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설

soojee 2020. 1. 18. 22:09

다음날 아침.
       송도에서 숙소로 돌아온 한경진은 백병진이 투숙하고 있는

     소복호텔로 장거리 전화를 했다.
        장기 공급계약에 가능할 것 같아요
        정말이야?
        이혜린이 오빠에게 매달려 계약되도록 하겠다는 약속했어요
        어제 밤에 이혜린과 같이 있었나?
        조금 전에 돌아갔어요
        그 방에서?
        여자끼리 호텔에 가서 잘 수는 없잖아요
        그건 그래
        이혜린이 언제 또 이 방에 올지 몰라요. 거기다 그 애 질투가
     심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알았어. 연락은 사무실로만 하지
        조 사장께도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내가 제일을 위해
     일한다는 것 이혜린이 알게 되면 일이 망쳐져요
        미스 한도 조심해
        뭘요?
        이혜린에게 빠지지 말라는 뜻이야. 여자끼리 사랑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던데?
        그건 남자를 모르는 이혜린 같은 여자 얘기예요. 난 남자
     쪽을 훨씬 더 좋아한다는 건 알고 계실 텐데요
        그래. 그건 내가 잘 알지. 그래서 걱정이지만
        그건 걱정 안해도 돼요. 이혜린이 때문에 남자 곁에도 못
     가는 신세가 되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혜린이나를 대신해 경진이를 지켜 주는 꼴이
     됐군
       전화 저쪽에서 백병진이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평양상회 쪽 일은 조 사장과 협의해 처리하도록 해
        여수 쪽에 누구 보내 봤어요?
       백병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끊겠어요
       한경진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회장 비서실 문을 노크도 없이 와락 열렸다.
       이방 문을 노크 없이 열 수 있는 사람은 조정래 한 사람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여비서 최수진이 벌떡 일어났다.
        회장 있지?
        네
       조정래는 대답도 듣기 전에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차운 것 좀 주어
       하고 소리 쳤다.
       조정래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본 백병진이 무슨
     일이야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일 제분이 발행한 연수표가 예고없이 마구 돌아오기
     시작했어
       조정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조금 전 은행에서 연락이 왔어. 돌아온 총액이 2천3백5십만
     원이야. 잔고가 천만원 정도 부족하니 은행 마감 시간 전까지
     입급시켜 달라는 거야
        그럴 수가?
       수표는 은행에 예금해 놓은 현금을 이 증서를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 증서에 명시한 금액을 현금으로 지급해 주라는
     지출의뢰서다.
       수표는 은행에 잔고가 있을 때만 발행이 가능하다. 은행에
     예금이 없는 상태에서 수표를 하면 발행하는 그 순간 사기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은행을 통해 결재하는 은행발행 어음제도가 없던 시절
     기업들은 발행일을 한 달이나 두 달 후로 기재한 수표를 발행해
     어음 대신 활용했다.
       이것을 연 수표라 불렀다. 그러나 수표는 발행일과 관계없이
     은행으로 돌리는 그날로 결재가 가능하다.
       수표에 기재하는 발행일은 어디까지 발행 일 일뿐 지급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 수표는 주는 쪽과 받는 쪽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제일물산의 산하 공장인 제일 제분이 발행한 연 수표가 약속
     기일 전에 은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천만원 정도는 물산에 있지? 경리에 연락해 입금시키라고
     그러지
        내가 걱정하는 건 오늘 천만원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이상한 예감이라니?
        연수표를 약속 날짜도 되기 전에 돌리는 일은 그리 흔한 게
     아니야
        받아간 업자가 할인해 썼고 할인업자가 기한도 되기 전에
     돌린 거겠지. 요즘 그런 악질 사채업자가 많다는 소문이야
        사채업자가 아니라 세살 먹은 중국 아이야
        무슨 소리야
        제분수표를 돌린 예금주가 누군지 은행에 알아보았어.
     진려화라는 세살 난 중국 기집 아이였어
        뭐?
       백병진은 놀라 소리쳤다.
       백병진의 고함 소리는 냉 사이다 잔을 받쳐들고 들어오던 비서
     최수진이 놀라 걸음을 멈출 만큼 높았다.
        두고 빨리 나가
       이번에는 백병진이 최수진을 향해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거야?
       최수진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백병진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우리 연 수표만 골라 돌리는 자가 있는 것 같애
        연 수표를 돌린 예금주 이름이 세살 먹은 중국 아니라면
     배후가 북창동 화상이라는 뜻 아닌가?
        지피는 구석 없나?
       조정래의 말에 백병진은 지난해 연초에 있었던 설탕 사건이
     머리에 떠올랐다.
        진려화...? 산동공사 사장도 분명히 성이 진이었어
        무슨 소리야?
       백병진은 지난해 초에 있었던 설탕사건을 설명했다.
        그때 설탕을 판 화상이 진정동이라는 북창동 산동공사
     사장이었고 그 배후에 고진영이 있었다는 건가?
        배후에 고진영이 있다는 걸 확인한 건 아니야. 짐작으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거야
        자네 추측이 정확하고 이번 일에도 고진영이 배후에서
     조정한다면 사태는 심각해
        지금 발행해 놓은 연 수표 총액이 억대가 넘어섰지?
        시기적으로 좋지 않아. 지난번 달러 불하에 자금을
     동원한데다 남해안 건어물 만 오천 짝에 대한 선금을 주면서
     그쪽에도 자금이 묶여 있어. 정부 달러와 건어물 수출 달러로
     발주한 소비재가 들어오자면 아직도 한달 이상 기다려야해.
     배후가 있고 계획적이라면 우리의 자금이 어렵다는 걸 알고 한
     짓이야. 그건 앞으로 계속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야
        평양상회가 3개원 이내에 만 오천 짝을 주겠다고 나선 것도
     이상하다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건 우리가 한경진을 앞세워 이혜린을 통해 공작까지 한 일
     아닌가?
        상대가 한경진이 우리 쪽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가정도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가정을 해 보는 건 좋지만 너무 의심하는 건 좋지 않아
        조 사장. 자네는 개성 상인그룹 쪽 사채시장에 나가 동원할
     수 있는 사채는 모두 확보해 놓고 오게
        만일을 위해 그게 좋겠군
        저녁에 백화장으로 오게. 오늘 고 의원하고 노 의원을 초청해
     놓았어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