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앵봉(鶯峰) 2020. 7. 3. 04:19

세마대 중건기(洗馬臺 重建記)

 

독산성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고성으로서 선조 25년 임진왜란 시

삼남의 용병 13만 대병이 일시 집결하였던 요새지이다.

그후 도원수 권율장군이 유진하여 식수 부족의 위기 모면책으로서

백미로 백마를 목욕시키는 양의 묘안이 병법으로서

왜적 3만 여명을 격퇴하고 3천병마곡에서 격멸하였다.

그후 이곳에서 권율장군은 변이중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최초의 화포를 발명 제조케하여

이 화포로 행주대첩의 대과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후 조정에서는 이곳에 세마대를 장엄하게 세우고

석대산을 세마산이라 칭하여 병기창을 두어 무예연습을 하게하고

방어사 유진장 독산성별장 등을 서수하였다.

영조 26년 9월 26일 대왕이 친림 순행하시고 군기 수련을 엄명하시어

더욱더 완강하고 비조불입의 석성이 둘러싸여 금성 천부지지라 하셨다.

정조 16년 10월 3일에 세마대를 중수하였고 지성 지효하신 대왕은

부왕을 인근인 융릉에 모시고 세마산을 향로봉이라 칭호하셨다.

수원유수부 중군도가 되고 군부 중심지가 되어 3백여호로 대촌의 도심지가 되었다.

경술년 한일합병 후 왜인은 세마대를 파괴하고 주거민은 각처로 분산되어

현재는 보적사와 폐허로 된 황성과 성문만이 남아있다.

풍진 풍유 50여 년 만에 초석만 남은 옛터에 단기 4290년 8월 15일을 기하여

독산성 세마대 고적중건위원회의 위원장 유희훈에 의하여 세마대는 중건 복구되었고

산악지대 통행로 30여리의 신설도로와 산상의 대소광장 2개소가 신설되었다.

본 공사는 무너진 역사를 다시 빛내고 민족정기 앙양의 무언의 지침이 되기를 기원하여

자금난으로 누차 중단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고경에 처하였었으며

4개 성상에 긍하여 천신만고로 경비조달에 노력하였다.

본 공사비는 세마대공사비 434만 1,370환, 부수공사비 272만 5,000환을 합하여

706만 6,370환이 소요되었다.

그 재원은 국도비 보조금 150만환과 위원장의 희사금 285만 여환으로 충당하고

각계각층의 협조와 지방민의 노력으로서 준공의 영광을 보게 된 것이다.​

단기 4290년(서기 1957년) 8월 15일

화성교육감 정형모 근기

 

 

세마대 중건 경위서(독산성, 세마대고적중건위원회)

 

세마대(洗馬坮, 洗馬臺)

 

세마대는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승전과 관련하여 성 안 꼭대기에 세워진 장대(將臺)로

일제 강점기와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었다가

1957년 8월 15일 민관으로 구성된 ‘세마대중건위원회’에 의해

팔작지붕을 올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북쪽에는 ‘세마대(洗馬臺)’라는 현판이, 남쪽에는 ‘세마대(洗馬坮)’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중 남쪽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글씨를 썼다.

1831년 편찬된 “화성지”에는 세마대와 관련하여 ‘도원수 권율 장군이 독산성에 들어갔다.

성안에 샘이 적어 오래 지키기에 어려웠다. 적이 염탐하여

그것을 알고서는 급히 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권율 장군은 군사들에게 적을 향하여 말(馬)을 세우고 쌀을 흩날리게 부어 씻게 하였다.

그 모습을 본 왜적이 성안에 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포위를 풀고 갔다.

훗날 그곳을 세마대라 일컬으니 곧 지금의 장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 장대(將臺) : 장수의 지휘대

* 팔작지붕 : 네귀에 모두 추녀를 단 지붕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烏山 禿山城 洗馬臺址)​ - 사적 제140호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109,5m의 테뫼식 산성과 산 정상부에 복원되어 있는

권율 장군(權慄 將軍)의 승전(勝戰)과 관련된 장대(將臺)를 말한다.

독산성은 독성산성(禿城山城)이라고도 불리는데,

오산과 수원, 화성에 걸쳐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

주변을 두루 살 필 수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독산성은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승전으로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여주 파사성, 용진토성 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1594년)에 경기도관찰사 유근이 백성들과 함께

4일 만에 고쳐지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선조 35년(1602년) 방어사(防禦使) 변응성이 석성(石城)으로 다시 지었다.

정조 16년(1792년)에 약 70일간 새로 짓는 것과 비슷하게 큰 규모로 공사를 했고,

정조 20년 (1796년) 수원 화성(水原 華城)이 완공된 이후 협수체제(協守體制)를 구축하였다.

산꼭대기에는 세마대가 복원되어 있으며, 동문안에 보적사가 있다.

내부시설로 성문 5개, 치(雉) 8개 우물 1개, 수로 1개가 남아있다.

 

경기도 오산시 지곳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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