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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나무 2011. 7. 8. 16:15
신숙주와 숙주나물 이야기
숙주나물은 숙주의 꼬리를 자르고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치고 데친 다음, 냉수에 헹구어 알맞게 짠 후 갖은 양념을 넣고 무쳐서 만든다. <사진출처 : 인터넷>
신숙주(申叔舟)와 숙주나물 이야기 녹두는 安豆(안두) 吉豆(길두)라고도 하며 녹두묵, 청포, 녹두빈대덕, 녹두죽, 녹두 떡고물, 숙주나물 등으로 우리 식생활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숙주나물은 녹두를 발아시켜 콩나물처럼 시루에 담고 물을 주어 싹을 틔워 기른건데 녹두나물이라고 하지 않고 숙주나물이라고 합니다. 신숙주(申叔舟)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입니다. 신숙주는 절친한 친구 성삼문과 함께 세종때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집현전 학자였습니다 신숙주는 7개국어에 능통한 언어학자 입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가장 공이 크고 높았는데 요동(遼東)에 귀양 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을 찾아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합니다 신숙주(申叔舟)가 책벌레라서 매일 밤 집현전 학자들의 당번을 대신 서주며 밤 세워 책을 읽었다는 고사는 대단히 유명합니다. 이 얘기가 세종대왕 귀에도 들어가서 세종대왕이 첫 닭이 울고서야 잠든 그에게 어의(가죽옷)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남아있습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1453.10.10) 6개월전에 고명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간 일이 있는데, 신숙주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따라갔습니다 그당시 수양대군은 안평대군,김종서,황보인등과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는 김종서의 장남 김승규와,황보인의 장남 황보석과 또 신숙주와 함께 갈것을 권합니다 김승규와 황보석은 인질이고 신숙주는 자기세력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서 입니다. 신숙주는 고명사의 서장관으로 김승규,황보석 등과 함께 수양대군을 수행 합니다. 이때 수양대군이 인간적인 후의와 배려로 신숙주와의 친분을 두텁게 쌓아 둡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으로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 합니다. 이때 신숙주는 정난공신 2등에, 성삼문은 3등으로 훈호를 받습니다. 사육신(성삼문,박팽년, 하위지, 이 개, 유응부, 유성원) 성삼문은 이에 불복하고 단종복위에 힘을 쓰다 김질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게 되고 정난공신 훈호도 삭탈 됩니다. 그때 아버지 성승(成勝)과 세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7형제)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 및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하여 혈손이 끊겼다고 합니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신숙주는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지 않아 변절자로 살아 남습니다. 신숙주의 부인 윤씨는 신숙주가 사육신이 모두 죽었는데도 살아서 귀가하자 변절한 신숙주의 욕된 처신에 의리없고 줏대없는 남자라며 그만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맙니다. (이광수의 역사 소설 《단종애사》에 나오는 내용 일부) 백성들은 이때부터 변절한 신숙주를 비꼬아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빗대어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숙주나물은 아주 쉽게 상해서 오래 보관이 불가능합니다. 제사상에도 숙주나물은 쓰지 않습니다. 사육신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변절하여 수양대군편에 가담하자 사람들은 빨리 상하는 녹두나물을 그의 이름을 빗대 숙주나물이라 부르며 조롱하였다는 이야기 입니다. 뛰어난 학식과 문재(文才)를 갖추어 조선 초기의 문물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던 것과 일제하 독립투쟁의 주역들인 단재 신채호(민족사관 정립)선생과 신규식 선생 등이 그의 후손들입니다. 후대에 종종 변절자로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이 모두가 보한재 신숙주선생이 살아 남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라고 평가해야 한다고 합니다.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그리움 - (대금 / 김영동)
출처 : 붕어알 친구
글쓴이 : 허꺼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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