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2015. 7. 25. 13:36
뉴스 & 이슈 | 정치

 

전두환 “외교관들 애국심 부족, 영어 잘하는 장교들 군복 벗겨 내보내면..."

이정빈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崔圭夏가 사실상 ‘외교총리’ 역할… 大使 인사도 독자적으로
⊙ 崔圭夏, 전문 통역도 놀랄 정도로 정확한 영어 구사, 유엔결의안에 들어갈 영어 단어 하나 놓고
한참 토론
⊙ 全斗煥, “우리나라 외교관들은 애국심 부족, 영어 잘하는 尉官급 장교 수십 명을 군복 벗겨
외교관으로 내보내면 해결할 수 있어”
⊙ 1989년 스웨덴 대사 시절 유럽순방 중이던 金大中 총재와 처음 만나, 스웨덴 복지제도에 대해 설명….
귀국 후 식사 같이 해

李廷彬
⊙ 78세. 서울대 법학과 졸업. 제11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 외무부 중동국장, 주시카고 총영사, 주네팔대사, 대통령 정무비서관, 주스웨덴대사,
외무부 제1차관보, 주인도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 주러시아대사,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외교통상부 장관 역임.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내가 고등고시 행정과 3부(후일의 외무고시)에 합격한 것은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저물어가던 1959년, 내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외무부 수습사무관으로 이듬해 3・15 부정선거를 지켜보았고, 4・19 직후 정식 사무관이 됐다.
내가 외교통상부 장관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친 때가 2001년, 김대중(金大中) 정권 때였다. 외교부 장관을 그만둘 때, 행정자치부의 인사책임자가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공무원들 가운데서 사무관에서부터 장관에 이르기까지 42년간 공직생활을 한 분은 장관님이 유일할 것입니다.”

42년! 참 오랜 세월이었다. 나도 내가 그렇게 오래 공직생활, 외교관 생활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원래 나는 독문학(獨文學)을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강요하다시피 해서 서울대 법학과로 진학했다. 하지만 민사소송법이니 형법이니 하는 딱딱한 법학 과목들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대신 국제법, 경제학 같은 과목들에 관심이 끌렸다.

局이 4개뿐이던 시절 외무부 들어가

당시는 대학을 졸업해도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 힘들었다. 한국은행, 시중은행, 신문사에 들어가거나 고등고시를 쳐서 판검사나 공무원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많은 친구들은 고등고시 사법과에 응시, 판검사의 길을 선택했다. 나도 고등고시를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외교관을 선발하는 고등고시 3부를 선택한 것은 솔직히 말하면, 시험 과목들 중에 내가 싫어하는 법학 과목들이 적어서였다.
나와 같은 해에 합격한 고시(高試) 행정과 11기 동기들로는 서석준(徐錫俊·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아웅산 테러로 사망), 이기욱(李基旭·전 재무부 차관·아웅산 테러로 사망), 최동규(崔東奎·전 동력자원부 장관), 김석규(金奭圭·전 주일대사) 등이 있다.

내가 들어갈 무렵 외무부는 전체 직원이 300명 정도 되는 단출한 조직이었다. 장관, 차관 밑으로 정무국(지금의 동북아시아국・북미국 등 지역국에 해당), 방교국(邦交局・지금의 국제기구국 등에 해당), 통상국, 의전국(儀典局) 등 네 개의 국(局)이 있었다.
재외(在外)공관이라야 10여 개에 불과했다. 이렇다 보니 함께 근무한 인연을 중시했고, 거기에서 흔히 회자(膾炙)되는 ‘김동조(金東祚)사단’이니, ‘박동진(朴東鎭)사단’이니, ‘이원경(李源京)사단’이니 하는 말이 나왔다. 입부(入部) 당시 차관이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었다.

나는 정무국 구미과(歐美課)에서 수습행정관으로 시작해 아주과(亞洲課)에서 사무관으로 일하면서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을 지켜보았다. 나중에는 방교국 조약과에서도 근무했다. 조약 업무를 5년 이상 다루었는데, 아마 외무부에서 조약 업무를 이렇게 오래 다룬 사람은 드물 것이다.

SOFA는 派兵國 입장에서 체결하는 것

1960년대 후반 스웨덴과의 조약에 서명하는 최규하 외무장관(왼쪽에서 두 번째). 오른쪽 끝 서 있는 이가 이정빈 외무부 조약과 서기관.
조약 업무를 하면서 공교롭게도 주한미군지위협정(SOFA・Status of Force Agreement)과 월남(남베트남) 파병에 따른 월남주둔군지위협정 초안(草案)을 마련하는 일을 했다. 전자(前者)는 외국군을 받는(외교적으로는 ‘접수’한다고 함) 입장에서, 후자(後者)는 우리 군대를 외국에 보내는 입장에서 맺는 조약이었다.

주한미군지위협정을 두고 우리의 주권(主權)을 침해하고 주한미군에게 부당한 특권(特權)을 부여하는 불평등조약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솔직하게 말하면 주둔군지위협정은 군대를 파견하는 나라의 입장에서 체결하는 것이지, 군대를 받는 나라의 입장에서 체결하는 것이 아니다. 군대는 한 나라의 주권의 상징인데, 군대를 보내는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나라 군대에 주둔국의 법률을 적용하는 것은 주권을 침해받는 것이 된다.

그리고 외국군의 주둔을 필요로 하는 나라가 을(乙)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경우도 월남주둔군지위협정 초안을 준비하면서, 당시 미국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던 주한미군지위협정 초안을 많이 참조했다. 이 경우에는 우리가 갑(甲)의 입장이 된 셈이다. 사실 월남은 우리보다 더 불리한 조건이었다. 우리나라는 휴전(休戰)상태였지만, 월남은 당장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근래에도 우리는 이라크,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등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때도 파병에 앞서 주둔군지위협정을 맺어야 했다. 그런 나라에 군대를 보낼 때, 우리 장병들을 (설사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체계나 형량(刑量)이 우리와 현저히 다른 현지 법률에 맡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주둔군지위협정 체결 시 파병국이 프리미엄을 갖게 되는 구조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South Korea, North Korea

처음 외국에 나간 것은 1965년이었다. 직책은 주(駐)스위스대사관 3등서기관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은 무척 낮았다. 무엇보다도 외국인들은 남북한을 구별하지 못했다. 한번은 한국으로 보내는 우편물에 주소지를 ‘Republic of Korea’라고 적었는데, 우편물이 사라지고 말았다. 알아보니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즉 북한으로 보내버렸다는 것이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1970년대 초 바레인에 입국할 때에는 영문도 모르고 별도로 격리되어 조사를 받은 일도 있다. 나를 북한 사람으로 오해하고 그런 것이었다. 조사관은 “남한(South Korea)사람인 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이런 일들을 겪은 후 나는 우리나라 국호(國號)를 영어로 말하거나 표기할 때에는 ‘Republic of Korea’ 뒤에 ‘South Korea’를 꼭 덧붙였다. 혹자는 우리나라를 ‘South Korea’라고 지칭하면 국가정체성(正體性)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외국인에게 우리나라를 정확하게 인식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971년 나는 주유엔대표부 1등서기관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외교관이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가 국제법의 전문가가 되어 국제법을 잘 원용(援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뉴욕 컬럼비아대학에는 유진 리시친이라는 유명한 국제법 교수가 있었다. 리시친 교수를 찾아가서 당시 현안이던 한일대륙붕(韓日大陸棚) 개발 문제와 관련된 법리(法理)를 어떻게 개발하면 좋은지 물어보았다. 리시친 교수는 “그건 아주 간단하다”면서 “개발할 필요가 있어서 개발한다는데, 그 이상 다른 논리가 뭐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필요성 논리’를 전공한 호주 출신 시러큐스대 교수 한 분을 소개해 주었다.

시러큐스대로 그 교수를 찾아갔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니, 여자 조교가 《뉴욕타임스》 등 신문기사나 유엔 제6위원회(법률위원회)에서 각국 대표들이 행한 연설문을 스크랩하고 있었다. 내가 물어보았다.

“이런 것을 뭐 하러 모으고 있습니까?”

“이것이 진짜 살아 있는 국제법입니다. 각국 대표의 연설문은 자국(自國)의 필요에 따라서 사례를 찾고, 논리를 개발하여 마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논문을 쓰고 발표합니다.”

외교는 살아있는 국제법

그와의 대화는 국제법 교과서만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겨왔던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외교관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 국제법을 그대로 따르고 원용하는 것보다, 필요하면 그것을 깰 수 있는 전략적 사고(思考)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제사회에는 국제법도 있고, 국제사법재판소도 있다. 국제 관행과 선례(先例)를 바탕으로 하는 국가들의 행동준칙(準則)도 있다. 하지만 현실세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힘의 논리를 그럴 듯하게 가장(假裝)하는 것이 외교다. 외교관은 국제법을 잘 알아야 하지만, 필요하면 국제법을 원용하되, 불리하면 이를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유엔에서 근무하는 동안에 깨달은 것이다.

당시 가장 중요한 외교현안 중 하나는 유엔을 무대로 한 남북 간 외교대결이었다. 원래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 직후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을 받았고, 6・25 때에는 유엔군의 도움을 받는 등 유엔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비록 소련의 비토 행사로 유엔에 가입하지는 못했지만, 옵서버 국가 자격은 얻었다.

휴전 후인 1954년 제네바 회담 이후 유엔에서는 매년 한반도 문제(‘한국 문제’라고 했음)에 관한 토의가 있었다. 미국이 유엔을 주도하던 1950년대에는 그러한 토의 후 거의 당연하게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1960년대 아프리카 신생국가들이 대거 유엔에 가입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많은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이 미소(美蘇)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면서 ‘비동맹 그룹’을 형성했다. 말은 비동맹이지만, 서구(西歐)제국주의로부터 식민지배를 받았던 경험 때문에 비동맹 그룹은 반서방・반미(反美)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었다. 북한은 이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우리 정부도 비동맹 국가들을 상대로 한 외교에 나섰지만, 비동맹 외교에서는 북한을 당하기 어려웠다.

1973년 북한이 WHO(세계보건기구)에 가입했다. 유엔전문기구에 가입하면 유엔 옵서버 국가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북한도 유엔이라는 국제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이에 앞서 1971년에는 중국이 대만을 대신해 유엔에 가입,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됐다. 북한은 유엔 안보리에서도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상황은 한반도 문제 관련 표결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전에는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안이 30~40표 이상 차이로 압도적 가결되던 것이 점차 표 차이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불과 몇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가결됐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북한은 유엔에 자기들의 주장을 담은 한반도 문제 결의안을 상정하기 시작했다. 유엔을 무대로 남북한은 자신의 주장을 담은 결의안이 채택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총력외교전을 펼쳤다. 북한을 ‘북괴’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유엔 무대에서 북한과의 대결에서 밀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73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변화하는 외교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및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에 반대하지 않고, 호혜평등(互惠平等)의 원칙 아래 모든 국가에 문호를 개방한다”는 내용의 6・23선언을 발표했다.

‘합의성명’ 통해 한반도 문제 不상정

1977년 7월 필립 하비브 미 국무부 차관보(오른쪽)를 만난 박동진 장관(가운데). 왼쪽은 스나이더 주한미국대사.
그해 박동진(朴東鎭) 주유엔대사에게 “공산 측 및 비동맹 국가들과 협상해서, 한반도 문제가 상정되지 않도록 하라”는 김용식(金溶植) 외무부 장관의 지시가 내려왔다. 6・23선언 및 그전 해에 있었던 7・4남북공동성명 등을 감안한 조치였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 불상정이라는 우리 입장을 지지하기로 했다. 미국은 중국, 알제리를 상대로 3주 동안 비밀협상을 벌였다. 이러한 비밀협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김용식 장관, 박동진 대사, 함태혁 참사관, 그리고 1등서기관이던 나뿐이었다. 본부의 담당 국장, 과장도 몰랐다. 협상 상황은 전문(電文)을 거치지 않고, 구두(口頭)로 보고했다. 협상이 잘못될 경우의 부작용을 걱정해서였다. 박동진 대사와 나는 수첩에 교섭일지를 작성했다. 비밀교섭의 결과 1973년에는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지 않는다는 ‘합의성명(consensus statement)’이 발표됐다.

우리는 한반도 문제 불상정 정책을 지속하려 했다. 하지만 북한이 1974년에 비동맹 국가들의 지지를 업고, 한반도 문제를 다시 유엔에 상정했다. 우리도 상응하는 결의안을 상정했다. 표 대결이 재현됐다. 우리 결의안은 채택됐고, 북한의 결의안은 부결됐다.

그해에 페루 리마에서 비동맹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북한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안이 압도적으로 채택되었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이듬해인 1975년 다시 유엔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했다. 우리도 맞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안과 북한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안이 모두 채택된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김용식 장관이 물러나고 박동진 대사가 외무부 장관이 됐다. 당시 외무부 장관 교체는 유엔총회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慣例)였다. 그만큼 유엔에서의 남북한 대결은 중대 이슈였다.

청와대, 유엔군사령부 해체 검토 지시

신임 박동진 장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는 한반도 문제의 유엔 토의를 지양(止揚)하는 것이었다. 당시 외무부 중동과장이던 나는 해외근무를 나가야 할 때였다. 하지만 박동진 장관은 “나가긴 어딜 나가?”라며 유엔과장 자리를 맡겼다. 우리는 유엔에서의 한반도 문제 토의를 지양하되, 북한이 결의안을 상정하면 우리도 맞대응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 등 서방국가들도 “유엔에서 한반도 문제를 토의한다고 해서 한반도가 통일되는 것도 아닌데, 냉전(冷戰)시대의 유산(遺産)인 한반도 문제 토의를 언제까지 해야 하나” 하는 피로감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북한도 자기들의 결의안이 채택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결국 1976년에는 한반도 문제가 상정되지 않았다. 이후 한반도 문제 토의는 유엔 무대에서 사라졌다.

유엔에서 남북 간 표 대결을 위해 다른 나라 외교관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많이 하고 다녀야 했다. ‘내가 이러려고 외교관이 되었나’ 하는 자괴감(自愧感)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거 말고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번듯한 결의안을 한번 주도적으로 내보는 것이 당시 나의 비원(悲願)이었다. 그러던 대한민국이 이제는 유엔사무총장까지 배출했으니,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북한이 한반도 문제를 토의할 때, 가장 문제 삼았던 것은 유엔군사령부 해체였다. 유엔과장 재직 시 청와대에서 유엔군사령부 해체 문제를 검토해 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유엔군사령부를 해체하고, 한미 양국군 사령부로 대체함으로써 시비의 소지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유혁인(柳赫仁)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주재하에 외무부, 국방부, 통일부의 차관급들이 이 문제를 협의했다. 나는 실무자로 이 과정에 참여했다.

한 달여의 논의 끝에 “키신저 미 국무부 장관의 이름으로 유엔사령부 해체를 발표하도록 하자”는 방안이 나왔다. 이에 대해 미 국무부에서는 찬성했지만, 국방부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미 국방부가 반대한 것은, 아마 허울뿐인 조직이기는 하지만, 유엔군사령부에 있는 장성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쿠웨이트, “시멘트 공급해 주면 원유 장기공급하겠다”

유엔과장이 되기 전에 나는 중동과장을 맡고 있었다. 아마 유엔대표부에 근무할 때, 중동 관련 업무를 일부 맡았던 인연 때문이었던 것 같다. 1972년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엔에서의 남북 간 표 대결에 대비하기 위해 중동 특사(特使)를 수행해 중동을 방문했다. 그때 쿠웨이트 등 산유국(産油國)들은 막 경제 건설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쿠웨이트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쿠웨이트 측에서는 “한국산 철강과 시멘트를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면, 원유(原油) 장기공급을 약속하겠다”고 제안했다. 한국산 시멘트는 품질이 좋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나는 본부에 쿠웨이트 측의 제안을 적극 검토해 달라고 건의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석유가 배럴당 1달러 정도에 불과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음해에 제4차 중동전쟁이 벌어졌다.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값을 배럴당 3달러로, 다시 10달러로 올렸다. 이후 석유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제1차 오일쇼크였다. ‘쿠웨이트 측의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았다.

오일쇼크는 우리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경제에 새로운 기회를 안겨주었다. 중동건설 붐이 분 것이다.

현대건설이 9억 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따낸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당시 현대건설의 정주영(鄭周永) 회장은 수많은 신화(神話)를 남겼다. 현대건설이 국가경제에 이바지한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늘도 있었다. 1977년 3월, 회사 측의 강압적인 노무관리에 반발해서 주베일 현장 노동자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사우디 정부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3억 달러의 벌과금을 매겼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사 수주 등과 관련해 불미스러운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柳陽洙 대사와 鄭周永의 갈등

유양수 前 駐사우디아라비아 대사.
유양수(柳陽洙)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는 군(軍)장성 출신으로 무척 강직한 분이었다. 그는 정주영 회장을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두 사람은 상극이었다. 그 무렵 중동국장이던 나는 유양수 대사와 가까이 지냈는데, 나중에 유 대사로부터 당시의 사정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정주영은 기업인이 아니라 장사꾼’이라고 생각했소.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주영 회장은 사우디에 진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지요.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나는 일시 귀국했을 때에 청와대에 들어가 박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어요. ‘정주영과 나 중 한 사람을 택하라’는 생각이었지. 박 대통령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소.

‘유 대사, 나에게는 당신처럼 강직한 대사도 필요하지만, 역경 속에서 달러를 벌어오는 정주영도 필요합니다. 부디 싸우지 말고 정 회장과 잘 지내주시오.’

그래서 이후로는 정주영 회장과 관련되는 일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았소. 하지만 정 회장과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화해하지 않았어요. 정 회장이 타계(他界)한 후 청운동 빈소를 찾아가 그의 영전(靈前)에서 이렇게 말했소. ‘여보, 정 회장. 살아 있을 동안 정리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구려. 영전에서나마 사과합니다.’”

유양수 대사는 “박 대통령은 나라 전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데, 나는 대사의 위치에서밖에 생각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유양수 대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중동 순방(巡訪)을 강력히 건의했다. 1964년 서독 방문, 1966년 동남아 순방 이후에는 외국에 나가지 않던 박정희 대통령이었지만, 1979년의 제2차 오일쇼크로 원유의 안정적 공급 필요성이 커지자 유 대사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지금은 대통령의 외국 방문이 워낙 자주 있는 일이어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당시에는 대통령의 외국 방문은 커다란 국가적 행사였다. 중동국장이던 나는 대통령 중동 순방의 실무 작업을 담당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중동 순방은 실현되지 못했다.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逝去)했기 때문이었다.

장인과 朴正熙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결혼식. 앞줄 왼쪽에 있는 소녀가 이정빈 전 장관의 처제다.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많은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장인(이성조 전 경북교육감)은 특히 애통해했다.

장인은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동기로, 절친한 친구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陸英修) 여사와 결혼할 때, 이불 등 살림살이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박 대통령과 육 여사 결혼식 사진에 보이는 화동(花童) 중 한 명이 나의 처제다.

장인은 청와대에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과 대작(對酌)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박 대통령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성조야. 지금까지 내 친구들, 내가 믿었던 사람들 중에서 90%는 나를 배반했다. 믿고 썼더니 돈을 받아먹지를 않나…. 너만은 내 믿음을 배반하지 말아다오.”

하지만 장인이 경북도 교육감을 그만둔 후인 1978년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이 터졌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가짜 교사증(敎師證) 발급 사건이었다. 경북도 교육위원회 직원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위조 자격증을 발급해 무자격자들이 교사로 임용되었는데, 장인은 이 사실을 보고받고도 시정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았다 하여 구속되었다. 언론은 장인이 뇌물이라도 받고 그런 것처럼 보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을 보고받고, “이성조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니, 다시 알아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야 무죄(無罪)임이 밝혀졌다. 그때는 이미 박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였다. 장인은 무죄판결이 나온 후 “박정희가 생전에 나를 그렇게 믿어주었는데, 내가 무죄라는 걸 보지 못하고 죽었다”면서 가슴 아파했다.

崔圭夏 대통령의 中東 순방

다시 외교 이야기로 돌아가자. 최규하 국무총리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정국(政局)의 혼란은 계속됐다. 12・12사태가 일어나 신군부(新軍部) 세력이 대두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었다.

이렇게 국내 상황이 어지러웠지만, 대(對)중동외교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2차 오일쇼크로 촉발된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원유의 안정적 도입이 급선무였다.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의 급서(急逝)로 중단됐던 우리 대통령의 중동 순방이 다시 추진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중동 순방은 1980년 5월로 잡혔다.

5월에 접어들면서 학생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정정(政情)이 이렇게 불안한 상황에서 과연 중동 순방을 해도 되는 것인지 전두환(全斗煥) 중앙정보부장 서리(署理)에게 문의했는데, 전두환 장군은 “괜찮으니 다녀오시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도 못내 불안했던 최규하 대통령은 5월 10일 중동 순방길에 오르면서 최광수(崔侊洙) 대통령비서실장을 서울에 남겨놓았다.

하지만 내게는 당시의 정국 같은 건 관심 밖의 일이었다. 중동국장으로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와의 공동성명 문구를 어떻게 작성하느냐 하는 것 말고는 다른 걸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사우디 통역도 감탄한 崔圭夏의 영어실력

최규하 대통령과 칼리드 사우디 국왕 간의 회담은 영어로 진행됐다. 정상회담이 끝난 후 사우디 측 통역이 내게 말했다.

“당신네 나라 대통령은 어디서 공부하신 분입니까? 우리나라에는 사흘에 한 분꼴로 많은 외국 정상이 찾아오는 데 비(非)영어권 국가원수 가운데 당신네 대통령만큼 영어를 잘하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1977년 주베일항만 공사장 소요사건으로 현대건설에 부과된 3억 달러의 벌과금 문제가 해결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나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진언(進言)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놔둬.”

나는 걱정이 됐다. 그런데 사우디 국왕과의 만찬을 마친 후, 최규하 대통령이 말했다.

“그 문제, 잘될 거야.”

최규하 대통령은 공식 정상회담 자리에서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만찬장에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에 사우디 국왕에게 귀엣말로 그 문제를 제기해 긍정적인 답변을 끌어냈던 것이다. 정상 간의 일처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사우디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정상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가장 쟁점(爭點)이 된 부분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대표성 인정 문제였다. 당시만 해도 PLO를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나라는 많지 않았다. 사우디 측은 PLO를 인정하는 문구를 넣자고 주장했지만, 우리는 미국 등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밤새도록 교섭을 벌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였지만, 사우디 외무부 청사가 밤새도록 불을 밝힌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최규하 대통령은 30분 단위로 전화를 걸어와 “합의가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나는 “난항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실무자로서 죽을 맛이었다. 사우디 외무부 장관은 합의문 타결을 실무진에게 맡기고 이웃 나라로 떠나버렸다. 결국 PLO의 대표성에 대해서는 양측의 주장을 절충해서 중립적인 표현을 넣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공동성명문 草案 찢어버려

쿠웨이트와 공동성명문안을 마련할 때에도 PLO 문제가 쟁점이 됐다. 당시 쿠웨이트 외무부 정무국장은 자신이 팔레스타인 출신이어서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우리는 사우디와의 공동성명에서 언급한 정도로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사우디보다 더 명시적으로 PLO의 대표성을 인정하는 문구를 넣어야 한다고 우겼다.

그가 하도 완강하게 나오는 바람에 나도 화가 났다. 나는 초안문을 찢어 그에게 던져버렸다. 그는 “당신은 외교관도 아니다! 어떻게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느냐?”고 펄펄 뛰었다. 나는 “공동성명 발표를 안 하면 안 했지,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교섭할 수 없다”고 받아쳤다.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하면서 “교섭을 파국으로 몰아넣고 말았다”고 보고했다. 사실 내 행위는 외교관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호된 질책을 각오했는데, 최 대통령은 의외로 담담했다. “됐어. 사우디하고 공동성명 냈으면 됐지, 쿠웨이트는 꼭 안 해도 돼.”

어떻게 외교관 출신이고, 그렇게 꼼꼼한 분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쩌면 그때 최규하 대통령으로서는 쿠웨이트와의 공동성명 같은 건 머릿속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국내 사정이 갈수록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최 대통령은 중동 순방 일정을 하루 앞당겨 5월 16일 급거 귀국했다. 원래는 귀국길에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1박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취소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그러고도 마음이 급했던지, 호텔을 출발하기로 한 시간보다 일찍 공항으로 떠났다. 예정시간에 호텔 로비로 내려간 박동진 외무부 장관과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서둘러 대통령 일행을 쫓아갔다. 공항에 도착했더니 비행기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 일행은 공항에 도착해서야 외무부 장관이 없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내가 정동렬(鄭東烈) 의전수석비서관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했더니, 정 수석은 “대통령께서 서두르시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귀국한 다음날, 정부는 5・17 비상계엄확대조치를 취했다. 사실상 신군부의 쿠데타였다.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이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맡아 전면에 나섰다. 그해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은 하야(下野)했다. 육군대장으로 군복을 벗은 전두환 장군이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최규하 대통령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나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 외무부 차관으로 있을 때 외무부에 들어가 여러 차례 그분을 모실 기회가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조약과장으로 장관이던 그분을 자주 뵈었고, 1970년대에 그분이 대통령외교담당특보로 중동을 순방할 때에도 수행했다.

정직한 원칙주의자

장관 시절에는 ‘주사(主事)장관’, 국무총리 시절에는 ‘대독(代讀)총리’ 소리를 듣곤 했지만, 나는 그렇게 정직하고 원칙주의자인 분을 여태껏 보지 못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최규하 전 대통령은 영어를 참 잘했다. 정확한 영어를 구사했다.

내가 유엔과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유엔결의안 초안을 마련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최규하 총리였다. 그가 말했다.

“나요. 유엔결의안 초안, 어떻게 됐소? 한번 읽어보시오.”

총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새카만 과장이 총리에게 전화로 보고드리는 것은 결례일 것 같아서 “제가 내려가서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때 총리실은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3층에, 외무부는 5층에 있었다. 최규하 총리는 “바쁜데 그냥 읽어보시오”라고 했다.

나는 ‘앤드(and)’ ‘콤마(,)’ 해가며 초안을 읽어 내려갔다. 한참 읽고 있는데 최 총리가 “그 단어는 아닌 것 같은데…”라고 지적했다. 어떤 단어가 적절한지에 대해 전화로 한참 논의를 하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초안문을 들고 총리실로 내려갔다. 당시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이규현(李揆現) 전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는데, 그도 영어를 잘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결국 최규하 총리, 이규현 실장, 나,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어떤 단어가 가장 적절한지를 토론했다. ‘총리가 큰일을 해야지, 이렇게 작은 일에 매달려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최규하 전 대통령에게는 단호한 측면도 있었다. 1988년 5공(共) 청문회에 그분이 출석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한창일 때였다. 나는 서교동 자택으로 최 전 대통령을 방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절대로 국회에 출석할 수 없네. 미국의 닉슨도 워터게이트 사건 후 국회에서 불렀는데도 안 나갔네. 전직 대통령이 국회에 나가는 나쁜 선례를 내가 만들 수는 없어.”

“외교관들은 애국심이 없다”

1979년 7월 1일 한국을 떠나는 카터 미국 대통령을 환송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최규하 국무총리.
5・17조치 후 출범한 국보위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기구로 행정부 위에 군림했다. 국보위 외무분과위 간사(幹事)는 육사(陸士) 16기 출신 정만길(丁萬吉・예비역 육군중장) 대령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외교관들은 애국심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군인만 애국심이 있습니까? 군인에게는 군인의 애국심이 있고, 외교관에게는 외교관의 애국심이 있는 거요. 경찰관, 소방관에게도 그들 나름의 애국심이 있소. 군인만 애국심이 있다면, 군대만 놔두고 다른 조직은 다 없애버리지….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법이오. 군인이라는 안경을 벗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거요.”

정만길 대령은 나중에 내가 시카고 총영사로 나가 있을 때에 “내 생각이 짧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외교관은 애국심이 없다”는 생각은 정만길 대령 한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전두환 대통령을 포함해서 신군부 군인들 대부분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이었다. 나중에 내가 외교 담당 정무비서관으로 일할 때의 일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비서관, 외교관의 첫째 덕목은 애국심인데, 우리나라 외교관들에게는 애국심이 부족해. 이북 외교관들을 보시오. 그들이 밀수를 하고 그러는 건 물론 나쁜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나라에 보탬이 되려고 하는 거 아니겠소? 우리나라 외교관들에게 그만한 애국심이 있겠소?”

전두환 대통령은 “위관(尉官)급 장교들 중에서 영어 잘하는 사람 수십 명을 군복을 벗겨 외교관으로 내보내면, 외교관들의 애국심 부족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도 기가 막혀서 최규하 전 대통령을 오래 모신 정동렬 전 의전수석비서관에게 이 얘기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비서관, 최규하 전 대통령께 들은 얘긴데, 박정희 대통령도 집권 초기에는 외교관에 대한 불신이 심했었다고 해요. 그런데 최 전 대통령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대요.

‘최 총리, 1961년에 권력을 잡은 후, 내정(內政)은 내가 다 장악할 수 있었소. 경제도 발전시켰고, 산림녹화도 했고, 내가 하려고 한 일은 다 내 뜻대로 했소. 그런데 외교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려. 이제 나는 외교에서는 손을 뗄 테니, 당신이 외무부 장관과 의논해서 잘 처리해 주시오.”

정동렬 전 수석은 “실제로 말년에 박정희 대통령은 대사 인사도 최규하 총리와 박동진 장관에게 맡기고 간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총리 시절의 최규하 전 대통령을 아무 실권이 없었던 ‘대독총리’로 기억하고 있다. 유신(維新)체제하의 박정희 대통령 아래서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박 대통령 말기에 ‘외교총리’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동진 외무부 장관이 5년간 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최장수 외교수장(首長)’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배경 아래서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외교만은 내 뜻대로 안 되더라”며 외교관의 전문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그가 정권을 잡은 지 14년이 지나서였다. 전두환 대통령도 임기 말에 가서야 외교관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 전문성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같은 군인 출신이면서도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외교관의 역할을 이해하는 편이었다. 아마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으로 외국에 자주 나가 우리나라 외교관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5년 단임의 대통령들 중에도 외교관에 대한 비슷한 편견을 가진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아마 자신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임기를 마치게 될 것이다.

시카고 총영사가 되다

시카고 총영사 시절,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왼쪽).
1980년에 나는 시카고 총영사가 됐다. 처음으로 공관장이 된 것이다. 나는 42년간 외교관 생활 중 7번 해외근무를 했다. 그중 공관원으로 근무한 것은 두 번(주스위스대사관 3등서기관, 주유엔대표부 1등서기관)뿐이고, 나머지는 공관장으로서였다. 이것도 내가 갖고 있는 진기록이다.

당시 미국 교민사회나 미국 조야(朝野)에서는 한국의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이 무척 심했다. 교민들과 상견례(相見禮)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신임 총영사, 당신은 몇 기생(期生)이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육사 몇 기생이냐는 말이오.”

“저는 서울대 법대를 나왔고, 고등고시를 쳐서 외무부에 들어온 직업외교관입니다.”

그러자 그 교민은 “그럼 얘기가 좀 되겠구먼” 하며 고성을 멈췄다.

한 번은 점심식사를 하고 총영사관으로 들어오는데, 한국 교민과 미국인들로 이루어진 일단의 시위대가 영사관 문 앞에서 데모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든 피켓에는 “백정 전두환 물러나라(Butcher Jeon Down)”라고 적혀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았다. 사무실에 들어와 있는데, 갑자기 케이블TV 기자 두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은 “밖에서 한국의 현 정부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고 있는데,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총영사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다”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는 미국 TV 기자들과의 인터뷰 경험은 없었지만, 그들의 요청에 응하기로 했다. 공보관을 배석시켰다. 그들이 질문했다.

“TV를 보면, 한국 경찰들이 거리에서 데모하는 사람들을 무참하게 짓밟는 장면이 많은데, 도대체 한국에 민주주의가 있는 겁니까?”

첫 질문부터 날이 서 있었다. 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아니, 여기 미국에서도 데모를 하면 덩치 큰 경찰관들이 시위자들을 엎어놓고, 수갑도 채우고, 발로 밟고 하지 않습니까? 한국 경찰이 데모 진압하면 인권탄압이고, 미국 경찰이 하면 민주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겁니까? 도대체 미국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개념은 몇 개나 되는 겁니까?”

기자가 다시 질문했다.

反정부 인사들과의 소통

“배우 출신인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 정부에 유화정책을 펼치면서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것은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고, 한국을 어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레이건 대통령은 더 이상 배우가 아닙니다. 그는 진정으로 한미 우호협력 강화를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직설적으로 대답하자 그 미국 기자는 얼굴이 벌게졌다. 동석한 공보관이 인터뷰 내용을 전부 기록했다.

나는 그만하면 인터뷰를 잘 마쳤다고 생각했다. 그 방송국이 어느 방송국인지, 언제 방송이 나가는지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외무부 본부에서 전문이 내려왔다. “시카고 총영사가 미국 TV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 내용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있으니 해명하라”는 내용이었다.

깜짝 놀라서 뒤늦게 인터뷰 방송을 확인해 보았다. 기자가 내가 발언한 내용을 묘하게 편집해서 왜곡해 놓았다. 그걸 본 교민이 한국 정부에 알린 모양이었다. 나는 공보관이 작성한 인터뷰 기록을 본부로 보내면서 “기자가 인터뷰 내용을 악의적으로 편집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다행히 그 해명이 받아들여졌다. 공보관의 기록이 없었으면 어쩌면 그때 옷을 벗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나는 관할구역 내의 소위 반정부 인사들과 소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행사 때에는 그들을 헤드 테이블(head table)에 같이 앉도록 했다. 교민 골프대회가 있을 때에는 그들을 나와 같은 조(組)에 포함시켜 함께 라운딩을 했다. 그러면서 함께 나라 걱정도 하고, 그들의 고민도 들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점차 그들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졌다. 5・16 후 미국으로 망명, 미시간대 교수로 있던 장도영(張都暎) 전 육군참모총장은 “총영사가 이렇게 해도 괜찮은 겁니까? 이러다가 목 달아나는 것 아니에요?”라고 걱정해 주기까지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 내가 참 간이 배 밖에 나온 행동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네팔국왕, 새마을운동·산림녹화 얘기 경청

비렌드라 네팔국왕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이정빈 대사.
1983년에 나는 주네팔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네팔국왕은 2001년에 조카에게 피살(被殺)된 비렌드라 국왕이었다. 그는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30대의 명민하고 개혁적인 군주였다. 신임장을 제정하면, 대개 30분 정도의 면담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국왕에게 한국의 새마을운동과 산림녹화에 대해 설명했다. “제가 네팔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돌아다녀 보니 산림이 너무 황폐해져 있다. 이걸 방지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더 황폐해질 것이다”라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어떻게 산림녹화에 성공했는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힌두교 국가인 네팔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火葬)을 하기 때문에 나무에 대한 소요가 엄청났고, 그 때문에 나날이 산림이 황폐해져 가고 있었다. 때문에 국왕은 나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었다. 국왕 비서실장이 수시로 들어와 국왕에게 면담을 끝내야 한다고 재촉했지만 국왕은 이를 무시하고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당초 30분으로 예정했던 면담은 2시간 가까이 되어서야 끝났다.

딸 자랑하던 북한대사

스웨덴 국왕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기 위해 왕궁을 방문한 이정빈 대사. 오른쪽은 스웨덴 의전장.
네팔대사를 마친 후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통령 정무비서관(외교담당)으로 1년 반 정도 일하다가 주스웨덴대사로 나갔다. 중립국인 스웨덴은 남북한 동시수교국이었다. 그때만 해도 남북한 외교관들은 서로 마주쳐도 말을 섞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스웨덴 주재 북한대사(이름은 기억나지 않음)는 내게 참 친근하게 굴었다.

“이 대사, 내 딸이 국제중학교에 다니는데 말이요, 전교에서 1등입니다. 자식 교육비 대느라고 고생이 적지 않아요.”

그는 닳아빠진 옷소매를 보여주면서 “자식이 뭔지, 자식 공부시키기 위해 10년 동안 옷 한 벌 못 해 입고 이렇게 지내고 있지 뭡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스웨덴 외무부 지역국장을 만났더니, “북한대사가 외무부에 들어올 때, 미성년자인 딸을 통역으로 데리고 들어오는데 참 거북스럽다”고 말했다.

북한대사를 만났을 때 그 얘기를 전하면서 “스웨덴 외무부에서 나보고 들으란 듯이 그런 불평을 하는데, 그건 경우가 아니지 않으냐”고 했더니, 그는 “고맙다”고 했다.

다른 나라 대사들을 만났더니, “북한대사를 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는데, 북한대사는 통 답례하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북한대사를 만났을 때 이 얘기를 전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산도 부족하고, 대사관저에 변변한 그릇 하나 없습니다. 이런 창피한 꼴을 보일 수 없어서 초대를 못 하고 있는데…. 참, 대사 구실을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스웨덴 TV도 서울올림픽 개막식 등을 보도했다. 북한대사는 “개막식 장면을 TV를 통해 보았는데, 참 멋있고 잘 되었다”면서 서울올림픽을 담은 TV필름을 하나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서울에 부탁해서 구해주었다. 다시 만났을 때, 그가 말했다.

“밤을 꼬박 새우면서 필름을 봤습니다. 남조선이 이렇게 발전해서 성대한 올림픽도 개최하고…. 참 좋았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그가 북한체제에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을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북한을 떠나오면 받아주겠다”고 말하면, 당장에라도 귀순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귀순해 오면 남북 간에 외교적 갈등이 벌어지고, 그것이 어떻게 비화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몇 년 후 서울에서 근무할 때, 그가 평양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북한에서는 고위직 인사들을 숙청할 때 교통사고로 가장하는 일이 많다고 들었기에, ‘그 역시 결국 숙청당하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내가 적극적으로 그에게 귀순을 권유하고, 한국으로 올 수 있도록 공작을 했더라면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스웨덴에서 만난 金大中

1989년 2월 평민당 총재로 스웨덴을 방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친필사인이 담긴 사진을 보내주었다.
스웨덴 대사로 있을 때, 국회의원 10여 명이 스웨덴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스웨덴 국회 외무위원장이 환영만찬을 열어주었다. 주최 측에서는 호스트인 스웨덴 외무위원장 맞은편에 우리 측 위원장석을, 그 옆에 내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평화민주당(평민당) 소속 이 모(某) 국회의원이 “왜 대사가 상석(上席)에 앉아 있느냐?”면서 소란을 피웠다. 그는 내 팔을 잡고 문가 쪽 자리로 끌어내리려고까지 했다. 주최 측에서는 영문을 몰라 당황해 했다. 다행히 일행 중 한 분이 의전 관례상 대사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그를 자제시키고 상황을 수습했다. 하지만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1989년 2월 유럽 순방에 나선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스웨덴을 방문했다. 그를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전에 소란을 피웠던 이 모 의원도 김 총재를 수행해 다시 왔다. 그는 “총재님, 이 대사가 저와는 무척 잘 지내는 사이입니다”라며 있지도 않은 친분을 자랑했다. 그러자 김 총재는 싸늘하게 말했다.

“거, ○○○ 의원은 남의 뒤통수를 참 잘 쳐.”

김 총재는 이 의원이 저질렀던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의원은 무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결국 나중에 김대중 총재와 결별하게 되는데, 그때 이미 눈 밖에 나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 총재가 스웨덴을 떠날 때, 그를 공항까지 배웅했다. 시내에서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는 스웨덴의 복지정책에 대해 물어보았다. 나는 스웨덴이 복지제도를 도입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과 발전과정 등을 설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도 이제 스웨덴식 복지모델을 연구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웨덴의 여건과 우리의 여건은 많이 다릅니다. 겉만 보고 따라해서는 안 됩니다. 당(黨)에 전문가들이 있을 테니, 그들이 한 1년 정도 와서 연구해 가면 좋을 것입니다.”

김대중 총재는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때로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나도 그의 말에 반박을 해 논쟁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40분쯤 되지 않나 싶다.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김 총재는 수행원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스웨덴에 와서 뭘 배워갑니까?”

스웨덴에 와서 놀다 가는 것 아니냐는 질책이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김대중 총재는 스웨덴 복지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기 시작했다. 그 짧은 시간에 내가 해준 이야기들을 자기 식으로 소화해서 남에게 설명하는 그의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金大中,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반대”

얼마 후 나는 외무부 정무차관보가 되어 한국으로 들어왔다. 김대중 총재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난번에 신세를 많이 졌다. 식사하러 한번 오라”는 얘기였다. 현직 고위공무원 신분으로 야당 총재를 만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밥 한번 먹자는데 못 갈 게 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대중 총재와 만나 식사를 같이 했다.

얼마 후 서울법대 후배인 김영일(金榮馹)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선배님! 김대중 총재와 식사 같이 하셨다면서요?”

아마 정보 계통에서 청와대로 보고가 올라간 것 같았다.

“그래요. 그게 무슨 문제가 있소?”

“아이고, 선배님. 그런 데는 뭐 하러 가십니까? 앞으로는 가지 마세요.”

하지만 김대중 총재와의 인연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외무부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여야(與野) 정치지도자들에게 그 취지를 설명하도록 했다. 내가 김대중 총재를, 박건우(朴健雨·주미대사 역임) 의전장이 김종필(金鍾泌) 민주자유당(민자당) 최고위원을 만났다.

김대중 총재는 “나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에 반대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북한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에 반대하고 있고, 분단 고착화의 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김 총재는 “나에게 설명을 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나를 설득하려 하지는 말라”고 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에 그가 대통령이 되어 나를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발탁하리라고는 당시엔 상상도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