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산천

거친 호흡 몰아쉬며 바람 저편 굽이치는 산맥 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중앙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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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B등산여행

2020. 8. 9.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일명 : 중앙탑)

 

길을 나선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안에 자유를 만드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시간과 속도에 얽매이지 말고 천천히 편안하게 즐기기.

 

유장하게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가 감싸 안고 있는 충절의 고장, 충주(忠州)

 

충주 지역은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지정학적 특성과 풍부한 철 산지라는 점 때문에 고대 삼국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 고구려, 신라 등 고대 삼국은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계립현과 죽령 서쪽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듯이 이 지역은 삼국의 남진과 북진의 주된 통로로 활용됐다.

 

지리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했던 중원은 치열한 전투 속에 백제와 고구려, 신라 순으로 주인이 바뀌며 고려 태조 23년(940) 때 고을의 중심이란 뜻의 '충주'(忠州)로 개칭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 탓에 삼국시대의 문화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신라 석탑 중 유일하게 7층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과 한반도 내 유일한 고구려 비석인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는 중원문화의 대표적 유산이다.

지금도 충주는 중앙탑을 위시하여 대한민국 중심 땅임을 자부하고 있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충주 도심에서 남한강을 따라 하류로 8㎞가량 내려가면 강변에 웅장한 모습의 '웅장한 석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충주호에서 흘러나온 강물이 탄금대를 지나 지류인 달천과 합류한 뒤 'S자'로 휘감아 도는 지점이다.

 

탑은 높이가 12.86m이지만 언덕 위에 올려져 있어 훨씬 거대하게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탑인국보 제 6호 '충추 탑평리 칠층석탑'이다. 탑평리라는 지명도 '탑이 있는 들판'이라는 뜻이다.

 

 

천년 넘게 남한강변에 서서 물살을 바라보고 있는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이 탑은 신라석탑 중 유일한 7층 석탑으로 통일신라기에 우라나라의 중앙에 세워져 중앙탑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신라 전국토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사람이 동시에 출발하여 같은 보폭으로 걸어 만난 국토의 중앙지점에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시대 석탑 중 크기가 가장 크며, 7층의 옥개석이 균형미를 갖추고 14.5m 높이로 솟아 있다.

탑이 위치한 곳에 있던 절에 대해서는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탑 앞에는 석등이 꽂혔을 법한 팔각연화대석이 있다.

 

충주는 역사적으로 남쪽에서 한강으로 진출하는 길목이었으며, 반대로 북쪽에서 한강을 통해 남쪽을 공략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삼한시대 마한과 백제의 주요 근거지였으며 고구려 장수왕은 이곳을 정복해 국원성(國原城)을 뒀다. 신라가 차지한 뒤로는 이 지역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진흥왕은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하고 경주의 귀족과 부호들을 이주시켜 살도록 했다. 경주에 이은 제2수도로서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통일신라는 한발 더 나아가 '국토 중앙의 수도'라는 뜻의 중원경(中原京)으로 명칭을 바꾼다.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강변에 우뚝 선 채 1천2백여년간 우리나라 질곡의 역사를 굽어봐 온 탑평리 7층 석탑

지금봐도 그 위용이 대단하다

 

100년 만에 충북 충주시 '가금면' 명칭이 '중앙탑면'으로 변경되었다.

'가금면'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가흥면'과 '금천면'의 첫 글자를 따 만들어졌다.

 

'중앙탑면'이라는 명칭은 중원문화의 중심지인 이 지역에 국보 6호인 중앙탑(가금면 탑평리 7층석탑)을 보유하고 있는 등 역사문화를 꽃피웠던 지역이라는 취지에서 결정됐다.

주민들 사이에서 일제에 의해 이름이 지어지고 나서 100년 만에 면 고유의 이름을 되찾자는 분위기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 1906~1907년 한국을 찾은 주일본 독일대사관 무관인 보병 중위 헤르만 구스타프 테오도르 산더(1868~1945)가 일본인 사진작가를 고용해 촬영한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일명 중앙탑). 국보 제6호다.

기단 부분이 크게 파손돼 위태로워 보인다. 꼭대기 부분도 겨우 걸려 있다. 기단 위 1층에는 참깨로 보이는 곡식을 말리고 있다. /사진=국립민속박물관

 

▲ 일제강점기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원경.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비에 젖은 자작나무를 아궁이에 넣으면 '자작 자작' 소리를 내며 타 들어간다는 자작나무

하얀 수피가 너무 아름다워 옛날 우리 조상들이 무척 귀하게 여겼지만 워낙 추운지방에서만 자라는 탓에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나무

영화<닥터 지바고>에서 보았던 광할하고 눈부신 설경 설원 위에 하얀 수피를 입고 하늘로 곧게 뻗은 자작나무숲이 생각난다 

 

자작나무의 하얀 수피를 조심스럽개 벗겨 내 그 위에 연정의 편지를 써서 보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예로부터 남한강 수운 물류교역의 중심지였으며 내륙항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량했던 남한강 목계나루

충주 목계나루 둘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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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목계솔밭 캠핑장 목계나루 답사

장맛비가 거세게 내리는 새벽 카메라 하나들고 예정된 코스를 향하여 새벽 4시에 집을 나섰다 목계나루 충주땅 들머리 목계교. 충주 역사여행의 출발점이다. 목계교 옆엔 신경림의 ‘목계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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