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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면 가곡리 은진임씨효열문(陽山面 柯谷里 恩津林氏孝烈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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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바람소리/영동군

2017. 5. 26.







영동군 향토유적 제 43 호 이 효열문은 이집(李集)의 효행과 그의 부인 은진임씨의 곧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고종 22년(1885)에 세웠다. 이 집의 본관은 인천, 자는 대성(대성), 호는 죽전(竹田)이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효행이 뛰어나 숙종 때 생원(生員)에 올랐다. 임씨는 시예(詩禮)를 잘하였고, 용모가 뛰어났으며,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는데, 남편이 죽자 장례를 치르고 나서 혼인 때 입었던 옷으로 갈아 입고 자결하였다. 목조 기와집으로 한칸의 맞배집이다. ※ 생원(生員) :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하나인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사람. 이들에게는 성균관에 입학 할 수 있는 자격 및 하급관료로 취임 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됨.



영동군 향토유적 제 43호로 1997년 7월4일에 지정관리되고 있다.

유적의 명칭은 은진임씨효열문이며 주소는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169번지이다.학산농협 옆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곡리는 양산면에 속한 법정리이다. 평지가 매우 넓은 지역이다. 남서쪽에는 낮은 산지가 이어지고 있지만 북쪽에는 금강이 동서로 굽이굽이 흐르고 있다. 자연마을에는 갓골(가곡)이 있다. 갓골은 비봉산 동쪽 날가지에 있어 가지골, 줄여서 갓골이라 부른 것이다. 가곡리[Gagok-ri, 柯谷里] (두산백과)



효열문안에는 효자성균진사이집지려열녀선인은진임씨지려(孝子成均進士李集之閭烈女宣人恩津林氏之閭)라고 적혀있으며

上之 22년(1885년) 을유5월(乙酉5月)에 정려되였다.


이집(李集)의 본관은 인천이며 자는 대성(大成)이며 호는 죽전(竹田)이였다.

판관 시신(詩愼)의 5대손으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효행이 남달리 뛰어나 숙종대에 생원의 벼슬자리에 앉게 되었다.

임씨는 본관은 은진이며 동표(東標)의 딸로 인천이씨인 집(集)의 아내로서 부인은 시예(詩禮)를 잘하였고 요모 또한 남달리 뛰어났으며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남편에게 순종하였다.남편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에절을 맞추어 장사를 치루고 나서 내실로 들어가 혼인때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자결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에 조정에서 남편 이집에겐 효자를 부인 임씨에겐 열녀를 정려하였다.[영동군지]



양산면은 충청북도 영동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이다. 금강 수계인 호탄천이 천태산에서 발원하여 면의 중앙을 흐르다 면의 남부를 동서로 가르며 흐르는 금강 본류에 유입된다. 천태산 · 마니산 · 노고산 등으로 둘러싸인 산간 곡지에 위치한다. 관내에 천태산 영국사와 양산 8경이 있어 관광지로 유명하다. 면 중앙으로 68번과 501번 지방도가 경유하고 있으나 외부와의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현재 가곡리 · 원당리 · 호탄리 · 누교리 · 봉곡리 · 죽산리 · 송호리 등 9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면 소재지는 가곡리이다.

지명은 고려 시대까지 존속했던 양산현()의 명칭에서 유래한 면 지명이다. 『삼국사기지리지』(상주)에 "영동군
은 영현()이 둘이다. 양산현은 본시 조비천현()인데 경덕왕이 (양산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라고 기록되어 관련 지명이 처음 등장한다. 『고려사지리지』(경상도 상주목 경산부 양산현)와 『신증동국여지승람』(옥천)에도 유사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를 통 해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양산'이란 지명이 생성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면은 조선 시대 양내면 지역으로 당시 군의 경계가 영동현의 남부로 길게 뻗어 있던 견아상입지()의 형태였다.

조선 시대 양내면은 『여지도서』에 누교리() · 호탄리() · 현리() · 원당리()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각 동리의 관문으로부터의 방향과 거리, 편호, 남녀 인구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 『여지도서』에 기록된 '현리()'와 '양산', 그리고 『대동여지도』와 『1872년지방지도』에 표기된 '양산'과 '양산시()'라는 지명을 통해 19세기 후반까지 지속되고 있던 과거 양산현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 밖에 『해동지도』와 『동여도』에 양내면이 표기자 변화 없이 기록되어 있다.

구한말의 양내면은 16개 리를 관할하였으며, 1906년(광무 10)에는 현재의 학산면
과 용화면 일대와 함께 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다. 『신구대조』에는 양내면을 포함하여 양남일소면의 모리 일부와 남이면의 중심동을 통합하여 과거 양산현의 이름을 취해 양산면이라 명명하고 9개 리로 새롭게 개편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양산면[陽山面, Yangsan-myeon]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2010. 2., 국토지리정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