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충청북도 내고장구석구석살펴보기

옥산면 덕촌리 문절공영당(玉山面 德村里 文節公影堂)

댓글 5

통합청주시/흥덕구

2014. 5. 24.

 




문절영당(文節影堂)이 자리한 옥산면 덕촌리는 하동정씨들이 대성을 이루며 사는 동네이다.

 

평야가 넓으며 북쪽과 남쪽이 모두 하천이 흐른다. 자연마을에는 반곡, 보촌, 광담말, 광촌, 서촌, 괴동, 신기, 지월, 삼성골, 팔모종, 미평이 있다. 보촌은 수로계 도랑인 보가 지나간다고 해서 지어진 명칭이다. 광촌은 빛이 비친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서촌은 과거에 서당이 있었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괴동은 옛날에 괴목과에 속하는 느티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신기는 새로 생긴 동네라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삼성골은 하루에 세 번씩 반성을 한다는 것에서 생겨난 지명이다. 팔모종은 팔모정이란 정자가 있었어서 그 이름을 딴 것이다. 미평은 미호천 제방을 따라서 세워진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청주에서 옥산시내로 진입하며 좌측으로 이정표를 따라 5분여 거리에 덕촌리가 자리하고있다.

옥산시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예전에는 농촌도시였는지 몰라도 지금은 도농점이지대로 농촌의 풍경은 많이 찾아 볼수가 없다

 

덕촌리로 접어들면 느티나무 정자를 보며 우측으로 마을안으로 진입하면 문절공 정수충의 영당이 자리하고있다.

홍살문이 있으며 외부에는 숭현문이라는 현판을 걸고 외삼문이 자리하고있다

 

 

정수충(鄭守忠)은 자 경부(敬夫). 시호 문절(文節). 경사(經史)에 밝아 환관들을 가르치는 데 선발되었고 뒤에 왕명으로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세종의 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1439년(세종 21) 경창부승(慶昌府丞)이 되고 1450년 문과에 급제, 사예(司藝)를 거쳐 1453년(단종 1) 행사용(行司勇)을 지낸 뒤 1455년(세조 1) 세조의 등극을 도와 좌익(佐翼)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사성(司成), 1457년 제학으로서 하원군(河原君)에 봉해지고, 이 해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자 3년간 수묘관(守墓官)을 지냈다. 이어 중추원첨지사를 거쳐 1463년 대사성이 되고 좌찬성에 이르러치사(致仕),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대구의 청백서원(淸白書院)에 제향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856년에 중건하고 1982년에 보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간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다. 그 앞에는 숭현문(崇賢門)’이라는 편액을 건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내부에는 1856년(철종 7)에 지은 영정중모기(影幀重模記)가 있는데, 영정과 함께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외부에는 하원군문절공정수충의 사적비가 자리하고 있으며 주차시설도 마련되여있다.

 

 

 

문절영당(文節影堂)은 1769년(영조 45)에 정수충(鄭守忠)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영정은 1455년(세조 1)에 그린 좌익공신도상(左翼功臣圖像)을 황해도 금천의 종가에서 1767년(영조 45)에 모사하고 1856년(철종 7)에 이덕명(李德明)이 다시 모사한 것이다. 관복차림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가로 63㎝, 세로 120㎝의 설채견본(設彩絹本)으로 문중에서 따로 보관하고 있다. 영당에 봉안되어 있는 영정은 1989년에 이자문(李自文)이 모사한 것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 문절영당(文節影堂)에 있는 조선시대의 영정 및 필사본. 비단 바탕에 채색. 조선 전기의 문신 정수충(鄭守忠)의 영정 및 이 영정의 중모(重摹) 내역을 기록한 필사본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여있다.

정수충의 영정은 그 도상이 현재 좌익공신상의 모습을 전해 주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청원(淸原) 문의영당(文義影堂) 소장 신숙주상(申叔舟像)과 언뜻 상통되는 듯한 특징들을 보여 주고 있다. 오사모(烏紗帽)의 모정(帽頂)이 높고 뾰쪽하며 양 날개가 길고 가늘어서 아래로 八자처럼 늘어져 있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단령(團領 : 깃을 둥글게 만든 공복)의 소매가 좁고 목 부분에 드러난 중의(中衣)가 푸른색이며 단령의 아래 자락이 좌우로 넓게 퍼져 있는 것도 흡사하다. 조선 중·후기의 초상화들이 통상 어깨보다 허리 부분이 더욱 넓어서 신체가 마름모 형태를 취하였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정적이고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이와 달리, 어깨가 넓게 벌어지고 허리 부분이 잘록하며 치마가 좌우로 넓게 퍼져서 신체가 크게 상하 두 덩어리로 이분되면서 다소 동적이고 호방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15세기의 초상화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의답(椅踏)의 윗면에 돗자리를 표현하지 않고 전체를 푸른색으로 칠한 것도 신숙주상과 같다. 그러나 교의자(交椅子)의 팔걸이가 조각 장식처럼 기형화되어 있고 받침대도 없다. 뿐만 아니라 교의자에 묶인 끈 매듭이 생략되어 있는 점이나, 흉배가 조악한 내용의 쌍학 흉배인데다가 목화(木靴)를 푸른색으로 채색한 점 등은 신숙주상과 다른 모습이다.

따라서 이 정수충의 영정은 15세기 좌익공신상의 원본을 충실히 전하고 있다기보다는 후대의 이모(移模) 과정에서 상당 부분이 왜곡되고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정중모기≫에 의하면 이 영정은 1865년에 화사(畵師) 이덕명(李德明)이 중모한 것이다.

중모의 원본은 금릉(金陵)의 종가에서 봉안해 오던 영정이며, 1769년에 이모해 왔던 것이라 한다. 금릉 봉안본은 6.25 피난 시 분실되어 현전하지 않는다. 화법은 다소 조악한 가운데 19세기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배채법(背彩法)을 매우 전면적으로 사용하여 거의 모든 색을 동일 채색으로 배채하고 있다. 얼굴은 흰색기가 많은 분홍색을 배채하였다. 그 다음 3단계 정도의 농담과 굵기 변화가 있는 먹선으로 윤곽선과 주름선을 선묘(線描 : 선으로만 그림)하였다. 그 뒤 주름선 주변을 붉은색으로 가볍게 선염(渲染 : 색칠할 때 한쪽을 진하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엷고 흐리게 하는 일)하여 명암을 표현했다. 연분(鉛粉 : 白粉)을 사용했기 때문인지 오른쪽 뺨과 코 부분이 흑갈색으로 변색되었다. 단령은 붉은기가 도는 분홍색을 배채한 위에 농담 차이가 적은 중묵 필선으로 윤곽선과 주름선을 서서히 잡은 다음 다시 그 위에 가늘고 짙은 먹선을 덧그어 강조하였다.

주름선 주변에는 농담의 차이를 주어 가며 붉은색으로 선염하여 명암을 표현하였다. 그 뒤 안감이 노출된 부분에 푸른색과 붉은색 진채(眞彩 : 진하고 강하게 쓰는 채색)를 후채하였다. 단령의 옷주름 필선은 신숙주 상보다는 덜 양식화되어 신체의 입체적 구조와 단령의 다양한 표정을 보다 상세히 포착한 편이다. 흉배는 아래쪽에 파도문과 화초문을 그리고 위쪽에 구름을 그린 뒤 중앙에 학 두 마리를 그리되 배경의 상하변에 청색과 홍색으로 동그란 점을 수없이 장식하였다. 모든 색을 배채한 다음 위에서 다시 진채로 후채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매우 조악하고 안료의 질이 다소 낮아서 조선 후기의 통상적인 쌍학 흉배의 도상이나 풍격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사모는 농담 변화가 없는 짙은 농묵(濃墨 : 짙은 먹물)으로 전면을 칠하였다. 그리고 삽금대(鈒金帶)는 금분을 입혔다.

비단의 가장자리에는 네 변을 따라 자주색 필선으로 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다. 이는 중모 시 원본의 크기를 전하려는 배려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단은 올이 가늘지만 조직은 매우 듬성한데 폭이 좁아 세 번을 결봉하여 사용했고, 아교를 많이 올려 표면이 매우 번질거리는 편이다.

현재는 액자 표구로 개장되어 원래의 족자 모습을 잃은 상태이다. ≪영정중모기≫는 이 정수충의 영정을 이모하고 봉안한 내력과 소요 물품 및 경비를 상세히 기록한 필사본이다. 크기는 27.5㎝x32㎝이며 선장정(線裝幀)이다. 먼저 1판부터 2판까지는 영정 중모의 전 과정이 요약되어 있다.

영정이 퇴락하여 1851년부터 1855년까지 문중에서 14,800문(文)의 경비를 모았다. 그 뒤 마침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황간현(黃澗縣 : 영동군 황간면)에 와 있던 삼가현(三嘉縣 : 합천군 삼가면)의 화사(畵師) 이덕명(李德明)을 초빙하였다.

그리고 강당(講堂)의 서재방(西齋房)에서 1856년 2월 23일부터 3월 8일까지 중모하였다. 3월 10일 사당에 봉안하였다. 3판부터 6판까지는 초상화 중모 및 화가에게 들어간 품목과 경비가 기록되어 있다.

서울에서 사온 비단 10척 5촌이 4량 1전이고, 채색 값이 20량이며, 화가에 사준 담배(南草) 2근이 3전 2푼이라는 등 세목별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당시의 제작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6판 뒷면부터 마지막의 9판까지는 영정을 다시 사당에 봉안할 때 소용된 물품과 경비 및 의식 담당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정수충영정및영정중모기 [鄭守忠影幀─影幀重模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