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나들이/영(嶺)현(峴)치(峙)천(遷) 재,고개

앵봉(鶯峰) 2015. 12. 10. 06:14

백두대간(白頭大幹) 죽령(竹嶺)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에 사이에 있는 고개로 높이 689m.

일명 죽령재· 대재라고도 한다.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5년(서기 158년)에 길을 열었다.

소백산맥의 도솔봉(兜率峰, 1,314m)과 북쪽의 연화봉(蓮花峰, 1,394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하고 있다.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호서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1941년 죽령 밑으로 4,500m의 죽령터널을 뚫어 중앙선이 개통되었고, 터널의 동쪽에 희방사역, 서쪽에 죽령역이 개설되었다.

죽령은 삼국시대 이래로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산신사당이 있었다.

지금도 용부원리 계곡에 산신당이 있다.

옛날 어느 도승이 이 고개가 너무 힘들어서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이라 하였다 한다.

 

 

 

 

영남관문 죽령(嶺南關門 竹嶺)

 

 

 

죽령(竹嶺)

 

소백산 허리, 구름도 쉬어 간다는 아흔아홉굽이 죽령은

영남과 기호를 넘나드는 길목 가운데서도 가장 유서깊고 이름난 중요한 관문이다.

이 고개는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에 신라사람 죽죽(竹)이 길을 개설하였다 하여

죽령이라 불리어 왔으며, 한때는 고구려와 국경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와 조선조시대는 청운의 꿈을 안은 선비들의 과거 길이였고,

온갖 문물을 나르던 보부상들과 나그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숱한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죽령주막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죽령길 - 건설교통부

 

 

 

 

 

 

팔봉구국제단기념비(八峰救國祭壇記念碑)

 

 

 

죽령 해발 696m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북도

 

 

 

죽령 표석(竹嶺 標石)

 

 

 

죽령휴게소

 

 

 

 

 

 

 

버들밭마을 유래

 

버들밭마을은 금강면에 편입(1914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신기, 기동, 응암을 병합하여

용부원리로 삼고 금강면에 편입) 되었다가 1917년 다시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2리로 편입되었다.

해방 이전 99가구가 거주하며 화전민촌을 이루고 있었으나 화전정비사업으로

대부분 인근지역으로 이주를 하였으며, 1975년에는 12가구가 거주하였다.

현재의 마을은 1939년에 도청에서 목양장을 개설했다가 한국전쟁 당시 병화로 없어진 자리에 들어섰고,

고산습지에 버들이 서식하였다 하여 버들밭 마을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국립공원 명품마을(옛고개마을)로 지정되어 있다.

 

 

 

국립공원 죽령옛고개 명풍마을 입구

 

 

 

 

 

 

 

 

 

 

 

죽령(竹嶺) 옛길 - 명승 제30호

 

소백산(小白山)의 제2연화봉과 도솔봉(兜率峰)이 이어지는 잘록한 지점에 자리한 해발 689m의 죽령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 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祠)이 있다'고 했다.

 

유구한 유서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高句麗) 국경(國境)으로 신라와 대치,

삼국의 군사가 뒤엉켜 엎치락 뒤치락 하는 불꽃튀는 격전장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長壽王) 말년(末年, 서기 470년)까지이며,

신라(新羅)는 진흥왕(眞興王) 12년(서기 551년) 왕이 거칠부(居柒夫) 등 여덟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百濟)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 죽령 이북  열고을을 탈취했으며,

그 40년 뒤인 영양왕(嬰陽王) 1년(서기 590년) 고구려 명장 온달장군(溫達將軍)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등의 기록을 보아

당시 죽령이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1910년대까지도 경상도 여러 고을에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와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들이 서울 왕래에 모두 이 길을 이용했기에 늘 번잡했던 이 고갯길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들이 길목마다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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