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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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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음

2020. 10. 16.

이제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미국에 와서 보낸 시간이 10년이나 더 길다.  누군가는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노래했지만, 나는 아직도 미국이 고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게는 남들에게 자랑하고 내세울만한 고향은 없다. 아버지는 실향민이었고, 외가는 손바닥만 한 집이라도 사대문 안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서울 중인이다. 남들은 명절이 다가오면 서울역과 고속버스 터미널에 자리를 펴고 차표를 구하던 시절에도 우리는 명절을 집에서 보냈다.

 

사전에 보면 고향이란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 또는, 자기 조상이 오래 누리어 살던 곳”이라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나의 고향은 외가가 있던 관훈동이고, 아버지가 사업을 접고 양계를 시작했던 구파발이며, 미국 오기 전까지 갈빗집을 하며 살았던 벽제다. 

 

외가는 택시도 들어오지 않는 좁은 골목 안에 있었는데, 맞은편에는 대지가 100평이나 되는 부잣집과 그 옆에는 방을 쪼개고 밖으로 이어 붙여 11가구가 사는 적산가옥이 있었다. 아침이 되면 문 밖에 있는 변소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고, 하루가 멀다 하고 누군가 싸우는 소리, 자지러지는 아이들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집이었다.

 

더운 여름날 누군가 한 손에는 수박, 다른 손에는 얼음 한 덩어리 사들고 오면 온 집안사람들이 모여 수박화채를 나누어 먹고,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누군가는 김치전을 부쳐 나누어 먹곤 했었다.

 

아버지는 전기도 없는 구파발에 집을 짓고 이사를 갔다. 나중에 2층을 올린다고 평평한 철근 콘크리트로 지붕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슬라브’ 집이라고 불렀다. 전기가 들어온 후에도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은 자주 정전이 되곤 했다. 촛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빗소리를 들으며 커다란 거실 창문을 통해 번쩍이는 번갯불을 보았다. 아버지는 가끔 마시던 미제 캔맥주를 우리 형제들에게 맛보라며 건네 주기고 하고, 그런 날이면 노래자랑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름밤이면 거실 앞 테라스에 나가 모기향을 피워 놓고 놀았다. 동생은 테라스로 뛰어 올라오는 개구리를 잡아 바닥에 내 던져 혼절을 시키곤 했다. 어떤 놈은 정신을 차린 후 도망을 가기도 했고, 끝내 깨어나지 못한 놈들은 다음날 닭 모이가 되었다.

 

금년에는 봄이 일찍 찾아 올 모양이다. 지난 ‘그라운드호그 데이’ (2월 2일)에 두더지가 제 그림자를 보지 못해 봄이 일찍 올 것이라고 한다. 나는 두더지보다 앞서 봄이 빨리 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설이 일찍 왔으니, 봄도 일찍 올 것이다.

 

습도가 높은 한국에서는 따스한 봄날이면 들판에서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벽제 집 길 건너에는 군부대가, 뒤쪽으로는 논밭이 있었다. 농부는 논밭 뚝을 손보는 일로 봄을 시작한다. 농부가 삽을 내리쳐 땅을 다지면 잠시 후 “쿵’하는 소리가 들린다. 빛의 속도가 소리보다 빠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현상이다.

 

겨울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이웃 아주머니를 불러 엿을 고아 강정을 만들었다. 엿이 묽을 때 떠놓으면 조청이 된다. 더 고아 걸쭉해지면 볶아 놓은 콩과 튀긴 쌀, 깨 등을 넣고 강정을 만들었다. 미리 만들어 둔 가래떡을 밥솥에 넣어 쪄서 조청에 찍어 먹었고, 강정은 겨울밤 흑백 TV 앞에 모여 앉아 연속극을 보며 먹었다.

 

눈 온 다음날, 사람의 발자국이라곤 없는 하얀 논밭을 배경으로 서 있던 나목들은 한 폭의 산수화였다.

 

갈 수 없어 기억으로만 추억하는 것이 고향이 아닌가 싶다. 혹시나 나이가 더 들어 한국에 가서 살게 된다면, 그때서야 나는 미국을 고향으로 그리워하게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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