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가 있는 풍경/서울 경기 탐방

향곡[鄕谷] 2014. 5. 14. 23:29

 

촌 탐방 ③

서촌 '어둠의 시대'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자하문로 (2014.4.2, 2014.4.12)

 

 

 

서촌은 처음 조선의 왕실이 자리잡았고, 조선이 기울자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조선의 땅을 어둠으로

몰아 넣은 사람들이 자리잡은 땅이 되었다. 조선을 강제적으로 합병하는데 앞장선 대표적 매국노

이완용이 자리 잡은 터가 서촌이다. 나라를 욕되게 하고 서촌을 욕되게 한 자이다.옥인동 18번지와

19번지를 찾아가 보았더니 국민은행과 옥인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택이 3천5백평이라니

일제로 부터 받은 은사금으로 받아 평생 살 줄 알았는가? (그도 합병 16년 뒤에 갔다)

 

나라를 팔아먹은 막후 1인자는 윤덕영이다. 시종원경(요즈음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있으

면서 순종을 압박한 인간이다. 그는 옥인동에 1만6천6백여평 대저택을 꾸몄다. 그는 순종비의 백부

로서 자리를 악용한 악질이었던 것이다. 수십 채 건물 중 20년 걸려 지은 3층짜리 서양식 대저택은 

불타서 없어졌으며, 에게 지어준 건물(박노수미술관) 등 두 채가 남아있다. 건물이 없어졌다고

아쉬워 할 일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져가서 안타까울 뿐이다.

 

 

 

매국노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어주었던 저택 입구 (박노수미술관-구립 종로미술관으로 쓴다)

 

 

 

매국노 윤덕영의 저택 19 채 중 남아 있는 두 채 중 하나인 옥인동 168-2 박노수미술관

 

 

 

서촌엔 친일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동김씨인 김상용의 후예인 동농 김가진은 대한제국의

장관급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하였다. 김좌진의 독립군 고문, 임시정부의 고문으로

활동하였으나 망명 3년째 별세하였다.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행적을 풀지 못하는 자료가

있어서, 서훈도 보류되고 아직 중국에 묻혀 있다. 아쉬운 일이다.  김가진의 집터는 자하문터널 옆

오른쪽 길로 올라가면 숲이 시작되는 곳 교회 아래에 있는데, 백운동천이라 쓴 바위 글씨가 있는

곳이다. 광무 7년이니 1905년에 쓴 글씨이다. 경복궁 옆 적선동 버스정류장 옆에도 잠시 살았던

김가진 집터 표석이 있다. 

 

 

 

동농 김가진선생 집터엔 백운동천 글씨만 남아 있다. 

 

 

 

서촌엔 문인들, 화원들이 많았다. 송강 정철,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가 서촌 사람들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그 맥을 이어온 사람들이 또 있다. 이상,윤동주,이중섭이 서촌에 살았다,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

하였다. 서촌에서 그들이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에서 100m 정도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상의 집'이 있다. 이곳에 사는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와서 22년을 여기서 살았다. 이상(본명

김해경)은 보통학교 친구와 중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미술을 같이 그렸는데,  친구 구본웅이 준 사생상

(그림도구 상자)이 너무 고마워서 평생 기억한다고 그 '상'을 넣은 '이상'을 호로 삼았다. 철문 안쪽으로

들어가서 이상의 소설 속에 나오는 그 어둠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상의 집 /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10. 이상이 살던 때보다 줄어든 집이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상의 집에서 수성동계곡 쪽으로 올라가면 골목 끄트머리에 시인 윤동주가 하숙하던 집이 있다.

실제 윤동주는 도망 다니느라 여기서 두 달을 살았지만 본인이 직접 뽑은 18편의 시 중  '별 헤는 밤'

등 여기서 쓴 시가 6편이다. 세 본을 필사하여 같이 하숙하였던 정병욱교수가 학병에 끌려가며 시골

어머니께 맡겨 놓은 윤동주의 원고가 있었기에 해방 후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집 뒤 수성동계곡에 

가끔 올라갔다는데, 좀 떨어진 창의문 앞 언덕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만들어 기리고 있다.  

 

 

 

 

윤동주 하숙집 터. 철문이 달린 폐지가 쌓인 집이다. 골목 위로 인왕산이 보인다

 

 

 

윤동주 하숙집 터 표지판. 한옥이 2층 양옥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석 달을 살았지만 도망 다니는 기간을 빼면 두 달이다.

 

 

 

일제를 지나 해방 후에 '한국이 낳은 화공'이라 스스로 얘기한 이중섭(1916~1956)이 지내던 집을 찾았다.

누상동 166-202. 2층 다다미방을 얻어 사용하였다. 주소를 들고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다. 다세대주택을

너무 많이 지어 그 주소는 골목 안에 깊숙히 묻혀 있었다. 윤동주 하숙집에서 100m도 안되었다. 마침

안주인은 골목에 떨어진 꽃을 쓸고 있었다. 자신도 서예를 하는 사람인데, 1984년 리모델링하여 살고

있다며, 이중섭이 사용한 이층 다다미방은 생활공간이라 보일 수는 없다 하였다. 책 '이중섭의 편지' 를

뒤져본다. 1954.7.13 이곳에 왔다. 선배가 방 한 칸과 쌀을 주었다. 여기서 닭,소,달과 까마귀 등을 그렸다.

걸식 같은 생활을 하며, 일본에 사는 아내와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어려움을 이기느라 그림을

그려 세상을 속였다고 하였다. 그림으로 세상을 잊으려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도 윤동주같이 수성동

계곡에 올라가서 머리를 식혔다. 절박하게 살다가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병원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죽었다. 

 

 

 

1954.7.13 이사가서 이중섭이 살았던 선배의 다락방이 있는 집 골목

 

 

 

  지금은 붉은 벽돌집이 된 2층 다락방이 이중섭 화가의 작업공간이었다. 

주변에 다세대주택이 많이 들어서서 다락방에서 인왕산을 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