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앵봉(鶯峰) 2020. 4. 2. 04:30

칠궁(七宮) 특별관람 - 사적 제149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면적 27,150. 이곳은 원래 1725(영조 1) 영조가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신위를 모시고

숙빈묘(淑嬪廟)라 하다가 뒤에 육상묘(毓祥廟)로 바꾸었으며, 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된 곳이다.

그 뒤 1882(고종 19) 불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다시 세웠으며,

1908년 저경궁(儲慶宮대빈궁(大嬪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경우궁(景祐宮)

5개의 묘당을 이곳으로 옮겨 육궁이라 하다가 1929년 덕안궁(德安宮)도 옮겨와서 칠궁이라 하였다.

칠궁은 동서로 줄지어 있고 이에 따른 행랑, 2채의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동쪽으로부터 배열된 칠궁의 순서와 모셔진 신위의 내용을 보면,

육상궁: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1718)

연호궁: 추존된 왕 진종(眞宗)의 생모 정빈 이씨(靖嬪 李氏, 1694 ?~1721)

덕안궁: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 엄씨(純獻貴妃 嚴氏, 1854~1911)

경우궁: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綏嬪 朴氏, 1770~1823)

선희궁: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1764)

대빈궁: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701)

저경궁: 추존된 왕 원종(元宗)의 생모 인빈 김씨(仁嬪 金氏, 1555~1613) 등이다.

건물을 둘러싼 정원에는 냉천정(冷泉亭), 초가집으로 된 정자, 늘어진 소나무, 긴 돌로 짠 연못과 축대,

벽돌담 등이 잘 어울려 있어 우리나라 정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칠궁 특별관람


문화재청에서는 20196월부터 12월까지 칠궁을 시범개방 한 이후

20201월부터 휴궁일(월요일)을 제외한 화~토요일 매일 7회씩 칠궁을 개방하고 있다.

특별관람은 매주 화~(5) 17회 시간제(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로 운영한다.

개인은 시간별로 현장접수(무궁화동산 안내부스)하고,

10인 이상 단체는 경복궁관리소 누리집(http://www.royalpalace.go.kr)에서 예약하면 된다.

관람료는 무료이다. 관람객은 개인별로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 후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





칠궁 외삼문(七宮 外三門)




대소인원 개하마비(大小人員 皆下馬碑)


조선시대에는 누구든지 대소인원 개하마비 앞을 지날 때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가진 비석이며

이는 궁가(宮家), 종묘(宗廟), 문묘(文廟) 등의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신분에 따라 1품 이하는 10, 3품 이하는 20,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내려서 걸어 지나가게 되었다.






송죽재(松竹齋)




재실(齋室)


재실은 제례를 준비하는 건물이다.

재실에는 풍월헌(風月軒)과 송죽재(松竹齋)라는 두 개의 현판이 동서로 걸려 있으며,

연결채로 이어진 뒤편에는 삼락당(三樂堂)이 있다.

삼락당과 풍월헌은 1753(영조29)에 영조가 육상궁(毓祥宮)에 예를 올렸다는

기록들이 처음 보이므로 이 무렵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호궁(延祜宮)

연호궁은 추존 왕인 진종(효장세자)의 어머니이며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靖嬪 李氏)의 사당이다.

정조는 영조의 명에 따라 효장세자의 뒤를 계승하여 왕으로 즉위하였다.

정조가 즉위 후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1778(정조 2) 정빈 이씨의 사당을 북부 순화방에 세웠다.

연호궁은 1870(고종 7)에 육상궁 안의 별묘로 옮겼는데 현재와 같이 한 건물 안에 숙빈 최씨와 합사된 내력은 분명하지 않다.

 

육상궁(毓祥宮)

육상궁은 영조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사당이다.

영조는 1724년에 즉위한 뒤 현재의 위치인 경복궁 북쪽에 사당을 세우도록 명하고 1725년에 숙빈묘(淑嬪廟)가 완공되자 신주를 모셨다.

1744(영조 20)에 기를 "()" 상서로울 "()"을 사용하여 육상이라는 묘호를 올리고,

1753(영조 29)에는 묘()에서 궁()으로 격상시켜 육상궁이 되면서 현재와 같은 사묘 제도의 형식을 갖춘 것으로 파악된다.

육상궁에는 1878(고종 15)1882(고종 19)에 화재가 두 차례 있었다.

특히 1882년 화재 때 냉천정에 모셨던 영조의 어진은 송죽정으로 옮겨 모셨으나

사당 내 숙빈 최씨의 신주와 옥책, 은인 등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복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안청(移安廳)


이안청은 신주를 임시로 보관하던 곳으로, 육상궁과 연호궁 앞쪽에 동서로 대칭되게 마주보고 있다.










냉천(冷泉)


냉천정 뒤편에 있는 우물로 제사 때 이곳의 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 냉천에서 흐르는 물은 수로를 따라 냉천정 앞 네모난 연못으로 흘러든다.

냉촌 북쪽의 석축에는 영조가 냉천과 냉천정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냉천 북쪽 장대석에는 재위 3년째가 되던 17273월 육상궁에 거둥한 영조가 지은 오언시가 새겨져 있다.




자연(紫淵)


냉천정 남쪽 아래에 있는 네모난 연못으로 냉천에서 나오는 물이 이곳으로 흘러 들어 간다.

화강암의 장대석을 쌓아 만들어졌으며 가로 7.5m, 세로 6.3m. 수심 0.9m이다.

연못의 남쪽면에는 "자연(紫淵)"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 연못의 이름이 자연임을 알 수 있다.





냉천정(冷泉亭)


건립 기록이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으나, 숙빈묘라는 명칭으로 육상궁이 처음 건립된 영조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 두 칸은 온돌방, 동쪽 한 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다. 영조가 어머니의 제사를 준비하고 휴식을 취한 장소이다.

영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라 봉안각이라 하였으나, 순조 이후 냉천정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냉천정이란 당호는 옆에 냉천이라는 우물이 있어 붙은 것이다.







저경궁(추존왕 원종의 어머니이자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의 사당)

대빈궁(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사당)

선희궁(영조의 후궁이자 추존 왕 장조인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사당)

경우궁(순조의 어머니이자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사당)

육상궁(영조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사당)

연호궁(추존 왕 진종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사당)

덕안궁(영친왕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후궁인 순현 귀비 엄씨의 사당)으로

일곱 분의 신주가 선희궁과 경우궁, 육상궁과 연호궁에는 각각 사당 한 채에 두 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어 사당 건물은 모두 다섯이다.

나지막한 담이 둘러싸여 있는 동쪽 육상궁 권역과 네 개의 사당이 있는 서쪽 권역은 사당이 서로 접하여 서있다.

그중 중심이 되는 대빈궁은 경종의 어머니이며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옆에 나란히 자리한 사당과는 계단과 기둥에서 차이가 있다.  




덕안궁(德安宮)


덕안궁은 영친왕의 어머니이며 고종의 후궁인 순헌 귀비 엄씨(純獻 貴妃 嚴氏)의 사당이다.

순헌 귀비 엄씨는 1897(광무1)에 영친왕을 낳은 뒤 귀인으로 책봉되었고,

고종이 엄씨가 거처할 궁을 경운궁(慶運宮, 현재의 덕수궁) 안에 지어 경선궁(慶善宮)이라 하였다.

1900(광무 4)에 순빈(淳嬪)에 봉해졌으며, 1901(광무 5)에 순비(淳妃),

1903(광무 7)에 황귀비(皇貴妃), 1910(융희 4) 순헌 귀비로 진봉되었다.

1911년 순헌 귀비 엄씨가 세상을 떠난 뒤 경선궁을 덕안궁이라 개칭하였다.

1913년 태평로에 사당을 새로 지어 옮겨 모셨다가 1929년에 육상궁으로 옮겼다






대빈궁(大嬪宮)


대빈궁은 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禧嬪 張氏)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경종은 1722(경종 2) 희빈 장씨의 사당을 경행방 교동에 건립하였다.

1870(고종 7)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졌으나 1887(고종 24)에 원래대로 경행방으로 옮겼다.

1908년에는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겼다.





경우궁(景祐宮)


경우궁은 순조의 어머니이며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綏嬪 朴氏)의 사당이다.

1822(순조 22) 양덕방 계동에 사당을 세워 경우궁이라 하였고 이듬해 신주를 모셨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고종이 이곳에 머물렀고, 1886(고종 23)에는 경우궁을 인왕동으로 옮겨 지었다.

1908년에 신주를 육상궁 안으로 다시 옮겨서 현재는 선희궁과 한 건물에 있다.


선희궁(宣禧宮)

선희궁은 추존 왕 장조(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는 1794(영조 40)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1765(영조 41)에 순화방에 사당을 세우고 의열묘(義烈廟)라 하였다.

정조가 1788(정조 12)에 묘호를 선희궁으로 고쳤다.

1870(고종 7)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졌으나 1897(고종 34)에 원래 있던 순화방으로 옮겼다.

1908년 다시 육상궁으로 옮겨서 현재는 경우궁과 같은 건물에 있다





저경궁(儲慶宮)


저경궁은 추존 왕인 원종의 어머니이자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 金氏)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인빈 김씨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을 낳았다. 인조는 반정으로 즉위하면서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존하였다.

영조는 1743(영조 19) 인빈 김씨의 사당을 원종의 옛집이었던 송현방에 마련하였다.

이후 종실인 이증(李增)의 집으로 옮겨 모셨다가

1755(영조 31)에 다시 송현방으로 옮기면서 저경궁이라 개칭하였다.

1870(고종 7)에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 안 별묘에 모셨다가

1908년에 육상궁으로 옮겼다.









수복방(守僕房)


수복방은 냉천정을 바라보며 서쪽에 길게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육상궁에 딸린 시설이었으며 1753(영조 29)에 육상묘가 육상궁으로 승격되면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宮女?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따르면, 궁녀(宮女)란 궁중 여관(女官)의 별칭으로

상궁(尙宮) 이하의 궁인직(宮人職) ,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 관리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는 상궁(尙宮)과 나인(內人)만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그 아래 하역을 맡은 무수리, 비자(婢子), 의녀(醫女) 등이 모두 포함된다.

무수리는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던 여인들로 민간의 아낙네들이었다. 

무수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영조(英祖)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 崔氏),

무수리로 궁중에서 지내다가 숙종의 은총을 입어 숙빈(淑嬪)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여인이다.

무수리는 순 한글로 한자로는 수사(水賜)라 표기하였다. 무수리가 출,퇴근하는 반면

비자(碑子)는 붙박이로 각 처소 또는 상궁의 살림집에 소속된 하녀를 일컬으며,

의녀(醫女)는 일명 여의사로서 궁중의 내의원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여순경의 역할과 잔치 때 무희(舞姬)의 역할도 겸하였다. 

 

宮女의 일

궁녀들이 일하는 부서로는 지밀(至密), 가장 지엄하고 말 한마디도 새어 나가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과 안사랑, 대청 등의 곳에서 왕과 왕비를 보필한다.

왕과 왕비의 옷, 이불을 만드는 침방(寢房), 음료와 과자를 만드는 생과방(生果房),

소주방(燒廚房) 중 안 소주방은 아침, 저녁의 식사를 관장하고, 밖 소주방은 잔치 음식을 만들었다.  

세수간(洗手間)은 왕과 왕비의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고, (요강), 타구, 매화틀(便器) 등의 시중을 담당하였다.

세답방(洗踏房)은 빨래와 다듬이질, 다리미질, 염색까지 그 뒷손질을 맡았다.

이들은 궁궐 내의 대전(大殿, 의 침소), 내전(內殿, 中殿의 침소), 대비전(大妃殿)

그리고 세자궁(世子宮, 東宮) 등으로 각각 소속되어 일을 수행하였다. 

 

宮女의 자격 

宮女가 되려면 왕을 가까이 모셔야 되고 또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궁녀의 선출 조건은 무척 까다로웠다

궁녀는 각 부서별로 나이가 달랐는데 지밀(至密)4~5, 침방과 수방은 7~8,

그 이외의 부서는 13세 미만으로 어린 나이에 뽑혀 들어왔다. 

궁녀의 출신성분은 조선초기에는 관청의 여종이나 기첩의 소생이었으나,

점차 양가집 규수들이 궁녀로 선발되게 되면서 이를 피하려고 딸이 10세 이상만 되면 조혼(早婚)시키는 등의 페단이 생기기도 하였다.

후일 경종(景宗)에 이르러 양가집 규수의 궁녀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궁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처녀성(處女性)이 확인되어야 했다.

이것은 12, 13세의 당시로서는 성숙한 나이의 경우에만 실시하던 것으로

앵무새의 피 한방울을 팔에 떨어트려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 해서 탈락시켰다. 효과는 모르지만 실제 그리 하였다.

 

궁녀와 후궁을 포함해서 궁궐에서 근무하는 여인들을 내명부(內命婦)라고 하였는데, 맡은 일에 따라 품계가 나눠져 있었다.

1"()" 이하로 부터 종4품 숙원(淑媛)까지는 의 여자인 후궁을 말하며,

궁녀는 정5품에서 종9품까지 10등급으로 나뉘며, 그 업무에 따라 품계가 달랐다. 

궁녀가 궁궐에 들어와 15년이 지나면 견습 나인(內人)들은 관례식을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궁녀로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관례식은 곧 成人으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궁녀에게는 이 관례가 사실상 혼례이기도 하였다.

 

궁녀는 을 위해 평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에게 시집가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관례식을 치른 궁녀는 스승 상궁으로부터 독립하여 두 명씩 짝지어 한 방을 쓰며 살았는데,

동거하는 궁녀들끼리 간혹 동성연애를 하기도 하였다. 

 

궁녀들의 월급 

궁녀들은 소위 여성공무원이었기 때문에 나라로부터 녹봉을 받았다.

매월 정기적인 보수로 쌀 세말과 그 외 옷감 등도 특별히 하사되는 경우가 있었다. 돈으로 받기도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순종때 지급되었던 월급명세서를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당시 가장 많은 보수이었던 196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약 200만원 정도라고 한다.

궁녀들은 업무와 년차, 품계에 따라 월급을 차등 지급 받았던 여성 공무원이었다.

궁녀들의 최대 희망은 성은(聖恩)을 입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평생을 갇혀 지내야하는 궁녀들. 그들에게 희망은 성은을 입는 것 즉, 과 성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왕의 총애를 받아 성은을 입게되면 시중을 드는 입장에서 시중을 받는 입장으로 그 위상은 물론 대우도 달라진다

후궁 역시 왕비처럼 간택을 해서 뽑기도 하였지만, 궁녀들은 일의 특성상 왕을 가까이 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간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궁녀가 성은을 입고 왕의 자녀들을 낳게 되면 종4품 숙원(淑媛)에서 높게는 정1품의 빈() 즉 후궁의 자리에 올라 갈 수 있었다

그러나 5~600명의 수 많은 궁녀들 사이에서 의 눈에 띄어 총애를 얻는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대신 그것은 권력을 잡는 길이기도 하였다





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 곳 - 칠궁(七宮)


칠궁은 근래에 와서 붙여진 명칭으로 조선시대에 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이곳은 원래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를 기리기 위해 1725(영조 1)에 지은 사당으로 처음에는 숙빈묘(淑嬪廟)라 하였다.

이후 1744(영조 20)상서(祥瑞)로움을 기른다는 의미로 육상(毓祥)이라는 묘호를 올렸고,

1753(영조 29)에 궁()으로 승격하여 육상궁(毓祥宮)이 되었다.

영조는 재위기간 중 200여 차례나 육상궁을 방문하였다.

조선 후기 도성 안 육상궁 외에도 왕을 낳은 후궁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 여럿 있었다.

고종과 순종 때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의 신주를 옮겼고,

1929년에 덕안궁을 옮겨 와서 육상궁에는 일곱 분의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선희궁과 경우궁, 육상궁과 연호궁에는 각각 두 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어서 신주는 일곱이지만 사당 건물은 모두 다섯이다.

동쪽 육상궁 권역에는 나지막한 담이 둘러싸고 서쪽 권역에는 네 개의 사당이 서로 접하여 서 있다.

이 두 권역 사이에 냉천정과 냉천, 자연이라는 네모난 연못과 뒤쪽의 산자락이 어울려 한국식 정원의 전형을 이룬다.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더불어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당을 어떻게 짓고 운영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여기에서는 매년 10월 넷째 주 월요일에 칠궁제(七宮祭)’를 지낸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1-1

 



사업자 정보 표시
| | | 사업자 등록번호 : -- | TEL : --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