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앵봉(鶯峰) 2020. 4. 9. 04:30

병인박해순교지, 로사리오의 천주교 남양순교성지


남양성모성지는 병인년(1866) 대박해 때 많은 순교지들이 피 흘리며 죽어간 무명순교지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치명일기(致命日記)와 증언록에 기록이 전해지는 남양의 순교자는

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돌 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 네 사람뿐이다.

남양 순교지는 다른 순교지와는 달리 무명 순교자들의 치명터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오다가, 1983년부터 성역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작은 정성들을 모아 가꾸어져 오던  남양 순교지는

1991107일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성모께 봉헌되고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되었다.

또한, 화성시에서 화성8경 중의 하나로 지정. 홍보하고 있을 만큼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남양순교성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화강암의 대형묵주알, 그리스도왕상, 성모동굴, 오솔길 소자상, 요셉성인상 등이 있으며,

아늑하고 성스러운 분위기 조성을 위한 성지 조성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 성모님 품 같이 아늑하고 포근한 경관을 지닌 곳으로

시민은 물론 전국의 천주교 신도들의 순례지 겸 휴식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남양성모성지 홈페이지 http://www.namyangmaria.org/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성지로 112 (남양리)  






































남양성모성지(南陽聖母聖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라고 해도 될 만큼, 교회가 창설된 이래로 100여 년 동안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를 비롯한 많은 박해가 있었다.

특히, 병인년 대박해 때에는 1만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가 났는데,

당시 교우의 총 수가 23천여 명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얼마나 잔학한 박해였는지를 알 수 있다.

바로 이 병인년 대박해 때 남양 도호부에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순교하였다.

 

묵주기도 가운데 이름없이 죽어간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자조선조 당시 남양은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행정과 사법권을 부여받은 종삼품의 도호부사가 다스렸다.

박해 당시, 남양 포교들이 잡아들인 천주교인들 중, 양반 신분인 분들은 한양이나 공주로 이첩이 되어

그곳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지만, 신분이 낮은 분들은 남양부사의 재량에 맡겨졌다.

남양 부사는 모진 매질로 배교를 강요하다가 이에 응하지 않는 신자들을 바로 지금의 남양성모성지 자리에서 목매달아 죽였다.

치명일기와 증언록에는 남양의 순교자들로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정 필립보, 김홍서 토마 네 분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전하고 있지만,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로 미루어 더 많은 신자들이 남양에서 순교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첫째,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에서 공부하다가 열병으로 숨진 최방제 프란치스코 신학생이 남양 사람이었다.

둘째, 한국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베드로의 손자로 1868, 외국인 주교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국내 인도를 도왔다는 죄로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한 이재의 토마 순교자가 성장한 곳이 남양부의 백학 교우촌이었다.

셋째,황사영 알렉산델의 전교로 입교하여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제관득도

남양 구포의 조카 집에서 숨어 지내다가 18015월에 체포되어 1803년에 순교했다.

넷째, 백학과 활초리 등 주변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남양 지역내에 있는 백학 교우촌은 앵베르 주교의 의견으로 성당을 짓기 위해 닦았다는 성당터가 오늘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여러 곳에 교우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어 1839년 이전 갓등이와 동시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남양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전래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상의 사실들로 남양에는 일찍부터 신앙이 전파되었다는 것과,

조선조 당시 이곳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살거나 왕래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남양 포졸들이 멀리 충청도에까지 가서 신자들을 붙잡아다 처형했던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분명 더 많은 순교자들이 남양에서 처형되었을 것이다.

 

순교자(殉敎者)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1812~1868)

김 필립보는 충청도 면천 중방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들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부친의 반대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훗날 그의 부친이 마음을 돌려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게 되면서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영세하게 되었다.

장성한 뒤 박 마리아와 혼인한 필립보는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본분을 잘 지키게 하였으며,

다른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는 이후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필립보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수원 걸매(현 충청남도 아산시 걸매리)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오매트르(Aumaitre, ) 신부에 의해 다시 회장으로 임명된 필립보는 한결같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필립보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충청도 신창 남방재로 피신하여 살았다.

1868년에 다시 박해가 성하게 되자, 필립보는 홍주 신리에 살던 사위의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남양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남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아내 박 마리아는 필립보와 포졸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고 하면서 자원하여 따라나섰다.

이들 부부는 남양 옥에 한 달 정도 갇혀 있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고 교회 일은 하나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6883일 부부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들 부부는 동갑으로 57세였다.


정 필립보 (? ~ 1867)

경기도 용인의 덧옥돌에서 살았는데, 186611월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붙잡혀

가혹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해 1867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김홍서 토마(1830 ~ 1868)

수원 걸매리 사람으로 1868년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아내와 함께 붙잡혀 남양으로 끌려왔다.

아내는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김홍서 토마는 끝내 배교치 않고 김 필립보 부부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배교한 아내는 김홍서 토마가 순교하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순교자 김홍서 토마의 나이는 3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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