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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봉(鶯峰) 2017. 1. 10. 22:30

신라충신 죽죽비(新羅忠臣 竹竹碑)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신라충신 죽죽지비(新羅忠臣 竹竹之碑)


이 비의 비문은 합천 출신으로 진주 목사를 지낸 한강 정구의 제자인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가 지었고

1644년(인조 22년) 합천군수 조희인(曺希仁)이 세운 것이다.
죽죽(竹竹)은 삼국사기에 '대야주 사람으로
찬간의 벼슬을 한 학열(郝熱)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화랑이었다.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의 휘하에서 그를 보좌하는 역활을 하였다.





죽죽비각중수기(竹竹碑閣重修記)





삼국통일의 기틀이 이곳 대야성 싸움에서 비롯하였으니 나라를 위하여는 죽음을 두려워 않으며

싸움터에서는 물러 섬이 없고 벗과는 오로지 믿음으로 사귄다는 신라 화랑의 넋을 담은 죽죽의 충성이 여기 꽃 피었도다.

님의 거룩한 뜻을 새긴 비석과 비각은 비 바람에 깍이고 씻겼으나 님의 이름과 같이 꺽일줄 모르는

충성의 얼은 천 삼백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도록  이 고장 주민들의 마음의 등불이요, 자랑이도다.

님의 충혼을 위로하고 그 뜻을 받들어 모시려고 이 고장 젊은이들이 모여 여기 이 조그만 비를 세웁니다.

서기 1970년 7월 17일

합천청년회의소




신라충신 죽죽비(新羅忠臣 竹竹碑)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이 비는 642년(신라 선덕여왕 11)에 대야성(大耶城)에서 전사한 죽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신라의 대야성은 642년에 윤충(尹充)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포위 되었다.

이때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에게 아내를 빼앗긴 검일(黔日)이 창고에 불을 질러 성안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에 전의를 잃은 김품석은 부하인 죽죽의 만류를 뿌리치고 항복하였다.

그런데 백제군이 항복하러 나온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리자 김품석은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였다.
 
죽죽은 남은 병사를 거느리고 싸웠으나 백제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 이름을 지은 것은 추울 때에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 항복하리요”라고 말하고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죽죽의 이런 충절(忠節)과 용맹을 들은 선덕여왕은 그에게 급찬(級湌)의 관등을 내리고 그 처자들을 왕도(王都)로 옮겨 살게 하였다.
 
높이 1.4m, 폭 54cm의 화강암으로 세운 이 비석은 죽죽의 충절을 기리고 그 뜻을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1644년(인조 22)에 합천군수 조희인(曺希仁)에 의해 건립되었다.

비문은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 1591~1658)가 지었다.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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