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좌파 와 북한의 원수 백선엽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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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7. 12.

 

 

백선엽(白善燁, 19201123~ 2020710)은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 교통부 장관 등을 지낸 대한민국 군인, 정치인, 외교관이었다.

 

間島特設隊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9기로 졸업하여 만주국의 장교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였으며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1945년 광복을 맞았고, 해방 직후에는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소련군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게 되자, 194512월에 월남하게 된다. 1946년 군정기 남조선국방경비대에서 활동하였고, 1949년 제5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에 대한민국 국군 장군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0년 제1사단장으로 승진한 뒤, 줄곧 전쟁에 참전하다가 1952년의 휴전 회담 때 한국측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휴전 문서 조인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예편 후에는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의 외교관을 지냈다.

호는 우촌(愚村운산(雲山). 본관은 수원(水源),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다.

 

인천 상륙작전 직후, 대구에서의 백선엽

생애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냈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약송소학교를 나온 이후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했다.

1939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했지만 군인의 꿈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194112월 만주국 봉천의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여 제9기로 졸업한 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 1943년에는 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이 부대에 배치되어 활약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1938년부터 당시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김일성, 강건, 김광협, 최용건 등이 가담한 동북항일연군 및 팔로군 소속 게릴라 부대를 주로 상대하며 여러 차례의 잔혹한 토벌작전을 벌여 악명이 자자했다. 이 때문에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이 있는 백선엽도 기계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선엽이 배치되기 한참 전인 1940년에 이미 김일성 및 만주빨치산파 독립운동가들은 토벌을 견디다 못해 동북항일연군을 빠져나와 소련 연해주로 망명하여 소련군에 배속되었으므로, 실제 독립운동가(공산당)들을 맞상대할 일은 없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이러한 백선엽의 간도특설대 경력을 아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으나, 본인이 이를 구체적으로 시인한 것은 1983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ゲリラアメリカはなぜけたか (대게릴라전 미국은 왜 졌는가?)(하라쇼보(原書房) 출간)에서였다.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게릴라 토벌 전술에 대한 책으로서, 백선엽은 광복 이전의 간도특설대 복무 경험과 6.25 전쟁 당시의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수행한 백()야전사령부를 이끈 경험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이 책 초반부의 한 장()間島特設隊秘密(간도특설대의 비밀)본문에서 백선엽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하였다

白善燁 (1993). ゲリラアメリカはなぜけたか. 原書房. (경향신문에서 재인용)

 

이후 출간된 한국어 자서전인 군과 나(1990), 실록 지리산(1992) 등에서도 간략하게나마 간도특설대 경력을 언급했다. 2005~2009년 활동한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일본에서 2000년 출간된 백선엽의 회고록 将軍朝鮮戦争(젊은 장군의 한국전쟁)(소시샤(草思社) 출간)에 나온 간도특설대 활동 내역을 토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였다.

(전략) 봉천의 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은 194112,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였다. 나는 견습사관으로서 동부 만주의 寶淸(파오칭)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국군 보병 제28(=연대)에서 근무하였다. (중략) 이어서 佳木斯(자무스)의 신병훈련소의 소대장으로 전임되었는데 (중략) 19432, 나는 만주 동부의 한반도에 접하는 간도성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전임되었다. (중략)

간도성 연길현 명월진(明月鎭)에 설치되어 있던 간도특설대는 조래의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1938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의 일부가 日系 軍官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는데, (중략)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의 임무는 잠입, 파괴공작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중략)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후략)

 

이들 문헌에서 백선엽 본인은 간도특설대 경력을 인정하고 부끄럽다는 정도의 언급은 하고 있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 위에서 나타나듯 자신은 이미 동북항일연군 세력이 거의 소멸된 뒤에 간도특설대에 합류하였고, 결과적으로 상대한 적들도 후방 치안을 어지럽히던 팔로군 유격대 등 중국 공산당계 빨치산들이었기 때문에 크게 죄스럽지는 않다는 입장이다.

이 부분의 태도가 문제이기는 하였으나, 특별히 자신의 간도특설대 경력을 세탁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후 만주군 중위을 지내다가 해방 직후 평양으로 돌아왔고, 동향 사람이기도 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다가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후 194512월에 월남했다. 당시 조만식에게 함께 내려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월남 직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방경비대에 입대,19462월 부산 제5연대 A중대장을 맡았다. 국방경비대가 정식 한국군이 된 이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복무하였으며, 이때 벌어진 여순사건 당시 공산 게릴라 소탕과 주동자 색출 및 처벌의 재판장이었다. 19504월에 대령 계급으로 제1사단장이 되어 개성 지역을 담당하면서 6월 당시에는 경기도 시흥에서 고급 간부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계열의 군인을 숙청하는 '숙군'과정에서 박정희는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이후 19492'군병력 제공죄'로 사형을 구형받은 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백선엽은 육군본부에서 정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김안일 방첩대 과장을 통해 직접 면담한 후 만주 시절 동료 20명으로부터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보증서를 제출받고 무죄 방면시켜줬다.

뿐만 아니라 백선엽은 불명예 제대한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신분(현 군무원)의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당시 정보에서 예산 문제로 문관 월급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했지만 백선엽은 자신의 판공비 일부를 떼어서 박정희의 월급으로 지불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타이페이에 있던 백선엽은 미국 대사와의 면담에서 박정희의 전력을 이유로 사상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발언했다. 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에서 유럽/아프리카 총괄대사로 전임되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캐나다를 떠돌다가 모친 병환을 이유로 잠시 귀국했을 때 박정희를 면담하고 나서도 2년 뒤인 196912월에야 교통부장관으로 임명되어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에는 교통부장관직 이후 전경련 이사와 한국종합화학 등 공기업체 사장을 두루 거치며 보상받았다.

여담으로 백선엽은 박정희보다 3살 어리지만 항렬로는 외할아버지뻘이다. 박정희의 모친 백남의는 수원 백씨 28세손으로 남()자 항렬이었고, 백선엽은 수원 백씨 27세손이다.

 

6.25 전쟁

6.25 전쟁, 한국전쟁 또는 조선전쟁은 19506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한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이었다. 광주에 주둔한 제5사단장으로 복무하던 백선엽 대령은 1950422일 개성을 포함한 38선의 경비를 담당하는 제1사단장으로 보직되었다. 1950625일 북한군의 남침 당시 그는 서울에 있다가 07시경 부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서야 전쟁을 인지했다.

그들이 수색의 사단사령부에 도착했을 땐 이미 개성은 함락되었고 12연대와의 연락도 두절된 상태로 임진강 철교를 폭파하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했다.

13연대 장병들이 전차를 상대로 육박공격을 감행하며 파평산에서 버티는 사이 임진강교를 건너온 적에 문산까지 밀린 11연대가 교도대의 증원을 받아 역습, 임진강교의 방어선 확보에 성공했지만 육군본부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38선 전체에서 전면적인 공격이 가해져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일제히 후퇴중이며, 1사단도 퇴각하지 않으면 곧 포위될 것이니 퇴각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시점에서 북한군의 주공이 지향된 포천-동두천 접근로가 완전히 돌파당한 상황이었으므로 1사단이 진지를 고수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부대를 유지하며 퇴각한 것은 아니었다.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무너져 버리자 포위를 우려하여 참모총장에게 후퇴를 건의했지만 패닉 상태에 있었던 지휘부는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 설상가상 인도교가 폭파되자 퇴로가 끊긴 1사단은 그제서야 시흥을 집결지로 선정하고 후퇴를 시작하지만 배도 구하기 어려운지라 몇명의 부관과 함께 행주에서 뗏목을 만들어 겨우 도하가 가능했다고 한다. 기적적으로 많은 장병이 도하에 성공하여 시흥에서 부대의 재편이 가능했으나 본인은 이 일로 상부의 후퇴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오해를 받아 많이 억울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나마 사단급 편제를 유지하고 멀쩡히 퇴각할 수 있던 부대는 1사단과 춘천의 6사단, 그리고 강릉의 8사단이 유일했다.

6사단의 경우 후퇴하면서도 제대로 된 전투를 벌였는데 바로 춘천-홍천 전투다. 수도권을 치던 인민군보다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해 공격의 강도가 덜했던 데다, 6사단은 부대장 재량으로 병력의 외출, 외박을 제한했던 덕분에 비교적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6사단은 북한군 제2군단을 3일간이나 저지했고 이 때문에 인민군 제2군단장 김광협은 해임 당했다.

그리고 8사단의 경우 주문진 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혔음에도 강릉을 빼앗긴 그날 밤 기습공격을 하여 인민군에게 적잖은 패배를 주는 등의 활약을 하고 3일간 방어하면서 태백산맥을 타고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었다. (강릉전투)

처음 이틀 동안 긴장과 긴박한 상황으로 인해 발에 못이 박히고도 다음 날에나 전투화를 벗었을 지경이었다고 전해지며, 1사단이 상태가 그나마 가장 양호한 부대였으므로 학도병과 신병들을 계속 보충받아 한강 방어선 전투를 시작해서 수많은 방어작전에 주력으로 투입된다. 그러나 전황이 계속 악화되어 결국 낙동강까지 후퇴하며, 이 와중에 병사들 속에 섞여 퇴각하던 중 북한군의 추격으로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후퇴와 재편과정에서 7월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위 사진이 다부동 전투 당시 한국군이 90mm 대공포로 지원사격을 하는 모습이라는 일부 설명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한국전쟁 초기 한국군은 M3 105mm 경곡사포 이외에 변변한 야포를 장비하지 못했다. 이것은 다부동 전투가 끝나고 인천 상륙작전이 감행된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에 돌입할 당시 한국군 제1사단 지원차 배속된 미군 제78 대공포병대대(78th AAA Gun Battalion)의 포격 모습이다.

 

다부동 전투

전쟁 발발 1개월만에 북한군은 빠르게 남하하여 불과 5주만인 195081일 낙동강 유역까지 도달했다. 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8월공세를 벌였고, 대한민국 국군과 미8군은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기 위한 총력 방어전을 펼쳤다. 81일부터 인천상륙작전까지 한달반 동안 낙동강 전선에서 이어진 치열한 공방전을 '낙동강방어선전투(洛東江防禦線戰鬪)'라 한다.

 

칠곡

 

낙동강 전선은 칠곡을 기준으로 북쪽 방어선은 국군 1사단, 6사단, 7사단, 8사단, 수도사단, 3사단이 방어를 맡았고, 칠곡 이남 서쪽 방어선은 미군 24사단, 2사단, 25사단, 해병대 1대대, 1기병사단이 방어를 맡았다.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은 칠곡을 중심으로 그 경계의 방어를 담당했는데, 북쪽 방어선과 서쪽 방어선이 만나는 모서리에 있어 낙동강 전선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북한군은 대구를 점령하고 부산으로 향하기 위해 인민군 제3사단, 13사단, 그리고 제1사단의 1개 연대를 동원해 미군부대를 회피해 국군1사단을 집요하게 노렸고, 국군 1사단을 이를 방어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칠곡 인근 낙동강 전선에서 8월 한달에 걸쳐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다부동 전투라고 하며, 낙동강방어선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했고, 나아가 6.25전쟁 전체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이 다부통 전투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더라면 대구를 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사단을 중심으로 한 국군은 미8군의 도움을 받아 UN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곳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낙동강방어선전투(洛東江防禦線戰鬪)

 

83일 국군 1사단이 낙동강을 도하하자마자 해평리에서의 전투를 시작으로 북한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T-34 전차

 

88~9일 북한군의 T-34 전차 15기가 낙동강을 도하하여 인근의 고지를 잇달아 함략하여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미 공군의 도움과 대전차 특공조의 활약으로 북한군의 전차를 잇달아 파괴했다. 결국 북한군은 전차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전차를 상실한 북한군은 전술을 바꾸어 1사단의 우측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백선엽과 1사단은 'Y'선을 사수하기 위해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김일성은 대한민국 정부가 위치해 있는 대구를 서둘러 점령하라고 독전했고 이에 북한군은 815일 광복절을 기해 칠곡(다부동)에 총공세를 가했다. 이에 칠곡을 중심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격전이 펼쳐졌다. 그러나 1사단 좌익의 미군 1기병사단이 방어하던 왜관 북쪽 2km303고지가 피탈되며 왜관이 적진에 떨어지고 말았다. 1사단 우익의 6사단도 4km 후퇴하는 등 전선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고, 1사단마저 무너지면 그길로 대구는 북한군의 손에 떨어질 운명에 처했다.

북한군이 다부동에 총공세를 펼치자 816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오키나와에서 B-2998대나 출격시켜 왜관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하지만 미군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북한국의 총공세는 이어졌다. 1사단은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1사단만으로는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8군은 817일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으로 투입하였다.

818일에는 북한군이 지척인 가산까지 침투했고 북한군의 포탄이 대구 시내까지 떨어졌다. 이 충격으로 정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했고 대구 시민들은 충격과 혼란에 빠졌으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직접 경찰과 함께 가두에 나서 대구 민심을 수습하여 질서가 회복되었다.

한편 818일 국군 1사단은 미 27연대와 함께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했다. 주야간을 가리지 않고 격전이 펼쳐지며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칠곡 일대의 고지들을 뺐고 빼았기는 일진일퇴의 격전이 계속되었다.

격전이 계속되며 다부동의 전황은 위급해졌고, 819일 미 23연대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두모동에 합류했고 육군본부에서도 국군 8사단 제10연대를 다부동에 증원시켰다.

820일 미 27연대가 국군 11연대 1대대가 후퇴 중이라며 퇴로 확보를 위해 자신들도 철수하겠다는 통보가 오자 백선엽은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병력을 수습하고 2대대 선두에 서서 돌격, 488고지를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백선엽은 권총을 들고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는데, 국내외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사례 중의 하나다. 일단 이 행동과 비슷한 사례로는 이오지마 전투 당시 일본군 수비대 최후의 돌격을 직접 이끈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 6.25 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 중 손원일 제독이 직접 소총을 들고 대한민국 해병대와 함께 진격한 경우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세 준장이 노르망디 상륙을 최전선에서 함께 했던 것과 같다.

돌격직전 병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820일밤 이후 북한군의 전력 소모가 커졌는지 북한군의 공세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821일 밤 북한은 다시 한번 역습을 감행했다. 이에 6.25전쟁 사상 최초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국군 1사단과 미 27연대는 모든 자원을 투입하여 5시간 동안 총력전을 펼친 끝에 결국 북한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북한군은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이 이끄는 국군 제1사단은 25일간에 걸친 북한군 주력 3개 사단의 집요한 공세를 저지하고 낙동강 전선과 대구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다부동 전투에서 장교 56명을 포함, 2300명의 전사자를 낸 것으로 집계되었다.

8월 공세를 저지한 후, 8281사단은 부산에 상륙한 미 1기병사단에 다부동을 이양하고 팔공산으로 이동하여 전력재건을 했다.

 

인천 상륙작전

 

그러나 9월 미 1기병사단이 북한군의 공격에 주저항선이 붕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인천 상륙작전이 실시되어 북한군에 막대한 혼란이 벌어지자, 반격부대로서 다시 1사단을 지휘해 다부동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평양 전투

평양 전투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으로 역 진공하던 때의 에피소드인데,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의 전투력을 의심하자 자신이 직접 영어로 설명하며 '1사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아 UN군의 선두에서 평양을 향해 제일 빨리 전진할 수 있으며, 사단장인 자신은 평양에서 어렸을 때부터 살아와 길을 잘 안다. 단지 자신들에게는 미군과 같은 종합적인 화력이 없는 것뿐이라 만약 1사단에 미군 전차 1개대대를 지원해주면 이들과 함께 선두에서 진격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미군 장군이 '미군은 차량이 많고 기계화되어 이동속도가 빠른데, 보병뿐인 한국군이 어떻게 미군의 전진속도보다 빨리 갈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자 '잠을 자지 않고 야간에도 행군해가며 이동속도를 늘리겠다'라며 굳은 의지를 보인다. 그리하여 미군 전차대대를 배속받게 되며, 미 육군 부대가 다른 나라 지휘관의 지휘를 받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영국지휘관에게 맡겨진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게다가 약속대로, 실제 1사단 장병들은 야간에도 잠을 자지 않으며 강행군을 계속해 차량으로 이동하는 미군들을 제치고 전군의 선두에 서게 된다.

나중에는 미군 전차대대 장교들이 '우리까지 밤에 잠도 안 자고 싸울 수는 없다. 전차는 야간에 사고를 일으킬 수 있고 적의 공격에도 취약하다'라고 하자 전차대대에는 숙면을 취하게 하며 '이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게 협조하라'고 하며 배려해줬으며, 실제로 이들은 그 보답으로 주간에 속도를 올려 1사단의 최선두를 따라잡았다. 이때 당시 장교들이 한 말은 정확하게 "전차는 낮에는 호랑이지만 밤에는 고양이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막힌 대답이라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밝힌 바가 있다.

1019일 평양 점령에 성공했다. 이는 전쟁 당시 최초의 평양 점령이었는데, 1사단과 평양 점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7사단 역시 다른 방향에서 같은 날 평양에 입성해 최초 입성부대라며 자랑하곤 한다. 평양 점령 후 김일성의 집무실에 1사단 지휘소를 차리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본인이 평양 출신이었던 덕분에 평양 점령 시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사단 통신참모가 북한군의 통신선을 발견해 도청을 하다 통신이 연결되어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이 통신참모는 평양 사투리를 못해 사단장인 백선엽에게 직접 해주십사 하고 요청을 했다. 백선엽은 유창한 평양 사투리로 현재 적이 유엔군의 전력에 눌려 사기가 바닥을 치고 후퇴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외에도 미군이 대동강을 도하하느라 진격을 못하고 있던 틈에 수심이 얕은 곳으로 병력을 도하시켜 가장 먼저 평양 중심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때 1사단의 고문관이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아느냐고 신기해 하자 "나는 어렸을 때 평양에서 수영을 배웠다. 물 위는 물론이고 물 아래까지 다 알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계속해서 북진을 계속해 압록강변에 거의 다다랐지만, 10월 말부터는 중국군의 반격에 휘말리면서 124일에는 통탄스럽게도 애써 점령했던 평양까지 철수하고, 38선 이남으로까지 밀려가게 된다.

중국 인민해방군

 

중공군 1951년 춘계 공세 저지

다부동 전투 및 평양 점령에 비해 덜 알려져있지만,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 중 동부전선의 붕괴를 막아내는 데 공헌한 것도 중요한 전공이었다. 백선엽은 1.4 후퇴 기간 중공군의 맹공세를 맞아서도 그럭저럭 제1사단의 건제를 유지한 채 성공리에 퇴각작전을 마무리했으며, 이어지는 반격작전에서도 미군 제1군단 예하로 서울 탈환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던 중 328일에 제1군단 군단장이던 김백일 소장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백선엽이 후임으로 발령받아 4월부터 제1군단 군단장 직을 수행하게 된다.

 

1.4 후퇴

 

당시 제1군단은 전선의 최동단(우익)인 설악산부터 동해안 대포리까지의 구간을 담당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좌익을 유재흥 소장의 제3군단이 맡고 있었던 것. 야심찬 1951년 춘계 공세에 나선 공산군은 서부전선을 노린 4월 공세에서 미군의 막강한 화력에 막혀 전혀 돌파구를 뚫지 못하게 되자, 5월에는 방향을 바꾸어 이곳 동부전선에 배치된 허약한 한국군 사단들을 노리게 된다. 이 공세에서 동부전선을 담당한 중공군 제9병단은 예하 중공군 3개 야전군(12·20·27)을 주력으로 한국군 제3군단 및 미군 제10군단 우익에 위치한 한국군 4개 사단(3·5·7·9사단)을 통탄할 계획이었다.

1군단 전선은 주공축선은 아니었으나, 북한군 3개 군단(2·3·5군단)이 중요한 조공을 펴기로 했다. 이들 북한군 군단들이 수도사단 전선을 돌파하면, 속사리~하진부리로 진격하여 한국군 제3군단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 격멸하고 제1군단의 증원을 봉쇄할 예정이었다.

1951516일 개시된 중공군의 공세는 이 의도대로 착착 맞아떨어졌다. 중공군 제20군은 한국군 제7사단 전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고, 특히 중공군 제60사단은 전선의 틈을 헤집고 후방 깊숙히 침투하여 만 하루 만에 제3군단의 후방 교통로 상의 요지인 오마치 고개에 도달한다. 이로 인해 한국군 제3군단은 완전히 패닉에 빠져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채 군단 전체가 하루만에 붕괴되는데, 이것이 한국군 최악의 패배로 회자되는 현리 전투였다. 이 현리 전투에서 붕괴된 2개 사단 병력은 남쪽 오마치 고개 방향으로의 퇴각을 포기하고, 대부분의 장비를 유기한 채 동쪽 방태산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여기서 공산군의 원래 계획대로 북한군 5군단과 2군단까지 전선을 돌파하여 동쪽 퇴로까지 차단했으면 한국군의 대병력이 꼼짝없이 전멸을 맞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백선엽의 제1군단은 원통 일대에서 시작된 북한군 제5군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다. 초반에 다소 밀리기는 했으나, 수도사단이 한계령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완강히 막아내었다. 이 사이에 한국군 제3군단은 조직이 와해되었음에도 병력 상당수가 어떻게든 방태산을 넘어 퇴각 행렬을 이어갔다. 중공군 병력 일부가 계속 제3군단을 추격해 창촌에서 오대산, 계방산을 거쳐 하진부리로 몰아 붙였지만, 북한군 조공이 적시에 따라붙지 못하는 바람에 병력이 부족해서 결정타를 날리지는 못했다. 520일까지 제3군단 소속 제3사단이 3,621(34%), 9사단이 4,582(40%)의 전력을 수습하면서 지연전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제1군단의 방어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사이 백선엽은 군단 예비인 제11사단 제20연대를 긴급히 대관령에 투입하여, 중공군이 이를 장악하기 전에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대관령이 함락될 경우, 1군단 전체의 보급로가 끊기는 것은 물론 전술지원을 톡톡히 해주고 있던 강릉비행장의 미 공군 항공전력도 제 기능을 못하는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한계령에서 대관령까지는 직선거리로만 55에 이르는데, 1군단은 이렇게 광범위한 좌측면이 노출되고도 일단 영동 지방으로의 관문을 틀어막아 반격의 기회를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좁은 영서 산악지역에서 충분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중공군은 보급난과 증원병력 부족으로 공세의 한계를 맞게 된다.

그러자 미군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반격의 기회를 포착하고 제8군 예비대인 미군 제3보병사단을 긴급히 횡성을 거쳐 장평, 속사로 투입한다. 그리고 520, 하진부리에서 백선엽 등 이 지구 야전 지휘관들을 소집해 미군 제3보병사단과 한국군 제1군단이 중심이 되어 반격할 것을 명령한다. 이후 다른 전선에서 미군이 공세로 돌입하는 한편, 3보병사단이 522일 운두령을 탈환하며 남하한 중공군의 보급로를 끊는 동시에 제1군단 병력이 역공을 펼치자 중공군의 춘계 공세는 완전히 종말을 맞게 되었다.

 

38도선

 

여기서 보듯 유재흥의 제3군단이 거듭된 졸전으로 밴 플리트로부터 군단 해체라는 초유의 치욕을 당한데 반해, 백선엽의 제1군단이 그나마 선전함으로써 한국군의 군단급 사령부가 존속할 수 있었다. 또한 제1군단이 동해안 지역의 방어선을 견고하게 유지한 탓에 이어진 반격전에서 한국군은 동부전선을 38도선 북쪽으로 한참 밀어 올려 오늘날과 같이 진부령 이북 화진포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7월부터는 미국과 북한-중국 간의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한국군 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빨치산 토벌작전

 

빨치산 토벌작전

19509월에 낙동강 전선에서 고착되어 전투를 치르던 조선인민군 병력들은 기습적인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해 핵심 교통로인 경부축선이 차단당하면서 퇴로를 잃게 된다. 다수 병력은 험준한 중부 산악지대를 따라 북으로 이동했지만, 퇴각 기회를 놓친 병력과 전라도의 공산주의자들은 잔류하여 빨치산 활동을 벌이도록 조치된다. 특히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의 경험을 살려 김일성에게 남한 후방에 4~5만 명의 조선인민군이 남아 후방 교란 임무를 계속 수행하면, 향후 중공군이 가세한 반격시 큰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이를 권고한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남한에 조직된 당 조직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별로 유격대를 조직해 활동하라고 명령한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회문산, 불갑산, 백아산, 화학산 등 남부지역 각지의 험준한 산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이 후방 치안을 교란하며 큰 위협이 되자, 육군본부는 '작전명령 제216'를 통해 빨치산 토벌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하고, 기존의 유격사령부(6개 유격대대로 구성), 2사단, 5사단과, 새로 편성 중인 제9사단, 11사단을 배속시켰다. 1950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최덕신 준장의 제11사단이 호남지방에서 대대적인 토벌전을 벌였고, 최영희 준장의 제8사단은 19512월 횡성지구 전투 이후 후방으로 이동해, 19514월 제11사단을 교대해 5월까지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제2사단은 19512~4월에 걸쳐 태백산 일대에 고립된 조선인민군 패잔병 중심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1951년 상반기의 작전을 통해 후방 빨치산 세력이 크게 위축되기는 하였으나, 문제점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자비한 토벌작전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이 많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512월 발생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다. 이는 제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과거 국민혁명군 시절 중국 공산당 유격대를 상대한 경험으로 무자비한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고집한 영향도 컸다. 여기서 살아남은 빨치산 세력들은 지리산 중심으로 재결집해 인근의 운봉, 곡성, 하동 및 전라선 철도를 교란했다.

결국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전방이 소강상태인 틈을 이용해 전방 야전사단 일부를 빼내 겨울 3개월 내에 후방을 완전히 정리할 계획을 세운다. 이는 산악지역에 은거한 빨치산 특성상 숲이 우거지는 봄~가을에는 색출이 어려운데 반해, 겨울에는 잎이 다 떨어지고 하얀 눈밭이 되므로 숨을 곳도 줄어들고 항공정찰로 수색도 용이했기 때문이다. 특히 밴 플리트 자신부터 그리스 내전에 미군 군사고문단장으로 투입되어 공산 게릴라에 대한 토벌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이러한 구상을 적극 밀어붙였다.

그는 백선엽이 제1군단 지휘에서 보여준 능력과 만주군에서 팔로군 게릴라 토벌 경험이 있다는 점을 높이 사서,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한 Task Force Paik, 즉 백()야전전투사령부를 창설해 이 대 토벌작전을 지휘할 것을 지시한다. 작전명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이었다. 백야전사에는 2개 야전사단(수도사단과 제8사단), 서남지구전투사령부[32] 및 예하부대, 전투경찰부대를 배속시켰다. 백야전사는 2개 주력 야전사단 소속 6개 연대를 기동타격대로 운용하고, 서남지구전투사 소속 경비부대와 전투경찰부대를 저지부대 및 거점 수비대로 활용해 122일부터 토벌작전에 돌입했다.

백야전사의 토벌전 제1(1951122~14)는 지리산 포위전으로 전개되었다. 수도사단은 지리산 남부에, 8사단은 지리산 북부에 배치되어 포위망을 좁혀간 것이다. 126일까지 양 사단은 지리산 능선을 향해 올라가며 포위망을 좁혀 조우하고, 다시 향후 1주일간 하산하면서 중간에 고립된 빨치산을 색출, 섬멸하였다.

2(19511216~ 195214)에서는 지리산 외부의 거점까지 대상을 넓혀 알려진 거점들에 대한 정밀 타격을 개시했다. 이 기간에는 각 연대들이 목표를 나누어 전주~무주 사이의 운장산, 함양 북쪽의 장안산, 정읍~순창 사이의 내장산, 회문산, 장군산, 순천 부근의 백운산 등 곳곳의 빨치산을 격멸하였다. 서남지구전투사는 계속 지리산에 남아 미처 소탕하지 못한 빨치산을 계속 소탕하였다.

이후 1월 말까지는 제1, 2기 작전구역을 재점검하며 제3기 작전을 펼쳐 잔적들을 더 철저하게 색출해냈다. 이때 지리산 대성골에 있었던 전투가 작전의 분기점이 되었다. 1, 2기 작전에서 예봉을 피한 지리산 빨치산들은 1월 혹한기에 접어들어 더 이상의 공격은 없을 것이라 방심했으나, 수도사단이 다시 사단 전력을 동원해 남부능선에서 벽소령 및 세석평전 쪽으로 포위망을 짜고 밀어붙이자 대성골 방향으로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다. 17일 밤 ~ 18일에 걸쳐 진행된 이 포위망 돌파전에서 빨치산 약 300명이 사살되고, 251명이 포로가 되는 등 지리산 빨치산 전력의 약 반수가 궤멸되었다. 이를 계기로 남부군 전력은 크게 손상되어 후방부대 및 전투경찰부대 만으로 상대가 가능한 수준으로 위축되었다.

 

 

백선엽은 이렇게 약 2개월 동안 예하 부대들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단기간에 빨치산 세력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특히 그는 '투항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절대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사면장에 자신의 사인을 넣어 비행기에서 살포한 덕에 수많은 유격대원들이 사면장을 들고 항복하게 만든다. 이는 제11사단장 최덕신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 방식이었다. 최덕신은 견벽청야작전을 실행하며 "100명의 공비를 사살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중에 상당한 부분이 양민일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하며 민간인의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했다. 백선엽은 이로 인해 남한 곳곳에서 군경에 대한 민심이 악화되던 상황에서 토벌작전에 돌입해야 했다. 오죽하면 김성수 부통령이 백선엽에게 "주민들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군경의 민폐가 심한 현실을 직시하고 부디 국민을 애호하여 민간에 폐를 끼치지 말고 치안을 확보해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서한을 보내기까지 했다. 백선엽은 이 때문에 토벌작전 중에 적성지역에서 발견되는 이들은 가급적 생포하여 일단 포로수용소로 보내고, 여기서 실제 빨치산과 양민을 구분해내도록 했다. 이 방식으로도 토벌대의 일부 잔혹 행위와 양민 학살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불필요한 희생을 많이 줄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에 국민혁명군 및 광복군 활동을 한 최덕신이 양민 학살의 오명을 남겼고, 간도특설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꼽히는 백선엽이 그나마 피해를 줄이며 성공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공과가 뒤섞인 한국 현대사 인물의 평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다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백선엽은 이 과정에서의 전과를 사살 5,009, 생포 3,968, 귀순 45명이라고 회고했다. 반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는 사살 6,606, 포로 7,115명으로 집계했다. 여러 기록간에 숫자상으로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작전 기간 및 참가 부대 포함 범위와, 후에 양민으로 판정된 포로들의 포함 여부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전공으로 백선엽은 1952112일자로 중장으로 진급한다. 이후 백야전전투사령부는 토벌작전을 수도사단에게 인계하고, 다시 전방으로 이동하여 제2군단 재창설 작업을 맡게 된다.

 

백선엽 육군 대장

 

전쟁 후기

이후 미군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대장의 지원 하에 1952년에 새로 창설된 제2군단 군단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발췌 개헌 당시 계엄령을 거부한 이종찬을 대신해 19527월에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953131일에는 그 동안의 전공으로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불과 33세였다. 이후 한국군의 규모 확대와 급여, 복지문제 개선과 지원을 확대하는 데 애쓰는 가운데 종전을 맡게 되었다.

6.25 전쟁 기간 동안 백선엽은 상기한 수많은 활약과 더불어 전쟁 중 부대 궤멸이나 대패, 총퇴각 같은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고, 빨치산 토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등 큰 전공을 쌓으며 미군 장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덕분에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를 통해 미군은 한국군을 냉전 구도에서 공산 블럭의 남하를 저지하는 유용한 동맹군으로서 인정하게 된다.

이 사실이 상당히 중요한 것은 6.25 전쟁 초~중반까지만 해도 미군은 한국군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한국군을 정규군이라기 보다는 조잡한 민병대 정도로 폄하했고, 장비를 주면 잃어버려서 적이 오히려 노획한 장비로 중무장을 할거라며 한국군에 대한 지원에 인색한 장군들도 많았다. 전쟁 후반으로 가며 많은 희생 끝에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게 되고, 한국군은 제한적이나마 자립의 기반을 닦게 된 것이다.

 

백선엽을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전후 활동

이승만 대통령은 노련한 정치가답게, 전쟁 경험을 통해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자 강력한 무력을 갖춘 세력으로 떠오른 육군 장교단을 내부 세력들이 상호 견제하게 만들어 쿠데타 가능성을 봉쇄했다. 그 핵심 세력이 백선엽을 필두로 한 평안도계, 정일권을 필두로 한 함경도계, 이형근을 필두로 한 일본육사계였다. 전후 1950년대 이승만 정권 내내 이들 3명의 대장들은 군내 요직을 돌아가며 맡았다. 이 영향으로 백선엽은 19531215일에 한국군 최초로 탄생한 야전군급 부대인 제1야전군의 초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1952(7)에 이어 1957년에 육군참모총장(10)을 역임했고, 정권 말기인 1959년에는 합동참모의장(4)에 부임했다.

이 세 군맥 가운데 가장 큰 조직은 정일권의 함경도계로, 전성기에는 김동하, 박창암 등을 비롯해 75명의 장성이 이 계파였다고 한다. 평안도계는 40명 정도의 장성이 속해 있었는데, 백선엽은 파벌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아 장도영이 평안도계의 리더 역할을 점차 맡게 된다. 그러나 이런 3대 파벌이 군내 인사를 과점하고 요직을 꿰어차며 각종 비리를 저지르자, 여기에 속하지 못한 장교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져갔다. 5·16 군사정변도 결국에는 이 파벌 구도에서 배제된 장교들(특히 김종필을 위시한 남한 출신 육사 8기생 그룹)이 박정희를 내세워 벌인 집단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선엽이 정일권만큼 노골적인 군내 정치를 벌이지 않았다 해도, 육군 내 최고위급 장군으로 이러한 내부 모순을 적극적으로 해소하지 못해 군사독재의 길을 열어준 책임은 일부 있다.

결국 백선엽은 4.19혁명 이후인 1960531일 예편하고, 7월에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부임하였다. 그 사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박정희를 위시한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여전히 군내 강한 영향력을 가진 백선엽의 개입을 막기 위해 계속 대사 직책을 주어 외국을 떠돌도록 한다. 19617월에는 주 프랑스 대사(유럽 및 아프리카 13개국까지 관할)로 발령받아 멀리 유럽으로 보내버렸고, 19657월에는 다시 주 캐나다 대사로 발령내어 다시 미주에 머무르게 했다.

그렇게 거의 10년이 지나 군내 인맥이 모두 박정희 충성파들로 교체되고 백선엽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뒤에야, 박정희는 백선엽을 불러들였다. 그래도 과거 남로당 활동 전력을 비호해준 은혜를 배려했는지, 196910월에는 교통부장관(19)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는 당시 대한민국의 몇 안 되는 핵심 화학기업이던 충주비료(1) 사장을 맡았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호남비료(2) 사장을 겸직하며 1973년에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 합병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종식된 1980년까지 장기간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내다가 퇴임하였다.

 

주한미사령관, 백선엽 100세 생일 축하방문

 

그 이후에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않고 이후 여러 기념활동에 참가하였다. 특히 전쟁 시기 미군 장성들의 우호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주한미군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미군들은 백선엽을 유능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다 보니 미 2사단 훈련평가원실 건물 이름이 '백선엽관'이다. 현재도 백선엽의 6·25전쟁 경험담 육성녹음은 미국 국립보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후 2013년에는 미8군 명예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2016년에는 미8군 사령관 이취임식에 초대되었다.

이렇듯 백 장군에 대해서는 한국군보다 오히려 미군들이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부르며 극진히 예우해왔다. 주한 미군은 2013년 그를 '명예 미8군사령관'으로 위촉해 각종 공식행사 때 주한 미8군사령관과 같은 예우를 해왔다. Living Legend 한국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이 백 장군에게 한국군 최초 원수 계급을 부여하려 했으나 간도특설대 경력 때문에 반대가 심해 무산되었다.

백선엽의 전투 활약상을 담은 ‘6·25 전쟁영웅의 투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20165월부터 9월까지 육사 누리집에 30회가 연재되었다가 2017년 일반에도 공개되었는데, 당시 백선엽의 친일 행적은 언급하지 않고 전쟁 영웅으로 미화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 2018년 육사 누리집에서 삭제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이는 문재인 정부 들어 국군의 뿌리를 광복군에서 찾으려는 노력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육군 관계자는 "백 장군 웹툰 삭제와 국군 역사 재조명은 무관하고, (새로운 웹툰 게재로 인해) 기존의 백 장군 웹툰이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대북정책에 반대해왔으며 9.19선언에 반발해 기존의 성우회, 대한민국재향군인회와는 다른 대한민국 수호 예비역장성단이라는 단체를 조직,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폐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망

20207102335분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9. 100세 생일을 4개월 앞두고,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병원을 굳이 옮긴 것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하루 전 사망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빈소가 있는 영향으로 보인다. 두 거물급 유명인사의 장례식을 동시에 같이 치르면 병원이 혼잡해질 우려도 있고 정치적으로 두 사람의 지지세력 성향이 정 반대인 만큼 조문객들 사이에서 다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례식 후 유족의 신청으로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하루 먼저 사망한 박원순 시장의 자살보다는 덜 주목받는 편이지만 정치적으로 정반대인 두 거물의 죽음 때문에 정치권부터 일반 국민들까지 양 진영 간 대립이 벌어지고 있다.

통합당에선 '대한민국 역사 그 자체'라며 애도했으며 주한미군 사령관 또한 영웅이자 국가의 보물이었다며 애도했다. 반면 민주당 측은 친일행적을 고려해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정의당은 한 술 더 떠 일제의 주구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현충원 안장은 부적절하다는 논평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