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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면 역동우선생기적비(大崗面 易東禹先生紀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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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바람소리/단양군

2018. 8. 23.




역동 우탁 선생의 행적을 기록한 이 기적비는 그가 청유하였다는 사인암(대강면 사인암리)에 있다. 건립 연도는 1974년이며 글쓴이는 김우규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적비는 사인암이 보이는 냇가에 소나무와 어우러진곳에 자리하고 있다.




<易東禹先生紀蹟碑>
於戱易之義其大矣至矣乎哉我祭酒文僖公禹先生博通經史尤深於易故諸遺史嘗奉使中州天子賜之以易又與其學士論其疑學士大驚曰吾易東矣則易之東先生而至退陶李子尊之爲百世師範設易東書院以獨祀之自是後之學者稱之爲易東先生錦溪黃先生俊良之丹陽也重鄕校立小祠於其傍以祀先生以規模儀典一出於退陶所指敎者益以丹爲先生鄕也今丹陽郡李永得與鄕儒爲先生樹紀念碑於校宮之前康秉殷池聖準等諸銘於家源其辭曰宇內萬學儒經最易與範也爲大範云箕來實芒杳易之東傳史甚暾祭酒先生麗士寥寥千載獨壇美程傳初到無知者究􄦠月而得之也􄦠哉先生丹之産雲林淸福無限退陶會想道妙錦祠傍子廟丹巖院己爲草世遠俗倭古道時撫遺獨起遐想哀所同安爲傍琢此穹碑竪聖域精靈此降涉丹水情兮丹山壽先生之道與久歲辛亥十月
頃後文學博士辰城李家源謹撰擬建校前此地平日杖所及樹之豊壤趙興九謹識西紀一九七四年甲寅五月日
後學延城後人金佑奎謹書



우탁은 1262(원종 3)∼1342(충혜왕 복위 3).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단양(). 자는 천장() 또는 탁보(·), 호는 백운()·단암(). 세상에서 ‘역동선생()’이라 일컬어졌다. 시조 우현()의 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으로 증직된 우천규()의 아들이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이 되었다. 이 무렵 영해에는 팔령()이라 이르는 신사()가 있었다.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을 극진히 받들고 있었으며, 자주 제사지내고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했는데,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는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통간하자 백의()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해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정이()가 『주역』을 주석한 『정전()』은 처음 들어왔을 때 아는 이가 없었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 만에 터득해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경사()에 통달했고, 『고려사』 열전에 ‘역학()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아주 뛰어난 역학자였다. 또한 시조 2수와 몇 편의 시가 전하고 있다.

조선조에 와서 이황()의 발의로 1570년(선조 3) 예안에 역동서원()이 창건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훼철당했다가 1966년 복원되었다. 또 다른 서원인 구계서원()은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시호는 문희()이다.

우탁[禹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