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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 2011. 7. 18. 20:42

국립경주박물관 특집진열 “만파식적과 옥피리” 개최

 

 

 

 

국립경주박물관은 7월 19일(화)부터 9월 18일(일)까지 소장하고 있는 옥피리 두 점을 선보입니다.
박물관 소장 두 점의 옥피리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5년 8월에 국립박물관에 입수된 것으로 조선시대 문인들의 여러 문집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옥피리를 신라 신문왕대의 대나무피리(만파식적)와 같이 적을 물러나게 하고 병을 치유하는 신이한 기물(神物)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고대의 ‘만파식적’에 대한 기원과 소망을 옥피리가 고스란히 이어받았던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만파식적’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문화재에 표현된 천인이 연주하고 있는 피리를 참고하여 그 모양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파식적’은 아니지만 천인이 불고 있는 피리가 천상의 세계를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피리를 비롯한 악기들이 매우 신성시되었으며 그 소리가 바로 하늘과 통하는 음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전시는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두 점의 옥피리에 담긴 선인들의 인간적 정서를 느껴볼 수 있는 유익한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옥피리, 길이 55.0cm, 47cm, 국립경주박물관

 

 

 옥피리보관함 길이 59.5cm, 국립경주박물관

 

 

옥피리를 소개합니다.

 

옥피리에는 바람을 불어 넣는 취공(吹孔)과 떨리는 소리가 나는 청공(淸孔)이 있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아 음률을 만드는 지공(指孔)이 있습니다.

 

1706년 경주부윤 이인징이 아홉 구멍이 뚫려있고 둥글고 곧은 것은 대나무를 본 뜬 것이라고 쓴 것을 보면, 아마도 이 검은색 옥피리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X선으로 촬영한 결과, 검은색 옥피리는 부러진 곳을 은으로 두 군데, 동으로 한 군데 감싼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두 점의 옥피리는 지금의 대금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두색 옥피리의 경우 칠성공의 수가 많고, 옥피리 두 점 모두 취공은 타원형이 아니라 둥근 원을 그리고 있어서, 대금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만파식적과 옥피리

 

신라의만파식적(萬波息笛)온갖 풍파를 잠재우는 피리입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이 감은사(感恩寺)에 행차한 뒤 이견대(利見臺)에 들렀는데 이 때 해룡(海龍)이 나타나 흑옥대(黑玉帶)를 바쳤다고 합니다. 이 해룡의 말에 따라 바닷가에 떠 있는 산 위의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소중히 보관하였습니다. 그 뒤 적군이 쳐들어오거나 병이 났을 때, 또는 큰 가뭄이 들거나 홍수 및 태풍이 불었을 때, 이 대나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모든 일이 평정되었으니 이 피리를만파식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이 옥피리를 신라의 보물, 만파식적으로 여겼습니다. 조선 연산군 때 편찬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99)에는 동해의 용이 신라왕에게 이 옥피리를 바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또한 한문건(韓文健, 1765~1850)고려 태조가 이 옥피리를 갖고 싶어 했으나 조령(鳥嶺)을 넘자 소리가 나지 않는다하여 신라에 대한 충절을 나타내는 기물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 경주 사람들은 옥피리를만파식적과 같은 신물(神物)로 생각하였습니다. 옥적이 조령을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신라 지역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옥피리의 충절로 여긴 것입니다.

심지어는 옥피리가 바로 만파식적이며 경주를 한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다고까지 생각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만파식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옥피리가 고스란히 이어받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옛 기록에 보이는 옥피리

 

조선 전기 이석형(李石亨, 1414~1477)의 계림옥적(鷄林玉笛)이라는 시에 신라의 옥피리가 등장합니다.

1530년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옥피리의 길이가 한 자 아홉 치인데, 그 소리가 맑다. 속설에는 동해 용이 바친 것이라고 한다. 역대 임금들이 보물로 삼아 전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문인들의 글 속에 등장하였던 옥피리는 1582년의 화재로 훼손· 유실된 것으로 보이고, 비슷한 옥적이 이후에 다시 발견됩니다.

 

1707년 객사의 무너진 토담 속에서 김승학(金承鶴)이라는 이가 옥피리를 주워 숨겨 놓았다가 발각되어 관아로 가지고 왔는데, 경주부윤 이인징(李麟徵,1643~1729)은 이 옥피리를 신라의 유물로 추측하였습니다.

 

의성김씨 운천 종택에도 옥피리가 전해 내려오는데, 그 보관함의 뚜껑에 1804년 김희주(金熙周, 1760~1830)가 쓴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는 자신의 옥피리가 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이 남긴 두 개의 옥피리 중 하나일 것이라고 하면서, 경주에 전해 내려오는 옥피리와 유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전시된 연두색 옥피리와 관련하여부선생안府先生案(1843)에는 서울에 사는 접위관(接慰官) 이인석이 동래에 왔다가 되돌아가는 길에 옥피리 한 개를 경주부(慶州府)에 전하면서동도(東都)의 옛 유물이니 악부(樂府)에 간직해 두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피리 소리로 하늘과 통하다.

 

신라 사람들은 피리가 곧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지봉유설芝峯類說,동경잡기東京雜記등에는 경주에 전해지는 옥피리를 신라의 보물로 인식하는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바래지 않았던, ‘만파식적이 가져올 평화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만파식적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천인(天人)이 연주하고 있는 피리를 참고하여 그 모양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만파식적은 아니지만 천인이 불고 있는 피리 또한 천상의 세계를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피리를 비롯한 악기들이 매우 신성시되었으며 그 소리가 바로 하늘과 통하는 음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201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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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피리의 구조

 

 

 

옥피리보관상자

 

 

 

광해군때 다시 만들어진 옥피리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만파식적이라 불리는 옥피리

 

성덕대왕신종 형태의 자물쇠와 빈눨성,북두칠성.남두칠성을 새긴 바닥쇠

 

옥피리보관함의 장식(영상물을 촬영함)

 

상자의 자물쇠 부분에는 월성, 안압지, 첨성대 등이 선각으로 새겨져있고, 자물쇠 자체의 모양은 에밀레종의 모양을 본떴다고 한다.

 

 

그런데 1400년 가까이 되는 세월 동안 도대체 어떻게 이 물건이 지금껏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삼국유사에 잘 나와 있듯이 경주 월성의 천존고에서 보관하던 '만파식적'은 신라가 멸망하면서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바쳤다가, 고려 광종 때 경주에 객사 동경관을 새로 지으면서 이 건물로 옮겨 보관했다.

 

그러나 초기에 동경관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이 피리도 불에 타 세 조각으로 깨졌는데, 이것을 납으로 땜질하고 그 위에 은테를 둘러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연산군 때에는 연산군이 이를 조정에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냥 흐지부지 된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전해져 내려오던 이 옥피리는 다시 임진왜란 때 경주 관아가 쑥대밭이 되면서 없어졌다. 그 후 광해군 때의 경주 부윤이 '신묘한 옥피리가 없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면서, '옥피리의 옛 모습을 상고하여 새롭게 만들어 보관하라'는 명을 내리게 된다.

이이 노란색의 옥피리이다. 

 

 

이러다가 조선 숙종 16년인 1690년, 동경관에서 근무하던 향리 김승학이 폭우로 무너진 동경관의 담장을 보수하다가 전란 중에 누군가가 감추었던 것으로 보이는 문제의 옛 옥피리를 찾아낸다.

김승학은 죽을 때까지 이 피리를 집으로 가져와 몰래 보관하였는데, 그가 죽자마자 당시의 경주 부윤 이인징(李麟徵)이 그의 유족에게서 이를 압수하여 다시 동경관에 갖다 놓았다.

 

 

                     <옥피리가 들어있는 상자의 뚜껑에 새겨져 있는 내용과 '동경잡기' 등의 기록을 참조>

 

이 만파식적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공개적으로 알려진 것은
1909년 창경원에 '어원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의 시초)이 들어서면서였다. 

 

당시 경주를 방문했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통감이 "이런 진귀한 물건은 마땅히 어원박물관에서 수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처음으로 마침내 경주 땅을 벗어나 창경원 박물관에 전시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옥피리는 1929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들어설때 까지 서울에 계속 전시되었다.

식민사학자로 악명 높은 이마니시 류가 1912년에 이 물건을 감정하고 논문을 하나 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1929년, 다시 경주로 돌아온 이 옥피리는 1973년에 새로운 국립경주박물관 건물이 완공되어 박물관이 이사를 갈 때까지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과 금요대와 함께 밀폐 전시실에 놓여 전시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2011년에 국립걍주박물관 특별전에서 잠시 전시된 적이 있다 



 

 

솔뫼샘,더운 여름날 잘 지내고 계시지요.
중복날, 삼계탕 한 그릇 쭉 비웠는지요. 건강 조심하시고 여름 잘 나시길 바랍니다.
부산에서 칩거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