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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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속의 초콜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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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음

2020. 7. 9.

얼마 전의 일이다. 그날은 여느 때보다 출근이 조금 늦었다. 서둘러 사무실에 들어서니 책상 위에 낯선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따로 포장을 한 것도 아니고 누가 보냈다는 쪽지 따위도 붙어있지 않았다.

 

직원들 중에는 휴가를 다녀오며 작은 기념품을 사 와 나누어주는 이들이 더러 있다. 궁금한 마음으로 열어보니 라스 베이거스의 화려한 야경이 새겨진 문진이었다.

 

그날 나는 반나절이나 걸려 내게 선물을 사다준 사람을 찾아냈다. 6층에 근무하는 여직원이 언니와 함께 라스베이거스에 다녀온다던 말이 생각이 났다. 감사의 인사를 이메일로 보냈더니 오후에 답이 왔다. 그제야 겨우 궁금증이 풀렸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선물은 크리스마스 때 부모님께 받았던 일기장과 볼펜이었다. 상당히 고급 일기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 2~3년 동안 계속 똑같은 것을 받았다. 나는 그 일기장 선물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건 마치 일 년 치 숙제를 미리 받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일주일 또는 열흘에 한번 정도 날을 잡아 일기장의 빈칸을 채워 넣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었다. 동생과 놀았다. 오후에는 싸웠다. 저녁에는 생선구이를 맛있게 먹었다. 일찍 잤다." 내용을 순서만 조금씩 바꾸어 적어 놓았다가 아버지가 일기장을 검사하는 날 크게 혼이 났던 일이 생각난다.

 

내 책상 위에는 작은 조가비가 든 모래시계가 놓여 있는데 그걸 선물로 주었던 메리는 작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끔씩 나는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고 떨어지는 모래알을 보며 잠시 그녀를 생각하곤 한다. 

 

내가 이제껏 받았던 선물 중 가장 정성이 많이 들어간 것은 어떤 여학생이 떠준 파란색 털실 조끼였다. 나를 생각하며 한 줄씩 짜 내려갔을 그 조끼를 실은 몇 번 입지도 못했다. 너무 작아 몸에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딸의 나이가 그때 그녀 또래다. 딸아이도 뜨개질을 좋아해 가끔 친구를 준다며 목도리 따위를 짜곤 한다. 뜨개실이 필요하다고 할 때마다 나는 불평 없이 아이를 실 파는 가게에 데려다준다. 누군가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도 그 아이를 기억해 준다면 그 또한 나름대로 근사한 일이 아닌가.

 

살다 보면 선물을 주고받아야 할 때가 많다. 내가 선물을 챙겨 주어야 하는 이들은 점점 현금을 선호하고 있다. 그런 모습에서 세상이 물질주의로 야박해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조금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을 사야 하나 하는 고민이 없어 좋다. 아마도 나의 선물 고르는 안목이 그다지 밝지 못한 탓이 아닌가 싶다. 

 

현금은 아니지만 용도는 비슷한 선물권을 받아 보았는데,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을 살 수 있다는 편리함과 실속이 있다. 

 

요즘 나는 부담 없이 작은 선물을 주어야 할 때는 초콜릿이나 커피를 선물한다. 특히 초콜릿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포리스트 검프'라는 영화에 대충 이런 내용의 대사가 나온다. 

 

"인생은 한 상자의 초콜릿과 같습니다. 상자 안에 든 온갖 모양의 캔디는 모두 그 맛이 다르지요. 입안에 넣고 먹어보기 전에는 그 맛을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기대하고 집었던 캔디가 전혀 다른 맛이었을 때의 실망감이나 우연히 집어 든 캔디에서 찾아낸 새로운 맛의 기쁨을….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치는 일들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내용물을 알 수 없는 포장지에 싸인 선물을 좋아한다. 포장지를 뜯어내며 느끼는 미지의 무언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좋기 때문이다.

 

(이 글은 10여 년 전에 중앙일보에 실었던 글이다. 털목도리를 짠다고 실을 사러 다니던 딸아이는 작년에 결혼을 했고, 현찰 선물을 좋아하시던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초콜릿을 선물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단 것을 먹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와인 선물한다. 캘리포니아에는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와인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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