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스크랩

제로드 2017. 5. 16. 09:34

너무 파지마라



한비자(韓非子)의 대체편(大體篇)에 취모멱자(吹毛覓疵)란 말이 있다. 

‘털을 입으로 불어 가며 털 속에 흉터가 있는지 찾아낸다.’ 즉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약점이나 잘못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내는 것을 뜻한다.

요즘 말로 더하면 억지로 남의 작은 허물까지 들추어내는 아주 치졸하고 잔혹한 행위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작은 허물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아주 작은 사생활까지 완벽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객관적 진실과 사실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자기 생각(입장)에서 색안경을 끼고 공격하거나 심지어 모함까지 한다.


한비자(韓非子)는 말했다.


"어지러움을 다스림에는 법에 의지하였고,

가볍고 무거움은 저울에 따라 판단하였다.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지 아니하고 사람의

감정과 본성을 상하지 않게 하였다.“


그저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우면 약자를 보호하거나 그 뜻을 헤아려 보려 하지는 않고 무차별 약점을 잡아 그 죄보다 몇 배의 더 큰 형벌을 가한다.

그래놓고 자신은 청렴결백하고 쾌도난마(快刀亂麻)하는 리더라고 떠벌린다.

한마디로 후안무치(厚顔無恥)하다.

머리는 좋아서 공부로 하는 것은 얻었을지 모르지만 그야말로 천박한 가슴과 지혜를 가져서 사리분별력이 전혀 없다.

그 죄가 정말 자신에게는 티끌만큼도 없는지는 양심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죄는 온 천지에 다 가득하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모르고 벌레를 밟아 죽인 죄도 있다.

다만 현행법으로 처벌 받지 않을 뿐이다.

힘 있는 자의 말 한마디와 판단하나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거나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잃을 수도 있다. 그 원망이 그의 귀에 잘 들리지 않고 있지만 그것은 엄연히 시공간에 존재한다.

그들의 논리는 아주 간단 할 수 있다.

‘억울하며 출세해라.’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지배한다.’ 등등


죄를 짓고 감옥에 안 간 사람이 간 사람보다 수 백 배는 더 많을 것이다.

다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거나 들키지 않았거나 또 들켜도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빠져 나왔을 수도 있고, 공소시효(公訴時效)가 만료되어 처벌 받지 않을 수도 있다.

밖에 있던 감옥에 있던 그것은 장소의 문제이고, 그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양심의 죄로 스스로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을지도 모른다.

가끔은 양심선언이라고 하면서 그 곳에서 탈출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모함이나 현대 수사의 한계에 따라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한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있는 한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서 어디서나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루스벨트와 투르먼 대통령은 개각을 할 때 마다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에게 어떤 약점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상대가 아무리 큰 장점을 가지고 있어도 사소한 단점만 밝히려고 한다.‘

소위 말하는 소인배의 시각은 그러하다.


오래전에 포청천(包靑天)이라는 중국 드라마가 유행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북송(北宋)의 수도인 개봉부(開封府)의 수장인 포청천의 설화를 드라마화 한 것이다.

이 포청천의 다음 후임자가 그 유명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歐陽修.1007~1072)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고려 때이니 지금부터 약 천 년 전 인물들이다.

구양수가 과거시험관으로 있을 때 한번은 이런 문제가 출제되었다.

“군자가 갖추어야 할 정의(正義)와 자비(慈悲)에 대해서 논하라”


이 문제의 장원은 우리가 잘 아는 역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蘇東波, 1036~1101)였다.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 중에 한명으로 꼽히는 대시인이다. 시도 잘 쓰고, 산문도 잘 쓰고,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심지어 요리도 잘할 정도로 못하는 것이 없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경에도 대단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저 유명한 소주(蘇州)와 항주(杭州)의 조경에 그가 손을 좀 댔다.

그래서 오늘날 소주와 항주가 더 멋진 것이라 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이'천유천당 지유소항'(天有天堂 地有蘇杭: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 항주가 있다) 라며 자랑한단다.

그리고 소동파가 개발한 요리 중에 동파육(東坡肉)이란 요리는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요리이다.


아무튼 소동파의 답안지의 내용은 대충 이런 요지다.


“군주에게 자비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군주에게 정의는 너무 크면 안 된다.“


자비는 많아서 흘러 넘쳐도 좋지만 정의는 넘치면 안 된다고 하였다. 소동파는 군주에게 정의가 넘치면 잔인해진다고 경고했다.

정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결과적으로 잔인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젊은 청년 소동파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구양수가 소동파의 답안지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제 집에 가서 애나 봐야겠다!”

“나의 시대는 이제 다 끝났다. 이런 천재가 나타났으니 나는 역사에서 퇴장해야겠다.”는 말이다.


기왕 구양수가 나왔으니 좀 더 얘기 해보자.

포청천보다 구양수는 8살이 적었다.

구양수가 포청천의 후임자로 개봉부에 부임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료로서의 스타일은 아주 달랐다. 추상같은 엄격한 포청천이라면 인자하기만한 구양수는 상반된 이미지였다.

구양수는 공적(功績)을 쌓는데 별 관심이 없었다.

이에 주위에서 포청천처럼 하는 게 이름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권했다.

그러자 구양수가 대답했다.

“사람의 재능과 성품은 같지 않아서 자기의 장점을 살리면 일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으며, 자신의 단점을 억지로 하면 일이 반드시 되지 않을 것이므로 나 또한 내가 능한 대로 할 뿐이오.”


천년을 사이에 두고 있어도 구양수나 루수벨트와 트루먼은 같은 말을 하고 이를 실천하질 않았는가.

자신의 공적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 않는 구양수의 간결한 성품은 금방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래서 그가 벼슬살이 한 고을들은 부임한 지 보름만 지나면 일이 열중에 대여섯 가지가 줄어들고, 한두 달 후에는 관부(官府)가 마치 절간과 같이 평화롭고 조용해졌다.

누군가 

“정사는 너그럽고 간략히 하는데 일은 해이해지거나 중단되지 않는 까닭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대답했다.

“방종을 너그러움으로 알고 생략하는 것을 간략히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면 해이해지고 중단돼 백성이 폐해를 입는다. 내가 말하는 관(寬)은 급히 하지 않음이며, 간(簡)은 너절하고 지저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구양수는 결론처럼 또 이런 얘기를 한다.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단지 백성이 편안하다고 말하면 곧 그가 훌륭한 관리”라고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비법이 곧 진심이란 얘기다.

포청천도 구양수도 각자의 장점이 있다.

두 사람의 능력이 모두 부럽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판을 보면서 그냥 썩은 웃음이 나오는 건 1천 년 전 이 사람보다 질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들보다 400년 후에 나타난 서양의 니콜라 마키아벨리(1469~1527)의 주장을 살펴보자.

다음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君主論) 일부를 인용했다.

 

‘군주들이 잔인하지 않고 인자하다고 생각하기를 더 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자비를 부적절한 방법으로 베풀지 않도록 조심해야합니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신민들의 결속과 충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자인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자비롭기 때문에 무질서를 방치해서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죽거나 약탈당하게 하는 군주보다 소수의 몇몇을 시범적으로 처벌함으로써 기강을 바로잡는 군주가 실제로는 훨씬 더 자비로운 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군주는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되 비록 사랑은 받지 못하더라도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미움을 받지 않으면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약 누군가의 처형이 필요하더라도 적절한 명분과 명백한 이유가 있을 때로 국한해야 합니다.‘ [군주론 제17장]


이것을 요약하면

“현명한 잔인함이 진정한 자비다”


개인적으로 동의한다.

현대 사회가 더 복잡해지고 난해 해져서 소위 공공의 적이 많아지니까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현명하다’는 말에 걸린다.

과연 현명한 것은 어떤 잣대인가?

현명한 잔인함은 어떻게 구현해야하는가?

그것은 어차피 그 권력을 가진 자의 몫이다.

결국 권력을 가진 자가 현명하지 못하면 잔인하게 당하게 되는 것이다.

현명치 못한 권력자는 작은 잘못까지도 찾아내어 공격하거나 처벌하려한다.

요즘 대선으로 상대방을 인신공격하는 오랜 전통적 수법에서 이러한 것을 우리는 느끼고 있다.

아주 구역질이 날 정도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상대를 가차 없이 치는 것은 원한을 남기니 보이지 않더라도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없다.

물론 하나의 조직이나 가정에도 엄연히 이는 존재하고 있다.


관대(寬大)하거나 포용(包容) 하라는 것이 무질서(無秩序)하란 말이 아니다.

경직된 지나침을 경계하란 말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털까지 불어가면서 흉터를 찾아내는 그런 일들이 참으로 많기도 하다.

남의 잘못을 너무 파지마라.

어쩌면 자신이 파묻힐지도 모른다.

권력을 가진 자는 자비(慈悲)를 잘 살필 일이다.

 

 

2012.9.25

淸顯  書

출처 : 청현서재(淸顯書齋)
글쓴이 : 청현(淸顯) 원글보기
메모 : 원 글에 내가 단 댓글. 어제 김수남 검찰총장이 퇴임사에서 소동파의 '정의가 지나치면 잔인해진다' 를 인용했다는 것을 보고 검색하면서 오게 되었어요. 소동파가 과거시험에서 이런 문장을 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면서 그가 중국의 대문장가로 불리우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때 시험관이었던 구양수도 대단한 사람이군요. 대개 우리는 포청천만 드라마를 통해서 알고 있을 뿐인데요. 오히려 그가 더 훌륭한 관리였겠네요. 소동파의 문장 자체로만 보면 음미해볼 만 한 가치가 있는데, 현재 시점에서 임기를 못채우고 떠나는 검찰총장이 인용할 문장으로는 적절해 보이지 않아 보이네요. 아무튼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