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黃眞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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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9.

 

황진이(黃眞伊, ? ~ ?)는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이다. 중종·명종 때(16세기 초, 중순경) 활동했던 기생으로, 다른 이름은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인 명월(明月)로도 알려져 있다. 중종 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시와 그림, 춤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士大夫; 선비()와 대부(大夫)를 아울러는 말), 은일사(隱逸士;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들과도 어울렸다.

성리학적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많은 선비들과 이런 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실전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도 않아 대부분 인멸되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뛰어난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신분 특성상 황진이라는 이름이 정사(正史)에 등장하지는 않으며, 여러 야사(野史)들을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이 전해 내려온다. 성리학 지식도 해박하였으며, 학자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다가 실패했다고도 한다.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로도 불렸으며, 대표작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등이 있다. 조선시대 내내 음란함의 상징으로 여겨져 언급이 금기시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다.

 

 

생애

황진이의 정확한 출생년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506년 전후로 추정된다. 그녀는 개성(開城)에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녀였다. 아버지는 황씨 성을 가진 양반으로 일설에는 진사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기생 또는 천민 출신으로 누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진현금'(陳玄琴)이라고 불리던 시각 장애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일설에는 시각장애인인 평민의 딸로 태어났다는 전설도 있다. 그녀가 살던 장단군 입우물 고개에는 1945년 광복 당시까지도 약수가 나왔다고 한다.

황진이는 조선의 신분제인 종모법에 따라, 아버지가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천출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황진이라는 이름 자체도 본명이 아닌 것으로 추측하는데,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본명이 황진이고 접미사 ‘-가 붙은 이름이 전해 내려온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은 옛 조선 여성들의 이름에 그 근거를 둔다.

그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운 것으로 봐서는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여덟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 살 때 벌써 웬만한 한문 고전을 읽어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으며, 서화에도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기생이 된 이유

그녀가 기생이 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시각장애인이던 어머니가 기녀 출신이었다는 설과 짝사랑하던 남성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서녀 출신임을 비관하여 스스로 기녀가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녀를 짝사랑하던 한 남성이 혼자 연모하다 어머니 진현금을 찾아가 청혼을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남성은 상사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뒤에 이 사실을 접하고 기생이 되었다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어머니는 기생 또는 천인 출신으로, 서녀 출신임을 비관하여 스스로 기녀가 되었다고 한다.

어려서 교방(敎坊)의 동기(童妓)로서 기녀가 되어 대성하였다. 화장을 안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어느 날 당대의 명사인 송공(宋公)의 대부인(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는데 가창과 미모가 아름다워 유명해졌다. 이때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명나라 등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기녀가 된지 수년 안에 그녀의 재주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그녀의 명성은 한성과 전국 팔도에까지 회자 화 되었다.

 

 

작품 활동

시와 글씨, 그림, 서예에 두루 능하였다.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으며, 성리학과 고전 지식 역시 해박하였다. 한편으로는 당대의 명사, 한량들과 교류하며 시문 등을 주고받기도 하고 연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한번은 왕족인 벽계수를 유혹하는가 하면 당대의 고관대작들을 유혹하거나 망신을 주기도 했다. ,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승려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다.

당대의 석학의 한사람이던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는 것은 실패하였으나 그의 인품에 탄복, 서경덕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 그에게서 당시(唐詩)를 배웠다고 한다.

황진이의 여러 시조들은 문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어 고전 한국문학의 일부로 인정되며, 교과서에도 실리는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성리학자 화담 서경덕과의 사랑 등으로도 유명하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거나 교류하였으며, 남녀간의 애정에 대한 내용을 시와 그림으로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유실되었으나 몇 수의 시가 현재 전한다. 뛰어난 시, 그림, 글씨 재주와 함께 성리학과 고전에도 능하였으며 뛰어난 미모를 갖추어 유명하였으며,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남성 편력

용모가 출중하고 노래, , 악기, 한시 등에 두루 능했기 때문에 당시 선비들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와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남게 되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으나 나이 들면서 한 남자를 의지 하고 싶은 마음에 벽계수를 사랑하기도 했으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크게 상처를 받고 방황을 했다고 한다. 벽계수와 사랑을 이루지 못함에 슬픈 세월을 보내며 방랑을 하다가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당시 벽계수라는 인물은 왕손으로써 세종의 손자 영해군파 길안도정(吉安都正) ()의 다섯쩨 아들인 이종숙으로 알려진다. 이종숙은 1508년생으로 인종조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풍류에 능하여 황진이 명성을 듣고 찾아가 놀기는 했으나 그와 가정은 이룰 수 없어 황진이의 사랑을 거절하고 떠났다고 한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 자기 집에서 3, 모두 6년을 같이 살다가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이사종과 헤어지고 다시 개성으로 되돌아왔으나 지족선사를 잊지 못해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황진이의 재방문에도 수행중이던 지족은 요지부동이었고, 지족암에서 끄떡 않고 앉아 있는 지족에게 다가가 꽃을 꽂고 수행 중이던 지족의 무릎을 베고 잠을 청하기도 하고, 말도 걸어 보았지만 지족선사는 그대로였다. "지족! 그대 같은 큰 위선 덩어린 없을 거요!" 황진이의 지적에 놀란 지족은 다시 무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다시 암자로 찾아가 황진이가 지족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한참 뒤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끼고 지족이 그를 깨우니 지족이 덤덤한 웃음으로 말을 건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족선사와의 관계도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떠나게 된다.

한편 황진이는 당대의 은둔학자인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는 서경덕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한다.

 

 

최후

그녀의 사망 일자와 정확한 사망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죽기 전에 나 때문에 천하의 남자들이 자정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동문 밖 개울가에 시체를 두어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하여 주시오"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황진이의 유언에 따라 그대로 하였는데 한 남자가 거두어 장사 지냈다는 전설도 전한다. 1567년 무렵을 전후해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대부의 위선에 대한 조소와 미모로 남성을 유혹한 것 등이 문제시되면서 조선시대 내내 음란함의 상징과 사대부에 대한 모욕적인 행실 등이 문제시되어 언급이 금기시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다. 일설에는 그가 죽은 뒤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일부러 들판에 버려졌다는 전승까지 누군가에 의해 유포되기도 했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구정현 판교동(현재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판교리)에 있다.

 

 

사후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고, 또한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했다. 황진이 사후 음란하다는 이유로 사대부들에게 지탄을 받았고, 사대부들에 대한 조롱과 풍자, 유혹 등의 행실이 문제시되어 언급이 금기, 기피되었다. 그러나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시 재주와 학식,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었으므로 그에 대한 일화가 구전을 통해 많이 전해졌다.

그의 작품들 역시 그가 음란함의 상징으로 몰렸고, 전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사라졌으며, 남은 작품들 또한 사대부에 대한 조롱과 풍자 등이 문제시되어 제대로 보전되지 못하여 대부분 인멸, 실전되었다. 그의 시와 작품들 중 일부는 청구영언해동가요, 동국시선, <가곡원류> <대동풍아(大東風雅)> 등의 문헌에 전하고 있다. 또한 금계필담과 어우야담 등에도 그에 대한 일화가 일부 전해져 내려왔다.

그가 지은 작품으로는 한시로 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 영초월시(咏初月詩), 등만월대회고(登滿月臺懷古), 등이 전하고 있으며, 시조 작품으로는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내언제 신의 없어, 산은 옛 산이로되, 어져 내일이여 등이 있다.

항간의 소세양 이라는 인물에 대한 사랑과 황진이의 극진한 이별의 시를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극작가 양인자씨가 황진이와는 전혀 관계없이 본인이 창작한 시 라는 것을 티비에서 밝힌바 있다.

 

박연폭포

 

박연폭포(朴淵瀑布) / 황진이

 

一派長天噴壑壟(일파장천분학롱) / 한 줄기 긴 하늘을 바위 끝에 뿜어내니

龍湫百仞水叢叢(용추백인수총총) / 폭포수 백 길 물소리 우렁차구나.

飛泉倒瀉疑銀漢(비천도사의은한) / 나는 물줄기 거꾸로 쏟아져 은하수 되니

怒瀑橫垂宛白虹(노폭횡수완백홍) / 성난 폭포 달래는가 흰 무지개 뚜렷하네.

雹亂霆馳彌洞府(박난정치미동부) / 어지러운 물 벽력 골짜기에 가득하고

珠憃玉碎徹晴空(주용옥쇄철청공) / 구슬 절구에 부서진 옥 창공에 맑았으니

遊人莫道廬山勝(유인막도려산승) / 유자여! 여산좋다 말하지 말게

須識天磨冠海東(수식천마관해동) / 천마가 해동에 으뜸가는 곳이니

 

詠初月(영초월) 黃眞伊(황진이)

 

誰斷崑崙玉(수단곤륜옥)

그 누가 곤륜산의 백옥을 쪼개어

裁成織女梳(재성직녀소)

직녀의 얼레빗을 만들었나

牽牛一去後(견우일거후)

견우총각 한 번 떠나간 뒤에

愁擲碧空虛(수척벽공허)

속상해 빈 하늘에 던진 거라네

 

칠석날 밤중에 내리는 비는 직녀와 견우의 눈물인 것을 누구나 안다. 그러나 만약 비는 아니 오고 반달이 휘영청 떠있으면, 그 달이 직녀가 내던진 얼레빗인줄 아는 이는 많지 않으리라. 시대를 초월하여 뭇 남자들의 가슴에 연인으로 자리한 황진이의 감수성이 반달을 이별이 슬픈 얼레빗으로 상징화시켰다. 견우가 떠난 뒤 머리 빗고 화장할 일 없다고 직녀가 던져 버린 빗이 반달이 되었단다. 황진이는 얼레빗을 몇 개나 허공에 던졌을까? 중국 당나라 때 작자미상의 시를 황진이가 직녀를 끌어다 개작(리모델링)한 것이다. 이 시의 원전은 다음과 같다. ‘誰採崑山玉//功成一半梳//自從離別後//愁亂擲空虛(그 누가 곤륜산 옥을 캐어/예쁜 얼레빗을 만들었나/날 두고 임 떠난 뒤에/심란하여 허공에 던진 거라네)’ *() ; 누구 *() ; , 머리를 빗다 *() ; 던지다, 擲柶(척사) ; , 윷놀이. 한시연구가

출처 : 양돈타임스(http://www.pigtimes.co.kr)

 

 

 

내 언제 무신하여

 

내언제無信ᄒᆞ여님을언제소겻관ᄃᆡ

月沈三更에온ᄠᅳᆺ이전혀업ᄂᆡ

추풍에지ᄂᆞᆫ닙소릐야낸들어이ᄒᆞ리

 

현대어

내 언제 신의 없이 굴어 임을 언제 속였길래

달이 기운 깊은 밤에 오려는 뜻이 전혀 없네

가을바람에 지는 잎 소리야 나인들 어찌 하리

 

동짓달 기나긴 밤을

 

截取冬之夜半强(절취동지야반강)

春風被裏屈幡藏(춘풍피리굴번장)

有燈無月郞來夕(유등무월랑래석)

曲曲舖舒寸寸長(곡곡포서촌촌장)

 

冬至ᄉᄃᆞᆯ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현대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정 통한 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만월대회고

古寺蕭然傍御溝고사소연방어구

夕陽喬木使人愁석양교목사인수

烟霧冷落殘僧夢연무냉락잔승몽

歲月崢嶸破塔頭세월쟁영파탑두

黃鳳羽歸飛鳥雀황봉우귀비조작

杜鵑花發牧羊牛두견화발목양우

神松憶得繁華日신송억득번화일

豈意如今春似秋기의여금춘사추

 

현대어

옛 절은 쓸쓸히 어구 옆에 있고

저녁노을에 큰키나무는 사람을 서글프게 하는구나

안개는 늙은 승려의 꿈 속에서 적막하게 사그라들고

기나긴 세월에 탑머리는 무너져내렸네

누런 봉새는 어디 가고 참새들만 날아드는가

진달래꽃 피어나 소와 양이 풀을 뜯고 있구나

송악산 영화롭던 옛날을 떠올려보니

지금 이 봄이 가을인 듯한 것을 어찌 알았으리

 

 

산은 녯 산이로되

 

은 녯 이로되 물은 녯 물 안이로다

晝夜에 흐르니 녯 물이 이실소냐

人傑도 물과 갓ᄋᆞ야 가고 안이 오노ᄆᆡ라

 

현대어

산은 옛날 산 그대로인데 물은 옛날의 물이 아니로다

쉬지도 않고 밤낮으로 흐르니 옛 물이 그대로 있을쏘냐

인걸도 물과 같아 가고 아니 오는구나

 

 

상사몽

相思相見只憑夢상사상견지빙몽

儂訪歡時歡訪儂농방환시환방농

願使遙遙他夜夢원사요요타야몽

一時同作路中逢일시동작로중봉

 

현대어

서로 그리워 만나는 것은 다만 꿈에 기댈 뿐

내가 임 찾으러 갈 때 임은 나를 찾아왔네

바라노니, 아득한 다른 날 밤 꿈에

한시에 함께 일어나 길에서 만나기를

 

 

소요월야사하사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問君有時錄妄言문군유시녹망언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忙中要顧煩惑喜망중요고번혹희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현대어

스산한 달밤에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잠자는 밤에 뒤척이며 꿈인가 하시나요

때론 제가 드린 말씀 적어보시나요

이승에서 맺은 연분 믿어도 좋으련지요

머나먼 곳에 계신 임을 생각하니 궁금한게 너무 많네요

날마다 제 생각 얼마나 하시나요

바쁘실 때 돌아봐달라고 한다면 귀찮아하실까요 아니면 기뻐해 주실까요

참새처럼 시끄럽게 지저귀어도 절 향한 임의 마음은 여전하신가요

 

송도

雪中前朝色설중전조색

寒鍾故國聲한종고국성

南樓愁獨立남루수독립

殘廓暮煙香잔곽모연향

 

현대어

눈 속에 전 왕조의 빛이 보이고

차가운 종소리에 옛나라의 소리가 들리네

남쪽 누각에 서글피 홀로 서니

무너진 성곽으로 저녁연기 냄새가 나는구나

 

어져 내 일이야

어져내일이그릴줄을모로ᄃᆞ냐

이시라ᄒᆞ더면가랴마ᄂᆞᆫ 제구ᄐᆞ여

보ᄂᆡ고그리ᄂᆞᆫ은나도몰라ᄒᆞ노라

 

현대어

!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몰랐더냐

있으라 했더라면 구태여 갔겠는가

보내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나도 몰라 하노라

 

청산리 벽계수야

靑山裏碧溪水(청산리벽계수)

莫誇易移去(막과이이거)

一到滄海不復還(일도창해부복환)

明月滿空山(명월만공산)

暫休且去奈何(잠휴차거나하)

 

청산은 내 뜻이오

靑山은내ᄯᅳᆺ이오綠水ᄂᆞᆫ님의

綠水흘너간들 靑山이냐 ᄒᆞᆯ손가

綠水靑山을못니져우러예어가ᄂᆞᆫ고

 

현대어

푸른 산은 내 뜻이오, 푸른 물은 임의 마음이로다

푸른 물 흘러간들 푸른 산이 변할쏜가

푸른 물도 푸른 산을 못 잊어 울며 흘러가는가

 

 

자료; 워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