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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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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2020. 9. 22.

‘먼 북소리’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6 - 1989년 사이 3년 동안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살며 쓴 책이다. 책 표지에는 “낭만과 감성의 유럽 여행 에세이”라고 적혀 있지만, 여행기라기보다는 그 3년을 전후한 그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3년 동안 유럽에 머물며 그는 ‘상실의 시대’와 ‘댄스 댄스 댄스’ 같은 대표작을 썼고, 번역작품도 여러 편 발표했다고 한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끝나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재미있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저자의 좌충우돌 여행 경험담과 여행지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지만, 이 책에는 여행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그가 경험한 유럽의 도시들과 거기 사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기억과 소회를 담고 있다.

 

그와 그의 아내는 한 도시에게 1달 또는 그 이상 장기체류를 하며 근처를 여행한다. 값비싼 아파트나 호텔 대신 허름한 셋방에 살며, 이름 없는 동네 식당을 찾는다.

 

이 책을 읽으며 하루키가 훌륭한 작가가 되는데 아내의 내조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아내가 가장 가까운 독자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낯선 도시에서 벗이 되어주는 아내가 없었더라면 과연 그가 3년씩이나 유럽에 머물며 작품에 전념할 수 있었을까 싶다.

 

스펫체스 섬에서의 일이다. 이 섬에서는 신용카드는 물론 달러나 독일 마르크 이탈리아 리라도 받지 않는다. 주말에 장을 보기 위해서는 금요일에 은행에 가서 환전을 해놓아야 하는데, 그만 깜빡한 것이다. 하루키의 아내는 돈을 바꾸어 오지 않은 그를 탓한다. 그는 아내에게 당신은 왜 그 생각을 못했어 라고 말하는 대신 잠자코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여성은 화를 내고 싶은 일이 있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화내고 싶으니까 화를 내는 것이다. 그래서 화내고 싶을 때 제대로 화를 내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게 된다.” (79 페이지) 그는 나이 40에 이미 결혼생활의 비결을 터득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조깅족을 설명해 놓은 부분도 재미있다. 첫째 멋을 많이 부린다. 옷부터 멋지게 갖춰 입는다고 한다. 두 번째 특징은 혼자서 달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대개 몇 명이 어울려 함께 달린다. 왠지 한국과 많이 닮은 것 같다. (202 페이지)

 

그리스에서 본 다양한 나라에서 온 배낭족들을 묘사한 내용이다. “독일인 (세계에서 여행을 가장 좋아한다), 캐나다인 (세계에서 가장 한가하다), 오스트레일리아인 (캐나다인에 이어 두 번째로 한가하다), 미국인 (최근에는 많이 줄었다), 영국인 (대개는 얼굴색이 나쁘다)” (244 페이지)

 

책 말미에 그는 비능률적이고 부정확한 이탈리아의 우편 사정과 도둑 문제에 대하여 길게 쓰고 있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일본의 친인척들이 보내 준 일본 식품과 책자들은 대부분 분실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도둑 문제 또한 매우 심각해 보인다. 다음날 도코에 가기도 되어있던 그는 나보나 광장에서 아내가 여권과 비행기표 등이 들어있는 가방을 날치기당하는 바람에 큰 고초를 겪기도 한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나 싶을 정도다.

 

재즈에서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에 대한 그의 사랑과 이해를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내용은 감성 에세이고, 어떤 것은 하루키식 단편소설 같기도 하고, 지식인의 시각으로 본 그리스와 이탈리아에 대한 시론도 있고, 미식가의 주말 칼럼 같은 글도 있다. 가장 부러웠던 것은 갓 구운 빵과 커피로 시작하는 아침과, 신선한 생선과 해산물을 숯불에 구워 간장에 찍어 먹는 일이었다.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일상을 탈피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재충전의 기회를 갖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잠시 관광지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여행보다는 낯선 도시,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나를 붙잡아 매고 있던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 자유로운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의 작은 어촌에 가서 몇 달이고 머물며 하루키의 흉내를 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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