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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남 고재형 심도기행 해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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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기행 해설

2019. 5. 15.

화남 고재형 심도기행 4



이 책이 나온지 올해로 꼭 110년이 되었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선생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김형우 박사에 의해 완역되었다.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 인천대학교

인천학 연구원


譯註 沁都紀行
초판인쇄 2008년 12월 26일
초판발행 2008년 12월 31일
저 자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역 자 김형우ㆍ강신엽
발 행 인 이갑영
발 행 처 인천학연구원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편집·인쇄 도서출판 아진


❚발간사 ❚일러두기


발간사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김형우 박사에 의해 완역되었다.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심도기행(沁都紀行)』에 수록된 한시 작품들은 강화의 오랜 역사와 수려한 자연,

그리고 강화가 길러낸 수많은 의인과 지사들의 행적에 바치는 아낌없는 찬가(讚歌)이다.

이 기행시문은 강화도 선비 화남 선생이 지은것으로 모두 256 수의 7언 절구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강화의 마을 유래와 풍경, 주민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


고재형은 1846년 강화군 두운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며 1888년(고종25년)에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은 선비였다.

그는 “평소 충의와 대의를 쫓은 인물들을 흠모하였으며 전통이 급속히 사라져가는 풍속을 개탄하였다”고 한다.

고재형은 자신이 태어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에서 출발하여

당시 강화군 17개면 100여 마을을 필마(匹馬)에 의지하여 빠짐없이 섭렵하였다.


저자가 “강화부 전체의 산천과 고적을 다시 탐방하기 위해” 단신으로 강화기행을 떠난 것은 1906년 봄이었는데

강화 기행을 감행한 동기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터인 강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었을 터이다.


한편 그가 강화순례를 떠난 해가 서구문명이 물밀듯 밀려들어 전통과 유풍이 점차 사라져 가는 때였으며,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암울한 시대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재형이 순례자가 되어 강화의 땅 구석구석을 밟으며 걸어갈 때의 심정은

훗날 이상화 시인이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을) 다리를 절며 걷고 싶다”고 토로했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심도기행(沁都紀行)』은 독특한 구조와 내용을 지닌 기행시문이다.

우선 기존의 기행문학이 출발지와 목적지라는 두 점을 잇는 선형적 구조의 플롯을 취하고 있음에 비해

이 작품은 강화도의 모든 마을을 샅샅이 탐방해가는 공간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심도기행(沁都紀行)』의 문체는 시와 산문이 병치되고 서로 조응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한편의 서사시처럼 읽힌다.


256수의 7언시를 골격으로 삼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한시 작품과 관련되는 주석이나 해설을 통해서도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특히 산문으로 기술된 강화의 역사적 유산이나 자연경관, 풍속과 생활상, 성씨와 인물에 대한 서술은 그 자체로 지지(地誌)를 이룰 만큼 풍부하고 자세하다.


한편 『심도기행(沁都紀行)』은 저자 자신이 나고 자라고 생활한 고향땅을 기행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보통의 기행문학은 주체가 먼 이방 지대로 여행하는 과정에서 접하는 이색적 풍물이나 감흥을 기록한 산물이다.

자신의 삶터가 성찰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면 거기에는 주체나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일 터이다.

친숙한 장소가 낯선 공간으로 현현(顯現)했을 때 주체의 대응 방식은 낯선 공간을 다시 자신의 영토로 전환하기 위한 시도를 감행하는 것이다.

즉 이 책은 전통사회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낯선 공간으로 떨어진 향토를 재발견하여 전유(專有)하기 위한 주체의 대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대전환기 향토문학 가운데 선편에 놓을 수 있겠다.


『심도기행(沁都紀行)』의 입체적 성격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텍스트를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ʻ권리ʼ를 허락해준다.

문학적 텍스트로, 그리고 민속지로, 지리지로도 손색이 없다.


이 책을 읽는 분들께 화남 선생이 100년 전에 노래하며 홀로 걸었던 강화의 땅을 밟으며,

강도(江都)가 겪어 온 기나긴 수난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돌아보고,

그 땅이 길러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ʻ新 심도기행ʼ을 떠나보자고 권유하고 싶다.


2008년 12월
인천학연구원장 이 갑 영


일러두기


1. 이 책은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이 1906년 강화도의 각 마을 명소를 직접 방문하여 256수의 한시(漢詩)를 짓고,

그 마을의 유래와 풍광, 인물, 생활상을 설명한 산문을 곁들인 기행문집 『심도기행(沁都紀行)』을 번역한 것이다.
2. 『심도기행(沁都紀行)』은 필사본 2종이 조사되었으며, 그 중 종손 고승국이 소장하고 있는 ʻ고승국소장본ʼ을 저본으로 삼았고,

구창서의 발문이 있는 ʻ구창서발문본ʼ을 부본으로 삼아 대조하며 번역하였다. 번역문 뒤에 저본으로 삼은 ʻ고승국소장본ʼ을 영인본으로 수록하였다.
3. 원문의 수록 순서대로 한시 256수와 해설문을 배열하되, 당시의 면(面) 별로 묶어서 편집하였다.
4. 제목이 없는 한시는 바로 앞의 제목을 따르거나, 내용 중에서 주제어를 뽑아 제목으로 삼고 끝에 ʻ*ʼ를 붙여 구별하였다.
5. 지명의 주석은 ≪강화지명지≫(강화문화원, 2002)와 ≪한국지명총람-강화군≫(한글학회, 1986) 등을 참고하고, 현지 주민들의 증언으로 보완하였다.
6. 인물의 주석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시스템의 자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주로활용하였다.
7. 이 책의 각주는 모두 역자가 단 것이며, 저자의 주는 본문 속에 포함시켰다.
8. ʻ구창서발문본ʼ에만 있는 구창서의 발문은 번역문 맨 뒤에실었다.
9. 이 역주본은 2005년 3월부터 12월까지 강화역사문화연구소의 강독회 회원들의 강독이 출발점이 되었다.

C O N T E N T S

❚인정면(仁政面) ····································································· 15
1. 두두미동(斗頭尾洞) 2. 백운동(白雲洞)① 

3. 백운동(白雲洞)②  4. 삼동암동(三同岩洞)

5. 서문동(西門洞) 6. 마장동(馬場洞)

7. 석성동(石城洞) 8. 대청교(大淸橋)


❚선원면(仙源面) ····································································· 24
9. 거말동(巨末洞) 10. 연동(烟洞)

11. 송공촌(宋公村) 12. 독정촌(獨政村)

13. 남산동(南山洞) 14. 용당사(龍堂寺)

15. 참경루(斬鯨樓) 16. 가리포(加里浦)

17. 신당동(神堂洞) 18. 신지동(神智洞)

19. 대문동(大門洞) 20. 염씨산영(廉氏山塋)
21. 냉정동(冷井洞) 22. 선행동(仙杏洞) 충렬사(忠烈祠)

23. 안동인 김상용 24. 벽진인 이상길 

25. 청송인 심현 26. 파평인 윤전

27. 남양인 홍명형 28. 남양인 홍익한 

29. 남원인 윤계 30. 창원인 황일호

31. 연안인 이시직 32. 은진인 송시영
33. 진주인 강위빙 34. 연안인 이돈오

35. 평해인 황선신 36. 능성인 구원일

37. 진주인 강흥업 38. 안동인 권순장
39. 광산인 김익겸 40. 김수남

41. 여흥인 민재  42. 강화수신(江華守臣)

43. 충의혼백(忠義魂魄) 44. 열녀절부(烈女節婦)

45. 선원사(禪源寺) 46. 고성인 이암(李嵒)

47. 경주정씨 48. 진주유씨

49. 창동(倉洞) 50. 이정(梨井)

51. 조산평(造山坪)


❚부내면(府內面) ····································································· 77
52. 남산동(南山洞) 53. 구춘당(九春堂)

54. 청송심씨(靑松沈氏) 55. 부내12동(府內12洞)

56. 진보 돈대 57. 충신 이춘일(李春一)
58. 남대제월(南臺霽月) 59. 서문동(西門洞)

60. 국정동(國淨洞) 61. 맥현제단(麥峴祭壇)

62. 사직단(社稷壇) 63. 문묘(文廟)
64. 명륜당(明倫堂) 65. 강당(講堂) 안연재(安燕齋)

66. 북문(北門) 67. 여제단(厲祭壇)

68. 당주동(唐州洞) 69. 북장대(北將臺)
70. 북장춘목(北場春牧) 71. 기우청단(祈雨晴壇)

72. 행궁 궁아제단(宮娥祭壇) 73. 척천정(尺天亭)

74. 장녕전(長寧殿) 75. 세심재(洗心齋)
76. 연초헌(燕超軒) 77. 규장외각(奎章外閣)

78. 상아(上衙) 79. 객사(客舍) 

80. 민풍시(民風詩) 81. 도과(道科)
82. 공도회(公都會) 83. 이아(貳衙) 

84. 중영(中營) 85. 진무영(鎭撫營) 열무당(閱武堂)

86. 선원비각(仙源碑閣) 87. 시장(市場)
88. 용흥궁(龍興宮) 89. 육궁(六宮)

90. 부내 심부윤(沈府尹) 91. 부내 최판서(崔判書)

92. 부내 김효자(金孝子) 93. 성황단(城隍壇)
94. 고려궁지(高麗宮址) 95. 동문(東門)

96. 강화부성(江華府城)


❚장령면(長嶺面) ··································································· 138
97. 장동(長洞) 98. 묵사동(墨寺洞)

99. 갑곶동(甲串洞) 100. 갑성열초(甲城列譙)

101. 이섭정(利涉亭) 102. 진해사(鎭海寺)
103. 제승곶(濟勝串) 104. 오종도비(吳宗道碑)

105. 삼충단(三忠壇) 106. 용정동(龍井洞) 

107. 용정동 남궁공 108. 용정동 황공
109. 장승동(長承洞) 110. 성정(星井) 

111. 왕림동(旺林洞) 112. 추포영당(秋浦影堂) 

113. 옥포동(玉浦洞) 114. 옥포동 황공
115. 범위리(範圍里) 116. 월곶동(月串洞)

117. 연미조범(燕尾漕帆) 118. 대묘동(大廟洞)

119. 고성당동(高聖堂洞) 120. 양양곡(襄陽谷)
121. 선학곡(仙鶴谷) 122. 소산리동(小山里洞)


❚송정면(松亭面) ··································································· 162
123. 낙성동(樂城洞) 124. 솔정동(率亭洞)

125. 숙룡교(宿龍橋) 126. 뇌곶동(雷串洞)

127. 숭릉동(崇陵洞) 128. 포촌동(浦村洞)


❚삼해면(三海面) ··································································· 166
129. 당산동(堂山洞) 130. 승천포(昇天浦)

131. 긍곡(矜谷)  132. 상도동(上道洞)

133. 하도동(下道洞)


❚하음면(河陰面) ··································································· 172
134. 하음면(河陰面) 135. 신촌동(新村洞)

136. 봉가지(奉哥池) 137. 부근동(富近洞)

138. 장정동(長井洞) 139. 양오리(陽五里)

❚북사면(北寺面) ··································································· 176
140. 산이포동(山里浦洞) 141. 철곶동(鐵串洞)

142. 덕현동(德峴洞) 143. 삼성동(三省洞)

144. 군하동(羣下洞) 145. 냉정동(冷井洞)


❚서사면(西寺面) ··································································· 180
146. 증산동(甑山洞) 147. 교항동(橋項洞)

148. 송산동(松山洞) 149. 인화동(寅火洞)


❚간점면(艮岾面) ··································································· 183
150. 별립산(別立山) 151. 창교동(倉橋洞)

152. 강후동(江後洞) 153. 이현동(梨峴洞)

154. 이현동 덕수이씨 155. 삼거동(三巨洞)
156. 신성동(新成洞)


❚외가면(外可面) ··································································· 189
157. 삼거동(三巨洞) 158. 망월동(望月洞)


❚내가면(內可面) ··································································· 190
159. 산곶동(山串洞) 160. 고산동(孤山洞)

161. 구주동(鳩洲洞) 162. 구하동(鳩下洞)

163. 황청동(黃淸洞) 164. 구포촌동(舊浦村洞)
165. 옥계(玉溪) 166. 조계동(皂溪洞)

167. 백씨산소(伯氏山所) 168. 창원황씨

169. 동래정씨


❚고려산(高麗山)과 매음도(媒音島) ····································· 196
170. 고려산(高麗山) 171. 청련사(靑蓮寺)

172. 백련사(白蓮寺) 173. 적련사(赤蓮寺)

174. 흥릉(洪陵) 175. 보문사(普門寺)


❚위량면(位良面) ··································································· 205
176. 정포동(井浦洞) 177. 외주동(外州洞)

178. 항주동(項州洞) 179. 낙인동(樂仁洞)

180. 흥천동(興川洞) 181. 산문동(山門洞)
182. 존강동(存江洞) 183. 건평동(乾坪洞)

184. 장지포(長池浦) 185. 진강산(鎭江山)

186. 목장(牧場)


❚상도면(上道面) ··································································· 213
187. 하일동(霞逸洞) 188. 하촌(霞村)

189. 묵와선생(黙窩先生) 190. 능내동(陵內洞)

191. 가릉(嘉陵) 192. 조산동(造山洞)
193. 장하동(場下洞) 194. 장하동 청주한씨

195. 장하동 평해황씨 196. 석릉(碩陵)

197. 장두동(場頭洞) 198. 추포정(秋浦亭)
199. 가릉포(嘉陵浦)


❚하도면(下道面) ··································································· 222
200. 문산동(文山洞) 201. 상방리(上坊里)

202. 내동(內洞) 203. 마니산(摩尼山)

204. 천재암(天齋庵) 205. 성단청조(星壇淸眺)
206. 망도서(望島嶼) 207. 장곶동(長串洞)

208. 여차동(如此洞) 209. 흥왕동(興旺洞)

210. 화포지(花浦址) 211. 동막동(東幕洞)
212. 해산정(海山亭) 213. 정수사(淨水寺)

214. 사기동(沙器洞) 215. 덕포동(德浦洞)

216. 선평만가(船坪晩稼)


❚길상면(吉祥面) ··································································· 238
217. 선두동(船頭洞) 218. 장흥동(長興洞)

219. 산후(山後)  220. 전등사(傳燈寺)

221. 삼랑성(三郞城) 222. 장사각(藏史閣)
223. 취향당(翠香堂) 224. 양공비(梁公碑)

225. 애창(艾倉)  226. 온수동(溫水洞)

227. 초지동(草芝洞) 228. 초지동 대구서씨
229. 직하동(稷下洞) 230. 직산동(稷山洞)①

231. 직산동(稷山洞)② 232. 직산동 제주고씨

233. 정하동(亭下洞) 234. 정두동(亭頭洞)
235. 곤릉(坤陵) 236. 길상산(吉祥山)

237. 굴곶포(屈串浦)


❚불은면(佛恩面) ·································································· 252
238. 덕진동(德津洞) 239. 대모산(大母山)

240. 손석항(孫石項) 241. 손석항 손장군(孫將軍)

242. 광성동(廣城洞) 243. 광성나루[廣城津]
244. 신현동(新峴洞) 245. 넙성동(芿城洞)

246. 둔랑촌(芚浪村) 247. 오두동(鰲頭洞)

248. 오두어화(鰲頭漁火) 249. 오두동 평양조씨
250. 사복포(司僕浦) 251. 능촌동(陵村洞)

252. 능촌(陵村) 253. 고잔동(高盞洞)

254. 지천(芝川) 255. 곶내동(串內洞)
256. 두두미(斗頭尾)


❚沁都紀行 원문 ··································································· 269


장령면(長嶺面223))


97. 장동(長洞224))


亭子山東大路傍  정자산 동쪽의 큰 길 옆에는,
柿樓苽圃各成庄  감나무와 참외밭으로 농장을 이루었네.
箇中最是權居久  개중의 으뜸은 오래 산 권씨 가문,
芸月書窓倚短床  달빛 담은 서재에서 책상에 기대있네.


○ 장동(長洞)은 강화부와의 거리가 동남쪽으로 1리인데, 대로(大路)의 곁에 있다. 옛날부터 참외밭이 많았고, 그 안에는 안동 권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98. 묵사동(墨寺洞225))


墨洞來尋博士居  묵사동에 다다라서 박사 거처 찾아가니,
諄諄敎語以經書  정성스레 경서를 가르치고 있었네.
知應此道光千古  이 도가 천년토록 빛날 것은 응당 알았으나,
一變何難古寺墟  한번 변한 옛 절터는 찾기가 어렵구나.


○ 묵사동(墨寺洞)은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때 세워진 절의 터라고 한다.
○ 함열 남궁씨 우계(牛溪) 성혼(成渾)226)의 문인 남궁명(南宮蓂)227)의 후손 승지 남궁갑(南宮鉀)228)의 조카인 겸산(謙山) 남궁은(南宮溵) 박사가 경학을 익히면서 만년에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다.


223) 장령면은 1914년 강화읍에 편입되었다.
224) 강화읍 갑곶3리의 장동마을이다.
225) 강화읍 갑곶2리 먹절마을이다. 현재 농어촌기반공사와 현대아파트 남쪽에 위치한다.



99. 갑곶동(甲串洞229))


鎭海樓臨甲串津  진해루는 갑곶진에 임하여 있는데,
春風起浪拍城闉  봄바람에 물결 일어 성벽을 치고 가네.
如噴如激千秋恨  분노한 듯 격노한 듯 천추의 한이 되어,
猶帶丁年代北塵  정축년의 오랑캐 흔적 아직도 남아 있네.


○ 진해루(鎭海樓)는 갑곶진의 초루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관아와 의 거리가 20리이다.
○ 옛날에 침략했던 몽고의 장군이 “갑옷을 쌓아 건널 만하다.” 라고 하여 얕잡아본 것이다. 이첨(李詹)230)의 기문에는 이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고려사≫를 살펴 보건대 이미 갑곶이란 명칭이 있었다. 강화의 옛이름 갑비고차(甲比古次)가 나루의 명칭이 되었으니 어찌 ʻ갑ʼ이나 ʻ고ʼ가 아닌 줄 알 수 있었겠느냐. ʻ고ʼ와 ʻ곶ʼ자는 발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오류가 생긴 것이다.
○ 인조 정축년(1637)에 청나라가 침략하였을 때에 충신과 열사들이 싸우다가 많이 죽은 곳이다. 나룻가에는 제물진(濟物鎭)이 있었는데 그 진에는 만호(萬戶)가 있었다.
○ 또 유비창(有備倉)이 있었다.
○ 금의영(禁義營)231)이 있었다.
○ 나루 위에는 복파루(伏波樓)가 있었다.


○ 김창협(金昌協)232)의 시는 다음과 같다.

“눈속의 슬픈 노래에 갑곶진을 바라보니(雪裡悲歌望甲津) 

북풍이 말에 불고 성곽에 이르네 (北風吹馬到城闉)

영웅의 한맺힘을 창해가 못씻으니(滄海未洗英雄恨)

전쟁의 먼지에 눈물이 흐른다네(涕淚空沾戰代塵)

지금의 조정은 요새를 늘리니(今日朝廷增設險)

옛날부터 관방터는 사람을 기다렸네(古來天塹更須人)

태평한 세상이라 선장들도 쉬고 있고(時平臥穩樓船將)

위험에 처해서는 죽음을 불사해야지(寄語臨危莫愛身)”


○ 두 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강화의 유수부는 천연의 요새지라 (天險江都府)

바람과 연기가 진해문에 가득하네(風煙鎭海門)

돛대를 높이세워 누 밖으로 나가고(檣高出樓外)

조수가 밀려와서 성 밑에 이르네(潮滿到城根)

정축년의 한맺힘이 터전에 싸여있고(地積丁年恨)

갑곶의 원혼들이 봄날에 상심하네(春傷甲水魂)

구슬픈 노래에 격한 파도 약해지니(悲歌和擊汰) 

저 늙은 교룡이 뒤집는 듯하다네(似有老蛟飜)”


○ “섬인지라 새해에 기러기 일찍 날고(澤國新年起早鴻)

말을 타니 나 역시도 동풍을 거스르네(歸鞍吾亦溯東風)

성 주변엔 아지랑이 봄바람에 움직이고(城邊野馬吹春動)

나루터에 얼음 풀려 바다 하늘을 마는구나(渡口氷澌卷海空)

세상사와 천기는 끝끝내 흘러가고(世事天機終冉冉)

물정과 인의는 부드럽게 융화하네(物情人意也融融)

떠가는 저 배는 누대를 가리키고(舟移背指樓臺好)

꽃이 피는 시절에는 사찰을 묻는다네(花發他時問梵宮)”


○ 정상규(鄭尙揆)는 정휴(鄭庥)233)의 아들이다.

안산 부사로서 본부에 부임하여 공도회(公都會)의 시관을 지낼 때에 이곳을 건너면서 느낀 것을 시로 지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강화의 형승은 동쪽에서 으뜸인데(江都形勝冠東州)

오랑캐가 침략하게 한 것이 누구였던가?(誰使胡鞭此斷流)

갑자년을 회고하니 옛 원한이 남아있고(甲子重回餘舊恨)

산하는 그대로지만 갈수록 부끄럽네.(山河不變帶深羞)

성과 해자 예부터 증축했다 하더라도(城壕自古雖增築)

잠근 것이 지금같아 경작지가 되었구나.(鎖鑰如今更有疇)

지리와 인화는 맹자의 말씀인데(地利人和鄒聖語)

주상께서 세밀하게 추구하길 바란다네.(吾王窃願細推究)”


○ 이안눌(李安訥)234)의 시는 다음과 같다.

“진의 누는 멀리까지 바다를 누르고(鎭樓迢遞壓海梁)

초루문을 잠그니 성벽이 길구나.(鐵鎖譙門石壘長)

한수가 내려 흘러 한 물결을 나누니(漢水北來分一派)

바다 하늘은 서쪽으로 삼면을 접하네.(海天西望接三方)

지세는 옛날부터 견고한 요새라서(地勢自昔金湯險)

 왕도는 지금처럼 빛이 나네.(王道如今玉火市光)

난간에 앉아 부니 조수가 밀려오고(坐嘯曲欄潮滿港)

 무수히 돌아온 배는 고기잡는 상인이라네.(無數歸帆雜魚商)”


○ 갑진(甲津)은 일명 동진(東津)이라고도 한다.


226) 성혼(1535∼159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227) 남궁명(1566년 출생)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요서(堯瑞).
228) 남궁갑(1820년 출생) 본관은 함열(咸悅).
229) 강화읍 갑곶1리 갑곶마을이다. 갑곶나루와 제물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230) 이첨(1345∼1405)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雙梅堂).
231) 금의영(禁義營)은 금위영(禁衛營)이 옳다. <속수증보강도지>권상 官署조에 ʻ금위영은 갑곶진의 북쪽 복파루 문 안에 있다.ʼ고 하였다.
232) 김창협(1651∼1708) 조선 후기의 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중화(仲和),호는 농암(農巖)
233) 정휴(1625년 출생) 자는 대경(大卿), 본관은 경주(慶州).
234) 이안눌(1571∼163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100. 갑성열초(甲城列譙)


長城一面水平鋪  장성의 한쪽 면은 물이 넓게 펼쳐있고,
列立譙樓盡畵圖  열 지어 선 문루는 그림처럼 아름답다.
人去人來多指點  오고가는 사람들을 여기저기 가리키니,
玲瓏額月耀江都  영롱한 둥근 달이 강도를 비추고 있네.


(甲城列譙 卽本府十景之一也 畵譙錯落 粉堞暎帶 極目上下 不但金湯
之固甲於東方 亦近畿佳景之勝地也)


○ 갑성에 벌려진 초루들은 강화부 십경(十景)의 하나이다. 초루가 벌려있고 성이 어우러져 시야에 모두 들어오니 매우 견고할 뿐만아니라 동방에서도 으뜸이므로 근기지방에서는 매우 훌륭한 장소이다.



101. 이섭정(利涉亭)


漢水臨津合祖江  한강과 임진강이 조강으로 합해지고,
別流南坼泛篷窓  따로 흐른 남쪽 갈래에 거룻배를 띄웠네.
祗今利涉亭前月  이섭정 앞쪽에 떠오르는 저 달은
猶照李堂梅樹雙  이첨 선생댁 한쌍 매화나무를 비추어 주고 있네.


○ 이섭정(利涉亭)은 갑곶진의 가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 홍무 무인년(1398, 태종 7)에 이성(李晟)이 세웠다.
○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235)이 기문을 지었다. 그 기문에는 “한강과 임진이 합류하여 조강이 되어서 서쪽으로 바다로 달려가는데, 별도의 흐름을 갑곶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102. 진해사(鎭海寺236))


鎭海寺前綠草肥   진해사 앞에는 푸른 풀이 무성하고,
曇雲慧月摠依迷237)  구름 속 밝은 달은 헤메는 듯 보이누나.
寂然空塌238)無人掃 고요한 탑에는 사람 없이 비었는데,
惟有山禽帶春飛   오로지 산새들만이 봄빛 띠고 날아가네.


○ 갑곶나루의 서쪽에는 진해사(鎭海寺)가 있는데 예전에는 불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103. 제승곶(濟勝串)


濟勝串中多水聲  제승곶 가운데는 물소리만 요란한데,
朝宗東入漢陽城  조선 조정 동으로 가 한양성에 돌아갔네.
昔時何作無情物  옛적에는 어찌하여 그리도 무정했나,

不濟朝鮮濟彼淸  조선은 건너지 못했고 청나라는 건넜네.


○ 갑곶의 상류를 예전에는 제청곶(濟淸串)이라고 불렀다. 인조 정축년(1637)에 강이 얼어붙어 배가 다닐 수 없었는데, 갑자기 얼음이 깨져 청나라 군대가 건너왔다. 그러자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235) 이첨(1345∼1405)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雙梅堂).
236) 지금은 해운사(海雲寺)로 이름이 바뀌어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237) 구창서발문본에는 ʻ迷ʼ가 ʻ稀ʼ로 되어 있다.
238) 구창서발문본에는 ʻ塌ʼ이 ʻ塔ʼ으로 되어 있다.

104. 오종도비(吳宗道碑239))


甲串津西石立崇  갑곶진 서쪽에 한 비석이 우뚝하니,
壬辰天將紀吳公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오종도공을 기념했네.
峩峩浩浩山河氣  높고 넓은 강산 같은 당시의 기백,
永世同傳撫綏功  위무해준 공로를 영원토록 전하리니.


○ 선조 임진년(1592) 난리에 중국 절강(浙江)의 소흥부(紹興府)사람 오종도(吳宗道)가 흠차관(欽差官)으로서 황명을 받들어 동쪽으로 왔다. 정유년(1597) 왜가 다시 침략하였을 때에 형개(邢玠)의 군문에 소속되어 수병을 이끌고 강화에 머물면서 주민을 보살피니 섬의 모든 사람들이 신뢰하고 편안하게 여겼다. 그가 돌아갈 때에 강화도 사람들이 그를 생각해서 갑곶나루 위에 비석을 세워 떠나는 사람의 은혜를 표현하였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於鑠王師 聿遵海澨)

“아아, 천군(天軍)의 강성함은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으며,

(顯允吳公 實掌其旅)

오공(吳公)의 밝고 정성스러움은 실로 그 군사를 장악하였도다.

(仁涵義鬯 護譊歌謳)

인의(仁義)가 가득 차고 울창하여 큰 소리로 노래 부르니,

(譬彼靑颸 是吹是煦)

푸르고 서늘한 바람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 넣음과 같음이라.

(拯我燎灊 措之袵席)

우리를 불구덩이에서 건져내어 목전(目前)에 두었으며, 

(帲幪乍輟 飊馭莫及)

덮은 장막을 걷고 폭풍을 부려서 미치지 못하게 하였도다.

(嵽嵲龜趺 表玆達路)

높은 귀부(龜趺)는 대로(大路)에 드러나 보이고, 

(尼山峨峨 河水浩浩)

마니산은 높고 늠름하며 강물은 장대하다.

(繄公之烈 萬世之慕)”

아아, 공의 아름다움을 만세에 걸쳐 사모하리라.


239) 본래 갑곶나루 진해루 안쪽 언덕 위에 있었으나, 2000년에 강화역사관 비석군으로 이전되었다.

105. 삼충단(三忠壇240))


國事蒼黃昔丙丁  나라일 다급했던 지나간 병자·정축난 때,
諸公義烈劍頭汀  많은 사람 의열심에 창칼 들고 맞섰네.
表忠壇上靑苔石  표충단 위 바위는 푸른 이끼 덮였는데,
點點如斑月日星  얼룩진 반점은 해·달·별처럼 빛나네.


○ 표충단(表忠壇)은 갑곶진 위 당고개<堂峴> 남쪽 산기슭에 있었다. 황선신(黃善身), 구원일(具元一), 강흥업(姜興業)이 순절한 곳이다. 처음에는 삼충단(三忠壇)이라고 하였다. 후에 동시에 죽은 이들을 함께 배향하여 제사를 지냈으니 파총 안몽상(安夢祥)·이참(李參),초관 이사후(李嗣後), 기패관 이광원(李光遠), 출신 서언길(徐彦吉),교사 고의겸(高義謙), 정병 차명세(車命世), 철곶첨사 김득남(金得男),수군 송영춘(宋榮春) 등 모두 9명이다.
○ 유수 이유(李瑜)는 그들이 순절한 날에 합동제사를 지내고 비석을 세워 그 일을 기록하면서 표충단이라고 이름하였다.
○ 유수 정실(鄭宲)241)이 축문을 지었다. 그 축문은 다음과 같다.
“한 때의 순절은 천고의 강령이네(一時殉節 千古樹綱) 제삿날에 이르러서 삼가 제물 올리나니(玆以夫日 敬薦豆觴)” 부일(夫日)은 『예기』에 “죽은 날이다.”라고 하였다.


240) 구창서발문본에는 ʻ表忠壇ʼ으로 되어 있다.

106. 용정동(龍井洞242))


萬壽山南洞保明  만수산243) 남쪽에 보명동244)이 있는데,
嵬然古廟赫然名  높다란 옛 사당에 빛나는 명성 있네.
李公去後雲仍在  이공이 가신 후에 후손이 이어져,
世世惟殫享祀誠  대대로 정성 다해 제사를 지내오네.


○ 임진년(1592) 난리에 명나라 총병(摠兵) 이여매(李如梅)가 그의 아버지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과 함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로 왔었다. 그 자손들이 계속 우리나라에 머물러 살고 있었는데 이면(李葂)이라고 하는 자는 만수산(萬壽山) 남쪽 기슭 작은 마을에 와서 거주하였으므로 그 마을 이름을 보명동(保明洞)이라고 하였다. 영조가 이것을 듣고 그 터에서 영원백 부자를 제사지내주었다. 그 후손들은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후손 이기혁(李基赫)245)은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를 거쳐서 관직이 한성 판윤(漢城判尹)까지 올랐다. 또 그 아들은 정평 부사(定平府使)를 지냈다.


241) 정실(1701∼1776)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공화(公華), 호는 염재(念齋).
242) 강화읍 용정리로, 용구물 용구말이라고도 한다.
243) 만수산은 당산이라고도 하며, 갑곶리에서 용정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당고개라고 한다.
244) 보명동은 용구물 남동쪽에 있다.
245) 이기혁(1810년 출생) 자는 원서(元緖), 본관은 합천(陜川).장령면(長嶺面) 147

107. 용정동 남궁공(南宮公*)


杏亭春色想南宮  행정(杏亭)에 봄빛 도니 남궁 선생 생각나네,
積累餘功折桂紅  공부를 많이 하여 과거에 급제했네.
諫藁猶存承政院  정사를 논의한 글들 승정원에 남아있으니,
愛君一念始而終  임금 사랑 한 생각은 시종여일 하였네.


○ 남궁갑(南宮鉀)246)은 대대로 학문을 세습하여 철종 계유년에 (247) 강화부 도과(道科)에 합격해서 승정원 승지를 거쳤으며,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인 남궁명(南宮蓂)248)의 후손이다. 대사성 남궁침(南宮忱)249)의 10대손이다.(250)


108. 용정동 황공(黃公*)


黃公白髮坐江東  백발의 황 선생은 강화 동쪽 사셨는데,
矜式吾鄕凜有風  우리 고장 본보기로 기품이 늠름했네.

歸思倘如陶令否  귀거래 생각한 건 도연명을 닮았는가,
放鷴明月亦開籠  흰 꿩을 놓아주니 밝은 달도 문을 여네.


○ 추포(秋浦) 황신(黃愼)251)의 후손 황호석(黃浩錫)은 강화부의 분교관(分敎官)으로서 능령(陵令252))을 여러 번 역임하고 돈녕부의 도정(都正)을 지냈으며 늙어서 이곳으로 돌아와 지냈다. 그 대략은 추포영당(秋浦影堂) 조의 주(註)에 보인다.


246) 남궁갑(1820년 출생) 본관은 함열(咸悅).
247) 철종 재위기간에는 계유년이 없다. <국조문과방목>에 의하면 남궁갑은 철종 5년(1854, 갑인)에 정시(庭試) 병과(丙科) 9위에 합격하였다.
248) 남궁명(1566년 출생)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요서(堯瑞).
249) 남궁침(1513∼1567)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성중(誠仲)
250) 이 문장은 구창서발문본에 실려 있다.

109. 장승동(長承洞253))


杏園端坐郭先生  행원(杏園)에 단좌하신 곽한익 선생은,
侍立彩衣三品榮  채의 입고 임금 모시는 3품 명예 누리셨네.
認是風聲傳世世  이런 명성 인정하여 세세토록 전해지니,
一門孝烈兩紅旌  한 문중에 효자·열녀로 두 정려문이 세워졌네.


○ 청주 곽씨인 선전관(宣傳官) 일송(一松) 곽한익(郭漢益)은 관직이 종3품에 이르렀다. 그의 아버지 곽원종(郭遠鍾)254)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돈녕부의 도정을 지냈고, 그의 할아버지 곽치오(郭致五)는 효행으로 정려문을 내려 받았으며, 그의 고조 곽임도(郭林道)255)은 사마에 합격하였다. 그의 조모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열녀로써 정려문을 내려받았다.


251) 황신(1562∼1617)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정랑 대수(大受)의 아들이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252) 능령은 왕이나 왕의 친족의 무덤을 지키는 일을 맡은 종5품의 벼슬아치이다.
253) 장승동(長承洞)은 강화읍 옥림1리 장승마을이다. 도감골 서남쪽에 있으며 장승이 있었다고 한다.
254) 곽원종(1874년 출생) 자는 복려(復呂). 본관은 청주(淸州).
255) 곽임도(1744년 출생) 자는 여유(汝游). 본관은 청주(淸州).

110. 성정(星井256))


井星光彩耀姜門  우물별의 광채는 강씨 문중에 빛나는데,
銀杏樹前成一村  은행나무 앞쪽에 한마을을 이루었네.
世世簪纓承繼業  대대로 관직 올라 그 업을 계승하니,
至今高築讀書軒  지금도 책 읽는 집으로 높다랗게 세워져있네.


○ 성정(星井)은 일명 성천(星泉)이라고도 한다. 검고 차가운 물이 흐르는데 별이 떨어져서 샘이 솟았다고 한다. 진주 강씨 강세필(姜世㻶)은 음사로서 예빈시 주부를 지냈는데 처음으로 장령(長嶺)의 이곳에 들어와 살았고, 그 손자 강흥적(姜興績)은 첨정을 지냈고 둘째 손자 강흥업(姜興業)257)은 충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강흥적의 손자 강상무(姜尙武)258)·강석무(姜錫武)259) 형제는 모두 진사였으며 또 그 아우 강익무(姜翊武)260)는 우후를 지냈다. 또 그 아우 강수무(姜授武)261)는 판관을 지냈다. 강석무의 아들 강성좌(姜聖佐)262)는 무인으로써 영변 부사를 지냈으며, 강성좌의 아들 강욱(姜頊)은 무인으로서 영암 군수과 수안 군수를 지냈고 통진 부사로 있다가 경상좌도 수사로 올랐으며, 또 그 아우 강영(姜瑛)은 절제사를 역임하였다. 강욱의 아들 강계주(姜啓周)는 무인으로서 김해 부사까지 올랐다. 모두 4대가 통진 부사를 역임하였다.


256) 강화읍 월곶리 성정(星井)마을로, 별우물·뺄우물이라고도 불린다.
257) 강흥업(1575∼1637)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위수(渭叟). 권필(權韠)의 문인.
258) 강상무(1618년 출생) 자는 취지(就之). 본관은 진주(晉州).
259) 강석무(1622년 출생) 자는 석지(錫之). 본관은 진주(晉州).
260) 강익무(1625년 출생) 본관은 진주(晉州).
261) 강수무(1635년 출생) 자는 수지(授之). 본관은 진주(晉州).
262) 강성좌(1651∼1696)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111. 왕림동(旺林洞263))


復齋書榻向東城  복재 선생 글방은 동쪽성을 향해있고,
矜式吾鄕是弟兄  우리 고장 본보기는 이 두 분 형제라네.
若使國家收德器  만약에 국가에서 덕 높은 인재를 받아들일 때,
先庸此老播璜聲  먼저 이 노인을 썼더라면 명성이 퍼졌겠지.


○ 복재(復齋) 남궁호(南宮滈)는 그 아우 남궁속(南宮涑)과 함께 이 왕림동에서 거주하였으니 모두 학행이 뛰어나 한 마을에서 이름을 떨쳤지만 여전히 넉넉하게 살지는 못하였다. 부제학을 지낸 남궁찬(南宮璨)264)의 13대손이며 대사성을 지낸 남궁침(南宮忱)의 11대손이며, 문과에 합격한 남궁성(南宮惺)의 증손이고, 진사인 남궁용(南宮
鏞)의 조카이다.
263) 강화읍 옥림2리 왕림마을이다. 장승말 남쪽에 있으며, 왕림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264) 남궁찬(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여헌(汝獻), 호는 창랑(滄浪).

112. 왕림사 추포영당(秋浦影堂*)


旺林寺古在何邊  왕림사 옛 터는 어디쯤에 있는가,
秋浦影堂獨嵬然  추포 선생 영당만이 홀로 우뚝 서 있네.
想是雲仍文蔭武  생각하니 후손들이 문무 관직에 나아가고,
鳴吾東國博淵泉  우리나라 울려 퍼져 깊은 덕성을 넓혔네.


○ 왕림사(旺林寺)는 고려 때의 절이다. 지금은 폐지되어 형체도 없지만 동네 이름만이 남아있다.
○ 추포(秋浦) 황신(黃愼)의 영당(影堂)이 이 동네에 있었는데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화상찬(畵像贊)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옥병처럼 맑디맑고 대처럼 곧다네.(炯如氷壺 貞若竹筠) / 백년의 기운은 한폭의 정신이라네.(百年間氣 一幅精神)

늠름한 절개에 바르고 큰 식견일세.(凜烈之節 正大之識) / 어디서 취했는가? 주자의 학문이라네.(斯焉取斯 考亭之學)”


○ 장무공(莊武公) 지촌(芝村) 황형(黃衡)의 아들은 황원(黃瑗)이고, 황원의 아들은 황대수(黃大受)로서 문과에 합격하여 선조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주서(注書)로서 잠저의 처소에 드나들었으며 그의 행동은 그 지키는 바가 탁월해서 여론이 매우 칭찬하였다. 장차 높이 쓰일 것을 기약하였는데 병조정랑으로서 영남도에 명을 받들고 가다가 죽었다.
○ 황대수의 아들 황신(黃愼)은 호를 추포(秋浦)라고 하였는데 일찍이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사사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성혼의 제자라고 하였다. 오윤겸과 황신은 진사로서 문과에 합격하여 대성(臺省)에 들어갔으며 행동이 매우 곧아서 여러 소인에게 배척을 당했으며, 후에는 천장(天將) 접반사(接伴使)로서 오래도록 웅천(熊川)의 왜영(倭營)에 있었다. 병신년(1596)에는 통신사로서 일본에 들어가 서해문(誓海文)을 지었다. 정유년(1597)에는 호남의 안찰사가 되어서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능히 절의가 이름을 떨쳐 크게 중국의 도적들이 복종하는 바 되어 관직이 겸호조판서체찰사(兼戶曹判書體察使)까지 올랐다. 광해군 때에는 이이첨(李爾瞻)에게 모함을 받아 죽음을 겨우 면해서 옹진(瓮津)에 유배되어 죽었다. 인조반정이 있은 후에는 우의정에 추존되었으며 문민(文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문민공의 아들 황일호(黃一皓)는 호를 지소(芝所)라고 하였는데 인조 을해년(1635)에 군수로서 과거에 합격하여 의주 부윤에 오르고 풍옥(風玉) 조수륜(趙守倫)265)을 사사했는데, 주나라를 종주로 여기는 뜻으로 인해 청나라 오랑캐들에게 잡혀가게 되었다. 인조가 천금(千金)을 들여서라도 구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단지 휼전만을 거행하였다. 좌찬성으로 추존되었으며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받았다. 부여의 의열사(義烈祠)와 운봉의 용암서원(龍庵書院)에 배향되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어주었다. 강화부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지소(芝所)의 증손 황사용(黃士用)은 오수당(悟修堂)이라 호를 하였는데 글씨를 잘 써서 세상에 유명하였다. 유수 황경원(黃景源)266)은 ʻ오수당기(悟修堂記)ʼ를 지었다.
○ 지소의 현손 황경조(黃景祚)는 승지 황윤(黃玧)267)의 증손이다.장녕전의 참봉으로 동부(東部) 도사(都事)를 지냈다.
265) 조수륜(1555∼1612)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지(景至), 호는 풍옥헌(風玉軒)
266) 황경원(1709∼1787) 조선 후기의 문신·예학자(禮學者).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
267) 황윤(1623년 출생) 자는 집중(執中). 본관은 창원(昌原).
○ 아술당(蛾述堂) 황진(黃璡)은 우암(尤菴)과 동춘(同春)을 사사하였으며 효도하는 마음을 오로지 하였고 창릉(昌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지평에 추증되었다.
○ 쌍송당(雙松堂) 황하민(黃夏民)은 황진(黃璡)의 아들이다. 형 황하신(黃夏臣)268)이 계묘년(1723)에 참화를 당하자, 이로 인하여 모든것을 포기하고 섬으로 돌아와 다시는 갑곶진을 건너지 않겠다고 맹서하였다. 일찍이 오류천(五流川)에 거주하면서 대문을 닫고 손님을 사양하였다. 임진년(1772)에 경녕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관직이 직산 현감에까지 이르렀다.
○ 황하민의 아들 황상경(黃尙敬)269)은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황상경의 손자 황면철(黃勉喆)270)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13. 옥포동(玉浦洞271))


紫紋村裡卜居閑  자문촌엔 사람들이 한가로이 사노니,
物外田園倚水山  속세 벗은 전원에서 산수에 기대 사네.
白髮靑衫黃上舍  백발에 푸른 옷 입은 황복 진사는,
暮年詞賦動江關  나이 들어 시를 잘 지어 강화에서 유명했네.


○ 자문리(紫紋里)272)는 옥포동(玉浦洞)의 작은 지명이다. 방촌(尨村) 황희(黃喜)의 후손 황복(黃馥)273)은 예문에 정밀해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268) 황하신(1656년 출생) 자는 종명(宗明). 본관은 창원(昌原).
269) 황상경(1688년 출생) 자는 일경(一卿). 본관은 창원(昌原).
270) 황면철(1739년 출생) 본관은 창원(昌原).
271) 강화읍 옥림리와 월곶리에 걸쳐 있는 개울 옥개 옆의 마을이다.
272) 강화읍 옥림리의 도감골이다.

114. 옥포동(玉浦洞) 황공(黃公*)


玉浦東邊海屋深  옥포 동편에는 바닷가 집도 깊은데,
黃公昔日炳丹心  그 옛날 황공은 충심으로 빛을 냈지.
務安後裔今司果  무안 현감 후예들은 사과 벼슬 올랐는데,
不遇衿懷寓酒斟  품은 뜻 때를 못 만나 술 마시며 지내네.


○ 황선신(黃善身)274)의 정축년에 있어서의 충절은 충렬사 주(註)에 보인다. 그의 아들 황류(黃瑠)275)는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군수를 거쳐 가선대부 수군방어사에까지 이르렀다. 그 손자 황연(黃沇)276)은 문과로써 무안 현감을 거쳤으며 그의 6대손 황시(黃時)은 무과를 하였지만 등용되지 않아서 술만 즐겼다.


115. 범위리(範圍里)


範圍里內是安居  범위리 마을에는 안씨들이 사는데,
柿葉桑枝左右廬  감나무와 뽕나무가 집주위에 늘어섰네.

老翁當晩投鋤坐  날 저물면 노인은 호미 놓고 앉아서,
戒兒勤讀古人書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아이들을 훈계하네.


○ 범위리(範圍里)277)는 옥포동(玉浦洞)의 작은 지명이다. 강진(康津) 안씨(安氏)들이 이곳에 많이 살고 있다.


273) 황복(1834년 출생) 자는 형백(馨伯). 본관은 장수(長水). 1894년 식년시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였다.
274) 황선신(1570∼1637).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사수(士修).
275) 황류는 1651년 신묘(辛卯) 별시(別試) 병과(丙科) 88위로 합격하였다.
276) 황연(1680년 출생) 본관은 평해(平海).






116. 월곶동(月串洞278))


鷰尾亭前鎭月移  연미정 앞에는 둥근 달이 기울어 가는데,
黃公舊屋別成規  황공의 옛집이 규모 있게 서있네.
一苞奇竹千松樹  기이한 대숲과 수천 그루 솔숲은,
認是當年種德基  그 당시 덕 베풀던 터인 줄을 알려주네.


○ 성종과 중종 때 창원 황씨 판서 지촌(芝村) 황형(黃衡)279)은 무로써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번 전공을 세워서 관직이 공조판서에까지 올랐으며 일찍이 강화도로 물러나 거주하면서 월곶(月串)의 연미정(燕尾亭) 아래에다가 집을 짓고 종을 시켜 나무를 심었는데 수천 그루에 이르렀다. 어떤 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이 심느냐?”라고 말을 하자 지촌은 “후에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진년(1592) 난리 때에 첨병과 의병이 강도에 들어와 지켰는데 배와 목책들이 모두 마련되어서 모자람이 없게 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멀리 보는 식견에 탄복하였다.

○ 월곶에 진을 설치한 후에는 옛 집터를 진(鎭)의 관아로 삼았다. 지금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새집처럼 견고하였다. 서로 전하기를 “바꾸려고 하면 재앙이 들었다. 섬돌 아래에는 대나무 숲이 있었는데 지촌이 직접 심은 것이다. 마도(馬島)에서 군대를 돌릴 때 옮긴것이다.”라고 한다. 공은 휘가 형(衡)이며 시호가 장무(莊武)이다.


277) 범위리는 용구물 남동쪽마을로 범우리·범옹골·보명동이라고도 불린다.
278) 강화읍 월곶리로 예전에 월곶진(月串鎭)이 있었다.
279) 황형(1459∼1520)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언평(彦平).





117. 연미조범(鷰尾漕帆)


鷰尾亭高二水中  연미정 높이 섰네 두 강물 사이에,
三南漕路檻前通  삼남지방 조운 길이 난간 앞에 통했었네.
浮浮千帆今何在  떠다니던 천 척의 배는 지금은 어디 있나,
想是我朝淳古風  생각건대 우리나라 순후한 풍속이었는데.


○ ʻ연미정 조운선의 돛대ʼ는 강화부 10경(景)의 하나이다. 삼남 지방의 조운선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모두 이 정자 앞을 경유하면 이것이 큰 볼거리였다. 지금도 정자가 여전히 있지만 조운선은 폐지되었다.


118. 대묘동(大廟洞280))


莊武祠傳大廟村  장무사는 대묘촌에 전하여 오는데,
在前列屋摠雲孫  앞에 있는 열 지은 집에 후손이 모여 사네.
枝枝葉葉春風氣  가지마다 잎새마다 봄바람 기운 가득,

盡帶皇天雨露天281)  모두 다 왕실의 은혜를 입었을 터.


○ 대묘동(大廟洞)은 고려 때에 사당을 세운 곳이다.
○ 지촌(芝村) 장무공(莊武公) 황형(黃衡)의 사당이 이곳에 있고 그 자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 장무공 황형의 아들 황침(黃琛)은 무과에 급제해서 관직이 한성 판윤을 지냈다. 황침의 동생 황기(黃琦)282)는 문과에 급제해서 관직이 경기 관찰사까지 이르렀다. 황기의 아들 황치경(黃致敬)283)은 황침의 후사가 되었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 감사를 지냈다. 황치경의 아들 황수(黃瀡)284)는 문과에 급제해서 목사를 지냈고 ʻ진해루 상량문ʼ과 ʻ강화부 향안문ʼ을 지었다. 황수의 아들 황호(黃㦿)285)는 호가 만랑(漫浪)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대사성까지 이르렀고 그의 문집이 세상에 유포되어 있다. 지금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문과와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거나 진사,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280) 강화읍 월곶리의 대묘마을로 대묵골이라고도 불린다. 고려 강화도읍기에 태묘를 두었다 전한다.

119. 고성당동(高聖堂洞286))


高聖堂前近海門  고성당 앞 쪽은 해문에 가까운데,

黃翁白髮坐松軒  백발의 황옹이 松軒에 앉아 있네.
閑言此土其風好  이 땅은 풍수가 좋다고 말들 하니,
曾是林溪學士村  일찍이 임계선생의 학사촌이 있던 곳이네.


○ 부사 백죽(白竹) 윤계(尹棨)287)는 두 아우 윤집(尹集)288), 윤유(尹柔)289)와 함께 이곳[高聖堂洞]서 살았다. 윤계는 강화부의 과거를 거쳐 남양부사를 지냈고, 병자년(1636)에 죽었다. 아우 임계(林溪) 윤집은 교리의 관직에 있으면서 청나라와의 화의를 배척하다가 정축년(1637)에 죽었다.
○ 지금은 창원 황씨들이 살고 있다.


281) 구창서발문본에는 ʻ天ʼ이 ʻ恩ʼ로 되어 있다.
282) 황기(1498∼1539).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중온(仲韞). 공조판서 형(衡)의 아들이다.
283) 황치경(1554∼1627)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이직(而直), 호는 몽죽(夢竹).
284) 황수(1587년 출생) 자는 행원(行源). 본관은 창원(昌原). 목사를 지냈다.
285) 황호(1604∼165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자유(子由), 호는 만랑(漫浪).
286) 강화읍 월곶리 북쪽 해안가에 있는 고성동마을이다.

120. 양양곡(襄陽谷290))


姜公舊第地襄陽 강공의 옛 집은 양양골에 있는데,
楣上紅旌玉署香 문 이마의 붉은 정려 귀한 글씨 향기 나네.
荷國寵光今正尉 나라의 은총 입어 지금은 정위 벼슬,
南征西守晩歸鄕 남쪽 정벌 서쪽 수비 마치고 늘그막에 고향 왔네.


○ 진사인 진주 강씨 강시(姜偲)291)의 아들 강응생(姜應生)292)은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강응생의 아들 강위빙(姜渭聘)293)은 정축년(1637)에 순절하였다. 이 일은 충렬사 주(註)에 보인다. 강위흥(姜渭興)은 진사를 지냈다. 강위흥의 아들 강학(姜翯)294)는 문예로써 진사에 합격하고 과거에도 합격하여 일찍이 영원군수를 지냈다. 인조 병자년(1636) 난리에 이웃 고을과 약속하고는 적을 막고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군대를 소집하기도 전에 적군이 몰려들어 그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강학(姜翯)의 증손 강시겸(姜始謙)은 진사이고 강학의 형 강익(姜翌)은 무과로서 선전관을 지냈다. 강학의 7세손 강대흠(姜大欽)이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정위를 지냈다. 그는 남쪽으로는 제주목사를 지내고 서쪽으로는 해주 목사를 지냈다. 그는 지금 귀향하여 살고 있다.


○ 강위빙의 아우 강위재(姜渭載)는 임피(臨陂) 현감을 지냈고 그의 아들 강수남(姜壽楠)은 인지(麟趾) 현감을 지냈다.
○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은 정자(正字) 강학(姜翯)에게 벽상시(壁上詩)를 지어주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진양의 후손이 강화에 살고 있는데(晉陽才子住江城) 공부하기 위해서 힘든 일도 마다 않네(問字曾勞載酒行) 벼슬을 하기 위해 재물을 아끼지 않으니(本向庭闈叨地主) 사와 부에 의지한 문생이라 하였네(敢憑詞賦號門生) 을묘년에 첫 번째로 의발을 전수하니(乙卯第一傳衣鉢) 동갑 모임에 처음부터 형제를 맺었다네(庚契從初結弟兄) 밥먹다 홀연이 난리일을 생각하니(寄食忽思遭亂日) 두 집안의 지금까지 백년의 정이라네(兩家終始百年情).”


○ 두 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과거에 몽진하던 사건을 생각하니(憶昨鸞輿避虜塵) 외론 신하 이 강가로 걸어서 왔다네.(孤臣徒步此江濱)

파란 파와 흰 밥이 서로 땅을 찾으니(靑蔥白飯相尋地) 자주빛 말 붉은 옷이 다시 몸을 일으키네.(紫馬朱衣再起身)

향촌 노인 함께 살며 오늘을 공경하니(鄕叟共生今日敬) 나그네 길 일찌감치 우리 집에 머무네.(旅程曾被我家嗔)

전후로 그대 대하니 진실로 낯빛이요(對君前後眞顔色) 한 번 저무니 인간 만사 새롭구나.(一暮人間萬事新)”


○ “되박만한 작은 집 무릎은 들어가니(小齋如斗膝湛容) 그윽한 새소리에 깊은 낮잠 드는구나.(幽鳥聲中午睡濃) 달빛에 들판 끊겨 밝은것은 한 구비요(野斷江光明一曲) 산에는 나무 그늘 지는데 어두움이 천겹이네.(山回樹影暗千重) 이슬 내린 동쪽 계단에 새롭게 대 자르니(東堦露浥新裁竹) 북쪽 산 오래된 나무에 바람이 부는구나.(北塢風生舊植松) 임금 알현 그만두고 귀향해서 쉬자니(官罷見君歸臥穩) 벼슬하는 생활보다 진실로 낫다네.(眞勝抱笏趨曉鍾)”


287) 윤계(1583∼1636)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신백(信伯), 호는 신곡(薪谷).
288) 윤집(1606∼1637)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
289) 윤유(1616∼1644)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강백(剛伯), 호는 농아(聾啞).
290) 월곶리 양골 마을이다.
291) 강시는 1546년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21위로 합격하였다.
292) 강응생(1552년 출생) 자는 시망(時望). 본관은 진주(晉州).

293) 강위빙(1569∼1637) 본관은 진주. 자는 백상(伯尙), 호는 서호(西湖).
294) 강학(1601년 출생) 자는 군백(君白). 본관은 진주(晉州).

121. 선학곡(仙鶴谷295))


谷鳥翩翩仙鶴村  골짝 새들 날아 오른 선학촌 골짜기엔,
曾是金公卜居爰  일찍이 김공이 자리 잡고 살던 곳.
府留瓊韻雙詩板  강화유수 지은 시구 두 판에 새겨있고,
收得風烟入此軒  風煙을 거둬들여 이 집으로 들어가네.


○ 강릉 김씨 김수창(金睡窓)의 증손 김명호(金命浩)는 선학동(仙鶴洞)에서 살면서 ʻ학곡유거(鶴谷幽居)ʼ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유수 심성진(沈星鎭)296)이 현판에 시를 지어주었다.

“동갑내기 벗님을 보기 위해(爲見同庚友) 학동의 집으로 찾아갔다네.(來尋鶴洞家)

돌 밭 허름한 지붕 아래에(石田茅屋下) 백발되어 담백하게 살고 있네.(白髮淡生涯)”


○ 유수 김상익(金尙翼)297)이 ʻ학촌정사(鶴村精舍)ʼ에 제하여 8경(景)을 읊어서 주인인 족형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

“산의 기운 고요하니 비단으로 글을 써서(山氣微霏錦作文)

고운 산에 하늘열려 황혼에 아름답네.(天開麗岳媚斜曛)

오두의 달에 상아 돛대 비추고 (牙檣隱暎鰲頭月)

연미 구름에 피리를 비껴 부네. (畵角橫吹燕尾雲)

동쪽밭 찬 소리에 여인네 채취하고(東陌寒聲樵女採)

서쪽 밭 새벽 빛에 남정네 김을 매네.(西疇曉色饁夫耘)

감나무 숲 어찌 홀로 후손에게 물려줄까(柿林豈獨貽孫計)

나무 심고 자식에게 근면함을 가르치네.(手植庭槐敎子勤)”


295) 강화읍 월곶리 3반·4반 일대로, 고성당 서쪽 마을이다.
296) 심성진(1659년 출생) 자는 시서(時瑞) 본관은 청송(靑松).

122. 소산리동(小山里洞298))


小山叢桂管何人  소산리 계수나무 숲은 그 누가 돌보는가,
招隱歌中客意新  초은의 노래 소리에 나그네 뜻 새롭구나.
唯有村翁知務本  시골 노인 오로지 농사에 힘쓸 줄 알아,
賣綯賣草未全貧  새끼 꼬고 이엉 엮어 팔아 가난하지는 않다네.


○ 지명 소산(小山)은 <회남자>의 ʻ소산 총계로 은사를 불러 살았다.[叢桂招隱]ʼ라는 싯귀에서 연유하였는데, 지금 사람들은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있다. 겨울과 봄 사이에 새끼를 꼬고 풀을 덮어서 시장에 갔다 팔아서 생업을 돕는 이들이 많았다.


297) 김상익(1699∼1771) 본관은 강릉. 자는 사필(士弼).
298) 강화읍 대산1리 소산마을로 송학골 위쪽에 있다.

송정면(松亭面)
123. 낙성동(樂城洞299))


神城洞口聽農歌  신성동 입구에 권농가가 들리는데,
頭着黃冠背着簑  머리에 황관 쓰고 도롱이를 등에 졌네.
相語今年粮道足  금년 양식 풍족하다 서로들 말을 하고,
前冬結網受錢多  지난 겨울 그물뜨기로 돈도 많이 벌었다네.


○ 송정면(松亭面)은 강화부 관아의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낙성동(樂城洞)은 옛날에는 신성동(神城洞)이라고도 했다. 낙성돈(樂城墩) 낙성포(樂城浦)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물을 짜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124. 솔정동(率亭洞300))


率亭洞裡士多居  솔정동 마을에는 선비가 많이 살아,
鋤罷西疇坐讀書  호미질 끝내고 밭두렁에 앉아서 책을 읽네.
床頭橫張蒲席械  상머리에 부들 짜는 기계를 놓았으니,
箇中經緯識何如301) 그 중에 씨줄 날줄 있는 줄을 어찌 알았을까.


○ 송정(松亭)을 솔정동(率亭洞)이라고 하는데 강화부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10리되는 곳에 있다.
○ 제주 고씨 고숙(高 )은 우리 할아버지 대제학 영곡공(靈谷公)의 13대손이다. 영곡공의 증손 고인상(高仁相)302)은 문과에 급제하여 경기 관찰사를 지냈다. 일찍이 지공거(知貢擧)로서 시험답안이 불타는 일에 연루되어 본부의 진강(鎭江)으로 유배되어서 이쪽에 머물러 살았다. 묘가 매음도(媒音島)303)에 있다.

후손들이 이 동네에 사는데 관찰사의 손자 고자원(高自元)은 진사였다. 진사의 증손은 고상직(高尙稷)·고상설(高尙說)인데 모두 무과를 합격하였다.
○ 전의 이씨·양성 이씨·전주 이씨·강진 안씨 등이 이곳에 많이 살면서 밭 갈고 베 짜고 돗자리를 짜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다.


299) 강화읍 대산리 납성개 옆 마을이다. 납성개를 한자로 표기하여 신성포(申城浦)라 하였는데, 신성포(神城浦), 낙성포(樂城浦)로도 불렸다.
300) 송해면 솔정리 삼거리 근처로, 소나무 정자가 있어서 송정, 솔제이라고 불렸다.
301) 구창서발문본에는 ʻ如何ʼ로 되어 있다.

125. 숙룡교(宿龍橋304))


麗山水出向東流  고려산 계곡물이 동쪽 향해 흐르고,
亘一橋龍駕浦頭ʻ  용ʼ다리 걸쳤으니 포구의 어가로다.
北望崇陵何處是  북쪽의 숭릉은 어디에 있는지,
九疑雲影滿天浮  의심 많은 구름들이 하늘 가득 떠있네.


○ 숙룡교(宿龍橋)는 송정(松亭) 앞의 포구의 다리이다. 다리 상하좌우가 모두 넓은 들이다.

○ 사람들이 전하기를 “다리 북쪽에는 고려 때에 숭릉(崇陵)이있었기 때문에 본래의 이름은 숭릉교(崇陵橋)였다고 한다. 불교(佛橋)와 하교(蝦橋)가 이 근처에 있다.
302) 고인상(1620년 출생) 본관은 제주(濟州). 1651년 별시(別試) 을과(乙科) 20위로 합격하였다.
303) 삼산면 매음리이다.
304) 송해면 숭뢰리의 숙룡머리에 있는 다리이다.

126. 뇌곶동(雷串洞305))


御來峴上渚雲垂  어래현 위쪽의 물안개가 드리운 곳은,
三百年前殿坐基  삼백 년 이전에 임금 머문 터였네.
雷串洞人猶仰慕  뇌곶동 사람들이 아직도 우러러보기에,
至今不敢起耕菑  지금껏 묵힌 밭을 일굴 생각 못한다네.


○ 뇌곶(雷串)은 돈대 뒤에 있다. 인조 정묘년(1627)에 임금이 행차하였을 때 임금의 가마가 임시로 자리했던 터가 있고, 그 남쪽에 임금이 오신 고개인 어래현(御來峴)이 있다. 주민들이 지금도 전좌기(殿座基)라 부르며 감히 개간하거나 경작하지 못한다.


127. 숭릉동(崇陵洞306))


宿龍橋下雨來村  숙룡교 아래쪽에 우래촌이 있는데,
列柳枝枝拂短垣  늘어선 버들가지 낮을 담을 쓸고 있네.
曾有年兄居此地  일찍이 내 형님이 이곳에 살았는데,
春風歸自杏花園  봄바람이 살구나무정원에 저절로 돌아오네.


○ 우래촌(雨來村)은 작은 지명이다. 진주(晉州) 유씨(柳氏)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유인근(柳仁根)307)은 나와 연방(蓮榜)을 함께 하였기에 형이라 부른다.
305) 송해면 숭뢰리 우뢰(雨雷)마을이다. 어래현은 돌기와집 뒤의 낮은 고개이다.
306) 송해면 숭뢰리 숭릉다리의 북쪽 마을이다.

128. 포촌동(浦村洞308))


在昔壬辰一劫當  그 옛적 임진년에 왜적의 침입 받아,
腥塵八路共凄凉  사방팔방 피비린내로 모두가 처참했네.
最奇此地松汀字  이 지역 ʻ松汀ʼ 글자 가장 기이하였으니,
能退夷兵百萬彊  백만의 오랑캐를 거뜬히 물리쳤네.


○ 선조 25년 임진년(1592)에 왜구가 송정(松汀) 배를 대고 그 곳의 지명을 묻기에 ʻ송정ʼ이라 대답하니, 곧바로 떠나고 상륙하지 않았다. 대개 그 동쪽으로 들어올 때 ʻ송(松)ʼ 자를 만나면 반드시 패하는 징조가 있었기 때문에 피했던 것이다.
○ 송정(松亭)은 일명 송정(松汀)이다.


307) 유인근(1842년 출생) 자는 성배(聖培). 본관은 진주(晉州).
308) 송해면 숭뢰리 송정 포구가 있던 마을. 현재는 논으로 되어 있지만, 토지의 필지가 작은 면적으로 나뉘어져 있어 예전엔 시설 밀집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256수 중에서

현재 128수 옮김


계속 준비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