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가 있는 풍경/서울 경기 탐방

향곡[鄕谷] 2014. 5. 10. 08:50

 

촌 탐방 ②

안평대군의 몽유도원을 찾아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자하문로 (2014.4.2, 2014.4.12, 2014.5.7)

 

 

안평대군은 세종의 아들로 큰형인 문종과 한 살 위에 형 수양대군이 있었다. 그는 시가 뛰어나고,

글씨가 좋고 출중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쟁에 희생되어 시신도 무덤도 없으며, 그가

평생 모은 진귀한 글과 그림은 모두 흩어지고 사라졌다. 이제 서촌 두 번째 탐방은 안평대군이

살며 무릉도원을 꿈꾼 집 비해당터와, 꿈 꾼 것을 몽유도원도로 그리게 하고, 인왕산 기슭에 

가본 뒤 꿈 속 모습과 정말 같다고 탄복하여 그 자리에 세운 계정사터를 찾아나섰다.  

 

서촌에 가서 서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어느 골목에서 보나 인왕산이 그 사이로 조금씩 다 보인다.

세종이 태어난 곳인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에서 골목을 따라 옥인동을 북서로 올라가면 수성동계곡

인데, 그 끄트머리가 안평대군의 집터였던 비해당터이다. 안견의 그림인 '수성동'에 있는 기린교가

있어서 비해당터임을 알 수 있다. 아파트를 헐고 널찍한 휴식공간이 되었다. 비해(匪懈)는 '게으름

없이'란 뜻인데, 안평의 인품과 신뢰감에서 세종이 내린 당호이다. 여기에서 꾼 꿈을 화원 안견에게

그리게 한 그림이 몽유도원도이다.

 

 

 

 

안평대군의 집터인 비해당터. 바로 앞에 다리가 기린교이다

 

 

 

기린교

 

 

 

기린교 위쪽. 문인들이 모여 시회를 열었던 곳이다 

 

 

다시 발길을 옮겨 창의문이 있는 언덕을 넘어서 부암동에 있는 무계정사터로 갔다. 무계는 무릉계곡

이다. 옛터엔 최근인 2014.3월 완공한 무계원이 있다.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음식점인 오진암옮겨

종로구청에서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는데, 새로 짓다시피 하였다. 음식점은 무계정사와 관련이

없는데 이름을 빌어 그렇게 지었다. 골목 길을 따라 더 올라가면 소설가 현진건집터 표지석이 있고,

공터 느티나무 뒤에, 문으로 잠궈서 들어가서 볼 수 없는 곳 바위에 무계동이라는 각자가 뚜렀하다. 

바위 옆 한옥은 그 뒤에 지었다는데 서까래는 내려 않아 다 쓰러져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다. 안평

대군의 흔적은 모두 지워져 찾기가 어렵지만 이 부근인 것만은 확실하다.

 

 

 

 

음식점이었던 오진암을 옮겨서 무계정사터에 지은 무계원

 

 

 

무계동 바위각자

 

 

 

무계동 바위 앞 느티나무

 

 

안평대군이 남긴 글인 도원기(桃源記)를 읽어보면 산벼랑 숲으로 올라갔다 하였다. 창의문을 지난

언덕에서 북쪽으로 보았으니 그 대상은 북한산 봉우리인 향로봉 비봉 문수봉 보현봉 일원이다.

몽유도원도를 담은 책을 가지고 각도를 비교하며 올랐다. 무계정사터 앞 언덕은 집으로 막혀 올라갈

없었다. 부암동 골목길을 따라 민가를 지나 인왕산 기차바위까지 다다르니 거의 비슷하였지만,

좀 더 멀리 봐야할 듯하여 능선 아래로 돌아 내려오니, 어느 새 창의문에서 인왕산 정상으로 오르는

능선 중간에 이르렀다. 각도로 봐서는 그 부근이 맞을 것 같다. 

 

 

 

 

 

안평대군이 꿈에 본 무릉도원과 같다고 생각한 무계정사터 뒷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원경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후 열흘 만에 교동도에서 안평대군에게 사약을 내리고, 비해당은 효령대군에게

물려주고, 무계정사는 헐고, 자식들은 죽이거나 노비로 삼아 안평대군의 흔적을 없앴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비해당은 불타고, 몽유도원도는 약탈되고, 지금 그 그림은 일본 덴리대학에 있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사라진 것은 사람 만이 아니었다. 안평이 모은 세계적인 귀중한 글씨와 그림은 흩어지고,

몽유도원도는 이 땅에 남지 못하고, 우리는 돌다리나 그 흔적을 찾을 뿐이다. 허망한 자취이다.   

 

 

※ 참고 도서

 1. 오래된 서울. 최종현 김창희 지음. 동하. 2013

 2.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김경임 지음. 산처럼. 2013

 3. 겸재의 한양진경. 최완수.동아일보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