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앵봉(鶯峰) 2019. 7. 28. 04:30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 국보 제18호)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浮石寺 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










부석사 무량수전 편액(浮石寺 無量壽殿 扁額)

 

부석사 무량수전 편액은 공민왕(恭愍王, 1351~1374 재위, 고려 제31대 왕)의 친필을 판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이 무량수전 편액 친필을 남긴 시기는 1361(공민왕 10)에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왕이 경북 안동으로 피난해온 시기에 남긴 것으로 보인다.

현재 현판 뒤에는 묵서명이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옛날 신라 의봉 원년에 부석사를 창건하였는데 금당의 액자 글씨는 공민왕이 쓴 것이다.

경오년(1690)에 왕족인 낭선군이 부석사에 와서 그 액자를 건 뜻을 쓰고,

신미년(1691) 여름에 이 절 화승 영필이 마음먹고 액자 테두리를 다시 만들었다.

(粵在新羅儀鳳元年創建浮石寺, 金堂題字, 恭愍王之親筆也, 當此庚午之時, 國族朗宣君到于浮石寺,

題于符板之意, 命其書鎭云, 到于辛未孟夏間, 寺畵僧瑛珌慨然傾心四雪角改造也)”라고 적혀 있다.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16371693)는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의 편찬자로 선조의 손자이다.

또한 무량수전 서쪽 부석에는 선원록 봉안사 낭원군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낭원군(이간,李偘,朗原君, ? ~ 1699)은 낭선군의 동생으로

16819월초에 간인(刊印)선원보략의 제작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따라서 부석의 낭원군 각석은 선원보략이 만들어진 1681년 이후

1690년 낭선군이 부석사에 왔을 때를 즈음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무량수전 편액은 1358년 왜구의 병화로 무량수전이 소실되면서 재건의 움직임이 있을 즈음

공민왕이 부석사를 방문하여 편액에 사용할 글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현판의 정확한 연대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유추해 볼 때,

1361년 이후 1377년 무량수전이 중건될 즈음에 제작되어 걸려 있다가

1691년 오늘날의 모습으로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 기단의 명문


무량수전 동쪽 석면에 새겨진 명문에는 충원 적화면 석수 김애선(忠原 赤花面 石手 金愛先)이 기단석을 정리했다.’고 되어 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浮石寺 塑造如來坐像) - 국보 제45호




국보(國寶) 제45부석사 소조여래좌상(浮石寺 塑造如來坐像)



국보(國寶) 제18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浮石寺 塑造如來坐像) - 국보 제45


이 불상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상(塑造佛像)인데,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불상 높이는 278cm이며,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일반 사찰과는 달리 법당 중앙의 정면이 아닌 서쪽에 마련된 불단(佛壇) 위에 모셔져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법당이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 ' 원융국사비' 비문에 "좌우에 다른 보처(補處) 보살을 모시지 않고

아미타불 한 분만 모셨다"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통일신라시대 불상 조형을 충실이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온몸에 금빛이 화려하며,

고려 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수법을 보이는 걸작이다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 - 국보 제18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당(本堂)으로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모시고 있다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 현종 7(1016)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고쳐지었으며, 고려 공민왕 7(1358)에 외적에 의해 불에 타,

고려 우왕 2(1376)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지었다.

조선 광해군 3(1611)에는 폭풍우로 건물 일부가 파손되자 이를 복구하였으며,

이후 1916년에 해체. 수리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앞면 5,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기둥은 중간이 굵고 밑이나 위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는 배흘림기둥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물인 공포(栱包)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와 형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장식적인 요소가 적은 간결한 형태이나 건물 규모나 완성도 면에 있어서 장엄하고 깊이 있는 법당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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