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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마신 2011. 11. 8. 03:46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선조조고사본말)
 
영남(령남) 의병(의병)
 
전 훈련 봉사(훈련봉사) 권응수(권응수)는 신녕(신녕)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혹 영천(영천)이라고도 한다.
응수는 처음에 수영 군관으로서 자제(아우 응전(응전)과 이온수(리온수) 등)와 노복을 거느리고 상도(상도)의 토적을 죽였으며, 또한 요로에 복병해 놓았다가 뒤떨어진 적군을 죽이기도 하였다. 여러 장정을 모아서 적을 맞아 정면에서 공격하기도 하고 뒤에서 공격하기도 하였는데, 두려워하여 피한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습격을 받았으나 그의 말이 강건하여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초유사(김성일(금성일))가 그를 의병대장으로 삼았다.
○ 9월에 영천에 있던 적군이 봉고어사(봉고어사)라고 자칭하면서 신녕을 향하여 오는데, 안동(안동) 의병장 권응수가 정대임(정대임)ㆍ정세아(정세아)ㆍ조성(조성)ㆍ신해(신해) 등과 함께 박연(박연)에서 만나 죽인 적들이 매우 많았다. 이때 영천 백성들이 그 고을에 주둔하고서 웅거한 적군을 무찌르려고 응수 등에게 구원을 청하여 왔으므로 응수 등이 함께 진군하여 추평(추평)에서 군사의 위엄을 보이니, 적들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못하는데도 군사들은 적군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응수는 담략과 용맹이 있어 곧장 군사 몇 사람을 베어 죽이고 뛰쳐 나가 군사들의 앞장을 섰다. 모든 군사들이 합세하여 성을 포위하고서 성문을 부수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진격하니 적군은 관사로 도망갔다. 바람을 따라서 불을 지르니 거의 다 타죽고 혹 물에 빠져 죽기도 하였다. 수백여 명을 죽였으므로 시체 썩는 냄새가 길에 가득하여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기재(기재)》에는, “응수가 군사 천여 명을 모집하여 한 사람당 섶 한 묶음씩을 들고서 밤에 영천을 공격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안동 이하 여러 곳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상주)로 향해 갔으므로 좌도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 병사 박진(박진)이 즉시 장계를 올려서 응수는 통정에 올랐고 《기재》에는, “절충조방장(절충조방장)으로 발탁되었다.”고 하였다. 대임은 예천 군수(례천군수)가 되었으며 조성 등에게는 차등 있게 상으로 관직을 주었다.
○ 응수는, 자는 중평(중평)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갑신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병사에 이르렀으며, 선무 공신 2등으로 두 번째이다. 에 녹훈되어 화산군(화산군)에 봉해졌고 찬성(찬성)에 증직되었다.
○ 정대임은, 본관이 영일(영일)이다.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고, 계사년에 공으로 예천 군수에 임명되었다. 용궁(룡궁)ㆍ비안(비안)에 머물고 있던 적군을 추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숫자가 매우 많았고, 또 병사 박진을 수행하여 경주ㆍ울산에 있던 적군을 쳐부수었다. 뒤에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 정세아는 영천 사람으로 진사였는데 그때 나이가 67세였다. 적군이 영천을 점거하니, 세아가 좌수 유서(류서)ㆍ생원 조희익(조희익) 등과 함께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서 적군을 잡아 죽인 숫자가 매우 많았다. 성을 보전한 승리는 모두 세아 등의 의병을 먼저 일으킨 힘이었다. 《순영록(순영록)》
○ 세아는, 자는 화숙(화숙)이고 호는 호수(호수)며 본관은 오천(오천)이다.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 적군을 격파하고 그 공로로 황산 찰방(황산찰방)에 임명되었다. 뒤에 여러 차례 증직되어 병조 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강의(강의)이다. 공의 아들은 의번(의번)인데, 을유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경주(경주) 전투에서 세아가 포위되니 의번이 두 번이나 여러 겹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갔다가 마침내 적군에게 잡혔으나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뒤에 정려(정려)되었다.
○ 조성은, 본관이 창녕(창녕)이다. 그의 형 조경(조경)과 함께 공산(공산)으로 가서 의병을 일으켜 적군을 토벌하여 여러 번 이겼다. 공으로 군자 판관에 임명되었고, 갑오년에 무과를 주어 벼슬이 절제사에 이르렀다.
○ 신해는 하양(하양) 사람이다. 훈련 봉사(훈련봉사)로서 군사를 모집하여 적군을 토벌하였다.
○ 본관이 함안(함안)인 전 현감 조종도(조종도)는, 전 직장 이로(리로) 등과 함께 서울에 있다가 왜변의 소식을 듣고 즉시 본도로 돌아가며 약속하기를, “마땅히 의병을 일으킬 것인데,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동지와 함께 물에 빠져 죽을 것이지 의리상 적에게 욕을 볼 수는 없다.”고 하였다.이때에 이르러서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그 통문에 “죽음이 비록 싫기는 하지만 천지에 적들이 그물처럼 둘러싸서 도망가 살 곳이 없으니, 비록 살기를 도모하여 개ㆍ돼지처럼 치욕을 참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차라리 의리에 죽을지언정 감히 살기를 바라겠느냐? 인(인)을 위해 생명을 버리겠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 뒤 정유년에 종도가 황석산성(황석산성) 전투에서 죽으니, 사람들은, “그 문구의 말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일월록》
○ 이로의 통문에, “백척이 되는 나무가 이미 뽑혔어도 한 치의 뿌리에서 생기를 돌릴 수 있을 것이며, 아홉 길의 산이 장차 완성되려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큰 공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는 문구가 있었다.
○ 유종개(류종개)가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경상 좌도의 산골 10여 고을은 전란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간혹 강개한 뜻을 가진 선비가 고을 사람을 격려하여 적군을 토벌할 것을 타일렀으나, 백성들은 조석으로 편히 지내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군사를 일으키자는 사람을 도리어 원망하였다. 종개는 개연히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서 고을의 군사 수백 명을 모아서 산중에 진을 쳤다. 강원도의 적군이 횡행하여 못된 짓을 하다가 광비촌(광비촌)을 지나가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장령(장령) 윤흠신(윤흠신)ㆍ윤흠도(윤흠도)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전진하였다.적군의 선봉이 변장을 하고 몰래 다니는데도 척후병이 이를 알지 못하여 복병들이 모두 흩어졌다. 종개 등이 갑작스럽게 적군을 만나 용감하게 싸우고 후퇴하지 않다가 힘이 다 떨어지고 구원군이 없어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적군이 드디어 불지르고 노략질하고서 갔다.
○ 유종개의 자는 계유(계유)이며, 본관은 풍산(풍산)이다. 기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을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 정자(교서정자)가 되었다.
○ 예안(례안) 사람 전 한림 김해(금해)가 의병을 일으켰다.

종개가 죽자 사람들은 모두 의병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초유사가 격문을 띄워서 국은을 잊었음을 책망하고 의병에 나갈 것을 격려하였으며, 안집사(안집사) 김륵(금륵) 또한 통문을 들렸다. 이에 영천(영천)ㆍ풍기(풍기) 선비들과 전 한림 김해ㆍ생원 금응훈(금응훈)ㆍ진사 임흘(임흘)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여 잇달아 일어나니 군사가 만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김해의 통제를 받았다. 김해는 본래 인망(인망)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일월록》
○ 좌도의 의병이 일직현(일직현)에 모여서 맹약할 때에 김해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는데, 뒤에 김면(금면)이 본도의 대장이 되었음을 듣고 의병 문서를 강을 건너 김면에게 보내었다. 김면이 열람하여 보니, 모두 유생들로 부대가 편성되었으므로, “이것들이야말로 참된 의병이다.” 하였다. 계사년에 김해는 명 나라 군사를 따라서 경주에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수찬에 증직되었다. 《일월록》
○ 박정완(박정완)이 군사를 모집하여 김면을 따라갔는데, 재산을 털어서 군량을 공급하였고 활과 화살도 직접 마련하였으며, 전투에서는 상당히 공을 세웠다. 김면이 무계(무계)에서 승전한 것은 정완의 힘이 컸는데도 공에는 참여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순영록》
○ 삼가(삼가) 사람 학유(학유) 박사제(박사제)의 형제와 봉사(봉사) 노흠(로흠), 생원 권양(권양), 단성(단성) 사람 권세춘(권세춘)ㆍ권제 등이 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다. 《순영록》
○ 금산(금산) 사람 박사 여대로(려대로)와 권응성(권응성) 등이 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는데, 응성이 임시로 대장이 되어서 김면과 지례(지례)ㆍ금산의 적군을 협공하였다. 그 뒤에 적군의 습격을 당하여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순영록》
○ 창녕 사람 생원 신방즙(신방즙)ㆍ충의(충의) 성천희(성천희)ㆍ정자(정자) 성안의(성안의)ㆍ유학 곽찬(곽찬)ㆍ보인(보인) 조열(조열) 등이 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다. 천희 등이 군사 십여 명을 거느리고, 창녕의 적군을 포위하고 종일토록 교전하여 본읍의 군수라고 자칭하는 적을 쏘아 맞추자 3일 만에 적군이 성책을 불지르고 도망갔다. 《순영록》
○ 경주 사람 김호(금호)가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토벌하였다. 초유사가 김호를 도대장(도대장)으로, 전 현감 주사호(주사호)를 소모장(소모장)으로, 진사 최신린(최신린)을 소모유사(소모유사)로 직책을 맡기니, 김호 등이 더욱 용기를 분발하였다. 8월 2일에 적군 기병 5백여 명이 언양(언양)에서 노곡(노곡)을 향하여 오자 김호 등이 군사 1천 4백 명을 거느리고 대항하였는데, 호는 창에 찔리고서도 더욱 힘써 싸웠다. 적군이 본주(본주)의 큰 진으로 도망가자 추격하여 5십여 명을 죽였다. 전후의 경주 승전에서 그보다 앞 선 자는 없었다.
○ 고성(고성) 사람 봉사 최강(최강)은 어려서 글을 익히고 늦게서야 무과에 합격하였으나, 담략이 있었다. 무사들의 출세를 구하는 행동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성품이 또 강직하여 자신의 의사를 굽혀서 남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았다. 이때에 와서 군사를 일으키니 군사들이 비록 많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신임을 얻었고, 전투에 임해서는 자신이 앞장을 섰다. 정기룡(정기룡)ㆍ안신갑(안신갑)과 명망은 같았으나 군사를 통솔하는 재주는 그들보다 나았다. 또 진주성 함락조 아래에도 적혀 있다.
○ 상주 사람 진사 김각(금각)과 장자 이준(리준)은 의병을 일으키려고 격문을 보냈다.
○ 예안 사람 진사 이숙량(리숙량) 등은 격문을 지어서 여러 고을에 전하고 효유하였다.
○ 인동(인동) 향병장(향병장) 장사진(장사진)은 날래고 용맹하며 담략이 있어서 마음을 단단히 가지고 힘써 적군을 토벌하였고, 그의 아우 사규(사규)가 전사하자 더욱 분발하였다. 별장이 되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요충지를 지키고 있는데, 하루는 적군 수백 명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사진은 용사 수십 명만을 거느리고 뛰쳐나가 맞아 싸워 먼저 비단 옷에 은 투구를 쓴 놈을 쏘아서 그의 머리를 베어 창에 매다니 적군들은 울부짖으며 도망갔다. 사진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추격하였다.10일 뒤에 적은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다시 와서는 먼저 기병 십여 명을 거느리고서 싸움을 걸어 오므로 사진이 또 돌격하여 활을 쏘아대니 적들이 시윗 소리에 따라서 거꾸러졌다. 이에 드디어 날쌘 기세로 추격하여 죽이자 갑자기 적군의 복병이 나타났으나 사진은 오히려 크게 호통치며 힘껏 싸웠다. 화살이 다 떨어지고 해도 저물었는데, 적군 한 놈이 갑자기 앞으로 달려들어 사진의 한 팔을 쳐서 끊어 버렸다. 한쪽 팔만으로도 용기를 떨치며 공격하여 마지 아니하더니 그만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나라에서 이 사실을 듣고 통정(통정)ㆍ수사(수사)를 증직하였다.
○ 사진은 군위(군위) 향교 유생이었다. 본 고을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적군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적군은 그를 두려워하여 장장군이라고 부르며 그가 맡은 구역에는 감히 침입하지 못하였다.
○ 배덕문(배덕문)과 배설(배설)이 의병을 일으켰다.
○ 배덕문은, 자는 숙회(숙회)이며, 본관은 성주(성주)이다. 명종 계축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군수를 지냈다.
○ 배설은 덕문의 아들이다.
○ 성주《선생안(선생안)》에 제말(제말)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고성(고성) 사람이었다. 임진란을 당해서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공격하였는데, 향하는 곳에는 앞을 막는 자가 없어서 곽재우(곽재우)와 나란히 일컬어졌으나 명성은 오히려 그보다도 높았다. 조정에서 특별히 본주 목사를 제수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죽어서 공명이 크게 드러나지 못했다 한다. 또 소문에는 적군과 진을 마주쳐서 교전할 적에는 용기가 충전하여 수염이 모두 위로 뻗친 것이 흡사 빳빳한 고슴도치 털과 같았으므로 적군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였다 한다. 《약천집(약천집)》

호남(호남) 의병
 

의병장 고경명은 이미 죽었고, 김천일은 경기 좌의병(좌의병) 진중으로 갔다. 사자(사자)들이 흩어진 군사 8백 명을 모으고, 전 부사 화순(화순) 사람 최경회(최경회)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았다. 7월 26일에 깃발과 북을 광주(광주)에 세우고 골(골)자로 신표를 삼았다. 전라우도에서 군사를 거두어 남원으로 향하면서 격문을 지어 돌리고 효유하였다.
○ 10월에 진주성을 포위하고 있던 적군이 사방으로 나뉘어서 약탈하였다. 경회가 군사를 단성(단성)에 주둔시키고 있는데, 적군이 갑자기 닥치니 장수와 군사들이 놀라서 무너졌다.
○ 11월에 통정에 오르고, 계사년 2월에 우병사(우병사)에 임명되었으며, 6월에 진주 전투에서 죽었다.
○ 7월에 보성(보성) 사람 임계영(임계영)은 동지 여러 사람과 함께 격문을 전하여 군사를 모집해서 향토를 지킬 계획으로 본국을 출발하여 낙안(악안)ㆍ순천(순천)을 거쳐 그 역시 남원으로 향해 갔는데, 가는 도중에 군사 천여 명이 얻었다. 좌의병장(좌의병장)이라고 일컬으면서 호(호)자로 신표를 삼았다. 처음 인장에는 호랑이를 그렸으나 뒤에는 호자를 썼다.
○ 남원 사람 전 참봉 변사정(변사정)은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수십일 안에 2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적개의병장(적개의병장)이라고 불렀다. 진주 전투에 부장 이잠(리잠)을 파견하였는데, 성이 함락되어 죽었다.
○ 남원의 백성들이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향병(향병)이라 부르면서 정염(정염)을 장수로 추대하였다.
○ 순천 무사인 강희열(강희열)은 처음에는 고경명을 따라 군사를 일으켰는데, 금산(금산)에서 패하자 울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군사를 불러모아 전진하였다.
○ 해남 사람 진사 임희진(임희진)과 영광(령광) 사람 첨정(첨정) 심우신(침우신)과 태인(태인) 사람 민여운(민여운)이 각각 군사를 모집하여 영남으로 갔는데, 모두 진주 전투에서 죽었다.
○ 해남의 임시 장군 성천기(성천기)는 뇌진군(뢰진군)이라고 써서 신표를 삼고 국가의 일에 힘을 다 하였다.
○ 임피 사람 진사 채겸진(채겸진)ㆍ이이남(리이남)이 의병을 일으켰다.
○ 계사년 8월에 전라 우의병(전라우의병)과 복수병(부수병) 선비들이 나머지 군사를 수습하여 전 제독관 화순 사람 최경장(최경장)을 추대하여 장수로 삼고 계의(계의)라고 써서 신표를 삼았다. 경장은 경회의 아우이다.
○ 11월에 계의군(계의군)을 해체시키고 그 군량을 초승군(초승군 김덕룡(금덕룡)의 군대를 칭하는 것으로 초승(초승)은 말을 훌쩍 뛰어서 탄다는 뜻이다.)에 귀속하게 하였다.
○ 적군이 지례(지례)로부터 호남을 침범할 때에 알수 없는 5, 백 명의 사람들이 청학장군(청학장군)ㆍ백학장군(백학장군)이라고 자칭하면서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쏘아 죽였다.

호서(호서) 의병
 

○ 이산겸(리산겸)은 토정(토정) 이지함(리지함)의 서자이다. 조헌(조헌)의 남은 군사를 거두어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다.
○ 한산(한산) 사람 전 참의 신담(신담)이 의병을 일으켰다.
○ 호서(호서) 노 정승 심수경(침수경)이 의병을 일으켜서 조대곤(조대곤)을 부장으로 삼고, 건의(건의)자 기를 세워서 징표를 삼았다. 대곤이 전에 우병사로 있다가 탈직당하고, 김수(금수)를 따라서 임금이 있는 행조(행조)로 가려는 것을 수경이 말려서 부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조정(조정)에서 건의군의 장수를 팔도 의병 도대장(팔도의병도대장)으로 삼고 인장과 어도(어도)를 하사하였다.
○ 충주(충주) 사람 충의위 조웅(조웅) 《조야첨재》에는 웅(웅)이라 하였다. 은 용감하여 말 위에 서서 달리며 창을 휘두르기를 잘하였다. 군사 5백 명을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죽였다. 하루는 조웅이 짙게 낀 안개를 이용하여 행군하려는데, 적군이 무방비 상태에 그의 후면을 엄습하였다. 조웅은 포위망을 뚫고 나왔으나 탄환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서 적군에게 잡혔다. 그의 손ㆍ발을 잘랐는데도 입으로 꾸짖기를 마지 않다가 드디어는 사지가 찢겨졌다.
○ 선비 박춘무(박춘무)와 충주 선비 조덕공(조덕공), 청주 무사 이봉(리봉)은 모두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다.
○ 전 목사 김홍민(금홍민)은 호서에서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경기(경기) 의병
 

경기 전 정(정) 정숙하(정숙하), 수원 사람 최흘(최흘), 선비 이산휘(리산휘), 전 목사 남언경(남언경), 선비 김탁(금탁), 전 정랑 유대진(유대진), 충의 이질(리질), 선비 왕옥(왕옥) 등이 모두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으나 기록할 만한 공적은 없었다.
○ 전 사간 우성전(우성전)이 강화ㆍ인천 등지에서 군사를 일으켜 군세가 매우 성하였으며 의(의)자를 군호(군호)로 삼았다. 조정에서 대사성으로 벼슬을 올려 주고 적군을 토벌할 것을 권면하였으나 열 한달이 되어도 성전 등은 잘 싸운다는 소문이 전혀 없었다. 임금이 그를 불러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곧장 평안도로 와서 김명원과 군사를 합치게 하였으나, 성전은 병 중이어서 갈 수 없었다.임금이 노하여 이르기를, “성전은 군사를 거느려 자신만 호위하며 형세를 관망하면서 오지 아니하고, 김천일 등은 편안히 앉아서 담소만 하고 있으니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천일은 고립된 군사로 해볼 만한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성전은 본래 중병에 걸렸음을 사람들이 모두 아는 터인데 어찌 관망만 하고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 원균(원균)의 아우인 진사 원정(원정)이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다.
○ 전 부사 김적(금적)이 삭녕(삭녕)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임금에게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기를 청한 상소에, “천명과 인심이 이미 전하에게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성혼(성혼)을 장수로 삼으소서.”라고 하였다.
○ 성혼이 세자의 소명(소명)을 받고 들어가려 할 때, 세자는 그에게 김적의 군진에 가보기를 명하였다.
○ 고양(고양) 진사 이로(리로) 혹 영남 전 직장이라고도 되었다. 가 의병을 일으켰다.
○ 이산휘(리산휘)는 기지가 있어 계략을 써서 적군을 사로잡은 것이 많았다. 하루는 서울에 있던 적군이 노략질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왔는데 그중 적군 네 명이 정토사(정토사)에 왔다. 산휘는 중들과 약속하고 그들에게 나가서 맞아들이게 하니, 네 명의 왜놈들이 즐거워하였다.법당으로 인도하여 들이고 밥을 지어서 대접하는데 늙은 중 한 사람이 그들과 마주 앉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물을 찾으니 중들은 불을 지펴 물을 매우 뜨겁게 끓여 네 명의 중이 큰 바가지에 물을 가득히 떠가지고 왔다. 왜놈들이 각각 밥주발을 가지고 위로 쳐다 보면서 물을 받으려고 하는 순간 중들이 급히 놈들의 낯에 끓는 물을 끼얹자 놈들이 모두 땅에 거꾸러지므로 중들이 나무 방망이로 쳐 죽였다. 이것은 비록 작은 지혜이긴 하지만 그의 임기응변이 이와 같았다.

해서(해서) 의병
 

황주(황주) 사람 황하수(황하수), 윤담(윤담)과 봉산(봉산) 사람 김만수(금만수)가 의병을 일으켰다.
○ 해주(해주) 사람 생원 조광정(조광정) 자는 응순(응순) 이 연안(연안)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크게 승리하였다. 호조 좌랑에 증직되었다. 연안 현충사(현충사)에 모셔졌다.
○ 봉산(봉산) 무사 김만수(금만수)가 그의 아우 천수(천수)ㆍ구수(구수)ㆍ백수(백수)와 진사 최섭(최섭)ㆍ이옹(리옹)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서울로 가는데, 백수는 유극량(류극량)과 함께 파주(파주) 전투에서 죽었다. 이때 본 고을에 원이 없으므로 순찰사 이일(리일)이 만수를 군수로 삼았는데, 임금이 의병장을 삼도록 명하였다. 그 아들 광협(광협)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여러 번 싸워 공을 세웠다. 모두 참판에 증직되었다. 《봉산 충령사지(봉산충렬사지)》

관서(관서) 의병
 

중화(중화) 사람 김진수(금진수)ㆍ임중량(림중량)과 평양(평양) 선비 양덕록(량덕록)ㆍ양의직(양의직)ㆍ이덕암(리덕암)이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다.
○ 강동(강동)에서 귀양살이 하던 조호익(조호익)이 평양으로 불리어 오자 금부도사 직을 주어 소모관(소모관)에 제수하였는데, 미처 군사를 모집하기도 전에 임금의 행차가 이미 평양을 떠났고, 강 여울을 지키던 장수도 무너져 흩어졌다. 호익이 다시 행재소로 향하여 가다가 길에서 유성룡을 만났는데, 왕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다. 성룡이 말하기를, “국록을 먹는 신하의 충성이 도리어 초야에 묻힌 신하의 충성만도 못하다.”고 하면서 호익에게, “임금께 충성하는 것은 적을 토벌하는 것만한 것이 없으니, 자네는 도로 돌아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수복할 것을 도모하라.” 하였다.호익이 즉시 달려 돌아와서 문도들과 정성을 다하여 부르짖으며 효유하니 응모하는 자가 5백여 명이나 되었다. 매월 초하루 또한 동지(동지)라고도 한다. 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행재소를 바라보며 네 번 절하고 밤새도록 통곡하니 온 군사들이 눈물을 흘렸다. 중화(중화)와 상원(상원) 사이에 진을 치고 뒤떨어진 적군을 습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숫자가 많아서 군사들이 기세가 가장 강하였다.
○ 호익은, 자는 사우(사우)이며, 호는 지산(지산)이고 본관은 창녕(창녕)이다. 을사년에 태어나서 벼슬은 목사까지 지냈다. 기유년에 죽으니 나이가 65세였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 호익이 창원(창원)에 살면서 퇴계(퇴계)의 문하(문하)에 왕래하였는데,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을해년에 경상 도사 최황(최황)이 군적(군적)을 가지고 창원에 와서, “군적의 검사와 감독하는 임무는 마땅히 온 고을에서 명망이 두터운 사람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하면서 공을 지명하였다. 공은 상복을 아직 벗지 아니하였으며, 병이 또 중해서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최황이 크게 성내어 일 없는 장정 50명을 들여보낼 것을 독촉하였다. 공은 집의 종들을 모두 내었으나 그 숫자를 채울 수 없었다.고을원 이하의 사람들이, “비천한 임무를 이 사람에게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다투어 말하니, 최황은 더욱 더 성을 내어 형장을 치기까지 하였고, 또 토호(토호)라고 장계를 올려서 평안도 강동(강동)으로 귀양가게 하였으니 강동은 창원과 2천여 리의 거리에 있었다. 그에게 와서 위문하는 자가 있으면, “운명이 있는 것이다.”라고만 말을 하고 태연히 귀양길에 올랐다. 관서(관서) 사람들은 옛날부터 학문을 알지 못하였는데, 공의 품도를 듣고는 원근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여 들므로 학규(학규)를 정하여 가르치니, 성대하게 서하(서하 공자의 제자인 자하(자하)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의 기풍이 있었다.무자년에 공이 말미를 받아 선영에 성묘하러 갈 때에 서울을 지나게 되었다. 최황이 그 소식을 듣고 찾아와 악수하면서, “들으니, 자네가 강동에 귀양가 산 이래로 나를 원망하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하니 참으로 명(명)을 아는 군자로다. 나는 자네를 모함하였기 때문에 하늘의 재앙을 혹독하게 받게 될까 두렵네.” 하였다. 그 뒤에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조호익은 신의 그릇되고 망녕된 아룀으로 오랫동안 귀양 중에 있으니, 신의 죄를 다스리고 빨리 불러서 그를 임용하소서.”라 아뢰었으나 죄의 사면을 받지 못하였다. 이때는 귀양살이 한 지가 벌써 17년이 되었다.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갈 때에 유성룡이 다시 그의 억울함을 아뢰어서 특별히 석방되었다.이어 금부 도사로 임명하고 소모관으로 삼으면서, “들으니, 그대가 오랫동안 관서에 있어서 그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가 많다 하니, 그대는 군사를 모집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그 문인 윤근(윤근)ㆍ박대덕(박대덕) 등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효유하니 응모하는 자들이 매우 많아서 군세가 가장 강하였다. 이때 중화 사람 임중량(림중량)도 군사를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는데, 적군은 허수아비 둘을 만들고서 그 위에 칼을 대면서, “네가 조 아무개냐, 네가 임중령이냐” 하였으니 적군이 그들을 두려워함이 이와 같았다.성주(성주)ㆍ안주(안주)ㆍ성천(성천) 등의 고을 원을 지냈으며 기유년에 죽었다.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천(영천) 유생들이 그가 임시로 살던 집 옆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명신록》
○ 호익은 제사 지내는 데에 더욱 삼가해서 제사에 소용되는 모든 기물을 별도의 장소에 간직하고 집안 사람들과 집사들에게는 모두 제삿날 전에 미리 목욕하고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난 뒤에야 그릇을 씻고 음식을 장만하게 하였으며, 껍질이 있는 과실은 그 껍질을 벗긴 뒤에 물로 깨끗이 씻고, 우물 물도 미리 깨끗이 치우고서 다른 사람은 길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초장도 별도의 그릇에 만들어 두어 보통 때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모두 후생들의 본보기가 될 만하였다. 《명신록》

임진(임진) 승장 중 휴정(휴정)과 유정(유정)
 

묘향산(묘향산)의 늙은 중 휴정(휴정)은, 호가 서산대사(서산대사)이고 또 청허선사(청허선사)라고도 한다. 덕행이 높고 계율을 엄히 지켰으며 불경에 두루 통하고 또 무장도 잘 지었다. 그의 뛰어난 제자들이 온 나라에 두루 퍼져 있었는데, 이때에 제자 수천 명을 모아 거느리고서 파천하는 임금을 뵈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라의 환난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널리 구제할 수 없느냐.” 하였다. 휴정이 울면서 절하고, “국내의 늙고 병든 중들에게 이미 각기 있는 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수도해서 부처님과 신의 도움을 빌도록 하였고, 그 외에는 신이 모집하여 왔으니 군중에 나가고자 하나이다.신 등이 비록 일반 백성은 아니오나,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임금의 길러주시는 은혜를 받자왔사온데,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까와하겠습니까? 충성된 마음을 바치기를 원하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일국도 대사 팔도선교 도총섭 부종 수교 보제 등계 존자(일국도대사팔도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라는 칭호를 하사하게 하였다. 제자 의엄(의엄)을 총섭으로 삼고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순안(순안) 법흥사(법흥사)에 주둔하면서 원수(원수)를 응원하였다. 팔도의 사찰에 격문을 전하니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중들이 모두 달려왔고, 그의 뛰어난 제자 처영(처영)은 호남에서, 권율(권률) 막하에 갔다. 유정(유정)은 관동(관동)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 휴정은, 자는 현응(현응)이고, 속성(속성)은 최씨이다. 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중들 가운데 소문이 났다. 그가 금강산을 유랑한 때에 지은 시에,

태평 성세에 요선(요선) 천길 노송나무[회]인데 / 순일요선천장회
숲을 사이에 두고 □□ 한 소리 물 여울이로다 / 격림□□일성탄

하는 것이 있었다. 기축년의 정여립 옥사에 명승(명승)으로 잡혀 갇혔으나 임금의 특명으로 석방되고, 어제시(어제시)와 의복을 하사하여 절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임진왜란)에 임금은 그를 불러서 중들을 거느리고 힘을 모아 적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지봉유설》 《소대기문》
○ 유정은, 자는 이환(리환)이며, 호는 송운(송운)이고 또 사명산인(사명산인)이라고도 한다. 속성은 임(임)씨이다. 용모가 헌걸스럽고 수염은 깎지 않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또 불경에도 달통하였다. 이때 금강산 표훈사(표훈사)에 있었는데, 적군이 절에 들어오니 중들이 모두 달아났으나 유정은 동요하지 않았다.적군은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혹은 합장하여 지극히 공경을 표하고 물러갔다. 국가에 충성하라는 교서와 휴정의 격문이 도착하니, 유정은 불탁(불탁) 위에 펼쳐 놓고 모든 중들을 불러놓고 읽어 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산중에 있는 중들을 모두 동원하여 서쪽으로 가면서 글을 사방에 띄워서 각각 승병을 일으키게 하였더니, 평양에 도착할 때에는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성 동쪽에 주둔하면서 접전하지는 않았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를 부지런히 하여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으니 모든 도(도)에서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 영남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왜장 청정(청정)이 만나기를 청하므로, 유정이 왜군 진영에 들어가니, 적군은 몇 리나 벌여 섰고 창검은 묶어 세워 놓은 것 같았다. 유정은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청정을 보고 조용히 담소하였다. 청정이 유정에게,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 하니, 유정이, “우리나라에서 너의 머리를 천근의 금과 만호가 되는 고을을 주겠다고 현상하였으니, 네가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대답하니, 청정이 크게 웃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때 왜병의 방비가 매우 성하여 유정이 겨우 한 번 보고 물러나왔으니, 필시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다.”고 하였다. 10년 뒤에 강화 사건으로 일본에 갔는데 왜놈들은 그를 후히 대접하고 보냈다. 《지봉유설》 ○ 유정은 벼슬이 지중추(지중추)고 사시(사시)로 자통홍제존자(자통홍제존자)라 하였다.

임진란 때의 여러 장수
 



박진(박진)

○ 박진은, 자는 명보(명보)이며, 본관은 밀양(밀양)이고, 경신년에 태어났다. 별천(별천)으로 선전관(선전관)에 임명되었고, 갑신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 부정(훈련부정)ㆍ밀양 부사를 지냈다. 임진년에 경상 좌병사(좌병사)에 발탁되었으며, 또 부총관, 경상 우병사, 전라ㆍ황해 병사가 되었고, 벼슬이 병조 참판에까지 이르렀으며 38세에 죽었다. 좌찬성(좌찬성)의 증직을 받았고 시호는 의열(의렬)이다.
○ 박진이 왜변 초에 밀양 부사로서 전공이 있었으므로, 이각(리각)이 도망쳤다가 참형을 당한 후에 드디어 박진을 좌병사로 승격시켰다. 9월에 영천(영천)으로 가서 공격하다가 적군의 습격을 받아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 《기재잡기》 ○ 밀양ㆍ황산의 전투는 위에 나와 있다.
○ 박진이 병사(병사)가 되어 남은 군사를 수습하고 여러 장수를 나누어 파견하여 일진일퇴하면서 적군을 섬멸하니 군세가 조금 떨쳤다. 행조(행조)에 주문(주문)과 첩사(첩사)를 잇달아 올리니, 임금이 매우 그를 애중하여, “나는 박진이 함부로 전쟁하다가 죽을까 두렵노라.” 하였다. 일찍이 박진을 서쪽으로 불러와서 부원수로 삼아 평양 수복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불리하다 하므로 그만두었다. 《조야첨재》
○ 7월에 박진이 좌도의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 성 아래에까지 쳐들어갔는데, 적군이 몰래 북문으로 나와서 무방비 상태에 쳐들어왔다. 박진이 안강(안강)으로 도망와서 다시 결사대 천여 명을 모집하여 성 아래에 잠복하고 있다가 비격진천뢰(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던져서 적진 중에 떨어뜨렸다. 적군은 그 제작을 알지 못하여 앞을 다투어 모여서 보느라고 서로 밀고 넘어지며 손으로 만졌다.조금 있다가 포탄이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과 같이 부숴졌다. 맞고 넘어져서 즉사한 놈이 20여 명이나 되자, 온 진중이 아찔하여 거꾸러져서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놈이 없었다.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귀신의 조화라고 하면서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서생포)로 도망갔다. 박진이 드디어 경주 성으로 들어가서 남아 있는 곡식 만여 섬을 얻었다. 조정에서 듣고 진을 가선대부로 승진시켰다.
○ 박진이 전후 종군하는 동안 황산(황산)과 경주에서 패전한 일만 있고, 특별히 적군의 예봉을 꺾거나 적진을 함락시킨 일이 없었는데도, 여러 장수의 공을 의논할 적에 매양 박진을 첫째로 꼽아 감히 그와 비교하는 자가 없었다. 박진이 밀양 부사로 있을 때, 적군이 침입하는 길이 바로 문앞이었다. 난리에 다달아도 당황하지 아니하고 병사를 거느리고 격려하여 한 고을의 군졸로서 대군의 적과 맞서서 싸웠다. 적군을 황산에서 막으려고 자신의 칼날을 무릅쓰고 혈전을 하다가 물러났지만 그가 꺾고 패배시킨 것은 또한 모든 장수에게 본보기가 될 만하였다.적의 형세가 충천하게 되어서 한 도의 크고 작은 모든 장수와 관원들이 머리를 싸매고 바람에 쏠리듯이 항복하였으나, 박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절개를 지켜 백절불굴(백절불굴)하여 고립된 군사를 거느리고 충성과 의리를 지킬 것을 권면하여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가는 곳마다 적군을 무찔렀다. 비록 여러 번 위태로왔으나 어렵고 위험한 것을 피하지 않고, 한 편으로는 적의 상황을 조정에 급히 보고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군사를 수습하였으니, 이때에 조정에서 적군의 정세를 탐지 할수 있었던 것은 오직 박진의 첩보가 있어서였을 뿐이었다. 만약 박진이 죽었더라면 영남의 소식은 거의 끊어졌을 것이다.임금이 가상하게 여기고, “박진의 행위를 살펴보건대, 다만 죽음을 면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박진이 만약 죽는다면 국사가 잘못될 것이다. 형세를 보아서 진퇴(진퇴)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박진은 이것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전진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그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말에 넘쳤다. 마침내 도내의 모든 장졸을 수습하여 점점 군대의 모양을 만들어 한 도의 끊어진 기맥(기맥)을 다시 소생시키고, 사람들에게 적군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은 박진의 공이었다. 《백사집》
○ 8월에 경상 좌병사 박진은 여러 장수를 안강(안강)에 모으고 군관 권응수와 판관 박의장(박의장)을 선봉으로 삼아서 열 여섯 고을의 병정 만여 명을 거느리고 밤에 40여 리를 가서 이른 새벽에 경주성에 도착하였다. 장사(장사)를 모집하여 성 밖 집들에 불을 지르게 하니 연기가 하늘에까지 치솟아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다. 대군으로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적병이 고을 동쪽 10여 리에서 뜻밖에 돌진하면서 우리 편 군사의 후면을 습격하여 왔다.이것은 하루 전에 언양(언양)에 있던 적군이 와서 골짜기에 숨어서 우리 편 군사의 동정을 정탐하며 기다리고 있었건만 장수들이 알지 못했던 것이다. 대군이 놀라서 무너져 장수와 군사들이 갑옷과 병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적군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쫓아와 죽였으므로 송장이 서로 겹쳐지고 서천(서천)물이 모두 붉어졌다. 여러 고을의 의사(의사)들도 모두 죽었다. 《일월록》
○ 박진은 안강에 주둔하면서 흩어진 군사를 모르고, 박의장을 시켜 말을 달리며 돌격하면서 군사의 위엄을 보이게 하니, 적군은 성을 비우고 밤에 도망갔다. 의장이 성에 들어가서 창고에 있던 곡식 4백여 섬을 거두었고 길이 통하게 되었다.


황진(황진)

황진은, 자는 명보(명보)이며, 본관은 장수(장수)이다. 익성공(익성공) 황희(황희)의 5대손이며 경술년에 태어났다. 2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충청 병사에까지 올랐다.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정려(정려)하였으며 창렬사(창렬사)에 향사하였다.
○ 인격이 엄격하고 진중하여 기개와 절개를 숭상하였다.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힘이 남보다 세고 빠른 동작이 나는 듯하였다. 이종인(리종인)과 명망이 같았으며, 서로 벗으로 지내며 생사를 같이 하기로 언약하였다. 《명신록》
○ 동복 현감(동복현감)이 되었을 때에 매양 관청 일이 끝나면 번번이 갑옷을 입고 말을 달려서 용맹을 길렀다. 이듬해에 왜적이 침입하자 관찰사를 따라 근왕(근왕)하려고 용인(룡인)까지 갔는데, 군대가 전멸되었다. 공은 수원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으므로 자기 부대만은 온전하게 돌아왔다. 《명신록》
○ 이현(리현) 전투에서 승리하니 체찰사 정철(정철)이 격문으로 공을 불러서 임시로 익산 군수(익산군수) 겸 조방장(조방장)을 시켰는데, 조정에서 듣고는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병사 선거이(선거이)를 따라 북으로 가서 수원에 주둔하더니, 적군을 만나서 힘껏 싸워서 그 말을 빼앗았다. 절충장군에 승진되어 충청 조방장이 되었으며, 계사년에 병사에 임명되었다. 6월에 진주에 모였다가 그달 28일에 탄환을 맞고 죽었다. 《명신록》
○ 황진이 용인에서 패전할 때에 자기의 부하 군사를 수원에 매복시켜 두어 그 부대를 온전하게 하여 돌아오면, 적군을 안덕원(안덕원)에서 격파하고 또 이현에서 승리하여 벼슬이 충청 병사에 이르렀다. 계사년 6월에 적군을 뒤밟아 상주(상주) 적암(적암)까지 가서 연달아 승리하였다. 장차 진주로 가려고 하니 곽재우(곽재우)가, “진주는 고립된 성이라 지켜낼 수 없고, 또 공은 충청도 절도사이니, 진주를 지키다가 죽는 것은 맡은 직분이 아니오.” 하고 황진을 말렸으나, 황진은, “내가 이미 가겠다고 창의사(창의사 김천일(금천일))에게 승낙하였으니,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식언하지는 못하오.” 하였다.곽재우가 드디어 술을 권하고 이별하였다. 진주에 모여서, 진이, “여러 군사가 한 성 안에 함께 몰려들어가서 성이 포위되고 밖에서 구원하는 이가 없으면 성은 반드시 위태롭게 될 것이다.” 하고, 자기는 한 부대를 끌고 성 밖에 진을 쳐서 성 밖과 성안이 서로 응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천일이 난색을 보이므로 드디어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가서 죽음으로 지킬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좌찬성을 증직하고 정려를 세우고 그 집에 요역을 면제하고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삼충사(삼충사)를 진주에 세워서 창렬(창렬)이란 편액을 하사하고, 김천일ㆍ최경회와 함께 향사하게 하였다. 《계곡집》


고언백(고언백)

고언백은, 교동 향리로서 무과에 올라 종군하여 반란을 일으킨 오랑캐를 공격하여 명성이 있었다. 도원수를 따라서 장령이 되었는데 적군을 죽인 공이 있었다. 이때 임진년 7월 양주로 돌아가서 군사를 모아 적군을 칠 것을 자청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당상관으로 올려 양주 목사에 임명하고 능침을 보호하라 하였다. 언백은 장사를 모집하여 산꼭대기 험한 곳에 모여 있으면서 때때로 나와 뒤떨어진 적군을 습격하였다. 적군은 대군을 풀어 수색하였으나 언백이 기회를 엿보아 잘 피하고 숨었으므로 끝내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언백은 항상 여러 능에 복병하였다가 때때로 적군을 쏘아 죽였다. 그러므로 적군이 일찍이 태릉(태릉)을 침범한 적이 있었으나 언백이 쫓아버렸으므로 여러 능이 온전할 수 있었다. 임금은 그 공을 칭찬하고 여러 번 품계를 올려서 표창하였다. 선무공(선무공) 3등으로 네 번째이며, 제흥군(제흥군)이다.


원호(원호)

원호는, 자는 중영(중영)이며, 본관은 원주(원주)이고, 계사년에 태어났다. 정묘년에 무과에 올라서 만포 첨사(만포첨사)ㆍ여주 목사(려주목사)ㆍ전라 수사를 지냈다. 임진년에 강원도방어사로 있다가 전사하니 나이 60세였다. 병조 판서를 증직했다. 원두표(원두표)의 조부이다.
○ 원호는 전 수사로서 집에 있다가 강원도 조방장으로 기용되었다. 원호는 강원도에서 다시 여주로 와서 고을 군사를 불러 모아 구미포(구미포)에서 적군을 습격하여 50여 명을 죽이니 남은 놈은 도망쳤다. 그로부터는 적군이 다시 여주의 길에는 들어오지 못하였다.장계를 올리고 벤 적군의 귀를 바치니, 임금이 칭찬하고 특별히 가선대부에 승진시키고 여주 목사 겸 경기ㆍ강원 양도 방어사로 삼았다. 이때 적군은 충주와 원주에 있으면서 진영을 연결하여 경성에까지 뻗쳐 있었다. 원호는 또 이천 부사(리천부사) 변응성(변응성)과 군사를 합세하여 활쏘는 군사를 배에 싣고 안개가 낀 틈을 타서 적군을 마탄(마탄)에서 맞아 공격하여 상당히 많이 죽였다. 이로부터 원주 적군의 길이 마침내 끊어졌다. 《조야첨재》 《명신록》
○ 강원 감사 유영길(류영길)이 춘천에 있으면서 원호를 불러 북로(북로 함경도)의 적군을 공격하라 하였다. 원호는 군사를 이끌고 김화(금화)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적의 대군을 만나서 곧 군사를 거두어 산으로 올라갔다. 종일토록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나, 화살은 다 떨어지고 적군은 바짝 다가왔으므로 드디어 천길 절벽에 몸을 던져 죽었다.적군은 그의 머리를 고을 문에 달고, “조선 군사와 백성이 모두 이미 귀순하였는데, 원호만이 나라를 위하여 우리를 항거하였다.”고 방(방)을 붙였다. 뒤에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고, 그곳에 사당을 세워서 제사지내게 하였으며, 《계갑록(계갑록)》에는, “춘천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하였으니, 잘못이다. 그 부인에게 월급을 주었다.
○ 젊었을 때 윤두수ㆍ근수(근수)ㆍ이해수(리해수)와 잘 지내어 한 스승 밑에서 함께 수업하였다. 여러 공들이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두루 청환직을 내고 있었더니, 공은 분연히, “나와 함께 공부하던 사람은 오직 이 세 벗 뿐인데, 어찌 다시 소년배와 같이 붓과 벼루를 만지겠느냐? 하물며 나의 선조들 중에는 술로 이름이 드러난 분이 많으니 출세길이 어찌 문(문)에만 있으랴.” 하였다. 윤공 형제가 말리며, “자네의 재주로 어찌 끝내 불리하겠느냐? 그런데 왜 무술 쪽으로 나가려는가.” 하니, 공이 탄식하며, “임금을 섬기는 데에는 각각 알맞는 재주로 할 것인데, 어찌 문과 무를 따지겠는가.” 하였다.
○ 일찍이 단천(단천) 군수로 있을 때에 그 부인이 은가락지를 샀더니, 공이 놀라며, “이 지방이 은 생산지인데 내가 이곳 원으로 있으면서 어찌 내 집에 이런 물건을 두게 하겠느냐.” 하고 드디어 그 물건을 사들인 종을 매질하고 가락지를 빼앗아버렸다.

임금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오다
 

계사년 1월에 평양에서의 승전 보고가 도착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의주(의주)에서 평양을 향하여 떠나려 하면서 문루에 올라 고을 백성들을 효유하였다. 부역을 모두 감해주고, 또한 전조(전조)를 하사하였다. 서쪽으로 명 나라 서울을 향해서 망궐례를 거행하고 출발하였다. 종묘실의 금보 옥책을 처음에는 산중에 묻었다. 대가가 정주(정주)로 들어와서야 비로소 요여(요여)와 선장(선장)을 갖추어서 맞이하였다.
○ 18일에 정주에 환어(환어)하니 세자가 성천(성천)에서 종묘 사직의 위패를 받들고 행재로 왔다.
○ 3월에 임금이 숙천(숙천)으로 가서 머물렀다가 또 영유(영유)로 옮겼다. 이때 대신들과 여러 재상들이, 임금이 내지(내지)로 나아가서 군량 운반을 독촉하여 민심을 견고하게 할 것을 연달아 청하였으나, 임금은 미심쩍어 하여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이 일의 상황이 몹시 급하다고 하며 계속 청하여 마지 않으니, 임금은, “나의 생각으로는 경략(경략)이 뒤에 있어서 파견된 관리들이 끊임없이 왕래하니 접대하는 것이 긴요한 일이고, 왜적이 아직도 함경도 주둔하고 있으니 서쪽으로 침범할까 염려되며, 또 이곳에서 한 걸음이라도 옮기면 호령이 해이해져서 중국의 양식을 운반하는 데에도 지장이 많을 것이므로 흔쾌히 승낙하지 않았던 것인데, 무슨 방법이라도 쓰라고 한다면 세자와 중궁이 이대로 정주에 머물고, 나는 시종관을 조금 거느리고 단기(단기)로 평양에 가서 대군의 뒤를 따르며 모든 군사를 호령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이에 대신들은, “이것은 바로 신들이 원하던 바이니, 오직 속히 결정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고 아뢰었다. 임금이 그대로 좇아서 잠간 숙천에 머물다가 곧장 가는 길에서 공급받는 것이 폐단이 있다고 하여 영유로 이주하였다.
○ 내전(내전)과 동궁이 뒤따라서 도착하였다.
○ 4월에 명 나라 황제가 칙명으로 산동(산동)의 양곡 10만 섬을 하사하여 구원 양식을 뱃길로 운반하도록 하고, 이때는 바닷길이 막힌 지가 이미 2백 년이었으므로, 무관 오정방(오정방)을 여순(려순)어귀에 보내어 길을 인도하여 왔다. 또 내고의 은 3천 냥을 하사하여 국내의 유공자 및 순직자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정철(정철)과 유근(류근)을 보내어 표문을 바치고 삼경(삼경)이 수복된 것에 대하여 사례하였다.
○ 7월 혹은 8월이라고도 되었다. 에 이여송이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가는데, 임금이 강서(강서)에서 황주(황주)로 가서 그를 맞아하고 전송하였다. 이어 황주에서 해주(해주)로 갔으며, 내전과 세자도 강서에서 와서 모였고, 임해(림해)ㆍ순화(순화) 두 왕자도 왔다.
○ 임금이 환도할 때, 임진강의 싸움터를 지나다가 즉시 행주(행주 행재소에 있는 주방)에 명하여 진중에서 사망한 군사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 10월 4일에 어가는 서울로 돌아왔고, 내전은 그대로 해주에 머물렀다. 내외에 널리 알리고 향축을 보내서 각 도의 명산대천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모든 도의 백성들에게 내린 교서에, “삼도가 무너지고 갈라지고서야 비로소 진실로 갑작스러운 계책을 내었으니, 필마로 떠돌아다닐 때에 애당초 어찌 아침 저녁 사이에 어떻게 될 줄을 알았으랴. 오묘의 악기에는 오랫동안 월출(월출)의 의관을 폐하였고, 십대의 원릉에는 한식날 보리밥도 올리지 못하였다. 성곽은 아직 남아 있지만 산하를 보니 눈에 비참하고 위의를 다시 보니 부로(부로)를 대하여 마음이 아프다. 하늘이 장차 운을 떨어주기 위해서[태] 먼저 운을 맞았으니[부] 어려운 고비 건너기를 어찌 도모하지 않으랴. 일은 반드시 위태함을 겪은 뒤에야 편안해지는 것이니, 끝까지 힘써 나의 뜻을 따르기를 바란다. 피난갔다가 비록 돌아왔으나 회계(회계)의 쓸개를 여전히 맛보노라.” 하는 말이 있었다.
○ 정릉동의 월산대군(월산대군)의 옛집 지금의 명례궁(명례궁) 을 행궁(행궁)으로 삼았다. 명 나라 장수가 궁실을 지을 것을 말하였으나, 임금은, “원한이 깊은 원수도 갚지 못하였는데 어찌 집을 지으랴.” 하였다.
○ 날을 가려서 종묘의 폐허에서 곡하였다.
○ 정릉동의 행궁은 흉악한 적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므로 비린내 나고 더러워서 임금의 처소로 적당하지는 못하였으나, 거처할 곳이 없어서 우선 거처하신 것이다. 일찍이 하교하기를, “이 집에서는 결코 오래 거처할 수가 없으니, 옛 궁성 서쪽에 비록 초가집을 대충 지어서라도 옮겨 살고 싶다. 옛날 위(위) 나라 임금도 조(조)에서 풀집에 살았으니 비록 초가인들 무엇이 해로우랴? 이때가 어떤 때인데 감히 커다란 집에 살겠는가.”라고 하였다. 《월사집》
○ 이때 성 안에는 가시덤불이 가득 찼고, 모든 관청은 모두 허물어져서 겨우 장벽만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기근과 도적이 겹쳐서 서울이 외롭고 위태하였다. 유성룡이 훈련도감(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근본을 튼튼하게 할 것을 청하고 중국 쌀 만섬을 풀어서 군사를 모집하니, 응모하는 자가 구름같이 모였다. 건장한 사나이 수천 명을 찾아 번갈아 숙직을 시키고, 거둥할 때에도 이들로 호위하게 하니,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다. 《서애행장》
○ 이때 굶어 죽은 송장이 성안에 가득하였으니 하루 동안에 죽는 사람을 그 숫자도 기록할 수 없었다. 임금이 명을 내리기를, “요사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할 방책이 없어 나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뿐이니 먼저 죽고 싶어도 되지 않는다. 유사가 날마다 백미 여섯 되를 올리는데, 나는 평일에는 본래 하루에 세끼를 먹지 않으니 세되의 쌀인들 어찌 다 먹겠느냐.이제 쌀 세되씩 덜어서 진제장(진제장) 다섯 곳에 나누어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궐내에서 백미 몇 섬을 내어서 정원에 명하여 죽을 끓여 주린 백성을 먹이도록 하였는데, 정시(정시)에 급제한 최계옥(최계옥)은 방방(방방 과거 합격자 발표)하던 날에 하사한 어사화(어사화 과거에 합격한 사람에게 임금이 하사한 꽃)를 꽂고 홍패(홍패)를 든 채로 진제장에 가서 죽을 먹었다. 《지봉유설》 《소대기문》
○ 교서를 내리기를, “병화 중에 서울 백성의 죽은 자가 한이 있겠는가? 남은 백성 반수 이상이 소복을 입었을 줄로 생각되었는데, 성에 들어오던 날 백성들이 골목을 가득 메웠는데 상복 입은 사람은 볼 수 없었으니, 이것은 필시 난리 뒤에 윤리와 기강이 땅에 떨어져서 그렇게 된 것일 것이다. 각 부(동ㆍ남ㆍ북ㆍ중ㆍ의 오부(오부)로 나눈 행정 구역)에게 단속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묘지문(선묘지문)>
○ 단을 쌓고 신위를 만들어서 문묘(문묘)에 친히 제사지냈다. 《문묘전고(문묘전고)》에 자세히 나온다.
○ 벽제(벽제)에서 전사한 명 나라 군사의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 서울 백성으로 적군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또 전염병이나 굶주려 죽은 자의 시체를 중[승]을 모집하여 수습해서 묻은 다음 단을 설치하고 제사 지내게 하였다.
○ 임금이 용산(룡산) 창고에 가서 창고의 곡식을 내어 마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어공미(어공미)를 감해서 구휼하였으며, 동ㆍ서에 진제장을 설치하고 미음을 끓여서 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먹였다.
○ 대신에게 전교를 내리기를, “우리나라에 인재가 적은데, 그 임용하는 방법은 다만 과거 한 길에 달려 있을 뿐이다. 사방의 넓은 지역에 위대한 재주와 특이한 행실이 있는 사람이 초야에서 부질없이 늙어가는 이가 어찌 없으리요. 옛사람이 말하기를, ‘대신은 사람을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긴다.’하였고, 안영(안영)은 그 종을 추천하였으며, 사안(사안)은 그 형의 아들을 천거하였으니, 진실로 적임자라면 미천하다해서 싫어하지 말고 친척이라 해서 폐하지 말고 각각 천거하라.”고 하였다.
○ 훈련 도감을 설치하고 유성룡을 도제조로 삼고, 조경(조경)을 당상으로 삼도록 하였다. 《군문전고(군문전고)》 에 자세히 나와 있다.
○ 팔도에 공물과 조세를 참작하여 줄이고, 공헌(공헌 나라에 바치는 정상적인 납세가 아니고, 임금에게 바치는 토산물 등을 말한다.)을 모두 폐지하게 하고, 충신ㆍ효자ㆍ열부를 찾아가서 표창하고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 팔도에 초관(초관)을 두어서 삼수기법(삼수기법)을 훈련시키고 어사를 나누어 보내서 시험하였다.
○ 이때 궁궐이 모두 타버렸으므로 정릉동의 양천 도정(양천도정)의 집과 계림군(계림군)의 집을 대내(대내)로, 청양군(청양군) 심의겸(침의겸)의 집을 동궁으로, 고(고) 영상 심연원(침련원)의 집을 종묘로 정하였다. 또 부근에 있는 크고 작은 집을 궐내 각사로 정하였다.을미ㆍ병신 연간에 길의 동ㆍ서쪽에 문을 세우고, 나뭇가지를 사용해서 울타리 모양처럼 둘러치고 시어소(시어소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라고 이름지었다. 이항복이 병조 판서가 되어서 비로소 담장을 쌓아 궁궐처럼 되었다. 병오년에 창덕궁을 중수하여 기유년에 공사를 마쳤으나, 연기(년기)에 구애되어 즉시 옮겨가지 못하였다. 《갑신만록(갑신만록)》 《조야첨재》 ○ 《궁궐전고》에 자세히 나와 있다.
○ 계묘년 8월에 시어소에 돌을 던지고 담을 넘는 변고가 있어서 궁궐 담을 물려서 쌓을 것을 명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시어소를 임시로 여염집에 설치한 지가 지금 벌써 10년이나 되었는데 그 동안 파손되고 구차스러움을 다 말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옵니다. 성상의 마음에는 와신상담(와신상담) 하시느라 다른 일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으실 것이옵니다마는, 신하들의 마음에야 어찌 일각인들 편하였겠습니까? 다만 오늘날 궁궐 담을 물려서 쌓는 역사를 경복궁 옛 성을 중수하는 데로 옮긴다면 저곳은 옛날 공이 남아있으므로 힘이 많이 들지 않지만, 담을 뒤로 물려서 쌓는 이것은 무익하면서 역사만 방대합니다.사세만이 그럴 뿐만이 아니라 옛 궁궐을 중수하는 것도 그만 둘 수 없는 일이오니, 위문공이 조(조)에서 풀집을 짓듯이 집을 대충 만든다면 누가 타당하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명 나라 사람들의 논설을 들으니, 그들도 대부분 속히 터를 가려서 처소를 정하여야 한다.’고 말을 하였나이다.” 하였다. 임금은 담을 물려서 쌓는 역사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조야첨재》

세자의 분조(분조) 무군(무군)
 

○ 세자가 처음 평양에서 임금과 작별하고 통곡하면서 길을 나누어 영상 최흥원(최흥원) 등을 거느리고 영변(녕변)으로 갔다가 또 정주(정주)로 옮겼다. 황해도를 지나 그대로 강원도를 향하여 가다가 이천(이천)에 머물렀다. 다시 이천에서 곡산ㆍ강동ㆍ성천을 거치고, 성천에서 영변으로 되돌아 왔다. 그가 여러 도의 의병들에게 내린 교서에 이런 말이 있었다. “용만이 어디 어디기에 거의 30일이나 지났고 대동강에 사람이 없으니 누가 건너오는 적의 배를 막겠느냐.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끝에 용안(룡안)과 천리가 떨어져있고,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는 중에 한(한) 나라 의식을 한성에 보존하였도다. 하물며 지금은 가을 기후가 점점 깊어가니, 이 서쪽 지방은 빨리 추워짐을 어찌하랴. 편히 살 곳이 없으니 누가 얼고 굶주리는 환란을 구제할 것이며, 어떻게 해가 다 마치도록 편안히 지낼수 있는 준비를 마련하지 못하였는고.” 하였으니, 황신(황신)이 지은 것이다. 《일월록》
○ 처음에 세자가 영변에서 강계(강계)로 가려 함에 심충겸(침충겸) 등이 강계는 길이 막힌 곳이니 결코 갈 수 없는 곳이고, 강원도는 높은 산과 험한 재가 많아 장벽을 이루었으니, 춘천(춘천) 등지에 도달하여 영남과 서로 교통의 경계에 머물러 4, 5일 동안 노숙하니, 따라오던 관원들이 모두 흩어져버렸다. 부득이 양덕(양덕)을 경유하여 이천(이천)에 도착하였으나, 또 춘천에는 가기가 어렵다는 소문을 듣고 갈 곳을 알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비로소 듣고 크게 놀라서, “어떤 담이 큰 자가 감히 세자를 모시고 지극히 위태한 지방에 깊숙이 들어가려 했던고.” 하였다. 오래지 않아서 성천으로 돌아왔다. 《기재잡기》
○ 세자가 강계로 향하여 가면서 동궁 관원인 조정(조정)에게 명하여 박천(박천)으로 가서 임금에게 문안하도록 하니 임금이 편지 한 통을 주었다. 이때 세자가 개평역(개평역)에 머물고 있었는데, 조정은 편지를 전하지 않고 지름길로 자기 가족들이 임시로 거처하고 있는 삭녕(삭녕)으로 가버렸다. 7월에 세자가 이천(리천)에 있었고, 이천과는 거리가 하룻길 정도였는데도 여전히 직접 가지 않고 사람을 시켜 그 편지를 올렸다.세자가 대신들과 함께 뜯어 보니, 바로 영결하는 글로서 슬픈 사연이 지극하였다. 대략에, “내가 살아서는 망국의 임금이 되었고, 죽어서는 장차 이역땅 귀신이 되겠구나. 부자가 서로 헤어져 있으니, 다시 볼 날이 없을 듯하다. 바라건대, 세자는 옛 강토를 다시 회복하여 위로는 조종의 영혼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부모의 돌아옴을 맞이하라. 종이를 대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워 말할 바를 모르겠노라.” 하였다. 상하가 다 목이 쉬도록 통곡하였다. 박동현(박동현)이 분연히 일어나서 조정을 잡아다 국문하고 직위를 파면할 것을 청하니, 사람들이 모두 흔쾌하게 여겼다. 《명신록》
○ 임피(림피) 현령 김은휘(금은휘) 자는 경회(경회)이며 계휘(계휘)의 아우 가 이천에 가니, 광해(광해)는 동헌에 거처하고, 종묘와 사직의 위패는 정청에 임시로 봉안되어 있었는데,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류자신)이 서헌(서헌)에 거처하고 있었다. 은휘가 그 무례함을 논책하면서 왕봉(왕봉)이 궁전을 빌렸던 옛 일에 비교하니 자신이 깜짝 놀라서 거처를 피하였다. 《계곡집》
○ 6월 17일에 정철ㆍ유성룡이 대사간 정곤수(정곤수)를 데리고, 임금에게 감국(감국)하는 임무를 세자에게 넘겨 줄 것을 청하려고 드디어 입대하였다. 임금이, “경들은 무슨 말을 하려 하는가.”물으니, 정철과 유성룡은, “나랏일이 이와 같아서 이미 어찌 할 수 없나이다.”라고만 말하고, 드디어 물러갔다. 사람들은, “세자가 이미 감국의 임무를 맡고 있었으니, 정철 등의 의향은 임금이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 줄 것을 말하려 하였으나, 머뭇거리기만 하고 입을 떼지 못하였다.” 하였다. 행차가 정주에 있을 때의 일이다. ○《기재잡기》
○ 10월에 상소를 올려 말하는 이 김적(금적)인 듯하다. 가 있었는데, “전하께서는 이미 인심을 많이 잃어서 오늘날과 같은 사태가 있게 되었으니, 세자에게 어찌 빨리 전위하지 않으십니까. 온 나라의 인심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어 즐거운 마음이 생긴다면 적군이 아마도 평정될 것이옵나이다.” 하였다. 또 남이순(남이순)이란 자가 상소를 올려 전적으로 임금을 나무라고 이어서 이산해(리산해) 등을 벨 것을 주청하고 또 세자에게는 속히 임금과 함께 머물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비록 전위에 대해서는 분명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말의 뜻이 은미하면서도 드러났다.임금이 하루는 여러 신하에게, “종묘와 사직에 죄를 짓고서 파천하여 이에 이르렀다. 난리를 겪은 끝에 또 정신이 없어 온갖 병에 걸렸으니, 원컨대 경들은 나를 불쌍히 여겨서 속히 나같은 죄인을 물리치고 세자를 보좌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러 신하가 간하여 말리고, 소관들도 또한 상소를 올렸더니 3일 만에 비로소 윤허하였다. 《기재잡기》
○ 김적이 전위하기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경기의병 조목에 적혀 있다.
○ 계사년 11월에 세자가 호서(호서)로 내려가서 무군(무군)하였는데, 3도 체찰사 윤두수와 여러 재신들이 따랐다. 송응창의 통첩에, “조선 세자는 청년으로 영특하여 그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니, 마땅히 전라ㆍ경상 양도에 있으면서 명 나라 장수 유정(류정)과 만나서 협력하여 수비하라는 황제의 명을 이미 받았다.” 하므로 이런 행동이 있었던 것이다. 22일에 전주에 머무르면서 다음날 알성(알성)하고 과거를 보이었다. 갑오년 2월 전주에서 공주로 돌아왔다.

사헌이 칙서(칙서)를 가져오다
 

이보다 먼저 명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의 형세가 떨치지 못하여 혹시 적군에게 덮침을 당할까 걱정하여 의논이 매우 많았는데, 급사중(급사중) 위효증(위효증)이 올린 글에 우리나라를 처리하는 방책으로 지역을 분할하고 임금을 바꾼다는 말까지도 있었다. 이 일을 병부에 의논하게 하니 석성이 옳지 못하다고 반대하였다. 이에 행인(행인 외교관) 사헌(사헌)을 보내어 칙서를 받들어 유시하고, 또 우리나라 형편을 살피게 하였다.이때 윤근수가 적의 정세를 살피는 배신(배신)으로 파견되어 요동 경략(송응창(송응창))의 문하에 있었는데, 하루는 송응창이 위효증의 글을 보이면서, “조정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그대 나라에서는 장차 어떻게 하려 하는가. 이 일은 내가 이미 힘껏 막았다. 그러나 그대는 돌아가 그대 국왕에게 고하고 좋은 계책을 도모하라.” 하였다. 근수가 요동에서 돌아와 먼저 그 일을 아뢰니, 임금이 영상 유성룡을 인견하고 위효증의 글을 보이면서, “나는 오래전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았으므로 자리에서 물러나 피하고자 하였는데, 이제 과연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였다.대개 그 글에는 우리나라를 욕하고 비방하는 뜻이 많았는데, “조선이 왜적을 막지 못하고 중국에 근심을 끼치니 마땅히 그 나라를 2, 지역으로 나누어 왜적을 막아 낼수 있는 자에게 주어서 조치하게 하여 중국의 울타리가 되게 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성룡이 다 보고, “이것은 무리하고 망녕된 말인데, 중국 조정이 어찌 이런 의논에 속을 리가 있사오리까. 의심하지 마시고 더욱 우리의 할 일을 다 하시어 중국의 근심을 풀도록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였다. 《서애집》
○ 계사년 윤 11월에 사헌이 왔는데 칙서는 대략 이러하였다. “근자에 왜적이 한번 들어오니, 수도를 지키지 못하여 들판에는 해골이 널려 있고, 종묘와 사직은 빈터가 되었으니, 패망한 원인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찌 다 우연한 운수라 하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임금이 오락을 좋아하고, 소인들을 신임하여 백성을 구휼하지 않고 군비를 소홀히 하여 남의 업신여김을 초래하고 도적을 부른 것이 이미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건마는, 신하들은 일찍이 말하는 이가 없었으니, 앞 수레의 뒤집힘이 어찌 뒷수레의 경계가 아니리오.모르겠지만, 임금은 파천한 나머지 돌아와서 잡초가 우거진 궁궐과 타다 남은 무덤과 소복으로 길에 나와 영접하는 백성들을 보고서 후회하고 골머리를 앓아 어떻게 마음을 가누겠는가? 옛 정치를 고치고 새 정치를 하는데 어떻게 계획을 세우겠는가? 짐이 임금을 보기를 비록 속국이라고 하였지만 조빙하는 예문(례문)외에는 원래 임금의 군사 한 명이나 부역 한 가지도 폐를 끼치지 않았다.오늘의 일은 다만 대의로 분심을 일으켜 망한 나라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요, 진실로 임금이 짐에게 은덕을 요구해야 할 바가 아니로다. 대병이 이미 철수하였으니, 이제부터 임금은 돌아가 나라를 다스릴 터인데 척촌의 땅도 짐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국경을 넘어서 구원해 주기를 보통 일로 여겨서야 되겠는가? 가령 그대의 나라가 우리나라를 믿고 대를 세우지 않는다면, 제비가 당에 있고 섶에 불을 둔 것과 같아서 장차 화가 미칠 것이니 설사 다른 변이 있더라도 짐은 다시는 임금을 위하여 계책을 세울수 없다. 이 때문에 미리 거듭 일러두니, 옛 사람의 와신 상담(와신상담)하던 뜻으로 힘쓸지어다.지금에 있어서는 외적의 업신여김을 벗어나서 나라의 모습을 다시 정돈할 시기이니, 전쟁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흩어진 백성을 부르고, 척후병을 멀리 배치하고, 성을 수리하며 무기를 연마하고, 창고를 충실하게 할 것이며, 주색에 빠지지 말고 노는 데 빠지지 말 것이며, 한 쪽 말만 편벽되게 믿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홀로 맡겨서 백성들의 마음을 막지 말고 모진 형벌과 괴로운 역사로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아니하면, 선대의 기업을 부흥시킬 수 있으며 큰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존망과 치란의 기틀이 임금에게 있고 짐에게 있지 않으니, 경계하고 삼갈지어다.” 하였다.
○ 임금이 칙서를 받은 다음 사헌을 만나보고 밤에 대궐로 돌아와서 곧 유성룡을 불러서, “벌써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서도 일찍 자리를 피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내일 칙사를 보고 선위할 것을 청할 터이니 경과 만나는 것도 이날 뿐이다. 그러므로 밤이 비록 깊었으나 대면하여 영결하려고 불렀노라.” 하니, 성룡이, “중국이 우리나라를 매우 걱정하고 있으니, 칙서의 뜻은 그저 권면하고 독려하는 것 뿐인데 어찌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하였다. 임금이 술을 권하면서, “이것으로 영결하노라.” 하니, 성룡이 일어나 절하고 “내일 하시려는 일은 천만 부당한 일이오니 신이 감히 죽음으로써 청하나이다.” 하였다.이튿날 임금이 칙사와 만나서 소매 속에서 한 통의 문서를 꺼내놓았는데, “병이 들어 국사를 맡을 수 없으므로 세자에게 왕위를 전하고저 하오니, 주장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지극히 진달하는 내용이었다. 칙사가 직접 써서 답하기를, “위를 전하는 일은 당 나라 숙종(숙종)의 옛일이 있으니, 임금이 이미 이런 마음을 갖고 계시다면 문서를 갖추어 황제께 올려서 청하십시오. 일개 행인인 제가 어찌 감히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처음에 성룡이 사헌을 맞이하려고 벽제역에 갈 때 도승지 심희수(침희수)가 함께 갔다. 사헌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서울에 도착하면 새로우 조처가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날 밤에 명 나라 유격장군(유격장군) 척금(척금)이 성룡을 만나자고 하여 만나보니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고 6, 7조목을 써서 보이는데, 그 중 한 조목에 ‘국왕은 전위를 일찍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것이었다.성룡이 깜작 놀라며, “이것은 배신이 차마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형세가 위급한데 만약 또 군신 부자간에 있어서 처리함이 알맞지 못하면, 이것은 그 망함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하니, 척금이, “옳은 말이오.” 하면서 곧 그 종이를 촛불에 태워버렸다. 이튿날 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칙사에게 글을 올렸는데, 저녁에 척금이 또 성룡에게, “칙사가 의향을 이미 크게 돌렸으니 다른 염려는 없을 것이요.” 하였다. <서애행장>
○ 사헌이 대신과 병무를 주관한 재상 유성룡ㆍ김명원ㆍ유근수ㆍ이항복을 불러 함께 오자, 사헌이 “중국의 여러 장관이 지방에 폐해를 끼치고 있다는데 참말인가.” 하니, 성룡이, “오늘날 모든 장수들이 각각 약속을 이행하여 군사들을 단속하고 있으니, 어찌 폐해를 끼치는 일이 있겠소.” 하였다. 사헌이 또 글로 쓰기를, “내가 듣건대, 조선 사람이 말하기를, ‘왜적은 참빗이고 중국 군사는 얼레빗이라’고 한다는데 참말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소소한 피해야 어찌 다 없겠소마는 얼레빗이라는 말은 필시 중간에서 말을 꾸며낸 자가 한 말일 것이오.” 하였다. <서애행장>
○ 이때 임금은 전위하는 일을 여러 차례 조신들에게 하교하였고, 조신들은 그 불가함을 힘을 다해 간곡히 전달하였으나 오히려 만류하지 못하였다.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글을 칙사에게 올려 본국이 변란을 만난 이후의 사정은 모두 왜적의 중국을 범하려는 계획을 따라주지 않는데에 기인하여 낭패를 당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 임금이 즉위한 이후로 대국을 지성으로 섬겨 걱정하고 부지런히 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는 것을 일일이 진술하여 수천 자나 되었다. 칙사는 자못 그 말을 믿고 받아들였다.
○ 이때 사헌은 중국 조정의 명이라며, “세자는 호조ㆍ병조 등의 관원과 협동하여 경상ㆍ전라도에 머물면서 군무를 총괄하여 다스리도록 하라.” 하면서 길 떠나기를 독촉하므로, 우리나라에서는 호조 판서 한준(한준)ㆍ병조 판서 이항복이 협동하여 나아갈 뜻으로 회답하였다.
○ 갑오년 정월에 윤근수를 보내어 세자 책봉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예부 상서 범겸(범겸) 등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조선이 세자를 세워 민심을 견고하게 하려고 청하는 것이 불가한 것은 아니지만, 혹 오로지 한 도에만 신칙하도록 하여 편의대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빌려주어 저 세자로 하여금 마음대로 다스리게 한다면 일이나 권력이 분산되지 않을 것이니 저 나라가 편안해져서 과연 난을 막는 큰 공훈이 있기를 기다려서 별도로 의논해 처리하는 것이 해롭지 않으니 그 책봉하는 은전을 가벼이 주어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갑오년에 유정(류정)이 군대를 철수하다.
 

처음 계사년 9월 에 송응창ㆍ이여송 등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유정ㆍ오유충(오유충)ㆍ낙상지(락상지) 등만이 남아서 보군 만여 명을 거느리고 본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유정은 팔거(팔거)에, 유충은 울산에 주둔하였다. 팔거는 바로 성주(성주)이다.
○ 이때 영남 좌도에는 적군의 세력이 아직도 성하였다. 오유충ㆍ낙상지 등이 울산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적군 수천 명이 갑자기 공격하여 왔으므로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싸웠으나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명장 한 사람이 전사하였고 죽은 군사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았다. 상지가 맨 뒤에 남아서 좌우 손에 삼지창을 들고 서 큰 소리를 지르면서 거꾸로 맞아 싸우니, 적군이 드디어 물러갔다. 상지는 이때 나이가 이미 60여 세이었는데도 양 손에 천자총통(천자총통) 두 자루를 들었으니 당시에 낙천근(락천근)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 명 나라 황제는 응창 등의 말에 따라 칙사를 보내어 정세를 살핀 뒤에 남은 군사를 모두 거두게 하였다. 윤 11월에 명 나라 사신이 서울에 도착하자 유정이 팔거에서 올라와 사신을 만나 왜적의 정세를 직접 알린 다음 전라도로 돌아갔다.
○ 이때 유정이 여러 차례 편지를 행장(행장)에게 보내어 빨리 철수하지 않고 시일을 끎을 책망하니, 행장이 단기(단기)로 대면하여 약속하기를 청하므로 유정이 허락하였다. 때마침 밤중에 행장을 만나 보았는데 그 눈빛이 횃불과 같았다. 행장이 물러간 뒤에 유정이 탄식하기를, “하늘이 영걸을 해외에 낳게 해서 중국이 편안히 잠을 자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 12월에 유정이 행장에게 편지를 보내어, “포로가 된 조선의 남녀를 모두 석방하면 마땅히 황제께 아뢰어서 상을 내리게 할 것이다.” 하였더니, 행장이 답서를 보냈는데 매우 극진히 사절하고, 또 “두 나라가 화친하는 일을 다른 장수들은 알지 못하니, 앞으로 다른 장수에게는 편지를 부치지 말 것이며, 설사 다른 장수가 당신에게 글을 올리더라도 결코 믿지 마시오.” 하였다. 《조야첨재》
○ 갑오년 봄에 낙상지ㆍ송대빈(송대빈)ㆍ곡수(곡수) 등이 모두 군사를 거두어 요동으로 돌아가고, 유정ㆍ왕필적 등이 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팔거에 주둔하였다. 이때 서울과 지방에 흉년이 심하여 군량 공급에 곤란이 많았다.
○ 3월에 유정이 팔거에서 남원으로 옮겨 주둔하였는데, 접반(접반) 김찬(금찬)이 따라갔다. 유정이 거느린 군사가 처음에는 만여 명이 있었는데, 이때에는 왜적이 이미 철거하였다 하여 군사를 많이 줄이고 5천 명만 거느리고 있었다. 유정이 또 청정(청정)과 서로 사자를 보내어 의사를 통하였더니, 청정이 소왜(소왜) 임소지(림소지)를 보내어 정에게 만나기를 청하였다. 여러 장수가 소지를 죽이라고 청하니, 유정은, “대장이라면 죽여서 용서하지 않겠지만 소장은 죽여도 이익이 없다.” 하였다.
○ 6월에 승지 이덕열(리덕열)을 보내어 남원에서 유정을 위해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 6월에 유정이 명 나라의 명을 받고 회군하니, 세자가 공주에서 윤두수를 보내어 남아 주기를 청하였고, 권율도 와서 잔치에 참여하고 있다가 국경 안에 그대로 남아 주기를 굳이 청하였으며, 백성들도 뜰 앞에까지 들어와서 울며 호소하기를, “명 나라 군사가 만약 돌아가면 왜적은 반드시 쳐들어 올 것이니, 잠시라도 남아서 남은 백성들을 살려주기를 원합니다.” 하니, 유정이 조서를 꺼내어 보였다.8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 왔다가 이어 요동으로 돌아가고 파발을 본국에 설치하였는데 30리에 다섯씩 두어 북경에서 부산까지 통하게 하였다. 본국에서도 이것을 의지하였다. 이때 적군이 아직 해상에 있었으므로 인심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 처음에 명 나라 군사가 우리나라 여자에게 많이 장가들어서 호남ㆍ영남에 거주하였는데 돌아갈 때 모두 따라갔다. 산해관에 도착해서는 들어가지 못하고 방자(방자)들과 짝을 지어서 거주한 것이 전후에 수만 명이었는데 그 뒤 기해 년간에 전부 찾아서 돌아오게 했다. 방자란 것은 명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가난한 백성을 데려가서 기른 것인데, 그 숫자가 여기 왔던 중국인과 거의 같았다.
○ 유정에게는 본래 아들이 없었다. 그가 대구에 있을 적에 선산(선산)에서 사삿집 여종을 데려다 동거했는데 데리고 가면서 유상공(류상공)이라고 호칭하여 기찰을 면하였다. 사천(사천)에 이르러 사내 아이를 낳았으므로 그 부인이 거두어 길렀다. 무술년 출병해 올 때에 그 여인을 데리고 나와서 은(은) 수백 량으로 본 주인에게 속납(속납)하였다.
○ 남원 백성들이 중국 장졸들의 공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워서 기록하였는데, 송대빈은 군사를 잘 단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낙상지ㆍ송대빈 두 장수의 이름을 빼버렸으니, 낙상지는 원통한 것이었다.
○ 처음에 유정이 촉 지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왔다. 그 중에 해귀(해귀)라는 자가 있었는데, 남번(남번) 출신으로 낯빛이 칠처럼 까맣고, 바다 밑에 숨어 다니기도 하며 그 모양이 귀신같다 하여 해귀라고 한다 하였다. 키가 큰 사람이 있었는데, 몸이 아주 커서 거의 두 길이나 되었으므로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녔다. 이와 같은 것으로 보면 천지 사이에는 없는 물건이 없다 하겠다. 《서애집》
○ 군중에 지개삼(지개삼) 더러운 오랑캐의 종족 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키가 크고 체구가 큰 것이 보통 사람보다 10배나 되었다. 해귀(해귀)가 넷인데 까만 눈에 붉은 머리털이 가는 털과 같았다. 초지방 원숭이가 네 마리인데, 말을 타고 활을 사용함이 사람 같았다. 그 밖에 소ㆍ양ㆍ돼지와 잡물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월록》
○ 또 두 마리의 원숭이에게 활과 화살을 차고 말을 타고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는데, 원숭이는 적진에 들어가서 말의 고삐를 풀 수도 있었다.

병신년에 왜병이 철환하다.
 

처음에 송응창이 화친을 주장했기 때문에 탄핵을 당하여 갈리고, 급사중 허홍강(허홍강)이 송응창의 봉공(봉공)을 허락하여 일을 그르쳤다고 탄핵하여 파직하였다. 병부 시랑 고양겸(고양겸)이 대신 요동에 갔다.
○ 고시랑(고시랑)이 도사(도사) 담모(담모)를 시켜서 왜군 진영에 가서 염탐하게 하였더니, 행장은 소서비(소서비 내등여안(내등여안)) 등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여 담을 잡아 두고 인질을 삼았다.
○ 갑오년 2월에 본국에서 사신 허욱(허욱)을 보내어 왜적의 마음은 이랬다 저랬다 변하기 때문에 화친을 믿을 수 없음을 아뢰고, 겸하여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 줄 것을 청하게 하였다. 이때 명 나라 조정의 의논은 왜적과 화친하기를 허락한 것은 잘못이라는 사람이 많았으나 석성 및 경략 송응창ㆍ고양겸 두 사람만은 승산이 없었으므로 그럭저럭 화친하여 일을 매듭지으려고 극력 주장하였으나, 과도관(과도관)들이 문득 반대하였다. 양겸이 허욱을 말려서 진전되지 못하게 하고, 4월에 참장(참장) 호택(호택)을 보내어 와서 우리에게 우선 강화할 뜻으로 황제에게 올리는 주문(주문)을 고치게 하여 자기 계획대로 되게 하였다.
○ 그 자문(자문)은 대략 이와 같다. “왜놈이 무단히 너희를 침범하니 파죽지세(파죽지세)와 같았다. 삼도를 점거하고 너희 왕자를 사로잡았다. 황제께서 크게 성내시어 군사를 일으키니 왜놈은 마침내 도망갔고 2천여 리의 지역을 회복하였다. 비용에 쓴 내탕금(내탕금)이 셀 수 없이 많았으며 군사와 말이 죽은 것도 적지 않았다. 조정에서 속국을 대우하는데 은혜와 의리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황제의 끝 없으신 은혜가 또한 너무 지나쳤다. 이제 왜놈이 두려워하여 항복하기를 청하므로 조정에서는 정히 이를 허락하고자 한다. 너희 나라에서는 양식이 없어서 사람끼리 서로 잡아 먹는데 또 무엇을 믿고 군사를 청하는가.이미 너희 나라에 군사와 양식을 주지 않고 또 왜놈에게 봉공을 허락하지 않으면 왜놈은 반드시 너희 나라에 화풀이를 하여 너희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너희 나라의 말을 조정에서 반드시 믿으니 너희가 왜놈을 위하여 봉공을 청한다면 왜놈은 중국의 은혜에 더욱 감격할 것이고 또 너희 나라에 고마워 하여 싸움을 그치고 갈 것이다. 너희 나라 군신은 고심초사(고심초사)하여 구천(구천)이 한 일을 수행할 지어다.”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말이 누누히 천 여자나 되었다. 호택이 객관에 있은 지 달이 넘도록 조정의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니, 호택은 몹시 급하게 보고를 독촉하였다.영상 유성룡이 차자를 올려서, “우리나라는 이미 자력으로 일어날 수 없기에 다만 대국을 의지하여 부흥을 도모할 뿐이었는데, 경략 송응창과 도독 이여송이 모두 그만 두고 가버렸으며, 고시랑이 지금 겨우 왔는데 그가 말하는 바를 한결같이 거절만 한다면 일 맡은 그 사람이 성을 내어 협력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일은 더욱 고립되지 않겠습니까? 봉공을 청하는 일은 의리상 진실로 불가하지만 마땅히 근일의 사정을 자세히 갖추어서 아뢰고 중국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도록 하시옵소서.” 하고 여러 번 아뢰니 5월 임금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 이때 비국(비국)의 여러 의논이 다 성룡의 말과 같으니, 임금은 마지못해서 따랐다. 5월 17일에 호택을 접견하고 황제에게 아뢰겠다고 허락하였다.
○ 갑오년 5월에 전라 감사 이정암(리정암)이 화의를 따를 것을 청하면서 구천(구천)과 범려(범려)의 옛 일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다. 이때 조정의 의논이 화의를 크게 배척하고 대각의 논의가 과격하게 일어나서 정암을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다. 《일월록》 《소대기문》 《혼정록(혼정록)》 ○ 《조야첨재》에는 충청 감사라고 하였으니 잘못된 것이다.
○ 동월 26일, 처음에 영상 유성룡이 고양겸의 자문에 대한 일로 입대하여 결정하고자 좌참찬 성혼(성혼)을 청하여 함께 들어가니, 임금이 황제에게 강화하자고 아뢰는 것이 타당한가를 물었다. 성혼은, “나라 형세의 위태함이 한 가닥의 머리털과 같으니, 모름지기 적군의 예봉을 조금 늦추어서 우리나라가 스스로 강해지기를 도모해야 할 것이며, 고시랑이 권력을 손에 쥐고 마음대로 높이고 낮추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싸울 수도 없고 또 능히 지키지도 못하면서, 중국 조정의 화의만을 말리는 것은 아마 실책일 듯합니다.” 하였다.임금은 답하지 않았는데, 정암의 장계가 마침 이르니 좌우에서 정암의 목을 베어야 된다고 다투어 말하였다. 성혼은, 본래 정암이 충성스럽고 진실하고 큰 절개가 있음을 알았으며, 또 그의 말이 충심에서 나왔음을 가상히 여겨 아뢰기를, “이 사람은 중하게 죄를 주어서는 안됩니다.절개를 지켜 의리에 죽을 마음이 없다면 감히 이런 주장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옵니다.” 하다가 임금의 노기가 대단하므로 성혼은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성룡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이로부터 삼사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서 화의를 공격하였는데 유영경(류영경)이 극력 주장하였다. 성룡이, “영감의 묘비에는 화친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부주화(불주화) 세 글자를 쓰겠소.”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를 기롱하는 말이었다. <우계행장(우계행상)> 《하담록(하담록)》
○ 성혼이 드디어 황공히 물러 나오자 조회를 파하였다. 임금이 시를 지었는데,

한번 죽음은 내 참을지언정 / 일사오녕인
강화란 말은 듣기 싫도다 / 구화원불문
어찌 간사한 말을 주장하여 / 여하창사설
의리를 무너뜨리고 삼군을 의혹하게 하리 / 패의혹삼군

하고, 이어서 전교를 내려, “간특한 사람의 사특한 말이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을 속임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러서 지금 조정의 처사와 변장들이 하는 일도 모두 성혼의 사특한 말 때문에 그릇되었다.” 하고 방에 써서 조당에 보이도록 명하였다. 《혼정록》
○ 성혼은 변명할 길이 없으므로 6월에 소를 올려 처분을 기다리고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마음에 품고 있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모두 말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인데, 하물며 사람의 소견이 모두 같지 아니함에랴. 무슨 상관이 있으랴. 경은 사직하지 말고 더욱더 마음에 품고 있는 바를 모두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 이달 27일 임금이 교서를 내렸는데, “세자에게 전위하고 싶다. 그런 뒤에 화의를 허락하는 일을 마음대로 행하라.”는 말까지 있었다. 유성룡이 사직하는 차자를 올렸더니 비답은 내리고 허락하지는 않았다. 《일월록》
○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 (주화오국) 네 글자는 내 스스로 살펴보아도 이런 것이 없다. 계사ㆍ갑오 연간에 사람끼리 서로 잡아 먹고, 나라 형세가 몹시 위태하여 조석도 보장하기 어려운데, 왜적을 도모할 만한 힘이 없으므로 나는 생각하기를, 겉으로 중국의 기미(기미)하는 계책을 따르는 척하여 적군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늦추면서 안으로는 전투ㆍ방비의 대비를 갖추어서 천천히 뒷날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스스로 헤아려 보아도 오늘날 국가를 위한 계책은 이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나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서책 속에서 좋은 제목[주화오국]을 찾아내어 서로 더럽히려고만 하고 있으니, 이것은 웃으면서 받을 수 밖에 없다. 서애가 조월천(조월천)에게 보낸 글
○ 6월에 경안령(경안령) 요(요)가 입대하여, 성혼은 화의를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논계하고, 또 성혼이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 한다고 말하였다. 요가 성혼을 길가의 민가에서 만나 수작하고 돌아와서 아룀이 이와 같았다. 성혼이 또 소를 올려서 변명하기를, “5월에 입시하던 날 좌우에서 정암의 죄를 중하게 논하는 자가 있으므로, 신은 그 사람을 깊이 아끼기 때문에 중한 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먼저 정암을 파직시킬 만한 죄를 아뢰고, 또 정암이 자신을 잊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말하였던 것입니다.비록 지금 그가 올린 글이 지극히 해괴한 것이오나 그 정성만은 취할 만하고 또 이런 말을 내면 죄를 받을 것임을 알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린 것이옵니다. 명 나라에 보낼 주본(주본)의 의논에 관해서는 우리나라가 중국의 끝없는 은혜를 입어 종묘 사직을 보존하였으며 원수 왜적을 거의 토멸하게 되었는데, 중국의 장사가 힘써 싸우려 하지 않고 마침내 화의를 개시하여, 싸우지 않을 계책으로 왜적이 돌아갈 것이라고 속여 말하여, 반드시 화친해야 한다는 말을 지어 내었으나 왜적이 명을 따르지 아니하고 흉악한 짓을 예전처럼 멋대로 하니, 그들이 자기네 조정에 대하여 가리우고 속이는 일이 생겼습니다.지난 겨울 명 나라에 주청한 가운데 그들의 속인 사실이 발각되어 과도관(과도관)의 탄핵을 받았는데도 반성하여 자책하지 않고 우리에게 원망을 돌리면서, ‘원망으로 덕을 갚는다. 인심의 험악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은 교활하고 간사하다. 나는 너의 나라가 나를 죽일까 두렵다.”라는 말을 한다 하니, 그들의 노여움이 이미 극도에 이르렀나이다. 신의 생각에는 오늘날 믿을 수 있는 바는 중국뿐이며, 모든 일들이 다 장상과 대신에게서 나오는데, 이제 우리에게 노함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뒷일을 잘 수습할 수 있으리이까. 속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호참장(호참장)이 와서 머물은 지 달이 넘었으나 주본에 대한 의논이 아직도 결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망녕된 생각으로 국가의 존망이 이에 달렸는데, 오랫동안 그 사신을 머물게하여 그 마음을 몹시 잃었다고 여겨집니다. 또 듣건대, 중국에서는 물러가 압록강을 지키자는 의논이 매우 성하다 하더니, 유정의 군사를 철수하라는 명이 이미 내려졌사오니 신은 진실로 겁이 나서 위급하게 여기는 마음을 금할 수 없나이다. 제가 보건대, 고시랑이 손에 권력을 쥐고 자기 마음대로 높였다 낮추었다 하는데, 장차 우리나라에 분을 풀려고 한다면 진실로 힘을 들이기가 쉬울 것입니다.이러므로 그 자문에 의거하여 정세를 사실대로 아뢰면서 ‘중국 군사가 이미 재차 나오지 않았고 우리는 날로 위급한 지경에 빠지는데, 병권을 위임맡은 대신이 장차 항복을 받고서 적군을 퇴각시키려고 하니, 우리 같은 작은 나라가 어찌 감히 그 일을 저지시켜서 반드시 우리의 뜻대로 하고자 하리오. 오직 끝까지 구제해 주기를 바랄 뿐이오.’라고 하여 이렇게 분명히 말하면 우리가 복수하려는 대의에 해로운 바도 없고, 저쪽 장상과 대신들에게도 거스리는 바가 없을 것이옵니다.대개 그때 주문하는 큰 뜻이 다만 적군의 정세를 알리려고만 하고, 항복을 받는 일에는 언급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신이 그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자 한 것이오니, 신의 본심은 오직 이것뿐이옵니다. 왜적과 강화한다는 것은, 신이 마음 먹어 본 적이 없으며 생각해 본 일도 없사옵니다. 신이 비록 망녕되오나 역시 명예와 절조를 아끼는 마음이 있사온데, 신이 무슨 이익이 있기에 진회(진회)의 옛 자취를 스스로 밟아서 당세에 죄를 얻고 후세에 악취를 남기려 하겠습니까? 신의 병이 중하여 늘 출입하지 못하다가 6월에 친구가 역병을 앓아서 거의 죽게 된 자가 있어, 병을 참고 가서 문병하고 돌아오는 길에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길가 민가에 살고 있는 아는 상주를 길에서 만났으므로 신이 잠깐 들어가서 위문하였습니다. 경안령 요도 그 자리에 있다가 신에게, ‘근래 바깥에서 당신에 대한 비방이 있으니 무슨 일이오.’하기에, 신은, ‘며칠 전 입시하여 함부로 의논한 일은 모두 나의 허물이오.’하고 대답하였습니다.또 ‘자문ㆍ주문에 대한 조정의 의향은 필경 어떻게 되었나.’하기에, ‘그 뒤에는 감히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듣건대 호참장이 협박하므로 부득이 그 의향에 약간 따르는 듯하다.’라고 답하였나이다. 밤길이 바빠서 곧 일어나 갔으며 또 많은 말도 하지 않았는데, 요는 신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 이런 말을 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요가 신에게 들은 것은 그때 주문에 대하여 신이 말씀 올린 그 말에 불과하였고 회의를 주장한 의논은 아니었나이다. 천지 귀신이 위에서 굽어보시고 곁에서 증명하는데, 신이 감히 군부를 속여 스스로 하늘에 죄를 짓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야첨재》
○ 성혼이 소를 올려 사직할 것을 청하여도 허락되지 않았고, 또 재차 소를 올리려고 하였으나 황송하여 실행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에 대간 김우옹(금우옹) 등이 서로 이어서 성혼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는데, “반드시 일찍 법으로 처단하여야만 조종에 부끄러움이 없고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오.”라고까지 하였다. 그들의 뜻은 대개 성혼에게 죄를 씌워서 장차 형장에서 죽이려고 한 것이었다.이런 형세를 이용하여 욕하고 배척하는 자가 전력을 다하였다. 이때 이이첨(리이첨)ㆍ정인홍(정인홍) 등이 유성룡과 맞서서 서로 배척하였는데, 이첨 등이 주창하기를, “화의를 주장한 자는 성룡인데 도리어 성혼이 화의를 주장하였다 하니, 성룡은 참으로 간사한 사람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당시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성혼을 공격하지 못하였다. 《일월록》
○ 정암은 당파가 성혼과 다른데도 힘을 다해 구제하려 하다가 마침내 이 때문에 뭇소인들의 모함을 받았으니, 군자의 마음 쓰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인데, 저들은 홀로 무슨 마음으로 최영경(최영경)의 일을 가지고 성혼을 욕하고 무함하기를 한 없이 하는 것인가. 《일월록》
○ 처음 성혼이 왜변이 일어날 때 조정에 달려가려고 하였으나 붕당의 의논이 매우 준엄하니, 스스로 생각하기를, 본래 산야 출신으로 방금 붕당을 한다는 지목을 받고 조석으로 죄를 얻었는데 나라에 비록 급한 일이 있더라도 도의상 함부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임금의 행차가 만약 서쪽으로 피난 가신다면 길가에서 울며 맞이해야 할 것이니, 물어 주실 것 같으면 마땅히 행차를 따라갈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오직 물러나서 구렁에서 죽을 따름이라 하였다. 얼마 후 임금이 갑자기 피난 갈 것을 결정하였는데 성혼의 집은 관로(관로)에서 20리의 거리였다.행차가 이미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문을 듣고 창황히 따라 가려 하였으나 나룻배가 끊어졌고 왜적이 이미 길을 막고 있었다. 드디어 통곡하면서 병든 몸으로 가마에 실려서 산 골짜기에 피난하였다. 임금이 임진강에 도착해서, “성혼의 집이 여기에서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물었다. 이홍로(리홍로)가 가까운 언덕에 작은 집이 있는 곳을 속여 가르키며, “저곳이 성혼의 집이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와서 나를 보지 않을까.” 하니, 홍로가, “이런 위급한 때에 그가 어찌 와서 뵈려 하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홍로는 일찍 성혼의 집에 왕래하였으므로 임진강에서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를 이용하여 이렇게 무함한 것이다. 행차가 의주에 도착하였는데 홍로는 성혼이 동궁의 부름을 받고 성천(성천)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임금에게, “성혼은 온 나라의 중망을 입고 있는데 이미 세자에게 갔으니 일은 틀린 것입니다.” 하였다. 뒤에 성혼이 행재소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혼이 오는 것은 세자를 위해서 선위를 도모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하였다. <우계행장>
○ 세자가 성천에 있으면서 편의대로 성혼을 검찰사에 임명하였다. 얼마 후에 성혼이 행재소에 들어가기를 청하므로 세자가 허락하였다. 행재소에 가서 임금을 뵈었는데, 대신 윤두수가, “착한 사람은 천지의 기강이니 우대하여 승진시키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아뢰어 이에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뒤에 윤두수가 죄에 연루된 것은 이 때문이라 한다. 성혼이 차자를 올려서 사퇴하니, 비답이 내렸는데, “험한 길을 어렵게 이곳에 와주었으니 진실로 기쁘게 여긴다. 국가가 경의 힘을 입어 회복을 도모할 터이니, 이번의 이 승진은 경에게는 오히려 늦은 것이니 사양하지 말라.”고 하였다. 《기재잡기》에는, “행재에 도착한 이튿날 윤두수가 가자(가자)할 것을 청하여, 드디어 자헌에 올렸다.” 하였다. 이항복은, “어리석은 사람도 하지 않을 일인데 오음(오음)은 실성했다고 하겠다.” 하였다. 대사헌에 임명되어서 시무 아홉 조목을 올렸다. 계사년 봄에 행차가 영유(영유)에 돌아갈 때 성혼은 병으로 행차를 따르지 못하였고, 뒤에 따라 와서 처분을 기다렸더니, 비답을 내려, “경은 의병장인지라 나라의 회복을 기대할 만한데 한때 도로에서 잘못한 일이 무슨 해가 되랴.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10월에 환도할 때에도 병으로 어가를 따르지 못하였다.
○ 갑오년 2월에 좌참찬에 임명되었다. 들어가 임금을 뵈오니, 임금은, “당초에 왜변이 나서 창황히 내가 경의 집 앞을 지나는데도 경이 나와서 위문하지 않기에 나의 죄가 중하다는 것을 알고 죽고 싶었으나 되지 않았는데, 이제 경이 오니 감격하여 눈물을 걷잡을 수 없다. 경의 병이 비록 중하나 잘 조리하여서 간간이 비변사의 모의에 참여하여 흉악한 왜적을 토벌하고 위태로움을 편안한 상태로 돌린다면 죽더라도 내 마땅히 결초보은 하겠다.” 하였다. 성혼이 소를 올려서 자신을 탄핵하였다.
○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허물로 인해서 국사가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바야흐로 충신과 현인의 힘을 입어 어려운 고비를 넘기기를 바라니, 경은 우선 나의 허물을 용서하고 간간이 여러 대신의 반열에 참여하여 변방의 군무를 규획하는 것이 어떻겠소. 혹시 경의 힘을 입어 이 적군을 소탕하게 된다면 내가 감히 경의 은덕에 갚지 않으랴.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께서도 먼 하늘에서 어찌 감동하지 않으리오.” 하였다.성혼이 시무 10여 조목을 올렸는데 계자(계자)를 찍지 않고 비변사에 내렸다. 비변사에서 회계하기를, 열네가지 조목은 나라를 위하 정성과 지금의 절실한 일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제 1조의 공헌(공헌)을 폐지하고 시장에서 사다 쓰자는 것은 또한 이런 때에 합당하니 먼저 시행할 것을 청하나이다.” 하였다. 회계에 따라 시행한 지 3일만에 경기 감사가 장계를 올렸는데, “수라에 소용되는 물건이 난리 뒤에 굶주린 백성이 서로 잇달아 죽기 때문에 진상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중신이 계책을 올렸다는 것을 들었으니, 만약 속히 시행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전교를 내려서, “성혼이 올린 시장에서 사다 쓰자는 계책은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에 와서 이정암을 구원하려던 일로 인하여 대각의 탄핵이 엄준하게 나와서 얼마 뒤에 정철의 관작을 추탈하는 거조가 있게 되었다.
○ 임금의 행차가 정주(정주)에 머무르고 있을 때 어보(어보)를 윤두수에게 맡기고 임의대로 처리하라 하였으니, 임금의 노여움을 상상할 만하다. 《석실어록》
○ 그 뒤 정유년에 배용길(배룡길) 등이 소를 올려서 이정암과 성혼이 화의를 말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 8월에 호택이 돌아갈 때 임금이 드디어 진주사(진주사) 허욱으로 하여금 주문을 가지고 말을 달려 가게 하였는데, 고양겸이 보낸 자문의 의사와 꼭 같게 하였다. 호택이 돌아가서 양겸에게 보고하니, 양겸도 주문을 올리고 왜적의 정세를 끝까지 말하고 군무에서 해직되기를 원하였다.
○ 과도관(과도관)들이, 양겸이 화의를 주장하였음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손광(손광)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 9월에 허욱이 북경에 도착하여 주문을 바치니, 병부에서 크게 기뻐하여 왜적이 성심으로 항복하는 것이라 하고 소서비(소서비)를 북경에 불러들일 것을 청하여 세 가지 일을 다짐시켰는데, 첫째 다만 봉왕(봉왕)만을 요구하고 공물을 요구하지 말 것, 둘째 왜인 한 명도 부산에 남아있지 않을 것, 셋째 영원히 조선을 침략하지 아니할 것이다. 약속대로 하면 곧 수길에게 봉왕할 것이지만, 약속을 어기면 봉왕할 수 없다고 하니, 소서비가 약속을 따르겠다 하며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였다.그때 심유경(침유경)은 장황하게 말하기를, “왜놈이 성심으로 순종하려 하니, 지금 만약 사람 한명을 보내어 수길(수길)을 달래면 왜적에 대한 걱정은 없게 될 것이라.”고 하여, 석성(석성)은 봉왕을 들어줄 것을 정했지만 허홍강(허홍강) 등은 여전히 불가함을 힘껏 다투었다. 허욱이 주문을 가지고 도착한 뒤에 석성이 그제서야 여러 의논을 물리치고 봉왕을 승낙하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다.
○ 병부에서 아뢰어 다시 유경을 보내어 소서비를 데리고 왜군 진영에 들어가서 유시하여 봉왕할 것을 허락하고 주둔한 군사를 모두 거두어 귀국할 것을 요구하였다.
○ 9월에 명 나라 조정에서 임회훈위도독첨사(림회훈위도독첨사) 이종성(리종성)을 일본 책봉 정사(일본책봉정사)로 임명하고 도독첨사 양방형(양방형)을 부사로 삼았다.
○ 을미년 4월에 종성 등이 나왔다. 책보(책보)와 금백(금백)을 가지고 가서 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봉하려 하는데, 우리 서울에 머물면서 왜적이 다 철수한 다음에 가게 하였다. 소서비탄수(소서비탄수)가 명 나라 복식을 꾸려서 부하에 맡겨 놓고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그 부하와 함께 다녔다. 유경이 함께 와서 먼저 부산으로 갔다.
○ 호조 판서 김수(금수)와 이조 판서 이항복을 정사 부사 접반으로 삼았다.
○ 황신(황신)이 유경의 접반이 되어서 왜군 진영에 따라 들어갔다. 행장이 유경을 접대하면서 접반사에게는 앉으라는 말도 없으므로 황신은 발끈 성을 내어 일어나 나가려 했다. 행장은,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느라고 정신이 쏠려 매우 예모에 실수가 있었다.” 하고, 영접하여 앉게 하고 사죄하며, “조선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이러한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유경이 행장에게, “왜병이 모두 철수한 뒤에 명 나라 사신이 내려올 것이다.” 하였다. 행장이 유경을 진중에 머물러 있게 한 후 직접 작은 배를 타고 가서 수길에게 이 말을 전하고 곧 바다를 건너 돌아와서 우리나라 통신사도 아울러 청하였다.
○ 행장이 비로소 담도사(담도사)를 돌려보냈다. 한 책에는 담이 청정(청정)의 진영에 구금되어 있다가 꾀로써 탈출하였다는 말도 있다.
○ 종성 등이 연달아 사자를 보내어 왜적들에게 바다를 건너 갈 것을 독촉하였다. 이에 행장이 먼저 웅천 몇 진과 거제(거제)ㆍ장문(장문)ㆍ소반포(소반포) 등지에 주둔한 군대를 철수시켜서 신용을 보이고, 또 유경을 시켜 자문을 전하였는데, “행장이 명 나라 사신을 기다렸으나 이제까지 온다는 소식이 없으므로 여러 장수가 평양에서처럼 속임을 당한 것인가 의심하니, 원컨대 천사가 속히 왜군 진영에 들어오면 마땅히 약속대로 다 이행하겠다.” 하였다. 《일월록》
○ 처음에 임금은 화의를 심히 배척하였으나, 대신들이 뜻을 굽혀 경략의 의사를 좇아 왜적의 정세를 아뢰었으므로 석성이 큰 의논을 결정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때 종성 등이 말하기를, “명 나라 사신이 조서를 받들어 일본에 가는데 조선에서는 어찌 동행하는 사신이 없을 수 있소.” 하며 사신을 보낼 것을 독촉하니, 임금은 더욱 성이 나서 비국의 여러 재신들에게 책임을 넘겼다. 《조야첨재》
○ 8월에 부사 양방형이 병부의 지령으로 인하여 먼저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였으나 왜적은 머뭇거리면서 즉시 철수하지 않고 다시 상사(상사)를 청하니 사람들이 대부분 의심하였다.
○ 석성은 유경의 말을 믿었고, 또 왜병을 물리치는데 급하여 여러 번 종성을 독촉하여 전진하게 하였다. 비록 조정에서는 다른 의논이 많았으나 오히려 분연히 자신이 책임을 지고 나섰다.
○ 9월에 정사 이종성이 소서비를 거느리고 뒤따라 출발하여 남원에 도착하여 오래 머물 계획을 세웠다.
○ 종성이 개구리를 잘 먹었으므로 수령이 백성들에게 개구리를 잡아들이라고 하였으나, 서리가 내린 뒤라서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
○ 손광이 문서를 보냈는데, “왜장이 여러 번 천사를 청하였으나 천사는 두려워하고 머뭇거리기만 해서 황제의 명령을 매우 욕되게 하였다.” 하니, 종성이 마침내 부산에 들어갔다.
○ 10월에 종성이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행장 등이 즉시 와보지 않고 그제야 말하기를, “장차 관백(관백 수길(수길))에게 가서 보고하고 결재를 받은 다음 맞이하겠다.” 하였다. 행장이 일본에 들어간 지 수개월 만에 비로소 돌아왔으나 여전히 군대 철수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을 하지 않고, 또 유경과 함께 먼저 바다를 건너가면서 사신을 맞이할 예절을 준비하기 위함이라고 핑계를 대니, 사람들이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 《서애집》
○ 종성ㆍ방형 등이 가야사(가야사)에 도착하여 부처에게 절을 하는데 몹시 공손하였다. 하인이 종사(종사) 이광윤(리광윤)에게, “어찌하여 혼자 절을 하지 않는가.” 하니, 광윤이, “우리나라 사람은 공자에게 절할 줄은 알아도 부처에게 절할 줄은 모르다.” 하였다. 대개 중국 사람은 소상(소상)을 보면 반드시 절을 하는 것이었다. 《지봉유설》
○ 병신년 1월에 유경이 홀로 행장과 함께 일본에 갔다. 유경은 비단옷을 입고 배에 올랐는데 깃발에 ‘두 나라를 화해시킨다(조집량국)’이란 네 글자가 크게 써서 뱃머리에 세워져 있었다. 간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나 회보가 없었다. 대개 유경이 일본에 먼저 들어가서 망용의(망룡의)ㆍ옥대(옥대)ㆍ익선관(익선관)과 대명지도(대명지도)ㆍ무경칠서(무경칠서)를 사사로이 수길에게 바쳤으며, 그 밖에 은밀히 뇌물로 바친 진귀한 보물도 많았다. 또 아리마(아리마)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왜놈과 합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조종을 받게 되었다.
○ 종성은 바로 개국공신 이문충(리문충)의 후손으로 그의 공으로 벼슬을 세습하여 귀한 집 자제로서 어리석고 일에 경험도 없었다. 이때 복건(복건)에서 포로가 되어 왜에 귀화한 두 사람 즉 복건의 소학명(소학명)ㆍ왕삼외(왕삼외) 이 와서, “바다를 건너지 마십시오. 일을 헤아리기가 매우 어려우니 한 번 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왜는 사실 봉왕을 받을 의사가 없으니 공은 빨리 결단을 내리십시오.” 하였다. 종성이 몹시 겁이 나서 4월 3일 밤중에 사복(사복)으로 도망쳐서 남원에 이르러 전에 머물던 호도사(호도사)와 함께 서울을 향하여 말을 달렸다.수행하던 명 나라 사람들도 모두 도망쳐 흩어졌다. 이튿날 아침에 왜적이 비로소 알고 여러 갈래로 쫓아가서 흩어져 숨어 있던 명 나라 사람을 거의 반이나 잡았다. 방형은 이때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의지(의지)가 아문에 달려와서 부사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고, 그 부하들에게, “좋다”고 하였다. 날이 밝아 왜장 사고(사고)가 아문의 군사 3백 명의 왜병을 거느리고 종성을 추격하려고 하자 방형이 의지를 불러, “쫓아가도 따라잡지 못할 것이고, 또 내가 직접 처분을 내릴 것이다. 일이 만약 거의 이루어지면 정사는 스스로 올 것이니 지금 쫓아가지 말라.” 하니, 의지가 “노야(로야)의 말씀이 이치가 있다.” 하고 즉시 쫓지 말도록 명령하였다.방형이 우리나라 역관을 불러서, “천하만고에 이같이 부끄러운 일이 있을까보냐. 당당한 명 나라 사신으로 작은 나라에 왔으면 일을 공명정대하게 해야 할 것인데, 어찌 도망치는 천사가 있을 수 있느냐. 장부가 죽으면 죽었지, 어찌 일신만 돌보고 국가는 돌보지 않으리요. 본국(조선)과는 한 집안인데 왜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어떻게 하나. 너희 나라가 놀라서 경솔히 군사를 일으키면 대사가 그르쳐질 것이니, 너는 이 뜻을 빨리 보고하라.” 하였다.이튿날 방형이 정사의 아문에 직접 가서 하인들을 꾸짖고 타일러서 안심하라고 하니 모두 눈물을 흘리었다. 방형이 웃으며, “내가 여기에 있으니 오랑캐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게 하라.” 하였다. 행장을 뒤져 보니 금인(금인) 두 개가 있는데, 한 개는 관백에게 봉왕할 인장이고, 한 개는 정사의 인장이었다. 종성은 부절만 가지고 갔던 것이었다. 《서애집》에는, “쫓아서 양산(양산)까지 갔으나 잡지 못하였다.” 하였다.
○ 이때 종성은 가정(가정) 한 사람만 데리고 차관(차관)모양으로 꾸미고 등에 누런 보자기를 짊어지고, 너울을 드리우고 바라를 치면서 나가 문을 지키는 왜인을 속여 급히 전할 일이 있으니 문을 열라고 하였다. 왜인이 그 말을 믿고 문을 열었다. 드디어 뛰어 나갔으나 깜깜한 밤중이라 지척도 분간하지 못하고 산길을 따라가다가 잘못되어 울산(울산)에 당도하였는데, 마침 우리나라 정탐군을 만나서 겨우 경주(경주)에 갈 수 있었다. 드디어 서울로 가서 이어 북경으로 돌아갔다.
○ 이때 왜인들은 행장이 나오기만 하면 곧 철병할 것이므로 모든 짐을 다 배에 실어 두었는데, 이 말을 듣고는 도로 풀어 내리게 하니 많은 왜인들이 통곡하면서, “우리들은 돌아갈 기한이 없다.” 하니, 방형이 경고하기를, “우리들이 여기 온 지 여러 달이 되었으나, 너희들이 철병하지 않으므로 정사가 크게 성이 나서 갔다. 비록 정사는 없더라도 나와 인신(인신)은 여기에 있다. 정사가 필시 남원에 도착했을 것이니 너희들이 철병한다면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면 나를 배에 태워 두고 일의 결과를 보면 될 것이다.” 하며 간곡히 타이르니, 왜놈들이 감격하고 감탄하면서, “인장과 칙서와 양노야(양로야)가 여기에 있으니 다시는 두려울 것이 없다.”고 모두들 말하였으나, 청정만은 명 나라 사신이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면서, “나는 이번 일이 실상이 아니고 명 나라 사신이 한갓 속이려 한 것이라고 했더니 과연 그렇다.”고 하였다.
○ 이보다 먼저 이항복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종성은 부귀한 집 사람이라 한갓 문필에만 종사하였고 행동거지에는 어긋남이 많으니 반드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할 것이며, 화친이 성사되는 것도 알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이 맞았다. 《일월록》 <백사행장>
○ 접반사 이항복이 부사의 편지를 가지고 서울에 올라왔다. 본국에서는 심우승(침우승)을 중국에 보내어 사유를 갖추어 아뢰니, 황제가 노하여 종성을 잡아 금의위(금의위) 옥에 가두도록 명령하고, 방형을 정사로 승진시키고 유경을 부사로 삼았다. 진운홍(진운홍)이 칙서를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알렸다.
○ 행장이 일본에서 돌아와서 정사가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크게 군사를 내어 쫓아가 잡고자 하니 부사가 타일러서 말렸다. 영남 여러 진영의 적군은 여전히 농사를 지으면서 철수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일월록》
○ 5월에 청정이 철병하여 바다를 건너가자 46둔이 잇달아 철수하였고, 부산에 네 개의 둔만 남았을 뿐이었다. 《일월록》
○ 이때 행장이 또 우리나라 통신사를 청하면서, “조선에서 사신이 없으면 이것은 다만 명 나라 조정과만 화친하는 것이니, 반드시 조선의 사신이 있어야만 대사가 완전할 것이오.” 하였다. 유경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그 조카 심무시(침무시)를 보내서 사신을 보낼 것을 독촉하므로 마지 못하여 처음에 무신 이봉춘(리봉춘)을 ‘근수배신(근수배신)’이라는 명칭으로 수행하게 하였더니, 7월에 유성룡이 아뢰기를, “반드시 왜적의 정세를 잘 아는 사람을 찾아야 걱정이 없을 터입니다.황신(황신)은 명민과 담략이 있고, 또 위급한 때나 평상시나 변하지 않는 절개가 있으니 황신을 보내기를 청하나이다.” 하였다. 《석실어록》에는, “우리나라에서는 통신사를 보내려는 거조가 없었는데, 명사가 우리나라로 하여금 사리에 밝고 숙련된 한 사람을 가려서 적당배신(적당배신)이라는 명칭으로 따라가게 한 것이다.” 하였다.
○ 문학 황신을 돈녕부 도정에 승진시켜 통신정사로 삼고, 대구 부사 박홍장(박홍장)을 부사로 삼았다. 황신이 유경의 접반사로 왜군 진영에 있은 지 이미 2년이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또 이런 명이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황신은 조금도 언짢은 기색이 없었다. 8월 4일에 배를 타고 평조신(평조신)과 함께 대마도로 향하였다. 바다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배가 거의 뒤집힐 뻔하니, 뱃사람들이 모두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였으나, 황신만은 단정히 앉아 바다에 맹세하는 글을 지어서 바다에 제사를 지내었다. 그 글에, “사납고 악독한 태군의 진에서 이미 2년이나 절(절)을 가졌고, 교룡의 굴 위에 또 8월의 뗏목을 띠웠노라. 4천여 리의 사신길에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수고로움을 꺼리겠는가? 30년 공부가 바로 오늘에 도움을 얻기 위함이었다.”는 말이 있었다. 제문을 바다에 던졌더니 풍랑이 곧바로 진정되었다. 대마도에 이르러 명사와 함께 대판(대판)으로 향하였다. 《일월록》
○ 황신이 처음 왜군 진영에 갔을 때 대등한 예를 고집하며, “우리나라는 중국의 봉함을 받았으니 내지(내지)이지만, 너희 나라는 중국의 봉함을 받지 못했으니 교화를 받지 못한 나라이다. 내가 마땅히 위에 서야 한다.” 하니, 현소(현소)가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실제적인 일만을 귀하게 여기고 이와 같은 예절에 대한 일에는 실상 관심이 없다.” 하며, 황신을 윗자리에 앉히고 내려와 앉았다 한다. 《석실어록》
○ 방형 등이 일본에 이르니, 관백은 객관 성대하게 꾸미고 명 나라의 칙명(칙명)을 맞으려 하였다. 마침 하룻밤에 큰 지진이 나서 관백이 있던 5층 누각이 허물어져서 겨우 몸만 빠져 나왔고 궁녀 4백여 명은 눌려서 죽었다. 명사의 객관도 무너졌는데 명사는 붙들어 내어 겨우 화를 면하였으나, 방형의 천총 김가유(금가유)와 유경의 부하 주벽(주벽)과 가정 4명이 모두 죽었다. 3, 4천 호의 큰 마을이 함몰되어 큰 못이 되었고, 또 오색털이 비처럼 내린 변괴가 있었다. 드디어 다른 집으로 옮겼다.수길이 양사(량사)와 한두 번 만나서 처음에는 봉함을 받을 듯하더니 갑자기 크게 성을 내면서, “나는 조선 왕자를 석방하였으니 당연히 왕자를 보내어 사례해야 될 것인데, 사신은 벼슬이 낮으니 이것은 나를 멸시하는 것이다.” 하니, 황신 등이 왕명을 전하지 못하였다. 방형과 유경 등에게 돌아가라고 독촉하고, 또한 명 나라에 대해서 사은하는 예절도 없었으니, 이는 관백이 요구하는 것이 너무도 커서 봉공(봉공) 뿐만이 아니었는데, 유경과 행장이 일을 당해서 미봉책으로 구차스럽게 성사시키려고 명 나라와 우리나라에 실정을 알리지 않았으므로 일이 마침내 성취되지 못하고 말았다 한다. 《일월록》 《서애집》
○ 명사가 수길에게, “절하고 꿇어 앉아서 조서를 받으라.” 하니, 수길은, “무릎 사이에 종기가 나서 절을 하지 못하겠다.” 하면서 욕을 보이는 뜻이 많았다. 황신 등에게는 모욕이 더욱 심하였으며, 불손한 말로, “너희 나라에서 지은 큰 죄가 네 가지가 있는데, 왕자를 돌려보내준 뒤 지금까지 사례하지 않은 것이며, 사신을 벼슬이 낮은 사람으로 대충 충당한 것이며, 너희 작은 나라가 이전부터 우리를 업신여겨 세공(세공)도 바치지 않고, 조빙(조빙)도 보내지 않은 것이며, 또 명 나라 정사가 도망간 것도 너희 나라의 잘못이다.” 하였다.또 행장 등을 꾸짖어, “너희들이 오랫동안 조선에 있으면서 달리 해놓은 일도 없으면서 이제 화친을 약속하고 회군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였다. 청정이 다시 군사를 내어서 조선을 평정하자고 청하였으나, 가강(가강)과 행장이 힘껏 말렸다 한다. 《일월록》
○ 수길이 요구한 것이 일곱 가지였는데, 땅을 가를 것, 임금으로 봉할 것, 공물을 통하게 할 것, 인영(인영) 망룡의(망룡의)ㆍ충천관(충천관)을 보낼것, 하나는 선우(단우)가 한(한) 나라에 했던 것을 본따고자 한 것으로 거만하고 무례하였지만 화의를 말하는 자가 다만 봉왕ㆍ통공 두 가지만을 가지고 당사국(당사국)에 보고하였던 것이다. 《간이집(간역집)》
○ 행장이 황신을 향례에 청할 때마다 황신은, “사신의 할 일을 완수하지 못했으니 의리상 이 나라의 밥도 먹지 않아야 될 것인데, 하물며 잔치 대접을 받을 것인가.” 하였다. 행장이 또 양사(량사)에 요구하여 황신을 참석하도록 청하였으나 황신은 거절하고 듣지 않았는데, 행장은 끝까지 좋은 말로 대하였다. 《조야첨재》
○ 겨울 10월에 황신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왜국이 봉왕하는 것을 받지 않는 사정을 아뢰었다. 《조야첨재》
○ 조정에서는 황신의 장계를 보고서 청정이 재차 침입하려는 거조가 있음을 알았다. 이원익(리원익)이 입대하여 청야(청야)의 전술을 쓸 것을 아뢰자, 임금이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왜적을 막는 일은 경에게 맡기니 경은 호남과 영남으로 급히 내려가서 힘을 다하여 조치하여 내가 다시는 용만으로 피난가는 액운이 없게 하라.” 하였다. 원익도 울다가 눈물을 닦으면서 물러나왔다. 곧바로 영남에 내려가서 청야의 전술을 쓰고 호남에도 즉각 시행하도록 전령하여 백성들을 모두 부근의 산성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일월록》 《조야첨재》
○ 12월에 명사가 바다를 건너 돌아올 때, 행장이 호송하여 양산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황신은 사신으로 갔던 일이 성사되지 못하였으므로 남아서 일을 매듭짓고자 하였으나, 양사가, “그대는 국서를 전하지 않았으니, 완전히 돌아가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비록 조서는 전하였으나 봉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이것은 군명을 욕되게 한 것이다.” 하며 황신에게 함께 떠날 것을 재촉하였다.황신이 복명하면서 왜적이 다시 침입하려는 뜻이 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특별히 가선에 올려 주도록 하였다. 대간이 그가 사신으로 가서 일을 마치지 못했으니 공은 없고 죄만 있다고 탄핵하니, 임금은, “나는 그가 홀로 수고하였기 때문에 상을 주려는 것이다. 만약 황신이 사신으로 갔던 일을 성취시켰다면, 상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임금의 의향은 화의를 이루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던 것이다. 《조야첨재》
○ 정기원(정기원)과 유사원(류사원)을 북경에 급히 보내어 적군의 정세를 아뢰었다.

제도(제도)에 토적(토적)이 일어나다
 

이때 곳곳에 도적이 일어났다. 양주에는 강한 도적 이능수(리능수)가 있고, 이천에는 현몽(현몽)이 있었다. 충청도에도 역적들의 난리가 잇달아 일어났다.
○ 갑오년 봄에 홍산(홍산) 사람 송유진(송유진)이 모반하였다. 적들이 밀서를 전주에 보냈는데, “임금의 악함은 고쳐지지 않고 부당은 타파되지 않았다. 부역이 많고 중하니 생민이 편치 못하다. 목야(목야)에 용맹을 떨치니 비록 백이ㆍ숙제에게는 부끄러움이 있으나 백성을 위로하고 죄있는 자를 토벌한 것을 실로 탕(탕)과 무왕(무왕)보다도 빛나도다.”하는 구절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의병장 이산겸(리산겸)이 한 짓이라고 무고하였으므로 산겸이 전주 무군사(무군사)에 가서 변명하였으나 잡혀 죽었다. 《조야참재》 《조야기문》에는 계사년 12월이라고 되어있다. 산겸은 지함(지함)의 아들이다. 의병조에 적혀 있다.
○ 도원수가 호서 역적들에게 격문을 보냈는데, “이것은 진실로 장강(장강)을 만나지 못한 것이니, 어찌 반드시 우후(우후 한 나라 때의 사람으로 지방 수령이 되니, 도적이 자취를 감추었다.)를 기다리랴. 항복을 받는 장막을 설치해서 바른 길로 돌아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선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서 장차 어두운 곳에서 탈출하는 무리를 받아들이라.” 하였다.
○ 정월에 송유진은 참형을 당하였다. 그 무리 오윤종(오윤종)ㆍ김천수(금천수)ㆍ이춘복(리춘복)ㆍ김언상(금언상)ㆍ송만복(송만복)ㆍ이추(리추)ㆍ김영(금영) 등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고, 고발한 사람 홍우(홍우)ㆍ홍각(홍각)은 모두 당상에 가자 되었다. 《일월록》
○ 이때 유진이 도적의 무리를 불러 모아서 격문을 돌리고, 겁탈하고 노략질하니 서울이 진동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유성룡에게 대궐안에 들어와 숙직하도록 명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이런 위태롭고 염려스러운 때에 갑자기 대신을 불러들여서 시위하게 하면 더욱 백성들의 마음을 놀라게 할 것이옵니다.” 하니, 임금이, “경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아니하니 무원형(무원형)의 일을 보지 않았는가.” 하였다. 《조야첨재》
○ 갑오년 여름에 토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천명 만명으로 떼를 지었는데, 남원과 운봉(운봉) 등지에서 더욱 심하였다. 대낮에도 못된 짓을 자행하고 나타났다 숨었다 하면서 도적질하니 그 형세가 날로 성해져서 관가에서도 금하지 못하고 길도 막혔다. 이때 밀과 보리가 익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좀도둑질을 하므로 밭 지키는 사람이 많이 살해되었다.
○ 남원의 토적 김희(금희)와 영남의 도적 임걸년(림걸년)이 가장 횡포하였다. 도원수가 전라 병사 김응서(금응서)로 하여금 잡도록 하였더니 군사가 무너져서 물러났다. 원수가 다시 상주 목사 정기룡(정기룡)을 독포대장(독포대장)으로 삼아서 토벌하게 하였다. 8월에 기룡이 도적 이복(리복)의 목을 베자 그 무리들이 김희와 합하였다.
○ 남원의 토적 고파(고파)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몰래 이교점(이교점)에 왔다. 점 사람이 고발하므로 판관 김류(금류)가 군사 4백 명을 동원하여 점마을을 덮쳤으나 도적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밥을 지어 먹고 활을 힘껏 당기어 갑자기 나와서 관군을 쏘아대니 관군이 무너져 달아났고 김류도 물러났다. 도적들은 그가 돌아가는 길에 먼저 가서 매복하였다가 김류가 오는 것을 기다려 일시에 갑자기 활을 쏘아서 김류의 말 안장을 맞혔다. 김류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성중으로 달려 들어갔다.
○ 김희ㆍ강대수(강대수)ㆍ고파 등이 합세하여 약탈하였다. 운봉 현감 남간(남간)이 독포장 정기룡에게 통지하였더니, 기룡이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운봉으로 달려와서 모였다. 도적들이 한창 술자리를 베풀고 대대적으로 모여 있었는데, 관리와 군졸이 태반이나 도적의 무리였으므로 이쪽의 계획이 대부분 누설되었다. 기룡ㆍ김류ㆍ남간 등이 밤을 타서 나아가 포위하니 도적들은 이를 알고도 더욱 풍악을 치면서 싸울 작정을 하지 않았다. 해가 뜰 무렵에 적들이 고함을 치면서 포위망을 뚫고 나오니 관군이 무너져 달아났고 도적들은 느릿느릿 천천히 갔다.
○ 임걸년이 지리산의 사찰을 모두 무찔렀다.
○ 임실(임실)의 도적들도 노략질을 하였으나 관군은 여러 번 패전하였다. 도적이 드디어 도장(도장) 등을 죽이고 소굴로 돌아가면서, “전주ㆍ남원에서도 우리를 당해내지 못하는데 너희같은 쇠잔한 고을이 우리를 감히 도모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남원 등 일곱 고을 군사가 협력하여 회문산(회문산)에 모여 있는 도적을 잡는데 산에 불을 지르고 나무를 찍어내고 사면으로 공격하여 포위하니, 도적들이 지탱하지 못하여 높은 곳에 오르기도 하고 험한 곳에 웅거하기도 하였으나 연일 굶주리고 피곤하여 능히 싸우지 못하였다. 관군이 밤을 타서 백여 명을 잡아 죽이니 회문산 길이 비로소 소통되었다.
○ 을미년 봄에 영남 관군이 도내의 도적 김희ㆍ강대수를 토벌하여 죽였고, 장성(장성) 사람이 또 고파를 죽이니 길들이 비로소 소통되었다.
○ 병신년 7월에 홍산(홍산) 도적 이몽학(리몽학)이 군사를 일으켰다. 몽학은 성질이 본래 흉악하고 교활하였다. 처음에 부장이 되었다가 국사의 위태함을 보고 한현(한현) 등과 함께 몰래 반역을 꾀하여 불량배들을 불러 모으니, 이때 백성들이 난리와 관리의 침탈의 혹독함에 곤란을 겪고 있었으므로 도적을 따르는 자가 바람 앞에 풀이 쓰러지듯 하여 며칠도 안되어 군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임천(임천)ㆍ홍산ㆍ청양(청양)ㆍ정산(정산) 등 여섯 고을을 함락시켰으며, 임천 군수 박진국(박진국)은 포로가 되었다. 병사 이시언(리시언)이 군사를 내어 토벌하였으나 관군이 두 번이나 무너져서 도원수 권율에게 위급함을 보고하였다.몽학이 홍주(홍주)를 포위하니 목사 홍가신(홍가신)이 성을 굳게 지키고 대항하여 여러 날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몽학은, “한현이 만약 왔다면 목사의 머리는 깃대 끝에 달려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면서 군사를 옮겨서 덕산(덕산)으로 향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안도하였다. 적들이 서울로 쳐들어가겠다고 말을 퍼뜨리니 성안 인심이 흉흉하며 두려워하였고, 진위(진위) 수원의 백성들은 모두 떠날 태세로 짐을 메고 서 있었다.이때 적병이 지나가는 곳의 밭을 김 매던 자는 호미를 들고, 행상하던 자는 막대기를 들고 분주하게 기꺼이 따라 나섰다. 박진국이 적들 속에서 빠져나와 원수부에 고하기를, “서산 군수 이충길(리충길)이 그 아우 세 명과 함께 적당과 몰래 통하였다.” 하니, 원수가 감사를 시켜 공주(공주)에 잡아 가두게 하였다.
○ 권율이 전라 감사 이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여산(려산)을 경유하여 이산(니산)으로 향하다가 도중에 적군의 형세가 대단히 성하다는 말을 듣고 충용장군(충용장군) 김덕령(금덕령)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올 것을 명하였다. 또 영남에 명하여서 항복한 왜인을 거두어 거느리고 오도록 하였다. 호남 군사는 석성(석성)에 주둔하였다. 전주 아병(아병) 윤성(윤성)이 장사 십여 명을 뽑아서 밤에 적진에 들어가 전통(전통)을 쏘여 큰 소리로 호통치니 적군의 무리가 크게 놀라서 아우성치며 시끄러웠다.윤성이 고함치기를, “도원수와 전라 감사와 충용장군이 각각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이미 이곳에 이르렀으니 내일이면 마땅히 무찔러 죽일 것이다. 너희들 중에는 협박을 받아서 따라 온 자가 많을 것이니 만약 괴수를 목베어 와서 항복한다면 같이 죽는 것을 면하게 될 것이다.” 하니, 적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병기를 가지고 막사 안으로 돌입하여 몽학을 누운 자리에서 목베었다. 그러자 적군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한현은 수천 군사를 거느리고 홍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시언과 홍가신이 군사를 보내어 공격하여 현을 사로잡아 군중에서 목베었다. 그 뒤 33년에 청난공신(청난공신)으로 홍가신 등 네 사람이 녹훈되었다.
○ 이몽학은 경구(경구)에 사는 서자이다. 불량하여 행실이 좋지 않으므로 그 아버지에게 쫓겨나서 충청ㆍ전라도 사이를 왕래하였다. 한현(한현)이 선봉장이 되었을 때 그 군대에 예속되어 한현과 함께 난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몽학이 먼저 홍산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고을 원 윤영현(윤영현)을 사로잡고, 또 임천 원 박진국을 사로잡으니 인심이 와해되어서 연달아 6, 7 고을이 함락되었다. 한현은 일이 성사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호응하지 않았다. 몽학이 홍주로 진격하자 목사 홍가신은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어찌 할 방책이 없어 성문만 닫고 있을 뿐이었다.원수의 종사관(종사관) 신경행(신경행)이 마침 왔다가 격문으로 수사 최호(최호)를 불렀다. 최호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오니 인심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무장 박명현(박명현)은 날래고 용맹하며 꾀가 있는 사람인데 상제(상제)로서 그 고을에 있었다. 가신이 부르니 명현이 곧 군복을 입고 성에 들어왔으므로 성을 더욱 굳게 지키게 되었다.몽학이 처음에 군사를 일으킬 때 그 무리를 속여, “김덕령은 나와 약속하였고 도원수와 병사ㆍ수사도 모두 함께 계획하였으므로 반드시 우리에게 호응할 것이다.” 하니, 무리들이 그렇게 여겼는데, 홍주에 이르러서 적의 군사들은 수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속았다는 것을 알고 군사들의 기세가 꺾여서 밤중도 되지 않아 군대가 무너졌다. 홍산 현감으로 적에게 사로잡혔던 윤영현이 적진에서 뛰어나와 성 아래에 이르러, “도적들이 무너져 흩어지니 추격하시오.” 하고 소리쳤다.성중에서는 믿지 않고 영현을 묶어 들이게하였는데, 새벽이 되어 보니 적의 군사가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성중에서 비로소 후회하여 군사를 풀어서 추격하여 사로잡고 죽인 것이 많았고, 적의 부하 임억명(림억명)이 몽학을 목베어 바쳤다. 한현도 일이 발각되어 목베었다. 《자해필담(자해필담)》
○ 적은 이덕형(리덕형)의 공훈과 명망이 중하므로 문초 받을 때에 덕형을 끌어다 넣었으므로 덕형이 거적을 깔고 엎드려 40일 동안 처분을 기다렸다. <한음묘지(한음묘지)>
○ 그때 가신은 민병을 모으고 또 고을에 거주하던 무장 임득의(림득의)ㆍ박명현 등을 불러서 성을 지킬 계획을 하였는데, 남포(람포) 현감 박동선(박동선)이 사변 소식을 듣고 수사 최호(최호)에게 급히 보고하고, 군사를 내어 홍주를 구원하려고 하니, 최호가 동선에게 급히 와서 서로 의논하자고 하였다. 동선은 곧 군사를 모아 달려가서 곧장 홍주로 가자고 하였으나 최호는 수군은 육지에서 싸우는 군사가 아니라고 하여 어렵게 여기는 기색이 있으므로 동선이 큰 소리로, “이때가 진정 어떤 때인데 수군과 육군의 차이를 따지고 있소?” 하였다.드디어 수영의 군사를 모두 동원시키고 또 보령(보녕) 현감 황응성(황응성)에게 명하여 본 고을 군사를 모아서 함께 충주 성으로 들어갔다. 성중에서는 구원병을 얻어 기세가 자못 떨쳐졌다. 이에 적들이 어두움을 타고 도망쳤다. 《조야첨재》
○ 몽학의 무리가 도망쳐 흩어지니 명현 등이 성에서 나와 추격하였다. 권율이 수색하여 체포하도록 명령하니 고을에서 각각 수색 체포하였다. 권율이 즉시 심문하여 자복을 받고 모두 경옥(경옥)에 넘겼다. 임금은 동의금 윤승훈(윤승훈)을 직산(직산)에 보내서 죄의 경중을 심문하여 위협받은 어리석은 백성은 가벼운 쪽으로 석방하고, 경옥에 넘긴 자는 백여 명인데 처형한 자는 법과 같이 처자를 종으로 삼고 재산을 적몰하였다.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중외에 선유하였다. 《조야첨재》
○ 충용장군 김덕령이 곤장에 맞아 죽었다. 아래에 자세히 적었다.
○ 곽재우(곽재우)는 잡혔다가 은명을 받아 진에 돌아갔다.
○ 몽학이 선봉장이 되어 정산(정산) 쌍방축(쌍방축)에서 군사를 모았는데 거의 6, 7백 명이나 되었다. 7월 6일 새벽에 홍산(홍산)에 들어가서 현감 윤영현을 체포하고, 이어 임천으로 가서 또 군수 박진국을 체포하였다. 7일에 정산을 함락시키니 현감 정대경(정대경)은 몸을 빼어 달아났고, 8일에는 청양(청양)을 함락시키니 현감 윤승서(윤승서)가 또 도망쳤으므로 수일 동안에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9일에 대흥(대흥)을 함락시키니 군수 이질수(리질수)가 또 도망쳐 산중에 들어가서 보고서를 만들어 사람을 보내어 신평(신평)ㆍ대진(대진)을 거쳐 서울에 도달하여 비변사(비변사)에 바치게 하였으니 큰 길이 이미 막혔기 때문이었다. 적의 무리들 중에 병기를 가진 자는 군관ㆍ무사 등 수백 명 뿐이고, 그 밖에는 모두 시골 백성들로 맨손이었다. 9일에 적은 홍주를 침범하려 하였는데, 이보다 먼저 고을 관속 이희(리희)ㆍ신수(신수) 두 사람이 목사 홍가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거짓 항복하는 체하여 도적들의 행세를 자세히 정탐하여 오겠다.” 하고, 함께 광시역(광시역)으로 갔다.길가에서 거짓말로 적에게 불기를 원한다고 하니 대흥에서 서로 보자고 하여, 고을에 이르러 의자에 걸터 앉아서 불러보니, 적이 말하기를, “오늘도 아직 시간이 이르니 홍주로 공격해 가려고 한다.” 하였다. 이희ㆍ신수가, “홍주에서는 성을 굳게 지키고 있으니 갑자기 들어갈 수 없다. 우리들이 먼저 들어가서 다시 허실을 살피고 와서 보고한 뒤에 가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우리들도 성 안에서 호응하겠다.” 하니, 적이 그대로 머물고 출발하지 않고 그 이튿날 회보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으므로 늦게서야 출발하였다.이희와 신수는 돌아와서 가신에게 보고하고 성을 지키는 기구를 정비하여 더욱 견고하고 주밀하게 하였다. 고을에 살던 무장 박명현이 난이 일어난 처음부터 성에 들어오니 목사가 그를 의지하여 중하게 여겨 무사로서 유명한 자들이 많이 모였다. 체찰사의 종사관 신경행이 마침 내포(내포)에 왔다가 변고를 듣고 이웃 고을 수령들에게 전령하였고, 수사 최호(최호)도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러 모든 조치가 완비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이희와 신수가 꾀를 써서 도적의 공격을 늦추게 한 힘이었다. 명현이 무사를 보내어 적의 선봉을 맞아 공격하여 잡은 숫자가 많았다.적은 고을 성에서 2, 3리 쯤 되는 거리에 다섯 개의 진을 쳤는데 한 진에는 각각 천여 명이나 되었다. 저녁 때에 적장 몇 사람이 말을 달려 성 아래로 와서, “천운이 이와 같은데 성중 사람들은 어찌 나와서 응하지 않는가.” 하고 소리쳤다. 밤에 성중에서는 화포(화포)와 화전(화전)을 쏘아서 동문 밖 인가를 불사르니 불꽃이 하늘까지 비추었다. 병사 이시언(리시언)은 온양(온양)을 경유하여 바로 홍주를 향하여 이미 예산(례산) 무한성(무한성)에 도착하였고, 어사 이시발(리시발)은 유구(유구)에 진을 쳤으며, 중군 이간(리간)은 청양에 진을 치고서 모두 홍주로 오려 하니 군대의 사기가 크게 떨쳐졌다.11일 새벽에 적이 스스로 무너져 도망가므로 명현이 성중의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청양에 이르렀다. 적이 주둔하고서 항거하였으나 최호와 여러 장병들이 또 많이 도착하였다. 적장의 막하였던 김경창(금경창)ㆍ임억명(림억명)ㆍ태근(태근) 등 세 사람이 몽학의 머리를 베어 바치니 오합지졸이 일시에 흩어졌다.서울에 거주하던 겸사복 한현이 몽학을 지시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하고는 도망가서 면천(면천) 시골 집에 숨어서 성패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적의 무리로 잡힌 자들이 대부분 한현을 주모자라고 하므로 한현을 잡아서 국문하니 죄상이 모두 드러났다. 함께 모의한 자 중에 두드러진 자는 모두 체포되어 죽임 당하였다. 《갑진만록(갑진만록)》 ○ 《공신록》에는 신경행의 경(경)자가 경(경)자로 되어있다.
○ 처음에 역적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매우 급하니 훈련대장 조경(조경)이 소속 경병(경병) 8백 명을 거느리고 싸우러 가기를 자청하였고 도감도청(도감도청) 윤경립(윤경립)도 그를 따랐다. 11일에 서울을 떠나서 진위(진위)에 도착하였는데 적이 패하였다는 보고가 왔으므로 군사를 돌리도록 명령하였으며, 황해ㆍ강원ㆍ경기 군사들도 불렀는데 이때에 와서 모두 정지시켰다.김경창ㆍ임억명은 특별히 가선에 승진시키고 태근은 발탁되어 6품 실직을 제수받았는데, 얼마 뒤에 대간들이 경창은 두 번째 공이라고 논하여 통정으로 내렸다. 이희와 신수 등도 6품 실직에 제수되었으며, 이시언은 첫번째 공으로 최호와 함께 가선에 승진되고, 이시발과 홍가신은 통정이 되었다. 박명현이 처음에는 상을 받지 못하였다가 조정에서 여러 번 청한 뒤에 가선에 승진되었다.
○ 그때 혜성이 자미 제좌(자미제좌)를 매우 급하게 범하더니 평정되어 곧 사라졌다.
○ 갑진년 4월 청난공신에 홍가신ㆍ박명현ㆍ최호ㆍ신경행ㆍ임득의 다섯 사람이 녹훈되었다.

김덕령(금덕령)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정조 무오년에 충장(충장)이란 시호를 내렸다.
 

담양 부사 이경린(리경린)과 장성 현령 이귀(리귀)가 번갈아 글을 올려서 광주의 선비 김덕령을 감사에게 천거하니, 감사 이정암이 장계로 아뢰었다.
○ 계사년 윤 11월에 덕령이 담양에서 군사를 모아 수천 명을 얻었다. 도원수 권율에게 허락을 얻어 초승사(초승사)라고 인장을 쓰고 또 스스로 비장을 부절(부절)이라고 부르고 그 아래도 모두 사호(사호)가 있었다. 덕령은 어려서부터 남보다 뛰어난 용맹이 있었다. 이때 모친 상중에 있었으나 스스로 벼슬에 복직하여 그 군사를 일으키는 격문에, “광주의 상주 김덕령은 도내 여러 고을 모든 군자들에게 삼가 고한다. 나는 일찍부터 구속받지 않는 기질을 지니고 청영(청영)하려는 뜻이 간절하였다. 변고가 발생한 처음에 군중에 몸을 던지려는 생각이 깊었으나 늙은 어머니가 병에 걸려 해가 서산(서산)에 걸린 듯 하여 끝까지 봉양하고 싶은 심정 간절하고 옷자락을 끊는 짓을 차마할 수 없어서 두 해 동안 숨어 칼을 어루만지며 일본이 있는 동쪽을 돌아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는데, 이제는 어머니가 이미 별세하였으니 신하로서의 절의를 다할 수 있게 되었다. 상복을 입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갑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계책을 내는 것은 비록 표요(표요 한 나라때의 장군 곽거병(곽거병)으로 흉노를 쳐부수었다.)만 못하지만 의기는 사사로이 사아(사아 진(진) 나라 조적(조적)의 자(자))를 사모한다. 군사는 정예(정예)하기에 힘쓰고 많은 것에는 힘쓰지 않으니 오중(오중)의 장사 천여 명이 따라주기를 원하노라.” 하는 말이 있었다. 《일월록》
○ 덕령은 광주 석저촌(석저촌) 사람이다. 용맹과 힘이 뛰어나서 달아나는 개를 쫓아가 잡아서 그 고기를 찢어서 다 먹기도 하고, 말을 타고 달려서 작은 창문으로 한 칸 방에 들어갔다가 곧 말을 돌려서 뛰어 나오기도 하며, 누각 지붕 위에 올라가서 옆으로 누워 굴러서 처마를 타고 떨어져서 누각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일찍이 대숲 속에 사나운 범이 있다는 말을 듣고 활과 창을 가지고 가서 박두(박두)로 먼저 쏘니 범이 입을 벌리고 손살같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덕령이 창을 뽑아 대적하니 창날이 범의 턱아래로 나와서 땅에 박히므로 범은 꼬리만 흔들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이귀가 천거하는 글에, “지혜는 공명(공명)과 같고 용맹은 관우(관우)보다 낫다.” 하였다. 세자가 불러서 익호장군(익호장군)에 임명하였는데, 임금이 초승장군이라고 고쳐 불렀다. 일찍이 철퇴 두 개를 허리 아래 좌우에 차고 있었는데 무게가 각각 백 근이 되니 온 나라에서 신장(신장)이라고 하였다. 이보다 먼저 진주 목장(진주목장)에 사나운 말이 있어서 뛰쳐나가 곡식을 밟고 날 듯이 높이 뛰어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다. 덕령이 그 소문을 듣고 즉시 가서 굴레를 씌워 올라 타니 말이 잘 말을 들었다. 왜놈들이 듣고 몹시 두려워하여 ‘석저장군(석저장군)’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석저가 마을 이름인 줄 모르고 돌 밑에서 나온 줄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명신록》
○ 도유사(도유사)인 전 첨정 기효증(기효증)을 시켜서 격문을 썼는데, “장수와 군사들이 비록 싸움터에 달려가지만 부모ㆍ처자들이 모두 산성에 들어가 있으니,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있게 되면 그 군사를 되돌려 산성을 지키는 것이 실상 공격과 수비의 상책이다. 모아 둔 곡식은 한 편으로는 전장에 가는 군사에게 공급할 것이고, 한편으로는 성을 지키는데 준비하여야 될 것이다. 산성 안에는 입암(립암)과 금성(금성)이 서로 엇비슷한데, 입암이 더욱 나으니, 한 도의 주장(주장)이 주둔하는 곳이 될 것이다.” 하는 말이 있었다. 《일월록》
○ 처음에 덕령이 집에서 선비의 학업을 익혀서 겸손하고 자신의 재주를 숨겨서 자기 몸을 낮추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는 이가 없었다. 그 자부 김응회(금응회)도 강개한 선비로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토벌할 것을 여러 번 권하였으나 덕령이 주저하여 결정하지 못하다가 이때에 와서 평소부터 잘 지내던 장사 최담령(최담령) 등 수십 명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날랜 장사 5천여 명을 모집했다. 덕령이 타던 백마도 그 주인과 같아서 하루에 천 리를 갔다. 향하는 곳에는 대적이 없었으니 적군이 감히 싸우지 못하였다. 《조야첨재》
○ 갑오년 봄에 선전관을 보내어 선유하고 충용장군이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덕령이 세자를 전주에서 알현하니 세자가 북정(북정)에 나와서 그의 용맹을 시험하였다. 덕령은 투구와 갑옷차림으로 말을 달려서 곧장 담양으로 돌아갔다. 《조야첨재》
○ 덕령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남으로 향하였다. 그 선문(선문)에, “담양ㆍ순창(순창)ㆍ김해ㆍ동래ㆍ부산을 지나서 동해를 건너고 대마도와 일본 대판(대판)으로 향할 것이다.” 하는 말이 있었고, 이어 영남에 보낸 격문에, “뜻이 글공부에 있었지 활쏘기와 말타는 것은 본업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나이 이미 죽음에 가까웠으며 형도 싸움터에서 죽어서 잠깐 군중에 있다가 곧 돌아왔다. 위로는 나라의 수치를 생각하고 몇 번이나 한 밤중에 칼을 어루만졌으며, 아래로는 형의 원수를 분하게 여겨 매양 밥상에서 눈물을 흘렸다. 집안의 불행이 연달아 어머니도 이제 세상을 떠났다. 상을 대충 마쳤으니 이 몸을 나라에 바칠 수 있게 되었다.” 하였다.
○ 남원에 있을 때 광한루(광한루)에 주둔하여 일일이 군사를 조련하면서 본 고을의 유학 최담령을 별장(별장)으로 삼았다.
○ 진주에 주둔하였을 때 크게 둔전(둔전)을 설치하였는데, 원수가 전주 출신의 군사를 예속시키고 각도 의병들도 모두 충용군에 예속시키고 각도 의병들도 모두 충용군에 예속하도록 명하였다.
○ 갑오년 8월에 제찰사 윤두수에게 명하여 덕령을 독려하여 적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두수가 관하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원수 권율과 통제사 이순신등과 만나서 거제로 진군하였다. 곽재우가 사적으로 덕령에게 말하기를, “이번 거사는 장군이 원수에게서 일을 만든 것이라고 들었는데, 그렇소?” 하고 물으니, “아니오.” 하였고, “장군은 바다를 건너 왜적을 멸망시킬 방책을 궁리하였소?” 하니, “아니오.” 하였다. 또 “국가가 장군을 믿고서 이번 일을 시작하였고 군졸이 장군을 믿고서 싸움을 하려고 하는데, 지금 장군의 말이 이와 같단 말이오?” 하니, 덕령이 “나도 이번 일의 시말을 알지 못하오. 굴에 숨어 있는 적을 무슨 수로 제어하겠소.” 하였다. 재우가 탄식하며, “아아, 일을 알만하오. 오늘의 일은 장군의 용맹을 시험하려고 하는것일 거요. 장군의 명성은 오랑캐의 나라에도 널리 퍼져 흉악한 왜적이 움츠려 물러나는데 만약 가벼이 나가서 약점을 보이게 된다면 뒷일을 잘 처리할 방책이 전혀 아닐 것이오.” 하고 즉시 원수에게 급히 보고하여 도로 물러나서 후일의 변고에 대비하기를 요청하여 여러 번 청하였으나 원수가 듣지 아니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마지 못하여 배에 올랐다.적군은 깃발을 크게 벌려 세우고 성에 올라 대항하였다. 선거이(선거이)가 덕령에게, “장군의 용맹을 오늘 써먹을 만하오.” 하였다. 덕령이 익호기(익호기)를 두 개 꽂고 북을 울리며 전진하였으나 총알이 비오듯 쏟아지니 어떻게 할 계책이 없어서 군사를 퇴각하였다. 여러 장수들도 드디어 돌아왔다. 덕령이 이 때문에 뭇사람들의 촉망을 잃었고 더욱이 좌상(좌상 윤두수)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였다. 《일월록》
○ 을미년 9월 덕령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 동안에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하였고, 또 여전히 잔인하고 혹독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 윤근수가 잡아서 진주에 가두고 이어 조정에 아뢰었으므로 잡혀와서 구금되어 국문을 받았다. 다음 해 2월에 용서를 받아 진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언관이 허황된 말을 하는 수령을 탄핵하였는데, 임금이 “이 사람의 허황됨이 과연 장성 원 이귀와 같은 자인가. 익호에 대한 말은 다시는 입밖에 내지도 말라.”는 비답을 내렸다.
○ 병신년 가을에 이몽학의 난리 중에 문서를 얻었는데 김ㆍ최ㆍ홍의 세 성이 적혀 있었다. 한현(한현)이 붙잡히자 원수가 신문하니, “김덕령ㆍ최담령ㆍ홍계남(홍계남)이라.”고 공초하였다. 또, “곽재우와 고언백(고언백)도 모두 나의 심복이었다.”고 하였다. 권율이 곧 위에 구체적으로 아뢰고 군관을 나누어 보내서 체포하게 하였다. 이때 덕령은 역적을 토벌하라는 원수의 명을 받고 진주에서 운봉으로 갔다가 호남 우도가 평정되었음을 듣고 본가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권율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진에 돌아갔는데 곧 잡혀 진주 옥에 갇혔다.임금이 권율의 장계를 보고 조정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니, 어떤 사람은, “덕령은 용력이 뛰어나니 소홀히 해서는 안되니 체찰부로 하여금 군문에 불러오게 하여서 사로잡는 것이 편리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한 미친 사람과 같은 서생이니 속임수로 잡을 것이 아니라 전례대로 선전관과 도사를 보내어 잡아오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선전관은 무인이니 단독으로 맡겨 보낼 수 없다.” 하고 승지 서성(서성)으로 선전관과 도사를 거느리고 가도록 하였다. 덕령이 이미 옥에 갇혔으므로 드디어 금부로 잡아와서 국문하였다. 재우 등도 잡혀왔으나 오래지 않아서 은명을 받고 진으로 돌아갔다.덕령이 까닭없이 체포되니 원통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으나 요직에 있는 이가 모두 꺼려서 한 사람도 구해주는 자가 없었다. 혹 말을 퍼뜨려, “덕령은 사람 죽이기를 삼을 베듯 하였으며 또 모반할 상(상)이 있으니 죽이지 않으며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하고, 또 형리에게 부탁하여 속히 죽이도록 시키니 26일 동안에 형장을 치며 심문하기를 여섯 번이나 하여 정강이 뼈가 이미 부러졌는데도 오히려 무릎으로 걸어갔다.마침내 볼기에 형장을 쳐서 아직 목숨만 남아있는 상태였으나 행동거지가 평상시와 같아서 조용히 공초를 받았는데, “신이 만약 다른 뜻이 있었다면 어찌 당초에 원수의 명을 받고 운봉에 왔겠으며, 또 명을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서 진으로 돌아갔겠나이까. 다만 신에게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나이다. 계사년에 자모가 별세하였는데 3년 상의 슬픔도 잊고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에 흥분하여 정을 끊고 상복을 벗어 던지고 칼을 잡고 굳건히 나섰으나, 여러 해 동안 종군하여 조그만한 공도 세우지 못하였으니 충성도 이루지 못했으면서 도리어 효도에만 어겼나이다.허물은 이것 뿐이오니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지만 구구한 충정은 천지가 굽어 살피옵나이다. 다만 죄없는 최담령만은 죽이지 마시옵소서.” 하였다. 임금이, “덕령은 형장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니 참으로 적이다.” 하였다. 옥문을 출입할 때 그의 용력을 의심하여 큰 나무 토막에다 묶고 좌우에서 에워싸고 다녔는데 마침내 형장 아래에서 죽었다. 《조야첨재》
○ 덕령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만에 명성이 중국과 오랑캐의 나라에 널리 퍼졌다. 전에 호남에 있을 때 맨손으로 범 두 마리를 쳐서 잡아 왜놈에게 자랑하며 팔았더니 왜놈들이 두려워하였다. 청정(청정)이 그 위엄있는 명성을 듣고 몰래 화공을 보내어 그의 얼굴을 그려다가 보고는, “참 장군이다.” 하면서 항상 스스로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뒤에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고자 하여 충용장군을 면대할 수 있도록 원수부에 청하니, 원수는 집에 돌아가서 상을 마치게 하였다고 대답했다. 마침내 그가 죽었다는 것을 자세히 알고 술을 마시며 기뻐 뛰면서 “호남과 호서는 걱정없다.”고 하였다. 《난중잡록(란중잡록)》 《조야첨재》
○ 이 때 당시의 정승이 그의 위엄있는 명성을 꺼려서 이 일(역적의 문초에 이름이 나온 것.)로 인하여 죽이고자 하여 국문하는 형벌이 몹시 혹독하였다. 덕령은,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역적의 새끼를 따라서 모반하였겠는가.” 하며 노하여 몸을 떨치니 쇠사슬이 모두 끊어졌다. 《명신록》
○ 역적의 무리들이 덕령을 끌어들였을 때 임금이 크게 놀라서, “덕령은 용맹이 삼군에 으뜸가니 만약 잡아오지 못한다면 어찌하나.” 하니, 서성(서성)이 아뢰기를, “한명련(한명련)도 날래고 용감하니 명련을 시켜 도모하게 하고 김응서(금응서)로 하여금 항복한 왜인 50명을 거느려서 돕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서성에게 잡아올 것을 명하였다. 서성이 전주에 이르니 권율이 벌써 진주에 가두어 놓았다. 권율도 덕령이 명을 거역할까 염려하여 비밀히 성윤문(성윤문)을 시켜 도모하게 하였다. 윤문이 비밀히 군무에 대해 의논할 것이 있다고 덕령을 청하니 덕령이 혼자서 말을 타고 왔다.윤문이 그의 손을 잡고, “조정에서 그대를 잡으라는 명이 있네.” 하니, 덕령이 즉시 꿇어 앉으면서, “임금의 명이 계시는데 어찌 이와 같이 도리어 나를 접대하는가.” 하였다. 윤문은 그의 원통함을 알고 다만 그의 두 손에만 자물쇠를 채워서 옥으로 보냈다. 서성은 덕령이 이미 잡혔다는 것을 듣고 장계를 올렸는데, “권율이 덕령에게 몽학을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나흘이나 머뭇거리면서[사일지류] 성패를 바라만 보고 있었으므로[관망성패]가두었다.”고 하였다. 이 여덟 글자가 드디어 덕령의 죄안이 되어서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서성을 허물하였다. 《자해필담》
○ 덕령은 단정하고 바르기가 선비와 같았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거문고타고 노래하는 것을 영웅의 일이 아니니 / 현가불시영웅사
칼춤을 추면서 모름지기 장수의 옥 장막에서 노닐 것이다 / 검무요수옥장유
훗날 평난되어 칼을 씻고 돌아온 뒤에 / 타일세병귀거후
강호에서 낚시질 하는 외에 다시 무엇이 구하리 / 강호어조경하구

하였다. 그의 뜻을 가히 알 수 있는데 미쳐 성공하기도 전에 명성이 너무 성해져서 마침내 비명에 죽고 말았으니 남쪽 사람들이 지금도 그를 슬퍼한다. 《명신록》 《조야첨재》
○ 덕령이 진주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 지낸 제문이 문장은 강개스럽고 뜻은 창달 간절하였으니, 미친 서생이니 무사니 하는 명칭으로는 그 사람을 단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때 권인룡(권인룡)이란 사람도 신력이 있어서 덕령 다음 갔으나, 뒤에 그 또한 죄 아닌 죄로 역적으로 몰려서 옥에서 죽었다. 《일월록》
○ 어떤 말에는 조정에서 덕령을 의심하여 원수에게 가만히 불러서 영문에 오거든 곧 묶으라고 명하려 하였는데, 서성이, “덕령은 반역자가 아니니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서 잡아도 곧 잡힐 것인데 하필 거짓 꾀를 쓸 것이오.” 하였다. 임금은 서성의 쉽게 말하는 것을 의심하여 성을 내면서, “네가 가서 잡아라.” 하였다 한다.
○ 권필(권필)이 일찍이 꿈에 작은 책 한 권을 얻었는데 바로 김덕령의 시집이 었다. 그 첫머리 한 편은 취시가(취시가)인데, 그 구절은,

취했을 때 노래하노니 / 취시가
이 곡을 듣는 사람이 없구나 / 차곡무인문
나는 꽃과 달 아래에서 취하고자 하지도 않고 / 아불요취화월
나는 공훈도 세우고자 하지 않는다 / 아불요수공훈
공훈을 세우는 것은 뜬 구룸과 같고 / 수공훈야시부운
꽃과 달 아래에서 취하는 것도 뜬 구름일세 / 취화월야시부운
취했을 때 노래하노니 / 취시가
내 마음 알아 주는 사람 없구나 / 무인지아심
다만 긴 칼을 잡고 밝은 임금 받들기를 원하노라 / 지원장검봉명군

하였다. 권필이 잠이 깨서 매우 슬퍼하며 한 수의 절구를 지었으니,

장군이 옛날에 창을 잡았으나 / 장군석일파금과
장한 뜻이 중도에서 꺾여지니 운명인걸 어찌할거나 / 장지중최내명하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이 / 지하령영무한한
분명 취시가 한 곡조로 나타냈구료 / 분명일곡취시가

하였다. 《석주집》

정유년에 왜구가 두 번째 나오다
 

정유년 정월에 왜장 청정 등이 병선 만여 척을 거느리고 건너와서 다시 서생(서생) 도산(도산) 등 옛 진을 다시 수축하면서, “왕자는 와서 사례하라.”고 소리쳤다. 권협(권협) 등을 보내어 주문을 가지고 중국 조정에 가서 사태의 급함을 보고하였다. 촬요(촬요)
○ 도원수 권율이 대구에 머물면서 각 도의 군사 2만 3천여 명을 모아서 왜적이 오는 길목에 장수를 정하고 군사를 나누어 막게 하였다. 남원 부사 최렴(최렴)이 산성 별장(산성별장) 신호(신호)와 함께 일곱 고을의 군사를 모아서 교룡산성(교룡산성)을 수축하였다.
○ 통제사 이순신(리순신)이 잡혀 갇히고, 전라 수사 원균(원균)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 처음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본진이 궁벽된 곳에 있어서 방어하기 어렵고, 한산도(한산도)는 거제 남쪽 30리에 있는데 산세가 둘러져서 배를 감추기에 편리하고, 왜적의 배가 호남을 침범하려고 하면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하게 되니 진영을 한산도로 옮기도록 청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그대로 따랐다. 통영이 뒤에 거제로 옮겨졌고 또 고성(고성) 농포(롱포)로 옮겨졌다.
○ 계사년 8월에 조정의 의논이 삼도 수군이 서로 통솔이 되지 않으므로 특별히 통제를 두어서 주관하도록 청하였다. 드디어 순신으로 삼도 수군 통제사를 겸하게 하고 본직은 그냥 맡게 하였다. 순신은 육지에서 군용을 공급하기는 곤란하다고 여겨 체부(체부)에 청하기를, “다만 일면의 바다와 포구를 부속시켜 주면 양식과 기계를 자족하게 할 것이오.” 하였다. 이에 바다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어 팔아서, 곡식 수만 섬을 쌓게 되고 군영 막사와 기구가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백성을 모집하여 살게 되니 하나의 커다란 진이 되었다.
○ 이보다 먼저 청정 등은 우리나라 수군을 두려워하였는데 더욱 순신을 두려워하였으므로 반간(반간)의 계책을 써서 순신을 쫓아 버리려고 하였다. 행장이 요시라(요시라)를 시켜 김응서(금응서)의 진에 왕래하게 하여 정성을 바치고 정의를 통하여 조선 사람이 되기를 원하니 응서가 믿고 특별히 잘 대접하고 이어서 원수부에 보고하여 넉넉히 포상을 하였다. 그 뒤로부터는 왕래가 잦았으며 오면 우리의 의관을 입고 적진의 소식을 일일이 보고하였다.
○ 갑오년 9월에 행장과 의지(의지) 등이 요시라를 응서에게 보내어 함안에서 만나 강화할 것을 요청하여 왔으므로 응서가 원수부에 보고하니 권율이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는 이에 응서를 시켜 적군의 정세를 탐지하게 하였다. 응서가 군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도착하니 현소(현소)ㆍ죽계(죽계)ㆍ조신(조신) 등이 왜군 백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오고, 조금 뒤에 행장과 의지가 왜군 3천여 명을 거느리고 대포 세 방을 쏘면서 왔다.차고 있던 칼을 풀고 걸어 들어와서 응서와 마주 앉아 명 나라 조정의 봉공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다. 행장은 강화의 일이 성사되지 않은 허물을 청정에게 돌리고 날이 저물자 자리를 피하고 돌아갔다. 응서의 일명은 경서(경서)이다. 뒤에 전라 병사로 있다가 이 일에 연좌되어 파직당하였다. 을묘년에 은명을 입어 북병사(북병사)에 임명되었는데, 무오년 심하(심하) 전투에서 항복하였다가 죽었다.
○ 이때에 이르러 행장이 또 요시라를 시켜 응서에게 비밀히 말하기를 응서는 이때 전라 병사였다. “이번 강화의 일이 성사되지 못한 것은 청정 때문이므로 나는 청정을 매우 미워하고 있다. 아무날에 청정이 바다를 건너 올 것인데, 조선에서는 수전을 잘하니 만약 바다 가운데서 마주치면 가히 승리할 것이요.” 하므로 응서가 급히 장계를 올렸다. 임금이 비국의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윤근수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오.” 하였으나, 황신은, “두 적이 비록 사이가 나쁘다고는 하지만 신은 예로부터 기이한 모략과 비밀의 계책이 적국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소.” 하였다.임금이 영상 유성룡을 돌아보면서, “이 말이 옳다고 생각되는데 경의 의향은 어떤가.” 하였다. 이에 황신을 위유사(위유사)에 임명하고서 비밀히 순신에게 알렸다. 순신은, “바닷길이 험난하므로 적군은 반드시 복병을 많이 놓아 두고서 기다릴 터이니 배를 많이 거느리고 가면 적이 모를 리가 없고 적게 거느리고 가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나가지 않았다. 요시라가 또 와서 응서에게, “청정이 지금 이미 육지에 내렸는데 어찌하여 바다 가운데에서 막아 기다리지 않았던가.” 하며, 거짓으로 매우 애석하다는 듯한 뜻을 보였다.이 일이 위에 알려지자 조정의 의논은 순신을 허물하고 대간은 잡아서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전 현감 박성(박성) 현풍(현풍)사람 도 소를 올려 순신을 목베어야 된다고 극단적으로 말하였으나 이원익(리원익)이 그렇지 않음을 밝혔다. 임금이 사성(사성) 남이신(남이신)을 한산으로 보내어 사실을 염탐하게 하였더니 돌아와서 아뢰기를, “청정이 바다 섬에서 7일을 머물렀으니 우리 군사가 만약 갔더라면 그를 체포하여 왔을 것인데 순신이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쳤나이다.” 하였다. 요시라가 본국에 말을 전하기를, “청정이 한 척 배로 바다를 건너오다가 풍랑을 만나 수일 동안 배를 정박해놓고 머물렀으므로, 내가 급히 통제사 이순신에게 보고하였으나 이순신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나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순신이 허황되게 큰 소리만 치면서 군부를 속인다고 의심하던 터여서 이에 잡아와서 의금부에 가두고 대신에게 그 죄를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판중추 정탁(정탁)이 아뢰기를, “순신은 명장이니 죽여서는 안 되며, 군사 기밀의 이롭고 해로움은 멀리서는 측량하기가 어려우니 그가 진격하지 않은 것은 필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후일의 공을 세우도록 요구하십시오.” 하였다.
○ 고문을 한 차례 하고 사형을 감해서 종군하게 하였다. 남쪽 백성들이 한산을 보루로 삼고 순신을 간성(간성)으로 삼고 있었는지라 순신이 잡혀가는 길에 남녀노소가 모두 길을 막고 목놓아 울었으며 파직당하였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사람들이 모두 안정된 뜻이 없었다.
○ 행장은 일찍이 대마도 백성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섬겼으므로 이때에 와서 우리나라 사람 보기를 부끄러워하여 거짓으로 정의를 통하기를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포로가 된 왕자를 탈출시키고자 하여 응서에게 가서 의논하게 하니 수길이 이로 인하여 이순신을 제거할 간책을 썼던 것이다.
○ 순신은 유성룡이 천거한 사람이었다. 성룡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들 곧 북당(북당)이다. 이 떠들썩하게 순신이 군사의 기회를 잃었다는 것으로 죄를 만들었으니, 그 뜻은 성룡에게 누를 끼치려는데 있었다. 그때 의논이 준엄하여 사람들이 모두 목을 움츠리고 있었는데 정탁만이 차자를 올려 순신의 무죄를 극력으로 말하여 죽지 않게 되었다. 《국포쇄언(국포쇄언)》
○ 정유년 3월에 임금은 순신의 공과 죄가 비등하다고 하여 목숨을 용서하고 원수부에서 종군하게 하였다.
○ 순신의 늙은 모친이 아산(아산)에 있었는데 순신이 옥에 갇혔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하고 놀라서 죽었다. 순신이 옥에서 나와 아산을 지나면서 상복을 입고는 곧 권율의 진주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듣고 모두 슬퍼하였다.
○ 이때 조정에 있던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나뉘어지고 갈라짐이 더욱 심하였으니, 서인은 원균을 두둔하고 동인은 순신을 두둔하여 서로 공격하면서 국사는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조야첨재》 ○ 순신을 모함한 자는 다 동인의 북당이었으니, 이 말은 그릇된 것이다.
○ 원균이 처음에는 순신에게 붙어서 연명으로 승전을 아뢰었는데, 순신이 통제사가 되어서는 원균이 그 밑에 있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순신에게 배반하려는 마음을 먹고 통제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와서 원균이 한산에 도착하여 순신의 법령을 다 변경하고 사납고 괴팍하여 제 마음대로 하니 군졸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술을 즐기고 주정이 심하여 형벌이 법도가 없으니 호령이 시행되지 않았다.
○ 행장이 또 요시라를 보내어 응서를 속여, “왜선이 아무 날에 더 오게 되어있지만 조선 수군이 오히려 맞아서 공격할 수 있을 것이오.” 하니, 응서가 그 말을 믿고 원수에게 보고하여 원균에게 진군할 것을 재촉하였다. 원균이 함대를 모두 거느리고 전진하다가 적군을 보고 물러나 가덕도(가덕도)에 배를 대고 있는데 적군이 덮쳐 치니 크게 패하여 칠천도(칠천도)까지 쫓겨왔다. 권율이 격문으로 원균을 불러 곤장을 쳐서 다시 진군하기를 독촉하였다. 원균이 군중에 돌아와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누워있는데 한밤중에 왜적이 습격하니 군사가 무너지고 원균은 달아나다 죽었다. 가덕도는 웅천(웅천)에 있고 칠천도는 거제에 있다. ○ 《조야첨재》
○ 6일에 수군의 여러 장수가 한산에서 바다로 내려가서 적군과 교전하였는데 보성(보성) 군수 안홍국(안홍국)이 패하여 죽었다. 《일월록》
○ 적군의 배가 그 달 초순부터 잇달아 건너왔다. 원균이 여러 장수에게 나아가 염탐하게 하였다. 수군 여러 장수가 웅천 앞바다에 적군과 만나 싸웠는데 우수사 배설(배설)이 선봉이 되어서 적선 십여 척을 격파하고 군량 2백여 섬을 빼앗았는데도 적의 형세가 더욱 성하였으므로 군사를 물리고 구원병을 청하였다.
○ 권율이 곤양(곤양)에 도착하여, 원균이 자신은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군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기만 하였다고 전령으로 불러와서 곤장을 치며, “국가에서 너를 높은 벼슬로 대우하는 것이 한갖 편안하게 부귀만을 누리게 해서인가.” 하였다. 그날 밤에 원균은 분한 마음을 품고 물러나와 한산에 이르러 남아서 지키고 있는 군사들까지 쓸다시피 다 거느리고서 급히 부산으로 갔는데 적선 천여 척이 또 나왔다. 원균이 노젓는 군사를 독촉하여 배를 전진시키니 적군이 파도에 흩어져서 지탱하지 못하는 듯하므로 원균이 기세를 타고 전진하여 그칠 줄을 몰랐다.뱃사람들이 모두, “물마루[수종 부산과 대마도 사이에 있는 지점으로 물결이 가장 센 곳]는 벌써 지났고 대마도에 가까워져서 배를 부리기가 불편하니 우리는 살 길이 없다.” 하였다. 원균이 듣고 급히 노를 돌리라고 명령하였으나 배가 역류하는 물길을 넘어선 까닭에 노를 저어도 소용이 없었다. 전라 우수사가 거느린 배 일곱 척이 먼저 동쪽으로 표류하여 흘렀다. 원균이 모든 배를 독촉하여 급히 물러나게 하고 밤낮으로 노를 저어서 겨우 가덕도(가덕도)에 도달하였다. 적군은 우리 군사가 형세를 잃었음을 알고는 곧 신ㆍ구(신구) 전선을 내어 엉크러져 쫓아오므로 우리 군사는 영등포로 물러왔는데 군사들은 땔나무와 물을 다투어 구하였다.그 전날 밤에 적군이 작은 배를 내어 육지로 내려와서 복병을 시켰다가 이때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니 포성소리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원균 등은 창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급히 배를 저어서 온라도(온라도)로 물러났으나 적군이 크게 몰려왔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하늘과 물이 어둡고 처참하기까지 하였다. 원균이 밤에 여러 장수들을 모아서 의논하기를, “적의 형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는 것이다. 오늘의 일은 한결 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뿐이다.” 하니, 배설이, “용맹할 때는 용맹하고 겁을 낼 때는 겁내는 것이 병가(병가)의 요긴한 전력이오.부산 바다에서 세력을 잃었고 영등포에서 패전하여 흉적이 벌써 가까이 왔는데 우리 형세는 외롭고 약하기만 하니, 용맹은 부릴 수 없고 겁내는 것만이 쓰일 수 있소.” 하였다. 원균이 성을 내며, “죽고야 말 것이니 너는 여러 말 말아라.” 하였다. 배설은 자기 배에 돌아와서 자기의 휘하 여러 장수와 함께 비밀히 의논하고 군사를 물리기로 하였다. 한밤중에 적군이 몰래 비거도(비거도)로 하여금 우리 배 사이를 가만히 뚫고 들어와서 형세를 살피고 또 전선 5, 6척으로 우리 배 주위를 살며시 돌아 다녔으나 장수나 군사들이 모두 몰랐다.7월 16일, 날이 밝자 복병선(복병선)에 먼저 불이 붙어 격파되니 원균이 크게 놀라서 은밀히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며 불화살을 쏘아서 변을 알렸다. 갑자기 각각 우리 배의 옆에서 적선이 갑자기 뚫고 들어와서 철환이 쾅쾅 떨어지니 군졸들이 낯빛이 변하였다. 원균이 비로소 적의 습격을 깨닫고 쫓아가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여러 군사를 독촉하여 닻을 내리고 접전하도록 하였는데, 형세가 산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배설은 바라보기만 하다가 퇴각하려 하자 원균이 군관을 시켜 잡아오게 하니 배설이 항거하여 싸움이 한창일 무렵에 관하의 배 열두 척을 거느리고 달아나 버렸다.원균도 힘을 지탱할 수 없어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닻을 올리고 흩어져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다. 적군이 쫓아와서 마구 죽이니 원균 등이 다 죽었고, 여러 장수와 군인의 죽은 자를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원균이 본래 살이 쪄서 하루에 술 한 말과 생선 다섯 묶음을 먹었으므로 배가 무거워 걸으면서 싸우는 것을 잘하지 못하였다. 나무 밑에 앉아 쉬다가 적에게 살해당하였다.
○ 이억기(리억기)ㆍ최호(최호) 등은 물에 빠져서 죽고, 전선 백여 척도 모두 함몰되었다.
○ 배설이 전선을 거느리고 달아났으므로 그 군사들만은 온전하였다. 한산도에 돌아와서 피난가고 남은 백성으로 섬에 살고 있는 자는 적군을 피해 가도록 하고 불을 놓아 막사ㆍ양곡ㆍ군기 등을 모두 태우니, 순신이 모아서 몇 해 동안 쓸 수 있었던 양곡ㆍ병기가 모두 재가 되었다.
○ 적군이 이긴 기세로 서쪽으로 향하니 남해(남해)와 순천(순천)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두치진(두치진)에 이르러 뭍으로 내려와서 길게 휘몰아치니 전라도와 충청도가 크게 진동하였다.
○ 권율이 이순신에게 진주에 가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 다시 기용되었다.

이순신 진도(진도)에서 이기다
 

○ 한산에서 패전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놀래었다. 임금이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문의하였으나 두려워하고 정신없어 대답할 바를 몰랐다. 경림군(경림군) 김명원과 병조 판서 이항복이, “지금의 계책으로는 오직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를 시켜야만 됩니다.” 하였다.임금은 그 말에 따라서 이순신의 벼슬을 도로 제수하여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이때 순신은 진주를 지나서 서쪽으로 구례를 향하다가 적선이 이미 나루 어귀에 정박하여 있는 것을 보고 곡성을 지나서 서해로 향하여 갔다. 그때 배설이 열 두 척 병선으로 물러나 진도 벽파정(벽파정)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순신이 그 곳으로 달려갔다. 《일월록》
○ 8월에 적선이 악양(악양)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영남 앞바다 5, 6십 리에 배가 꽉 차서 바라보니 바다가 없는 듯하였다. 9월에 수가(수가)가 섬진강(섬진강)을 경유하여 한산에 들어와서 먼저 천여 척 배로 서해로 향하였다. 《일월록》
○ 9월에 적의 괴수 뇌도수(뢰도수)가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진도에 도착하였는데, 이순신은 명량(명량)에 머물며 진을 치고 피난선 백여척을 모아서 가짜로 성세를 이루었다. 적이 이르니 순신은 거짓으로 싸우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적은 우리 군사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 다투어 와서 덮쳐 둘러싸고 바싹 가까이 와서 싸웠다. 갑자기 장군의 배에서 태평소를 불고 깃발이 일제히 일어나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불이 적의 여러 배에 옮겨 붙었다. 순신은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공격하니 죽는 자가 삼대 쓰러지듯 하였다.먼저 뇌도수의 머리를 베어서 돛대 위에 걸어 놓으니 장졸들은 용기를 뽐내고 의기가 백배나 되어 달아나는 자를 쫓아서 수백여 명을 베어 죽였는데,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셀 수없이 많았다. 적군은 겨우 십여 척으로 도망갔고 우리 배는 모두 탈이 없었다. 그 뒤에 적이 싸움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명량(울돌목) 전투를 말하였다. 《일월록》 《조야기문》에는 적장이 마다시(마다시)라고 기록되었다.
○ 처음에 순신이 조정의 명을 받고 단기로 달려서 회령포(회녕포)에 도착하니 그때는 바로 새로 패전한 뒤인지라 전선과 기계가 전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도중에 경상 수사 배설을 만났는데 배설이 거느린 전선은 다만 8척 뿐이었고 또 녹도(록도)에서 전함 한 척을 얻었다. 배설이, “지금은 일이 급하니 배를 버리고 뭍에 올라서 호남 군진에 의탁하여 싸움에 조력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낫다.” 하였으나, 순신이 듣지 않았는데, 배설은 과연 배를 버리고 가버렸다. 순신이 전라 우수사 김억추(금억추)를 불러서 전함을 수습하게 하고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함께 왕명을 받았으니 의리상 마땅히 생사를 같이 해야 될 것이다.나라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 번 죽는 것을 아까워 하겠는가, 다만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광일 것이다.” 하였다. 이때 경상도와 전라도가 모두 적의 소굴이 되어서 행장은 육로에 있었고 의지는 수로에 있었다. 수군이 탕진(탕진)된 뒤에 순신은 일어나서 홀로 병들고 쇠잔한 남은 군사로 열 세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벽파정 앞바다에서 머뭇거리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어느 날 갑자기 군중에 영을 내려, “오늘 밤에 적들이 반드시 우리를 습격할 것이니 각기 군사를 정돈하고 엄중히 대비하라.” 하였는데, 그날 밤에 적들이 과연 군사를 몰래 거느리고 오니 순신은 모든 군사들에게 움직이지 말도록 하였다.이때 달은 서산에 걸려 산그림자가 바다에 비쳐 절반이 약간 그늘져 있었는데 적선이 그늘져 컴컴한 속으로 와서 우리 배에 접근하려 하였다. 이때 증군에서 화포를 쏘면서 함성을 지르자 모든 배들이 따라 응하니 적군은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일제히 조총을 쏘니 소리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순신은 싸움을 더욱 힘차게 독려하니 적군이 드디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 순신이 군사를 돌려서 우수영 명량 앞바다에 있는데 날이 밝아오자 적선 5, 6백 척이 바다를 가리우고 왔다. 적의 장수 마다시(마다시)는 본래 수전을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때 호남 백성들이 배를 타고 피난가던 자가 모두 진 아래 모여서 순신을 의지하여 생명을 보전하고 있었다. 순신은 먼저 피난선에 명령하여 차례로 물러나서 차례로 늘어서 진을 쳐서 가짜 군사를 만들어 바다 가운데를 들락날락하게 하고, 자신은 전함을 거느리고 적군 앞을 가로막고 진하니 깃발을 단 층각배가 바다 위에 가득히 찼으므로 우리 군사가 보고 얼굴빛이 변하였다.그때 아침 조수가 막 밀려 나가는 중이라 항구에는 물결이 사나웠다. 거제 현령 안위(안위)가 조수를 타고 내려갔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배가 화살처럼 나아갔다. 바로 적진 앞에서 충돌하니 적은 사면으로 에워쌌으나 안위는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싸웠다.
○ 순신은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안위의 뒤를 잇대어서 먼저 적선 삼십 일 척을 격파하니 적이 조금 퇴각하였다. 순신은 돛대를 치며 군사를 맹세하고 이긴 기세를 타고 전진하였다. 적은 죽도록 대들었으나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군사를 다 몰아서 도망쳤다.순신은 영화도(형화도)에 진을 옮겼다. 그때 한산도 여러 장수가 각각 도망쳐 숨어서 본도 피난민들과 함께 여러 섬에 도망가 있었다. 순신은 날마다 장교들을 보내어 여러 섬에 알리고, 흩어졌던 군사를 불러 모아서 전함을 만들고 기계를 준비하여 소금을 구워 팔아서 두 달 동안에 수만여 섬의 곡식을 얻었으며 장수와 군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니 군사의 형세가 다시 떨쳐졌다. 무술년 2월 17일에 고금도(고금도)로 나아가서 진을 쳤다.
○ 그때 배설은 교만하고 패려하여 버릇을 고치지 않았으며 제 마음대로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여 성주 본 집으로 돌아갔다. 순신이 사유를 갖추어 장계를 올렸더니 뒤에 잡혀서 죽임을 당하였다. 《일월록》

황석산성(황석산성)에서 패전하다 곽준(곽준)ㆍ조종도(조종도)
 

○ 수길은 또 금오(금오)를 대장으로 삼아 20여 명의 장수와 50여 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수로와 육로로 크게 진군해 오니 밀양ㆍ진해(진해)ㆍ김해(금해)ㆍ거제의 길에는 연기와 먼지가 하늘에까지 뻗쳤다. 금오는 부산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때 나이 60세라 하였다.
○ 8월에 청정 등의 군사가 함양에 이르렀다. 선봉인 적군 수천 명이 안음(안음) 황석산 밑에 와서 호령하기를, “성을 비우고 나가면 쫓아가서 죽이지 않겠다.”고 하였다. 김해 부사 조방장 백사림(백사림)이 줄을 타고 성을 넘어 달아나니 적군이 성에 들어가 함부로 죽였다. 전 함양 군수 조종도와 안음 현감 곽준 등이 죽었고, 곽준의 아들 이상(리상)ㆍ이후(리후)와 그의 딸인 이문호(리문호)의 아내도 자살하였다. 《조야기문》
○ 처음에 체찰사 이원익은, 황석산성은 호남과 영남의 요충지가 되므로 적이 반드시 차지하려는 곳이라고 여겨 세 고을 군사를 예속시켜서 곽준에게 명령하려 지키게 하였다. 이때 적군이 공격해오니 곽준은 싸움을 독려하여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이 함락되니 교의에 걸터 앉아서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마침내 살해당하였다. 두 아들이 그 아버지를 안고 적을 꾸짖으니 적은 함께 죽였다.
○ 곽준은, 자는 양정(양정)이며, 호는 존재(존재)이고, 재우(재우)의 종부(종부)이다. 타고난 자질이 밝고 순수하였으며, 효도와 우애도 지극하였다. 중년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성현의 학문에 몰두하여 의리를 연구하였으며, 사람을 만나면 문득 자상하게 가르치고 지도하여 각기 그 업에 따라서 힘쓰게 하니 어진 사람ㆍ어리석은 사람 할 것 없이 그를 사랑하고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천거로 고을 원이 되었는데 백성이 편하고 정사가 거행되어 한 지방이 잘 다스려졌다. 아버지는 충성을 위하여 죽고 아들은 효도를 위하여 죽고 딸은 절개에 죽었으니, 삼강이 한 집안에 갖추어진 것이다. 곽준에게 병조 참판을 증직하고, 두 아들에게는 공조 정랑을 증직하였다.
○ 곽준의 딸이 이문호의 아내였는데 문호가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
곽씨는 피난하기 위해 이미 성 밖까지 나가 있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 그 여종에게, “아버지가 죽었어도 내가 죽지 않은 것은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남편도 적군에게 잡혔으니 어찌 차마 홀로 살겠는가.” 하고 드디어 목을 매어 죽었다.
○ 조종도는, 자는 백유(백유)이며, 호는 대소헌(대소헌)이고 본관은 함안(함안)이다. 무오년에 사마과(사마과)에 합격하였고, 성격이 활달하여 구속을 받지 않는 기이한 남자였다. 전 군수로 집에 있으면서 항상 말하기를, “나는 국록을 먹는 사람이니 달아나 숨는 사람들과 함께 풀 사이에서 죽지는 않을 것이고, 죽더라도 마땅히 대의를 명백히 할 것이다.” 하더니, 처자를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왔다. 학유(학유) 윤선(윤선)과 진사 박천우(박천우)와 함께 밤에 술을 마시다가 분개하고 탄식하면서 시를 지었는데,

공동산(공동산) 밖에서는 삶이 오히려 기쁨이지만 / 공동산외생유희
장순ㆍ허원의 성중에서는 죽음도 영광이다 / 순원성중사역영

하였다. 드디어 곽준과 함께 죽었는데 이조 참판 증직을 받았다. 《명신록》

명 나라 군사가 재차 구원하다
 

정유년에 명 나라 조정에서 특별히 군사를 보내어 구원할 것을 허락하였으므로 윤승훈(윤승훈)을 보내어 표를 올려 사은하였다. 《촬요》
○ 2월에 우첨도어사(우첨도어사) 양호(양호)를 경리조선군무(경리조선군무)로, 병부 상서 형개(형개)를 총독군문(총독군문)으로, 총병(총병) 마귀(마귀)를 제독으로 삼아서 선대병(선대병) 2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부총병 양원(양원)은 요동병(료동병) 3천 명, 오유충(오유충)은 남병(남병) 3천 명, 유격 우백영(우백영)은 밀운병(밀운병) 2천 명, 진우충(진우충)은 연유병(연수병) 2천 명을 거느리게 하여 계속적으로 강을 건너왔다. 참정 소응궁(소응궁)에게 감군(감군)하게 하고, 호부 동한유(동한유)에게 독향(독향)하게 하였다. 2월이《조야첨재》에는 1월로 적혔는데 그릇된 것이다.
○ 3월에 또 어사 진효(진효)에게 감군하도록 명하였다. 《일월록》
○ 마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면서 먼저 절강(절강) 유격 섭상(엽상)을 보내어 서울에 와서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는데 권려가(권려가)를 지어서 팔도에 돌려 보이도록 하였다. 그 노래는,

조선은 본래 예의의 나라라고 일러 / 조선소칭예의방
무예에 관한 일을 거론하기를 부끄러워하고 문장만 숭상하였다 / 수칭무사상문장
그때에 섬 오랑캐가 시끄럽게 덤비니 / 당년도이분륙량
모래가 무너지듯 대가 쪼개지듯 평양까지 들어왔네 / 붕사파죽입평양
임금은 파천하여 초야에 있었고 / 국군파월재초망
왕자는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있었다 / 왕자계루재부상
서울은 횃불 한 자루에 절반이나 잿더미가 되었고 / 왕경일거반진앙
불모지가 된 천 리 땅에는 햇빛도 비참하였다 / 적지천리참일광
지난 일 생각하니 이가 갈린다. 원한은 어찌 이다지도 깊은고 / 추사절치한하장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를 어찌 잊을소냐 / 불공대천수기망
뜻은 있지만 힘이 모자란다고 말하지 말라 / 무언유지력미황
일이란 사람이 진력하기에 달렸고 하늘은 굽어보시는도다 / 사유인진감유창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와신상담하여 오 나라 강토를 망하게 한 것을 / 군불견와신상담소오강
창을 베개로 삼고 벽돌을 옮겨 진 나라를 강하게 한 것을 / 침과운벽보진강
또 장사가 성을 내면 흰 무지개가 길게 뻗치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가 / 우불견장사유노백홍장
필부의 용감한 행동은 대중도 당하기 어렵나니 / 필부감용중난당
남아의 기절은 하늘과 땅 같은데 / 남아기절등소양
일곱 자 몸으로 마땅히 기강을 떨치게 할 것이다 / 칠척구의진기강
발분하여 정사를 닦는 것은 조정에서 힘쓸 것이요 / 발분수정려랑묘
백성을 모집하여 근왕하는 것은 초야에서 일어나야 한다 / 모민근왕기교황
상하가 같은 마음으로 서로 격동하면 / 동심상하상격앙
위엄과 무력이 저절로 떨쳐짐을 보게 되리라 / 저간위무자분양
구원하러 온 군사는 굳세게 함께 서둘러 / 원사광광공광양
왜적을 소탕하는데 양몰이 하듯 할 것이다 / 소탕왜적여구양
동타의 왕기(왕기)는 아직도 다함이 없으니 / 동치왕기정미앙
문을 열어 왜적에게 항복하는 짓은 말지어다 / 물효개문읍호랑
난초를 심는 것과 가시를 심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잘하는 것이며 / 종란재극과수량
기와는 온전하고 옥은 깨지는 것이 어느 쪽이 향기롭다고 할 것인가 / 와전옥쇄인수향
예로부터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킬 수 있었으니 / 일언종고가흥방
나는 이제 장부타령을 길게 노래하노라 / 아금장가장부행
용사가 사방에서 일어나서 / 원득맹사기사방
동해를 길이 맑게 하고 물결이 일지 않기를 원한다 / 영청동해무파양

하였다. 《일월록》
○ 양호가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차례로 강을 건너왔다. 양호는 평양에 주둔하고 마귀 이하는 서울에 주둔하였다. 마귀가 여러 장수를 나뉘어서, 양원은 남원을 지키게 하고, 모국기(모국기)는 성주에, 진우충은 전주에 주둔하게 하고, 오유충은 충주를 지키게 하였다. 6월에 양원 등이 각각 목적지로 떠나갔다.
○ 7월에 적군이 용담(룡담)을 침범하고 장수(장수)로 향하였는데 조방장 이유의(리유의) 등이 군사를 버리고 도망쳤다. 남원 판관 노종령(로종령)도 단기로 도망가니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무너졌으나 부사 윤안성(윤안성)만이 홀로 부(부)에 있으면서 변고에 대비하였다. 유의의 무너진 군사가 성중에 들어가서 창고를 약탈하니 일시에 텅비게 되었다. 남원 사람들도 성에 들어가서 그 나머지를 훔쳐갔다. 처음에 김면(금면)과 곽재우가 노획한, 왜적이 약탈해갔던 궁중 물건을 김성일(금성일)이 적진과 거리가 조금 떨어진 남원에 보내어 간수하게 했던 것인데, 이때에 와서 전부 잃었다.안성은 적군이 오지 않을 것을 알고 난민 중에 심한 자를 베어 죽이고, 이어 임춘루(림춘루)에 올라서 눈물을 흘리며 방을 붙여 백성들에게 경고하였는데, “창고에 있던 물건은 마침내 왜놈이 갖게 될 것이니 백성에게 흩어주는 것도 무방하나, 각처에 물건이 다 없어지고 명목도 없이 민간에서 거두어들이는 것도 온단치 못한 일이니 관청의 물건을 가져간 사람이 관청에 자발적으로 가져다 바친다면, 원래 도적질해 간 것이 아니니 죄로 다스려질 걱정은 전혀 없을 것이고 그 수의 3분의 1은 상으로 줄 것이다.” 하였다. 《난중잡록》
○ 8월에 남원 부사 윤안성이 팔결군(팔결군)을 동원하여 성 밑에 해자[지]를 팠는데 5일 만에 역사를 마쳤으니 1천 7백여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


양원(양원)의 남원(남원) 패전

○ 양원은 3천 명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남원에 내려갔다. 남원은 호남과 영남의 요충지에 있어서 성이 자못 견고한데 낙상지(락상지)가 일찍이 무너진 곳을 보수하였고, 또 성밖에는 교룡산성(교룡산성)이 있어서 지킬 만한 곳이라고 여겨 여러 고을 군사를 모아서 성을 수리하고 성가퀴를 더 쌓았으며, 성밖에는 양마장(양마장)을 쌓고 해자를 깊이 파게 하였다. 접반사 민준(민준)은 나이가 늙었으므로 돌려보내고, 높은 관리가 와서 성을 지키도록 하여 달라고 청하므로 임현(임현)을 남원 부사로 임명하였다.
○ 처음에 삼공 이원익ㆍ이덕형ㆍ이항복이 번갈아 재지와 책략이 있는 임현을 천거하여 남병사로 승진시켰는데, 이때에 와서 양원이 문무가 겸비한 자와 함께 하기를 청하므로 임금은 임현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아니면 될 수 없다.” 하고 특별히 남원 부사에 임명하였다.
○ 정기원(정기원)을 접반사로 삼았다.
○ 진우충이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전주를 수비하여 남원의 구원병이 되었다. 교룡산성은 포기하였으니 부성(부성)을 지키는 데 전력하기 위함이었다.
○ 8월 4일에 행장(행장) 등의 선봉은 사천(사천)ㆍ남해를 무찌르고, 청정(청정) 등은 이미 초계(초계)ㆍ함안을 지났으며, 의홍(의홍) 등은 곤양(곤양)에 배를 정박하고 산을 뒤져서 죽이고 약탈하여 관청과 민간을 다 불살랐다. 적군이 광양(광양)에 들어오니 병사 이복남(리복남)은 퇴각하여 옥과(옥과)에 주둔하였다.
○ 6일에 구례 현감 이원춘(리원춘) 《조야첨재》에는 광양 현감 이원춘이라고 적혀 있다. 이 창고를 불사르고 남원으로 피해 들어갔다.
○ 이튿날 적군이 구례에 들어왔다. 심유경이 요동에서 부하 우파총(우파총)을 보내어 행장 등에게 효유하여 퇴군하라 하니, 답하기를, “관백(관백)의 명이 반드시 전라도를 함락하라 하였으니, 사세가 중지하기 어렵다.” 하고, 이어 남원 경내로 들어왔다. 양원이 원천(원천)으로 나가서 성수령(성숙령)에 이르러 군대의 위력을 보이고 돌아왔다. 이날 밤에 성중에서는 군사와 백성이 많이 도망갔는데, 양원은 군사를 나누어 성가퀴를 지키게 하고 여러 진을 독려하여 함께 들어와서 성을 지키게 하였다.
○ 전라 병사 이복남이 순천에서 옥과에 도착하니 현감 홍요좌(홍요좌)가 단신으로 변고에 대비하고 있었다. 복남이 거느리고 왔던 군사들도 흩어졌으므로 장교 50여 명만 거느리고 나아가다가 길에서 조방장 김경로(금경로)와 산성별장 신호(신호)를 만나 매우 기뻐서 손을 잡고 함께 죽기를 맹서하면서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나아갔다. 적군의 선봉은 이미 성 아래에 가까이 오고 있었다. 복남은 눈을 부릅뜨고 손에 침을 뱉으면서, “군부의 급한 환란을 구하는 것이 오늘이 아닌가, 국가의 큰 은혜를 갚는 것도 오늘이 아닌가.군사는 분발함으로써 날래지고 곧음으로써 강해지니 생사와 화복을 어찌 의논할 것인가.” 하고, 즉시 바라와 태평소를 불고 북을 치게 하면서 천천히 대로를 따라서 남문으로 들어갔다. 적군은 뒤로 물러서며 놀란 눈으로 보고 있다가 포로에게 물어보고는 혀를 내두르지 않는 놈이 없었다. 일설(일설)에는 양원이 격문으로 복남을 불렀으나 복남은 시일을 미루고 오지 않으므로 연이어 사자를 보내어 재촉하였다 한다.
○ 13일에 의지ㆍ행장 등이 먼저 방암봉(방암봉)에 올라서 두 마리 용을 그린 큰 기를 세우고 포를 쏘며 대평소를 불더니 여러 괴수들이 차례로 나뉘어 세 갈래 길로 전진하여 오는데 왜놈 장수가 번갈아 산봉우리에 올라서 진을 치고 지휘하였다. 양원은 이신방(리신방)과 동문에, 천총 장표(장표)는 남문에, 모승선(모승선)은 서문에, 이복남은 북문에 있으면서 대오를 나누어 성가퀴를 지키고 있었다. 양원은 성중에 명을 내려서 무기를 함부로 허비하는 것을 금하였다. 오시에 왜적 다섯 명이 곧장 동문으로 들어와서 돌다리 위에 늘어서므로 양원도 몰래 나가서 문밖 성안에 서서 사람을 모집하여 일시에 총을 쏘아 즉시 세 놈을 죽였다.미시에 적군 수만 명이 칠장(칠장)에서 성밖 백 보쯤에 나아와 연속해서 총을 쏘고 고함치므로 성중에서는 진천뢰(진천뢰)를 쏘았더니 적군이 많이 다쳐서 드디어 퇴각하였다. 양원은 적이 목숨을 생각하지 않고 대낮에도 덤비니 밤에는 반드시 뛰어 들어올 것이라고 여겨 마름쇠를 많이 박아 놓고 양원이 직접 문밖에서 변고에 대비하고 있었다. 밤에 적 세 놈이 왔으므로 명 나라 군사가 나아가 베어 버렸다. 적은 불을 피워 놓고 아침까지 갔으니 백 리 사이에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14일에 적은 성수원(성숙원)에서 산 가득히 내려오더니 성밖에 이르러서는 사방으로 나뉘어 전보다 배로 토목 공사를 시작하였다.긴 사다리를 많이 만들어 성에 오르는 기구로 삼고 해자를 메워서 길을 만들었다. 밖에 긴 나무를 가로 매어 거의 백여 보나 잇닿게 한 다음 인가의 판자를 가져다가 나무에 기대어 벌려 세우고 또 성밖 인가의 담벽을 뚫어서 총쏘는 구멍을 만들었다. 또 높은 시렁을 묶어 성안을 굽어 보면서 총을 쏘니 명 나라 군사가 많이 죽어 동남쪽 성가퀴가 텅 비었다. 오시에 또 칠전(칠전)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는데 포소리가 천지에 울렸다. 서문 앞에 있던 적은 만복사(만복사)의 사천왕(사천왕)상을 수레에 싣고 와서 성밖에 돌려 보이니 대군이 더욱 놀랐다.양원은 군사 천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가서 싸웠는데 적이 퇴각하므로 돌다리 밖에까지 쫓아나가니 적은 문밖에 잠복해 있다가 무릎걸음으로 나아와서 포위할 계획을 하므로 양원이 급히 바라를 울려서 돌아왔다. 15일에 양원은 동문의 성 위에서 바라를 두어 차례 울렸으나 성중은 고요하였다. 사람을 시켜 성 위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두어 번 부르니 왜적 다섯 놈이 동문 밖에 뛰어와서 꿇어앉아 명령을 청하므로 양원은 통역관을 시켜 몇 마디 주고 받다가, 집안 일 보는 두어 사람에게 명하여 왜적을 따라가서 적의 괴수를 만나 일을 의논하도록 하였더니 행장이 음식대접을 하여 돌려 보냈다.저녁 때 행장이 다섯 왜놈을 시켜 말을 타고 와서 양원에게, “급히 성을 비우시오.” 하므로, 양원이, “나는 열 다섯 살 때부터 장수가 되어서 천하에 횡행하였다. 이제 정예한 군사 십만을 거느리고 와서 이 성을 지키고 있는데 물러나라는 명령은 없다.” 하였더니, 왜적이 또 말을 전하기를, “천여 명 패잔병이 어찌 능히 백만의 군사를 당해내겠소. 명 나라 장수가 조선에 무슨 은혜를 입었다고 후회될 일을 하는 것이오?” 하였다. 양원이 또 두어 마디 답하여 보냈다. 포위된 지도 여러 날이었는데 적의 세력은 날로 성하였다. 성 안팎에 있던 명 나라 군사가 서로 함께 울부짖고, 우리나라 백성들도 술렁대며 울고 불고 하니 적군이 이것을 알고 배나 더 공격하였다.
○ 16일에 적은 양원에게 성밖으로 나가라고 재촉하였다. 양원은 성이 결국 함락됨을 면키 어려울 것임을 알고 내심으로 성을 버리려는 뜻이 있었다. 성중에서는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우는 소리가 우레 같았다. 적군은 더욱 급히 육박하여 밤 이경에 남문과 서문으로 뛰어 들어와서 어둠을 이용하여 함부로 찍어대니 명병과 우리 군사는 다 북문 안으로 달려가 모였다. 적은 칼을 휘둘러 마구 죽이니 양군이 북문 안에서 모두 죽어서 전후에 죽은 자가 5천여 명이었고, 성 안팎 관청과 민간의 집들도 다 재가 되었다.총부 중군(총부중군) 이신방ㆍ천총 장표ㆍ모승선ㆍ접반사 정기원ㆍ병사 이복남ㆍ방어사 오응정(오응정)ㆍ조방장 김경로ㆍ별장 신호ㆍ부사 임현ㆍ판관 이덕회(리덕회)ㆍ구례 현감 이원춘이 다 죽었다. 양원은 5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포위를 뚫고 나왔다. 그때 적군은 나무를 벌려 에워싸고 그 위에 칼을 묶어 꽂았으므로 양원이 준마를 많이 몰아서 뛰어넘게 하니 말이 칼날에 찔려서 넘어지므로 또 말을 채찍질해 나가는데 잇달아 찔려서 죽은 말이 많이 쌓이었다. 양원은 날래고 용맹함이 뛰어난 까닭에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죽은 말 등을 밟고 나갔다.접반사를 살리고자 달아나는 말에 태워서 같이 나오려고 하였으나 기원은 말타기에 익숙하지 못하여 말에서 떨어졌다. 양원이 재차 들어가서 데리고 나오려 하였으나 능히 따라 나오지 못하였다. 여러 적군이 일시에 와서 쫓으므로 양원은 4, 5마리의 말을 한꺼번에 놓아서 달리는 동안에 탔던 말이 힘이 빠지면 다른 말에 훌쩍 뛰어 타고 하여 이와 같이 돌려서 바꿔 타고 갔다. 말도 사람의 뜻을 아는 듯 달아날 때는 흩어졌다가 양원이 부르면 일제히 머리를 맞대고 모여들었다.갑옷을 입은 채 뛰어서 바꿔 타는 모습이 꼭 자리를 바꿔 앉듯 하므로 적도 마침내 해치지 못하였다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양원이 들에서 싸우는 것은 잘하지만 성을 지키는 데에는 적당한 재주가 아니었는데 주장(주장)에게 시기를 받아서 강제로 요충지를 수비하게 되어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패전하게 되었다.” 한다.
○ 그때 진우충은 전주에 있었는데 총병(총병 양원)이 급함을 보고하고 구원을 청하였으나 즉시 군사를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경리(경리)가 듣고 위에 아뢰고 잡아 와서 곤장 백 대를 치고 사형에서 감하여 충군(충군)하게 하였다. 그뒤 무술년 여름에 명 나라 조정에서는 양원과 진우충을 베어 죽이고 그 머리를 우리나라에 전하여 왔었다.


소사(소사)의 전첩(전첩)

남원이 이미 함락되니 전주 이북은 와해되었다. 서울이 크게 놀라 백성들은 흩어졌다. 조정의 신하들이 피난할 계책을 올려서 내전과 세자가 먼저 수안(수안)으로 갔다. 《일월록》
○ 임금이 여러 대신과 공경에게 의논하기를, “적군이 만약 멧돼지처럼 돌진해 온다면 나는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하니, 어떤 사람이, “영변이 형세가 매우 견고하고 또 중국과 가까우니 가서 지킵시다.” 하였다.신잡(신잡)이 일찍이 평안도 절도사였으므로 그곳의 편리 여부와 저축된 양곡 등의 일을 모두 아뢰고, 끝으로, “백관이 많으니 미리 장(장)을 준비하여 기다리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니, 그때 사람들이 웃었다. 한준겸(한준겸) 유천(류천) 이 남이공(남이공) 자안(자안) 과 함께 옥당에 일직으로 있었는데, 남이공이, “신공을 합장사(합장사)로 삼아서 먼저 영변으로 가게 할 것이다.” 하니, 한준겸이, “다른 사람이면 가능해도 신공은 결코 가서는 안 되오.” 하였다.“무슨 까닭이오?” 하니, “신불합장(신불합장 음양서(음양서)에 신일(신일)에는 장을 담그지 않는다 한다.)때문이오.” 신(신)이 신(신)과 음이 같다. 하니 듣는 자가 크게 껄껄 웃었다. 《지소록》
○ 적군이 전주의 성과 해자를 파괴하였다. 청정과 행장이 서로 의논하기를, “임진년의 싸움에 여러 도가 다 함몰되었는데도 조선이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수로가 있어서 호남과 호서와 통하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마땅히 수로와 육로로 나누어서 구원하는 길을 막을 것이다.” 하고, 곧 직접 군사를 나누어 청정은 군사를 거느리고서 바로 경기ㆍ호서로 향하고, 수가(수가)와 행장은 군사를 돌려서 남원으로 내려가고, 의홍 등은 순창(순창)ㆍ담양(담양)으로 향하였고, 남은 괴수들은 혹 우도를 따라 내려가게 하였다. 《일월록》
○ 지나는 곳마다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임진년보다도 더 심하였다. 사람을 만나면 모두 그들의 코를 베었고 집을 만나면 불을 질렀으며 숲의 나무까지도 남기지 않았다. 《자해필담》
○ 처음에 진우충이 전주에서 군사가 무너져서 돌아오니 적군이 뒤를 밟아 쫓아서 이미 금강(금강)을 건넜다. 양호가 평양에서 적군이 서울 근방에까지 가까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서울에 와서 임금을 위로하기를, “혹 일이 불리하더라도 국왕과 궁궐에 소속된 사람들은 또한 서로 구원할 것이오.” 하고, 곧 마귀 등을 보내어 대군을 거느리고 출발하게 하며 동작진(동작진)에 부교(부교)를 설치하게 하고, 먼저 부총병 해생(해생)ㆍ참장 우백영(우백영)ㆍ양등산(양등산)ㆍ유격 파새(파새)ㆍ파귀(파귀) 등의 군사 수천 명을 보내어 적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마귀가 수원에 가서 목책을 설치하고 군사를 갈원(갈원)에 보내어 가천(가천) 위아래에 복병하여 후원하게 하였다. 해생 등은 금오평(금오평)에 도착하여 싸움하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군사를 세 패로 나누어서 좌우로 덮쳐 공격할 계획을 하였다. 적군은 공주ㆍ천안에서 곧장 경기로 향하여 5일 날이 샐 무렵에 선봉이 금오평에 이르렀다. 명 나라 군사가 오른편에서는 유포(류포)로 나오고 왼편에서는 영통(령통)으로 나왔으며 대군은 큰 길을 따라 나와서 바라소리가 세 번 울리니 일만 기가 일제히 펄럭이었다.군사들이 모두 소주를 마시고 쇠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서 돌진하니 왜병이 어지러워하므로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서 바싹 조이었다. 《자해필담》에는 철기(철기) 3천으로 격파하였다 한다. 적의 송장이 들에 가득히 덮혀 있었으며 하루에 여섯 차례 싸움에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날이 저물어서 군사를 거두고 해생이 군중에 명령하기를, “적이 내일은 반드시 결전하려 할 것이니 힘써 죽을 힘을 다하고 군율을 범하지 말라. 다만 교활한 적군이 달아날 때엔 반드시 산길로 따라갈 것인데 기병(명병)과 보병(왜병)이 형세가 다르니 끝까지 추격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였다.6일에 날이 밝으니 적은 과연 포를 잇달아 쏘며 양쪽으로 벌려서 나아오는데 흰 칼날이 번쩍이고 지독한 구름이 해를 가리며 기괴한 모양과 괴상한 형상이 되어 사람의 눈을 아찔하게 하였다. 해생 등이 포소리에 응하여 갑자기 내닫으며 철퇴를 휘둘러 치니 맞은 자는 모두 줄줄이 쪼개지듯 하였다.싸움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적이 크게 무너져 도망가서 드디어 목천(목천)ㆍ청주길을 따라서 달아났다. 대군도 힘이 다하였고 또 마귀가 끝까지 추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군사를 쉬게 하였다가 길을 나누어 쫓았다. 그 뒤에 적이 조선의 세 대전을 말할 때에는 평양ㆍ행주(행주)ㆍ금오를 들었다. 그러나 임진년 이후로 이번처럼 통쾌한 승전이 없었고, 그 외에는 다만 성을 공격하였거나 혹은 스스로 지킨 것뿐이었다.
○ 이때 양호는 상중이었으므로 벼슬을 사직하려 하였는데 명 나라 조정의 의논이 공이 아니면 되지 않는다고 하여 특별히 양호를 기용하여 도어사(도어사)로 삼았던 것이다. 양호가 평양에 도착해서 적이 경기에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고 자문(자문)을 보내어 굳게 지키고 동요하지 말라고 하였다. 곧 길을 배로 재촉해서 급히 달리니 군리가 함부로 전진하지 말라고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서울로 들어왔다.마귀 등 여러 장수와 함께 서울 남산에 올라서 군악을 치고 호령을 포고하였다. 밤에 날래고 건장한 군사를 뽑아서 먼저 가서 적을 맞아 싸우도록 하고 또 2천 기병으로 후원이 되게 했는데, 적을 직산(직산)에서 만나 그 선봉을 무찔러 죽이니 여러 괴수가 크게 꺾여서 곧바로 해변의 소굴로 돌아가 버렸다. 월사(월사)가 지은 양경리(양경리) 비문
○ 이날 경리가 임금에게 강가에 나가 보기를 청하였다.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백성들이 모두 짐을 메고 서 있었는데 소사(소사)에서 이겼다는 보고가 이르자 서울 안의 인심이 그제서야 조금 안정되었다.
○ 처음에 양호가 임금을 시험하고자 하여 하루는 임금에게 청하기를, “제가 크게 군사를 거느리고서 적을 토벌하려 하니 국왕도 마땅히 함께 가셔야 하겠소.” 하니, 임금은 즉시 허락하였다. 명 나라 군사가 남쪽으로 내려갈 때 양호와 임금이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서 성밖으로 나왔다. 부교를 건널 때 임금의 탄 말이 명 나라 군사의 채찍질을 받고 뛰어올랐으나 임금은 고삐를 당겨잡아 위태하지 않았으며 기색이 태연하였다.양호가 돌아보고 웃으며 말에서 내려 교의에 앉아 위로하기를, “임금은 일을 함께 할 만하오.” 하였다. 그때 백관 중에 아무도 뒤따르지 못하였고, 오직 선전관 유승서(류승서)만이 뒤따라와서 임금이 말에서 내릴 때 앞으로 와서 고삐를 잡았다. 임금이 동행하기를 청하였더니 양호는 허락하지 않았다.
○ 양호가 처음에 와서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의 나라 일은 마땅히 유성룡과 같은 사람으로 돕게 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양호에게 유성룡을 헐뜯어 말하는 자가, “유성룡이 공을 얕잡아서 일을 이룰 재주가 없다고 하더라.” 하면서 없는 사실을 많이 꾸며서 말하고 심지어는 경리의 객관에 방서(방서)를 붙이기도 하였다. <서애행장>
○ 양호는 우리나라를 중흥시켜준 공이 있었는데도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징비록)》에는 그 일을 전부 빠뜨리고 왜적이 저절로 물러간 것처럼 하였고, 소사의 승전이 사람들의 이목에 배어 있었는데도 오히려 양호에 대한 사사로운 원망으로 소사의 공을 《징비록》에서 빠뜨렸으니 이것이 성룡의 큰 병통이었다. 《청야만집》 ○ 《서애집》에는, “적군이 휘몰아쳐서 서울 근처에 오니 도성이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얼마 후에 직산에서 물러갔다.” 하였다.
○ 소사에서 패전한 적이 영남으로 길을 잡아 돌아가서 충청ㆍ전라도의 완전하던 고을이 모두 파괴되었다. 《자해필담》
○ 청정 등 적군이 청주에 도착해서는 길을 나누어 내려가는데 호남과 영남에 가득히 차서 여러 고을에 주둔하였다. 패(패)를 발급하여 백성을 유혹하고 쌀을 주기도 하니 곤궁한 백성들이 다투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의홍 등은 순창ㆍ담양에서 사방으로 흩어져 주둔하면서 죽이고 겁탈하는 것을 금지하고 패를 주어서 유혹하니 항복하여 붙는 자가 그 수를 셀 수 없었고, 심지어 시장을 개설하여 물건을 교역하기도 하였다. 큰 길가에 있는 여러 적들이 다 이와 같이 하였다. 동복(동복) 사람 생원 김우추(금우추)란 자가 본 고을 왜장에게 글을 올렸는데,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원컨대 한 터전을 받아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 싶소.” 하였으며, 그 끝에 시를 짓기를,

칼을 차고 건너왔으니 / 장검도동해
장군은 제왕을 보좌할 만한 재주요 / 장군왕좌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 살인여불기
사해 백성들이 다 돌아올 것이오 / 사해진귀래

하였다. 그 뒤에 난리가 평정되어서 향중의 사림이 왜적에 붙었던 자를 기록하여 죄를 주었다. 그때 창전(창전)ㆍ옥삼(옥삼)ㆍ동이(동이)ㆍ곡일(곡일)이란 말이 있었는데, 전(전)이란 것은 한 고을이 모두 왜적에게 붙은 것이고, 삼(삼)ㆍ이(이)ㆍ일(일)은 적에게 붙은 그 괴수를 들어서 말한 것이었다. 창(창)ㆍ옥(옥)ㆍ동(동)ㆍ곡(곡)은 고을 이름들이다. 《일월록》
○ 적이 남쪽 변경에 나뉘어 웅거하고 있었으니, 행장은 순천에, 심안돈오(침안돈오 도진의홍(도진의홍))는 사천에, 청정은 울산에 웅거하였고, 조신(조신)은 남해 유산도(류산도)에 주둔하였다. 《자해필담》 《조야첨재》
○ 경리가 낭중(랑중) 동한유(동한유)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주에 주둔하게 하고, 또 말을 퍼뜨리기를, “남북의 수군ㆍ육군 도합 70만을 조달하여 아침이나 저녁에 도착할 것이고, 복건(복건)ㆍ광동(광동)ㆍ절강(절강) 등의 수군은 곧장 일본으로 들어갈 것이다.” 하니, 왜적이 이 풍문을 듣고 드디어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 9월에 도원수 권율이 달아나 서울에 이르니 대간이, 권율은 겁만 내고 지모가 없으므로 원수가 될 수 없다고 탄핵하였으나 임금은 들어주지 않았다. 권율이 찬획사 이시발(리시발)과 함께 서북의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별장 한명련(한명련)과 경상도 방어사 고언백(고언백)을 선봉으로 삼아 청정 등을 쫓아서 비안(비안)까지 갔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일월록》 《조야기문》
○ 권율이 조정에 들어오니 임금이 놀라면서, “남쪽에 적군의 형세가 한창 성한데 원수가 어찌 갑자기 조정에 돌아오는가?” 하니, 권율이 대답하기를, “부르시는 명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좌우에서, “지난번에 적의 선봉이 서울 가까이 왔을 때 조정의 의논이 한강을 끊고서 지키려고 한다면 권율이 아니고는 안 된다고 하므로 불렀습니다.” 하였다. 백사가 지은 《유사》
○ 형 군문(형군문 형개(형개))의 차관(차관)이 명 나라 황제의 칙서를 받들어 전하였는데, “짐이 생각하건대 그대의 나라는 동번에 가까이 있으면서 대대로 공순함을 힘써 다하였다. 전년에 왜놈이 그대의 강토를 파괴할 때 의주에 피난와서 슬프게 호소하여 구원을 청하기에 짐은 불쌍히 여겨 특별히 문무 중신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서 동쪽을 정벌하게 한 것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듯이 한 것뿐만이 아니었다.그때는 온 나라가 아직 굳게 지킬 뜻이 있어 천자 군대의 정벌을 함께 도와서 그대의 토지를 회복하고 그대의 왕자와 배신을 돌아오게 하였으며, 왜놈이 겁을 내어 도망치고 머리를 숙여 봉함을 빌 때에 짐은 그대의 백성들의 생업이 회복되지 않았음을 생각하여 우선 그 청을 들어주었으니 그대들을 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난리가 잠잠해진 몇 년동안에 어찌 훈련에 힘을 기울이지 않고 간교한 왜놈이 재차 들어오자 장황하게 문서로 아뢰어 우리나라에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가.이에 다시 동쪽을 정벌하는 전쟁이 있어서 군사를 수고롭게 하고 군량을 운반하여 갖은 고초를 겪게 하였으니 짐의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인자함과 어려운 나라를 구휼하는 의리를 또한 부지런히 하였다. 이에 어사 한 사람을 보내서 군사를 감독하고 싸움을 독려하게 하며 이어 보검 한 자루를 군문(군문 형개(형개))에 하사하여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장졸이 있거든 모두 먼저 처형하고 뒤에 아뢰도록 하였으니, 그대의 군신들은 마땅히 온 나라가 노력하여 천자의 군대를 도울 것이며 천자의 조정에 의절을 당하여 후회를 끼치지 말라.” 하였다.
○ 정곤수(정곤수)를 보내어 표를 올려 사은하였다. 《고사촬요》
○ 겨울 10월에 임금이 흥인문(흥인문) 밖에 나가서 종묘사직의 신주를 맞이하여 권안소(권안소 임시로 봉안한 곳)에 이르러서 분향례를 거행하였다. 《조야첨재》


양호가 도산(도산)을 공격하다.

양호가 군문에 글을 전하여, “마땅히 먼저 청정을 공격하여 적의 오른팔을 끊어야 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마귀와 함께 대군을 끌고 조령(조령)을 넘어서 경상도로 가는데, 행장이 서쪽에서 구원하러 올까 염려하여 중협장(중협장)에게는 의성(의성)으로 가서 구원하고, 좌우 양 협장에게는 전라ㆍ경상도 사이의 험한 곳을 막게 하였으며,또 삼협장(삼협장)에게는 우리 군사와 함께 천안ㆍ전주ㆍ남원을 거쳐 내려가면서 크게 깃발을 날리고 북을 울려 거짓으로 순천 등지를 공격하는 체하여 행장을 견제하게 하고, 양호는 대군을 거느리고 잇달아 진군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의 거느린 군사가 도합 4만 4천 8백 명이었다. 양호는 경주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조야첨재》
○ 그때 청정은 울산 동해 가 험한 곳에 성을 쌓고 도산(도산)이라고 하였다.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도산에 머물러 있으며, 여러 적들을 나누어서 요로를 막게 하였다. 차왜(차왜)를 여러 진에 보내어 급함을 알렸다.
○ 12월 22일에 모든 군사를 파견하여 좌협장 이방춘(리방춘)은 왼편 길로, 중협장 고책(고책)은 중간 길로, 우협장 팽우덕(팽우덕)은 오른편 길로 가게 하였으며 오유충은 양산을 막게 하고, 동정의(동정의)는 남원으로 가게 하고 노계충(로계충)은 서강(서강)에 주둔하여 수로를 막게 하였다.
○ 23일 이른 아침에 양호가 통역관만 데리고 앞으로 나가는데 접반사 이덕형과 원수 권율이 따랐다. 한밤중에 마귀가 먼저 울산에 도착하였는데 적진과 60리의 거리였다. 마귀가 양등산ㆍ파새ㆍ파귀를 불러서 누가 선봉이 되기를 원하는가 물으니 세 장수가 서로 가기를 다투므로 드디어 파새로 선봉이 되게 하고 등산으로 다음이 되게 하였다.파새는 날래고 용감한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등산은 날랜 기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차례로 출발하였다. 날이 밝기 전에 파새가 적진 가까이 가서 큰 화살로 쏘니 적이 나와서 쫓자 파새가 손으로 네 명을 죽이고 거짓으로 물러나는 체하였더니 적이 따라왔다. 파새가 다시 군사를 돌려서 등산과 함께 힘을 합쳐 공격하여 4백 60여 명을 베고 작은 장수 한 사람을 사로잡았다.
○ 24일에 삼협장이 함께 진군하여 좌군은 반구정(반구정)의 적굴을 포위하고 중군은 병영 길에서 곧장 적진을 꿰뚫고, 우군은 태화강(태화강)의 적진을 포위하였다. 양호는 몸소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북을 치고 떠들면서 분발하여 공격하니 포성이 천지에 울렸다. 불 화살 수백 개를 서로 호응하여 한꺼번에 쏘니 바람은 빠르고 불은 뜨거워 어지럽게 적의 막사를 태워서 검은 연기가 공중에 가득하였다.이긴 기세를 타서 반구정ㆍ태화강의 두 적굴을 함락시키니 남은 적들은 겨우 살아서 도산으로 도망갔다. 명 나라 군사가 한참 적군의 머리를 베는 동안에 적들이 벌써 도산에 들어가 버렸다. 양호는 보병과 기병을 지휘하여 여덟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서 차례로 잇달아 주둔하여 지키게 하고, 또 절강의 군사 한 진영으로 강변을 끊어서 수로로 오는 적을 막게 하였다. 양호는 마귀와 함께 도산 북쪽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 25일에 진군하여 성 동쪽에 가까이 갔으나 싸움이 불리하여 유격 진인(진인)이 탄환을 맞아서 마주 들고서 서울로 돌아갔다. 《조야첨재》
○ 26일에 우리 군사는 항복한 왜병과 함께 애패(애패)를 가지고 화공(화공)을 하였다. 또 성 아래에 있는 우물을 메워서 적군이 물을 길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덕형과 권율과 여러 장수들이 다 목책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적의 총알이 비오듯 쏟아져 패를 뚫고 들어와서 죽고 상하는 사람이 매우 많으므로 부득이 군사를 거두어 돌어왔다. 《조야첨재》
○ 그때 양호가 권율에게 홀로 본토의 군사만 거느리고 화공을 하게 하였으므로 권율은 여러 장수를 독촉하여 돌진하게 하고, 뒤떨어지는 자 두 사람을 베어서 돌려 보이니 모든 군사들이 뛰고 고함치면서 나아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여러 장수가 개미처럼 붙어 올라가서 함께 목책 안으로 들어가서 성밑에 바싹 가까이 가니 마귀가 멀리서 바라보고 가만히 기특함을 칭찬하여, “원수가 호령을 잘 시행한다.” 하였으며, 양호도, “조선 군사가 힘껏 싸워서 군세를 도우니 매우 즐겁다.”고 칭찬하였다. 《유사》
○ 그때 적의 배가 남강(람강)에 정박하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절강병이 불 화살을 많이 쏘니 적선이 포를 맞고 부서졌다. 적 한 명이 진 앞으로 나와서 항복하므로 은을 상으로 주었더니 항복하러 나오는 자가 서로 잇달았다. 청정이 성문을 엄하게 지키고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 27일에 큰비가 내렸다. 청정의 부장이 병사 성윤문(성윤문)에게 글을 보내어 강화하기를 청하니 양호가 돌려 보내며 효유하기를, “청정이 만약 와서 항복한다면 마땅히 조정에 아뢰어서 벼슬을 주고 상도 후하게 주리라.” 하였다. 적이 대답하기를, “싸우자 하면 싸우겠고 강화하자 하면 강화하겠는데, 한쪽을 틔워서 우리를 성밖으로 나가게 하면 마땅히 강화의 일을 의논하겠다.”고 하였다.
○ 적은 성중에 물이 없어서 밤마다 성밖으로 나와서 물을 길어갔다. 김응서가 장사와 표하(표하)에서 항복해 온 왜병을 거느리고 우물 곁에 숨어 있다가 하룻밤에 연달아 백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모두 굶주리고 여위어서 겨우 목숨만 붙어 있었다. 모든 장수가 다, “성안에 양식이 떨어졌으니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으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하였다.
○ 그때 비가 오고 서풍이 크게 불어서 추위가 심하였다. 양호는 여러 군사에게 풀집을 만들게 하여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 성을 포위한 지 열사흘에 밤낮으로 성을 공격하니 적은 크게 곤란하였다. 더구나 양식이 다 떨어지고 우물물이 다 말라서 죽는 자가 날로 쌓였다.청정은 자살하고자 하였으며 매양 금과 보배를 성밖으로 던져서 우리 군사의 공격을 늦추었다. 청정의 부장 금대부(금대부)가 글을 가지고 와서 말을 전하기를, “내일은 강화를 의논하겠소.” 하였다. 양호가 왜를 사로잡아 힐문하니, “청정은 도산에 있고 시마돈오(시마돈오)와 흑전갑비수(흑전갑비수) 등 여러 장수도 함께 이 성안에 있었는데 모여 의논하기를, ‘명 나라 군사 수만 명인데 양식이 다 떨어지면 돌아갈 것이니 명 나라 군사가 간 뒤에 곧장 서울로 쳐들어가서 명 나라를 침범하자.’ 하였다.”고 말하였다.
○ 서호(서호) 등 여러 곳에 주둔해 있던 적이 도산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내어 구원하려고 떠났다. 무술년 1월 4일에 양호가 여러 군사를 독려하여 성을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였다. 이덕형ㆍ권율등을 불러서, “성이 험해서 함락시키기 어렵고 구원병의 세력은 크니 포위를 풀었다가 후일의 일을 다시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날 밤에 진영을 철수하여 파새와 양등산으로 뒤를 막게 하고 물러났다.
○ 그때 청정은 퇴각하여 내성(내성)을 지키고 있는데, 땔나무 길과 물길이 끊어져 버렸다.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약속하여 우리편 군사의 공격을 늦추게 하였다. 10일 동안 큰비가 와서 군사와 말이 얼고 굶주려서 많이 죽었다. 사천과 부산에 있던 적군이 구원하러 오므로 양호는 앞뒤에서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군사를 끌고 물러났다. 《자해필담》
○ 파새가 홀로 결전할 것을 청하였으나 양호는 들어주지 않았는데, 얼마 뒤에 파새는 역질로 군중에서 죽었다. 임금이 예조에 문의하여 2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도록 명했다.
○ 그때 배에 있던 적군이 명 나라 군사가 철수하여 돌아가는 것을 보고 앞을 다투어 뭍에 내려오므로 양호가 돌기(돌기)로 맞아 치게 하여 적 아홉 명을 베니 적들이 퇴각하였다. 양호는 모든 군사에게 명령하여 양식과 기계를 불태워서 모두 남김이 없도록 하고 달려서 경주로 돌아갔다. 《조야첨재》
○ 오유충과 조승훈(조승훈)은 한밤중에 결사대 2천 명을 거느리고 서생포(서생포)로 몰래 들어가서 조교(적교) 위의 패자(패자)를 뽑아 가지고 돌아왔으며, 이방춘은 적군의 길을 막고서 백여 명을 베었다. 《조야첨재》
○ 이 전쟁에서 명 나라 군사의 죽은 자가 거의 천 4백 명이고 부상한 자는 3천여 명이었다.

양호가 탄핵 당하여 가니, 우리가 사신을 보내어 억울함을 변명하여 주다
 

무술년 1월에 양호가 바야흐로 재차 거사하기를 도모하는데 병부 주사 정응태(정응태) 형개의 참모관 가 경리 양호ㆍ제독 마귀ㆍ총병 이여매(리여매)의 도산 싸움을 탄핵하여 아뢰었다.처음에 유격 진인(진인)ㆍ주승(주승)이 호에게 죄를 얻어서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있더니 응태에게 참소하기를, “도산 싸움에서 양식과 기계를 무수히 버렸고 명병의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도 숨기고 알리지 않았으며, 양식과 은을 횡령하고 나누어 주지 않아서 각 진의 군사와 말이 여러 달 동안 양식이 다 떨어졌으며 청정과 강화하였고, 공의 등급을 논하여 정하는 것도 공평하지 않았다.”고 하니, 응태가 드디어, 양호가 임금을 속이고 일을 그르친 20여 죄목과 마귀와 여매는 탐욕스럽고 교활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며 난을 조성하고 임금을 속였다는 등의 죄목과 아울러 각로(각로) 장위(장위)가 아들을 두호하여 윗사람을 속였다는 등의 일을 아뢰었다. 《조야첨재》
○ 6월에 양호의 중군 팽우덕이 접반사 이덕형을 불러서 은밀히 말하기를, “주사 정응태가 경리의 스무 가지 죄목을 아뢰었는데, 그 중 다섯 가지는 귀국에도 관계가 되는 것이오. 경리가 이제 사직하는 글을 올려서 돌아가기를 청하려 하니 경리의 불행은 또한 귀국의 불행일 것이오.” 하였다. 《조야첨재》
○ 양호가 글을 올려서 죄 주기를 청하고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7월에 임금이 진주사(진주사) 최천건(최천건) 등을 보내어 도산 싸움의 시말을 구체적으로 아뢰고 양호가 무고를 입었음을 변명하여 그대로 조선에 머물게 할 것을 청하였다. 《조야첨재》 ○ 《난중잡록(란중잡록)》에는 1월로,《계갑록(계갑록)》에는 5월로 기재되었는데 모두 틀린 것이다. ○ 주문(주문)은 이정귀가 지었다.
○ 7월에 명 나라 조정에서 경리 양호를 파면시키고 도어사 만세덕(만세덕)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8월에 양호가 중국으로 갈 때에 임금이 홍제원까지 가서 전별하였는데 이별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양호도 슬퍼하여 얼굴빛이 달라졌다. 도성 안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 늙은이까지 모두 교외에 나와서 전송하였다. 모화관에 비석을 세워서 그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비(비)는 전고에 자세하다 ○《조야첨재》
○ 8월에 응태가 또 성 쌓던 일로 본국을 모함하였으므로, 본국에서는 또 우상 이원익(리원익)을 진주사로 삼고 허성(허성)과 조정립(조정립)을 부사로 삼아서 주문을 올려 변명하고 아울러 양호를 구원하였다. 《월사집》 ○ 주문은 이정귀가 지었다.
○ 처음에 정응태가 있는 힘을 다하여 양호를 모함하였으므로 임금은 대신 중에 문학과 언변이 있고 일처리를 잘하는 자를 가려서 보내려고 영상 유성룡에게 이르기를, “경리를 포창하여 아뢰려고 하려면 모름지기 대신이 가야 할 터인데 좌상은 병으로 사직하고 우상은 체력이 쇠진하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으나, 그때 성룡은 80세의 노모가 있어서 가기를 자청하지 못하였다. 이원익이 성룡에게, “내가 비록 체력이 몹시 쇠진하였으나 아직 갈 수 있는데 다만 나는 문장이 부족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였다.성룡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원익의 말이 자신의 기력이 갈 만하다 하나이다.” 하여, 드디어 그를 보냈다. 압록강 가에 갔을 때 응태를 만나서 원익이 숲 사이에 피하였으므로 응태가 의주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알고 날이 어두워진 뒤에 두세 장교와 군사를 보내어 요동 경계에서 뒤쫓아 미치었다. 일행을 돌려보내려고 매우 급하게 재촉하니 원익이 직접 중국말을 하여 해명하기를, “우리들은 국왕의 명을 받들어 천자에게 아뢰려는 것인데, 이제 만약 중지하면 이것은 임금의 명을 버리는 것이다. 너희들이 힘으로 우리 일행을 묶어서 거꾸로 실어 돌려 보낸다면 우리들은 국왕에게 할말이 있을 것이다.” 하니, 장교가 강제로 하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돌아가 버렸다.응태가 사람을 보내어 바로 황제에게 아뢰기를, “신이 조선에 도착하여 길가에서 떨어져 있던 작은 책을 주웠는데 모두 조선이 왜를 섬기던 절목이었으며 또 국왕의 선조에게는 모두 조(조)니, 종(종)이니 하는 칭호를 썼나이다. 지금 왜구가 오자, 수상 이원익이 국왕과 함께 유인하여 길을 빌리도록 하였으니, 이제 이원익을 금의위(금의위)의 옥에 가두고 엄하게 문초하면 그 실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말이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교묘하였다.원익이 날마다 병부와 과도(과도) 도어사에게 사실을 진술 변명하고, 또 글을 지어서 통정사(통정사)에 올려 아뢰어 주기를 빌었으나 통정사에서는 문을 닫고 들여보내 주지 않으므로 어찌 할 수가 없어서 돌아왔다. 《명신록》
○ 처음에 성룡은 어머니가 늙었다고 사피하면서, “대신을 대우하는 데에는 소나 말을 얽어매듯 하여서는 안 된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어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원익이 자기가 가려고 하나이다.” 하므로 임금은 드디어 원익을 보내고 성룡을 경시하였다. 지평 이이첨(리이첨)이 먼저 성룡을 탄핵하였는데 이에 홍봉선(홍봉선)ㆍ최희남(최희남)ㆍ윤홍(윤횡)ㆍ유숙(류숙) 등이 서로 이어서 소를 올리니 성룡이 드디어 파면되어 돌아갔다. 《일월록》 《혼정록》
○ 응태는 본국에서 양호를 구원하려 하는 것을 노엽게 여겨 9월 2일에 글을 올려서 본국의 죄를 얽어서 무고함이 끝이 없었다. 황제가 조정의 신하에게 그 글을 내려서 의논하게 하고 급사 서관란(서관란)을 조선에 보내어 조사하기까지 하였다. 형개는 응태가 눈썹을 깎고 머리를 싹둑 벤 격변 등의 일을 아뢰었다. 임금은 거적을 깔고 정사를 보지 않았다. 《월사집》
○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양호를 의지하여 든든하게 여기고 있었다. 임금이 이원익을 보내어 양호를 그대로 머물러 두기를 아뢰었더니, 응태가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에 노여움을 옮겨서 끝없이 모함하였다. 임금은 정전을 피하고 조회를 철폐하여 달이 넘도록 정사를 보지 않고 거적을 깔고 황제의 명을 기다리니 국내가 크게 진동하였다. 대신이 마땅히 가서 진술하고 변명하여야 될 것인데, 의논을 하는 자들은 유성룡이 자청하여 진술하고 변명하려 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하기로 논핵하였다. 특별히 이항복을 우상에 임명하여 진주정사(진주정사)로 삼아서 밤중에 북경에 가게 하였다. 항복이 힘껏 우상의 직을 사양하고 가함(가함)으로 사신에 충원되기를 원하니, 임금은, “모함을 해명하려고 하면서 먼저 황제를 속인다면 되겠는가.” 하였다. <백사행장>
○ 상사(상사)가 아뢰기를, “모함을 변명하는 외에도 필히 허다하게 진술하고 변명할 일이 있을 터이니 응교 신흠(신흠)은 문장을 잘 지어 명백하고 간절하고 직절하니 신흠을 서장관으로 삼기를 청하나이다.” 하니, 임금은, “일찍이 신흠이 지은 자문을 보니 그리 좋지는 못하였으니 이 사람을 서장관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지금 아뢰는 글에는 이정귀처럼 잘하는 자가 없다.그의 글을 보면 속마음을 모두 표현해내어서 성의를 다 표현하고 온화하고 점잖으니 참으로 글을 잘 짓는 선비이며 사람됨도 자못 계책이 있으니 품계를 올려서 부사로 데리고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참지에서 공조 참판으로 승진시켜서 가게 하였다. 《월사집》
○ 정응태가 무고하여 아뢰기를, “왜를 꾀어서 함께 중국을 침범하여 요하(료하) 이동을 탈취하여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려 한다.” 하였고, 또 조(조)니 종(종)이니 하는 칭호로 큰 죄를 만들었으므로 정귀가 드디어 하나하나 진술하고 변명하였다.이때 유성룡은, “조니 종이니 하는 칭호가 가장 큰일이다. 사실을 자백하면 화를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니 칭호 문제는 빼어 버리고 의논하지 않는 것이 낫다.” 하여 조정의 의논이 오래도록 결정되지 못하였다. 임금이 친필로 전교를 내려, “군신은 부자와 같은데 어찌 숨길 일이 있으리오. 이것으로 죄를 받더라도 나는 진실로 달게 여길 것이니 이대로 바로 아뢰는 것이 옳다.” 고 하였다. 《월사집》 ○ 그때에 글 잘하는 선비 두세 명을 잘 선발하여 각기 주문을 지어 올리게 하여 선택하여 쓰려 하였는데, 드디어 이정귀의 글을 사용하였다. 《월사집》
○ 북경에 도착하여 주문(주문)을 병부에 올렸더니 상서 소태형(소태형)이 사신을 불러서, “어찌 오는 것이 더딘가. 황상에서 정찬획(정찬화)의 주본(주본)과 《해동기략(해동기략)》을 향안(향안)에 두고 그대 나라의 변명을 기다린 지가 오래되었다.” 하므로, 사신은, “방물(방물)이 역참을 통과하지 못하여 일정(일정)을 헤아려서 왔다.”고 대답하였다. 태형은, “너의 나라가 지금 끝없는 모함을 입고 있으므로 주문을 올려 변명하는 것이 일각이 급한데 방물이 무슨 소용인가.” 하였다.각로(각로) 심리(침리)ㆍ주갱(주갱) 등이 주문을 보고 모두 머리를 끄덕이며 칭찬하기를, “좋은 문장이다. 명백하고 명백하다.” 하고 조니 종이니 하는 칭호에 대하여 변명한 한 항목을 가리키며, “노련하고 충실하다. 임금에게 숨김없이 고하니 조선은 참으로 예의의 나라로다.” 하였다. 황제가 주문을 보고 병부에 내렸다. 성지를 받들어 병부에서는 부(부)ㆍ부(부)ㆍ구경(구경)ㆍ과도(과도)와 회동하여 주문을 보고 의논하였으며 서른 아홉 아문의 관원이 동각에서 회의하게 되었다고 와서 말하였다.정귀는 하룻밤 사이에 초고를 써서 각 아문에 글을 올리려고 하여 역관 이언화(리언화)ㆍ사자관(사자관) 이해룡(리해룡) 등이 서른 아홉 건을 나누어 써서 이튼날 새벽에 동각에 바쳤더니 각로 이하의 여러 관원들이 궁궐 뜰을 메우고서 서로 다투어 가져다 보고 크게 칭찬하였으며, 원근에서 듣는 자들도 다투어 와서 베껴 가지고 갔다. 여러 관원의 복의(복의) 중에, “조선 국왕의 주문을 삼가 살펴보니, 명백하고 통쾌하여 그 주문을 읽으니 충성된 마음과 정의의 마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줄줄 흐르게 하나이다.” 하는 말이 있었다.의논이 들어가니 황제가 곧 분부를 내려서 사실이 밝게 분변되고 무함이 통쾌하게 씻어졌다. 먼저 왔던 역관이 밤중에 달려오니 동정(동정)했던 대소 장수들이 임금에게 와서 하례하고 모두 주문을 좋은 문장이라고 칭찬하였다. 《월사집》
본국 사람 노인(로인)이 표류하여 소항(소항)에 도착하니 남중(남중)의 선비들이 모두 이 주문을 외우면서, “조선 이정귀의 글이다.” 하였다.
○ 황제의 성지에, “짐이 어찌 한 작은 신하의 사사로운 분노와 망녕된 고발로 장군의 오랜 전쟁터의 노고와 속국 군신들의 울며 부르짖는 괴로운 심정을 생각하지 않으리오. 정응태는 행동거지가 사리에 어그러져서 거의 큰 일을 그르칠 뻔하였으니 관직을 파면하여 평민이 되게 하고 고향에 돌려 보내어 죄 정함을 기다리게 하라.”는 말이 있었다.
○ 12월에 이항복 등이 돌아오니 조정에서는 곧 신식(신식)을 보내어 표를 올려 은공을 사례하였다. 《일월록》에는, “기해년 1월에 이항복ㆍ이정귀 등이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고사촬요》
○ 이미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의논하는 자가 응태의 일로 접반사 백유함(백유함)에게 죄를 돌려서 옥에 가두었는데 삼성 회국(삼성회국) 때에 이항복이 위관(위관)이 되어서 그의 원통함을 밝히었다. <백사행장>
○ 주문의 대략은, “정응태가 성을 쌓는 데에 한 가지 일로써 알 수 없는 말로 신을 무함하니 신은 놀라 당황하고 몹시 원통하옵니다. 이미 주본을 갖추어 슬프게 호소하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명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어 본관(본관 정응태(정응태))의 세 번째 소를 보니 저희 나라를 무고함이 극히 낭자하고, 신에게 악명을 씌워 못하는 말이 없었으니, 한 가지는 왜를 꾀어서 중국에 침범한다는 것이고, 한 가지는 천조(천조)를 우롱한다는 것이고, 한 가지는 왜를 불러서 옛 땅을 회복하려 한다는 것이고, 한 가지는 왜적과 교통한다는 것이며,혹은 양호와 한 당이 되어서 천자를 속인다는 것이고, 혹은 왜적의 분함을 돋구워서 구원을 청하여 화를 천조에 옮긴다는 것이니, 신이 다 읽기도 전에 심장이 떨어지고 찢어지나이다. 신은 청컨대 한 조목씩 아뢰겠나이다. 살피건대 일본이란 한 종족이 동해 밖에 있어서 바닷길이 아득하고 그들의 소굴이 험하고 머니, 이것은 실로 천지가 다른 종족을 구별지어 놓은 것인데 저희 나라가 불행히도 그들과 이웃이 되었나이다.저들은 배를 집으로 삼고 겁탈하는 것을 일삼아서 돛 바람이 세차게 불 때에도 왕래가 무상하여 고려 말기에서 저희 나라의 초기에 이르기까지 함부로 날뛰며 침략하여 해마다 변경의 걱정이 되었으며 동남 연해의 수천 리의 땅이 황폐해져 가시덤불이 되었습니다. 선신(선신) 강헌왕(강헌왕 태조(태조))이 힘껏 싸워 섬멸해 겨우 평정하였으나 아직도 그 몰래 나오는 놈은 능히 막아내지 못하였던 것이옵니다.땅이 떨어져 있고 바다가 멀어서 동정과 소문을 탐지할 길이 없었는데 대마도만은 우리와 가장 가까워서 그 사람들이 우리와 무역하는 것을 이롭게 여겨 남쪽 변경에 찾아오므로 드디어 그 정성을 보아 왕래하는 것을 허락하였더니, 그 뒤에는 일본 여러 섬의 왜들도 대마도를 통하여 좋게 지내려고 하므로 저희 나라에서는 그들을 짐승같이 보고 뱀같이 대우하나 오직 백성을 위하는 생각에서 드디어 관시(관시)를 허락하여 그들의 요구에 맞추어 혹 미곡을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나이다.이에 관(관)을 두어 왜놈을 대접하는 예가 있게 되었는데 이세수(이세수)가 돌아갈 때에 명주와 쌀을 준 것과 수린승(수린승)이 돌아갈 때에 유서(유서)를 부쳐보낸 것이 곧 이것이옵나이다. 정통(정통) 년간에 그들이 사신 보내기를 요구하므로 배신 신숙주(신숙주)를 일본에 보내서 통유(통유)하고 왔는데, 이는 저들의 정세에 보고하려는 것이었나이다. 오직 이와 같았으므로 정통 계해년에 왜가 상국을 침범하고 이어서 저희 나라 제주(제주)에서 약탈하다가 저희 나라 변방의 신하에게 잡히고 남은 적들은 대마도로 도망쳤습니다.저희 나라는 사람을 보내어 도주(도주)에게 잡아 보내도록 효유하여 드디어 포로를 천조에 바쳤습니다. 가정(가정) 계미년에는 왜놈들이 중국 영파부(녕파부)에서 난을 일으켜 변장을 죽이고 달아났는데 그 무리였던 등원(등원)ㆍ중림(중림) 등이 저희 나라에 잡혔으므로 곧 포로와 적의 머리를 벤 것과 포로당하였던 한인(한인)을 바쳤습니다.또 가정 계축ㆍ병진년 등에도 침범하였던 왜를 모두 잡아서 절차대로 포로를 바치고 여러 번 조정의 포상을 받았사오니 이것은 모두 저희 나라가 천조를 위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일면으로는 막아서 그들의 칼날을 막고 일면으로는 어루만져서 그 침범할 틈을 방지하여 추악한 무리들을 두려워하고 복종시켜 감히 침범할 마음을 내지 못하게 하여 변경의 화를 그치게 하고 속국의 직분에 힘쓴 것이옵나이다.또 대마도의 왜가 처음에 제포(제포)ㆍ부산포(부산포)ㆍ염포(염포) 등지에 가서 살면서 그 곳을 무역하고 고기잡이 하는 곳으로 하겠다고 청하므로 저희 나라에서는 드디어 그들이 와서 살 것을 허락하고 그들에게 왜적의 소식을 정탐하여 보고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삼포왜호(삼포왜호)라는 말이 있게 된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는 곳과 통행하는 곳이 다 일정한 곳이 있어서 위반하지 못하게 하였고, 거주지를 빙자하고 막사를 짓는 자와 장사차로 가만히 사귀는 자로 일을 마치고도 일부러 머무는 자는 낱낱이 모두 엄금하였으니, 이것은 《해동기(해동기)》에 이미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정덕(정덕) 경오년에 삼포의 왜놈들이 난을 일으켜 제포 첨사 이우증(리우증)을 죽였으므로 드디어 장수를 보내어 섬멸하였으니 삼포에 왜의 집이 없어진 지가 지금 벌써 89년이옵니다. 이제 정응태가 저희 나라가 만력 20년(임란 때)에 대대로 살던 왜호를 보내서 여러 왜를 불러 군사를 일으켜 함께 침범하려고 한다 함은 말이 근사하지 않음도 이에 이르렀습니다. 《해동기략(해동기략)》에 대해서는, 이것은 배신 신숙주가 왜인이 자기 나라 풍속ㆍ세계(세계)ㆍ지도를 기록한 것을 얻어서 그 본고(본고)에다가 소방에서 관을 두고 왜를 접대하던 사례를 붙여서 한 책을 만들고 《해동제국기(해동제국기)》라고 명칭하여 이국기문(이국기문)으로 하였던 것인데, 이제 항아리나 덮을 여러 조각이 난 문서로써 사람을 죄에 빠트리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뜬 소문을 주워 모으고 거짓말을 꾸며대는 것이 또한 너무 심하기도 하옵니다. 그 소위 일본의 연호를 크게 쓰고 중국의 연호를 작게 썼다는 일은, 이 글이 다만 그 나라에서 기록한 것에 주석을 단 까닭으로 그 나라에서 연호를 참칭한 밑에 천조의 연호를 분주(분주)하여 일본이 참칭한 모년이 곧 천조 건원(건원)의 몇 년이란 것을 표시한 것이므로, 크게 쓴 것은 본기(본기)이고 나누어 쓴 것은 주를 단 것이니, 즉(즉)이란 한 자를 더 쓴 것은 그 뜻이 더욱 명백한 것입니다.춘추(춘추)는 노 나라 역사를 인하여 지은 것이므로 노 나라의 원년을 크게 쓰고 그 밑에 주 나라 평왕(평왕) 몇 년이라고 분주하였으나 또한 이것으로 인하여 주 나라를 높이는 대의(대의)를 의심한 때가 있었나이까. 하물며 그 국왕과 관백(관백)에 대해서는 모두 사(사)라고 썼으니 높여서 받드는 것이 과연 이 같은 것이오니까. 또 글 가운데 이미 내조(래조)하였다고 썼는데 이제 정응태는 피차간에 서로 조회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이미 미곡을 하사했다고 하였는데 이제 조선 사람이 공을 바쳤다라고 하여 스스로 근거없는 말을 지어내어 그 실상을 가렸으니, 정응태가 우리에게 죄를 씌우려고 한다면 무슨 할 말이 없겠습니까.만약 저희 나라가 일본 연호를 받든다고 한다면 서문 끝에 어찌 천조의 성화(성화) 기원을 게재하였겠습니까. 또 그 서문은 신숙주가 그 글을 인하여 옛날에 오랑캐를 대우하던 방법을 널리 논한 것으로 이것은 한 문사(문사)의 글을 쓴 잘못에 불과한 것인데 이제 이것을 트집잡아 죄안(죄안)으로 삼고자 하여 중국을 경시한다는 것으로 지목하니 어찌 원통하지 아니하리까. 하물며 그 글 가운데 이른바, ‘왜국이 참과 거짓을 속여서 온갖 거짓말을 하여 산골짜기와 같은 욕심이 끝이 없어 조금이라도 그들의 의사를 어기면 문득 노한 말을 하되 지역이 떨어져 있고 바다가 가로 막혀서 진정과 허위를 살피기 어렵다.’는 등의 말은 곧 저희 나라가 왜를 대우한 실정이 이미 그 대강이 나타난 것입니다.조(조)라고 일컬은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해외의 궁벽한 저희 나라는 삼국 시대로부터 예의와 명호(명호)를 중국을 사모하여 모방함이 많았는데, 우리 선신(선신) 강헌왕(강헌왕)에 이르러서 중국의 제도를 범한 것은 모두 수정해 미세한 절목에까지도 모두 삼가 상하의 구별이 분명한 분수로 삼아 자손에게 전하여 금석같이 굳게 지켰으나 그 칭호만은 신라ㆍ고려로부터 이러한 오류가 있었으니 이는 신민들이 옛것을 그대로 따르고 잘못된 것을 이어받아 외람되게 존칭을 붙여서 서로 계승하여 내려오면서 고칠 줄을 몰라서이니,이것은 실로 무지하여 함부로 지은 죄이오니 이것으로 죄를 받게 된다면 신이 비록 만 번 죽어도 진실로 할 말이 없을 것이오나 만약 이것을 참람하다고 한다면 그 실정은 아니옵나이다. 저희 나라는 선신 이후로 성심으로 상국을 섬겨서 율(률)은 대명률을 사용하고 역(력)도 대명력을 사용하였으며 복색ㆍ예의도 사모하여 숭상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공사(공사)의 간독(간독)에도 모두 중국의 연호를 받들었으니, 어찌 감히 구구한 조(조)니 종(종)이니 하는 한 칭호로 스스로를 상국에게 참람히 한다는 죄에 빠트리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천조에서 소방 보기를 한 집안같이 여겨서 소방의 서적으로 국사(국사)ㆍ패설(패설) 같은 것이 중국에 많이 들어가서 소방의 사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데 신이 어찌 감히 있는 것을 없다고 하여 스스로 속이는 죄에 빠지리까.소위 협강(협강) 중주(중주)라는 곳은 소방의 의주와 다만 강물이 사이에 막혔을 뿐이므로 얼음이 얼어붙으면 질펀하게 평지같이 되어서 이쪽저쪽의 백성들이 서로 교통하여 매매하는데 사단을 일으킬까 염려한 까닭에 가정(가정) 연간에 도사(도사)에게 자문을 보내고 혹은 조정에 아뢰어서 몰래 농사를 짓던 곳을 모두 황무지로 만들고 비석을 세워서 금지하기로 약속하기까지 하였으니, 일의 전말은 이와 같음에 불과하였습니다. 소방은 스스로 응분(응분)의 땅이 있고 천조에서도 정해진 제도가 있어서 경계에 대한 일은 소방이 진실로 그 일정한 것을 삼가 지켜서 한결같이 처분만 듣는데 어찌 저 경계 이 경계 하면서 서로 다투어 점령할 리가 있으리까.다만 거주하고 농사짓는 것을 금지하여 두 쪽 백성이 섞여 살다가 사단을 일으키는 폐단을 막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소방이 일찍이 요동 백성들과 다툰 적이 없는데 정응태는 다투었다 하며, 도사가 일찍이 이 일로써 판단한 적이 없는데 정응태는 도리어 판단하였다고 말하고, 심지어는 왜를 불러서 함께 침범하여 요하 이동을 탈취하여 옛 땅을 회복하려 한다고까지 하니 말의 망극함이 이에 이를 수 있습니까. 신묘년 봄에 왜장이 글을 보내서 함께 역적질을 하자고 협박하고 길을 빌리라고 요구하여 언사가 흉악하고 참혹하므로 신은 대의로써 거절하고 그 사신을 쫓아내고는 곧 주문을 갖추어 급히 알렸는데,임진년에 이르러 적은 드디어 나라를 비우다시피 하고 쳐들어와서 신의 팔로(팔로)를 망치었고 신의 삼도(삼도)를 전복시켰으며 신의 두 묘(묘)를 무너뜨리고 신의 오묘(오묘)를 불태웠으며 짓밟고 휘몰아쳐서 군사를 다 거느리고 서쪽으로 오니, 이것은 그들이 중국을 침범하려는 계책이 진실로 하루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온데 신이 이미 힘으로 흉악한 칼날을 대항하여 죽음으로 강토를 지키지 못하여 필마로 창황히 서쪽 변방에서 낭패를 당하여 다만 서쪽으로 가서 부모의 나라(중국)에서 죽고자 할 뿐이온데, 고금 천하에 어찌 도적을 끌어들여서 스스로 자기 나라를 전복시키고 군부의 나라에 땅에 다툴 자가 있으리까.이것은 한갓 신을 무함하려는 데 불과한 것으로 스스로 그 말이 허황됨은 깨닫지 못한 것이옵니다. 그러나 신이 이런 말을 찬획(찬획 정응태)에게 듣는 것은 또한 그 연유가 있으니, 신이 지난번 양호가 갈 때 남아 있게 해줄 것을 아뢰는 글을 올렸던 바 논의가 서로 어긋남으로써 격분하여 이에 이른 것이옵나이다.” 하였다.
○ 그때 양호가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임금이 수첩에 동궁에게 왕위를 전하고 싶다는 것을 친히 써서 도승지 이호민(리호민)에게 주어서 양호에게 전하게 하였는데 말이 몹시 애절하였다. 양호는 회답하면서 다만 두 구절을 편지에 적었는데, “전쟁으로 몹시 어수선한 날이니, 진실로 왕위를 전[권근]할 때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매우 옳게 여겼다. 《지소록》
○ 예로부터 동정(동정)한 장사가 비록 성공한 자라도 모두 죄를 얻고 갔다. 한 나라 무제(무제)가 사군(사군)을 평정하였으나 순체(순체)와 양복(양복)이 함께 죄로써 갇혔고, 당 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였으나 이적(리적)이 공을 아룀이 진실하지 못하다고 하여 삭직(삭직)되었으며 백제를 평정한 소정방(소정방)과 설인귀(설인귀)도 공을 다투다가 봉작(봉작)이 정지되고 관직이 떨어졌으며, 요(료)는 고려의 강조(강조)를 사로잡은 소손녕(소손녕)이 고려 임금을 쫓아가 잡지 않았다고 외방에 유배시켰다.원 나라는 살례탑(살례탑)의 죽을 죄로써 부장이었던 아록첩아(아록첩아) 이하가 모두 주벌을 당하였고, 임진 이후로 송응창은 탄핵되어 고향에 돌아갔으며, 이여송(리여송)은 공을 보고함이 너무 지나쳤으므로 탄핵되어 처분을 기다렸다. 유황상(류황상)과 원황(원황)은 모두 직책이 갈렸으며, 정유년에는 양호가 탄핵되어 돌아갔고, 형개ㆍ마귀ㆍ유정이 모두 정응태의 탄핵을 받았고, 정응태도 이 일로 강직되었으며, 만세덕(만세덕)도 안신(안신)의 탄핵으로 녹봉이 정지되었으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지소록》

석성과 심유경의 하옥
 

명 나라의 과도관 채사목(채사목) 등 7, 8명이 선후로 소를 올려 일본에 봉왕하여 주는 은전은 마땅히 파할 것이며 병부에서 국사를 그릇친 것과 총독의 결단성 없는 행동을 말하고 모두 삭직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출병하여 조선을 구원하도록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주공교(주공교)는 소를 올려 여덟 가지 속인 것과 다섯 가지 그르친 것을 석성의 죄목이라고 열거하였는데 극히 준엄하였다.양방형(양방형)은 조정의 의논이 너무나도 준엄함을 보고 비로소 전말을 실토하고 죄를 심유경에게 미루고 아울러 전일에 받은 병부 및 총독의 수서(수서)를 올리니 황제가 비로소 유경의 매국한 것과 병부의 미봉하려던 실상을 알고 유경을 잡아 가두도록 명하고 병부를 꾸짖으니, 병부 상서 석성이 소를 올려서 변명하였으며 총독 손광(손광)은 병추(병추)의 직에서 사면되기를 원하였다. 황제는 이에 양방형을 옥에 가두고 율대로 문초하였고, 형부 상서 소태형(소태형) 등에게 명하여 경(경)과 과도관을 모아서 복의(복의)하게 하고, 조서를 내려, “석성은 마음으로는 병사를 쉬게 하고 군비를 소비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국사를 그르치는 말을 경솔히 들었으니 사정으로 볼 때 용서할 점이 있다.관직을 파면하고 명을 기다릴 것이다. 청정이 재차 온 것은 손광의 소치가 아닌데 이제 사면하면 사기를 잃을까 염려되나 관직을 파면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하고, 양방형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소인이니 본래 마땅히 무겁게 추궁하여야 할 것이나, 우선 멀리 사신으로 갔던 노고를 생각해서 파직하고 서용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방형은 이미 돌아갔고 유경은 칙서를 받들어 양국의 일이 완결됨을 기다려서 돌아가겠다고 칭탁하면서 이에 영병(영병) 3백 명을 거느리고 부산에 출입하였다. 이어 의령ㆍ경주로 갔다가 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을 헤아리고 문득 발길을 옮겨 왜국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청정의 군사가 이미 양호(량호)로 향하였다. 황제가 양호에게 유경을 덮쳐 잡을 것을 명하였다. 양호는 비밀히 양원(양원)을 시켜 잘 달리는 기병에게 단계(단계)로 달려가 잡아서 형틀을 씌워 보내게 하였는데, 유경은 후한 재물로 감군 소응궁(소응궁)에게 뇌물을 주었다.이에 응궁이 편지를 형개에게 부치니 형개가 글로 아뢰었더니, 요동 순안어사가 듣고 응궁을 탄핵하고 삭직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하고, 유경을 금의옥(금의옥 명 나라 황제의 직속으로 두었던 금의위(금의위)의 옥)에 가두고 3년 만에 저자 거리에서 베어 죽였다.
○ 황제는 남원에서의 패전한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정전을 피하고 음식의 가지 수를 줄이며, 풍악을 정지하고, 석성을 옥에 가두고 ‘왜와 통하여 우환을 자아내고 나라를 팔아 위엄을 손상시켰다.’ 는 죄목으로 베어 죽이기로 논죄하니, 형부 상서 소태형(소태형)이 힘껏 말렸으나 황제가 들어주지 않아 석성이 마침내 옥중에서 병이 나서 죽으니 사람들이 매우 원통하게 여겼다.
○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에 사당을 세우고 석성과 이여송을 아울러 제사 지냈다.
○ 최립(최립)이 북경에 갔을 때 석성이 보고 말하기를, “내 비록 노년이었지만 수염과 머리털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었는데 너희 나라를 위하여 걱정한 뒤로부터 이처럼 희어졌다. 다만 조신으로서 너희 나라 일을 담당한 자로는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낸들 어찌 오래 살겠는냐. 내가 죽은 뒤에는 아마 다시는 너희 나라 일을 담당하려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간이집》
○ 석성은 키가 8, 9척이나 되고 용모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멀리서 바라보아도 덕스런 기상이 있었으며 눈에는 정기가 빛났다. 사신을 대하여 본국의 일을 말할 때에는 왕왕 눈물을 흘렸으니 그 정성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만약 이때 병무를 주관하는 자리에 이 사람이 없어서 다른 의론이 일어났더라면 우리나라의 일은 또한 매우 위태했을 것이다. 공을 이루고서도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아까운 일이다. 《서애집》

수륙으로 동정하여 왜적이 철환(철환)하다
 

황제가 남원에서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도독 동일원(동일원)ㆍ유정(류정)과 수군 도독 진린(진린)에게 여러 장수의 병마와 수군을 통솔하여 길을 나누어서 동정할 것을 명하였다. 정유년 겨울에 형개가 서울에 도착하였으므로 윤두수ㆍ이원익을 접반사로 삼았다.
○ 무술년 1월에 유정ㆍ동일원이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김수(금수)ㆍ이충원(리충원)을 접반사로 삼았다. 진린은 절강의 군사 5백여 척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서 당진(당진)에 정박하였다.
○ 2월에 산동 포정사사(산동포정사사) 우참의 양조령(량조령)이 소응관(소응관)을 대신하여 나왔다.
○ 3월에 찬획 주사 서중소(서중소)가 정응태를 대신해서 왔는데 감군을 겸하였다. 7월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돌아갔다.
○ 그때 왜적이 남쪽 변경에 주둔하여 웅거하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이 때맞추어 농사를 짓지 못하니, 곤궁하여 굶주림이 날로 심하였다. 중국 조정에서 산동의 좁쌀 백만 섬을 보내어 구제해 주었다.
○ 여름 4월에 행장이 요시라(요시라)을 임실(임실)에 보내와서 화친하기를 청하므로, 옥에 가두었다가 이내 중국에 보내어 베어 죽였다. 《일월록》
○ 수군 제독 진린이 수군을 거느리고 전라도로 내려가려 할 때 임금이 청파(청파) 혹은 동작진(동작진)이라고도 한다. 에서 전송하였는데, 진린이 표독하고 거만하여 사람들에게 거슬린 점이 많았으므로 임금은 이순신과 사이가 좋지 못할까 걱정하여 잘 대접하도록 은밀히 명하였다.그때 순신은 강진(강진)의 고금도(고금도)에 주둔하여 군대의 위의를 성대하게 갖추고 멀리까지 나와서 맞이하고 도착하여서는 곧 크게 잔치를 벌여서 군사를 대접하니 중국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과연 훌륭한 장수다.” 하였다. 진린도 마음으로 기뻐하여 임금에게 글을 올려, “통제사는 천지를 다스릴 만한 재주를 지녔고,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킬 만한 큰 공이 있습니다.” 하였다.
○ 4월 16일에 이순신은 적군을 고금도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앞서 순신이 진린과 함께 잔치를 열고 있는데 갑자기 적이 쳐들어 온다는 급보가 이르러 잔치를 파하고 장좌(장좌)에게 분부하여 모든 것을 정비하고 때를 기다리게 하였다.한밤중에 바람결에 노젓는 삐걱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새벽 무렵에 적선이 과연 많이 왔다. 이에 순신은 진린을 높은 곳에 올라서 내려다보게 하고 자신은 많은 배를 거느리고 적의 한복판에 뚫고 들어가서 화살을 쏘고 돌을 던지며 화포도 함께 쏘아서 잇달아 50여 척을 불사르고 적의 머리 백여 급을 거두어 베니 적이 도망쳐 돌아갔다. 이를 보고 진린이 매우 기뻐하며, “이 사람은 임금의 주석(주석)이 될 만한 신하이다. 옛날의 명장인들 어찌 이보다 나으리.” 하였다. 《일월록》
○ 이때 녹도 만호(록도만호) 송여종(송여종)이 중국 배와 함께 나아가 적선 여섯 척과 적의 머리 70급을 포획하였는데 명 나라 군사는 소득이 없었다. 진린이 듣고 부끄러워서 성을 내자 순신은, “대인께서 와서 우리 군사를 통솔하니 우리 군사의 승리는 바로 명 나라 군사의 승리인데 우리가 어찌 감히 공을 차지하겠습니까. 얻은 것을 드릴 터이니 모두 아뢰십시오.” 하였다. 진린이 매우 기뻐하며, “내가 그전부터 공은 조선의 명장이라고 들었는데 과연 그러하오.” 하였다. 《조야기문》
○ 그때 행장은 군사를 거두어 험한 곳에 웅거하고서 순천의 왜교(왜교)에 진을 쳤는데 순신은 왜교 백 리의 거리에 진을 쳤다. 7월에 진린이 수군 5천 명을 거느리고 순신과 함께 진을 치고, 유정은 묘병(묘병) 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순천 동쪽에 진을 쳐서 장차 수군과 육군이 일제히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명 나라 군사가 우리 군사를 침노하여 성가시게 굴므로 순신이 군중에 영을 내려서 막사를 철거하였다.진린이 괴이히 여겨 묻자 순신은, “명 나라 군사가 올 때에 부모를 맞이하듯이 하였는데, 때때로 침노하는 까닭에 우리나라의 새롭게 모인 백성들이 모두 멀리 옮겨가려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진린이 크게 놀라서 순신에게 편리한 대로 행사할 권한을 주어 뒷날에 다시 침노하는 일이 있으면 죄를 주도록 하니 온 군중이 이를 힘입어 안정되었다. 《백사집》 《유사》
○ 7월에 총독 형개가 다시 와서 서울에 주둔하였다.
○ 도독 유정이 군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는데 임금이 동작 강가에서 전송하였다.
○ 경리 만세덕이 서울에 들어왔다.
○ 그때는 왜적이 우리나라에 웅거하고 있은 지 7년이 되었는데 연해 천여 리를 세 개의 소굴로 나누어서 동쪽에는 청정이 도산에 웅거하고, 서쪽에는 행장이 순천 율림(률림)의 왜교에 웅거하고, 중간에는 석만자(석만자 도진의홍(도진의홍))가 사천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북으로는 진주의 남강을 의지하고 남으로는 대해와 통하여 동ㆍ서로 성원할 수 있는 지세인데다가 살마주(살마주)의 병정은 날렵하고 사나워서 강적이었으므로 행장의 수군은 번을 갈라 쉬면서 빠르게 왕래하면서 양식을 보급하였다.어떤 사람이 경리에게 말하기를, “조선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산수가 험하여 막혔으므로 군사를 한 곳에 모아두면 성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지세에 따라 사람을 나누어 맡겨서 각자 싸우고 지키게 해야 승리할 수 있소.” 하니, 경리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 형개와 만세덕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었다. 마귀는 동쪽 길을 맡았는데, 참장 양등산(양등산)ㆍ도사 설호신(설호신)ㆍ총병 오유충ㆍ참장 왕국동(왕국동)ㆍ유격 진잠(진잠)ㆍ섭사충(엽사충)ㆍ진인(진인)ㆍ파귀(파귀)ㆍ총병 해생(해생)ㆍ유격 진우문(진우문)ㆍ팽신고(팽신고) 등이 군사 2만 4천 명을 거느리고 모두 그에게 통솔되었다.동일원은 중간 길을 맡았는데, 부총 이여매(리여매)ㆍ유격 도관(도관)ㆍ학삼빙(학삼빙)ㆍ섭방영(엽방영)ㆍ노득공(로득공)ㆍ모국기(모국기)ㆍ안본립(안본립)ㆍ총병 장방(장방) 등이 군사 1만 3천 5백 명을 거느리고 모두 그에게 통솔되었다. 유정은 서쪽 길을 맡았는데, 총병 이방춘(리방춘)ㆍ유격 우백영(우백영)ㆍ남방위(람방위)ㆍ참장 이녕(리녕)ㆍ총병 조희빈(조희빈)ㆍ오광(오광) 등이 군사 1만 3천 6백 명을 거느리고 모두 그에게 통솔되었다.진린은 수로를 맡았는데, 유격 허국위(허국위)ㆍ참장 왕원(왕원)ㆍ주파(주파)ㆍ총병 이천상(리천상)ㆍ유격 계금(계금)ㆍ심무(침무)ㆍ복일승(복일승)ㆍ양천윤(양천윤)ㆍ장양상(장량상) 등이 수군 1만 3천 2백 명을 거느리고 모두 그에게 통솔되었다. 대략 군사가 14만 2천 7백여 명이었는데 말로는 20만이라고 일컬었으며, 서쪽 길의 유격 부량교(부량교) 등은 이 수효에 들지 않았다.
○ 여러 도의 방어사에게 나뉘어 명병에 예속되도록 명령하니 충청ㆍ전라는 서로에, 경기ㆍ황해ㆍ경상우도는 중로에, 평안ㆍ강원ㆍ경상좌도는 동로에 통속되었으며, 황해도와 평안도의 수군은 수로에 통속되었다. 함경도는 국경의 경보가 있으므로 징발하지 않았다.
○ 수륙 네 길의 제독이 일시에 서울로 돌아와서 다시 군문(군문)의 지휘를 듣고, 동시에 적의 소굴 세 곳을 공격하여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하기로 약속하고서 왕사기(왕사기)가 사로(사로)의 군사와 연달아 출발하여 9월 20일에 일제히 도산과 사천과 왜교를 공격하였다.
○ 9월에 정응태와 서관란(서관란)과 진효(진효) 등이 여러 명장의 공과 죄를 감정하고, 아울러 남쪽으로 내려가서 네 길을 순시하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 이날 마귀 동로 군사 는 동래에서 도산으로 진군하여 군사를 독려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청정은 지난 해에 포위를 당한 뒤로부터 여러 진의 군사를 모아 힘을 합쳐서 굳게 지키므로 대군이 성에 다달았으나 어떻게 할 계책이 없어서 곧 도로 나왔으니, 대개 적군의 수가 지난 해에 비하여 열 배나 되었으며 성의 험함도 전일보다 심하였던 것이다. 《고사촬요》에는, “마귀가 자중하여 싸우지 않았다.” 하였다.
○ 동일원 중로의 군사 은 진주에서 군사를 독려하여 먼저 사천의 적을 공격하였다. 적이 군세의 웅대함을 보고 큰 진으로 달아나므로 일원은 군사를 풀어 쫓아가 죽이게 하고 이어 법질도(법질도)를 포위하였다. 연일 공격하며 싸우자 적장 의홍(의홍)이 성에 올라 방어하면서 날마다 스스로 약한 듯이 보이니, 일원이 깔보고 여러 장수에게, “이들을 전멸시키고 아침 밥을 먹자.” 하였다.
○ 16일에 군사를 독려하여 성 밑에 다달았다. 의홍은 염초(도소) 두 서너 섬을 성 밖에 묻고 그 곁에 불 붙이는 도구를 설치한 다음 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싸우다가 거짓 패한 체하고 성으로 들어가면서 성문을 닫지 않았다. 이에 명병이 따라 들어가자 의홍이 군사를 풀어서 힘껏 싸우니 송장이 산더미같이 쌓였다. 조금 있다가 염초에 불이 붙어 군사들이 모두 타죽었다. 이어 여러 적들이 고함을 치면서 덮치자 일원은 겨우 몸만 빠져서 삼가(삼가) 길로 달아나니, 적군이 진주까지 따라와서 남강의 군량 1만 2천 석을 빼앗아 갔다. 일원은 남은 군사를 거두어 거창(거창)에 주둔하였는데 거기서도 군량 8천 석을 잃었다.
○ 처음에 유정 서로의 군사 이 여러 장수와 함께 순천 적군의 진영에 가서 정탐하였는데 도원수와 본도의 방어사 등도 따랐다. 유정이 행장과 강화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행장이, “중국의 대인이 소방에 내려오셨으니 마땅히 날을 가려서 우호를 맺읍시다.” 하므로 유정은, “오는 20일에 대면하고 화약을 맺자.”고 답하였다. 이것은 그때 행장의 왜교의 진영이 성은 높고 지세가 험한데 밖에는 목책을 많이 설치하여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웠으므로 우선 성 밖으로 끌어내려는 계획이었다.이날에 이르러 유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순천으로 가니, 행장이 먼저 몇 명의 왜를 시켜 보도(보도) 한 쌍을 받들어 올리게 하고, 강화할 때에 대병이 왜교에서 5리 밖에 진을 치면 자신은 3천 명을 거느리고 오겠다고 하였다. 이에 유정은 중군으로 제독의 위의를 거짓으로 꾸미고 우리나라 우후 백한남(백한남)으로 병사(병사)의 여장을 갖추게 하고, 혹은 거짓으로 접반을 삼았다 한다. 원수의 군관을 원수로 꾸며서 각각 수백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순찰사 황신은 행장 등이 안면을 알고 있으므로 가짜를 만들지 않고 직접 가서 행장을 중로에서 맞이하게 하고, 왕지한(왕지한)ㆍ사무관(사무관) 등에게는 광양에서 진군하여 행장이 성밖으로 나온 틈을 타서 성에 바짝 다가가서 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게 하여 유정이 안에서 나와 사로잡기로 하였다. 먼저 집 비둘기 20여 마리를 중로에 숨겨 놓았다가 행장이 막사에 들어올 때에 혹은 예를 마치고 돌아갈 때라 한다. 비둘기를 날리면 양쪽 길에서 일제히 공격하기로 계책을 정하였다. 행장이 막사에 이르기 전에 군대의 형세가 매우 성함을 멀리서 보고 의심을 품고서 전진하지 않았다.조금 있다 군중에서 비둘기를 날리는 동시에 다른 책에는, “우협병이 적을 잘못 살피고 먼저 불화살을 쏘았다.”고 하였다. 동로의 군사가 갑자기 포를 쏘면서 쫓아오므로 행장 등이 놀라 달아나서 도로 성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유정은 드디어 군사를 독려하여 세 갈래 길에서 급히 추격하여 힘을 합하여 공격했는데, 좌협 이방춘이 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적의 길을 차단하니 적은 먼저 두 괴수를 보호하여 들어가고, 미처 성에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길에서 육박전을 벌였다. 이에 98급을 베었고 명병의 피해도 많았으나 대군은 드디어 적의 성채를 포위하였다.
○ 진린이 수군 천여 척을 거느리고서 이순신을 선봉으로 삼았는데 배에는 모두 검은 베로 돛을 만들었으며 여러 가지 모양의 깃발을 그 사이에 가로세로로 꽂았다. 묘도(묘도)에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두 마리의 용을 그린 기를 펄럭이면서 전진하였다.
○ 21일에 유정이 목책을 만들고 해자를 파려 하였으나 적이 막아 싸워서 군사가 성에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이날 밤에 유정은 삼군에 영을 내려서 각각 다섯 가지가 달린 홰를 준비하게 하고 대진(대진)에서 바라를 울리고 포를 쏘거든 일시에 횃불을 올리고 성으로 향하는 체하다가 또 불을 끄고 진으로 돌아오게 하였더니 적이 소리에 응하여 연달아 포를 쏘아서 불이 성 밖에 번졌다가 한참 뒤에야 꺼졌다.이튿날 수군이 왜성 북쪽에 정박하고 들락날락하면서 싸움을 돋구니 적이 다투어 물속으로 들어와서 죽기로 포위하므로 우리 군사도 혈전을 벌였는데 조수가 나감으로 물러났다. 밤마다 초저녁이면 적은 바깥 목책 사이에 불을 밝혔다. 유정은 모든 군사에게 방차(방차)와 방패를 만들어서 성을 공격할 기구를 준비하도록 명하였다.
○ 23일에 부량교가 섬진(섬진)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모여 많이 북을 치고 풍악을 울려 적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더니 밤에 적이 글을 보내서, “예로부터 전쟁에 어찌 서로 속임이 있으리오.” 하였다. 밤중에 적의 진중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 말하기를, “왜병이 수만 명이라 하나 적진 중에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이 반이 넘고, 왜들 중에서도 그들의 장수가 일찍 돌아가지 않아 다같이 죽는 화를 당하게 됨을 원망하는 자들이 있다.” 하였다. 적은 또 밤에 성 북쪽 바다 어구에 새로 성을 쌓고 성 위에는 포루(포루)를 많이 설치하고 포루 아래에는 구멍을 뚫어서 힘껏 싸울 계획을 하였다.
○ 10월 1일에 유정은 여러 장수와 함께 내일 성을 공격하기로 약속하고서 날이 저물 때 선봉 수천 명을 모아 교거(교차)에 타게 하고 아울러 대발 높은 사다리를 수송하여 성 가까이 갖다 두고 대군은 진을 옮겨 한데서 주둔하였는데 본국의 장사들도 모두 따랐다.
○ 2일 여명에 유정이 대장기를 세우고 대군을 성 밑에 가까이 가게 하였다. 선봉이 이미 성 밑에 들어가자 마병 만여 명을 동원하여 후원하게 하였으나 적이 포루에 올라서 화포를 쏘았으므로 나무와 돌도 능히 지탱하지 못하였다. 해가 높아지자 갑자기 성 서쪽 호두(호두)에서 두들기고 치는 소리가 나더니 명병이 모두 탄환과 칼에 부상을 입었고, 또 마름쇠를 밟아 어지럽게 흩어지며 엎어지고 자빠지니 적이 쫓아와서 창으로 찔러 혹은 죽이고 혹은 포로로 잡았으며 달아난 자들도 모두 상처를 입었다.또 성 구멍으로 칼을 휘둘러 함부로 찍고 섶을 던져서 윤거와 죽편에 불질렀으므로 죽은 송장이 다 타버렸다. 이때 명병의 죽은 자가 8백여 명이었는데 유정은 억지로 큰소리를 쳐서 군중을 위로하고 우선 싸움을 정지할 것을 명령하였다.
○ 3일에 유정은 진린에게 은밀히 통지하여 밤에 조수가 들어올 때 수군과 육군이 협력하여 공격하기로 하였다. 밤 이경에 수군이 조수를 타고 적의 수채(수채)에 육박하자 육군이 거위 소리를 하면서 응하므로, 수군은 육군이 이미 적의 성에 들어간 줄로 알고 힘을 다하여 먼저 성에 올랐는데 조수가 갑자기 말려가서 배가 육지에 있게 되었다. 이에 적은 진창 가운데로 함부로 들어와서 포위하고 죽이니, 명병은 힘이 모자라서 드디어 이쪽 배 43척에 불을 질렀는데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명병 수백 명은 꼼짝 못하고, “상관! 우리를 살려 주시오.” 하고 부르짖으니 그 소리가 육군에까지 들렸다. 우리나라 배 3척도 그 가운데 있었는데 배가 몹시 높고 견고한데다가 화살을 비같이 쏘아댔으므로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새벽에 조수를 타고 나오게 되어서 우리 군사만은 홀로 화를 면하였다.
○ 그때 진린은 순신과 함께 적을 쫓아서 항구에 들어갔는데 한창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으므로 조수가 밀려나가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세 척의 큰 배가 물이 얕아서 움직이지 못하였는데 적이 불로써 공격해오자 진린은 순신과 함께 발을 구르면서 어떻게 할 바를 몰랐는데, 해남 현감 유형(류형)이 곧 여러 배에다 세 배의 뒤쪽을 묶도록 명하고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힘을 다해서 빠진 배를 움직이게 하자 드디어 배가 끌려 나오니 온 군중이 모두 탄복하였다. <유형묘비(류형묘비)>
○ 4일에 진린이 분발하여 수군을 모두 이끌고 다시 들어가서 공격하였으나 적이 화포를 마구 쏘므로 수군이 능히 지탱하지 못하자 진린은 매우 노하여 육지에 올라 유정의 막사에 가서 손으로 유정의 수자기(수자기)를 찢으면서, “마음속 심사가 좋지 못하다.”고 책망하고, 곧 사유를 갖추어서 급히 군문에 알리니 유정은 얼굴빛이 흙빛과 같이 되어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장관 중에 능한 사람이 없는데 내가 홀로 어찌하겠소.” 하였다.
○ 7일에 유정은 원수에게 퇴군할 것을 명하고 또 따라가 있는 우리 사신들도 모두 먼저 나가도록 명하였다. 밤중에 대군에 명령을 내려서 갑옷ㆍ투구ㆍ군량을 다 버리고 부유(부유)에 돌아가서 주둔하게 하였는데, 양식 버린 것이 7천 9백여 석이었고, 우리나라 여러 진의 양식 천여 석과 소ㆍ말도 많이 버렸다. 이튿날 적은 우리 진이 조용한 것을 보고 매우 괴이하게 여겨서 감히 함부로 나오지 못하다가 얼마 뒤에 다투어 성밖으로 나와서 불을 질러 태웠다.
○ 며칠 뒤에 본국의 여러 장수가 다 부유에 모였다. 진린은 해안에 배를 대고 순신과 함께 날마다 싸움을 돋구었으나 적들은 나오지 않았다. 유정은 또 쌍암(쌍암)에서 불우산(불우산)으로 옮겨 진을 쳤다.
○ 11월 16일에 유정이 다시 대군을 거느리고 왜교로 향하여 전진하니 행장은 영남 해안의 여러 진에 소식을 전하려고 천금을 주고 사람을 구하여 밤 조수를 타고 가만히 나가서 사천ㆍ남해에 급한 형편을 보고하도록 하는 한편 사람을 시켜 유정과 서로 퇴각하기로 약속하고, 또 말하기를, “수군이 핍박해 오므로 우리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으니, 육군으로 호송시켜 주시오.” 하였다. 이에 유정은 오광(오광)을 시켜 40명을 거느리고 적진에 보내었더니 유광은 강화하기로 약속하고 돌아왔다.
○ 19일에 순신이 진린과 함께 적병을 노량(로량)에서 크게 격파하니 행장은 도망쳐 돌아갔고, 순신은 탄환을 맞고 죽었다.
○ 과거에 유정이 진린에게 통지하기를, “적장이 철병하여 돌아가려 하니 놓아 보내는 것이 좋겠소.” 하니 린은, “수군과 육군의 책임이 다르니 마땅히 각자 자기의 할 바를 할 뿐이오.” 하였다. 적선 십여 척이 먼저 묘도에 건너오므로 수군이 모두 잡아 죽였더니 행장이 분노하여 사십 명의 명병을 묶고 두 사람의 팔을 잘라 보내면서. “전후에 속이기를 이와 같이 하니 나는 마땅히 가지 않겠다.” 하였다. 유정이, “진 장군에게 강화하기를 빌면 될 것이오.” 하였더니 행장은 마침내 은 백 냥과 보도(보도) 오십 자루를 진린에게 보내고, “피를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니, 길을 빌려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오.” 하였으므로 진린이 허락하였다.적이 또 배 몇 척을 출발시키자 순신이 맞이하여 죽이니 행장이 다시 진린에게 포위 풀기를 청하고, “강화가 이미 이루어졌는데 공격을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이오.” 하니, “내가 알 바가 아니고 본국의 이 장군이 한 일이다.”고 진린이 답하니 적들이 근심하였다. 사천에 있던 적의 괴수 의홍과 남해에 있던 적 조신 등이 행장이 구원을 청하는 것으로 인하여 노약자들과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을 태워서 먼저 출발시키고 자신은 수백 척을 거느리고 밤 조수를 이용하여 구원하려고 왔다. 이에 순신은 빠른 배를 보내어 진린에게 알려서 모든 배를 거느리고 좌우협이 되게 하고, 우리 군사는 남해 관음포(관음포)에 주둔하고, 명병은 곤양(곤양) 죽도(죽도) 앞바다에 진을 쳤다.밤중에 적이 광주(광주)에서 구름같이 모여서 바로 왜교로 향하였다. 우리 군사와 명병 양군이 덮쳐서 공격하고 불붙인 섶과 화살과 돌을 잇달아 던지니 태반의 왜선이 불타고 부서졌다. 적은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을 하였으나 지탱하지 못하고 마침내 관음포로 물러갔다. 다음 날 19일 아침에 순신이 직접 북채를 잡고 먼저 배에 올라가 추격해 죽이니, 적이 배 꼬리에 엎드려 일제히 순신을 향하여 총을 쏘았으므로 순신이 탄환을 맞았다.급히 장좌(장좌)와 아들 이회(리회)에게 명하여 방패로 자신의 신체를 가리게 하고 곡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였다. 어떤 책에는 형의 아들 이완(리완)이라고 하였다. 이회가 명령에 따라 직접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두르니 해가 아직 한낮도 되지 않았는데 물에 빠져 죽은 적군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죽음을 면하고 도망친 것은 겨우 50여 척뿐이다. 이 싸움에서 9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는데 왼편 귀를 잘라서 모두 명 나라 배에 넘겨 주었다. 행장 등은 한참 싸울 때에 몰래 묘도 서량(서량)에서 달아났고, 남해의 적은 육로로 미조항(미조항)에 들어가니, 의지가 거두어 모아서 배에 태우고 갔다.유정은 왜교에서의 포화의 연기를 보고 달려갔으나 적진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진린은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남해로 들어가서 양식 만여 섬을 거두었는데 소와 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수군이 전후에 죽이고 잡은 숫자가 천 명이나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왜놈으로 잘못 알려져 죽은 자도 많았다. 《일월록》
○ 그때 순신이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백여 명을 베니 적은 배를 모두 끌고 와서 관음포에서 싸우자 진린은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사천의 적을 무찔러 죽였다. 적이 순신의 배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으므로 진린이 우리 배에 바꿔 타고 포위망을 뚫고서 곧장 들어가 구원하려 하니, 적이 또 진린의 배를 포위하여 칼날이 거의 진린에게 닿게 되었다. 이에 진린의 아들 구경(구경)이 몸으로 막다가 찔려서 피가 뚝뚝 흐르는데도 오히려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기패관(기패관)이 당파(당파)로 적의 가슴을 찔러서 바다에 던졌으므로 구경이 겨우 면하였다.적선이 잇달아 모여들어서 위로 조총을 쏘자 명병도 사력을 다하여 아래로 긴 창으로 찌르며 싸우니 물에 떨어져 죽은 자가 천 명이나 되었다. 조금 뒤에 진린이 요령을 흔들어 군사를 거두니 배 안이 고요하여 아무 소리도 없자, 적이 의심하여 조금 물러났다. 명병이 높은 곳에서 분통(분통)을 적선에 흩어놓았더니,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맹렬하게 타올라 적선 수백 척이 잠깐 동안에 줄지어 타 버려서 바닷물이 모두 벌겋게 되었다. 순신은 진린이 포위당한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또한 포위를 꿰뚫고 전진하여 힘을 합쳐 혈전을 하는데, 총병 등자룡(등자룡)의 배에 불이 나서 온 군사가 놀라 불을 피하느라고 시끄러운 틈을 타서 적이 자룡을 죽이고 그 배를 불살랐다. 기해년 3월에 자룡의 상여가 서울에 이르니 임금이 친히 나와서 제사지냈다. 이때 순신은 적선 중에 한 척이 가장 높은데 위에는 붉은 색의 장막을 쳤으며 금 갑옷을 입은 한 사람이 싸움을 감독하고 있으므로 군사를 모아 힘을 합쳐 공격하여 화살로 금 갑옷 입은 자를 쏘아 적중시키니 적이 진린을 버리고 와서 구원하였으므로 진린의 배는 포위에서 풀려 나왔는데 조금 뒤에 순신이 탄환에 맞았다. 《조야첨재》
○ 이날 밤 삼경에 순신은 꿇어 앉아서 하늘에 빌기를, “오늘은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하늘은 반드시 왜적을 섬멸시켜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였다. 빌기를 마치고 직접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노량으로 갔다.
○ 19일 사경에 적이 진린을 포위하여 형세가 몹시 급하므로 순신은 바로 앞에까지 가서 구원하였다. 순신이 화살과 돌을 개의치 않고 직접 손으로 북을 치다가 갑자기 탄환을 맞고 넘어졌다. 순신의 죽음을 듣자 진린은 배에서 엎어지고 넘어지기를 세 번이나 하면서, “함께 일할 이가 없구나.” 하였으며, 남쪽 백성들은 순신의 죽음을 듣고 쫓아와 골목을 메우고 곡하였고, 시장에 간 자는 술자리를 파하였다. 상여가 돌아오자 남도의 선비들은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노인과 어린이들도 길을 막고 곡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명병도 고기를 물리고 먹지 않았다.
○ 좌상 이덕형이 순신의 죽음을 듣고, 충청 병사 이시언(리시언)을 임시로 통제사에 차임하고, 전라 방어사 원신(원신)을 임시로 충청 병사에 차임하였는데, 진린이 먼저 이순신(리순신)을 임시로 통제사로 차임하여 수군을 거느리게 하였다.
○ 그때 적의 괴수 수길이 이미 죽자 수가(수가)와 여러 괴수 등이 진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돌아갔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포로로 있던 우리나라 사람이 보고한 바로는, “7월 17일 《첨재》에는 9일로 되어 있다. 에 수길이 죽어 국내가 매우 어지러워지자, 원가강(원가강)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면서 여러 장군의 처자를 잡아서 인질로 하고 그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하였다.
○ 그때 순천에 있던 적이 사천에 있던 적과 함께 불을 들어 서로 응하므로 유형은, “적이 구원군을 맞아 우리와 싸우면서 빠져 달아날 계획을 하니, 사천의 적을 맞아 쳐서 돌아가는 길을 끊은 것이 좋겠다.” 하고 크게 고함치면서 바로 전진하여 종일토록 고전하였는데, 유형은 탄환을 여섯 개나 맞았으면서도 오히려 꿋꿋이 서서 적에게 화살을 쏘며 의기가 여전하였다.피가 흘러 내려 엉겨서 뭉치살과 같이 되자 그제야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있다가 깨어나서, “대장이 어디 계시냐?”고 물으므로, “이미 탄환을 맞고 죽었다.” 하였더니, 유형은 통곡하면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여 적의 시체가 바다를 덮었다. 뒤에 보고가 올라가서 부산 첨사로 발탁되었다.

수길(수길)에게 약을 먹여 죽이다
 

일찍이 동래 사람 양조한(량조한)과 통한(통한)이 송상현(송상현)과 함께 죽었는데 조한의 손자 부하(부하)는 그때 나이 12세였다. 사로잡혀 대마도로 실려 가서 목창(목창)을 세우고 그 끝에 쓰기를, “조선 양반의 자제로 관백에게 헌신하겠다.” 하였다. 도주(도주)가 처음에는 도망병인가 의심하다가 그가 쓴 것을 보고는 부하를 차례로 여러 섬에 전하여서 수길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수길이 부하를 자세히 보고는, “조선 아이도 일본 아이와 같구나.” 하고 통역하는 왜를 돌아보고 부탁하기를, “네가 이 아이의 스승이 되어 일본 말을 가르쳐라.통달하지 못하면 너를 목벨 것이다.” 하니, 통역관이 두려워하여 촛불을 밝히고 밤을 새워 부하를 가르치면서, “네가 만약 힘쓰지 않으면 나와 네가 함께 죽게 된다.” 하였다. 이튿날 수길이 시험조로 부하를 불렀더니 부하가 잘 대답하므로 수길은 크게 기뻐하였다. 석달 동안 배워서 일본 말을 다 알자, 수길은 사랑하여 항상 좌우에 가까이 있게 하였다. 수길은 삼층 병풍을 뒤에 치고 높이가 한 자를 넘는 자리에 머리를 틀어 뭉치고 다리도 뻗고 앉았는데 왼편에는 포(포)와 검을 두고 오른편에는 활과 화살을 두었으며 위에는 창 따위를 걸어 두었다. 그때 군사를 일으켜 일이 번거로웠는데도 수길은 할 일이 없었다.곁에 근신 다섯 사람이 있어서 한가할 때면 옛 일을 이야기하고 손뼉을 치면서 즐거워하였다. 수길에게는 다섯 명의 계집이 있었으나 자식이 없다가 군사를 일으키던 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이 수뢰(수뢰)였다. 《간양록(간양록)》에는, “수길의 근신이 수길의 계집과 간통하여 낳았다.”고 하였다. 병신년 가을에 부하는 우리 사신과 중국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수길에게 청하여 다행히 만나 보았는데, 중국 사신은 심유경이었다. 왜가 사신을 객관에 가두고 군사를 시켜 매우 엄중히 지키고 있었다. 부하가 중국 사람의 곡하는 소리를 듣고 돌아와서 수길에게 알렸더니, 수길은 곧 음실(음실)을 만들고 객관에서 궁궐로 오게 하여 유경을 맞아들여 보았다.유경은 좌석에 앉아서 환약 한 개를 먹었는데, 수길과 두 번째 만났을 때에도 약을 먹으므로 수길이 괴이히 여겨 물으니 유경은, “만리나 되는 바다를 건너오느라고 습기에 상해서 병이 났으므로 항상 이 약을 먹었더니 기운이 넘치고 몸이 가뿐하오.” 하였다. 수길이, “거짓이 아니오?” 하니 유경이, “감히 거짓말을 하겠소.” 하였다. 수길이, “나도 앞서 섬에서 돌아왔더니 기운이 줄어든 듯한데 먹을 수 있겠소?” 하자 유경이, “좋지요.” 하고 곧 주머니 속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수길이 부하를 시켜 가져다가 손바닥에 놓고 자세히 보니 환약에 무슨 글자가 적혀 있었다. 수길은, “글자가 어찌 이렇게 작은가.일본에서 큰 글자를 잘 쓰는 것만 못하다.” 하면서 품속에서 이쑤시개를 꺼내어 그 약을 반으로 갈라 유경에게 주면서, “함께 맛보고 싶소.” 하였다. 유경이 받아서 삼키고, 한참 뒤에 목을 움츠리고 팔을 펴서 몸이 편안해지는 듯한 형상을 보이니 수길이 그제서야 입에 넣고 물을 찾아 마셨다. 이튿날 아침에도 유경을 만나서 환약 한 개를 얻어 처음처럼 나누어 먹었는데, 그 약은 매우 독해 사람의 몸을 몰래 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유경은 객관에 돌아가서 필시 다른 약을 먹어서 그 독기를 내리게 하였을 것이다. 수길은 이로부터 사지에 윤기가 없어지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몸이 말라서 의원에게 보였으나 효험이 없고, 침을 놓아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수길이 괴상하게 여기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 진액이 없을 수 있는가. 내 뜸을 뜨리라.” 하고, 드디어 내실에 들어가서 첩들에게 쑥을 붙이게 하다가 갑자기 모로 누워 웃으면서, “내가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밖에 명령하여 말꼬리 두어 웅큼과 깨끗한 물 한 독을 들여오게 하였다가 죽거든 상을 알리지 말고, 배를 갈라서 창자를 들어내고 오장육부를 씻은 다음 말꼬리로 꿰매어서 시체를 술독에 담그게 하라.” 하였다. 첩들이 그의 말대로 하고, 일이 있으면 함께 의논해서 결정하였다. 몇 달이 되어서는 냄새가 심하여 밖에까지 풍기므로 첩들이, “끝까지 숨기지는 못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상을 발표하였다. 수길이 내실에서 거처하게 된 뒤부터는 부하가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이 일은 문지기에게서 들은 것이다. 수뢰는 그때 일곱 살이었다. 《염헌집(념헌집)》의<양부하전>에는 “부하의 나이 39세 되던 기미년에 돌아왔고 신사년에는 이미 95세였는데 내가 직접 부하에게서 들은 것이다.” 하였다.

명병이 철환하다 무술ㆍ기해ㆍ경자년의 일은 《고사촬요》에 자세하다
 

무술년 12월에 유정은 군사 5천 명을 왜교에 남겨 두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용두산(룡두산)으로 돌아갔다. 진린은 계금(계금) 등에게 우리 수군과 협력하여 영남 해안 지방을 수색하고 토벌하게 하였으나 적의 자취가 없으므로 허국위(허국위) 등에게 거제도ㆍ한산도 등에 나누어 진을 치게 하는 한편 진린은 남해에서 고금도로 퇴군하니 국위는 남해로 물러났다.
○ 22일에 서관란ㆍ정응태ㆍ왕안찰 이름 모름 이 남원에 도착하였다. 왕안찰은 영남의 울산과 동래를 둘러보고 서관란ㆍ진효 등 여러 사신과 서로 만나서 함께 돌아왔고, 유정은 용두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세 사신을 기다렸다.
○ 기해년 봄에 명 나라 조정의 명령으로 철병하여, 유정은 용두산에서, 진린은 고금도에서, 동일원은 성주에서, 마귀는 경주에서, 오광은 남원에서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여 왔다. 임금이 강가에 나가서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조야첨재》
○ 명 나라에서 두 번이나 군사와 양식을 내어 끝까지 구제하여 주었으므로 1월에 한응인(한응인) 등을 보내어, 흉악한 적이 패하여 도망치고 나라가 거듭 회복되었다는 등의 사정을 표를 올려 사은하였다. 《고사촬요》
○ 한응인이 돌아왔는데 명 나라에서 칙유(칙유)로써 장려하고 옷감을 하사하였으므로 황진(황진)을 보내어 표를 올려 사은하였다. 《고사촬요》
○ 2월에 어사 진효가 서울에서 죽었다. 그때 사로(사로)의 제독 중에는 서울에 와서 왜를 친 공을 과장하는 이가 많았는데 형개가 또한 포장하여 아뢰고자 하므로 진효가 그 속이는 것을 괘씸하게 여겨 사실대로 보고하려고 하였다. 이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유정이 어사의 요리사에게 뇌물을 먹여서 독살하였다.” 한다. 본국에서는 예부에 자문을 보내서 부고하였다. 《고사촬요》
○ 임금이 그 상에 임하여 대뢰(대뢰)로써 제사하였다.
○ 2월에 형개가 사로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발하여 중원(중원)으로 향하였다. 만세덕은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그대로 머물렀다. 3월에 중국 조정에서는 사천에서 패전하였다는 이유로 중로의 선봉 남방위(람방위)에게 벌로 본국으로 돌아가 수자리를 살게 하였다.
○ 5월에 형개가 조정에 돌아가니 황제는 만세덕ㆍ이승훈(리승훈) 도독 동지 두잠(두잠) 산동 안찰 부사(산동안찰부사) 에게 명하여 서울에 남아서 뒷날의 계획을 잘 세우기 위하여 군사 2만 4천 명을 남겨 두도록 하였으니 형개의 아룀을 따랐던 것이다. 《고사촬요》
○ 형개가 중국으로 돌아가니 임금은 홍제원에 나가 전송하였다.
○ 서관란이 돌아가서 여러 장수의 공과 죄를 아뢰니, 황제는 다시 예과 우급사(례과우급사) 양응문(양응문)을 보내어 모든 군공을 정하게 하였다. 《조야첨재》
○ 5월에 선무사(선무사)를 세웠다. 전고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 경자년 정월에 이승훈이 요동에서 서울에서 도착하였다.
○ 이시언을 보내어 의주에 남아 있는 쌀과 콩을 옮겨 가지 말아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고사촬요》 이하는 같다.
○ 5월에 만세덕이 왜에 대한 일이 이미 마쳐졌으므로 대군을 철수할 것을 청하여 9월에 만세덕과 두잠 등이 돌아갔다.
○ 신경진(신경진)을 보내어, 중국의 남병(남병) 3천 명을 머물게 하고 달마다 양식을 주어서 남쪽 변경을 지키게 해줄 것을 청했더니 황제가 허락하였으므로 또 민몽룡(민몽룡)을 보내어 사은하였다.
○ 기해년에 명 나라 조정에서 의주에 남겨 둔 쌀과 콩 12만여 석을 하사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하였으므로 정광적(정광적)을 보내어 주문을 갖추어 사은하였다.
○ 신축년 봄에 명 나라의 도망병이 도당을 불러모아 기병과 보병 3십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서 위관(위관) 이승총(리승총)ㆍ섭정국(엽정국) 등을 잡아 묶고 칼날로 쳐서 상처를 입혔으며, 옥문을 깨뜨려 열고 좌감(좌감)의 도망병 15명을 빼앗아 갔다. 이들이 흥인문(흥인문) 밖으로 달려나가 모여서 진을 쳤으므로 본국에서 군사를 내어 사로잡는 한편 자문(자문)으로 중국의 여러 아문에 보고하고 호군 박동량(박동량)을 시켜 압송하였는데 도망병으로 뒤떨어져 있는 자를 전후에 수백여 명이나 차례로 요동에 잡아 보냈다.
○ 을사년에 명 나라 무원(무원) 제사(제사)에, “왜노가 조선을 엿보고 해치려는 마음을 품어서, 지난 번에 침략하고 돌아간 뒤에도 오히려 교활한 꾀를 감추고 여러 차례 요구하고 협잡질을 하니 진실로 헤아릴 수 없다. 이에 마땅히 관원을 파견하여 정탐해서 일을 알맞게 처리하는 데 편리하게 하고자 원임 유격 동정의(동정의)를 보내어 먼저 조선에 가서 왜의 실정을 정탐하고, 수시로 문서에 게재하여 보고하게 한다.” 하였다.
○ 병오년 봄에 무원에서 원임 유격 유흥한(류흥한)을 파견하였는데, 우리나라 변경에 도착해서 왜의 실정을 정탐하여 완급을 막론하고 수시로 빨리 보고하였다.

난중(란중)의 시사(시사) 총록(총록)
 

○ 왜의 장수는 34명이고 군사는 25만 명이었는데 말로는 50만 명이라고 일컬었다. 부산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 30리마다 진을 구축하고 험한 곳에 웅거하여 나뉘어 8도를 함몰시키고, 산과 숲을 수색하여 남자와 여자를 죽이고 노략질함이 한이 없었으니 이것은 천지 개벽 이래로 처음 당하는 화(화)였다. 이에 명 나라 조정에서는 전후에 군사 21만 명과 내탕고(내탕고)의 은 수백만 냥과 산동의 양곡 20만 석을 내어서 구원하였는데 이것도 옛날 이래로 없었던 일이었다. 《지봉유설》 《소대기문》
○ 절강(절강)ㆍ섬서(섬서)ㆍ호북(호북)ㆍ사천(사천)ㆍ귀주(귀주)ㆍ운남(운남)ㆍ면전(면전) 등지에서 징발한 남북병의 숫자가 통틀어 22만 1천 5백여 명이었고, 왕래한 여러 장수와 일을 맡았던 사람이 3백 7십여 명이었으며, 은이 약 5백 83만 2천여 냥이고, 쌀과 콩을 교역한 은이 3백만 냥이었는데 실제로 사용한 본색(본색) 양미가 수십만 곡(곡)이고, 모든 장수에게 상으로 준 은이 삼천 냥이고, 산동 양곡이 20만 곡(곡)이었다.
○ 임진년에 명 나라 장수로서 왜를 징벌한 자가 의주에 와서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가 걸핏하면 중화의 예악 문물을 따르지만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삶을 즐기는 마음이 없는 것은 모두 골격이 약하고 예절이 까다로운 탓이다.” 하였는데, 이는 명장이 우리나라의 풍기(풍기)가 유약하고 인심이 박하면서 한갓 헛된 꾸밈과 소소한 예절에만 힘쓰는 까닭에 백성이 명을 감내하지 못하여 이에 이르렀다는 것을 살펴서 알았던 것이니 한 달 사이에 능히 남의 나라 일을 살피는 것이 이와 같았다. 《공사견문(공사견문)》
○ 사변이 나던 초기에 어떤 사람이 초씨 역림(초씨역림)으로 점을 쳐서 송괘(송괘)를 얻었는데, 일설에는 ‘명 나라 점장이가 우리나라의 점을 쳤다.’ 한다. “문물은 번드르르하고 풍속은 퇴폐하니 장차 질박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 쓰러진 송장은 삼대 같고 유혈이 낭자하여 방패가 피 속에 떠다닐 것이다. 이 난리는 사람이 그 어머니는 알아도 그 아버지는 알지 못하게 된 뒤에라야 그칠 것이다.” 하였다. 그때 남정네들은 거의 다 죽었으니 사내 아이가 자라서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 자도 있고, 혹은 여자가 명병에게 몸을 더럽혀 자식을 낳아서 아버지의 성을 모르는 자도 있었다. 《지봉유설》
○ 그때 행조(행조)에 참요(참요)가 있었는데,

가랑비 내리는 천가(천가)에 버들 빛 푸른데 / 세우천가류색청
동풍이 불어 들어와 다른 책에는 입(입) 자가 송(송) 자로 되었다. 말발굽이 가볍다 / 동풍취입(일작송)마제경
옛날 다른 책에는 태평이라고 적혔다. / 구시(일작태평)
이름난 관원이 조정에 돌아오는 날 / 명환환조일
개선을 아뢰는 기쁜 소리 낙성에 차리라 / 주개환성만낙성

하였다. 《일월록》
○ 일설에는 홍종록(홍종록)이 귀양갈 때에 아들이 있었는데, 어리석어서 글자를 알지 못하였다. 신묘년 겨울에, “꿈에 절구 한 수를 지었습니다.”(위의 절구가 곧 그것이다.) 하면서 종록에게 적어서 보이고, “오래되지 않아서 사면해줌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종록이 꾸짖기를, “어떤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하였다. 이는 문리가 짧았던 까닭으로 개선을 아뢰는 것을 풀려나 돌아온다는 징조로 알았던 것이다. 《기재잡기》
○ 이보다 앞서 장마가 처음 개인 때에 남사고(남사고)가 영천의 인가를 지나다가 흰 구름이 소백산 허리에 가로 걸려 있는 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기색이 있으므로 다른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것은 상서로운 구름이나 오래지 않아서 전쟁이 있을 터인데 산 아래에 있는 자는 안전할 것이니, 풍기(풍기)와 영천은 복지(복지)가 될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왜구가 이르렀는데 풍기와 영천은 조령(조령)에서 멀지 않으므로 며칠이면 올 수 있었는데도 적은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국당배어(국당배어)》
○ 계사년 봄에 큰 흉년이 들어서 각 도의 백성들이 떠돌아 다니니 집을 잃고 굶주려서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졌으며, 사람이 서로 죽여서 먹기도 하였고, 산중의 풀잎과 소나무ㆍ느릅나무의 껍질과 뿌리도 먹어 모두 없어졌다.
○ 갑오년 여름에는 큰 소의 값이 쌀 서 말에 불과하였고, 세목(세목) 값은 좁쌀 두어 되 미만이었으며, 진기한 보배도 사고 팔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서로 죽여서 먹으므로 여자와 어린 아이는 감히 마음놓고 나다니지도 못하였다. 굶주려서 죽은 시체가 서로 잇달았는데 굶주린 백성이 다투어 그 고기를 먹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의 뼈를 벗겨서 즙을 내어 마시기도 하였는데, 이들 또한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모두 죽었다.
○ 소와 말이 있는 자는 명 나라 병사에게 팔았다. 이에 명병이 하루에 수백 마리의 소를 도살하였으므로 사방 경내에 소ㆍ닭ㆍ개가 거의 다 없어졌다. 유정이 진휼하는 장소를 남원에 설치하였더니 굶주린 백성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는데 이에 힘입어 잠시 동안은 연명하였으나 그 뒤에는 모두 그 곁에서 죽었다. 명 나라 사람 한 명이 취하고 배불러서 길 가운데에 토하자 굶주린 백성들이 머리를 맞대고 주워 먹었는데 약한 자는 주워 먹지 못하여 물러서서 울기만 하였다.
○ 그때 전쟁이 일어난 지 1년 만에 나라의 비용이 모두 없어졌으므로 하는 수 없이 매관(매관)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곡식 백 석이면 3품 벼슬이 되고, 30석이면 5품 벼슬이 되었다. 계사ㆍ갑오년에 와서는 1, 20석이면 가선(가선)ㆍ당상에까지 오를 수 있었으나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 계사ㆍ갑오년 무렵에는 무명 한 필 값이 쌀 두 되였고, 말 한 마리의 값은 서너 말에 불과하였다. 굶주린 백성이 대낮에 사람을 죽여 서로 먹는 지경이었는데, 염병까지 겹쳐서 길가에 죽은 자가 서로 베다시피 즐비하였으며, 수구문(수구문) 밖에 쌓인 송장이 산더미 같았는데 성보다도 두어 길이나 더 높았다. 이에 중들을 모집해서 묻도록 하였는데 을미년에 와서야 그쳤다. 이듬해 병신년에는 풍년이 들어서 면포 한 필 값이 쌀 3, 40 말이었고, 콩은 5, 60 말이었다. 사람들은 이때에서야 굶주린 빛을 면하였는데 술과 고기를 먹는 호사스러움은 평시보다도 더 심하였다. 《지봉유설》
○ 적군이 성 밖으로 나갔으나, 굶주림과 염병으로 인하여 죽는 자가 또 10명에 8, 9명 꼴이나 되었으니, 이때는 민생의 매우 불행한 고비로 비록 인사(인사)의 실수로 된 것이지마는 또한 운수인 것이다. 수년 전에 형혹성(형혹성)이 적시기(적시기)의 분야(분야 점성학(점성학)으로 별의 한 부분임.)를 침범하더니 마침내 이런 환난이 있었던 것이다.또 서울 밖 사방 산기슭을 백성들이 많이 불법으로 개간하므로 판윤 임열(임설)이 건의하여 흙을 쌓아서 작은 흙 무더기를 만들어 한계를 표시하였는데, 동소문(동소문)에서 시작해서 숭인문ㆍ수구문을 지나 남벌원(남벌원)에 이르기까지 무수하게 나열하여, 바라다보면 둥긋둥긋한 것이 많은 무덤 같았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좋은 징조가 아니라고 하더니, 과연 무더기 쌓기를 다 끝내지 못하고서 잇달아 병란이 일어났다.계사ㆍ갑오년 사이에 굶주리고 병들어 죽은 백성의 시체를 성 동쪽에 끌어다 버렸더니, 평안도의 중 두어 사람이 들것ㆍ삼태기ㆍ가래를 갖추어서 송장을 거두어 큰 구덩이를 만들고 묻었는데 모두 성 동쪽에 있었다. 사람들이 보고 흙무더기를 쌓은 감응이라고 하였으니 또한 괴상하다. 《서애집》
○ 계사년 7월에 모든 도의 백성들에게 임시로 중국식으로 옷을 입게 하고, 대소 관원은 검은 옷에 좁은 소매를 달게 하였으며, 금군(금군) 이하는 갓을 버리고 작은 모자를 쓰게 하여 왜로 하여금 명 나라 군사가 더 왔는가 의심하도록 하였다. 8월 초부터는 남김없이 의복 제도를 고쳤다.
○ 임진란 때에 왜장 한 사람이 종묘에 들어와서 점거하였으나 거처가 편하지 못하여 남별전(남별전)으로 옮겨갔고, 또 건원릉(건원릉)의 정자각(정자각)과 마전(마전)의 숭의전(숭의전 고려 태조의 사당)ㆍ봉산(봉산)의 객사에 왜적이 여러 차례 불을 질렀으나 저절로 꺼져서 끝내 탈이 없었으니 이상하기도 하다. 《지봉유설》
○ 변고가 갑자기 난데다가 우리나라는 땅덩이가 좁아서 거의 적군이 침입하지 않은 깨끗한 곳이 없었는데, 다만 호남 한 도와 호서 우도가 홀로 온전하였으므로 남자와 여자들이 많이 그곳으로 갔다. 또 왜적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길을 인도하게 하였던 까닭에 먼 곳까지 가지 않은 데가 없었다.이른바 깊숙하고 험한 곳에는 피난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들어서 산골짜기에 가득하였으므로, 도리어 왜적을 불러들이게 되어, 머리를 맞대고 죽은 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함경북도는 지세가 병의 목과 같아서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가 없으므로 왜적의 칼날을 면한 자가 매우 드물었으니, 도리어 평지에 있으면서 적의 가는 곳을 따라서 동ㆍ서로 달아나 피하는 것이 나았다. 《지봉유설》
○ 계사년에 비국(비국)의 건의에 따라 철전(철전)을 시험하였는데, 다섯 번 쏘아 한 번 맞히는 자는 그 뒤에 대오를 편성하여 영남에 가서 종군하게 하며 왜적의 수급(수급) 하나를 베어오면 곧 과거를 허락하였으니, 이른바 머리 벤 급제라는 것이다. 이 뒤로부터는 굶주린 백성 중에 그 머리를 보전하지 못한 자가 많았다. 모두 머리털을 깎아서 왜적의 수급을 만들었으니 비록 진짜 왜적의 왼쪽 귀 벤 것을 바친 자라도 많이 다른 사람에게 사서 올렸던 것인데, 혹 값을 다투어서 서로 송사하면서도 1, 2품의 관질(관질)에 오른 자도 있었다.
○ 그때 명 나라 군사가 선산과 성주에 진을 쳤으므로, 호남 사람이 명 나라 군사에게 음식을 바치는 데 소용되는 양식과 반찬을 한 사람이 두 짐바리를 운반하였으니, 운반의 수고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고, 생원ㆍ진사와 선비들은 감관(감관)ㆍ감공(감공)에 충원하였는데 다른 도도 모두 그러하였다. 《일월록》
○ 명 나라 조정에서 온 참장(참장) 여응종(려응종)이 별점을 잘 쳤다. 감공하는 선비에게 시를 전하였는데,

세상을 해치던 요망스런 뱀은 큰 바다로 달아나고 / 독세요사주대해
사람을 삼키던 사나운 범은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 탄인포호입심산
추격하는 군사 백만 명이 무슨 일을 하였는고 / 추병백만성하사
먹이느라고 공연히 백성의 돈만 축냈네 / 궤향도상백성전

하였다. 또 왜(왜) 자를 가지고 점을 쳤는데, “글자 가운데 목(목) 자가 있으니 마땅히 금(금)으로써 목을 이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1월 8일 금(금)일에 평양을 수복한 것이고, 원수 김명원(금명원)이 패하지 않은 것도 이 전조에 응한 것이다. 글자 가장자리에 인(인) 자가 있는데 곁에 있는 인(인)이고 바로 선 인(인)이 아니므로 머물 곳을 잃고 정한 곳이 없으며, 글자 위에 화(화) 자가 있으므로 여름철에 성사하였고, 글자 아래에 여(녀) 자가 있으니 교화시키기 어려운 것이 부인이다. 다만 화(화)의 음은 화(화)이고 여자(녀자)가 호(호) 자가 되니, 화호(화호)하자는 말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일월록》
○ 김복흥(금부흥)이 여응종에게 묻기를, “시변(시변)이 이에 이르렀는데 어느 때나 태평해지겠소?” 하니 응종이, “또 말할 수 없는 한 가지 일이 있소. 그대가 만약 듣는다면 목이 쉬도록 통곡할 뿐 갈 곳이 없을 것이다. 천하가 장차 반드시 크게 어지러워질 것이니, 나도 지금부터 무이산(무이산)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노라.” 하였다. 응종의 호는 계암(계암)이며, 자는 태화(태화)인데, 말한 것이 무오년 이후에 맞았다. 《일월록》
○ 을미년에 황제가 평양ㆍ개성ㆍ벽제ㆍ서울의 전진(전진)에서 죽은 군사와 병으로 죽은 관군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명을 내리고 이어 관은(관은)을 보내어서 제사에 소용되는 물품을 갖추게 하니 그 조서를 받들어서 제단의 명칭을 민충(민충)이라고 하였다. 《조야기문》 《고사촬요》
○ 계사년에 유성룡이 요동에 자문(자문)을 보내어 압록 중강(중강)에 시장을 개설하여 무역을 통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요좌(료좌)의 미곡이 우리나라에 많이 흘러 나오니 평안도 백성들이 먼저 그 혜택을 입었고, 서울 백성들도 뱃길로 혜택을 입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면포 한 필 값이 피곡(피곡) 한 말이었는데 중강에서는 한 필이 쌀 20여 말의 값이었고, 그 밖에 은ㆍ구리ㆍ무쇠를 이용한 자는 더욱 십배의 이익을 얻었다. 《서애집》 또 서북 개시(개시) 전고(전고)에서도 자세하다.
○ 이보다 먼저 전라 감사가 장계를 올리기를, “광양(광양) 현감의 보고에 의하면 옛날부터 ‘쇠무덤’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어서 파보니 쇠붙이는 없고 다만 글자를 새긴 지석(지석)에, ‘동쪽으로 15리쯤 되는 거리에 황금 무덤이 있는데 얻기만 하면 그 이익이 만배는 된다. 다만 자식이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종이 주인을 업신여기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중이 붉은 갓 쓰고, 중이 속인의 일을 하고, 속인이 중의 일을 하며, 유생은 붓과 벼루를 버리고, 베짜는 계집은 베틀과 북을 버리며, 농부는 쟁기와 호미를 버리게 된다.임진년에 나라가 셋으로 나뉘어졌다가 계사년에 도로 정하여져서 갑오ㆍ을미년에 태평하게 된다. 두류산(두류산)에 들어가서 피난하는 것이 제일이고 호서(호서)는 조금은 편안하나 여강(려강)은 피가 흐르고 살점이 흩어지는 지방이다. 한양에 환도하면 마땅히 8백 년을 누릴 것이고, 명 나라 군사가 임진(림진)을 건너면 2백 년을 더 누릴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것이 과연 맞았다. 《송와잡기》
○ 을미년 봄에 기근이 끝이어서 일하는 소가 남은 것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직접 쟁기를 끌었는데 8명의 농부가 한 패가 되었으므로 곳곳에 사람이 둔치고 있었다.
○ 그때 전라ㆍ충청도의 백성들은 밭갈고 씨뿌리기를 즐겨서 김매는 사람들은 열 명씩 무리를 지어서 기를 휘두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가무(가무)로 서로 경쟁하니, 사람들이 정유년의 난리는 즐거움이 지극한 끝에 슬픔이 온 것이라 하였다.
○ 정유년에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할 때에 내지에서는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농사에는 뜻이 없고 술과 고기를 많이 허비하면서 날마다 놀이와 잔치를 일삼았다. 전라 감사가 여러 고을에 관문(관문)을 보내어 금지하도록 타일렀다. 이상은 모두 《일월록》에 있다.
○ 정유년에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할 때에 평수길(평수길)이 모든 왜에게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베어서 수급(수급) 대신으로 바치게 하였으므로 왜졸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문득 죽이고 코를 베어 소금에 담가서 수길에게 보내었다. 수길은 이를 점고하여 본 뒤에 그 나라 북망(북망)인 대불사(대불사) 옆에 모두 매장하여 한 구릉을 만들고 제 나라 사람에게 위엄을 보였다고 하니, 사람을 참혹하게 죽인 것은 이것으로도 가히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때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코 없이 살아있는 자들이 많았다. 《지봉유설》 《소대기문》
○ 정유년에 명 나라 장수가 다시 나오니 왜적을 정벌하려는 자가 모두 서울에 도착하였으므로 임금은 그들을 사대부의 집에 나누어 거처하도록 하였다. 명 나라 병졸 한 명이 소를 잡아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데, 하루는 잡기를 막 마치자 의주에 있던 대장으로부터 소 잡는 것을 금지하라는 영이 전해졌다. 그 군사는 감히 영이 내리기 전이라고 해명하지 못하고 곧 흙을 파서 잡았던 소를 묻었으니 그 명의 엄함이 이와 같았다. 《공사견문》
○ 그때 사대부집 부녀들이 많이 약탈을 당하였는데 왜적이 물러간 뒤에 화를 면한 집에서는 변고를 당한 집과 혼인하지 않으려고 하므로 임금이 근심하여, “이런 풍습이 만약 이대로 간다면 온 나라의 대가(대가) 중에는 거의 완전한 사람이 없겠다.” 하고, 종실과 귀척(귀척)에게 힘써 권하여 변고를 만난 집과 혼인하도록 하였더니 그 뒤부터는 감히 험점을 구별하는 자가 없었다. 《공사견문》
○ 부녀자 중에 절개를 지켜 죽은 자가 대단히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가 없었고, 효자가 그 다음이고 충신은 또 그 다음이었다. 그러나 드러나게 칭도할 만한 자가 또한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아! 선비들이 평소 글을 읽고 의리을 강론할 때에는 누군들 내가 대장부이다라고 하지 않았으리오마는 위태로움에 다달아서 목숨을 바치는 데에는 도리어 부인네들보다도 못하였구나. 《지봉유설》
○ 장홍(장홍)이 자기 아내가 왜적을 욕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므로 조정에서는 정려(정려)할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병신년에 황신(황신)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에 왜가 포로되었던 남녀를 돌려보냈는데 장홍의 아내도 그 속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분하게 여겼으나, 조정에서는 장홍의 속인 죄를 처벌하지 않았다. 《하담파적록(하담파적록)》
○ 왜적의 괴수 길성중륭(길성중륭)이 철령(철령)에서 길을 나누어 관동(관동)을 향하여 돌아오면서, 영서(령서)를 넘어 여러 고을을 짓밟고, 장차 원주(원주)를 핍박하려 하였다. 목사 김제갑(금제갑)은 부임한 지 겨우 1년이었는데 군졸을 모두 내어서 영원산성(령원산성)으로 들어갔다. 영원산성은 사면이 다 절벽이고 앞에 한 가닥 길만이 통해 있었다. 적은 글을 써서 장대에 걸고 항복하기를 달래면서 협박하였으나, 제갑은 손수 그 사자를 베어 죽이고 아랫사람에게 명하여 적이 이르는 것을 기다려 태평소를 불게 하였다.날이 밝자 다섯 곳에서 태평소가 일제히 알리므로, 보니 왜의 창과 칼날이 산을 덮고 북소리와 고함소리가 땅을 울리었다. 적군이 비탈을 타고 몰래 전진하여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적이 제갑을 협박하여 절하게 하였으나 제갑은 굽히지 않고 그 처자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제갑의 본관은 안동이었는데, 얼굴은 희고 키가 컸으며 말과 웃음이 적었다. 과거에 올라서 수령과 방백(방백)을 지냈는데, 백성들에게 잊지 못할 은혜가 있었다. 《조야첨재》
○ 성영(성영)이 전 승지로서 상주가 되어 서울 가까이에서 여막을 지키고 있을 때에 감사가 성영에게 임시로 여주(려주)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조정의 명령은 아니지만 난리가 심하므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더니 조정에서는 이 말을 듣고 강원 순찰까지 겸하게 하였다. 홍사효(홍사효) 목사(목사) 가 어머니 상을 입고 가까운 곳에 피난하였다가 길에서 성영을 만났는데, 성영은 그가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노하여 졸개를 시켜 잡아서 책망하기를, “너는 조정의 관원인데 이러한 큰 난리를 당하여 어찌 그 걱정을 함께 하지 않고 사사로이 피난하느냐.” 하였다.사효가 말하기를, “부모의 상이 중한데 어찌 감히 사사로이 나와서 벼슬하겠느냐? 왜에게 항복하여 몸을 편하게 하고 싶지만 인간의 도리상 차마 할 수 없으므로 이처럼 난리를 피하여 다니노라.” 하였다. 성영은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이면서 말을 채찍질하여 갔다. 이는 성영의 숙부 승지 세영(세녕)이 왜에게 항복하여 그 딸을 평수가(평수가)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하였으며, 성영이 상중에 나와서 벼슬함도 조정의 명이 아니므로 이것을 욕한 것이었으니 듣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조야첨재》
○ 전 좌랑 강항(강항)은 정유년 난리에 온 집안이 포로가 되어서 중도에 두 번이나 물에 뛰어들었으나 사람들에게 구조되어 죽지 못하였다. 왜국에 있을 때 간혹 왜의 유식한 자와 교류하면서 왜의 정세를 매우 자세히 염탐하여 여러번 인편으로 우리나라에 아뢰었더니 임금이 몹시 가상하게 여기는 동시에 가엾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강항에게 수업한 왜인이 사사로이 배를 장만해주어 경자년 여름에 온 집안이 돌아왔는데, 포로되었던 선비들 중에서 이들을 따라 돌아온 자가 또한 10여 명이었다.강항이 그 곳에서 듣고 본 바를 기록하였다가 책을 저술하여 위에 아뢰었더니, 임금은 술을 하사하면서 왜의 실정을 묻고 벼슬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당시 조정의 의논에 꺾여서 마침내 금고(금고)되었다. 이에 드디어 강항은 시골에 살면서 학문을 가르치니 시골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고 그가 저술한 《간양록(간양록)》이 세상에 유포되었다. 《간양록》은 처음에 《건거록(건차록)》이라고 하였는데 문인 윤순거(윤순거)가 《간양록》이라고 고쳤으니 이는 강항이 몰래 상소로 조정에 보고한 것이다. 권필(권필)이 그가 죽지 않았음을 들어 알고서 시를 지어 멀리서 위로하였는데, “깃발은 양을 보느라고 떨어졌고 편지는 기러기를 힘입어 전한다.”는 글귀가 있었다. 그 까닭으로 거기에서 ‘간양’이라는 것을 따가지고 책이름으로 하였다. 강항이 왜국에 있을 때 왜장이 부채 한자루를 보내었으므로 강항이 시를 보내어 사례하였는데,

한 폭의 종이에 솔솔부는 바람을 / 일폭계등진진풍
부쳐 보낸 당신의 정의에 깊이 감사하오 / 기래심하장인정
욕되게 삶이 매양 하늘과 해 보기가 부끄러웠는데 / 투생매치간천일
이로부터 이국 땅에서 낯 가리고 다니겠네 / 종차수방엄면행

하니, 왜인이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일월록》

강항의 자는, 태초(태초)이며, 호는 수은(수은)이고, 본관은 진주(진주)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랑에 이르렀다.
○ 남원 선비 조경남(조경남)이 지리산 파근사(파근사)에 피난하고 있다가 강개한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키니 이에 천인 박언량(박언량) 등이 그를 따라서 낙오된 적군을 많이 죽여 피난하는 사람을 구제하였다. 9월 22일에 적의 머리 36급을 베었고 12월 7일에 적 1백 23급을 산음(산음)에서 베었는데, 그가 거느렸던 군사는 손상을 입은 자가 없었으며 또한 공을 자랑하여 적의 머리 벤 것을 나라에 바치지도 않았다. 또 일찍이 《난중잡록(란중잡록)》을 지었는데 내용이 자못 소상하였으며 또한 나라 일에 분개하는 마음을 발하는 뜻이 많았다. 《일월록》
○ 기해년 여름에 전라도 사람으로 적군에게 포로되었던 김정인(금정인) 등 12명이 대마도에서 배를 타고 달아나 돌아오다가 표류하여 등주(등주 중국 산동성)에 도착하니, 그 고을 관원이 경리(경리)의 아문에 압송하였다가 본국에 전송(전송)하여 돌아왔으므로 조정에서 이호민(리호민)을 보내어 표를 올려서 사례하였다. 그때 전라도 사람 노인(로인)도 배를 훔쳐 타고 오다가 표류하여 복건(복건 중국)에 이르렀는데 본국으로 전송되어 돌아왔다. 《일월록》
○ 기해년 여름에 본국 사람으로 명병을 따라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 등 각처에 머물러 살던 자들이 우리나라 사신을 보면 고향 땅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므로 병부(병부) 및 산해관(산해관)ㆍ요동 등의 아문에 자문을 보내어 빠짐없이 찾아서 돌려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일월록》

의병(의병)의 총론(총론)
 

임진년에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 가니, 나라 안이 텅 비고 적군이 가득히 찼다. 호령이 행해지 않아서 거의 나라가 없어진 지 한 달이 넘었을 때에 영남의 곽재우ㆍ김면과 호남의 김천일ㆍ고경명과 호서의 조헌 등이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키고 원근에 격문을 전하니, 이로부터 백성들이 비로소 나라를 받들려는 마음이 있게 되었고 고을의 선비들은 곳곳에서 군사를 모집하였다.의병장으로 호칭하는 자가 무려 백 명이나 되었으며 왜적을 섬멸하고 국가를 회복한 것은 바로 의병의 힘이었다. 난리가 평정된 뒤에는 모두 군공(군공)으로써 대오를 만들어 혹은 바다 진에 나누어 보내어 지키게 하기도 하고, 혹은 서울에 번으로 올라오게 하였으므로 그 원망과 괴로움이 극도에 달하였다. 납속(납속)한 사람까지도 모두 병역을 면치 못하였으니, 다만 백성을 속이고 신망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후에 일이 생겨도 반드시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봉유설》
○ 당초에 의병이 일어날 때에는 실로 나라를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나, 지금 세월이 오래되어서는 곳곳에 둔치고 모여서, 각각 제멋대로 행동하여 서로 통속(통속)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지 않고서 편의대로 휴식하고, 혹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기도 하는 등 마을에서 행패를 부리는 자도 있었다. 조정에서는 매양 의병이 수급을 바치러 오고, 뒤떨어진 적군을 베어 죽인 것을 보고는 모두들 적군의 죽은 자가 많으므로 수복될 것이라고 기뻐하였으나, 이것은 실로 뒤떨어진 소소한 적군을 죽이는 것은 적들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적에게도 손해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때문이었다.이귀(리귀)가 와서 말하기를, “의병대장이 될 만한 인물을 얻은 후에 대신을 보내어 경기ㆍ강원ㆍ황해 3도를 체찰(체찰)하게 하고, 의병을 합쳐서 하나가 되게 하여 그(의병대장)의 절제(절제)를 듣게 하되 낙오된 적군을 잡아 베는 것은 허락하지 않고 다만 힘을 합쳐서 성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게 하여 차례로 평정하는 것이 수복하는 실제의 공이 되고 또 아울러 관군을 주관하게 하고 방백을 통제하게 하면 기세가 합하여져서 병력이 나누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 사람의 계책이 진실로 지당한 계책이었다.오랫동안 난리를 겪으면서 이때의 형세를 깊이 보고서 지성에서 나온 말이니 연소한 사람의 말이라고 소홀히 하지 말기를 원한다. 우계(우계)가 정승 윤두수에게 보낸 편지.
○ 사변이 나던 초기에 사목(사목)을 논의하여 결정할 때에 초야(초야)의 사람으로서 조정의 명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스스로 가산을 털어 동지를 규합하여 향병(향병)이라고 일컫고, 스스로 병기를 만들고 군량을 공급하여 공로가 백 배나 되었는데도 그 장수된 자가 만약 활을 당기고 화살을 낀 무사가 아니라면 사세로 볼 때 자신이 스스로 나가 싸워서 칼날을 무릅쓰고 수급을 베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관하(관하) 사람이 10급 이상을 베면 그 장수도 아울러 상을 주기로 한 까닭에 선비로 의병장이 되어서 그 관하 사람이 10급 이상을 베면 예에 따라서 처음 품계의 관직을 주었지만 그 뒤에는 비록 2, 30급을 베어도 일일이 상을 논의하지 못하였다.언제 그 규정을 고쳤는지는 모르지만 초야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도 매양 관하 사람이 10급을 베면 장수 자신이 1급을 벤 것으로 쳐서 일일이 직계(직계)에 준하여 가선에까지 오른 자도 있었다. 사변 초기에 장수된 자는 적군을 바라보고는 도망쳐 숨어 있는데, 각처의 군병은 곳곳에서 적을 베었으나 위에 올릴 길이 없으므로 숨어 있는 그 장수의 손을 거쳐 아뢰게 하였다. 그러면 그 장수는 다만 수급을 받아 글로써 아뢴 공만이 있을 뿐인데도 중한 상을 받게 되고, 간혹 또 이것을 인연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백사집》
○ 세상에서는 조헌과 고경명의 죽음을 절의(절의)라고 하는데, 나라 일로 죽었다고 하는 것은 옳아도 절의의 죽음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라가 어지러운 날을 당하여 조헌 등은 일개 서생으로 팔을 걷어부치고 결연히 일어나 의로운 무리를 규합하여 뜻이 국사에 있었으니 충의는 가상하다 하겠으나 금산(금산)의 싸움에서는 모든 군사들이 어둠으로 인하여 무너져 흩어지니, 적군이 칼날을 빼어들고 뛰어들고 뛰쳐나오자 지세가 험하고 비좁은 관계로 자기 편끼리 서로 짓밟아 조헌은 난군(란군) 틈에서 죽었고, 경명은 마침 술이 취해서 말고삐를 잡지 못하여 또한 군사들 틈에서 죽었으니,그들이 패전함을 보고도 달아나지 않고 마침내 국사에 죽은 것은 과연 표창할 만하지만 절의라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그 중 조용히 죽음을 택하고 지조를 잃지 않은 이는 오직 김천일과 양산숙(량산숙) 두 사람뿐이었다. 진주가 포위되었을 때 천일은 형세가 급하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끌고 달려 들어갔으니 이것이 그 어려운 것이고, 일이 다급해진 뒤에 군중에서 천일이 선비라고 하여 군사를 부장에게 맡기고 성 밖으로 달려나가 자신을 보전하라고 권하였으나, 천일은 듣지 않고 끝까지 촉석루(촉석루)의 한 편을 지키다가 적군이 성에 올라오자 조용한 태도를 변하지 않고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죽었다.양산숙은 바로 농촌에 묻혀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로서 다만 천일의 속관이었으니, 비록 따라 죽어도 가하고 죽지 않아도 가하였다. 천일이 그에게 성 밖으로 나가서 함께 죽지 말라고 권하는데도, “이미 일을 같이 하였으니 마땅히 죽음도 같이 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천일을 따라 죽었으니, 평소의 행동이 독실한 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으랴. 세상의 의논하는 자가 네 사람을 개괄적으로 같은 품수로 치는데 이것은 또한 정론이 아니다. 《백사집》

여러 장수의 총론(총론)
 

이시언(리시언)ㆍ김응서(금응서)ㆍ고언백(고언백)ㆍ이광악(리광악)은 일찍이 크고 작은 백여 번의 싸움에 패한 적이 없었으며, 말을 달려 싸우며 적군을 베고 잡은 공로가 항상 여러 장수의 으뜸이었다. 박명현(박명현)ㆍ한명련(한명련)ㆍ홍계남(홍계남)ㆍ구황(구황)ㆍ이남(리남) 등은 가장 사납고 용맹스러워서 그때 여러 장수가 감히 어깨를 겨루지 못하였으며, 싸움에 다달아서는 모두 명현 등을 첫째라고 하였으나, 종군한 지 10년 동안 모두 대단히 칭도할 만한 공을 세운 자가 없었으니, 이것은 어찌 만났던 기회가 같지 않음에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백사집》
○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피난 가자 사람들은 서도(서도)를 사지(사지)라 하며 모두 말하기를, “적이 반드시 임금의 뒤를 밟을 것이니 서도로 가면 궁지에 몰려 함께 죽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가 서도로 향하려 하지 않고 모두 경성ㆍ황해 사이에서 머뭇거리면서 형편을 보아 앞으로 나아가든지 물러가든지 할 계책을 하다가, 임진강에서 패전하게 되어서는 일시에 무너져 흩어져서 각자가 삶을 도모하였다.오직 이빈(리薲)만은 패전한 곳에서 바로 행재(행재)로 들어와서 함께 평양을 지켰으며, 평양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여러 장수들은 모두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대동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갔는데, 이빈은 또 물러나 정주(정주)로 돌아와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해서 다시 순안에 주둔하여 왜적을 막을 계획을 하였다.행조(행조)에서는 일이 급하여 교서(교서)를 빨리 띄워 근왕(근왕)하도록 불렀으나 여러 장수는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감히 서쪽으로 향하는 자가 없었으니, 겉으로는 근왕을 칭탁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거슬러 올라가서 첩이 사는 곳을 찾아보고 수레에 싣고 도로 돌아간 자도 있고, 혹은 군중에 영을 내려서 군사를 해산하고 도망쳐 돌아가서 형세를 관망하려는 자도 있었으며, 징병(징병)하는 글을 보고 사람을 대하여 냉소하는 자도 있는 등 인심이 극도에 이르렀다.오직 전라 병사 최원(최원)은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올라가는데 군사들의 마음이 중도에 크게 변하였으므로 하루에 50여 명을 베어 결사(결사)의 뜻을 보였으나 끝내 막을 수 없으므로 강화(강화)에 들어가서 군사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해가 지나도록 굳게 지키니 굶주려서 죽는 자가 서로 잇달았으나 끝내 변하지 않았으니, 비록 공은 세우지 못하였으나 그 마음만은 또한 칭찬할 만하다. 그런 까닭으로 항상 난리 뒤에 여러 장수 중에서 오직 이빈과 최원만이 신하로서의 의리를 잃지 않았다고 하였다. 《백사집》

호성(호성)ㆍ선무(선무)ㆍ청란(청란)의 공을 기록하다
 

신축년 5월에 호종(호종)한 공을 기록하는데 이항복ㆍ정곤수(정곤수)를 원훈(원훈)으로 하였다. 《백사집》
○ 전교를 내렸는데, “기구하고 험난한 때에 엎어지고 넘어지며 떠돌아다니면서 백 번 꺾여도 마음을 돌리지 않아 대의를 천하에 폈으며, 천병(천병)을 청하여 적을 치고 강토를 회복하여 종사(종사)를 옛 도읍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것은 누가 한 일인가. 누군들 국가의 공신이 아니랴마는 오직 나를 따랐던 신하들의 충성스럽고 근실함은 일찍이 세상에 없었다. 이항복은 도승지로서 나를 따라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또 병조 판서가 되어서는 난리에 다달아 수고를 다하였고, 정곤수는 천병을 청하여 왔으니 내 마땅히 이 두 사람을 원훈으로 할 것이다.” 하였다. 정서평(정서평)의 <행장>
○ 항복이 아뢰기를, “대가(대가)가 영변에 머무시던 날에 심충겸이 신과 함께 들어가 여쭈었는데 충겸이 아뢰기를, ‘신이 처음에는 전하께 북쪽으로 가시도록 권하였사오나, 지금 항복의 말을 들으니 또한 이유가 있으므로 들어와 여쭙는 것이옵니다.’ 하였는데, 그 당시에 충겸이 만약 대책을 결정하여 들어가 여쭙지 않았더라면 대가는 거의 의주를 향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이날 밤에 전하께서 신에게, ‘나가서 여러 신하 중에 따라기를 원하는 자를 모으라.’고 명하셨으므로 신이 홍진(홍진)을 문에서 만나,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 하고 물었더니 홍진이, ‘마땅히 대가를 따르겠소.’ 하기에 신이 일부러 그 의사를 시험하려고 몇 가지 조목으로 어려움을 말하였더니 홍진은 울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유생이 비록 동쪽에 돌아간들 무슨 할 일이 있으리오. 군부의 곁에서 죽는 것만 못하오.’ 하였습니다.또 이국(리)을 보고 물었더니 이국이, ‘어째서 묻는가?’ 하기에, ‘오늘 양궁(량궁 임금과 세자)께서 처음으로 길을 나누어 가시게 되었으므로 공의 거취(거취)를 알고자 함이오.’ 하였더니, 이국이 눈을 부릅뜨면서, ‘마땅히 군부 가시는 곳에 갈 것이거늘 어째서 거취를 묻는가.’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와서 전하기를, “무인(무인) 한연(한연) 무신 선전관(무신선전관)으로 끝까지 임금 곁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 신하는 오직 한연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이라는 자가 강개(강개)한 어조로 말하기를, ‘우리 가문은 대대로 충의로써 서로 전하였는데, 이제 난리를 만나서 군부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처자를 볼 것인가.차라리 싸움에 가서 죽겠다 한다.’고 하므로 신이 듣고 불러서 물었더니 과연 그러하였으므로 세 신하와 함께 이 일을 약속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들의 반수가 저승에 가서 저승과 이승이 비록 막혔지마는 옛 의리야 어찌 잊겠습니까. 하물며 이덕형의 공은 실상 국가에 중대한 관계가 되는 것인데도 다만 당초에 공적인 일(왜장을 만나는 일)로 인하여 남쪽에 내려갔다가 평양으로 뒤쫓아왔기 때문에 서울에서부터 호종(호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아무도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으니 신은 참으로 애석하게 여기나이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덕형의 공은 내가 아는 바이다.다만 처음부터 따랐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으로 유사(유사)의 써 올린 글 가운데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우선 공이 정해지기를 기다려서 의논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제 이 아뢰는 말은 실상 내 마음을 알아낸 것이다. 한창 적의 선봉이 휘몰아쳐 올 때 자청해 가서 적을 달래어 그 진격하는 형세를 늦추었으며, 평양에 와서는 단 한 척의 배로 가서 오랑캐를 보고 이해(리해)로써 타일렀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리오.자기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는 자가 아니면 하지 못할 것이다. 또 영변에서 충겸이 들어와 하였다는 말은 일찍 친히 들어 아는 바이나, 홍진과 같은 무리가 나를 따르기를 원하였다는 말은 이제 비로소 들었는데 실로 눈물을 자아낸다. 이미 경을 원공(원공)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경이 침착하여 처리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 임인년 가을에 비로소 호종(호종)과 정왜(정왜)의 공을 합쳐서 녹훈할 것을 의논하였다.
○ 갑진년 4월에 홍가신(홍가신) 등 청난공신(청난공신) 다섯 명을 녹훈하였는데, 이것은 이몽학(리몽학)을 토벌한 공이었다. 《국조전모(국조전모)》
○ 갑진년 7월에 호종공신 이항복 등 86명과 정왜공신 이순신 등 18명을 고쳐서 녹훈하였다.
○ 갑진년 6월에 빈청(빈청)에서 원훈(원훈)과 대신이 아뢰기를, “신축년에 공을 감정(감정)할 때 호종공신과 정왜공신의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임인년 가을에 비로소 합쳐서 녹훈하자는 의논이 있어서 곧 이 뜻을 전하께 아뢰어 고쳐 정하였습니다. 이제 언관(언관)이 또 나누어 기록하기를 청하고, 그 중에서 빼어버릴 사람 27명과 추후에 기록된 정운(정운) 등도 마땅히 아울러 빼버려야 된다고 청하니, 그렇다면 왜적을 정벌한 무장으로서 남아있는 자는 다만 이순신ㆍ권율ㆍ원균ㆍ고언백 네 사람뿐입니다.권응수는 영천에서 수복한 공이 있고, 이억기의 수군과 조경(조경)은 행주(행주)에서 승첩한 공이 있으며, 김시민(금시민)과 이광악은 진주에서, 이정암(리정암)은 연안(연안)에서 모두 성을 보전시킨 공이 있는데도 모두들 빼버린다면 후일에 무장들의 마음이 풀어질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임진년 난리 초기에 신점(신점)이 북경 옥하관(옥하관)에 있다가 왜변을 듣고 통곡하면서 군사를 청하였습니다.그뒤에 중국에서 대군이 나오게 된 것은 모두 신점의 힘이었는데도 홀로 공신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이 두어 사람은 마땅히 그대로 아울러 두어야 될 것입니다. 또 두 가지 공신이 처음에는 그 수효가 매우 많았던 까닭에 4등급으로 정하였으나, 이제 이 칭호를 나누기로 하였으니 3등급으로 감정하고, 중국에서 군량을 얻어온 사신도 정왜공(정왜공)에 옮겨 기록하기를 청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 호종을 호성(호성), 정왜를 선무(선무)라고 고쳐 불렀다.
○ 갑진년에 호종한 공을 감정할 때에, 처음에는 익운(익운)공신이라고 하였는데, 유영경(류영경)이 의논을 주장하여 호성(호성)이라고 고쳤다. 그때 윤승훈(윤승훈)이 영상으로서 백관을 거느리고 임금에게 존호를 올리기를 정청(정청)할 때에 여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공들이 몸을 아껴서 먼저 물러나고 나에게 이 일을 담당하게 하니 공들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소.” 하더니 영경의 같은 당인 장령 이덕온(리덕온)이 승훈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영경이 대신 영상이 되었다. 《하담록》 《소대기문》
○ 그때 영경이 남모르게 권세를 잡고 가만히 조화(조화)를 부리고 있었는데 망녕되게 흉악한 제 소견으로 임금의 마음을 추측하고, 계사년에 광복(광부)한 업적으로써 임금에게 존호를 올릴 것을 의논하니, 조정에서는 침뱉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윤승훈이 그 불가함을 논박하여 말하기를, “깊이 사무친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이런 의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였더니, 영경이 사람을 사주하여 탄핵하게 하였다. 《백사집》ㆍ윤승훈 묘표(묘표)
○ 호성공(호성공)을 감정할 때에 반드시 서울에서 의주까지 따라간 자만 녹훈하였는데, 이덕형은 충주에 가서 왜군의 진영에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가서 평양에서 복명하고 그 길로 행차를 따라서 의주로 갔고, 유영경은 따라서 평산까지 갔으나 감사에 임명되어 행차를 따라서 서쪽으로 가지 못하였는데도 아울러 공을 녹훈한 중에 있었다. 대사간 허성(허성)이 대신 중에는 공을 녹훈하는 데에 해당되지 않는 이가 들어 있다고 논란하고 개정하기를 청하였는데 허성의 의사는 대개 영경 때문에 한 말이었다.덕형은 여러번 차자를 올려서 끝내 그 공을 사양하므로 이덕형 조에 자세하다. 임금은 그대로 따랐다. 영경은 그 때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잠자코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그의 이익를 좋아하고 수치심이 없음이 이와 같았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리이첨) 등이 영경의 공을 삭제하도록 청하였는데 계해반정 후에 도로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하담록》 《소대기문》
○ 갑진년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존호 올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계사(계사)를 살펴보노라니 눈물이 먼저 흐른다. 어찌 이런 이치가 있으리오. 나는 종사(종사)에 대하여 한 죄인이다. 이에 천지와 신민에게 부끄러워 다시 임금 자리에 눌러 있을 수도 없거니와 능히 도피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으니 다만 죄인으로 자처함이 마땅할 것이다. 적군이 북으로 올라올 시초에 힘으로 대적하지 못하고, 한갓 달아날 계책을 한 것은 부모 명 나라 황제 의곁에 가서 죽고자 함이었다. 나라를 다시 일으킨 것은 황상(황상)의 은혜와 장졸(장졸)들의 공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같은 말은 하지 말기를 원하노라.” 하였다. 이로부터 조정ㆍ종실ㆍ삼사ㆍ정원ㆍ예문관에서 달이 넘도록 날마다 세 번씩 간청하였더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 존호를 올리기를, ‘지성 대의 격천 희운(지성대의격천희운)’이라고 하였다.

병오년에 다시 왜와 통화(통화)하다
 

왜적이 물러가자 황신(황신)은 대마도의 적을 토벌하자고 청하는 소를 올렸다. 그 소에, “임진년 난리는 실상 이 대마도의 적이 인도한 것인데 이미 수길의 머리를 베지 못하였으니, 차라리 이 적이라도 모두 죽여서 종자도 남김이 없게 하여야 이 분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지난 해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이 섬을 경유하였으므로 익히 살펴서 가만히 기억하옵건대, 대개 주위가 수백 리에 불과하고, 중간에 배 댈 곳이 많으며, 육로는 비록 험하고 좁지만 사면이 모두 넘어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지금 대병이 남쪽 바다에 있으니 만약 절강병(절강병) 7, 8천 명이 우리 수군과 합세하여 바다를 건너 그 대비가 없을 때 덮치면 반드시 뜻대로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10년은 무사할 것을 보장할 수 있사오나, 지금 이 기회를 잃고 도모하지 않는다면 몇 해가 되지 않아서 통상(통상)과 급미(급미)를 청함에 이를 것입니다.” 하였는데, 조정 의논은 시일을 미루기만 하고 마침내 그의 말을 채용하지 않았다. <추포행장(추포행상)>
○ 기해년 7월에 일본이 또 사신을 보내와서 통신(통신)하기를 간청하므로 그 사신을 구금하고 명 나라 조정에 보고하였다. 《일월록》
○ 경자년 《고사촬요》에는 신축년이라고 하였다. 여름 4월에 대마도의 왜인 평의지(평의지)가 귤지정(귤지정) 등을 보내어 포로로 잡혀갔던 남녀 3백여 명을 돌려보내면서 화친하기를 요구하고 관시(관시)를 통하도록 애걸하므로 유근(류근) 등을 명 나라에 보내어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고 아울러 예부ㆍ병부와 군문 등 아문에도 자문(자문)을 보냈다.동래 사람 박희근(박희근)을 시켜 예조의 공문을 가지고 대마도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5월에 지정(지정)이 또 와서 화친하기를 청하고 명 나라 군사가 있는가 없는가를 정탐하므로, 만 군문(만군문 만세덕(만세덕))에게 자문을 보내어 명 나라 위관(위관)을 보내서 엄한 말로 깨우치도록 청하였다. 《고사촬요》
○ 신축년 6월에 왜의 사신이 경상 좌수영에 왔는데 포로되었던 전 현감 남충원(남충원) 등 2백여 명을 데리고 왔다. 충원의 공초(공초)에, “저 나라에 있을 때 수길은 이미 죽었고, 관동대장(관동대장) 가강(가강)이 수길의 아들 수뢰(수뢰)를 주인으로 세워서 정권을 임시로 맡겼는데, 관동에 중납언(중납언) 경승(경승)이란 자가 성을 웅거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지난 해 6월에 가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관동으로 향하였습니다.그뒤에 서경 유진(류진) 대장 모리휘원(모리휘원)이 왕성을 웅거하여 배반하고서 서로(서로)의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가강의 성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이어 서쪽으로 가서 가강을 공격하다가 도리어 크게 패하여 서로(서로)의 여러 장수 석전치보우(석전치보부)와 승장 안국사(안국사)ㆍ소서비(소서비)ㆍ평행장(평행장) 등이 모두 참살을 당하였습니다.가강은 관동에서 바로 서경을 향하여 여러 고을을 모두 무찔렀으나, 유독 휘원만은 베지 않고 머리를 깍아서 중으로 만들고 식읍을 모두 빼앗은 다음 서울 성 밖에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돌아온 사람은 만호 손문욱(손문욱)이 거느리고 체찰부에 도착하자 체찰부에서는 조사하여 근방의 사람들은 곧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일월록》
○ 이 해의 의지(의지)가 잇달아 지정을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고, 관시를 통하도록 청하며, 겸하여 명 나라 군사가 있는가 없는가를 살피므로 사유를 갖추어 명 나라 조정에 보고하였다. 《일월록》
○ 임인년에 지정이 세 차례나 나와서 비밀히 명 나라 군사가 있는가 없는가를 탐문하였는데, 그 정상을 헤아릴 수 없으므로 명 나라의 수군장 한 사람에게 날랜 군사 수백 명을 추려서 본국의 변장(변장)과 함께 병졸을 훈련시켜서, 명병이 있다는 소문이 멀리 퍼지게 해주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하절사(하절사) 김득(금륵)에게 부쳐서 아뢰었다. 《고사촬요》
○ 계묘년에 의지가 지정을 보내어서 포로되었던 남녀 수백 명을 돌려보내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사촬요》
○ 갑진년 봄에 지정이 또 와서 통신하기를 청하므로, 승 총섭(승총섭) 유정(유정)에게 명하여 가서 정세를 염탐하도록 하엿다. 《일월록》
○ 대마도는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곤궁하여, 순전히 공선(공선)의 상으로 주는 물품을 도로 팔아서 살아갔던 것인데, 임진년부터 화친이 끊어짐에 따라 이 이익을 잃게 되었으므로 섬의 왜가 화친을 통해 예전대로 회복하고자 하여, 일본에 말할 적에는 ‘조선에서 화친을 회복하기를 청한다.’고 하고, 우리나라에 말할 적에는 ‘만약 화친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다시 병화(병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갑진년 봄에는 대마도에서 포로된 김광(금광)을 몰래 도망쳐 온 것처럼 하여 보내어서 ‘왜가 다시 침입하려고 한다.’ 하였다.이때 김광이 경인년에 황윤길(황윤길) 등이 가지고 갔던 문서를 신표로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대개 섬의 왜가 경인년의 문서를 일본의 고물을 관장한 자에게서 도적질해 내어 몰래 김광에게 주어 일본의 신임을 얻은 것처럼 해서 공갈의 터전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과연 크게 두려워하여 중 유정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형세를 염탐하여 왔는데, 이것이 화친할 의논이 일어난 연유였다. 그 뒤 김광은 일이 발각되어 고문을 받아 죽었고, 그 가속들은 북쪽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하담록》
○ 유정이 두루 진신(진신) 사이에 전별하는 글을 구하였는데, 이수광(리수광)의 시에,

성세에 명장이 많지마는, 기이한 공은 오직 늙은 대사님 뿐이네 / 성세다명장기공독로사
배는 노련의 바다에 가고 / 주행노련해
혀는 육생의 말솜씨를 쏟아내리 / 설빙륙생사
요리 조리 속이는 오랑캐는 만족함이 없는데 / 변사이무염
기미(기미)하는 것은 일이 위태로울까 염려함이로다 / 기미사공위
허리에 찬 한 자루의 긴 칼이여 / 요간일장검
오늘날 남아 되기 부끄럽구나 / 금일괴남아

하였다. 《지봉유설》
○ 그때에 작자를 알 수 없는 시 한 구가 있었는데,

조정에 삼로(삼로)가 있다고 말하지 마라 / 막도묘당삼로재
나라의 안위(안위)는 모두 한 중의 돌아오는 데 맡겼다 / 안위도부일승귀

하였다. 《일월록》
○ 유정이 일본에 도착하여 여러 지방에 놀러다니며 산천을 구경하겠다고 핑계하니, 왜인이 기이하게 여겨서 거의 거르는 날이 없이 가마로 맞아 청하였다. 대판(대판)에 이르러서는 먼저 강화하는 것의 이로움을 말하고, 다음으로 포로되어 간 사람을 전부 돌려보내 달라는 말을 꺼내었더니 가강은, “임진년의 싸움을 나는 실상 알지 못하니 두 나라가 서로 태평을 누리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고, 잡혀간 사람들을 전부 찾아서 함께 돌아가게 하면서 오직 요시라(요시라)의 한 사건만은 그 잘못을 우리에게 돌리므로 유정은, “우리나라로서는 알지 못하는 바이다.” 하고 대답하였다.이리하여 을사년 여름 4월에 유정이 돌아올 때 우리나라 남녀 3천여 명도 돌아오게 되었다. 먼저 탐선(탐선)을 보내서 조정에 일일이 보고하고 아울러 바다를 건너는 날짜도 알리면서 수군에게 진을 엄중하게 하여 위엄을 과시하게 하였는데 통제사 이경준(리경준)이 역풍을 만나서 그대로 하지 못하였다. 유정이 찾아 온 포로들을 경준에게 맡기면서 편리한 대로 나누어 보내라고 하였는데 선장들이 앞을 다투어 나누어서 인수하고 구속하는 것이 포로된 것보다 더 심하였다.그 출생한 곳을 물어도 어릴 때 포로가 되어서 본계(본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모두 자기의 종이라 칭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그 남편을 묶어서 바다에 던지고 마음대로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다. 일이 발각되어 경준은 파면되고 이운룡(리운룡)이 후임이 되었는데, 각 도의 수사로 하여금 적발하여 사실대로 아뢰도록 하였으나 끝내 실상을 조사하지 못하였다. 《일월록》
○ 가강이 강화를 청한다는 사유를 갖추어서 자문으로 명 나라의 진무 등의 아문에 보고하였다.
○ 유영경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왜가 또 강화를 청하므로 영경은, “만약 왕릉을 침범한 적을 묶어서 보낸다면 화친할 수 있다.”고 답하면서 첨지 김계신(금계신)을 시켜 답서를 가지고 일본에 가게 하였다.
○ 병오년 10월에 왜국에서 두 사람을 묶어 보내면서 능을 침범한 적이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대신이 함께 국문하였더니 왜가 공초하기를, “우리의 얼굴을 보십시오. 우리는 아직도 젊으니 나이가 모두 20여 살이었다. 임진년이면 어린애들인데 어찌 능히 능을 발굴하였겠습니까.” 하였다. 대신에게 논의하라고 명하니 윤승훈(윤승훈)이 말하기를, “이들이 능을 침범한 적이라고 하는 것은 신명(신명)을 속이는 짓입니다.” 하니, 임금이 노해서 꾸짖고 그 왜를 저자거리에서 베었다. 《하담록》
○ 그때 귤지정(귤지정)이 두 명의 왜를 묶어 왔는데 영경은 그 왜적을 종묘에 바치고 하례를 하려 하였고, 이항복은 국경 가에서 죽여 왜의 사신에게 보이기를 청하였다. 이정귀(리정구)는, “지정이 두 적을 데리고 왔는데, 미리 국경에 있는 여러 신하에게 지정과 대좌하여 함께 능을 침범한 절차를 문초하도록 명하여, 만약 공초한 바가 사실이면 우리[함차]에 가두어서 서울로 보내어 바로 포로를 종묘에 드릴 것이고, 자복하지 않을 것 같으면 곧 지정을 힐책하고 돌려보내도록 하였으면 처리가 마땅하였을 것입니다.이제 변신(변신)은 이들을 인수받았고, 묘당에서는 화형(화형)과 압슬(압슬)로써 문초하였어도 오히려 하늘을 가리키며 굳게 자백하지 않고 있는데, 만약 참인지 거짓인지를 논하지 않고 바로 그 머리를 벤다면 저놈들은 반드시 우리가 속았다고 비웃을 것이니, 이 왜를 죽이기 전에 그의 공초한 자를 가지고 지정에게 급히 알리고 그런 사실이 없음을 책망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면 저들은 할 말이 없어지고 우리는 말이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저놈들이 만약 성심으로 화해를 구한다면 반드시 다시 진짜 적을 보낼 것이며, 비록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은밀히 그 간사함을 꺾을 수 있어서 후일에 말을 잡을 수 있는 여지가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마침내 영경의 의논을 따랐다. 《월사집》
○ 여우길(려우길) 등을 보내어 사유를 갖추어 명 나라 조정에 아뢰었더니 화친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영경이 임금의 의사를 보아가면서 논의하였으므로 앞뒤가 같지 않아서 마치 두 사람의 논의 같았다. 《하담록》
○ 정미년 1월에 첨지 여우길, 교리 경섬(경섬), 좌랑 정호관(정호관)을 통신사로 임명하여 일본에 들어가게 하였더니 온 조정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동지(동지) 윤안성(윤안성)의 시에,

사신의 명칭을 회답사(회답사)라 하니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 / 사명회답향하지
오늘의 화친이란 것을 나는 알지 못하겠네 / 금일교린아미지
시험삼아 한강에 가서 강 가를 바라보라 / 시도한강강상망
두 능의 송백에 가지가 나지 않는 것을 / 이릉송백불생지

이라고 하였다. 이덕형 시의 한 연에는,

신자(신자)는 능침의 치욕을 씻지 못하였는데 / 신자미전릉침욕
간서(간서 편지)는 먼저 견양(견양)의 하늘(오랑캐의 나라)에 가는구나 / 간서선입견양천

하였으므로, 그때 재상이 듣고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지봉유설》
○ 통신이라는 것이 혐의스럽다고 하여 회답사라 명칭을 고치고, 서장관(서상관)은 종사관이라고 명칭을 고쳤다.
○ 우길 등이 갈 적에 양재역(량재역)을 지나는데 큰 바람이 갑자기 불어서 깃대를 부러지게 하여 일행이 놀랐다. 《일월록》
○ 우길 등이 일본에 도착하였으나 요령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왜인도 공경히 대접하지 않고서 금쟁반에 똥을 담고 금가루를 뿌려서 올렸는데, 경섬이 진짜 금이라고 하며 손으로 쥐었더니 더러운 것이 손에 가득하여 왜인이 포복절도하였다. 이렇게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고, 수모를 받은 형상에 대해 사람들이 다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겼다.
○ 우길 등이 돌아올 적에 포로되었던 1천 3백 4십여 명도 돌아왔다.
○ 그때 원가강(원가강 덕천(덕천))이 수길의 아들을 폐하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가 그 아들 수충(수충)에게 자리를 전하였다. 영경은, “가강이 평씨(평씨)를 패하였으니, 우리나라와 원수가 아니다. 가히 화친을 허락할 것이다.” 하여 아뢰고 사신을 보냈던 것이다.수충의 답서에, “억지로 화친을 허락한다.”는 뜻을 보였는데도 우길 등은 두려워하여 감히 반박도 하지 못하고 왔지만 전례를 원용해서 가선에 올리니, 사람들의 의론은 시끄러우면서도 영경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못하는데, 오직 장령 최유원(최유원)이 소를 올려 우길 등의 가자(가자)를 빼앗게 하니, 영경이 매우 미워하여 그 뒤 공적인 모임에서 예절관계로 서로 다투다가 유원을 끌어내어 욕을 보였다. 《하담록》
○ 일찍이 수길이 죽을 적에, 두 대신이 있어서 좌우 정승 같았는데 하나는 동(동)이라고 하고, 하나는 서(서)라고 하였으니 바로 가강과 휘원(휘원)이었다. 두 사람이 수뢰(수뢰 수길의 아들)를 추대하여 함께 66주를 다스리다가, 동ㆍ서로 각각 33주씩 나누어서 가강은 동을 맡고 휘원은 서를 맡았다. 휘원에게 안국사(안국사)라는 꾀 많은 중이 있었는데 휘원에게 유세하기를 “천하에 두 임금이 있음은 듣지 못했소. 청컨대 전쟁하여 이기는 자는 임금이 되고 지는 자는 신하가 되게 하시오.” 하였다.휘원이 처음에는 듣지 않다가 7월에서야 그의 말을 좇아서 편지로 가강에게 알렸더니, 가강이 33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므로 휘원도 군사를 모두 일으켰다. 휘원이 가강을 관백의 궁전에서 만나 안국사의 말대로 고하니 가강도, “그렇다. 진실로 싸우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두 사람이 물러나서 그 군사들을 정돈하니 나라 안이 떨며 겁내었다. 휘원이 대오에 살마주(살마주) 의홍(의홍)이란 자가 있어서 용맹스럽고 사나워 싸움을 잘하므로 모든 왜가 그를 두려워하였는데 가강이 편지로 의홍을 유혹하기를, “내가 만약 내응(내응)이 되어준다면 다섯 개의 도를 더 봉하겠다.” 하였더니 의홍이 알리기를, “큰 일이어서 편지만으로는 불가하니 맹서를 하면 따르겠소.” 하였다.가강이 부모로 맹서하였더니 의홍이 말하기를, “내가 뒤에서 공격할 터이니 그대는 포소리를 듣고 진격하시오.” 하였다. 이리하여 싸움이 한창이고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의홍이 뒤에서 포를 쏘자 가강이 군사를 독려하여 진격하게 하니, 휘원의 군사가 크게 놀라서 휘원의 사랑하던 장수와 안국사 두 사람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하였으므로 휘원이 드디어 패하였다.가강이 세 사람을 함께 사로잡아서 뜰 아래에 나란히 앉히고 직접 수죄(수죄)하여, “틈을 얽어 난리를 주장한 자는 두 사람이다.” 하고 장수와 안국사의 얼굴에 회칠을 하고 옷을 벗겨서 우거(우차)에 싣고 군중에 돌린 다음 드디어 베었다. 휘원은 사면하여 상좌에 앉히고, “그대는 실상 죄가 없으니 그대가 다스리던 한 고을과 또 나의 두 고을을 더 주겠다. 그대는 이 세 고을만 있으면 족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휘원은 두려워하여 사례하였다. 이로부터 자신의 땅을 모두 잃었고 오직 세 고을만으로 살았다. 《염헌집(념헌집)》
○ 가강은 의정(의정)의 11대 손으로 침착하고 굳세며 지혜가 많아서 군사를 잘 부렸다. 일찍이 평행장(평행장)과 더불어 서로 관원(관원)에서 버티고 있었는데 행장은 군사가 7만이고, 가강은 군사가 20만이었는데도 가강이 행장에게 항복하기를 빌면서, “묶든지 포로로 하든지 귀양을 보내든지, 모두 오직 명령대로 하겠소.” 하니, 행장은 본래 가강을 가볍게 여기던 터라 이 말을 듣고는 더욱 교만하여 마침내 마음이 해이해졌다.이에 가강이 그 군사를 나누어서 한 패는 급히 강을 막아서 군사가 건너게 하여 상류를 먼저 점령하게 하고, 한 패는 자신이 거느리고서 행장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하류를 따라가서 바로 행장의 군사와 충돌하니 행장의 군사는 패하여 죽었다. 《풍암집화(풍암집화)》
○ 가강이 수뢰를 공격하려고 하여, 대판은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므로 수뢰와 화친하기로 약속하고, 은밀히 기이한 계책으로 그 성을 불살라서 드디어 멸망시키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다. 처음에 평씨(평씨)와 원씨(원씨)가 각각 군사를 일으켜서 강약을 다투다가 뇌조(뢰조) 때에 이르러, 군사가 더욱 강해졌고 만력(만력) 중에 수길에 이르렀는데, 수길의 모습은 개와 같았으므로 스스로 얼굴이 도참(도참)에 맞는다 하여 자신의 강대함을 자부하고, “천하도 통일할 수 있다.”고 하였다. 수길이 죽고 수뢰가 새로 즉위하였더니 국인들이 이에 반란을 일으켰다. 《미수기언》

종계(종계)를 변무(변무)하다
 

일찍이 본국의 반역자 윤이(윤이)와 이초(리초)가 태조 초기에 중국에 들어가서 국계(국계)를 무고하였다. 《조야기문》
○ 태조 3년 홍무 27년 갑술에 흠차내사(흠차내사) 황영기(황영기) 등이 가지고 온 해악(해악)과 산천 등 신에게 고하는 축문 내용 중의 한 구절에, “고려 배신 이인임(리인임)의 후손으로서 지금 이름이 단(단) ……” 이라고 하였으므로 곧 본종(본종)의 세계(세계)를 가지고 가서 이인임과는 관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 나라에 보고하였다. 《조야기문》 《패관잡기》 《고사촬요》
○ 태종 3년 영락(영악) 원년 계미에 조온(조온)이 중국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명 나라의 조훈조장(조훈조장) 안에, ‘조선 국왕은 이인임의 후손이다.’라는 말이 적혔더라.”고 말하므로 곧, “이인임의 조상의 본관과 본국 왕실의 세계가 각각 다르니, 개정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사정을 가지고 이빈(리빈)을 보내어 아뢰었다.갑신년에 중국의 예부에서 종계의 일로 자문을 보내어 왔는데, “본부의 상서 이지강(리지강) 등이 황제의 성지를 삼가 받아보니 조선 국왕은 이인임과는 관계가 없다 하니, 생각하건대 이것은 전의 전설이 착오된 것이므로 거기에 준하여 개정하였다. ……” 하였다. 아직도 명시되지 않았다.
○ 중종 13년 정덕 13년 무인에 이계맹(리계맹)이 대명회전(대명회전)을 얻어 왔는데, 본국 주(주)에 “이인임 및 아들 이성계 태조의 옛 이름 지금 이름 단(단) 태조의 새 이름 이 홍무 6년에서 28년에 이르기까지 전후에 왕씨의 네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차지하였다. ……” 우(우)ㆍ창(창)ㆍ요(요)ㆍ석(석)을 가리키는데 석은 공양왕의 세자이다. 하였으므로 곧 무고 입은 사정을 갖추어 남곤(남곤)ㆍ이자(리자)를 보내어 아뢰었다.기묘년에 예부 상서 모징(모징)이 본국 종계 등의 일로 제사(제사)를 보내왔는데, “이성계가 나라를 얻고 국호를 고친 것은 모두 태조 황제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니, 성은을 받은 바가 결코 우연이 아니고, 또 이인임의 후손이 아닌 것은 이미 태종 문황제의 조지(조지)를 만들어 고치기로 허락하였으며, 《일통지(일통지)》에 또 왕요(왕요 고려 공양왕)가 혼미하여, 이성계가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았다는 등의 일을 밝게 드러내었는데 지금 아뢴 바와 대략 서로 부합된다. 내린 칙서 한 통을 배신에게 부쳐서 황제의 뜻을 알린다.성지를 받들어 조선 국왕의 조상이 이인임의 뒤에 매이지 않았음은 태종 황제께서 이미 거기에 준하여 개정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제 또 갖추어 아뢰고 진술하니 성의와 효심을 가히 생각하겠다. 돌아갈 적에 칙서를 써 주노니 왕에게 주어 알게 하라.” 하였다. 《패관잡기》
○ 남곤 등이 돌아오는데 황제가 칙서를 내려, “그대의 조상 성계는 원래 이인임의 후손이 아니므로 특별히 청하는 바를 윤허하고 칙서를 내려 짐의 뜻을 알게 하노라” 하였다. 《고사촬요》
○ 그때 종계 변무의 일을 황제가 예부에 내렸는데도 오래도록 회답하여 아뢰지 않으므로, 남곤이 상서 모징에게 글을 올리고, 또 서장관 한충(한충)에게도 낭중(랑중)에게 글을 올리도록 하였는데 이것 역시 남곤이 고쳐 쓴 것이었다. 주문(주문)의 초고를 작성할 때에 상서가 낭중에게 말하기를, “초고를 만드는데 노력하여 문헌(문헌)이 있는 나라에 웃음거리가 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초고가 완성되자 상서가 많이 고쳤으며 마침내 그 청하는 대로 따랐다. 《패관잡기》
○ 24년 가정(가정) 8년 기축에 유보(류부)가 명 나라 서울에 있다가, 대명회전을 다시 편찬한다는 말을 듣고, 글을 예부에 올려서 본국의 종계와 악명(악명) 등에 대하여 사실대로 개정하여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서 이시재(리시재) 등의 제사에, “황제의 성지를 받들어보니, ‘조선국 배신이 올린 바 본국 종계의 사정은 이미 조종조(조종조)의 명백한 조지(조지)를 받든 바가 있으니, 예부에서 조사하여 자세히 기록해서 사관(사관)에 보내어 채택하여 시행케 하라.’ 하셨다.”고 하였다. 《패관잡기》
○ 34년 가정 18년 기해에 주청사(주청사) 권벌(권벌)과 임권(임권)을 보내어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예부 상서 엄숭(엄숭) 등이 회답한 제사에, “변명한 이인임 및 오늘날 모관(모관)이라는 자와 아울러 네 임금을 죽였다는 등의 말을 조사하여 보니, 모두 대명회전 안에 기재된 조훈(조훈)의 말씀이니, 어찌 감히 경솔히 개정하기를 의논하랴. 마땅히 소청대로 따를 수는 없으니 그 전후에 변명하여 올린 문서 및 받들어 받은 명 나라 열성(렬성)의 명백한 조지(조지)를 사관(사관)에 부치고, 이제 회전을 찬수할 때에 조선국 조항 아래에 서술하여 넣도록 하였다.조훈과 회전 두 가지가 서로 방해됨이 없이, 의심나는 것은 의심나는 대로 신빙성 있는 것은 신빙성 있는 대로 전하는 것이 각각 증거가 있는 것이다. 황제의 성지를 받들어보니, ‘이 황조(황조)의 대훈(대훈)은 감히 별도로 의논할 수 없으니, 그 나라 주사(주사)와 아울러 열성의 명백한 조지는 이 뒤 회전을 찬수할 적에 붙여서 기록하게 하라.’하셨다.”고 하였다. 《패관잡기》
○ 경자년에 권벌 등이 명 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칙서를 내려, “그대의 나라가 자주 종계가 분명히 이인임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으로 아뢰어 와서, 우리 성조(성조) 및 무종(무종)께서 명백한 조지를 갖추어서 짐도 자세하게 알았다. 다만 우리 고황제(고황제)의 조훈(조훈)은 영원히 깎을 수 없고, 회전에 기재된 것은 후일 속찬(속찬)할 적에 그대의 주사(주사)를 상세하게 기록할 것이니 그렇게 알지어다” 하였다.
○ 명종 12년 가정 36년 정사에 대명회전이 아직도 간행되어 반포되지 않아서 개정 여부를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 조사수(조사수)를 보내어 아뢰었더니, 예부에서 황제에게 회답하는 제사에, “비록 회전은 이미 찬수하였으나, 아직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개정한 말을 본부에서도 조사하고 상고할 수가 없어 사관(사관)에 가서 검사하여 명백하게 알릴 것이니, 신 등이 본국에 자문을 보내어 알리는 것을 기다려 주시고, 이어 회전을 반포하는 날을 기다려서 밝은 교시를 내리소서.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였다.
○ 18년 가정 42년 계해에 김주(금주)를 보내어 ‘회전 중에 국조(국조 태조(태조))가 환조(환조)의 아들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기재하기를 청한다.’는 등의 사정을 아뢰었다. 김주가 중국에서 병으로 죽었으므로 서장관 이양원(리양원)이 칙서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마땅히 사관에 회부해서 회전의 옛 조문에 의거하여 그대의 조상의 직계를 기재하여 흠을 씻어서 온 천하에 사실대로 전하여 해와 별같이 빛나서, 조정과 그대의 나라에서 모두 이자춘(리자춘)의 자손이지 이인임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겠다.” 하였다.
○ 예부에서 또 옛 회전 내에 본국의 종계를 고쳐서 기록하고, 이어 몇 장을 더 간행해서 배신에게 주어 보내어 고쳐 기록한 뜻을 알게 하였다.
○ 선조 6년 만력 원년 계유에 주청사 이후백(리후백)과 윤근수(윤근수), 서장관 윤탁연(윤탁연)을 보내어, “종계와 시역(시역) 등 이미 변무(변무)된 일을 이어서 편수하는 회전에 더 넣기를 바란다는 등의 사정을 아룁니다. ……” 하였다.
○ 예부 상서 육수성(륙수성)이 회답하는 제사에, “성지를 받들어보니, 그 나라의 전후 주사(주사)를 상세히 황조실록(황조실록) 안에 편찬하여 넣으라 하셨사오니, 새 회전에는 조지를 기다려서 이어서 편수할 적에 더 넣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이어 칙서를 써서 임금에게 알렸는데, “그대의 선조 이성계가 오래도록 무함을 입었는데, 우리 열조(렬조)의 살피심을 입어 이미 깨끗이 씻어 개정하였다.이제 찬수하는 실록에 전후의 주사를 갖추어 기록하여 영원히 전하도록 하고자 하노라. 짐이 생각하건대 그대의 나라는 예의를 지키는 나라이고, 또 일이 군신(군신)의 대의에 관계되므로 특별히 청하는 바를 윤허하고, 곧 예관(례관)에게 명하여 그 사유를 초록해서 사관에 회부하고 숙조실록(숙조실록) 안에 갖추어 써서, 뒷날 새 회전을 편수할 때를 기다려서 그대의 선조의 무함 받은 것을 씻어 달라고 한 간곡한 심정을 위로하노라.” 하였다.
○ 8년 만력 3년 올해에 사은사 홍성민(홍성민), 서장관 정윤복(정윤복)을 보내어 겸하여 주청하게 하였더니, 예부 상서 만사화(만사화)의 제사에, “조선 국왕의 그 선조의 원통함을 가슴 아파해서 재삼 변명하여 아뢰기에 이르렀다. 다만 전에 이미 명백한 조지를 받들었으며, 제왕의 말씀이 한 번 나오면 미덥기가 사철과 같으니 누가 감히 더하고 감함이 있으리요. 마땅히 그 나라의 전후의 주사(주사)를 황조실록에 편찬해 넣는 한편, 그것을 초록하여 사관에 회부하고, 회전 편수를 기다려서 기재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다.예부에서 이 뜻으로 칙서를 내려 선유(선유)할 것을 청하여 사신 가는 편에 부치려고 하므로, 성민이 이 소식을 듣고 이어 예부에 하직하고 말하기를, “일이 결정되지도 않았는데 바로 유지(유지)를 받들고 돌아가는 것은 사신으로 감히 못할 바이오.” 하니 예부에서 따랐다.
○ 10년 만력 5년 정축에 사은사 윤근수, 서장관 김성일(금성일)이 명 나라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예부의 회자(회자)를 가져왔는데, “부쳐 보낸 종계와 악명 두 조항은 이미 조지를 따라서 갖추어 기재하였으니, 두 번 아뢸 필요가 없습니다. 그 갖추어 기재한 조목은 이미 배신에게 펴서 보였습니다만, 관국(관국 사관(사관)에서 찬수할 적에 사리상 반드시 조금은 산삭(산삭)하고 윤색(윤색)을 더할 것이므로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황제의 어람도 거치지 않았으므로 문득 부쳐 보내지 못합니다.” 하였다.
○ 11년 만력 6년 무인에 주청사 황림(황림), 서장관 황윤길(황윤길)이 돌아왔는데, 예부 시랑 임사장(림사장) 등의 제사에, “책이 완성되기를 기다려서 반포할 것이니 다시 빠질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정축년 겨울에 사신을 보내어 거듭 아뢰었다. 《유천차기(류천차기)》
○ 13년 만력 8년 경진에 성절사(성절사) 이증(리증)이 돌아왔는데, 예부에서 회답하는 자문에, “본국에서 변무(변무)하는 종계 등의 일은 이미 회전을 편찬할 적에, 특별히 깨끗이 씻어졌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만 선조의 이름 두 글자의 그릇됨으로 인하여 이제 다시 정정하기를 청하니, 삼가고 주밀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회전의 본국 조항에 ‘긍춘(긍춘)’이라는 두 글자를 실었는데, 두 글자의 필획이 틀림 없습니다.혹 한 때 베껴쓴 것이 그릇된 듯하나, 이제는 모순되고 누락될 염려는 없습니다.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편집한 것이어서 일조 일석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책이 완질(완질)이 되어서 위에 올려 어람하신 뒤에라야 국내외에 반포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상은 《고사촬요》
○ 종계의 개정이 비록 황제의 성지를 입어서 회전에 끼워 넣었지만, 편찬이 끝났는데도 나누어 주지를 않으니, 이이(리이)가 강개한 어조로 사람에게 말하기를, “하찮은 개인도 무고를 당하면 오히려 씻고자 하는 것인데, 어찌 나라 임금으로서 무고를 받은 지 2백년이나 되도록 씻어버리지 못함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사신 보내는데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하고, 동료와 더불어 의논하여 아뢰기를,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가 죽는 것입니다.종계에 무고를 받음은 열성(렬성)에 욕이 크오니 주청하는 사신은 마땅히 지성으로 명 나라 조정을 감동시켜서, 일이 성공하면 환국하고, 성공하지 못하면 뼈를 연산(연산)에 묻을 각오를 한 뒤에라야 가히 성사할 것이옵니다.” 하고, 특별히 일의 기미에 따라 자유로이 응대할 만한 인재를 선택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조정 의논에 이이를 보낼 만하다고 하는 이가 많았으나 박순(박순)과 이산해(리산해)는, “이이는 하루라도 조정을 떠나서는 안되니 마땅히 그 다음 인물을 생각해야 한다.” 하여 김계휘(금계휘)를 주청사로 삼았더니, 계휘가 자청하여 고경명(고경명)을 서장관으로, 최립(최립)을 질정관(질정관)으로 삼았다. 《석담일기》
○ 14년 만력 9년 신사에 김계휘가 돌아오는데, 예부 상서 서학모(서학모) 등이 말하기를, “만약 회전이 완성되면 곧 나누어 주도록 아뢸 것이니 칙서를 내릴 필요는 없다.” 하였다. 《고사촬요》 ○ 《유천차기》에, “인의 (인의) 김경창(금경창)의 상소에 ‘회전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으니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뼈를 연산에 묻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으므로, 드디어 김계휘등을 보냈는데 경창은 새로 한림에서 벼슬을 내놓았다.” 하였다.
○ 17년 만력 12년 갑신에 주청사 황정욱 (황정욱)이 돌아올 때에 가지고 온 예부 상서 진경방(진경방) 등의 제사에, “개정하여 편찬한 문사는 어람을 거치지 않습니다. 간행하면 초고를 가려 뽑아서 보일 것이며, 성지를 받들어 그대로 써서 왕에게 줄 것입니다.” 하였고, 칙서에는, “전항의 사유가 그대의 원래의 주문과 서로 합치되니, 책이 완성되어 짐이 보기를 기다려서 반포하는 날에는 관원을 보내어 그대의 나라에 보낼 것으로 먼저 알리나니 그대는 그리 아시오.” 하였다. 《고사촬요》 서장관 한응인(한응인)
○ 황정욱이 예부에서 회답하는 제사와 새 회전에 기재된 우리나라 사실을 칙서 안에 갖추어 기록한 것을 얻어 가지고 왔는데, 그 거짓됨을 깎아내고 무고된 것을 변백한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 이에 임금이 매우 기뻐하면서 종묘에 고유제(고유제)를 올렸다. 《동각잡기》
○ 21년 만력 16년 무자에 주청사 유홍(유홍) 정해년에 유홍과 서장관 윤섬을 보냈다. 이 돌아올 때에 황제가 칙서를 내려서 유시하기를 “회전 안에 본국 사실을 기재한 것 한 권을 우선 부쳐 보내노라.” 하였다. 임금이 친히 종묘와 사직에 윤리가 다시 펴졌다는 뜻으로 고유하고, 또 선성(선성 공자)은 윤리의 주인이므로 문묘에 고유하고, 유흥 등 일행과 승문 제조 등에게 태평관(태평관)에서 잔치를 하사하였다. 《조야기문》 《고사촬요》
○ 유홍이 명 나라 서울에 갔는데 예부에서 회전은 어람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주기가 어렵다고 하여, 유홍이 꿇어 앉아서 청하기를 마지 않고 땅에 머리를 두드려서 피가 흐르니, 상서 심리(침리)가 여기에 감동되어 갖추어 아뢰어 사신이 오는 편에 부쳤던 것이다.황제의 칙서에, “배신이 지성으로 간청하므로 이에 특별히 빨리 주노라.” 하였다. 산해관을 나올 때에는 병부 주사 마유명(마유명)이 시를 지어서 하례하였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칙서를 교외에서 맞이하여 유홍을 불러 보고, “소하(소하)ㆍ조참(조참)ㆍ위청(위청)ㆍ곽거병(곽거병)의 공으로도 견줄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그 시를 보고 그 운(운)에 친히 화답하고 관각(관각)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릴 것을 명하였다. 계곡집(계곡집)
○ 마유명의 시는,

국왕의 황제의 명에 공순하여 / 국왕공제명
공헌함이 홀로 정성스러웠다 / 공헌독건성
새벽에 탄 말은 진역(진역)을 따라가고 / 효기수진역
밤에 가는 말은 한영(한영)을 지난다 / 소참도한영
상림원(상림원)에선 발에 편지를 매고 온 기러기를 보았고 / 상림첨계안
장락궁(장악궁 한 나라의 궁 이름)에선 꾀꼬리 울음을 들었다 / 장락청제앵
돌아가거든 번거롭게 호소하지 말라 / 귀거무번송
천조는 스스로 성스럽고 밝으니라 / 천조자성명

하였다. 여러 신하의 화답한 시 중에 오직 이상홍(리상홍)의 시 한 편 외에는 볼만한 것이 없었다는데, “기쁜 기운은 장릉(장릉) 나무에 엉키었고, 즐거운 소리는 태액[태액지] 꾀꼬리로다.” 하는 것이었다. 이에 어제(어제) 시를 내렸는데,

종계가 이제 비로소 바르게 되었는데 / 종팽금시정
이것이 나의 정성이라고 이르지 말라 / 막위시여성
여러 조종(조종)의 공이 일찍이 쌓였고 / 열조공증적
모든 신하의 정성으로 몇 번이나 경영하였던가 / 제신곤기영
은혜로 적셔 주는 것은 천지와 같고 / 은첨동대조
기쁜 노래를 서로 부르니 꾀꼬리 소리에도 미치도다 / 가경급류앵
원하건대 나의 구구한 뜻을 지켜 / 원수구구지
천추에 성명하신 님을 받들기를 / 천추대성명

이라는 것이었다. 여러 신하가 존호 올릴 것을 청하였으므로 끝 구절에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다. 《지봉유설》
○ 임금이 전교하기를, “사신이 만리 길에 고생하면서 한 마음을 다 바치어 손으로 칙서를 받들고 친히 보전을 받들고 왔다. 금수의 지역을 변하게 하여 예의의 나라로 되게 하니, 이것은 동방이 두 번 만들어지고 기자(기자)의 구주(구주)가 다시 베풀어지는 날이로다. 가히 후세에 민멸되게 할 것이랴.” 하고, 드디어 여러 문신에게 다 화답하도록 명하였다.
○ 대사령(대사령)을 반포하여 사형수 이하는 모두 석방하였으며, 증광과를 베풀어서 인재를 뽑고, 《서륜전서(서륜전서)》를 편찬하여 전말을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곧 우의정 유전(류전)과 한성 부윤 최황(최황)을 보내어 황제에게 사은하였다. 《유천차기》
○ 사은표의 한 구절에, “임금과 애비 없은 지 2백년만에 짐승됨을 면한 것이 진실로 다행이고, 영토 수천 리를 가졌으니 하사한 망룡의(망룡의)를 입은들 무엇이 부끄러우리.” 지난해에 황제가 망룡의를 하사하였으므로 표의 구절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대제학 이산해가 지은 것이었다. 임금은 윤리 기강이 정해지지 않으면 비록 영토 천 리가 있더라도 부끄러울 뿐 영예는 되지 않는 것이다.그리고 또 국토 수천 리를 가졌다는 문구는 자랑하는 의사가 있는 듯해서 황제에게 아뢰는 데는 마땅치 못하니, 그 구절은 고쳐서 새로 지어 올리라 하고, 조정 안의 글 잘하는 신하들을 모아서 중추부에 함께 모여 각자가 나누어 지어서 적당한 문자를 선택하라고 명하고 이어 술을 하사하였는데, 여러 신하의 고친 것이 모두 온당치 못하였다.” 윤리 기강을 13대 만에 바루었으니 하사한 망룡의를 입은들 무엇이 부끄러우리.” 하는 것은 임금이 직접 지어서 고친 것이었다. 필경에는 이 말을 사용하였는데 뒤에 들으니 중국 사람이 지극히 좋다고 하였다 한다. 《유천차기》
○ 22년 만력17년 기축에 성절사 윤근수(윤근수) 서장관 윤형(윤형) 가 돌아올 때에 황제가 칙서를 내리고 회전 전부를 하사하였다. 칙서에, “짐은 생각하건대 회전 한 책은 우리 조종의 옛 장정(장정)이고, 국가의 정해진 법이라 내부(내부)에 보관하고 부본(부본)은 해당 관청에 두어, 그 속국에는 일찍이 함부로 보인 적이 없는데, 그대의 나라는 대대로 직분과 공헌을 닦고 일찍부터 충성된 마음을 지켜 동한(동한)에서 울타리가 되어, 중국의 위의를 모방하여 여러 대에 분명치 못했던 세계(세계)를 바로잡았으니, 이미 간절한 소원을 이룬 것이다.밝은 시대에 변경할 수 없는 글[회전]을 편찬하고서 쾌하게 보여줄 것을 생각하노니, 짐은 그대의 나라를 내지(내지)와 같이 보며 같은 문자를 씀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전편을 주어 영구히 전하게 하여, 이에 배신에게 부쳐, 본국으로 가지고 돌아가서, 그대의 정성스럽게 진정하던 지극한 뜻을 위로하나니, 그대는 이 서적을 받들고 이 장정을 본받을지어다. 이미 현저하게 영광스러움을 입었으니 마땅히 높여서 비밀리에 보관하도록 하라. 짐의 어루만지고 품어주는 사랑을 생각하여 더욱 돕고 받드는 정성을 견고히 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사촬요》
○ 공을 기록하라고 명하여 황정욱ㆍ유홍ㆍ윤근수를 첫째로 삼고 전후에 사신으로서 공이 있는 자들도 등급을 나누어 훈권(훈권)을 하사하고 광국공신(광국공신)이라고 칭하였다. 이에 조정 신하들이 존호 올릴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다가 오랜 뒤에 허락하였는데, 임금에게는 ‘정륜 입극 성덕 홍열(정륜립극성덕홍렬)’, 중전에게는 ‘장성(장성)’ 이라고 올리고, 조정과 종실에서 잔치를 올렸다. 《동각잡기》
○ 그때 삼사와 백관이 존호 올릴 것을 정청(정청)하였는데, 헌납(헌납) 백유함(백유함)은 옳지 못하다 하고, 피혐(피혐)하여 사직하려는 말을 드려서 여러 번 아뢴 뒤에 허락되었다. 《조야기문》
○ 처음부터 끝까지 180년 동안에 사신이 열한 번 가서 비로소 청하던 대로 되었다. 곧 우의정 대리 정탁(정탁)과 동지중추 권극지(권극지)를 보내어 사은하고, 증광시를 시행하였다.
○ 그때 종계의 개정을 청하려고 여러 차례 갔으나 이행되지 않으므로, 조정 의논이 중국 조정의 일은 재물이 아니면 성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여 시험삼아 사용하려고 하였는데, 역관 홍순언(홍순언)이 말하기를, “외국의 사세가 중국 사람과는 같지 않는데 만약 이 뇌물 쓰는 길을 열어 놓으면 이 뒤에 오는 폐단은 반드시 국가적인 폐단에 이르고서야 말 것이니, 종계 변무의 일이 성사되는 것이 몇 해쯤 늦더라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여 드디어 뇌물은 쓰지 않았다. 《하담록》
○ 홍순언의 보은단(보은단)에 대한 일은 《역설전고(역설전고)》에 기록되었다.
○ 종계가 개정되게 된 것은 또한 영양(영양) 허국(허국)이 내각(내각)에 있으면서 주선하여 준 힘에 연유한 것이다. 대개 허국이 본국에 사신으로 왔을 때, 국상을 당해서 경황이 없는 중에도 인정과 예법에 합당하게 하였더니 우리의 성실함을 매우 아름답게 여겼던 까닭으로 그가 명 나라 조정에 있으면서 우리의 일을 힘껏 주장하여 깨끗이 씻게 하였던 것이다. 성옹《지소록》
○ 처음에 이준경(리준경)은 허국이 우리를 성심으로 대접하여 간격이 없음을 알고, 말이 국조(국조) 종계가 전부터 무고를 입은 일에 미치자 상세하게 진술하였더니 태사 허국이 귀기울여 듣고, “상국께서 어찌 거짓말을 하리요. 상국의 오늘 이 말이 아니었으면 중국 조정에 있는 우리들이 어찌 자세한 곡절을 알겠소. 이와 같으면 실로 원통한 일이요. 내가 조정에 돌아갈 때를 기다려서 곧 황제께 아뢰는 글을 보내면 나도 마땅히 조정에서 힘껏 변명하겠소.” 하였다. 허국이 돌아가자 그의 말대로 곧 종계 변무에 대한 주청을 하게 되었다.준경이 사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허태사와 문답한 말이 있다.” 하고, 이어 세 가지의 정문(정문)과 대답할 말을 직접 지었는데, 양연기(양연기) 등(이름과 자(자)가 동일한 예)의 일 같은 것도 다 조목조목 나열하여 부쳐 보냈더니, 예부에서 묻는 것이 모두 조목조목 나열한 말에서 나와 일행이 모두 놀라고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과연 허태사가 말을 꺼내고 힘껏 변명함으로 인하여 깨끗이 씻어졌고, 드디어 회전을 다시 간행할 때에 고칠 것으로 허락하는 조서가 내려졌으니, 이는 준경이 허태사에게 신임을 얻은 때문이었다. 종계를 고치는 한 가지 일에는 공이 첫째 공에 해당되는데도, 사람들의 방해를 받아 다만 원종공신(원종공신)으로 논하였다고 한다. <동고행장>
○ 융경(륭경) 정묘년에 민호(민호)가 고부사(고부사)의 수석 통역으로 장차 명 나라 서울에 가려고 하니, 이준경이 북경에 가서 대답할 몇 개의 조목을 써서 민호에게 주며, “전날 허태사가 돌아가면서 《목은집(목은집)》을 구해갔는데, 만약 본국에서 변무를 주청한 일에 대하여 힐문하는 일이 있다면, 그대는 연소하므로 혹 실수할까 염려하여 이에 최세협(최세협)과 임기(림기) 등을 더 보내니, 거의 빠트리거나 잊는 뉘우침이 없을 것이다. 조심하고 조심하여라.또 이제 전하께서 새로 즉위하였는데, 왕손의 순위로 가장 어려서 중국에서 의심이 없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선왕(명종)이 살아계실 때에 종실 중에서 능히 계승할 만한 자를 살펴 어진 이를 가려서 세자로 정하였으므로 대신들이 선왕의 뜻을 받들어 추대하였다고 대답하고, 전하의 연세가 몇이냐고 물을 것 같으면 사실대로 대답할 것이다.양로왕(양로왕) 연산(연산)을 가리킨다. 의 일을 묻거든, 고질병으로 사람 발소리만 들어도 문득 놀라고 성을 내어서 능히 국사를 다스리지 못했던 까닭에 중국 조정에 아뢰고 아우 공희왕(공희왕 중종(중종))에게 왕위를 사양하고, 유언하기를, ‘죽는 날에 중국을 번거롭게 할까 두려우니 아예 부고하지 말라.’ 하시었으므로, 감히 아뢰지 못하였다고 하여라.” 하고, 종계 일에 대하여 직접 지은 정문(정문)을 주어 보내었다.민호 등이 명 나라 서울에 도착하자 실록의 찬수를 겸한 제독주사(제독주사) 서응룡(서응룡)이 갑자기 조선의 대통역관을 불러 묻기를, “너의 나라에서 여러 번 종계 변무의 일을 주청하였는데, 이제 《목은집》을 보니 너의 나라 시조는 이름과 자(자)가 서로 같은 글자이니 이것은 무슨 의사인가.” 하여 대답하기를,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응룡이 《목은집》을 던지면서, “이것은 허태사가 가지고 온 너의 나라의 보책(보책)이다. 너의 국조의 이름도 춘(춘)이고 자도 춘이니, 이것은 필시 이인임(리인임)이란 인(인) 자가 잘못된 것이리라.” 하므로 답하기를, “옛 사람도 이름으로 호(호)를 쓴 자가 있는데 어찌 이것으로 의심하십니까.그렇지만 소인이 연소하여 옛 문서에 통달하지 못하오니 마땅히 배신에게 물어서 아뢰겠습니다.” 하니, 응룡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다시 꿇어 앉아서,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니, 생각건대, 배신이 소인이 말을 잘못 들었는가 의심할 터이니, 청컨대 직접 써주시는 글을 얻어서 보고할까 합니다.” 하였다. 응룡이 벽을 쳐다보고 한참 있다가, “과연 그러하겠다.” 하면서 곧 작은 시지(시지)를 꺼내어 쓰기를 “이름에다 다시 자(자)를 짓는 것은 이름을 공경하자는 것인데 자와 이름이 같으면 무엇으로 공경함을 표시하겠는가. 또 인(인)과 춘(춘)이 뜻이 서로 같으니 이인임이 아닌가.”라고 쓰고, 붉은 색으로 구두점을 찍어서 주는 것이었다.돌아와서 사신 임열(임설)ㆍ황서(황서), 서장관 김규(금규)에게 고하니 모두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탄식하기를, “이 정승의 선견지명이 이와 같구나.” 하였다. 곧 임기를 시켜 옛날의 자(자)와 이름이 같은 자 두 사람을 상고하여 적어서 바치니, 응룡이 또 쓰기를, “옛 사람은 우연히 이렇게 된 것이니 이것은 족히 영구불변의 법이 되지는 못한다.” 하므로 드디어 준경이 지어 보낸 정문을 가지고 고하였다. 응룡이 답하기를, “이인임은 참으로 지금 국왕의 조상이 아니로다. 다만 공민왕(공민왕)의 죽음이 제 명대로 잘 살다가 죽은 것인가. 아니면 이인임에게 의심이 없을 수 있는가.왕씨의 네 임금을 죽인 것은 과연 누가 한 짓이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공민왕은 아들이 없어서 남모르게 신돈(신돈)의 아들인 신우(신우)를 길러 자기의 아들로 삼았던 것인데, 임금은 도리어 홍륜(홍륜)ㆍ최만생(최만생)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우가 임금이 되었던 것입니다. 장차 요동을 침범하려고 하므로 선국왕(선국왕)께서 대의를 주장하여 군사를 돌린 것입니다. 가짜 임금인 신우가 왕위를 내어 놓고 그 아들 신창(신창)에게 넘겼는데, 공민왕의 왕비였던 안씨가 중국 조정에 아뢰어서 가짜 임금인 신창을 내쫓고 정창군(정창군) 왕요(왕요)를 세웠으니 그가 공양왕(공양왕)이 되었고, 신우와 신창 부자는 모두 공양왕에게 죽음을 당하였던 것입니다.뒤에 공양왕이 또 임금답지 못하여 죽이는 것이 한이 없으니,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여 서로 선국왕(태조(태조))을 추대하므로 고황제(고황제 명 태조(명태조))의 명을 받들어 국왕이 되었고, 왕요(왕요)는 편하게 사저(사저)에서 봉양하여 그 수명대로 마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응룡이 또 묻기를, “홍륜ㆍ최만생은 어떤 사람인가.” 하므로, “홍륜은 총애하던 신하이고 최만생은 곧 가까이 부리던 내시였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이인임의 직위가 너의 태조와 어떠하였나.” 하여, “같았습니다.” 하니, “그렇다면 이인임도 임금이 되었던가.” 하므로, “중국 조정의 명이 없었는데 어찌 감히 되었겠습니까.” 하였다.“그러면 역시 관직에는 그대로 있었던가.” 하므로, “관직을 그만 두고 경산부(경산부)에 살다가 죽었습니다.” 하니, 응룡이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가 여러 번 변명하여 아뢰었는데 이제서야 명백하게 알았다.”고 하였다. 며칠 뒤에 의판사(의판사)가 또 수석 통역을 불러서 매우 급하게 홍무(홍무)와 국왕의 연대 순서를 물으므로, 연소하여 능히 다 기억하지 못하니 마땅히 배신에게 물어서 아뢰겠다고 대답하고, 이튿날 준경이 가르쳐 준 역대의 차례를 써서 바쳤더니, 장인낭중(장인랑중)이 말하기를, “별도로 다른 뜻은 없었고 다만 창고에 비가 새어서 그대의 나라 보책이 썩었으므로 참고하여 볼 수 없었다.”고 하였다.이준경이 적어서 민호에게 주었던 열두 가지 조목이 준경의 말한 바와 중국에서 물은 것이 꼭 부합되어 한결같이 준경이 가르쳐 준 그대로 대답하였으니 일행이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동고유사》
○ 광해 을묘년에 허균(허균)이 명 나라 서울에서 돌아와서 소설 중조야사(중조야사)를 올렸다. 그 책에 종계에 대한 말이 있었는데 사실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많았으므로, 민형남(민형남)을 보내어 그 책을 가지고 가서 아뢰게 하려고 허균을 부사로 삼아 보냈더니, 예부에서 회답하는 제사에, “이 일은 자질구레한 것 같으니 근거 없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 하였다. 《고사촬요》

유성룡의 관작을 삭탈하다 무술년
 

처음 임진난 뒤에 유성룡이 7년 동안 국정을 잡아서 남인(남인)이 대성(대성)에 벌여 있었다. 이경전(리경전)을 경박하다고 하여 예조 좌랑의 직위에 허락하지 않더니, 이에 북인(북인)들이 드디어 기회를 타서 성룡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회산잡기(회산잡기)》 남북론분(남북론분)에 자세하다.
○ 무술년의 종계 변무할 때에 성룡은 어머니가 늙어서 가지 못한다는 말을 하였더니, 임금은 속으로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지평 이이첨(리이첨)이 성룡을 탄핵하고자 하였으나, 대사헌 이헌국(리헌국), 집의 이상신(리상신), 정언 정홍익(정홍익) 등이 따르지 않고, 각각 피혐(피혐)하였는데, 임금이 이첨을 옳게 여기고 헌국 등을 체임(체임)하였다. 《하담록》 남북론분 조에 자세하다.
○ 무술년 12월에 그때 논의가 점점 더 분열되었다. 남이공(남이공) 등이 소를 올려서 풍원부원군(풍원부원군) 유성룡을 논박하기를, “본래 교묘하고 영리하고 아첨하는 자질로 문필의 작은 재주로 꾸며서, 오랫동안 국정을 전담하고 조정의 권세를 마음대로 희롱하여 국사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한 죄를 다 기록할 수 없다.계사ㆍ갑오년에 적의 형세가 막 후퇴하였고 호남과 호서는 그래도 온전하였으니, 만약 그때 중국에 호소하여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으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다시 회복하는 방책을 거의 바라볼 수 있었을텐데, 먼저 화친하자는 말을 주창하여 드디어 강화하는 계획을 이루어 인심이 해이해지고 국세가 떨치지 못하게 하여 오늘의 피폐함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하고, 파면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남이공 등이 두 번째 소를 올렸는데 대략에, “명자(명자)를 도적질하고 작위를 훔쳐서 사람을 해쳐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세상을 속여도 세상이 깨닫지 못합니다. 우성전(우성전)ㆍ이성중(리성중)이 성룡의 심복으로서 간악한 정철(정철)에게 아첨하여 붙어서 조신(조신)에게 해를 끼친 것은 성룡이 남모르게 사주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공론이 이미 일어남에 이르러서는 성룡이 두 사람이 탄핵 받은 것을 분하게 여겨, 드디어 사류(사류)들과 갈라져서 뜻에 거슬리는 자는 배척하기를 원수같이 하고, 자기에게 아첨하는 자는 등용시키기를 뒤질세라 두려워하여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게 하고, 남인ㆍ북인이란 말을 또 세상에 만들어 내었으니, 이것은 실상 성룡이 폐해를 만든 바입니다. 왜적과 한 하늘 아래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들도 모두 아는 바인데, 자신이 대신으로 있으면서 맨 먼저 화의를 주창하여 중국 조정의 구실이 되게 하여 왜를 봉하는 칙서에, ‘조선이 봉왕(봉왕)할 것을 청한다.’는 말이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듣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성룡은 조정의 의논이 들어주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깊이 그 일을 숨기고 있었는데, 황신(황신)이 말한 뒤에야 대관(대관)들이 비로소 듣고 논란하게 되었으니, 그가 조정을 멸시하고 거리낌 없음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지난해에는 왜적이 경성에 가까이 오는데도 여전히 화친하기를 빌자는 의견을 고집하며 비변사에서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에 유영경이 분하게 여겨 일어나서, ‘이미 전일에 일을 그르치고, 또 재차 오늘도 그르치려고 하시오.’ 하니, 성룡이 문득 성을 내며, ‘영공(령공)의 묘비 위에는 마땅히 화의를 주장하지 않았다고 쓰겠소.’ 하였으니, 그의 오만방자한 형상을 누가 통탄하고 분하게 여기지 않았겠습니까.또 소응궁(소응궁 명 나라 사람)의 말을 빙자하여 사특한 의논을 하며 떠들므로 김응남(금응남)이 홀로 차자를 올려서 그 불가함을 아뢰었더니, 성룡이 도리어 아뢰기를, ‘신과 응남의 의견이 별로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으니, 그의 거짓을 숨기고 임금을 속임이 또한 너무도 심하옵니다. 이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의 기틀을 휘저어서 천하 대사를 그르치게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의 죄인입니다. 양경리(양경리 양호(양호))의 의사는 왜적을 토벌하는 데에 있었으므로 드러내놓고 성룡을 나무랐던 것인데, 성룡이 분한 마음을 품고 경리를 참소하였습니다.마침 그의 소원대로 되어 조정에서 양경리의 무고함을 변명하고자 하였더니, 그는 ‘이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 하고, 과도관(과도관)에게 글을 올릴 때에 자기의 이름을 먼저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국정을 담당한 6, 7년 동안에 그가 경영하고 배치한 것은 모두 유명무실한 것이며, 고집스럽고 강팍하여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하여 정사에 해롭게 하였습니다. 그가 훈련도감과 체찰군문(체찰군문)에서 속오(속오)ㆍ작미(작미)법을 만들고 선봉(선봉)ㆍ차관(차관)의 설 같은 것들을 그것으로 인하여 폐단을 만들어내고, 또 이것을 빙자하여 이익을 탐내었으므로 마침내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하고, 촌락이 퇴락하게 하여 원망은 임금에게 돌리고 이익은 자신이 독차지하였습니다.권세를 마음대로 부려서 은혜를 베풀기도 하고 갚기도 하며, 내외에 벌여 있는 심복ㆍ졸개를 중에 참하(참하)의 벼슬에 있는 자들을 승진시켜 주려고 할 때에는, 그들의 재주가 수령을 감당할 만하다고 칭찬을 하였는데 태반이 그의 시골의 친척이었습니다. 서예(서례)의 천한 신분을 발탁하여 줄 때에는 그들로 하여금 둔전(둔전)을 파수하는 관원으로 설치하였는데, 거의 모두가 치질이나 빨아주는 무리였습니다. 뇌물이 남몰래 통하고 광주(광주)에 있는 사유 토지를 백성의 부역으로 갈고 김매며, 단양(단양)의 새 농원에 도망치는 자를 불러 모았고, 안동의 옛 집에는 기름진 땅을 많이 차지하고서도 요역(요역)을 바치지 않으므로 부사 정사호(정사호)가 그 집에도 부역을 시키려고 하였더니, 남몰래 친한 자를 시켜 그를 쫓아내게 하였습니다. 이에 남쪽의 유식한 사람들이 침뱉고 꾸짖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이것이 성룡의 죄상의 대강이온데, 얼마 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기피하였다는 한 가지 일로 약간의 견책을 받고 정승 자리가 갈렸을 뿐이니, 그것으로 어찌 그 죄를 징계하고 백성들게 사죄한 것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풍원(풍원)이 어찌 그렇게 하였으랴. 전하여 들리는 말이 반드시 모두 사실이 아닐 것이니 이미 체직된 대신을 소급해서 논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 세 번째 아뢰기를, “성룡이 10년 동안 벼슬시키는 권한을 천단하여 친족이 안팎에 벌여 있고, 4도 체찰사의 임무를 맡아서 농장이 원근에 가득하옵니다. 배설(배설)의 패악(패악)함은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는 바인데 한 번 그의 집에 뇌물을 바치자, 문득 배설이 대장의 재질을 지녔다 하였으며, 신충원(신충원)의 범람함은 세상이 모두 미워하는 바인데, 한 번 그에게 아첨하자 천거하여 둔전의 파수를 삼았으니, 그가 고집스러워 제 마음대로 하여 국사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한 것은, 송 나라의 왕안석(왕안석)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며, 재물을 탐하는 더러운 형상은 실로 심하여 안석에 대해서 죄인이라 할 것입니다.죄악이 이미 가득차서 덮고자 하면 더욱 드러나서 귀 있는 이는 다 들고 입으로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전하께서 이제야 비로소 들으시는 것은 다만 성룡이 권세를 잡은 지가 오래되어 그의 무리들이 번성하여 오로지 전하의 총명을 막고 덮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논박한 바가 어찌 적중하다 하리요. 이미 체직된 대신이니 다시 소급해서 논란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 일찍이 성룡이 종계 변무하는 일을 당하여 곧 중국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자청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이첨이 맨 먼저 탄핵하였고, 이 때문에 공격하는 의논이 시끄럽게 일어나자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사특함과 바른 것을 밝게 분별하기를 청하였고, 예조 참판 김우옹(금우옹)이 또한 차자를 올려서 유성룡은 간사한 사람이 아니며, 또한 간사한 무리가 아니라고 변명하였다. 그러자 대사헌 이개(리기), 대사간 정광찬(정광찬) 등이 옥당과 김우옹의 그릇됨을 논란하고 배척하여 모두 파직시키기를 청하였다.
○ 정인홍(정인홍)이 성룡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그의 당인 정언 문홍도(문홍도)를 사주하여 그의 화친을 주장한 잘못을 극구 나무라고 배척하여 그를 당 나라 노기(로기)와 송 나라 진회에게 비유하고 유성룡의 관작을 삭탈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그대로 윤허한다.” 하였다.
○ 문홍도가 유성룡을 탄핵하는 말이 매우 험하고 각박하였으므로, 사간 김신국(금신국)이 너무 심한 곳은 삭제하고자 하였더니, 홍도가 피혐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신국을 체직시키도록 명하였다. 《염헌집》
○ 일찍이 이경중(리경중)이 전랑이 되어서 정여립(정여립)을 배척하여 중하고 영예스러운 벼슬에 의망하지 않았더니, 장령 정인홍이 어진 사람을 가리웠다는 것으로 탄핵하여 경중이 마침내 파직되었다. 기축년 옥사가 일어나자 여렵과 서신을 통한 자는 모두 죄를 입었다. 성룡이 일찍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백유왕(백유양)이 서신으로 여립을 천거하므로 성룡이 답서를 보냈는데, 이때에 스스로 불안하여 상소하기를, “당시에 여립이 온 세상의 중한 명망을 지녔으니 누가 속지 않았습니까마는, 알고서 미워한 자는 오직 이경중 한사람뿐이었는데, 사람들이 경중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탄핵을 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이에 임금이 경중에게 작위를 증직하고 탄핵하고 논란한 자에게 죄줄 것을 명하니, 인홍이 죄를 입고 파직되어 드디어는 성룡을 뼈에 사무치게 원망하였다. 그가 권세를 잡은 후로는 유성룡의 당을 배척하고 억제하여 어질고 어질지 않은 것을 따지지 않고 오직 배척함이 혹 가벼울까 두려워할 뿐이어서 그 화가 전전(전전)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부계기문》
○ 기해년 봄에 좌의정 이원익이 중국에서 돌아와서 곧 차자를 올려, “유성룡은 청렴하고 지조가 있어 자신을 지키고 혈성으로 나라를 걱정하였는데, 이제 전하께서 홍여순(홍여순)등의 참소를 좇아 어진 이를 끝까지 쓰지 못하고, 일시의 착한 무리를 유성룡의 당이라고 하여 멀리하고 배척하시니, 신은 사림의 화가 이를 쫓아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고 임금의 위엄이 서지 못하여, 정영국(정영국)과 채겸길(채겸길)등이 감히 간사한 언론으로 사람의 귀를 현혹시키므로, 시비가 밝지 못하여 행동거지에 잘못된 점이 많고 사특함과 바름이 분명하지 못하여 조정이 편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홍여순은 임국로(임국로)의 무리이니, 만약 이런 사람을 임용하면 반드시 국가의 화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경연에서 극구 당시의 국사를 논하면서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는 물리치기를 청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오늘날 정승을 선택하는데 유성룡 이외에는 가히 맡길 만한 자가 없습니다.” 하고, 자신은 물러나기를 구하여 마지 아니하니 임금이, “경은 종척(종척) 대신으로 나를 버리고 장차 초 나라에 갈 것인가, 진 나라에 갈 것인가” 하였다. 《하담록》에는, ‘경자년 봄’이라고 되었다. 남북론분 조에 자세하다. ○《조야첨재》
○ 이 해 여름에 우의정 이항복이 병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탄핵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의정부 아전이 옥당의 차사(차사)를 전하므로, 신이 남에게 부축을 받아 억지로 일어나서 한 번 보았는데, 거기에, ‘화친하기를 주장하는 사람과 같은 천지 사이에 살며 염치 없이 이욕을 좋아하는 무리가 따라서 부동하여, 청론(청론)이 용납되지 못하고 윤기(륜기)가 땅에 떨어졌으므로, 날로 공론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으나 이목의 관원[이목지관 간관(간관)] 중에 앞뒤나 재서 감히 한 마디도 내는 이가 없어 공론이 거의 없어지고 세도(세도)가 그릇되게 되었다.’ 하고, 그 끝에 ‘화친을 배척하는 의리를 더욱 굳게 하여 간사한 말에 흔들리는 바가 되지 않게 하라.’ 하였는데, 신은 다 읽지 못하고 놀라서 스스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인하여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몇 해 전에 남방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왜적의 형세가 보였으나 우리나라의 형세는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늙고 병들어 수족이 마비되고 숨은 목에 붙었으나 가슴과 배 아래는 이미 수습하지 못하게 되어 거의 다 죽게 된 사람의 형상과도 같았습니다. 항상 말하기를, ‘나라를 지키고 도적을 막는 길은 싸우거나 지키거나 화친하거나 하는 세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이제 이미 능히 싸우지도 못하고 또 능히 지키지도 못하였으니, 이보다 더 낮은 계책을 논한다면 오직 저들이 화친하기를 구하는 것을 허락하여 눈썹에 떨어진 불똥을 끄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이원익이 체찰사로 병으로 경주에 있으면서 신을 맞이하여 일을 의논할 때에 신은 앞에 말한 소견으로 자세하게 모두 진술하였습니다. 며칠 있다가 원익이 초한 장계를 보았더니, 오로지 이 일을 논하였을 뿐이었습니다. 뒤에 또 일찍이 일이 있어 조정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마침 화친과 싸움 두 방책을 가지고 공동회의를 명하였던 때였으므로, 신이 창졸간에 한 때의 소견으로 전하 앞에서 대강을 진술하였던 것이고, 또 신이 전후에 논한 바도 대개 이와 같은 것입니다.이제 크게 화의를 배척하는 논의를 내걸고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려고 하여 차례대로 화의를 말한 사람을 제거하려 하니, 마땅히 신도 제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물쭈물 구차스럽게 용납되어 입을 닦고 자취를 감추어서 요행히 면할 것을 바라는 것은 신에게 더욱 큰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 ……” 하였다. 《백사집》
○ 기해년 6월에 유성룡의 직첩을 돌려줄 것을 명하자, 삼사가 간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을 논하는데 실정에 지나치면 그 사람이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곁에서 논하는 자들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주화(주화 화친을 주장하는 것)’ 두 글자로 구실을 삼아서 성룡을 진회에 비유하기를 이르렀으니, 성룡이 또한 남몰래 진회처럼 금 나라와 통하고 음모한 일이 있느냐. 아아! 슬프다. 그 당시에는 누가 화친하자는 말에 마음이 쏠리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는 다투어 발을 빼려 하여, ‘나는 그런 일이 없었다.’ 하는데 이들은 모두 우의정 이항복에 대해서 죄인이다.또 대중의 의논을 배격하고 밤중에 일본으로 가는 사절을 보냈다는 말은 더욱 말할 것도 못 된다. 그때 널리 조정의 의논을 수합(수합)하였으니 승정원에 가면 상고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신하들이 ‘우리는 왜적과 이미 원수가 되었으니 화친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성혼(성혼)만이 자기 소견을 고집하여 화친에 대한 논의를 주창하였으니 진실로 죄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의 정세가 화친을 허락하는 의논은 그 권한이 중국 조정에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능히 할 바가 아니었다. 가령 죄를 논한다면 성룡이 첫째이고 정암(정암)이 다음이고 성혼이 또 그 다음이 될 것이다. 《일월록》 《혼정록》
○ 임금이 성룡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변명해 주고 유독 성혼에게만 죄를 돌려서 여러 번 엄한 말씀을 내리니, 사람들은 모두 “화의가 성혼의 죄가 아니라 임금의 노여움이 실로 참소와 이간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전후에 성혼을 공격하는 무리가 서로 잇달아 나와 세세한 잘못까지 들추어내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일찍이 이것에(성혼이 화친을 주장한 일) 대해 언급한 자는 없었다. 《혼정록》
○ 그때 경자년 여름 임금이 정승 이헌국(리헌국)의 말로 인하여 유성룡과 대립된 이산해ㆍ홍여순ㆍ이이첨ㆍ이경전(리경전) 등도 함께 물리쳐 관작을 삭탈하였다. 《하담록》

김ㆍ남의 당을 폄삭(폄삭)하다 기해년 가을
 

이조 판서 이개가 홍여순을 대사헌으로 삼으려고 하니 정랑 남이공이 붓을 잡고 쓰지 않았다. 《회산잡기(회산잡기)》 남북론분 조에 자세하다.
○ 기해년 김신국(금신국)이 보덕(보덕)에 임명되었다. 신국이 일찍이 말하기를, “홍여순은 탐심이 많고 난폭하여 행실이 무례하며, 거칠고 억세어 화를 일으키기를 즐기니 도어사(도어사 대사헌)가 될 수 없다.” 하였는데, 이때는 홍의 당이 매우 성한 때여서 홍이 의논을 합하여 신국과 모든 명사들을 죄에 얽으려고 하여, 탄핵하는 말을 초해서 대사간 유희서(류희서)에게 주면서 발론하게 하니, 희서는 마지못해 좇으면서도 오히려 신국의 이름을 빼어 버렸으나 그 뒤에도 홍의 당은 신국을 배척하기를 그치지 않아서 마침내는 파면되었다.얼마 되지 않아 서용되어 사복정이 되었고, 순무어사(순무어사)로서 관서에 갔는데, 미워하는 자들이 다시 크게 일어나므로 신국은 감히 복명하지 못하고 궐문 밖에서 대죄하였는데, 이는 대개 신국이 남이공와 더불어 본래 금석 같은 사귐이 있었고, 아울러 한때 명망이 두터워서 당시 사람들이 김ㆍ남 양인이라고 일컬을 뿐만 아니라, 항상 요직에 있으면서 착하고 착하지 않음을 핵실하고, 관직 주기를 아까와 해서 벼슬길에 진출하기를 다투는 자들에게 인심을 크게 잃었던 때문이었다.이로부터 번갈아 서로 좋지 않은 말을 퍼뜨리어, “두 사람이 국가의 정사를 오로지 자의대로 한다.”고 무고하여 멀리 귀양보낼 것을 논의하였으나, 임금은 달이 넘도록 허락하지 않고 다만 벼슬을 빼앗고 내치는 것만을 허락하였다. 이에 같은 날에 벼슬이 떨어진 자가 일곱 명이었는데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었다.이산해는 문장으로써 영의정이 되었는데 신국의 이성 존고부(이성존고부)로 본래 후진을 불러들였으므로 신국이 젊어서 일찍이 수학하였는데, 얼마 뒤에 산해가 권세를 탐내고 당을 좋아하여 점점 명예를 잃었으므로 신국도 그의 문하를 떠나서 그 농락을 받지 않았다. 이에 산해의 아들인 경전(경전)이 겉으로는 신국과 사이가 좋은 척하면서 속으로는 시기하여 그에 대한 배척론을 만들어 내어 거꾸러뜨리기에 힘썼으므로 신국이 모함을 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염헌집 (념헌집)》
○ 임몽정(임몽정)ㆍ임취정(임취정) 등이 채겸길을 사주하여 소를 올려서 김ㆍ남의 국정을 전단(전천)한 죄를 논하고, 대사헌 민몽룡(민몽룡) 등도 잇달아서 소를 올리니, 김신국ㆍ남이공ㆍ박이서(박이서)ㆍ이필형(리필형)ㆍ송일(송일)ㆍ박경업(박경업) 등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하담록》
○ 그때 이이첨이 사림들의 논의에서 갈라 섰고 홍여순은 요직에 있어 세력이 한창 성하였으므로, 박이서가 동지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탄핵하였다가 그 때문에 물리침을 당하여 여주(려주)에서 8년 동안 칩거하였다. 《택당집(택당집》 박이서비(박이서비)
○ 그때 홍여순이 궁중의 반연(반연)으로 기세가 당당하여 탄핵과 논박을 함부로 하여 자못 사림을 위태롭게 할 징조가 있으므로 조정에서 걱정하였는데, 삼사에서 공론에 따라 글을 올려 탄핵하였더니 여러 달 만에 비로소 삭출(삭출)할 것을 허락하였다. 여순은 남몰래 불편하는 무리들을 사주하여 거짓으로 초야의 공론이라 칭탁하고 연일 소를 올리니, 임금은 마음속으로 이미 모두가 당파 싸움이라 생각하고 틈을 타서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으로 의심하였다.여순이 다시 서용되어 조정에 돌아오자 당이 더욱 성하여 도리어 전일에 여순을 탄핵하던 사람들을 공격하여 거의 모두 축출하였으니, 이에 집의 김신국, 사간 송일, 장령 최동립(최동립), 지평 박경업, 교리 박이서, 이조 정랑 이필형, 좌랑 남이공이 모두 삭출되고, 교리 유희분(류희분)만이 임금의 외척(외척 광해의 처남)이었으므로 면하였다. 장령 경섬(경섬), 교리 이덕형(리덕형), 수찬 이필영(리필영)은 임명된 지가 오래 되지 않아서 파직된 뒤에 다시 서용되었으나, 모두 외직에 보임되었으니 경섬은 영광(령광)으로, 덕형은 여산(려산)으로, 필영은 풍기(풍기)로 갔다. 몇 해 뒤에 의논이 조금 진정되어서 세 사람은 요직에 앉게 되었고 신국 등은 9년 뒤인 무신년에 비로서 서용되었었다. 《죽창한화(죽창한화)》

성혼의 관작을 삭탈하고 신축년 정인홍이 권력을 잡다 임인년
 

이보다 앞서 정인홍이 성혼의 죄를 얽고자 하였으나 계책을 얻지 못하였다. 일찍이 최영경의 행장(행상)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에, “영경이 옥에 함께 갇혔던 윤광계(윤광계)에게 말하기를, ‘내가 성혼과 절교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고 하였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이른바 광계란 자는 이발(리발)의 재종 형제로서 조헌(조헌)에게 수학하였으므로 이발과 논의가 맞지 않아 당시에 버림을 당한 바였고, 정여립의 옥사 때에 옥에 갇힌 일도 없었으니 인홍의 무고가 모두 이런 식이었다.정유년 4월에 그 문인인 현풍(현풍) 사람 전 정랑 박성(박성)을 시켜서 시폐(시폐)에 대한 열 여섯 조목의 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이이(리이)가 권세와 직위가 성하지 않았던 날에 이미 간사한 당에 뿌리를 박고서 속으로는 남을 해칠 꾀를 품고 겉으로는 양쪽을 조정하려는 의사를 보여서 그 지위와 세력이 족히 사류를 배척하고 모함할 만하게 되자, 비로소 감추었던 형체를 드러내어 공공연하게 사류를 배척하였으니, ‘귀신 같고 불여우 같다.’ 함은 이를 일컬음인가 합니다.성혼은 이이와 결탁하여 마침내 간당의 괴수가 되었으니 실로 분간하기 어려운 소인이다. 최영경이 처음에는 성혼의 심술을 알지 못하고 서로 벗이 되어 좋게 지내다가 뒤에 깨닫고 절교하였으므로 성혼이 유감을 가졌던 것입니다. 지난 기축년에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자 저 성혼의 무리가 벼슬에 나갈 준비를 하고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이 기회를 타서 사사로운 원한을 갚을 것이다.’ 하면서 영경이 옥사에 관련되었다고 무고하여 반드시 죽을 곳에 넣고야 말았는데, 그 일을 지휘하고 사주한 자는 성혼이고 죄를 얽어서 무함한 자는 정철 등이었습니다. 이에 신(신)이 분개하고 사람이 원망하여 하늘이 성내어 외적을 부른 것이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순(순)이 사흉(사흉)에게 죄준 뜻을 본받으시고 공자가 정사를 어지럽히는 대부를 죽인 일을 본받으시옵소서.” 하는 말이 있었으나, 한 사람도 찬성하는 자가 없어서 그 계책이 시행되지 못하였다.
○ 신축년 3월에 인홍이 그 문객인 문경호(문경호) 등을 사주하여 소를 올렸는데, “양천경(량천경)의 공초에, ‘정철이 천경을 불러서 꼬드기기를, 네가 만약 상소하여 최영경을 가리켜 길삼봉(길삼봉)이라고 하면 좋은 벼슬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며 또 당초에 사헌부에서도 정철이 영경을 죽인 일을 자세히 논하였으며, 전하의 말씀에도 ‘영경은 독한 정철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하시고, 또 ‘정철의 일을 논하면 입이 더러워진다.’ 하셨으나, 정철은 다만 주색이나 좋아하는 자이고 경박한 사람이니 족히 논할 것이 못됩니다.성혼은 죄가 중하니 당초에 영경이 출세를 구하지 않고 몸을 닦고 있을 때에, 성혼이 찾아가서 사귀고 용문(룡문)에나 오른 것처럼 기뻐하여, 일찍이 사람들에게 칭찬하기를, ‘오늘날 제일 일 뿐만 아니라 옛사람 중에서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영경은 성혼이 의겸(의겸)의 심복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의심하였습니다. 하루는 영경이 성혼을 방문하였더니, ‘성혼이 의겸과 손을 물리치고 함께 얘기하고 있다.’ 하므로 중도에 돌아와서 이로부터는 다시 왕래하지 않았습니다.성혼은 의겸이 조정에서 못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사류를 원수보듯이 하였고, 심지어는 노수신(로수신)이 모친상을 당하여 조정을 떠나자 저들끼리 편지로 축하하기까지 한 뒤에 영경이 드디어 성혼과 절교하였습니다. 이에 성혼은 이를 갈고 입술을 불룩거리며 한 번 영경에게 독을 풀려고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기축년 역변(역변)이 일어나자 정철과 함께 국가의 화를 다행으로 여기면서, 일신의 사감을 풀려고 드디어 팔을 걷어 부치고 입성하여 그 당을 지휘하여 마침내 모함하려던 계획을 실행하였습니다. 김종유(금종유)는 성혼의 문객인데, 영남에서 성혼을 찾아가 보았더니 성혼이 가만히 묻기를, ‘너는 최영경이 길삼봉인 줄을 아느냐.’ 하였다고 합니다.이에 종유가 깜짝 놀라서 ‘어찌 이런 말을 합니까. 오래 남중(남중)에 있어서 다만 그 사람이 뛰어난 선비로서 높은 명망을 지닌 것을 알 뿐, 그 이외의 것은 알지 못합니다.’ 하니, 성혼이 좋아하지 않고 묵묵히 있다가 종유에게 도리어 사과하였으니, 정철이 영경을 가리켜 삼봉이라고 한 것은 성혼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정철이 날마다 삼사를 거느리고 성혼의 집에 모여서 드디어는 성혼의 집이 옥사를 다스리는 하나의 아문이 되게 하였으니,그 행적을 가지고 논하면 성혼의 죄가 가볍고 정철의 죄가 무거우나, 그 실정을 추구하여 보면 정철의 죄는 작고 성혼의 죄는 큰데, 죄를 다스릴 때에 독한 정철에게는 야박하게 벼슬을 폄삭하는 벌을 시행하였으나 흉악한 성혼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관직을 보전하였고, 심지어는 그의 문생과 도당이 요직을 점거하여 맑은 조정을 욕되게 하였으니, 무엇으로 이미 백골이 된 원통한 영경의 혼령을 위로하며 오래도록 굽혀있는 선비의 기세를 펴게 할 것입니까. ……” 하였는데, 12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상소에 계자(계자)를 찍어서 내렸다. 《일월록》
○ 12월 22일에 대사헌 황신(황신)이 피혐(피혐)하면서 아뢰기를, “문경호의 상소에 성혼이 최영경을 죄에 얽어 죽였다고 하였는데, 그의 말뜻에 속임이 있고 과장되었으며 심히 욕하고 배척하는 것이므로 신은 마음 속으로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신은 약관(약관)때부터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였는데, 매양 영경의 가정에서의 행실을 칭찬하면서, ‘오직 글을 읽지 않아서 식견이 적고 고을에서 처신을 잘하지 못함이 단점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축년에 역변이 일어나자 떠도는 말이 드디어는 최영경을 가리켜 삼봉이라고 하여 중외에 전파되었습니다.신이 경인년 봄에 마침 정언(정언)이 되어서 성혼을 방문하였더니 성혼이 신에게, ‘너는 최영경의 사람됨을 아느냐.’하기에, 신이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고 대답하였더니, 성혼이 말하기를, ‘영경이 비록 병통이 많으나 가정에서는 효도하고 우애하며 또 기개와 절개가 있으니 그의 장점은 가히 숭상할 만한데, 근래에 떠도는 말은 지극히 무리하니 혹 말은 내는 자가 있더라도 절대로 부동하지 말라.’ 하였습니다.그 뒤에 대간 중에 과연 완의석(완의석 양사(량사)에서 어떤 일을 만장 일치로 결의하는 좌석)에서 발언하는 자가 있으므로, 신이 ‘밝은 시대에 유언비어를 가지고 사람에게 죄를 주는 것은 옳지 못한데, 하물며 영경은 한 도의 높은 명망을 지니고 있음에 있어서 이리요. 따라서 이제 애매한 말로써 죄를 주면 반드시 한 도의 인심을 잃을 것이다.’ 하였더니, 그때 유근(류근)이 사간으로 있었는데 말하기를, ‘정언의 말이 옳다. 제갈량(제갈량)이 먼저 허정(허정)을 등용하여 촉중(촉중)의 인심을 수습하였으니,이것을 가지고 보면 헛된 명망이라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이 논의가 드디어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신은 실상 영경의 사람됨이 어떤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독실하게 믿는 스승(성혼)의 지론으로 인하여 이에 이르도록 힘껏 변명하였던 것이오며, 이것은 유근이 아직 살아 있으니 지금 대질하여 물을 수도 있습니다.그 뒤에 신은 바로 외직에 나가게 되었고 성혼도 고향집에 물러갔는데, 그로부터 또 달을 지난 뒤에 영경의 옥사가 비로소 일어났고 대간이 영경을 다시 국문하자고 아뢴 것은 영경이 처음 석방되던 날이었는데, 성혼이 백 리 밖에 있으면서 어떻게 알고서 참여하였습니까. 문경호는 어떤 사람이길래 감히 방자하게 하늘과 태양 아래에서 무함하고 속이는 것입니까? 이것은 남의 사주를 받아 조정을 위태롭게 하려는 계획에 불과합니다. 신은 성혼의 문생으로 이미 시기와 배척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언관(언관)의 지위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집의 이성록(리성록), 장령 조익(조익), 지평 민유경(민유경)이 아뢰기를, “최삼봉이란 말은 그때 처음으로 역적들의 공초에서 나왔는데, 이것이 항간에 전파되어 드디어 뜬 소문이 되었으니 삼봉이 최영경의 별호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사대부(사대부)들도 모두 근사하지도 않는 무리한 말이라고 하였는데도, 끝내 잡혀서 국문을 받기에 이른 것은, 실로 양남(량남 영남 호남) 감사와 병사의 장계와 국문할 때에 영경이 대략 그 도적과 안면이 있고 서신을 통한 사실을 진술한 데 연유한 것입니다.잇달아 ‘아무 해 이후로는 절대로 서신을 통하지 않았다.’ 하자, 전하께서 두 장의 서찰을 내리시면서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서 성긴 듯하면서도 빠트림이 없으니 그가 진실로 도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시고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추방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전하의 지극히 어지신 덕이었는데도 그때 대간이 문득 재차 국문하자는 계책을 말하였으니, 이것은 식자(식자)들이 함께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이것이 어찌 당시의 일치된 공론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이에 오직 그가 잡혀와서 죽은 것이 원통한 까닭에 대사헌의 관직을 주시고 그 처자에게 곡식을 급여하기에 이르렀으니, 가히 조정에서 영경의 원통함을 풀어 주는데 지극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성혼 같은 이는 삼봉이라는 근거없는 말에 대하여 현저하게 변명하여 주는 말을 하고 또 그의 효성과 우애를 칭찬하였는데, 어찌 다만 한때의 형적이 조금 서로 다르다 하여 문득 성혼을 가리켜 영경을 얽어 죽였다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다른 이들까지 거기에 연루시켜 성혼의 문생 도당이라고 지목하여 일망타진(일망타진)하려는 근거로 삼으니, 아아 또한 참혹합니다.근년 이래로 풍습이 좋지 않아서 조정을 기울여뜨리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초야의 공론이라고 칭탁하고 그 계략을 행하는데, 오늘날 경호 등의 소를 올린 뜻이 어찌 다만 이미 죽어 썩은 뼈를 해치는 데에만 있었겠습니까? 대사헌 황신은 비록 성혼의 문생이라 하나 원래 피혐할 필요가 없습니다. ……” 하였다.
○ 비답하기를, “최영경의 이미 지난 일은 모름지기 시끄럽게 추론할 것이 없다. 다만 영경을 이미 국문한 뒤에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도 양사에서 논박하였던 것은 무슨 의사인가? 여기에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이며 또한 영경이 마침내 그 때문에 죽었다면 사람들이 원통하다고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성혼을 가리켜……’ 라고 하는 말은 내가 알 바 아니나 영남의 선비들 간에 그 전부터 이런 말이 있는 것은 시비(시비)와 허실(허실)을 불문하고 그 도의 인심은 반드시 이와 같이 생각하는데, 만약 그것이 남을 모함하기 위한 함정이라고 말한다면 영남 선비들의 족히 마음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성혼의 사람됨은 그 뒤에 심사와 형적이 드러났으니 족히 책망할 것도 못되는 위인이다. 유생(유생 문경호 등)의 상소가 비록 무고하고 기망하는 데에서 나왔다고 하나 공론이 따로 있을 것이니, 도외시하여 내버려 두는 것이 가한데, 황신은 그 스승에게 아부하여 유생의 상소를 남의 사주를 받았다고 말하여 사림이 말을 못하게 제재하니,가령 영남의 선비들이 이 말을 듣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사람마다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서 글을 올리고 전후를 돌아보지 않게 되는 경우에도 그것은 남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말할 것인가? 근래 이조에서 감히 독종(독종)들을 수령의 자리에 추천하여 그들의 행동이 방자스럽고 거리낌이 없는데도 감히 머리를 내밀고 말하는 이가 없으니 조정의 시비(시비)가 어디에 있느냐? 피혐한 황신을 나와서 일을 하게 하는 것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이성록 등이 피혐하여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오래되니 그 말이 뜬소문 성혼이 최영경을 죽였다는 말 이었다는 것이 알려지고, 문경호 등이 뜬소문으로 올린 소는 반드시 함정을 만들어 성혼 등을 일망타진 하려는 계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비록 한 도라고 하나 고령(고령) 이하 3, 고을의 몇 사람이 8월부터 통문을 돌려서 모였으나, 자기들 간에서도 논의가 같지 않았으므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져 처음에는 같았으나 뒤에는 달라져서 소두(소두)였던 이흘(리흘) 등이 서로 잇달아 회피하였으며, 문위(문위) 등은 끝까지 부동하지 않는다 하여 자기들이 말하는 ‘사림정거(사림정거)’라는 것을 당하였고 3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상소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들은 상소를 가지고 서울에 들어온 뒤에도 오히려 항간에 흩어져서 출입하며 듣고 보고 머뭇거리며 형세를 관망하기를 수십 일이 지나도록 하였으니, 그 사이의 거조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어찌 영경을 변명하는 데 뜻이 있었겠으며 또 어찌 이미 죽은 성혼에게 있는 것이었겠습니까? 한 도의 일치된 공론에서 나오지 않았음이 명백한데도, 초야의 공론이라 칭탁하고 기회를 타서 사람을 모함한 형상이 실로 가히 숨기고 가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 24일에 헌납 이진빈(리진빈), 정언 이경운(리경운)ㆍ김지남(금지남)이 아뢰기를, “전후에 영경의 일로써 논란한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는데 성혼을 지목하여 말한 자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 문경호 등이 근거없는 말을 지어 내어 처음으로 성혼에게 죄를 돌리려고 하였고, 또 그 문생에게 영향이 미치게 하여 사람을 무함하는 계략을 꾸몄으므로 사헌부에서 ‘함정’이란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집의 이하가 나와서 직무를 수행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 전교에, “몇해 전에 영남 사람 박성(박성)이란 자가 소를 올려서 성혼이 은밀히 최영경을 죽인 죄상을 극단적으로 진술하였는데, 그 말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는 반드시 계교할 것이 못 되지만, 나는 남중에 이런 논의가 있었음을 아니 오늘날 영남 선비들의 소는 진실로 처음 하는 말이 아니다.사간원에서 아뢰는 말에는 전후에 성혼을 지목하여 말을 하는 자가 전혀 없었는데, 이번 문경호의 소에 비로소 죄를 돌린다 하여 이에 감히 하나의 시자(시자)를 붙이니, 이것은 사람을 속이고자 하는 것이라 그 바르지 못함이 심하다. 황신이 만든 사헌부의 아뢴 것은 진실로 족히 책망할 것도 못되나, 조정이란 데는 시비(시비)가 있는 곳인데 시비가 바르게 되지 못하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느냐?” 하였다.
○ 집의 이성록, 헌납 이진빈 등이 모두 피혐하니 사간 조희보(조희보), 장령 여우길(려우길)이 비록 휴가 중에 있었으나 동료간에 간통(간통)에 대하여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 하여 피혐하였다.
○ 25일에 부제학 신흠(신흠), 교리 최상중(최상중)ㆍ이현영(리현영), 수찬 홍준(홍준)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에 “경호 등의 상소 안의 논의는 대개 합천ㆍ고령 사이에서 시작된 것으로 박성은 실상 그 같은 파이고 다만 소를 올린 것만이 경호와 선후가 다를 뿐입니다. 이들 무리가 아닌 외에 또 성혼이 최영경은 죽였다는 것은 한 도의 공론이고, 사간원에서 이른바 ‘지금까지 성혼이 최영경을 죽였다고 논한 자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전후에 삼사에게 논의한 바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간원의 아룀에 과연 살피지 못한 실수가 있습니다.근래에 선비들의 풍습이 불미하여 근거없는 의논을 방자하게 행하며, 공론을 칭탁하여 조정을 동요시키며 없는 일을 날조하여 사류를 배척하고 무함하는 자가 전후에 한이 없었는데, 경호의 소도 그와 같은 것이었으니 사헌부에서 논박한 바가 진실로 지나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사간 이히는 체임하고 집의 이하는 출사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사간 조희보, 헌납 이진빈, 정언 이경운ㆍ김지남은 체직되고 집의 이성록, 장령 여우길ㆍ조익, 지평 민유경도 아울러 체직되었다. 이것은 외직에 보임된 듯하다. 아래에 나온다.
○ 28일 전교에, “근래 이조에서 실수한 것은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간흉의 자식을 끌어 들이고 임금의 말을 무시하고 서용되지 않은 사람을 벼슬에 추천하는데 수단이 매우 교활하여 돌아보고 기탄하는 바가 없으니 지극히 놀랍다. 이것은 반드시 낭청(랑청)이 제멋대로 한 바일 것이나 당상(당상)도 균등하게 책임이 있으니 아울러 추고하라.” 하였다.
○ 이조 판서 심희수(침희수), 참판 정사호(정사호), 참의 신경진(신경진)은 갈리고, 정랑 이홍주(리홍주), 좌랑 성진선(성진선)은 파직되었다.
○ 대사헌 기자헌(기자헌)이 아뢰었는데, 대략에 “사람들이 성혼이 최영경을 죽인 자라고 하는 것은, 성혼이 기축년 사이에 온 세상의 중한 명망이 있어서 그의 말이 반드시 시행되었는데도 한 번도 상소를 올려서 영경을 구원하지 않은 까닭으로 그의 마음을 의심하여 마침내 이런 말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춘추(춘추)》에서 주심(주심)하는 법입니다. 지난날 사헌부에서 아뢴 말에, ‘길삼봉이란 말이 건너고 건너서 최삼봉으로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이에 곧장 ‘최삼봉이란 말이 처음으로 역적의 공초에서 나왔다.’고 말하여 처음부터 길삼봉이란 말이 없고 다만 최삼봉이란 말만 있는 것처럼 하였으며, 영경의 죽음이 비록 원통한 것 같으나 또한 당연히 죽어야 할 것처럼 의심하도록 하는 뜻이 있습니다.또 ‘마침내 잡혀 와서 국문을 받은 것은 실로 양남의 감사와 병사의 장계에 연유하였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실상 그 때에 말을 지어서 저들이 부르고 저들이 화답하여 그 말을 나라 안에 전파하게 하여 보통의 이야기처럼 만들어서 비로소 옥사를 일으킨 자(정철)의 죄입니다.’ 이것이 어찌 그때 뜬 소문에 등용하여 장계를 올려 조정의 처지를 맡은 자(감사 병사)의 죄이겠습니까. 또 ‘영경이 대략 역적과 더불어 서신을 통하였던 사실을 진술하였다.’ 하여, 영경이 역적과 서로 알고 지내 스스로 그 죄가 있는 것 같이 하였습니다.신은 영경이 막 옥에서 죽을 때에 그것을 다행으로 여겨 의기 양양하던 자(서인)들은 과연 역적과 더불어 모두 평일에 한두 번 서신을 통한 일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증직하고 처자에게 곡식을 주었으니 조정에서 영경을 신원하는 데는 가히 지극하다 이를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의 뜻은 비록 감히 현저하게 말은 못하였으나 영경에게 증직하고 처자에게 곡식을 주는 것이 너무 지나친 일인양 말한 것입니다.그러나 능히 그때의 영경을 죽인 일을 다 덮지 못하고 이에 ‘그때 대간이 급히 재차 국문하자는 아룀이 있었으니, 이것은 식자들이 함께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보면 또한 가히 그때 용사(용사)하던 자의 죄상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그 당시에 전하께서 하늘의 그물이 넓고 넓으니 그가 진실로 도망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교를 내렸다.’ 하여 영경의 죄는 실상 전하의 전교에 연유한 것이고, 그때 용사하던 자의 소행이 아닌 것처럼 말하여 아울러 그때 용사하던 자의 죄를 벗기려 하고 선비(영경)를 죽인 일은 전하에게 책임을 돌리려 하였습니다.기축년 그때에 전하께서 비록 영경을 석방하라고 명한 일이 끝내 없었다 할지라도 이것은 진실로 당초에 말을 만들어서 국문하기를 청한 자의 죄일 뿐이니, 임금에게 돌리지는 못할 것인데도 굳이 재차 국문하기를 청하여 반드시 그가 죽게 만들고는, 마침내 감히 석방을 명할 때 내린 전교 중에 ‘하늘 그물……등’의 한 마디 말을 뽑아 내어서 그때 용사한 자의 아는 바가 아닌 것처럼 하려 하였으니 또한 심히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 기자헌이 황신대신으로 대사헌이 되어 드디어는 ‘사헌부가 선비를 죽인 명목을 임금에게 돌린다.’는 말을 만들어 임금의 노여움을 격동하게 하였다. 《조야기문》
○ 자헌은 본래 서인(서인)으로 칭하였는데, 그의 아내가 하원군(하원군) 정(정 선조의 형)의 딸이었으므로 궁내와 통하였다. 임금은 그가 재주와 기국이 있다고 하여 사석에서 국사를 자문하였는데 자헌은 심희수를 이조 판서로 삼을 것을 청하여 먼저 희수에게 통하여 자기를 돕도록 약속하였다. 희수는 이조를 맡자 한결같이 서인의 말을 따랐으므로 자헌이 신축년에 등용한 것은 대개 이에 연유한 것이다. 하루는 자헌이 밀지(밀지)를 받았다고 칭탁하면서 구성(구성)의 집에 도착하여 일을 의논하였는데,내용이 세자(광해(광해))를 동요시키는 것이므로 구성 등이 대답하지 않고 황신에게 알렸더니, 황신이 크게 기뻐하면서,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할 수 있는 일이리요? 만약 이 사람을 조정에 머물러 두면 우리들이 같은 당이라는 허물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때 황신이 이조에 있었던 까닭으로 황신은 평생 동안 이조에 들어간 일이 없었다. 후일 정사(정사)에서 자헌을 내쳤더니 자헌은 크게 성내어 도리어 죄를 얽고 무함하여 그 흉악하고 참혹함을 극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의 마음이 진실로 이미 움직였으므로 이에 이르러 자헌이 방자하게 아뢴 것이다. 《일월록》
○ 지평 윤의립(윤의립)이 아뢰기를, “최영경은 재야의 한 처사(처사)였는데 불행히도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옥사를 이루어 악한 죄를 씌워서 원통하게 옥에서 죽었으므로, 지금 영남의 유생들은 영경을 죄에 얽어 죽인 것은 성혼에게서 연유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혼은 정철과 교제가 가장 긴밀하였는데 그(영경)의 원통함을 밝게 알면서도 일찌기 한 마디로도 구원하지 않았으니 비록 영경이 성혼으로 연유하여 죽었다고 하여도 옳을 것입니다마는, 만약 성혼이 영경을 얽어 죽이기를 극구 주장하여 죄가 정철보다 심하다고 한다면 그 논의가 또한 지나친 것입니다.또 성혼의 문생과 도당에게까지 연루시키는 것은 어찌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성혼의 죄를 논하는데 영경을 얽어 죽인 것으로 지목하면 사람들이 불복할 것이지만 구원하지 않았음을 책망하면 성혼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대간들은 한갓 성혼을 위하여 변명할 줄만을 알아서 오히려 미처 하지 못할까 염려하니 매우 정직하게 일을 논하는 도리를 잃었습니다.” 하니, 장령 여우길, 사간 홍준은 피혐하고, 부제학 신흠은 이미 갈렸으며, 교리 최상중ㆍ이현영은 피혐하였다.
○ 헌납 김광엽(금광엽)이 양사를 처치(처치)할 것을 아뢴 말의 뜻이 더욱 험악하여 여우길ㆍ홍준이 갈렸다.
○ 임인년 정월에 양사에게 전일에 최영경을 재차 국문할 때의 대간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더니, 답하기를, “공론은 어린 양기[치양]가 처음 움직이고 끊어졌던 맥이 다시 이어지는 것과 같구나. 최영경이 정철을 진짜 소인이라고 배척하였으니, 정철은 어금니를 갈고 입술을 불룩거리며 옆에서 틈을 엿보기를 하루라도 마음에서 잊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또 정철은 역옥(역옥)이 일어나자 손뼉을 치고 뛰며, 처음에는 자기 당으로 하여금 고발하게 하고 뒤에는 자기 당으로 하여금 탄핵하게 하였으니, 영경이 죽었을 때에는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고 성대하게 잔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철의 방자스러운 소행이 이에까지 이른 것은 성혼이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성혼은 정철의 분신(분신)이니 정철이 비록 이미 죄를 받았지만 정철은 어찌 죄가 없겠는가? 그 괴수인 성혼은 제쳐두고 겨우 그 지엽만을 논하니 이것은 이른바 배를 삼키는 큰 물고기를 그물에서 빠트린 격이고, 부모의 삼년상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시마(시마)와 소공복(소공복)만을 살핀다는 격이다. 공론이 언제나 시행되게 될 것인가? 예로부터 간흉의 당이 되어 그 심복 노릇하던 자가 조금이라도 공론이 있게 되면 죄를 면한 일이 있었는가? 사람을 죽이는 흉특함은 사람들이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나는 성혼에게 영경을 죽인 율(률)로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른 것은 임금으로서 가히 결정하지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 2월 7일에 대사헌 홍이상(홍리상), 집의 이효원(리효원), 장령 윤의립, 지평 유희춘ㆍ김광엽 등이 피협하고 다시 앞서 아뢴 것을 연달아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만약 일을 주장한 죄를 논한다면 그때 모의(모의)가 한결같이 정철에게서 나왔고, 성혼의 영경을 구원하지 않은 죄에 이르러서는 가히 변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구원하지 않았다는 까닭으로 죄를 얽어 죽인 무리와 더불어 같은 죄목으로 죄를 의논한다면 그가 또한 불복할 것입니다. ……” 하였다.
○ 대사간 정관적(정광적), 사간 강첨(강첨), 헌납 최충원(최충원), 정언 이구징(리구징) 등이 차자를 올려, “그 행적을 논하면 정철이 죽인 것이지만 그 실정을 추구하여 보면 성혼이 실로 주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성혼이 없었다면 정철이 그의 간특함을 시행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정철은 성혼과 친밀히 사귀어 합하여 일체가 되어서 정철의 세력은 성혼을 의뢰하여 무겁게 여겨질 수 있었고 성혼의 심사는 정철에 의탁하여 실행되었던 것입니다. 일을 논의할 때에 참여하여 알지 못함이 없었는데, 하물며 영경을 죽이는 큰 일을 어찌 성혼이 몰랐겠습니까? 《춘추》의 마음을 주벌하는 법으로 시비를 핵실하여 정한다면 성혼이 주장이 되고 정철이 다음일 것이니 천년 뒤에라도 반드시 부월(부월)의 주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칼날을 잡고 사람을 죽이려 하는데 한 사람은 빤히 보면서 막지 않는다면 법관은 먼저 그 막지 않은 자를 다스릴 것입니까? 먼저 그 칼질한 자를 다스릴 것입니까? 이것이 신등이 성혼의 영경을 구원하지 않았던 심사만을 주벌하고 살인한 죄목은 더하고자 하지 않은 것입니다. 재차 국문하기를 논의하여 아뢰었던 대간은 어진 사람을 해친 흉악한 사람이니, 일이 이미 지났다고 하여 용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신등이 그들을 죄주기를 청하는 것은 진실로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성혼이 한때 뭇소인들의 소굴의 괴수가 되었었는데 온 세상이 그의 속임을 입었다. 그 정상을 몰랐으면 그뿐이지마는 이미 그 정상을 알고서도 언관(언관)의 책임을 맡은 자가 그 소굴을 바로 공격하여 분쇄하지 않아서 뭇 소인배들로 하여금 틈을 타서 출몰하게 하였다가 다른 날에 더욱 소인들을 많이 조정에 불러들이고, 정철의 자식을 끌어들여서 정철의 죄악을 두호하고 사론(사론)을 억제하여 공론을 막게 하였으니, 저 지하에서 하늘에 뻗힌 영경의 원통함은 비록 족히 생각할 것이 못 된다 하더라도 나랏일이 장차 날로 잘못된 것이니, 어찌 임금의 책임으로 다만 묵묵히 있고 말 것인가? ‘사람을 쏘려면 먼저 말을 쏘고, 도적을 잡으려면 먼저 괴수를 잡으라.’ 는 말은 아마도 옛날의 곧은 신하가 한 말인 듯하다. 그러므로 전일에 나의 소견을 말하자 경 등이 시끄럽게 사직하기에 이르렀던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하다. 이제 차자를 보고 진실로 가상하게 여기노라.” 하였다.
○ 양사에 답하기를, “그 당시의 개간을 조사해 내어서 조치하라.” 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최영경에게 죄주기를 청할 때에 양사와 본원에 상고할 만한 문적(문적)이 없어서 이조에 물었더니, 대사간 이해수(리해수), 사간 이정립(리정립), 헌납 이흡(리흡), 정언 구성ㆍ이상길(리상길), 대사헌 윤두수, 집의 송상현(송상현), 장령 장운익(장운익)ㆍ성식(성식), 지평 민선(민선)ㆍ이유징(리유징)이라 하는데,사간원에서는 재차 국문할 것을 의논하여 아뢰었고, 사헌부에서는 멀리 귀양보낼 것을 의논하여 아뢰었고, 사헌부에서는 멀리 귀양보낼 것을 의논하여 아뢰었다 하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내 비록 그때의 양사 관원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윤두수와 이해수가 장관이었고, 또한 사간원에서 재차 국문할 것을 청하였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여 아노라. 이해수는 곧 정철의 심복인데, 그 사람이 가장 독하고 간사하여 독사 같은 성질이어서 영경을 죽이자는 논의는 정녕 이 사람의 한 바였을 것이다.해수가 정철의 심복이었던 것을 누가 알지 못하랴. 이제 그가 간특한 당인가 아닌가를 논하지 않고 범연히 함께 참여한 자와 같은 죄를 줌은 불가하지 않겠는가? 사간원 다섯 사람이 어찌 다 정철에게 붙었었겠느냐?” 하였다.
○ 또 아뢰기를, “반드시 구별하지 말고 모두 사직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2월 12일에 전일 최영경을 다시 국문하기를 청한 간관인 이흡ㆍ구성ㆍ이상길 등의 벼슬을 삭탈하고, 이미 죽은 이해수ㆍ이정립의 관직도 추삭(추삭)하였다.
○ 지평 윤민일(윤민일)은 성혼의 문생으로서 피혐하여 벼슬이 갈렸다.
○ 초계(초계) 사람인 생원 이대약(리대약) 등이 소를 올려서 황신 등을 공격하고 배척하였는데, “황신 등은 간흉의 여당(여당)으로 요망스러운 혀를 눌려, ‘글을 읽지 않아 견식이 적다.’는 두어 마디 말로써 최영경을 흠잡으므로, 영경은 문을 닫고 몸을 닦아 위로 옛 현인을 따랐사오니, 책을 섭렵함은 다만 여사(여사)였습니다. 일찍이 성혼의 흉악한 심정을 알고 드디어 서로 절교하였으니 그의 견식은 진실로 이미 고명(고명)한 것이었습니다. 성혼과 정철의 남은 칼날을 다시 황신의 소매 속에 감추었을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정철은 곧 영경을 죽인 칼날이며, 성혼은 곧 영경을 죽인 오주(오주)였고, 황신은 오주를 극진히 옹호하고 은밀히 칼날을 숫돌에 갈았으니, 진정 법을 전해 받은 사문(사문)이라는 것입니다. 영경은 유림의 영수(령수)였는데 원통하게도 옥에서 죽었으므로 한때 사림의 기세를 수습할 수 없었습니다. 임진년의 변고가 이에 인연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조정에서는 옳고 그름이 조금 정하여지고 조정의 아래에는 공론이 조금 행해지게 되었으니 너희들은 그리 알아라.” 하였다.
○ 15일에 정인홍을 대사헌에 임명하고, 특별히 글을 내리기를, “높은 의기를 들은 지 오래이고, 10년 전에 대개 서로 한 번 보았으나 그 뒤에 경은 고향에 돌아갔었고 세월은 흘렀다. 임진년의 변고를 당하여 경이 칼을 잡고 왜적을 토벌하여 재야에서 국가를 위하여 죽음을 바친 것은 파천(파천)하는 중에도 일찍이 생각하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도 여전히 능히 나의 곁에 불러들이지 못하였으니, 현인을 버려둔 실수를 내 진실로 면하지 못하리로다.이에 경을 대사헌으로 삼아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키려고 하노라. 대저 학문을 쌓음은 장차 큰 일을 하려고 함이니, 홀로 자기 한 몸만을 선하게 하는 것이 어찌 군자의 하고자 하는 바이겠느냐? 마땅히 고향의 경치를 하직하고 농기구를 던지고서 한 번 일어날지어다. 지금은 봄날이어서 따뜻하여 오는 길이 매우 편할 것이니 역마를 타고 속히 올라오라.” 하였다.
○ 대사간 권희(권희), 사간 정곡(정곡), 헌납 최충원(최충원), 정언 이구징ㆍ권태일(권태일)이 아뢰길를, “참찬 성혼이 산림(산림) 학자로 한 세상을 속이고 문도들을 모아서 사제(사제)라고 일컬으면서 날로 경박한 무리들과 더불어 조정의 시비와 인물을 논의하였고, 나라의 외척을 사귀고 그 권세를 의탁하여 출세할 터전으로 삼을 뿐 한 가지 일도 건의하여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으며, 평생의 심사에 하나도 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역옥(역옥)이 처음 일어날 때에 영경의 무죄함을 알면서도 끝내 구원하지 않고, 팔을 걷어부치고 큰 소리 치며 간신 정철과 더불어 시기를 틈타고 꾀를 합쳐서 마침내 옥에서 죽이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성혼이 영경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성혼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죄를 얽어 죽인 형적은 비록 밝히기 어렵다고 하나 간악한 자의 당이 된 죄는 실로 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파천하던 날에는 대가(대가)가 그의 마을 앞을 지났으니, 그때에 마땅히 달려나와 맞아서 문후하기에 바빠야 할 터인데도 편안히 물러 앉아서 끝내 움직이지 않아 군신(군신)의 큰 의리가 남김없이 끊어지고 말았으니, 명하여 관작을 삭탈할 것을 청하나이다.” 하였다.
○ 집의 이효원(리효원), 장령 박진원(박진원)ㆍ강홍립(강홍립), 지평 송석경(송석경) 등이 아뢰기를, “경인년 사이에 정철이 서울과 지방에 글을 보내어 쌀과 베를 거두어서, 성혼의 부친 수침(수침)의 청송당(청송당) 옛 터에 집 하나를 지어 그의 도당을 거느리고, 날마다 모여서 그(성혼)의 지휘(지휘)를 듣고 마음대로 방자하게 행동하였습니다. 신묘년에 정철이 강계에 귀양갈 때에는 성혼이 파주(파주)에서 뒤쫓아 송도에 이르러 이틀 밤을 자고 작별하였습니다.임진년에는 변고를 듣고도 달려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가가 그의 사는 곳을 지나가는데도 나와서 뵙지 않았으며, 세자께서 이천(이천)에 머무르고 계실 때 성혼이 멀지 않은 곳에 피난하였다는 것을 듣고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고, 세자가 성천(성천)에 옮겨 간 뒤 가장 늦게서야 비로소 왔으나 곧 북도(북도 함경도)의 왜적이 장티[장치]를 넘는다는 소문을 듣고 세자께서 급히 용강(룡강)으로 옮기시는데, 성혼은 먼저 가기도 하고 혹은 뒤에 쳐지기도 해서 모시고 가지 않고 용강이 평양의 왜적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이유로 바로 의주로 갔습니다. ……” 하니, 답하기를, “조정의 시비는 바른 데로 돌아갔으니 관작까지 삭탈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재차 아뢰었더니, 답하기를, “성혼의 죄는 여러 말 할 것이 없다. 다만 간흉한 자들과 당을 맺었다는(당결간흉(당결간흉)) 네 글자로 반드시 죄를 다스려야 하겠으나 사람(최영경)을 죽인 간특함에 이르러서는 아울러 의논할 것이 아니니 영경을 얽어 죽인 것으로써 죄를 논하지 말자는 말은 옳다. 독한 정철이 영장을 얽어 죽인 뒤로는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자는 모두 정철과 더불어 압록강 동쪽에 사는 것마저 부끄러워했는데 성혼은 절교를 하지 않았다. 그가 절교를 하지 않은 것으로 그의 심사를 족히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지금 조정의 공론이 행해지게 되었으니 이미 준 관작은 소급하여 삭탈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 부제학 윤돈(윤돈), 응교 박이장(박이장)ㆍ강첨이 차자를 올렸는데, “성혼은 선비라는 명칭을 도적질하여 온 세상을 속이고, 왕실의 외척을 사귀어서 세 굴[삼굴 토끼가 굴을 세 개 만들어 놓고서 보신책을 꾀하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름을 산림에 의탁하고 마음은 좋은 벼슬에 얽매었으니, 축공(축공)의 오경(오경)이 땅에 떨어져 없어진 지 이미 오래였으므로 영경이 침뱉고 절교했으며, 이에 성혼도 함혐하여 원수를 맺었던 것입니다. 옛적에 가표(가표)가 낙양(락양)에 들어간 것은 그 화를 풀려고 한 것이었는데, 성혼이 입성(입성)한 것은 그 화를 즐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대가가 창황히 지척에서 그의 집 앞을 지나가는 날에 모르는 체하고 돌아보지 않다가, 놀라운 역변이 화급하여 착한 사람을 무찔러 죽일 때에는 어쩌면 그토록 만족스럽게 서울에 들어왔겠습니까? 난리 중에 임금을 버린 죄는 천지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간신과 한 당이 된 죄악은 국법이 용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 하였다.
○ 삼사에서 연일 성혼을 탄핵하기를 마지 않으니, 19일에 이르러 답하기를, “공론이 이와 같으니 아뢴 대로 하라. 다만 이미 나타난 바 간신의 당이 되고, 난리 중에 임금을 버린 죄로써 죄 주는 것이 가하다.” 하고, 이어 양사에서 전후에 성혼을 논박한 계사(계사)를 들이도록 명하고, ‘임금이 역적을 알처럼 품어 길렀으며 당류(당류)를 휘파람으로 불러 모았다.’는 등의 말은 삭제하였다.
○ 고(고) 의정부 우참찬 성혼의 관작을 추탈하였다.
○ 좌의정 이항복이 성혼을 구원하고자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성혼을 논한 자가 처음에는, ‘영경을 모함하여 죽였다.’ 하다가, 안되자, ‘영경이 성혼 때문에 죽었다.’ 하고, 또는, ‘역적을 보호하였다.’ 하나, 모두 사리에 가깝지 않습니다. 말이 빙빙 돌다가 지금에서야 지목할 죄명을 겨우 이루었으니 말이 모두 몇 번이나 변하였으며 몇 차례나 바뀌었습니까? 따라서 이것은 사람을 위하여 죄를 찾는 것이지 죄로 인하여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옵니다. ……” 하였다.이 차자를 올리기 전에 청주 사람인 생원 박이검(박이검)이 문경호(문경호)의 소에 잇달아 소를 올렸는데, “성혼의 문생이 아직도 관작을 보전하고 정철의 심복이 또한 정승자리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전하는 외롭게 위에 계셔서 뭇 까마귀의 자웅을 분변하지 못하시니 진궁(주궁)의 사슴과 말을 말하기에 어렵습니다. ……” 하였으므로 드디어 항복이 벼슬을 굳이 사직하여 갈렸다.
○ 김종유(금종유)의 아들인 선산(선산) 유생 김휘(금휘)가 그 아버지의 원통함을 소를 올려 호소하였는데, “신의 아비가 일찍 성혼의 문하에 있었는데, 만약 그때에 성혼이 이 말을 하였다면 반드시 먼저 온 집안에 말하였을 것이고 뒤에 타인에게도 언급하였을 것입니다. 신은 그때에 나이 이미 23세였고 아비가 스승과 벗 사이에 문답한 말을 참여하여 듣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 말만은 일찍이 대강이라도 듣지 못하였습니다.하물며 영경이 이미 죽은 뒤에도 신의 아비는 성혼의 문하에 왕래하기를 예전과 같이 하였으니, 어찌 경호 등의 말처럼 아비가 비록 중풍을 앓아 실성하였을지라도 한쪽으로 왕래하면서 한쪽으로는 말을 퍼뜨려서 아울러 절교를 당한 까닭까지를 타인에게 전파하였겠습니까? 경호 등은 신의 아비와는 처음부터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는데 지금 신의 아비를 끌고 들어가는 것은 그(신의 아비)가 이미 죽었으므로 다시 변명할 단서가 없고, 이미 죽은 사람을 증인으로 세워서 밝히기 어려운 죄를 이루려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대개 들으니 정인홍이 성혼과 이전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영경의 옥사를 성혼을 모함하는 하나의 좋은 기회로 삼고서 애매한 말을 만들고 그 문도를 사주하여 행장을 차려서 서울에 보냈다 합니다. ……” 하니, 답하기를, “나는 이 상소가 과연 그대의 손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정철은 사특하고 독하여 천고에 없는 간흉이었다.성혼이 정철의 심복인 것은 머리털이 채 마르지 않은 아이들도 아는 일인데, 말은 비록 자공(자공 공자의 제자로 가장 말 잘하는 사람)에게 빌리고, 글자를 양웅(양웅 기이한 글자를 많이 안 사람)에게 배우며, 소진(소진)ㆍ장의(장의)가 그 혀를 놀리고, 맹분(맹분)ㆍ하육(하육)이 그 용맹을 부린다 하여도 성혼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또 그대가 감히 정인홍을 배척하여 모함할 계획을 하나 인홍의 사람됨은 새와 짐승과 초목도 다 그의 이름을 아는 바인데, 그대가 또 정철의 당이 최영경을 얽어 죽이던 옛 수단을 본받는 것이 아니냐? 성혼이 비록 종남(종남)에서 출신하였으나 마침내 선비를 죽인 간특함이 있었으니 어떻게 은하수 물을 끌어다가 이 부끄럽고 치욕스러움을 씻을 수 있겠는가? 또 임금이 원수를 갚으려 하던 날에 임금 앞에서 팔을 걷고 큰 소리로 화친할 것을 청하므로 내가 곧 면대하여 책망하였더니, 물러가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벽 위에 시를 쓰기를, ‘저 따위여 저 따위여’ 하였으니, 슬프다 옛날의 징사(징사)는 한(한) 나라 사직을 한 가닥 실로 부지하였는데, 지금의 징사는 나라의 형세를 한 가닥의 터럭같이 깎으니 괴이하도다. 그대는 또 그대의 아비가 말을 하지 않았다 하나 그대가 어찌 반드시 아비가 동ㆍ서ㆍ남ㆍ북에 왕래할 때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따라 다녔겠느냐.” 하였다.
○ 윤 2월에 태학관 유생인 한효상(한효상) 등의 소에 성혼이 무함당한 것을 변명하였는데, 그 대략에, “밝으신 전하의 아래에 이렇듯 현인을 해치고 질투하는 무리가 있으며 또 사림을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이 있을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에 사림을 일망타진하려면 먼저 성혼에게 죄를 주지 않으면 안 되는 모양이며, 또 성혼에게 죄를 주고자 하면 반드시 정철을 가지고 말들을 하는데, 신등은 실로 정철의 죄가 어떻길래 이미 그 몸에 죄를 주고, 또 알고 지낸 이(성혼)에게까지 미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성혼은 정철과 생(생)을 같이 하였고, 같은 마을에 살아 교분이 있었습니다. 성혼은 항상 정철의 그릇됨은 꾸짖고 장점을 취하였으며, 정철도 성혼의 사람됨을 사모하고 그 덕의(덕의)에 복종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 정철을 탄핵한 것은 너무 심하였고 정철에게 죄준 것도 너무 중하였는데, 그 화가 날로 번지고 달로 심해져서 시간의 갈수록 더욱 새롭게 되어 유림의 종장(종장 성혼)도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되어 근자에 인심이 무너지고 선비의 풍습이 야박해져서 향방(향방)을 모르는 선비들이 의지할 곳이 없는데, 한 명의 큰 학자가 또한 죄의 그물에 빠졌습니다. ……” 하니, 답하기를,“너희 도당들이 비록 성혼을 구하려고 이런 소를 올렸으나 성혼이 간흉(정철)과 사귀고 결탁한 사실은 너희들도 덮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들의 말은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질 것이며 덮고자 하면 더욱 드러날 것이다. 성혼이 큰 학자라고까지 하는 것은 어쩌면 그리도 치욕스러운가? 임금 보기를 해진 신짝처럼 여기고 마침내 임금을 원수인 왜적에게 화친하기를 빌라고 인도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양주(양주)와ㆍ묵적(묵적)의 무리인 것이다. 능히 양주와 묵적을 배척할 것을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무리라고(맹자의 말이다.) 하였는데, 조정에서 그 죄를 성토한 것은 진정 영원히 시비를 정하려는 것이고 처음부터 깊이 캐고 숨은 것을 들추어내어 성혼에게 실정 외의 율(률)로 더 다스리려는 것은 아니었다. 유생의 도리는 다만 글을 읽고 수양하는 것이고 조정의 시비에는 마땅히 간예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 집의 이효원 등과 대사관 권희(권희)등이 한효상의 ‘현인을 해치고 사림을 일망타진하려 한다.’는 등의 말로 인하여 각자 인책하고 피혐하였다.
○ 지평 정홍익(정홍익)이 아뢰기를, “그윽히 생각하건대, 성혼이 정철과 교분이 두터웠고 또 대가가 서쪽으로 피난가실 때에 즉시 모시고 따르지 않았으니 공론에 배척받는 것은 진실로 마땅합니다. 다만 사람을 논하는 도리는 그 적당함을 취하는 것이 옳으니, 만약 성혼이 간특한 정철과 똑같이 삭직의 죄를 받는다면 실로 지은 죄에 비해서 과할까 합니다. 신의 소견이 이와 같사오니 동료를 처치하기는 결코 어렵습니다.” 하였다.
○ 옥당에서 양사의 피혐을 처치하였는데, 정홍익은 벼슬을 갈고 권희 등은 출사(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 사헌부 이효원 등이 아뢰기를, “파주 목사 이성록(리성록), 광주 목사 조익(조익), 전주 판관 민유경(민유경) 등이 지난날 사헌부에 있으면서 황신을 처치할 때에 말을 많이 늘어놓아 한갓 사사로운 당을 옹호하고 엄폐할 줄만 알고 공론을 덮기 어려운 줄은 알지 못하여, 성혼을 구원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아울러 간흉한 정철까지도 함께 구원하려고 하였으므로 이런 사특한 의논이 생기게 되었으니 모두 파직시킬 것을 명하시기를 청합니다.” 하여 아뢴 대로 되었다.
○ 이효원 등이 또 “이성록은 사사로운 당을 옹호하고 공론을 무시하였다.” 하며 이성록 등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청하고, 또 최상중ㆍ이현영ㆍ홍준 등은 간신에게 아부하여 공론을 무시하였다 하여 관직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모두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상중 등이 옥당으로서 성록을 처치하였던 까닭이다.
○ 수찬 오윤겸(오윤겸)이 성혼의 문생으로서 사직하여 갈리고, 5월에 외직으로 나가서 경성(경성) 판관이 되었다.
○ 대사헌 정인홍이 부름을 받아 들어와서 사은숙배한 뒤에 승정원 석상(석상)에서 맨먼저 최영경을 재차 국문한 대간을 탄핵하고, 국문하기를 청하려고까지 하였으나 동료간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서 그때의 대간들을 부처(부처)하기를 청하였고, 사간원에서는 그 대간들을 귀양보내어 내칠 것을 청하여 구성은 홍주(홍주)에, 이상길은 풍천(풍천)에, 이흡은 옥구(옥구)에 귀양갔다.
○ 당시 의논이 바야흐로 이항복을 공격하는데, 우의정 윤승훈(윤승훈)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박이검(박이검)이란 자는 이항복이 정철의 심복이라고까지 하였으나, 신이 듣건대 항복은 일찍이 정철과 더불어 왕래하지 않았다 합니다. 다만 항복은 본래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고 또 근거 없는 의논에 흔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지난 번 영의정이 결원되었을 때에 논의하는 자들은 유영경에게 촉망하는데, 항복이 추천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리며 반드시 그를 공격하여 쫓아버리려고 하였습니다.” 하니,이튿날 승지 박이장(박이장)이 아뢰기를, “정철이 귀양갈 때에 항복이 시로써 전별하였고, 정철도 화답하였으니 어찌 서로 친하지 않다고 이르겠습니까? 대신(윤승훈(윤승훈))의 말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였고, 특진관(특진관) 송언신(송언신)도 아뢰기를, “정철이 강계에 귀양가서 시를 지었는데,

생애는 설한(설한) 재 이름 밖에 있지만 / 생애설한외
심사는 필운(필운) 필운은 항복의 별호 과 같다 / 심사필운동

하였으니 매우 친하지 않고서야 어찌 심사가 서로 같다고 하였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러면 어제 우의정의 말은 그르다.” 하였다. 좌의정 김명원이 아뢰기를, “정철이 본시 이항복을 좋아하였으므로, 이런 시를 지은 것일 뿐 항복과 정철은 서로 나이가 매우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본래 정분도 없었습니다. 신은 젊어서부터 정철과 서로 어울려 지냈으니 정철과 사귄 것이 죄가 된다면 마땅히 신이 먼저 법의 처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승정원에 전교를 내려, “정철의 시 전편을 써서 들이라.” 하였다. 이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대신은 옳고 그른 말을 밝혀서 조정을 진정시키고 한결같이 사류를 도와 붙들어서 국가의 신뢰할 만한 태산이 되어야 할 것인데, 우의정 윤승훈은 지난날 어전(어전)에서 그가 좋아하는 이(이항복)에게 아부하여 심사가 같다는 사람(정철)과 처음부터 서로 알지 못하였다 하고, 인하여 맑은 논의를 억제하고 자기의 편당을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니, 그의 사정(사정)을 좇아 공론을 무시함이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다른 것은 무엇을 족히 취할 바가 있겠습니까? 벼슬을 갈도록 명하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언어(언어)가 우연히 같은 것으로 인하여 대신을 경솔하게 갈겠느냐? 또 그(이항복)의 심사가 정철과 같다 함은 어떤 일을 지적한 것이며, 맑은 의논을 억제하였다 함은 무슨 말을 지적한 것이며, 자기의 편당을 끌어 들였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지목한 것인가?” 하였다. 이에 사헌부에서 회답하여 아뢰기를, “정철의 시에, ‘심사는 필운과 같다.’ 하였으니, 그 심사의 같음을 가히 알 것이고, 근거 없는 말을 지어 내어서 영경의 몸이 비방 속에 쌓여 있었다고까지 하며 속으로 영경을 배척하여 일시의 청의(청의)가 장차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도록 하였고, 항복에게 의탁하고 아부하여 성혼과 정철의 남은 당이 등용될 터전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맑은 의논을 억제하고 자기의 편당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하였다.
○ 사간원에서는 정언 박건(박건)이 승훈을 논박하고자 하였으나, 대사간 권희, 사간 정곡, 헌납 최충원 등이, “승훈의 실수한 바는 다만 언어에 착오가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여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서 박건은 피혐하고 권희ㆍ정곡ㆍ충원은 모두 갈렸으니, 대개 승훈이 남인이었던 까닭에 권희 등이 힘써 구원하였던 것이다. 승훈은 다섯 차례나 사직서를 올려서 마침내 면직되었다.
○ 충주 사람인 이덕형(리덕형) 등이 상소하기를, “정인홍처럼 널리 알려져 초목도 그 이름을 아는 자와 더불어 도(도)를 의논하시어 홍여순 같은 간인을 배척하고 정의를 좇은 자 신묘년에 정철을 배척하는 데 공이 있었음을 말한 것. 는 특별히 석방하소서. ……” 하였다. 이 소를 이조에 내리니, 이조에서 회답하여 아뢰기를, “갑오년에 홍여순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영경을 신원해 줄 때에 공이 있었으니,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심이 어떠하옵니까?” 하였다.
○ 다른 대신은 병중이었으므로 수의하지 못하였고, 영의정 이덕형(리덕형)만이 의논하기를, “근년 이래로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데, 등용하고 물리침이 모두 한 사람의 소장(소장)으로 연유하니 이것은 실로 폐풍입니다. 이에 홍여순을 석방하는 은전은 후일을 기다릴 것을 청하옵니다.” 하였다.
○ 호남 사람인 전 참봉 최홍우(최홍우), 진사 김우성(금우성)ㆍ나덕윤(라덕윤) 등이 소를 올려 맨 먼저 “전하께서 위에 계시고 어진 정승이 아래에 있는데도, 천재와 시변(시변)이 말세와 같은 바가 있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인하여 정개청(정개청)ㆍ이발(리발)ㆍ이길(리길)ㆍ유몽정(류몽정)ㆍ조대중(조대중) 등을 신원(신원)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지평 채형(채형)이 아뢰기를, “대교 김류(금류)가 전일에 복수군(부수군) 중에 종사할 때에 아비의 원수를 갚는 데는 뜻이 없고, 주색만을 일삼았습니다. 그의 행동이 이와 같아서 청반(청반)에는 둘 수 없으니 파직시키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청야만집》 《임인일기》
○ 이 달 28일에 이귀(리귀)가 체찰사의 종사관으로서 영남에 갔다가 돌아와서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국가를 위하여 계책을 올린 것이 여섯 번이었고, 스승(리이)을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한 것이 세 번이었습니다. 비록 전하께서는 신의 말이 경망스럽다고 생각하실 것이나, 신의 마음에는 다른 뜻이 없사옵니다. 신은 벼슬에 승진된 것이 여섯 차례이며, 내직이나 외직에 있은 것은 세 번이었습니다. 갑오년 봄에는 어의(어의)를 보내시어 신의 병을 살펴주시며 약을 내리시어 치료하게 하시니, 신은 항상 제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국가의 급한 일을 당하여 순직하려고 하였습니다.신이 영남을 지나면서 민폐를 살펴 보았더니, 사인(사인)이라 일컫는 자들이 왕명을 맡은 수령을 협박하고 억제하기까지 하여 도(도)ㆍ유(류)ㆍ장(장)ㆍ살(살)의 권한이 모두 그들 손에서 나와 그 해(해)가 호남에서는 주ㆍ현(주현)에 미치고 영남에서는 국가에까지 미치고 있는데, 그 연유를 조사해보니 실은 정인홍이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신이 안음(안음) 아전의 문서를 보았더니, ‘합천 정참의(정참의)의 행차가 지나가는 까닭에 현감이 고을 경계에서 지대(지대)했다.’ 하였습니다.신은 비록 관질(관질)은 낮으나 공사로 간 것이었고, 인홍은 비록 관질은 높으나 사사로 간 것이었는데 수령이 공사로 가는 것은 돌보지 않고 모두 사사로 지나가는 인홍을 분주히 나가 기다리니, 인홍의 세도가 성함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글을 올려서 바로 지적하고자 하였는데, 체찰사 이덕형이, ‘이 사람은 선비라고 명칭하였으니 가볍게 처치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인홍이 이에 그 문도를 시켜 우도(우도)에 통문하여 신의 족질(족질)인 거창(거창)에 사는 이시익(리시익)을 향안(향안)에서 제명(제명)하였고, 신이 지나가며 유숙하던 집들도 불지르려고 하였으니, 이로써 그가 위력을 방자하게 부리는 실상을 대개 알 수 있습니다.왜적이 물러간 지 이미 3년이 지났는데도, 의병에 소속되었던 관노(관노)와 소나 말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그의 집에 두었으므로 성주(성주) 목사 유영순(류영순)이 인홍의 과실을 한번 말하였더니, 그 무리가 심히 욕하고 배척하여 귀머거리 체찰사ㆍ눈먼 종사관ㆍ어두운 순찰 등의 말을 지어냈고, 합천 군수 이숙(리숙)은 인홍이 살고 있는 한 면(면)이 관청영을 거역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서 반민(반민)이라고 나무랐더니, 인홍이 이숙과 감사 앞에 대좌하여 공공연하게 수죄(수죄)하였고, 유생이 과거 보는 것을 정지하는 것은 사관(사관)의 일인데도 도내의 선비가 인홍에게 밉게 보이면 문득 과거 보는 것을 정지시킨다고 하였습니다.전번에는 문위(문위)와 이경일(리경일) 등 10여 명이 문경호의 소(소)에 참여하지 않았더니, 모두 제명시킨다는 통문을 한 도에 돌렸습니다. 또 인홍은 왜적에게 포로되었던 부녀자를 협박하여 명 나라 도망병으로 풍수를 보는 자(시문용(시문용))에게 시집보냈고, 사족(사족)의 딸을 협박하여 미천한 사람으로 자기의 병을 치료해 준 자와 혼인하게 하였습니다.작고한 병사(병사) 김면(금면)은 인홍의 친한 벗으로 정이 형제 같았는데, 그(인홍)가 군사를 차지하고서 왜적을 토벌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였더니, 이로써 함혐(함혐)하고, 그 뒤 김면의 관이 그의 문 앞을 지나가는데도 끝까지 나와서 조문하지 않았고, 작고한 첨지 양희(량희)는 인홍의 장인이었는데, 양희가 명 나라에서 죽어 관이 서울 집에 이르렀는데도, 인홍은 그 처의 아우인 홍주(홍주)와 사이가 좋지 않다 하여 6일이 되도록 가서 곡하지 않았습니다.허잠(허잠)의 청렴함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인데, 허잠이 성주 목사로 있으면서 그(인홍)의 나쁜 행실을 말하였더니, 그의 문도와 ‘허잠이 쌀 백 섬을 훔쳤다.’는 말을 지어내었고, 성주 목사 이시발(리시발)이 한 가지 명령을 내려 하면 고을 안 유생들이, ‘반드시 인홍에게 여쭌 뒤에라야 된다.’고 하였다 합니다.한준겸(한준겸)은 그 도의 감사인데 처음에 인홍을 가서 보지 않았더니, 그 도당을 사주하여 죄를 얽어 논하게 하였고, 유성룡의 청렴함은 사람들이 함께 일컫는 바인데 말이 인홍에게 미쳤더니, 그 문객인 문홍도(문홍도)와 박이장(박이장) 등을 사주하여, ‘성룡이 뇌물을 공공연하게 받아들여 토지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는 등의 말을 지어서 탄핵하였고, 이덕형은 그 도의 체찰사인데 색리(색리) 김대허(금대허)에게 장형(장형)을 한번 가하였더니 인홍이 그 도당과 함부로 비웃고 꾸짖었습니다.인홍이 시골에 물러가 살 적에는 그 화가 그래도 적었는데, 지금은 높은 벼슬(대사헌)로 조정에 높이 앉아 있어 방자함이 열 배나 더할 것이니, 장차 국가의 위태롭고 어지러움을 가히 날을 꼽아 기다릴 만합니다. 신은 성혼의 문생으로 성혼의 원통함을 변명하는 데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성혼의 원통함은 공론이 국인에게 있으니 끝내 없앨 수 없는 것이므로 변명하는 책임은 신의 미칠 바가 아닙니다. 인홍의 방자한 실상은 신같이 어리석고 망녕되어 화복을 계산하지 않는 자가 아니면 끝내 한 사람도 말하는 이가 없을 것이므로 감히 이에 무서운 뱀을 밟고 호랑이를 건드려서 스스로 화를 피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 ……” 하였다.이에 인홍이 세 차례나 사직소를 올리고 차자를 올려서 자신을 변명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전날 우의정의 아룀은 진실로 남의 의심을 일으킬 만하였는데 이귀가 어찌 알지 못하였겠느냐? 경은 일찍이, ‘성혼이 최영경을 얽어 죽였다.’는 말을 하였으니, 이귀의 이 상소가 어찌 그것 때문에 올린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이귀의 사람됨을 경은 아는가? 일찍이 김덕령이 양쪽 겨드랑이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꼈다는 말을 지어낸 자이니 이런 말을 지어낼 수 있다면 무슨 말인들 지어내지 못하겠는가? 따라서 이번 일은 경으로 하여금 낭패하여 돌아가게 하려는 데 불과한 것 뿐일 것이고, 이 상소가 모두 이귀의 손에서 나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였다.
○ 인홍이 재차 차자로 다섯 가지의 벼슬할 수 없는 까닭으로 진술하였는데, 그 중 세 가지는 이귀의 상소에 대한 일을 말한 것이었다.
○ 장령 정협(정협)이 아뢰기를, “이귀의 사람됨은 20년 이래로 한결같이 일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것으로 처신하는 교묘한 술책으로 삼았으며, 전후에 소를 올린 것이 한 번 뿐이 아니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소마(소마)로 지목하여 천한 하인들까지도 괴이하게 여겨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일월록》
○ 28일에 사간 정곡이 아뢰기를, “인홍의 차자 가운데 인홍 자신이 성혼이나 정철과 서로 사이가 나쁘고, 또 유성룡과 불쾌하게 지냈기 때문에 지금도 그 도당의 남은 분이 삭지 않아서 조금만 논핵하여도 문득 스스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근일의 시끄러움이 있게 되었다는 등의 말이 있사온데, 신은 그 당시 사간으로서 윤승훈을 탄핵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피혐하여 벼슬이 갈리자 인홍을 비방하는 말을 하였으니, 신과 같은 사람 열 사람은 인홍 한 사람과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의 관직을 파면시켜서 인홍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사류의 바람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 집의 문려(문려)가 인홍의 문인이라고 자칭하면서 피혐하여 아뢰기를, “이귀가 정인홍을 죄에 얽어 무함하여 하지 못하는 짓이 없고 마음쓰는 것이 흉악하고 참혹하였는데, 잇달아 정곡이 또 인홍을 모멸하고 조롱하는 말을 꾸며대어 아뢰어 전하의 귀를 더럽힌 것이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양사에서는 마땅히 전후에 힘껏 그 진상을 진달하여 그들의 죄를 밝혀야 할 것인데도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으니, 신은 양사에서 이귀와 정곡을 두호하는 실상이 없지 않은가 합니다. ……” 하였다.
○ 장령 이구징(리구징), 지평 강유(강)ㆍ목장흠(목장흠), 대사간 성이문(성이문), 사간 조정립(조정립), 헌납 최충원(최충원)이 잇달아 인책 피혐하면서 모두 이귀를 심히 나무라고 정곡을 구원하였다. 정곡이 전에 성혼을 공격할 때에는 마음을 같이 하여 말이 합치되었고, 뒤에 윤승훈을 배척할 때에는 의논에 차이가 있었으며, 유성룡이 비방을 받을 때에는 이와 같이 서로 맞지 않았다.
○ 인홍이 취직하여 아뢰기를, “이성록 등이 황신을 처치할 때에 전하의 전일의 전교를 지적해 내어 임금으로 하여금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갖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임금을 잊고 악인에게 편당하였으니 이보다 심한 죄가 없을 것인데도 그 관직만을 삭탈하였으므로 여론이 더욱 분하게 여겨, 귀양보내는 것도 죄에 비해 경하니 감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호군 황신은 성혼의 문생으로 간흉의 당이 되어 사류가 남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여서 전하의 귀를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이는 임금을 속이고 사당(사당)을 옹호한 것이니 관직을 삭탈하기만 하는 것은 오히려 경한 벌인 것입니다.예조 참의 정경세(정경세)는 소년 명사로서 능히 예법을 지켜 몸을 신칙하지 못하고, 왜란이 일어나던 초기에 상주였는데도 관사에 출입하고 술을 마시다가 사람들의 언성을 면치 못하였으며, 또 전쟁하던 날에는 마땅히 서로 대하여 슬피 곡하기에 겨를도 없이 해야 할 것인데도 관동에 사신으로 나가서 공공연히 기생을 껴안아 남의 눈과 귀에 드러났으니, 파직시키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성록 등에 대해서는 그 말을 어찌 족히 계교하리요. 이미 삭직하였으니 귀양까지 보내는 것은 지나치다. 황신의 삭직도 지나치다.정경세의 일은 의심할 것 없이 확실하면 그만이지만, 풍문이 만에 하나라도 실상이 아니면 그 사람은 애석하다.” 하였다. ‘경세의 부모형제가 왜적에게 죽었고, 경세도 난리 중에 병을 얻어서 목숨이 거의 끊어지려 하자 고산(고산) 현감 신경희(신경희)가 육즙을 써서 살렸다. 따라서 그때 경세는 병이 중하여 실상을 알지 못하였다.’ 하니, 이 말은 양홍주의 소에서 나왔다.
○ 지평 강유가 연달아 아뢰어서 아울러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에 성록ㆍ조익ㆍ유경은 귀양가고, 황신은 관직이 삭탈되었으며, 경세는 파직되었다.
○ 인홍이 경세에 대하여 발론하자, 한 대간이 인홍에게 말하기를, “영감이 경세를 공격하는 것은 혐의스러운 데에 관계될 듯합니다.” 하였으나, 인홍이 듣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서 또 죄를 더하고, 사판(사판)에서 삭제하는 일로 동료에게 간통(간통)하여, “만약 따르지 않으면 마땅히 홀로 아뢸 것이다. 결단코 서로 용서하지 않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갈 것이다.” 하고, 동료들이 미처 답하기도 전에 인홍이 먼저 스스로 기초하여 경세를 사판에서 삭제하게 하니, 집의 김대래(금대래) 이하가 피혐하면서, “인홍이 답통(답통)을 기다리지 않고 동료를 협박하였다. ……” 하여, 이로써 인홍이 갈렸다.
○ 의령(의녕) 사람 진사 오여온(오여온)이 소를 올려 인홍의 어짊을 칭찬하기를, “심사는 밝기가 청천백일(청천백일)과 같다.” 하고, 또 이귀의 소를 배척하였다.
○ 그때 인홍을 기롱하는 시가 있었는데,

초목과 새와 짐승까지도 모두 이름을 아는데 / 초목조수개지명
경이 이제서야 올라옴은 창생의 복이로다 / 경금상래창생복
입성한 지 석 달에 삼사(삼사)가 비었으니 / 입성삼월삼사공
창생에 복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은 뼈(최영경)에 복 주는 것이로다 / 불복창생복사골

하였다. 여온이 상소에서 또 이 시를 들어서 전교의 문구를 인용하여, “전하를 기롱하고 모멸하였다.” 하여 임금의 마음을 격동시켰으니, 고자질하는 폐풍이 이미 여기에서 근원하였다. 《일월록》
○ 전 금부도사 양홍주(량홍주)가 소를 올려서 정인홍의 간사한 행실을 극구 말하였는데, 모두 열두 조목에 만여 자나 되는 내용이었다. 《일월록》 ○ 홍주의 아버지 양희가 일찍이 파주 목사로 있어서 홍주가 성혼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 인홍이 젊었을 때 일찍이 고향의 한 사람을 지목하여 악인이라 하면서, 홍주에게 밤을 타서 몰래 죽일 것을 권하므로 홍주는 의아하게 여기고, 그 뒤에 그를 수죄(수죄)하고서 절연하였다. 이로써 인홍은 드디어, ‘홍주의 아우가 그 아버지의 첩과 간음하였다.’는 말을 지어, ‘그 말이 홍주에게서 나왔다.’고 하면서 홍주의 아버지 양희에게 편지를 보내어 발설하지 못하게 하였다.양희는 홍주에게 그 편지를 보여주고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양희가 죽고 나서 홍주가 인홍을 보고 힐책하였더니, 인홍은 그의 죽은 매부 이린(리린)이란 자를 끌어대어 이 말을 하였다 하고, 또 홍주가 사당을 그 처가에 세우려 하니, 인홍이 홍주의 두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 “영감의 사당을 그 처가에 세우니 그 심술이 칼날을 잡고 아비를 죽이던 양광(양광 아비를 죽이고 위를 차지한 수양제(수양제))과 유소(류소 아비를 죽인 송 나라의 임금)의 무리와 같다.” 하고, 이어 법사(법사)에 고발하게 하였는데, 인홍이 또한 그 사이에서 거들었다. …… 양홍주의 소 가운데에서.
○ 전 직장 김광석(금광석)이 소를 올려서 홍주의 죄악을 극구 말하고, 또 “이귀와 양홍주의 말은 개 짖는 소리와 같으니 족히 변명할 것도 못됩니다. ……” 하였다.
○ 안산(안산) 군수 이귀가 소를 올려서 김광석과 권양(권양) 등의 욕먹고 무함당함을 변명하니, 임금이 전교를 내려, “이귀는 본래 어리석고 망녕되며 음험하고 허탄한 사람으로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 자이다. 광석 등의 소에 설사 실상보다 지나친 말이 있더라도 따로 조정에 공론이 있으니 마땅히 머리를 숙여 반성하고 공손하게 조정의 시비를 기다릴 것이지, 어찌 감히 거만하게 소를 진달하여 임금을 성가시고 귀찮게 하며, 조정을 경멸하여 외람되게도 기탄이 없느냐? 관직을 바꾸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