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생활의 지혜(生活의 知慧)

호남인 2015. 3. 11. 07:25

 

 

 

 

 

모시

 

 

 

모시풀의 줄기껍질로 만든 실로 짠 피륙.

 

저마포(紵麻布) 또는 저포(紵布)라고도 한다. 습기의 흡수와 발산이 빠르며 빛깔이 희어 여름철 옷감으로 애용된다.

모시풀은 습기가 많고 기후가 따뜻한 지방에서 성장하며, 한국·중국·일본·필리핀·인도·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모시는 순백색이고 비단 같은 광택이 나며 내수력(耐水力)과 내구력(耐久力)이 강하다. 여름철 옷감으로 많이 사용하며, 그 밖에 레이스·커튼·손수건·책상보 등에 사용되고 보통품질은 모기장·낚시줄·천막 등을 만든다.

충청남도 한산(韓山)은 모시의 주요 재배지로서 세모시가 유명하며, 이곳의 모시를 특히 한산모시라고 하여 특상품으로 치고 있다.  

모시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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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대사전

라미

ramie, Ramie

 

 

쐐기풀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목 식물 및 그 섬유를 말한다.

 

Boehmeria nivea와 B. tenacissima의 2종이 있다. 전자는 잎 뒤가 금백색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모시풀이라고 하여, 옛부터 섬유 채취용으로 재배되었으며 좁은 의미의 모시풀은 이것을 가리킨다. 후자는 잎의 뒷면이 녹색으로 인도 등에서는 리(英 rhea)라고 부른다. 현재는 양자의 구별없이 라미(말레이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라미는 중국, 인도에서는 옛부터 사용되었고 현재도 중국에서 가장 많이 산출된다.

섬유를 분리하려면 줄기를 박피기에 걸어 본질부를 부수어 인피부(靭皮部)를 채취한다. 조(粗)섬유는 물 또는 잿물에 담그고 다시 마를 훑어 고무질이나 목질을 제거한다. 또 묽은 수산화나트륨 용액과 끓여서 목질이나 고무질을 제거하는 방법도 행해진다.

 

【성상ㆍ용도】

라미의 섬유 다발의 길이는 2~4m이고, 짧은 섬유의 길이는 평균 15cm, 폭 40μ이다. 섬유는 원주상으로 꼬임은 없으며, 섬유의 표면에 마디 모양의 융기와 균열이 있고 세포벽은 두껍다. 표백하여 순백의 광택이 강한 섬유가 된다. 강도는 6~7g/d, 신장 3~4%로 아마, 마보다 강하다. 여름철의 고급 직물이나 모기장, 손수건, 레이스, 커튼 등의 직물이나 어망, 재봉실 등에 사용된다.

 

라미 [ramie, Ramie] (화학대사전, 2001.5.20, 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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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한산모시짜기

 

 

충남 한산지방의 모시짜기.

 

모시를 짜는 도중 날실이 엉켜 풀어주는 모습.

 

 

 

지정종목: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번호: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지정일: 1967년 01월 16일

기예능보유자: 방연옥(方連玉)

 

1967년 1월 1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모시[紵 ·苧]는 마(麻)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草本)으로 삼을 가늘게 하여 만든 베를 전(絟) )이라 하고 전이 가늘고 하얀 것을 저(紵)라고 한다. 그러나 통상 우리가 사용하는 모시는 모시풀의 껍질을 벗겨 삼베와 같은 과정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을 모시베[絟布]라 하고 날을 아주 가늘게 짠 모시베를 세모시베[細紵布]라 한다.

 

모시는 저포(紵布) ·저치(紵絺) )라고도 하는데, 삼과 함께 한국에서 오래 전부터 직물로 사용되어 의류로 발전되어 왔다. 삼국시대에는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때 저포를 해외에 수출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상당한 기술의 발달이 있었고, 저포는 이미 마한(馬韓)과 예(濊)에서 생산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려시대에는 모시가 농가 부업으로 가장 중요한 서민생활의 물물교환 역할을 하였다. 이 때의 국민경제는 대부분 모시나 쌀이 화폐 대용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고려의 모시 생산은 가내수공업으로 높은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려의 모시는 중국에 수출하는 품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조선시대에도 모시 생산은 국내 수요뿐만 아니라 수출에도 큰 몫을 하였으므로 직조 기술은 더욱 발달하였다. 생산지역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한산 ·서천 ·홍산 ·비인 ·임산 ·정산 ·남포 등 충청과 전라 연안지방에서 특히 많이 생산되었는데 이곳을 저포칠처(紵布七處)라고 불렀다. 이 중에서도 한산은 예로부터 모시짜기의 본고장이었다.

 

모시풀은 키 2m 정도이며 곧게 자라는 줄기가 뭉쳐나고 많은 땅속줄기가 있다. 1년에 3번 수확하는데 처음은 5월 말~6월 초이고, 2번째는 8월 초~8월 하순이며, 3번째는 10월 상순~10월 하순이다. 거두어들이는 시기는 밑둥이 갈색으로 변하고 밑의 잎이 시들어 마를 때가 가장 좋으며, 시기를 잘 맞추어야 질이 좋은 모시를 거둘 수 있다. 기능보유자는  방연옥(方連玉)이다.

 

한산모시짜기 [韓山─] (두산백과)

 

모시풀 (Boehmeria nivea (L.) Gaud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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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한산(韓山) 모시짜기

[ Weaving of Mosi (fine ramie) in the Hansan region ]

 

 

한산(韓山) 모시짜기

(Weaving of Mosi (fine ramie) in the Hansan region)© 2004 by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등재연도: 2011년

국가: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한산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지역에서 만드는 모시로, 이 지역은 여름 평균 기온이 높으며 해풍으로 인해 습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서 모시가 잘 자라서 품질이 우수하다. 이 때문에 한산모시는 모시의 대명사로 불리어왔다.

 

모시짜기는 수확, 모시풀 삶기와 표백, 모시풀 섬유로 실잣기, 전통 베틀에서 짜기의 여러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정장·군복에서 상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류의 재료가 되는 모시는 더운 여름 날씨에 입으면 쾌적한 느낌을 주는 옷감이다. 표백한 순백색 모시의 섬세하고 단아함은 일반 의류 뿐 아니라 고급 의류에도 알맞다.

 

모시짜기는 전통적으로 여성이 이끄는 가내 작업인데 어머니가 딸 또는 며느리에게 기술과 경험을 전수한다. 또 모시짜기의 전통은 마을의 정해진 장소에서 이웃과 함께 모여서 일함으로써 공동체를 결속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현재 한산 모시짜기는 한국의 충청남도 한 마을의 중년 여성이 전수하고 있으며 충청남도에서 대략 500여 명이 모시짜기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 정보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한산에 있는 한산모시짜기 전수교육관은 주요한 기술 훈련과 교육장소이다.

 

 

 

 

본문

한산 지역의 모시짜기는 모시풀이라는 자연 재료를 이용하여 전통 베틀에서 전통 방법에 따라 모시 옷감을 짜는 기술을 말한다.

그러나 모시짜기는 단지 모시를 짜는 기술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모시를 짜는 이들이 전체 제작 과정에 즐겁게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의 레크리에이션의 형태를 띤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모시는 고대 한반도의 인접 국가에 잘 알려져 있었다.

모시는 삼국 시대(4~7세기)에 처음 수출되었고, 고려 시대(8~14세기)와 조선 시대(12~20세기)에는 주요 수출품이었다. 모시는 오늘날에도 인기 있는 여름 옷감이다. 모시짜기의 전통은 충청도와 전라도를 포함한 다른 지역까지 퍼져갔으나 모시짜기의 전통 중심지는 충청남도 한산 지역이다. 한산 지역은 서해안을 끼고 있어서 토양이 비옥하고 해풍이 불어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모시풀이 잘 자라며, 품질이 좋아 질 좋은 모시 옷감을 생산할 수 있다.

 

제작과정은 크게 재배와 수확, 태모시 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굿 만들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모시표백 순으로 이루어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설명하면 모시를 재배하여 수확한 모시를 훑고 겉껍질을 벗겨 태모시를 만든 다음, 하루쯤 물에 담가 말린 후 이를 다시 물에 적셔 실의 올을 하나하나 쪼갠다. 이것을 모시째기라고 한다.

 

쪼갠 모시올을 이어 실을 만드는데, 이 과정을 모시삼기라 한다.

모시삼기의 과정은 특히 중요한데 실을 섬세하면서도 균일하게 만들어야 아름다운 옷감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한산의 모시 옷감은 이와 같은 실의 균일도가 일정하여 더욱 단아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을 체에 일정한 크기로 담아 노끈으로 열 십(十)자로 묶어 모시굿을 만든다.

 

모시날기는 실의 굵기에 의해 한 폭에 몇 올이 들어갈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모시매기인 풀먹이기 과정을 거친 후 베틀을 이용해 모시를 짜며 마지막으로 모시표백은 물에 적셔 햇빛에 여러 번 말려야 비로소 흰 모시가 된다. 모시 옷감이 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며, 완성될 때까지 무한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모시짜기는 통풍이 되지 않는 움집에서 짜는데, 이는 습도가 낮으면 끊어지기 쉬운 모시의 속성 때문이다.

모시는 통상적으로 7새에서 15새까지 제작되는데 보통 10새 이상을 세모시(가는 모시)라고 하며 그 숫자가 높을수록 고급품으로 여긴다. 1새는 30cm 포폭에 80올의 날실로 짠 것을 말한다.한산 모시짜기는 여성이 이끄는 가내 작업의 형태로 전수되며, 여성은 고유 기술을 딸이나 며느리에게 전수하는 전통을 특징으로 한다. 또 모시짜기는 마을의 정해진 구역에서 이웃이 함께 모여 일한다는 점에서 공동체 문화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한산모시가 화폐를 대신하는 수단으로 쓰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사회·경제적 활동에서 배제되었던 여성들에게 모시짜기는 소득의 주원천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더욱 저렴하고 다루기 쉬운 여러 직물이 도입되면서 모시는 인기를 잃었으며 아울러 모시 짜는 여성의 수도 감소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한산 모시짜기 전통 기술을 보호하기로 결정하고, 이 전통의 전승을 위해 한산 모시짜기를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 후기(18세기)에 한산모시가 처음 상업화된 이래, 한산 모시짜기의 주된 목적은 소득 창출이었다. 더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 가족은 함께 모시풀을 생산하기 위해 노동을 했으며 지역사회도 힘을 모았다. 이는 모시 두레(모시 생산을 위해 공동 작업하는 것)로 이어졌고, 이후 오늘날의 특화된 활동인 한산 모시짜기로 발달하였다. 모시 두레는 주로 친지나 이웃으로 조직되어 가족과 이웃이 집단 안에서 결속되어 조화로운 분위기에서 모시와 관련된 활동을 함께 한다.

 

한산모시가 다른 지역의 모시 제품보다 더 우수하다고 평가되기 때문에, 한산 지역의 모시 생산자는 고된 생산 과정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한산 모시짜기 방법을 고수해왔다. 모시짜기는 여전히 여성 주부의 소득 원천이다. 이들은 한산 모시문화제 기간 동안 모시제품을 판매하거나 온라인을 통해 판매한다.모시는 정장·군복·상복을 비롯해 일반인을 위한 다양한 의류를 만드는 데 쓰인다. 표백한 순백색 모시의 섬세함과 단아함은 옷으로 지었을 때 우아한 느낌이 살아있어 고급 의류에 적합하다. 한편 흰색 의복은 한국을 상징하는 역사·문화적 상징으로서 한국의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능보유자 / 기능보유자

2010년 현재 한산 모시짜기 전승은 명인과 전수조교 간의 견습제와, 모시짜기를 하는 일반 가정에서 어머니가 딸에게 전수하는 식으로 지속되고 있다. 모시짜기는 수확, 모시풀 삶기와 표백, 모시풀 섬유로 실잣기, 짜기의 여러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약 500명이 모시짜기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충청남도의 전체 모시 생산량 중 한산모시로 인증 받고 있는 것은 한산 지방의 157명이 생산하는 모시에 국한되어 있다.

 

기능보유자 방연옥(方連玉,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은 젊은이에게 한산모시짜기의 전통을 장려하고 보유한 기술을 후대에 전승할 책임을 지고 있다.

 

전수교육조교로는 박승월·고분자가 있으며 아울러 충청남도 서천군에서는 한산모시관을 운영하며 한산모시의 보급 및 홍보에 힘쓰고 있다.

 

 

 

 

 

전승 정보

고대에서 현재까지 가정에서 수작업으로 모시를 짰고, 그 기술은 가내에서 전승되어 왔다. 한산 지역 모시 생산자 대부분은 어머니나 시어머니로부터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그들 중 60세 이상인 여성들은 14세, 15세부터 모시짜기 기법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기능보유자 방연옥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모시짜기 기술을 습득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모시짜기는 다른 여성 가족 구성원을 도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60년대에는 고급 모시를 짤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미혼 여성이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상적인 신붓감으로 환영받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많은 여성들은 결혼 전에 모시짜기 기술을 자진해서 배웠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모시에 대한 수요는 감소하기 시작했고 한산모시 생산자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모시짜기 기술의 전승을 위해 한산모시짜기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기계화와 산업화가 모시짜기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으나, 한산모시 종사자들은 전통 기법을 고수해 왔다. 종사자들은 모시짜기 교육생들에게 전통적인 베틀에 개선된 기법을 이용할 것을 장려하고 있다. 현대식 베틀은 확실히 더 나은 모시를 생산할 수는 있겠지만 전통적 생산 방법을 배우는 것은 조상의 슬기에 감사하며 고유한 한국적 정신과 문화를 모시짜기에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련이미지 (16)

한산(韓山) 모시짜기 [Weaving of Mosi (fine ramie) in the Hansan region]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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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옥 / 1928. 9. 9 ~ | 보유자 인정: 1967년 1월 16일

 

 

살을 째고 피를 매어 오뉴월 짧은 밤을

왈캉달캉 베를 짜서 논을 살까 밭을 살까

베를 걸어 한필 짜면 닭이 울고 날이 샌다

피를 매어 짠 모신데 어찌 이리 곱고 희냐

베틀에서 허리 펴니 이 내 몸은 백발이라

- 베틀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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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한산모시짜기”

 

 

 

모시, 곧 저포(苧布)는 우리나라 상고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기간 동안 이용되어 온 직물로서 모시풀, 곧 저마(苧麻)의 섬유를 가지고 제직(製織)하여 옷감으로 사용하여 온 동시에 외국과의 교역품으로도 이용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 제직기술은 고도로 발달하여 일찍이 40새(升, 피륙의 날을 새는 단위) 이상의 모시를 생산해냈는데 정교하기가 비길 데 없었다. 중국만 하더라도 30승포는 고귀한 용도로 사용되었고 길복(吉福)으로 15승포로 사용하여 왔던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모시(紵苧)는 마(麻)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草本)으로 삼(麻)을 가늘게 하여 만든 베를 전(絟)이라 하고 전이 가늘고 하얀 것을 저(苧)라 한다. 그러나 통상 우리가 사용하는 모시는 모시풀의 껍질을 벗겨 삼베와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모시베(苧布)라 하고 날이 아주 가늘게 짜진 모시베를 세모시베(細苧布)라 한다. 모시는 삼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직물로 사용되어 의류(衣類)로 발전되어 왔다. 또한, 천연섬유 가운데 우리나라를 알리는 질 좋은 특산물로서 해외로부터 호평을 받아 왔다.이는 우리나라가 우수한 모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자연 풍토적 여건을 가지고 있으며 모시를 제직하는 기술면에 있어서도 인근의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 등의 타 지역 모시 생산 국가들에 비해 차별화된 기능과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모시 생산지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한산지역의 모시기원은 삼국시대부터이며, 신라시대 한 노인이 건지산에서 약초를 캐러 올라갔다가 처음으로 모시풀을 발견하여 이를 이 지방에서 재배하여 모시짜기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산모시의 명성은 이미 삼한시대 그 이전부터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 특산품으로 자리를 차지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당시 인근의 변한과 진한 지역에서도 이미 광폭세포를 직조하였고 변한포 등이 진상품으로 강대국에 바쳐졌던 기록이 있으므로 예나 지금이나 타 지역에 비해 우수한 모시질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유리한 자연 환경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던 한산지역이 인근 지역과 함께 질 좋은 모시를 생산하였음은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조선시대 모시의 용도는 여름용의 소재로써 모든 종류의 옷에 사용되며 특히 외출용 겉옷과 의례용 포류, 그리고 여자들의 속바지류 등에 주로 많이 보인다. 또한 상복(喪服)과 군복(軍服)에도 사용되었다. 모시옷은 특히 하얗게 표백되고 잘 손질된 정갈한 옷 맵시 때문에 사대부가의 기품을 돋보이게 하는 고급의료이지만 이같이 표백한 흰색의 모시 외에도 다양한 색으로 염색을 들여서 입기도 하였는데 주로 쪽염과 치자염 그리고 홍화 염색을 많이 하였다.

 

근래에는 염소표백을 하여 흰 모시를 만들기도 하며, 섬유공업의 발달과 함께 수요가 줄어들어서 모시짜기 기술도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967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11월 28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 6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택견, 줄타기와 더불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모시. 삼국시대 문헌에도 등장하며 경사와 위사 모두 저마를 사용하여 짠 것을 생모시라 하는데 까실까실하여 여름철 옷감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옥색, 치자색, 분홍색 등으로 염색하여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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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 잘 짜기로 소문이 자자하던 문정옥 선생

 

 

 

문정옥 선생은 1928년 9월 9일 충남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 교율마을 302번지에서 부친 문팔봉 선생과 모친 신순철 여사의 5남 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3형제였는데 형제간에 우애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런 연유로 큰아버지가 집안 대소사를 결정하였는데 아이들 교육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여자아이들은 가르치면 못 쓴다’는 어른들의 편견 때문에 손아래 남동생들은 학교를 다녔으나 선생은 집에서 가사 일을 도왔다. 당시 화양면 교율마을에서는 모시를 많이 짰다. 문씨 집안에서는 선생의 모친만이 모시를 짰는데, 솜씨가 좋아 보름새 등 고운 세모시를 많이 짰다. 힘든 모시 짜기를 일부러 시키지 않았지만 선생은 모친의 어깨너머로 모시 째기, 삼기 등을 스스로 배웠다. 타고난 눈썰미 덕분에 또래들보다 수도 잘 놓고, 골무도 잘 만들어서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칭찬을 듣곤 했는데, 모시 자기 역시 그러했다. 선생이 모친의 가르침대로 모시를 짜서 처음으로 1필을 완성한 것이 16세 때의 일이었다. 21세 되던 해(1948년)에 한산면에 살던 김기태 선생과 혼인하였다.

 

혼례를 치른 뒤에는 남편인 김기태 선생이 베틀을 짜주어 다시 모시 짜기를 지속할 수 있었다. 평생 모시를 짜왔던 선생이 잠시 손에서 모시를 놓았던 적은 한국전쟁 때뿐이었다. 시댁은 가난했던 까닭에 소유한 밭이 없어 모시를 별도로 재배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시장에서 태모시를 사다 짜거나 삯모시를 짰다. 당시, 무엇보다도 모시를 잘 짜면 며느리를 잘 얻었다고 하였고, 모시를 못 짜면 며느리를 못 들였다고 했을 정도로 모시를 잘 짜는 며느리들이 인기였다. 그런 까닭에 식구들 식사준비나 다른 집안 일들, 들일은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이 모두 맡아서 하고 선생은 모시만 짰다. 모시를 잘 짠다는 소문이 돌면서 먼 곳에서도 모시를 맡기러 오곤 했는데 보통 모시 한 필 가격의 2~3할 정도를 공임으로 받았다. 삯모시는 동네 사람들이 와서 사정하면 짜주곤 했는데 삯모시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다 날아 가져오면 제일 어려운 모시매기와 짜기 과정을 해주었다. 모시 짜기를 한 지 20여년이 넘자 그 솜씨가 널리 알려지면서 소문을 듣고 외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1967년 1월 16일 마침내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보유자에 오르게 되었다. 그저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해온 것뿐, 보상을 바라던 것은 아니었다. 2000년에는 선생의 뒤를 이어 첫 제자 방연옥 선생이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이외에도 전수교육 조교인 박승월, 고분자 선생이 활동하고 있다. 선생은 현재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어 한산면 지현리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모시 일을 하고 싶은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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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작품

 

 

 

 

한산모시 (Hansan mosi)

 

문정옥 선생은 모시의 전통과 현재화 움직임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한산을 중심으로 한 모시 활성화 노력이 일정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도 선생의 역할에 힘입은 바 크다.

 

선생의 작품은 같은 일을 하는 분들과 비교할 때, 기술의 숙련도는 물론, 결과물의 완성도에서도 빼어나다.

 

옷감의 차이는 눈으로 변별되지 않더라도 써본 사람이 더 잘 아는 법이다.

 

 

 

 

한산모시, 문정옥, 2160×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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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옥 선생이 사용하던 베틀

 

 

 

용두머리: 베틀 선다리 위쪽에 가로로 놓여 있으며 중간과 가장자리에 홈을 파서 쇠꼬리와 눈썹대를 끼우도록 된 나무이다.

베틀신대: 베틀 신 끝에 달려서 잉아대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나무

막대벱대: 도투마리에 날실을 감을 때 날 올들이 서로 붙지 못하도록 하며, 매기를 할 때 날실의 중간 중간에 끼워 넣는 직경 2~3cm 정도의 통으로 잘라서 만든 대나무 막대기

도투마리: 날실을 감아 두는

채머리: 선다리 뒤쪽에 있는 누운다리로 도투마리를 얹도록 한 지지대

비경이: 잉아올과 사올을 벌려주며 북실이 잘 통과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는 역할

선다리: 베틀을 수직으로 지탱하는 버팀목이며 위에는 용두머리가 가로로 놓여 있다.

: 씨실인 실꾸리를 넣고 북 바늘로 고정시켜 바디 바로 앞 날줄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실을 짜는 도구이며 옆에 작은 구멍이 나서 실을 통과시키게 되어 있다. 무명실용 북은 크기가 크고, 모시용 북은 작다.

누운다리: 베틀을 수평으로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앞은 높고 뒤는 낮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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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28 서천군 화양면 출생

1967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인정

1989~2003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작품전 출품

2008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명예보유자 인정

 

 

 

 

 

한산모시(5)

문정옥 선생의 작품은 같은 일을 하는 분들과 비교할 때, 기술의 숙련도는 물론, 결과물의 완성도에서도 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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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재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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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헌강 문화재전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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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12. 16. ~ | 보유자 인정: 2000년 8월 22일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위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 김말봉 작사, 금수현 작곡의 가곡 <그네> 중

 

여인네들의 땀과 피와 침과 눈물로 완성되는 천년명품 한산모시

 

우리나라 직물의 역사상 마직물은 견직물과 함께 가장 오래전부터 의료로 사용되어 왔으며 특히 모시는 천연섬유 가운데 우리나라를 알리는 질 좋은 특산물로서 해외로부터 호평을 받아 왔다. 이는 우리나라가 우수한 모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자연 풍토적 여건을 가지고 있으며 모시를 제직하는 기술면에 있어서도 인근의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 아시아 등의 타지역 모시 생산 국가들에 비해 차별화된 기능과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대 우리나라 저마 직물의 제직에 대한 문헌 기록은 『중국정사조선전(中國正史朝鮮傳)』에 나타난 기록이 가장 오래된 사료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마직물 재배와 제직의 역사는 부족연맹국가시대에 이미 한반도 전역을 포함한 북방의 부여, 옥저, 동예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었고 당시의 마직물은 여름용 의료로써 남녀 외출용 겉옷이나 여자들의 일상복으로 많이 보편화되었으며 제직 기술면에 있어서도 폭이 넓고 섬세한 마직물을 제직하였을 정도로 이미 그 기술이 우수하였다.

 

한산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저마(苧麻) 껍질을 쪼개고 이은 실로 짠 우리나라 여름철 직물이다. 특히 한산의 모시는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말이 생길 만큼 가늘고 곱기로 유명하다. 모시풀은 다년생 식물로 보통 1년에 3번 정도 수확하는데 수확 시기가 이르면 섬유가 약하고, 늦으면 올이 굵고 거칠기 때문에 8월 초순에서 하순 사이에 수확하는 모시가 제일 좋다. 타지역 모시와 구별되는 한산지역의 모시짜기 특성은 토양과 기후, 지세를 바탕으로 생산된 모시풀의 질과 제직 기술면에서 우수성을 갖는다. 세저포(細苧布), 광폭세포(廣幅細布), 문저포(紋苧布), 사저포(紗苧布), 저포교직(紵布交織)의 측면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 세저포 :

머리카락보다도 곱게 짜여진 모시로 삼국시대는 30~40승까지 제직되었으며 고려시대는 20승포, 조선시대는 15승포까지 제직되었다. 모시의 승수는 천의 폭이 넓으면 승수가 높아지므로 당시 천의 폭을 알지 못하면 모시의 섬세함의 정도를 추측하기 어렵다. 오늘날 한산모시의 포폭은 대개 29~36cm이며 보통 최고로 곱게 짤 수 있는 것이 12승 모시라고 한다.

 

* 광폭세포 :

폭을 넓게 해서 짜서 만든 모시로 삼국시대 문헌기록에 나타나며 당시 예측되는 천의 폭의 범위는 50cm 내외, 또는 60~78cm 내외로 추측된다. 광폭의 모시는 고려시대 모시이며 현재 한산지역에서는 62cm까지 제직하고 있다.

 

* 문저포 :

고려시대 문헌기록에는 나타나나 현재까지 유물이 없으므로 그 제직법을 잘 알 수는 없으나 고려후기 직물 중에 화문(花紋)으로 된 생초 직물처럼 사직과 평직으로 교차된 형태로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사저포 :

사직(紗織)으로 짠 고급모시로 추정되며 중국의 공물로 보낸 물품 중에 사저포 공평포 등이 있었다. 당시 사직으로 짠 견직물처럼 동일한 기법으로 제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저포교직 :

저마교직(苧麻交織), 사저교직(絲苧交織), 면저교직(綿紵交織) 등 모든 다른 천연섬유와 교직을 행하여 왔다. 일반적으로 사저교직은 경사올을 견사로 짜고 위사올을 저사로 짰으며 면저교직은 “춘사”라 하며 주로 경사올을 면사로 하고 위사올에 저사를 넣어서 짰다.

 

 

 

화학섬유가 판을 치는 오늘날에도 모시의 희소가치가 여전히 높은 것은 인조섬유가 범접하기 어려운 장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피드와 효율을 지향하던 산업화의 시대가 지나고 근래 삶의 가치에 주목하게 되면서 모시는 다시 미래형 섬유의 하나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모시와 다른 섬유를 교차 직조하여 만든 천이 기능성 섬유로 활용되는 등의 상황은 모시의 저력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산모시짜기 기능은 1967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500년 역사를 지닌 한산모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방연옥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방연옥 선생은 1947년 12월 16일 충남 서천군 기산면 가공리 36번지 옹근절 마을에서 부친 방자순 선생과 모친 박수영 여사의 2남 6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선생이 모시 짜기를 처음 접한 것은 친정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는 환갑이 넘어서까지 모시 짜기를 하였는데 선생이 모시 짜기를 배우려고 할 때마다 모시짜기가 정말 힘들다며 다른 일을 하라고 하며 못 배우게 하셨다. 그러나 모시 짜기를 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자란 선생은 자연스레 접하게 되었고 6살 때부터는 바디 꿰기를 할 정도로 모시 짜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숙제보다 모시 일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는데, 사실 한창 모시에 재미를 붙였을 때에는 학교 가서도 공부하는 것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모시 하는 것만 생각나곤 했다. 그래서인지 훗날 문정옥 선생께 모시 짜기를 전수받을 때 이미 어머니한테 배운 바가 있어 보다 쉽게 터득할 수 있었다.

 

선생의 나이 29살 되던 1973년 한산면 지현리에 사는 이소직 선생과 혼인하였다. 한산면으로 시집와서 살던 중 우연한 기회에 동네에 사는 문정옥 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모시 짜기를 배우게 되었다. 문정옥 선생 댁에서 짬이 날 때마다 일을 도와드리던 중 문정옥 선생의 권유로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모시 짜기를 배우게 된 것이다. 1981년 생애 최초로 짠 모시 4필은 약 12만원을 받고 팔았다. 당시 쌀 2가마니에 해당하는 꽤 큰 금액이었다. 모시를 판 돈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생활비로 가정경제의 보탬이 되기도 하였다.

 

실을 입술로 찢어 모시섬유를 만드는 ‘모시째기’는 숙련도에 따라 품질이 좌우된다. 한산모시의 ‘숨은 비법’은 이 모시째기에 있다. 모시풀 껍질을 벗겨서 말린 다음 그것을 앞니로 쪼개는 과정은 입술이 다 부르트고 피가 날 정도로 매우 고단한 작업이다. 또한 여러 과정을 거쳐 베틀에서 모시를 짤 때도 건조한 날에는 모시가 다 바스러져서 기후가 안 좋다 싶으면 한여름에도 문을 다 닫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해야 한다. 그야말로 여인네들의 땀과 피와 침과 눈물이 고스란히 배어야 하나의 명품으로 완성되는 것이 한산모시이다.

 

선생 역시 처음 모시 째기를 할 때 입술이 부르트고 피가 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나중에는 입술에 굳은살이 박힐 정도라고 했다. 또한 모시를 쪼개려면 앞니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때 불편함이 없도록 한산지역에서 모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치과에서도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을 쓴다고 한다. 모시 일을 하면서 온몸이 파스투성이, 입술에 굳은살이 생겼고, 일하기 편하게 이도 새로 해 넣었다. 그렇게 30년을 꼬박 온몸을 혹사시켜왔다. 문정옥 선생으로부터 모시 짜기를 배우면서 모시 짜기 전 과정을 습득하게 되었다. 1980년 전수장학생이 되었고 1986년 이수자로 인정되고, 1987년 전수교육조교가 되었다가 2000년 8월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품질로 보나 들인 공력으로 보나, 모시는 서양에서 들어온 천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모시 한필이면 전통한복 한 벌하고 남자 저고리 하나가 나오는데, 좀 비싼 듯해도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대도시 백화점의 명품 옷들에 비하면 착한 가격이지요. 모시옷은 대물림 하며 입는 옷입니다.”

 

적삼과 치마 한 벌에 남자 윗도리 한 벌이 나오는 모시 한 필의 가격은 고운 세저는 150만원, 중저는 100만원, 막저는 그보다 훨씬 싸다.

 

>“처음에는 비싸다고 하시는 분들도 만드는 과정을 보시면 비싸지 않다고 해요. 아토피를 전혀 일으키지 않는 천연섬유요, 모시를 완성하기까지 손길이 4000번이나 들어가는 명품입니다.”

 

한산 지역에 시집와서 이곳의 삶을 배웠고 모시를 짜왔다. 여인에서 여인으로 전수되던 전문화를 지켜 마침내 한산모시짜기 기능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이제 세계인의 전통이 된 만큼 기술을 배우는 후학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옛날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모시를 벗 삼아 오순도순 모여 일하면 참 좋겠다.”며 대대로 한산모시짜기의 명맥을 이어나갔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내비쳤다.

 

작품

백모시 / 30×2160cm모시풀로 만든 직물을 모시라 하며 직조 후에 표백과정을 거친 것을 백모시라 한다.

모시_31x2160cm

생모시와 백모시 / 각 32×2160cm경사와 위사 모두 저마를 사용하여 짠 것을 생모시라 하는데 까실까실하여 여름철 옷감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옥색, 치자색, 분홍색 등으로 염색하여 사용하였다. 생모시를 표백한 것을 백모시라 하였으며 다듬이질을 하여 봄, 가을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백모시_1필 폭 31cm

백모시_폭 31cm

 

 

 

 

한산모시 제작과정

 

1) 태모시 만들기 :

모시나무를 베어 모시의 겉껍질을 벗기는 과정이다. 모시나무에서 겉껍질을 벗긴 후 다시 부드러운 속살만을 골라내는데, 낫과 같이 생긴 손가락 크기의 특수한 칼로 훑어서 겉껍질과 속살을 분리시킨다. 벗겨낸 속살을 한주먹의 다발로 묶어서 4~5회 물을 반복해서 적시며 양지에 말린다.

 

2) 모시째기 :

잘 말린 태모시를 이와 입술을 이용해 쪼개는 과정인데, 이때 모시의 굵기가 결정된다. 모시는 굵기에 따라 올의 굵기가 가장 가는 상저(세모시), 중간 정도의 중저, 가장 굵은 막저로 구분한다. 따라서 모시의 품질은 바로 장인의 입술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시는 보통 7새에서 15새(보름새)까지 짜는데 10새 이상을 세모시라고 하며, 숫자가 높을수록 상품으로 여긴다. 1새는 30cm 포폭에 80올의 날실로 짜인 것을 말한다.

 

 3) 모시삼기 :

모시째기가 끝난 모시는 “쩐지”라는 틀에 걸쳐 놓고 한 올씩 입술의 침을 이용해 이어붙인다. 한 주먹 정도의 모시 한 태래를 ‘한 굿’이라고 하는데 10굿 정도가 돼야 한 필의 모시를 짤 수 있다.

 

 4) 모시날기 :

모시째기가 끝난 모시는 ‘조슬대’라는 틀에 매어 한필의 모시를 짤 만큼의 실을 감는다. 모시날기를 할 때 실이 엉키지 않게 잘 해야 모시를 잘 맬 수 있다.

 

 5) 모시매기 :

모시날기가 끝난 모시를 모시짜기에 앞서 날실을 부드럽고 보푸라기가 생기지 않도록 콩풀을 먹이면서 모시베틀에 얹을 ‘도투마리’라는 틀에 감는 과정이다. 이때 왕겨불로 콩풀을 말리면서 작업을 한다.

 

 6) 꾸리감기 :

모시는 날줄과 씨줄로 엮는다. 모시매기는 날줄로 쓸 모시원사이고, 씨실이 되는 실꾸리를 만들어서 북집에 끼워 넣는 작업 과정이다. 보통 7, 8승 정도의 모시 한 필을 짜는 데는 날실로 모시굿이 10굿이 필요하며 씨실에는 꾸리용 모시굿 8굿 정도가 필요하다. 이것을 실꾸리로 계산하면 모시 한 굿은 실꾸리 약 두 개 정도에 해당되므로 씨실에 필요한 실꾸리의 수는 모시의 곱고 섬세한 정도에 따라 약 10~16개가 사용된다.

 

 7) 모시짜기 :

모시매기 과정을 거쳐 날실이 감긴 도투마리를 베틀의 누운 다리 위에 올리고 바디를 끼운 날실을 빼어 각각의 잉아에 번갈아 끼운다. 짜기를 할 때에는 베틀신대에 달려 있는 베틀신끈을 오른발의 끌신에 걸고 오른손에는 북을 쥐며 왼손에는 바디집을 잡아서 짤 준비를 한다. 모시가 짜이는 원리는 끌신을 당기고 놓고 함에 따라 베틀신대가 고정되어 있는 원산이 눈썹대를 움직여서 사올과 잉아올을 교차시켜 주게 되므로 매번 날실이 교차될 때마다 씨실이 담긴 북집을 통과시켜 씨실을 걸어 주게 되므로 천이 짜이는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모시를 짜는데 도중에 날올이 마르면 준비해 둔 물소래기의 물로 중간중간 물을 축여가며 짜야 도중에 실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

 

 8) 실 잇기 :

모시를 짜는 도중에 제일 힘든 것은 도중에 실이 끊어지는 일이다. 실이 잘 끊어지는 이유는 모시실의 질에도 문제가 있지만 습기가 부족해서 실이 건조하면 잘 끊어지게 된다. 실이 끊어졌을 때는 베틀 옆에 준비해 둔 잇기용 모시실과 눈썹끈에 붙여 둔 풀솜을 이용해서 실을 이어준다.

 

 9) 표백하기 :

다 짠 모시는 흐르는 물이나 더운물로 대충 헹군 뒤에 콩즙을 빼기 위해 잿물에 1~2시간 정도 담궜다가 건져내고 더운물을 끼얹어가며 방망이로 두들겨서 콩즙을 깨끗이 빼내는데, 이렇게 한 모시를 반제라고 하며 생모시는 이것을 그대로 말려서 손질한 뒤 보관한 것이다. 생모시를 반쯤 표백한 것을 ‘반저’라 하고 완전히 표백한 것을 ‘백저’라 한다. 반저는 생모시의 연한 갈색에서 미황색을 지닌 색이며, 백저는 눈이 부시게 하얀 모시 본연의 독특한 특성을 가지는 흰색이다. 그해 옷을 지어 입지 않을 경우는 콩즙은 뺀 후에 풀을 하지 않고 잘 접어서 보관하고 염색을 할 경우엔 풀을 하기 전에 해야 하며 모시염색은 쌀겨나 쪽, 그리고 치자나 홍화 염색 등 색이 차분하고 은근한 천연염색을 많이 한다.

약력 1947년 출생

1980년 문정옥 선생 사사

1982~1986년 전승공예대전 7~11회 입상

1990년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1993년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1995년~1996년 전승공예대전 19~20회 입상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인정

2003년 충청남도 공예품대전 특선

2003년 전국공예품대전 입선

2004년 서천군 공예품 및 관광기념품 경진대회 대상

2000년~현재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및 전수활동

 

자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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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재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fpcp2010

 

: 이치헌   /사진: 서헌강 문화재전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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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뮤지엄

모시톱

 

 

국적 >시대: 한국 >일제강점(日帝强占)

재질: 금속 >철제(鐵製), 나무

크기: 자루길이 14.5

용도 · 기능: 산업/생업 >공업 >염직(染織)

소장처: 국립민속박물관 /유물번호: 민속(민속) 015491-000

 

 

모시풀의 껍질을 벗기는 도구.

우리나라의 전통직물인 '포(布)'란 삼베와 모시를 뜻하는데 이 작물들은 우리나라에서 잘 자라 비단옷을 입기 어려웠던 서민들에게 주로 이용되었다.모시는 쐐기풀과의 다년생초로 키는 약 2m 가량이다. 금강 일대에서는 모시의 재배와 베짜기가 성행하였으며 청양, 보령의 것은 올이 굵고, 서천군 한산면에서는 세(細)모시가 유명하다.

 

모시의 제직과정을 살펴보면 크게 태모시(껍질을 모시톱으로 벗겨내면 하얀 속껍질만 남는 것), 굿모시(모시타래를 만드는 것), 필모시(천으로 만든 것)로 나누어진다. 모시풀이 성숙하면 밑둥부터 베어서 잎과 옆가지를 대칼로 쳐서 굵기와 길이, 품질의 등급에 따라 분류하여 5∼6시간 물에 담가둔 후 모시톱으로 1개의 줄기에서 2장의 껍질을 벗겨낸다.

 

모시 줄기에 있는 껍질을 대나무로 만든 모시칼로 벗기고 그 벗긴 껍질에서 섬유를 분리할 때 모시톱을 이용한다. 형태로는 물려서 훑는 나무집게같이 생긴 것과 'ㄷ'자형의 날을 세운 것이 있다. 모시는 저마 혹은 저마포, 저포라고도 하며 주로 속옷이나 여름옷에 적합하다.<유사용어>모시, 삼, 모시칼, 태모시, 모시풀, 한산, 굿모시, 필모시, 삼톱, 톱, 인피, 세모시, 저포, 저마

 

참고문헌

• 한국의 장인(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1997)

• 민족생활어사전(이훈종, 한길사, 199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충남편(문화재연구소, 1991)

• 한국민속대사전(민족문화사, 1991)

 

모시톱 (e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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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모시의 생산

 

 

모시풀은 습기가 많고 기후가 따뜻한 지방에서 성장하며,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의 중부와 남부, 일본·필리핀·인도·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모시풀은 숙근식물(宿根植物)이므로 번식방법은 실생(實生)보다 꺾꽂이[揷木]나 포기나누기[分株法]에 의한다. 한번 심으면 약 20년간은 계속 수확할 수가 있다. 수확은 성장이 끝나서 줄기의 밑부분이 갈색으로 변하고 밑의 잎이 시들어 말라버릴 때가 수확에 적당한 시기이다. 한국에서는 기후관계로 1년에 1회 수확하게 되나, 열대지방에서는 1년에 2∼3회 수확하기도 한다.

 

 

수확한 모시풀로부터 섬유를 얻는 방법은 재래식의 경우 대칼[竹刀]로 잎을 제거하고 줄기를 다발로 묶어 5∼6시간 물에 담갔다가 줄기의 밑부분 30cm 정도를 꺾어 1개의 줄기에서 2장의 껍질을 벗겨 100장을 한 묶음으로 한 다음, 1장씩 빼서 모시벗기는 틀에 놓고 모시칼로 껍질을 걸어 당겨 섬유만을 벗긴다. 이렇게 얻은 모시섬유를 맑은 물에 씻어 햇볕에 2∼3일간 말린다. 우수한 품질의 모시를 얻으려면 수일 동안을 밤낮으로 바깥에서 표백하고 여러 번 되풀이하여 말린다. 섬유가 갈색으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껍질을 벗기기 전 더운 물에 담가 산화효소를 파괴시키는 방법도 있다.

 

 

기계법으로는, 줄기를 기계에 넣으면 회전면에 구리로 만든 치판(齒板)이 12매 붙어 있어서 그것이 줄기를 압쇄(壓碎)하고 섬유를 분해시키며, 빗질[櫛梳]의 작용을 한다. 기계의 전면(前面)에서는 섬유의 찌꺼기와 목편(木片)을 긁어내어 버린다. 또한 줄기에 항상 물을 보내주는 장치가 있어서 껍질에 붙은 젤라틴(gelatine) 같은 고무질을 제거하며 또한 직물 원료에 소다·염산·과망간산칼륨·비눗물 등을 여러 번 통과시켜 제거하기도 한다. 섬유는 순백색이고 비단 같은 광택이 나며 내수력(耐水力)과 내구력(耐久力)이 강하며, 곧고 곳곳에 마디가 있으며 단면은 타원형에 가깝고 아주 큰 중공(中空)이 있다. 여름철 옷감으로 많이 사용하며, 그 밖에 레이스·커튼·손수건·책상보 등에 사용되고 보통품질은 모기장·낚시줄·천막 등을 만든다.

 

모시의 생산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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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하평3년명칠반

[ 河平三年銘漆盤 ]

 

 

평양 낙랑구역 출토 칠반평양시 출토 낙랑시대 목제 그릇.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칭별칭: 협저칠반(夾紵漆盤)

시대: 고대/초기국가 /성격: 생활용품, 공예품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제작시기·일시: 서기전 26년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정의

평양 부근 정백리의 묘에서 출토된 칠기.

 

내용

낙랑고분으로 알려진 곳으로 1931년 도굴되어 한때 일본인의 수중에 있었으나 다시 미국인의 손을 거쳐, 지금은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모시풀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졌다고 하여 협저칠반(夾紵漆盤)이라고도 한다. 모시풀을 오랫동안 물 속에 두었다가 양잿물을 섞어 짓이겨 그 속의 잡물을 빼고, 그것을 빚어서 그릇의 모양을 만든 다음, 그 표면에 옻칠을 입히는 수법인데, 그 방법은 소위 마심칠기(麻心漆器)를 만드는 수법과 같다.

 

칠을 하기 전에 태형(胎型)의 표면에는 고운 기와가루를 재〔灰〕와 조합하여 바닥을 1, 2차 고르게 문질러서 편편하게 하고, 그다음 외벽(外壁)과 뚜껑 거죽, 그리고 바닥면 등에 유연칠(油烟漆)로 검정칠을 하고, 또 그릇 안쪽에는 주칠(朱漆)을 하였다.

 

그런 다음 속칭 열칠(熱漆)이라 하여 동유(桐油 : 油桐나무의 씨에서 짜낸 기름)를 100분의 40의 비례로 혼합하여 전체를 한두 차례 덧칠한 위에 주(朱)·황(黃)·녹(綠)·백(白) 등의 재료로 문양을 그려 장식하였다.

 

이 칠반에는 ‘河平三年蜀郡西工 造乘輿具母中飯工尊……(하평삼년촉군서공 조승여구모중반공존……)’의 각명(刻銘)이 있어서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으나, 불행스럽게도 도굴 당시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파손이 심하여 명문 전체를 해독할 수 없다.

 

그 명문 중 ‘하평 3년’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연호(年號)로 서기전 26년에 해당한다. 또, ‘승여(乘輿)’라는 말은 이 칠기가 천자가 사용한 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具母中飯……’이라 한 것은 이 칠기의 명(名)을 말하고 있다.

 

참고문

• 『칠기공예론(漆器工藝論)』(김종태, 일지사, 1976)

• 「낙랑고분출토칠기(樂浪古墳出土漆器)에 대한 일고찰(一考察)」(이강미, 『한국상고사학보』11, 1992.11.)

 

하평3년명칠반 [河平三年銘漆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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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기풀 | 식물도감(植物圖鑑)

모시풀 | 식물도감(植物圖鑑)

모시풀 | 식물도감(植物圖鑑)

大韓民國 植物目錄 5. - 4,903種중 (2733. 사초과 - 3470. 쐐기풀과) | 식물도감(植物圖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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