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005, 중국 백두산여행, 광개토태왕릉과 광개토태왕비(호태비)-길림성 집안시(국내성)

댓글 0

* 해외여행 */13년 China 백두산

2013. 10. 8.


2013년 10월 05일 토요일 맑음


백두산 여행 3일째 여전히 날씨는 쾌청한게 여행에 도움을 준다.

통화시의 만통호텔을 체크아웃 하고 고구려의 유적이 있는 국내성(길림성 집안시)로 이동 고구려 벽화가 있는

사신총을 관람하고 광개토태왕릉과 광개토태왕비, 장수왕릉을 둘러 보고 북한땅과 경계가 되는 압록강변을 트래킹한다.

집안시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심양으로 이동하여 발맛사지로 피로를 풀고 예스인 호텔까지가 오늘의 여정이다.

 


집안으로 이동중 잠시 휴게소에 들렀는데 옆에 조그마한 호수가 있습니다.



 

아름답게 물을 머금은 단풍이 온통 호수의 물에 풍덩 빠져 있습니다.



 

 

 

기념촬영

 




 

 

 

압록강 차로 만들었다는 술을 선전하는 간판이네요.



 

 

 

 

 

 

 

차창밖으로는 계속 멋진 풍경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길가 마을의 풍경인데 노랗게 옥수수를 많이 말리고 있는 전경

어느 마을이나 모두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기차길, 언젠가 김정일이 열차를 타고 중국방문할때 이용했던 그 기차길이라네요.

집안시를 통과해 평양까지 계속 연결되어 있답니다.


 


 

집안시 사신총, 고구려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사신총에 도착 고구려의 벽화를 관람합니다.

사진촬영은 하지 못하게 해서 벽화는 사진이 없다.



 

 

 

 

 

 

고구려 시대 고분은 석총과 토총이 있는데, 석총은 광개토왕릉(장군총)이 대표적이며 벽화가 없다.
토총은 벽화가 있는데,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은 당시 수도였던 통구(현 중국 길림성 집안현) 지방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유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 고분은 중국 집안(지안: 集安)의 20여기를 포함해100여기에 이른다.
3세기에 첫 등장한 고분 벽화는 생활풍속도가 주류를 이루다가 장식문양을 거쳐 후기로 가면 악귀를 쫓는 

의미의 사신도(四神圖)로 발전한다. 생활 풍속을 주로 그린 벽화가 있는 고분으로는 안악 2.3호분, 각저총, 

무용총 등이 있고, 사신도를 함께 그린 것으로는 쌍영총, 대안리 1호분이 있다. 

사신도를 함께 그린 것으로는 강서대묘, 중묘, 소묘를 들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고분 벽화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사신총

고분의 봉토는 방대형이며 무덤의 구조는 현실 남벽 중앙에 달린 널길과 방형의 현실로 된 외간무덤[單室墳]이다. 

네 벽은 잘 다듬은 거대한 석회암을 3단 쌓아서 축조하였고 천장은 화강암으로 구축한 평행3각굄천장이다.

벽화의 내용은 사신도이다. 이 밖에 문지기[守門將], 괴이한 짐승, 신선, 일월성신, 장식무늬 등도 그렸다. 

벽화는 회칠을 하지 않은 돌벽에 직접 그렸다. 이와 같이 잘 다듬은 거석 벽에 직접 그림을 그린 벽화고분에는 

강서중묘ㆍ강서대묘ㆍ호남리사신총ㆍ능산리 벽화고분 등이 있다. 벽화는 널길의 좌우 벽과 널방의 네 벽, 

천장에 그려져 있다. 널길의 동벽에는 상반신이 나체인 인물이 오른손에 창을 쥐고 상반신을 앞으로 구부리고 

입구 쪽을 향해 달려나가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림을 그렸다. 서벽에 그린 인물도 상반신이 나체인 인물이나 

왼손에 가늘고 긴 소라모양의 악기를 쥐고 있다. 이 두 인물상은 문지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널방의 벽화를 보면, 네 벽 모서리에는 나무기둥대신에 짐승머리에 몸이 털로 덮인 괴수가 굄돌을 두 팔로 받쳐 든 

그림을 그렸다. 네 벽 중앙에는 사신도를 배치해 남벽에는 널방문 중간에 두고 좌우 벽에 각각 한 마리의 

주작(朱雀)을 그렸으며, 북벽에는 구름무늬 사이에 나는 거북과 뱀이 엉켜 있는 현무도(玄武圖)를, 동벽에는 

쌍뿔에 긴 혀를 내민 청룡(靑龍)을, 서벽에는 백호(白虎)를 각각 그렸다.

천장에는 덮개돌 중심에 큰 용을 그렸고, 북쪽 가장자리 가까이에는 별 3개를 배치했으며, 네 모서리에는

 연꽃무늬를 포옹한 어캔더스(acanthus)무늬를 그렸다. 그리고 3각굄돌은 해ㆍ달ㆍ산악ㆍ나무ㆍ비천ㆍ

신선과 엉킨용무늬, 수레바퀴의 쇠를 자르는 인물, 인동당초무늬, 구름무늬 등으로 꾸몄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신총 [四神塚]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광개토태왕릉에 도착하니 안내석이 제일 먼저 반깁니다.


 

 

 

 

 

 

 

광개토태왕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 지린성 지안(집안 集安). 중국에서는 '호태왕비'라고 부른다.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비는 대석과 비신으로 되어 있고, 

비신이 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나, 대석과 비신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높이는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비의 머리 부분은 

경사져 있다. 대석은 3.35×2.7m 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

(판독 여부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고 비석이 불규칙하여 글자 수 통계에 이론이 있다.) 본래 비석만 있었으나, 

1928년에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중공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제1면 1행 ~ 6행)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왕),

유류왕(儒留王=유리왕),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기록해 놓았다. 

둘째 부분(제1면 7행 ~ 3면 8행)에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 정벌)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64개의 성(城)과 

1,400개의 촌(村)을 공파(攻破)하였다. 왕의 외정에는 정토복속(征討服屬)과 토경순수(土境巡狩)가 있으며, 한반도 내는 

전자의 대상이 되어 동일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영락 10년(400)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는 축출의 대상이었고 정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 같은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부분(제3면 8행 ~ 4면 9행)은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煙戶)의 숫자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守墓制)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 등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연구와 논쟁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조선 전기의 몇몇 문헌에 언급되어 있지만, 

조선후기까지 비문을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비석이 발견된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들었는데, 초기의 탁본은 

대체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다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의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또한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논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 것은 둘째 부분의 신묘년 

기사(辛卯年記事)이다. 일본에서 처음 입수한 비문은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수행하던 포병 중위 

사쿠오[酒句景信]가 1883년에 가져온 쌍구가묵본이었다. 이를 기초로 참모본부에서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 1888년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아세아협회의 기관지인 『회여록(會餘錄)』 제5집에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를 게재함으로써 일반에게 알려졌다. 여기에서 신묘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 □는 훼손된 문자 )”고 해석했는데, 

이후 이 신묘년 기사를 4세기 후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정설로 정착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우선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고, 

1909년에는 박은식과 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하기도 했다. 민족주의사학자 정인보는 1930년대 말에 저술한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에서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광개토대왕)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일본인들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1972년에는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李進熙)가 참모본부의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이 일어났다. 그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현대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조작 왜곡하여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극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과거 불분명했던 자획까지도 분명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석회도부의 결과로서, 

고마쓰[小松宮] 탁본을 참고하여 미다쿠[三宅米吉]가 쓴 「고려고비고추가(高麗古碑考追加)」가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왜이신묘년래도해파’(倭以辛卯年來渡海破)도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진희, 『광개토왕비의 연구』, 일조각, 1982) 


이를 계기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1981년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근거로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공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된다. 이 주장대로라면 일본 사학계의 이른바 ‘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지리적 이점이 큰 중국에서 최근에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1984년에는 중국의 왕젠췬[王建群]이 

장기간의 실지조사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好太王碑硏究)』를 발표했는데, 그는 이제까지 잘못 읽은 부분은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다고 주장하고, 비문의 총 글자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리고 비문에 등장하는 

왜(倭)를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진희의 

석회조작설도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에도 한계가 발견되고 있다. 도회부분은 탁공(拓工)들이 고가판매를 위한 

무지의 소치라고 주장하였는데, 발견 초기의 탁본은 고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닌 것임에도 조작된 것이 

나타나는 부분에 대한 해명이 부족하다.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은 그 주체가 고구려(광개토왕)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나 그 외의 것이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이 비는 사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풀어줄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내용의 정확한 판독이 이루어짐으로써 한국 고대사를 분명하게 해줄 것이다. 나아가 한·중·일 3국간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해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국간의 협동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한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개토대왕릉비 [廣開土大王陵碑] (두산백과)




 

 

 

 

 

 

광개토태왕비에서 기념촬영 후 광개토왕릉으로 이동합니다.

 

 


 

 

 

 

 

 여기가 광개토태왕릉, 밑부분과 전체적으로 허물어져 있는 모습이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광개토태왕릉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에 있는 고구려의 왕릉급 돌무지무덤〔積石塚〕

태왕릉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통구 분지의 우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방형 평면을 가진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이 능은 흙 담으로 쌓은 능원 내에 자리한다. 무덤의 동편으로 제대로 불리는 시설이 있고 

동북편으로는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으며, 남쪽으로 딸린무덤〔陪塚〕이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1913년 조사 시 출토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있는 벽돌에 근거하여 

태왕릉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1966년 중국 측에서 우산묘구 제541호묘(JYM 0541)로 편호하였다. 

이 능에서 동북쪽으로 300m 거리에 광개토왕비가 있다.

태왕릉은 잘 다듬은 돌로 축조한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서 현재 11단이 남아 있다. 잔존하는 무덤의 정상부는 

한 변이 24m 정도의 평평한 면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기에 매장주체부가 노출되어 있다. 매장주체부는 돌로 쌓은

 돌방〔石室〕과 돌방 내에 맞배지붕 형태의 돌덧널〔石槨〕이 있고, 돌덧널 내에는 관대(棺臺)가 남북 방향으로 

두 개 놓여 있으며, 주검은 나무널〔木棺〕에 안치되었을 것이다. 돌방은 한 변 길이 3.24m, 2.96m의 장방형에 

가까운 방형이고, 서벽 중앙에 길이 5.4m, 폭 1.96m의 연도(羨道)가 있다. 분구 위에서는 기와와 연화문 와당, 

벽돌이 출토되어서 분구 정상부에 목조 구조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구조물이 왕릉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무덤의 남쪽으로 3m 거리에 돌널〔石棺〕형태의 딸린무덤이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또한 중국에서는 무덤의 

동쪽을 50~68m 거리에 1.5m 높이로 쌓아 올린 석단 시설을 제대로 보고 있으나, 그 용도는 확실하지 않다. 

무덤의 동북쪽 120m 지점에도 건물지가 있으며, 능원의 동쪽 담장과 9m 정도 간격이 있어 초소시설로 추정된다.

무덤에서는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Y자형으로 부조된 연화문 와당은 태왕릉형 와당이라고 할 만한 

특징적인 것이다. 이외에도 금·금동·청동·철기와 토기 등 1,000여 종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금동제 장막걸이 장식, 

상 다리 등과 등자(鐙子), 행엽(杏葉), 띠 연결고리 장식 등의 마구와 “신묘년 호태왕O조령구십육

(辛卯年 好太王O造鈴九十六)”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방울이 출토되어 주목을 끌었다.

태왕릉은 그 거대한 규모와 명문 벽돌이 출토되어 일찍부터 고구려 왕릉으로 추정되었던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왕, 장수왕, 고국천왕 등이 비정돼 왔는데, 출토된 유물과 무덤구조로 미루어보아 

태왕릉의 건립 연대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가 우세하여 많은 이들이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최전성기 때의 대형 돌무지무덤으로서 국내성 시기 고구려 왕권의 

크기와 지배력을 짐작케 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왕릉 [Taewangreung, 太王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광개토태왕릉 내부의 전경입니다.

 


 

멀리 보이는 산은 압록강너머 북한땅입니다.


 

 

 

 

 

 

 

 

 

 

 

 

 

북한땅쪽으로 산위에 굴뚝이 있어 저게 뭐냐고 물었더니 구리(동)를 

제련하는 제련소가 있어서 그 굴뚝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