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플루크 2006. 10. 5. 13:38

 

 

 

오늘 낮, 잠시 짬을 내서 영화 한편을 봤다. 김승우와 장진영이 주연한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란 영화였는데 거기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룸살롱 출신의 여자 연아가 자신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연우에게 ‘왜 수경이년은 되고 나는 안 돼? 라고 묻는다. 그러자 연우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한다. 한참을 그러던 연우는 겨우 한다는 말이 수경이는 너보다 먼저 만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연아도 관객인 우리들도 모두 연우가 하지 못한 그 대답을 알고 있다. 당차고 거침없는 연아는 연애하기는 그럭저럭 괜찮은 상대이지만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로서는 조신하고 얌전한 수경이 보다 한 수 아래라고. 아마 적지 않은 남자들이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연애는 어떤 여자와 하건 간에 결혼만큼은 현모양처가 꿈이거나 혹은 그에 가까운 여자와 해야 한다고. 그건 어쩌면 여자들이 애인은 가난해도 좋지만 남편감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 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내 친구 하나가 울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무려 6년을 사귄 남자친구가 이제 결혼을 해야겠으니 그만 만나자고 했다는 것이었다. 연아 식 표현에 따르면 쓴맛 단맛 다 빨아먹고 마지막에 뻥 차버린 것이니 내 친구는 아마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단순하게 헤어지자가 아닌 ‘이제 결혼해야 하니 헤어지자’ 라는 말 속에는 너는 연애 상대일 뿐 결혼 상대는 아니라는 뜻도 함께 들어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화끈하고 대차서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결혼용의 조신녀를 찾느냐고. 나는 원래 세상이 그렇다고 말해줬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녀의 남자 친구가 결혼상대로는 남자가 눈만 똑바로 떠도 찍 소리도 못하거나 아니면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라 생각하는 맹추 같은 여잘 찾겠다는데 말이다. 그녀도 나도, 그리고 우리 주변의 친구들도 다 그런 타입의 여자는 아닌 것을 말이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꽤 사랑한다고 믿었고 이대로 가면 젊은 남녀가 사귐질을 하고서 다다르는 마지막 종착지인 결혼얘기도 나올 수 있겠다고. 하지만 이런 내 기대는 보기 좋게 날아가 버렸다. 그 역시 나를 애인용으로는 만족스러워 했지만 결혼만큼은 좀 더 얌전하고 좀 더 기가 약하고 좀 더 여성스러운 여자를 원했던 것이었다. 비록 그가 말로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남자 경험도 훨씬 적은 여자를 원했을 것이다. 나와 연애할 때는 밀고 당기고 내숭떨고, 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연애는 지겹다며 나처럼 까놓고 시작하는 여자가 좋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다. 연애에는 지겨운 얘기들이 결혼에서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막 서른에 접어든. 그래서 대외적으로 결혼하라는 독촉에 슬슬 시달리기 시작하는 나 같은 부류의 여자들은 거의 이 대목에서 딜레마를 느낄 것이다.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살자니 연애는 가능하지만 결혼은 힘들겠고. 그렇다고 평생 안 떨던 내숭 떨고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순진 떨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고. 그건 마치 침대에서 ‘니가 첫 남자야’ 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뻔뻔스럽고도 낯간지러운 짓이다. 하지만 세상은, 아니 뭐 이렇게 거창하게 나갈 건 없고, 남자들은 이 뻔뻔함과 낮 간지러움을 원한다. 적어도 그들이 결혼을 생각할 때는 그렇다. 좀 놀아본 아내. 같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침대 위에서 뒹굴던 여자는 그저 연애 상대일 뿐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맥주 한잔에 얼굴이 빨개지고 담배는 냄새만 맡아도 켁켁거리며 섹스는 비록 그 경험은 있다 할지라도 그리 대수롭잖은 회수를 자랑하는, 그러면서도 예쁘고 착하고 성격 좋은 여자를 원한다.

 

 

대부분의 연애에서 나는 장사를 한 적이 없다. 길고 짧음을 미리 재어보지도 않았고 가벼울지 무거울지 미리 달아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이유는 늘 비슷비슷했다. 어떤 이유를 입으로 얘기했건 간에 나와 헤어진 이후 곧 나와는 퍽이나 다른 여자들을 만나서 결혼을 한걸 보면 그렇다. 그들이 그녀들에게 속았건 아니면 그녀들이 정말로 그들이 원하는 그런 타입의 여자들이건 간에 아무튼 그녀들은 나와는 참 다른 여자들이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나는 결혼식장에도 파란색 미니 드레스를 입을 것 같은 여자라면 그녀들은 눈부시게 하얀 웨딩드레스가 어울리는 그런 여자들인 것이다.

 

 

어쩌면 선택은 너희들의 몫이니 공정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숭을 떨기란 얼마나 쉬운가. 어차피 상대방은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아 줄 텐데. 그들이 하는 말에 조용히 미소 짓고 절대 잘난 척 같은 건 하지 않고 욕도 담배도 술도 입에 담지 않으면 된다. 그렇지만 그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그들을 속이기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속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인척 하는 것. 장소에 따라 적당하게 나를 바꿀 수 있는 것. 그건 어쩌면 사기꾼보다 더 사기꾼 기질을 가져야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섹시하고 포악하다가도 사랑 하나에 자기를 확 던지는 여자 연아는 결국 그녀의 말대로 첩년, 세컨드로 남게 된다. 연우는 연아 대신 보조개가 예쁜 조신하고도 얌전한 처녀 수경이를 택한다. 비록 결혼 후에도 연아를 잊지 못해 그녀를 찾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해서이지 연아를 위해서는 아니다.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건 혹은 욕정이라고 부르건 이기적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한결같다. 어차피 너는 결혼을 원하지 않잖아. 그래 그렇지. 우리 같은 부류의 여자들은 구속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는 무엇무엇 하지 않잖아 라고 말해버리면 더 이상 원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리고 혹시 원했다 하더라도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그래 난 그런 여자가 아니지 맞아 니 말이 옳아 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도 알까? 섹스할 때 아파하면 처녀도 아니면서 뭘 그러냐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말이다. 이쪽에서 전혀 반박할 수 없는, 반박하는 게 치사스럽고 궁스러워서 차라리 입을 다물게 되는 그런 일들이다.

 

 

어쩌면 이제 진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어릴 때 하는 난 평생 혼자 살래가 아닌. 정말로 평생을 혼자 살 것인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남자를 찾는답시고 평생을 헤매어야 할지. 벌써 눈치 빠르고 계산 정확한 것들은 다들 적당히 남도 자신도 속이면서 꽤 괜찮은 (적어도 겉으로는) 남자들을 꿰어 차고 유부녀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녀들은 도끼눈을 하며 우리를 바라본다. 내 남편 건드리면 재미없어 라고 말이다. 우리도 늦었지만 이제라도 하며 늙어 추할지라도 20대 초반 못지않은 내숭을 떨어가며 국보급 내지는 천연기념물 흉내를 내야하는 것일까? 그래서 한 남자의 아내로 그 위치를 곤고히 지켜가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계속해서 넌 원래 결혼할 타입의 여자는 아니잖아 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 것일까?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보면서. 나는 세상에 연애만큼 무거운 건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극장 문을 나섰다. 그 무거움에 내 어깨가 내려앉고 발등이 찍히며 허리가 굽는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도 또 연애를 한다. 누군가는 내 안을, 그리고 진짜 나를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정말 촌스러운 말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사람이 세상 어디엔가는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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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섹스칼럼니스트
블루버닝(blueburning76@namrod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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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남녀불꽃노동당 다음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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