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 Telegraph (뮤직텔레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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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아트(Sound Art): 과연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무한한 영역의 세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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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예술

2020. 2. 21.


*photo: "Babel" by Kim Seung Young, Sound Effects Seoul Radio 2008 (Courtesy of SFX Seoul)



1) 사운드아트의 탄생 배경



인간의 예술적 오감(五感)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작동을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무엇을 인지할까? 어떤이는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이나 방 언저리에 걸려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고 말할 것이다. 다른이는 거실 TV에서 들려오는 아침뉴스 소리 혹은 창밖에 지저귀는 참새소리를 듣는다고 할 것이다. 혹은, 어느 늦가을밤에 실수로 창문을 열고자서 아침에 외부의 찬 바람이 피부에 거칠게 와닿는 느낌에 잠을 깰 수 있겠다. 그밖에, 좀 드문경우겠지만, 선반위에 올려둔 향수병이 떨어져 방바닥에 부딪쳐 깨지면서 향수냄새가 코를 찌르는 자극으로 잠을 깨거나, 어제 먹은 술이 입가에 아직 묻어있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술맛을 느끼는 경우도 있겠다. 어떤 경우이던지, 인간의 오감은(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작동을 시작한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에 잠을 깨었어도 곧이어 창밖의 새소리를 듣고, 방안의 찬공기를 피부로 느끼고, 깨진 향수병 사이로 새어나오는 진한 향수냄새를 맡으면서 동시에 어제 마신 막걸리의 맛을 아직 혀를 통해 느낀다. 물론, 과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인간이 자는 동안에도 오감은 계속 동작을 하고 있으며 단지 우리 뇌에서 오감의 반응에 대한 응답을 무의식중에 거절하고 있다는 정도의 추측은 누구나 가능하다. 하지만, 예술적인 견지에서 오감을 설명할 때에는 인간의 수면상태와 같이 현실에 대한 인지능력을 상실한 채 오로지 무의식과 생리적인 반응만이 존재하는 상태는 배제되어야 하겠다. 그 이유는, 예술에 있어서 오감이란 작가가 표출하고 싶은 주제를 현실세계로 표현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도구와 같은 역할을 하고 결과적으로 관객들도 오감을 통해서 작가의 작품을 현실의 세계에서 인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앞으로 언급되어지는 오감은 예술적 견지에서 바라본 오감이며, 사운드아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당연한 전제조건이 되겠다.




시각을 통한 갓난아기의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은 오감 중 제일 늦게 일어난다




다시 아침으로 돌아가보자. 위에서 보았듯이 오감의 다섯가지의 감각 중 하나의 자극만 충분해도 잠에서 깨어나는데 왜 유독 알람시계는 인간의 청각만을 자극하는 것들만 존재하나? 다시말해서, 왜 '소리'가 사람의 잠을 깨우는데 그토록 널리 사용되게 되었을까? 번쩍거리는 빛을 이용하거나 살갗을 자극하여 잠을 깨우게 하는 알람시계도 존재할법할 만도 한데 말이다. 참고로,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는 그 순간은 예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감각들이 잠에서 깨면서 부터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 감각들중, 청각이 그토록 인간의 잠을 깨우는 역할을 도맡아하게된 이유는 추측컨데 청각을 자극하는 '소리'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외부자극이 아닌듯 싶다.인간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로 성장하면서 볼수는 없지만 들을수는 있다. 임신중 태교를 목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거나 뱃속의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 자장가를 부르는 행위는 뱃속의 태아가 이미 청각의 기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이렇게 인간은 소리에 대해서 이미 친숙한 상태로 세상에 태어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젖을 빨아먹고 그리고 어머니의 살냄새를 맡으면서 자장가를 들으며 오감에 대한 인식의 문이 차례차례로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눈으로 보고 그 존재를 인식하는데 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시각이 열리는 순간 그동안 아기에게 친숙했던 어머니의 목소리, 냄새, 감촉, 그리고 따뜻한 모유의 맛이 순식간에 잊혀진다. 그리고 곧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어머니의 존재를 의심하고 두려워 하게 된다. 이렇게, 갓난아기의 시각을 통해서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로 인식하기까지에는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과 미각이 인식하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것은 왜일까? 왜 시각을 통한 외부세계의 인식은 다른 감각보다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발자국 소리에 대한 청각적 상상력은 시각을 통해 확인된 그 '실체'에 의해 소멸된다




우리는 때때로 서로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전화기로 상대방의 목소리만 듣다가 나중에 직접 그 상대방을 보고나서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재평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전화기에서 들리는 상대방의 목소리만으로 그 사람을 인식하는데에는 많은 상상과 불확실성이 따라다닌다. 전화를 끊고 우리는 곧 머리속에 상대방의 시각적인 이미지(외모, 분위기 등)를 오로지 청각적인 경험(전화통화를 통한 상대방의 목소리)에만 의지하여 그려내기 시작한다. 보통 이 상태에서 머릿속에 그려내는 이미지들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어왔던 나의 오감으로 세상을 인지해온 경험에 근거하여 상대방에 관한 여러개의 시각적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게 된다. 결국 그 상대를 직접 만나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에 그동안에 머릿속에 그렸던 다양한 상상의 그림들은 순식간에 소멸되고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남는다. 눈으로 확인된 그 실체는 곧 상대를 인식하는 대표적 꼬리표(즉, 아이덴터티)로 남아, 앞으로도 계속 그 상대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가장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로 남는다. 요컨데, 시각의 역할은 청각(촉각, 후각, 미각 역시 포함- 여기서는 주로 청각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이 글의 주제가 사운드아트 이기 때문이다.)으로 인식된 수많은 추상적인 상상의 개체들을 단 하나의 현실의 실체로 규정하는 것이다. 상상으로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은 자유롭고 동시다발적이다. 창밖에서 들리는 정체불명의 발자국소리로 우리는 단 몇 초 만에 여러개의 상상의 개체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편배달부, 강도, 얼마전 헤어졌던 여자친구, 외계인, 귀신 등등. 그런데, 그 발자국소리를 만들어내는 실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에 우리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그 '실체'를 좀 전에 청각을 통해 상상했던 여러 이미지들과 비교해보기 시작할것이다. 만약 그 실체가 상상했던 이미지들과 동떨어지는 것이라면 당황함 혹은 두려운 마음으로 시각을 통한 인지과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청각을 통해 경험했던 추상적 형상화 과정을 버리고 지금 현실에 보이는 그 '실체'에 집중하여 여태까지의 오감적 경험과 학습들을 총 동원하여 그 실체를 파악해나가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감의 선행적 경험이 지극히 적은 간난아이들이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시각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로 인지하기까지에는 무척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미각, 후각 등과 융합된 형태의 시각예술 '푸드 스타일링'




티비가 없던 라디오 시절에 스타로 군림했던 사람들이 티비에 방송되고 나서 부터 많은 팬들을 잃는 것은 그동안 그들의 팬들이 라디오를 통해 그려온 청각적 상상력이 시각의 기능으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지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어렸을때 즐겨 보았던 각종 환타지 만화영화(예를들어 동식물들이 주인공이 되어 다양한 상상의 세계에서 스토리를 펼쳐나가는 것 등)를 어린이들이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외면하고 보다 현실적인 드라마나 영화를 찾게되는 과정에는 그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청각적 경험에 주로 의존해왔던 간난아이때의 상상력을 시각적 경험의 축적으로 인해 현실의 '실체'에 보다 친숙해지면서 버리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내포되어 있다. 선천성 시각장애로 평생 맹인으로 살아온 스티비 원더는 자신의 신디사이저들을 이용해 소리로서 시각적인 소재들을 독특하게 표현한 작품들이 많은데 (예를들어 <You are the sunshie of my life>의 인트로 부분에 햇빛을 묘사한 배경음과 <Overjoyed>의 성곽을 쌓는 배경음 등), 이는 선천적으로 맹인으로 살아온 그에게 시각이 규정하는 현실의 실체로 인한 청각의 상상력을 잃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되어진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시각은 청각의 기능을 제한하여 청각적 상상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오로지 현실에 단 하나로서 존재하는 '실체'파악에만 이용되어진다면, 왜 지금 이시점에서 보면 청각예술이 시각예술을 이끌어가거나 더 나아가 자기 범주안에 시각예술을 포함을 못시킨채 오히려 부수적으로 시각예술에 보조적으로 쓰여지는 사례가 많은지 그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시각예술은 원시적인 동굴벽화에서 부터 사실주의, 초현실주의, 그리고 현대의 디자인과 비디오아트를 포함하여 오히려 인류에게 청각예술보다 더 많은 상상력과 새로운 심미적 자극의 요소들을 선물하였다. 반면에 청각예술은 시각예술처럼 구체적이고 혁신적인 발전을 통하여 인류에게 새로운 상상의 소재거리를 제공한 적이 드물다. 서양음악사만 봐도 그레고리성가 이후의 낭만파 고전파 그리고 현대음악과 비교적 최근의 실험음악(아방가르드 음악)까지 근본적으로 악기들을 사용한 음의 연주란 포맷은 변하지 않은채 주로 작곡과 연주의 형식만이 변화해왔다. 이는 앞서 언급한 청각이 가지는 무한한 상상력에 비하면 정말 작고 느린 발전이다. 시각예술은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시각적 표현방식의 한계점을 인식하고 청각적 요소의 도입을 시도하다(대표적 예로 영화를 들 수 있겠다) 현재는 오감을 모두 끌어들인 융합적인 형태의 예술형태(예를 들어 푸드 스타일링 이라던지 비디오아트)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음악에 있어서 소리의 새로운 청각적 의미를 제시한 존 케이지




그러나 청각예술이 가지는 무한한 상상의 잠재력을 재인식하려는 시도는 분명 있었다.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는 1952년 그의 작품 <4분 33초>를 통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소리의 상상력을 극대화 시켜 기존의 음악적 형식에 구속되는 소리의 음(音)에대한 종속성을 탈피하여 자유로운 감상을 유도해내었다. 이 작품은 연주가 진행되는 4분 33초 동안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아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무음(無音)의 퍼포먼스를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그 무음의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관람석에서 들리는 관객들이 무작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소음'이 곧 이 작품의 내용이 되며, 연주자의 침묵에 대한 관객들의 다양하고 예측불허한 반응들이 그 소음을 의미있는 '소리'로 탈바꿈시킨다. 여기서 주목할점은, 관객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은 연주자의 침묵에 대한 그들의 의미있는 청각적 상상력의 반응물로써 그 자체가 새로운 형태의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 케이지의 시도는 그 이후로도 많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독일의 저명한 전자음악 작곡가 슈톡하우젠, 폴란드의 서양음악 작곡가 펜데레츠키 등에게 기존의 음악적 형식에 구속되던 음(音)을 해방시켜 보다 자유롭고 광범위한 방법으로 청각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새로운 '소리'를 창작하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새로운 소리의 창작은 예술에 있어서 청각적 기능의 범위와 중요성을 넓혀왔고, 근래에 와서 많은 시각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에서 청각적인 소재와 기능을 도입하는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얼마전 타계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비롯해, 미국의 행위 예술가 비토 아콘치, 그리고 조각가이자 사진작가인 한나 윌키 등은 자신들의 작품에서 비쥬얼적인 요소에 사운드를 결합시켜 관객들과 보다 광범위하고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을 시도했던 아티스트 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언제까지나 시각예술가들이며, 그들의 작품에서 소리는 단지 그들이 보여주려했던 시각적 주제의 보조장치로만 사용되었을 뿐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청각이 시각의 우위에 있는 복합형태의 예술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며, 이들은 기존의 청각적인 요소를 포함한 비쥬얼아트와 구별되는 '소리의 광범위한 재인식'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이제 소리를 통한 거의 무한한 형태의 내적표현의 가능성 탐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예술의 한 장르로서 '사운드아트'가 탄생한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