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앵봉(鶯峰) 2020. 10. 20. 04:25

오대산 상원사(五臺山 上院寺) 적멸보궁(寂滅寶宮) 문수성지(文殊聖地)

 

 

문수전(文殊殿)

 

문수전은 1947년 월정사 주지 지암스님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건물을 본떠 지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신미대사의 발원에 따라

세조가 상원사를 왕실의 원당으로 삼으려고 학열스님에게 친히 불사를 주관하게 했다.

학열스님은 세조11년(1465)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동서불전을 비롯하여

누각,나한전,청련당,승당,선원 등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 법당은 1946년 선원 뒤에 있던 조실에서 실화로 전소되고 1947년 새로 지었다.

한국전쟁 때 군인들이 법당을 불태우려하자

한암스님께서 목숨을 걸고 지켜낸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문수전 안에는 세조 때 조성한 목조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과 문수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우측으로는 동진보살상을 모셨다.

2002년 청량선원이 신축되기 이전까지 북방제일선원으로 수좌들이 수행 정진하던 곳이다.

 

 

고양이 석상(猫 石像)

고양이 석상은 조선 세조임금과 관련이 있다.

하루는 세조가 기도하러 상원사 법당에 들어가려하자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옷깃을 물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세조는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진 끝에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서 세조를 죽이려는 자객(刺客)을 찾아냈다.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세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 고양이를 잘 기르라는 뜻에서 묘전(猫田)을 하사했다.

요즘에는 고양이 석상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많은 분들이 고양이 석상을 만지며 소원을 빌고 있다.

 

세조와 문수보살 이야기

세조(世祖,1417~1468)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端宗,1441~1457)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며 형수인 현덕왕후(顯德王后,1418~1441)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1438~1457,추존德宗)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훼손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는 피부병에 걸렸다.

전신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등 잘 낫지도 않고 견디기가 무척 힘든 병이었다.

세조는 명의와 명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자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려 부처님께 참회기도를 올려 병이 낫기를 발원하였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 혼자 몸을 담고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지나가던 한 동자승에게 등을 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자승이 등을 밀자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자승에게

"그대는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는 말하지 말라"고 하니

동자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왕은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자승은 간 곳 없고

어느 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이렇듯 문수보살의 가피(加被)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 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다.

지금은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으나 목각상은 상원사 법당에 모셔져 있다.

세조는 고양이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고양이를 잘 기르라는 뜻에서

‘묘전(猫田)’을 하사하여 각지의 고양이를 집단으로 키우는 한편,

고양이 석상을 세웠는데 부처님을 모신 법당 앞에

두 마리의 고양이 석상이 있는 사찰은 상원사가 유일하다.

 

 

상원사 영산전(上院寺 靈山殿)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4호

 

영산전은 정면3칸,측면2칸의 맞배집으로,1

946년 화재가 났을 때 유일하게 화마를 피한 전각으로 오대산 내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법당에는 석가 삼존상과 십육 나한상이 봉안되었는데,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설법하시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서 영산전이라 한다.

용악헤견(龍岳慧堅,1830~1908)스님이 1899년 해인사의 고려장경 4부를 인출(印出)하여

삼보사찰에 각기1부씩 모시고 1부는 전국 유명한 사찰에 나누어 모셨는데,

그 중 일부인39함(函)이 여기 영산전에 모셔져 있었다.

현재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옮겨 보존되고 있다.

 

 

동정각(動靜閣)

상원사 동정각에는 신라 성덕왕 24년에 조성된 국보 제36호인 상원사 동종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음향도 맑고 아름다운 범종이다.

‘梵鐘閣(범종각)이 아닌 초서로“動靜閣(동정각)”이라 쓴 현판이 붙어 있는데,

동정각 편액은 탄허(呑虛)스님의 글씨이다.

탄허 스님은 일생을 거의 상원사에서 보내신 분이다.

스승인 한암 스님과의 3년에 걸친 편지 왕래 후 불가에 입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노장철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방대한 양의『화엄경』83권을 번역한

『신화엄경합론』의 출판한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었다.

 

상원사 동종(上院寺 銅鐘)-국보 제36호

현존하는 한국종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 종은

신라 성덕왕(聖德王)24년(725)에 조성되어 조선 예종(睿宗) 원년(1469)에 상원사에 옮겨진 것으로

한국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범종(梵鐘)이다.

음통(音筒)이 있는 종뉴(鐘紐)아래에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鐘身)이 연결된 형태인데,

이상적인 비례와 안정감 있는 구조,풍부한 양감(量感)과 함께세부적인 묘사 수법도 매우 사실적이다.

종신이 있는 상대.하대.4유곽(乳廓)의 문양은 모두 당초문(唐草紋)을 바탕으로

2~4인의 작은 비천상(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圈文)이 새겨졌고,

종복(鐘腹)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8판 연화문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자락을 흩날리며 공후(箜篌)와 생(笙)을 연주하고 있는데,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 사실풍(寫實風)의 불교조각 양식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상대.하대,4유곽 등의 구조적인 특징은

한국종의 전형(典型)이 되어, 양식적인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이후의 모든 종에 계승된다.

 

 

달마대사 목각상(達磨大師 木刻像)

 

 

오대산 상원사 운판(五臺山 上院寺 雲版)

 

운판은 예불을 드릴 때 중생교화를 상징하는 사물의 하나로,

허공을 나는 생명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치고 있는 의례 용구입니다.

오대산 상원사의 운판은 우리 조상들이 우주를 관찰하고 기록했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표현하여 우주법계의 중생들에게

불법을 알리려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또한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極樂淨土)와

약사여래부처님의 동방유리광세계(東方溜璃光世界)도 담았습니다.

 

 

오대산 상원사(五臺山 上院寺) 적멸보궁(寂滅寶宮) 문수성지(文殊聖地)

 

牛耳 書(우이 서)

신영복(申榮福, 1941년~) 선생은 경제학자이자 작가, 교수, 서예가.

쇠귀(牛耳)라는 호(號)로도 유명하며, 시대의 스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학자이다.

 

 

관대걸이

 

관대걸이는조선초 세조가 피부병 치료를 목적으로 상원사로 오던 중

계곡에서 목욕을 할 때 의관을 걸어둔 곳을 기념해서 후대에 만든 표지석으로

다음과 같은 문수동자와 세조의 전설이 전해집니다.

세조가 상원사 앞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동자승을 만나 등을 밀게하고는

“어디 가서 임금의 옥체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니

동자승은“임금께서도 문수보살이 등을 밀어줬다는 얘기를 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이후 세조는 피부병이 완치되었고, 그때 만난 동자승을 나무에 조각하게 하였으며,

이 목각상이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上院寺 木造文殊童子坐象, 국보 제221호)입니다.

 

 

오대산 상원사(五臺山 上院寺)

 

강원도 오대산의 중대(中臺)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보천과 효명이 창건한 사찰로

705년(성덕왕4)에 창건하여 진여원(眞如院)이라 하였다.

이 진여원은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왕자가 창건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에 들어간 두 왕자 가운데 형인 보천은

중대 남쪽 진여원 터 아래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北臺)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 두 형제는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오대에 나아가 항상 공경스레 예배를 드렸으며,

날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茶)를 달여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공양하였다.

마침 신라의 왕이 죽자 나라사람들이 오대산으로 와서 두 왕자를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보천은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효명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왕위에 추대하였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난 705년 3월 8일 진여원을 처음으로 세웠다.

그 뒤 보천은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하였고,

그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였다.

또, 결사의 이름은 화엄사(華嚴社)라고 하였고 복전(福田)7원(員)을 두게 하였으며,

그 경비는 가까운 주현(州縣)에서 주었다고 한다.

고려시대는 어떠한 역사를 거쳤는지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동문선』의 「오대상원사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고려 말 이 절은 극도로 황폐해 있었다.

그때 나옹(懶翁)의 제자 영령암(英靈庵)은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보고 중창(重創)의 원을 세웠다.

판서 최백청(崔伯淸)과 그의 부인 김씨(金氏)가 그 뜻을 듣고 재물을 희사하였으며,

1376년(우왕2)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가을 낙성을 보았다.

그 해 겨울 선객(禪客) 33명을 모아10년 좌선(坐禪)을 시작하였는데,

5년째인 1381년5주년 기념법회를 열자, 승당의 불상이 방광을 하고 향내음을 풍겼다.

중창주 김씨 부인은 이 사실을 목도하고 더욱 불교를 믿는 마음이 지극해졌고,

토지와 노비를 시주하여 상원사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척불정책 속에 전국의 사찰이 황폐되었지만,오히려 이 절은 더욱 발전하였다.

척불정책의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은1401년(태종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할3칸 집과 2칸의 목욕소를 만들었다.

그 해 겨울11월 태종은 사자암에 왕림하여 성대한 법요식(法要式)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때 태종은 권근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佛恩)에 젖고 유명(幽明)이 함께 의지하기 위함이니,

경은 기문(記文)하여 구원(久遠)한 세대에게까지 알게 하라.”고 하였다.

또한, 이 절은 세조가 문수동자(文殊童子)를 만나 괴질(怪疾)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일화가 서려 있는 세조의 원찰(願刹)이기도 하다.

이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상원사를 중창하게 된다.

1465년(세조11) 학열이 공사의 총감독을 맡았고, 인수대비(仁粹大妃)는 경상감사(慶尙監司)에 명하여

쌀500석을 내어 강릉부(江陵府)로 운반하게 하고, 비단1,000필을 함께 내어 공사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1466년상원사의 낙성식을 가졌는데, 크게 동서로 나눈 가람형식에 각각 상실(上室)을 지었다.

남쪽에는 다섯 칸의 누각을 짓고 범종을 안치하였으며,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서쪽에는 청련당(淸蓮堂)을 지었다.

청련당의 서편으로는 재주실(齋廚室)을 지어 승당(僧堂)과 선원(禪院)으로 삼았다.

석조(石槽)와 집기(什器)등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유물들은 이때에 마련된 것이다.

그 뒤 인수대비는 탱화를 봉안하기 위하여 다시 조(租)150석을 하사하고,

신미를 초대 주지로 모시게 하였다.

세조도 상원사의 역사가 이룩된 다음 상원사에 들러 의발(衣鉢)과 좌구(坐具)등

수선(修禪)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사하였다.

그 해52명의 선객을 모아 수선을 시작하였다.

예종은 세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1469년(예종1)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고,

전대에 하사한 전답에 대해서는 조세(租稅)하는 것을 금하였다.

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되어 온 이 절은 1946년 선원 뒤에 위치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侍奉)의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되었다.

1947년 당시 월정사의 주지였던 이종욱(李鍾郁)에 의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하였다.

동북45도 방향의 이 절은 전면 8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이다.

6·25전쟁 때는 이 절을 지키면서 수행 정진하던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에 의해

월정사 등의 다른 오대산 사찰과는 달리 전화를 면하였으며,

현재까지 전국 수도승들의 요람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ㄱ’자형 선원을 중심으로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靈山殿),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후원(後院) 등이 있다.

선원은 청량선원(淸凉禪院)이라고 하는데,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선원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살상, 국보 제221호로 지정된 목각문수동자상, 3구의 소형 동자상,

서대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목각의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주처(住處)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산물이다.

이 상은 세조가 직접 친견하였다는 오대산 문수동자의 진상(眞像)을 조각한 목조좌상이다.

이 동자상의 자세·수인(手印)·의문(衣文) 등은 불상과 동일하지만 얼굴 부분만은 동안(童顔)으로,

두발을 위에서 두 가닥으로 땋아 동자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동자상에서는 총23점의 유물이 나와서 보물 제793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또한, 선실 바깥 마루에 안치되어 있는 신중상(神衆像)은 일명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신중들이 탱화로서 봉안되어 있는 데 대해,

이곳만이 유독 조상(彫像)으로 조성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높이 85㎝, 무릎폭 35㎝의 목조상으로서 머리에는 구름무늬의 보관을 썼고,

좌우 손은 문수동자와 같은 수인을 취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의문은 투박하고 굵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전신을 무겁게 감싸고 있고,

가슴과 무릎, 다리 부분 등 여러 곳에 영락 등의 장엄구를 드리우고 있다.

형태는 완전히 의자형으로서 목제의자에 앉아 있다.

두 발 역시 투박한 신발에 싸여 군의(裙衣) 밖으로 나와 있으며,

조각수법은 대체로 경직된 맛을 보이고 있으나 특이한 신중상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이 상의 조성연대는 세조의 상원사 중건연대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적멸보궁(寂滅寶宮)과 선원,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 종각인 동정각, 후원 등이 있다.

영산전은 선원 뒤쪽에 있다. 선원 화재시에 불길을 모면한 유일한 건물이다.

산내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으로서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전내에는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고,

또 세조가 희사한 『고려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39함이다.

영산전의 옆에서는 화강암 석재들이 출토되어 현재 법당 옆에 쌓여 있다.

이 탑은 사방에 삼존(三尊)의 불보살을 가득 새겼으며,

옥개(屋蓋) 등에 층급을 나타내지 않고 낙수면에는 단순히 연화를 조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청량선원 옆에는 희귀한 당우가 있다.

승사(僧舍)로 사용되는 소림초당으로서 전면 6칸, 측면 4칸의 일반형 팔작집이다.

소림초당 앞에는 종각이 있다.

이곳에는 국보 제36호로 지정된 국내 최고(最古)의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이 있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1211-50 (동산리)

대한불교조계종 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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