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나들이/영(嶺)현(峴)치(峙)천(遷) 재,고개

앵봉(鶯峰) 2020. 7. 9. 04:25

말티재 백두대간 속리산 관문 안내

 

대한 8경의 하나로 1970년 3월 24일 국립공원이 된 속리산 길목 해발 430m에 열두 굽이 말티재가 있다,

정상은 한남금북정맥 으로 고갯마루 동쪽은 남한강, 서쪽은 금강 수계 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남쪽 능선은 갈목재를 거처 천왕봉에서 백두대간과 만나고

북쪽 능선은 국사봉을 거처 미원고개를 지나 청주 상당산성으로 이어진다,

이 말티재는 신라 제24대 진흥왕 14년 (서기 553년) 의신조사가 인도를 다녀오는 길에

법주사를 창건하려고 흰노새 등에 불경을 싣고 넘어간 이래

1464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자비를 깨우치러 이 고개를 넘어 법주사로 갔으니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연과 애환이 서려 있을까?

혜공왕때 진표 율사는 금동미룩대불을 세우려고,

고려 태조 왕건은 고개길에 얇은 돌(薄石)을 깔고,

공민왕은 안동에서 홍건적의 난을 피한 후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려고,

조선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 10일 기도하러 이 고개를 넘어 법주사로 갔다.

3대 태종은 즉위 16년 심신을 다스리려고,

7대 세조는 즉위10년 훈민정음 주역 신미대사를 만나려고,

15대 선조 때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법주사로 집결하러 갈 때도,

인조4년 사명대사가 임진왜란때 불에 탄 법주사를 재건하려고,

구한말 당백전에 쓰려고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을 훼철하러 가던 사람들도,

1960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 부부도 연말마다 이 고개를 넘어갔다.

옛날 말티재길은 한. 두 사람이 오가던 오솔길이었으나 법주사가 세워지고 난 후

통행자가 늘어나 그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며

일제 강점기 1924년 충북지사 박중양이 신작로를 냈고, 1935년 도로 확장이 되었으나

현재 상.하행 각각 1차선 도로는 1966년 6월 김효영 충북지사가

당시 지역 국회 육인수 의원의 도움으로 국군과 미군장비 지원

보은군민 노력 동원으로 확.포장 되었다. (이하 중략~)

 

 

 

꼬불꼬불 12굽이 가파른 고갯길, 말티재(말티고개)

 

말티재(말티고개)는 보은에서 약7km 지점에 있으며, 속리산 입구에 위치한 해발 430m의 언덕이다.

현재의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이 속리산을 구경 오면서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

엷은 박석(薄石) 돌을 깐 것이 시초가 되어 지금의 말티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또, 조선 세조가 속리산으로 행차할 때에 외속리면 장재리에 있던 별궁(현 대궐터)에서

타고 왔던 가마를 말(馬)로 갈아탔다 하여 여기에서 말티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하고,

다른 설에 의하면 '말'의 어원은 '마루'로서 높다는 뜻으로

말티재는 '높은 고개'라는 뜻이 된다는 설로,

말 고개라는 뜻의 말티재가 되었다 라는 설이 있다.

속리산에는 오랫동안 존재한 박석 길이 유명하였는데

이 박석은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속리산에 구경 오면서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서 길을 닦도록 명하고

얇은 돌을 운반하여 3~4리나 깔은 것이 시초라 한다.

보은군의 전승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속리산에 거동하면서 처음 길을 닦았다고 한다.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속리산에 은거하며 불경을 탐독하다가 죽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 뒤 조선시대에 가서 세조가 속리산을 오를 때에도

진흙으로 된 길이라서 행차를 위해 얇은 박석을 운반하여 길을 정비하였다 한다.

그 뒤 인도의 형태로 존재하였지만 현대적인 형태의 등산로로 개설된 것은 1924년이었다.

당시 충청북도지사 박중양은 속리산의 사찰들을 방문하기 위해

속리산을 방문했는데 진흙탕으로 된 길을 보고 분개하여

당시 보은군수 등을 종용하여 말티고개로 올라가는 등산로를 포장하게 하였다.

이때 최초로 자동차와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길이 개통되었다.

그 뒤 1967년 도로폭을 15m 정도 확장시켰으며 1980년대에는 인도를 깔기도 했다.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장재리 산5-1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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