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소 칼럼

상담소 2008. 12. 10. 18:50

3M 포스트잇은 포스트잇 중에 최고로 여겨집니다. 소위 정품(正品)이랄까요. 포스트잇의 속성을 생각할 때, 제일 좋다는 것은 그만큼 어디에도 완전하게 붙어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 글에 등장하는 남직원 집단이 그렇고, 그 속에서 함께 일하는 은주와 경미도 그렇습니다. 김팀장의 성희롱 사건에 주의를 기울이던 남직원들은 팀장이 바뀌자 누군가 다른 곳으로 옮겨붙여주기라도 한 듯 사건과 여직원들을 외면합니다. 포스트잇은 은주가 관리하는 비품들 중 하나기에, 그녀에게 기대되는 직장내 돌봄노동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직장내 성희롱을 양산하는 시답잖은 직장내 남성문화와 그 속에서 자신의 성희롱 경험을 조금은 다른 목소리로 말해내는 여직원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자, 그럼 은주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

 

 

쓰리엠 포스트잇 (부제 : 르뽀 극화, 성희롱 김팀장)


토리(treehuman@naver.com)




나는 아직도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단어로 내가 겪었던 일을 설명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답답함과 가시지 않는 찝찝함은 남아있다. 어떤 단어나 느낌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거다. 언젠가 비슷한 일을 또 겪게 될 것만 같은. 뒤통수의 서늘함 말이다.


*  *  *


나는 직장인이다. 대학에선 컴퓨터디자인을 전공했고, 졸업 후 이 회사에 들어와 벌써 3년째 일하고 있다. 나는 공공기관이나 기업들의 프리젠테이션, 브로슈어, 리플렛 같은 것들을 디자인하는 일을 한다. 내 직장은 영세한 업체들이 즐비한 인쇄분야에서도 꽤 알려지고 규모도 있는 편이다. 취업하기 힘든 시대에 전공 분야도 잘 살렸고 첫 직장도 잘 잡았으니 이만하면 요즘 시대의 괜찮은 20대로 꼽힐 만하지 않은가. 9시 출근과 5시 퇴근. 과한 프로젝트만 아니면 야근도 없고 저녁시간이면 헬스도 가고 학원도 다니고 드라마도 챙겨보니 얼마나 좋을 소냐. 난 내 직장이 좋다.


은주씨 마스킹 테잎 좀 줘요. 또 다 썼네.


아침이면 떨어진 문구류를 챙기려는 팀원들이 모여든다. 이럴 때면 괜찮은 디자인이 떠올랐다가도 까먹기 일쑤다. 왜 좋은 아이디어는 아침 이맘때쯤 떠오르고, 왜 나는 비품 담당자여야만 하는가.


여기요.


이대리에게 테잎을 건네고 비품 반출 목록에 체크를 한다. 서랍을 닫고 다시 자리에 앉아 일러스트 창을 열고 업무를 시작한다. 전처럼 화기애애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다. 경미씨와 나는 조금 더 친밀해졌지만, 입사동기인 동수는 거의 남남이 되어버렸다. 점심시간, 사무실에 둘 만 남아있는 상황이 되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누구 한 명은 11시 50분쯤 어딘가로 사라져있다. 그것 만 빼면. 사람들과 조금 불편해졌다는 것 만 빼면 난 여전히 내 직장이 좋다. 조금 더 이곳에 남아 경력을 쌓으면 더 괜찮은 회사로 이직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불편한 마음도 참고 견딜 수 있다.


*  *  *


그러니까 두 달 전이었다. 그 때만해도, 그러니까 그 일이 있기 전 까지만 해도 내 업무량은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신입으로 들어 온지 얼마 안되서 부터 팀장은 내 디자인을 꽤 마음에 들어 했었다. 주 거래처가 아닌 소규모 기업의 리플렛은 모두 나에게 맡길 정도였으니까. 학교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어떤 일을 맡겨도 제 시간에 끝내고 성실했던, 웬만큼 능력도 있었던 아이. 그래서 사람들이 나에게 일을 많이 시키나 싶었고, 좋았다. 항상 피곤해도 그러려니 했다.


언니는 왜 다 예스야. 예스맨도 아니고 예스 예스. 좀 못한다고 해봐.


동아리 후배가 나에게 했던 충고였다. 맞다. 일만 그랬던 게 아니다. 선배 누나 돌잔치 도우미에서부터 내 수업도 펑크 내고 해줬던 대타 과외까지.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고 미안하다는 말엔 하하하 웃어버리고 말았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괜히 인상 찌푸리며 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참.


녹록지 않은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나 뿐일까.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신입사원 시절. 그래. 이렇게 힘든 시대에 돈이라도 벌고 일이라도 하는 게 어딘가 ―. 하는 마음으로 계속 견뎠던 것 같다. 그렇게 훌쩍 3년을 지냈다.


점심시간. 팀원들은 항상 함께 식사를 했다. 지금처럼 외근을 나간다는 속아주기도 힘든 핑계로 끼리끼리 모여서 먹고 오는 경우도 드물었다. 식사장소는 빌딩에 있는 구내식당이나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뷔페식당이었다. 어디를 가는가의 문제는 그 날 팀장이 무엇을 먹고 싶어 하는가에 따라 달라졌다. 그래도 나는 가리는 음식이 없어 그러려니 했다. 음식가림이 심하던 이대리나 진수씨도 별 소리 못하고 따라왔다. 반찬 다섯 개 중 2개 밖에 못 집어 먹을 때는 그들이 그렇게도 불쌍해보였다.


이대리 어제 잘 잤나? 요새 좀 힘들다며?

그러게요. 하하. 마누라가 자꾸 괴롭히네요.


팀장의 시답잖은 질문으로 시작되는 유부남들의 대화가 없으면, 식사자리는 참 심심했을 것이다. 어젯밤 잠자리, 정관수술 고민, 자녀 학원비 등등. 항상 7명 쯤 모였던 식사자리 멤버는 나와 경미씨를 제외하고 모두 남자고 결혼한 사람들이었다. 경미씨도 나도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조용하고 차분하고 식사예절 바른 참한 여자들. 그들이 우리를 그렇게 불렀던가? 그렇게 식사가 끝나면 모두 함께 커피를 마시고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했다. 늘 화기애애했기에 야근도 힘들지 않았다. 


그 일이 있었던 것은 C전자의 새 브로슈어를 만드는 프로젝트가 끝나고 이틀 후였다. C전자는 우리 회사와 거래하는 업체 중 가장 큰 기업이었다. 깐깐한 팀장은 극도로 예민해져있었고, 팀원들은 제출 전 3일 가까이 야근하며 새 브로슈어와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었다. 하지만 C전자와 거래를 끊느냐 마느냐 하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할 만큼 결과는 엉망이었다. 회사의 사장이 바뀌었으니 취향도 바뀌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게 C전자 부장들을 쫓아 열심히 룸싸롱에 다니던 팀장님은 대체 무슨 영업을 했던 걸까.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들어온 팀장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지금까지 본 팀장의 표정 중 가장 지쳐보였다. 팀원들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담뱃갑 쥐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 명은 옆 팀 직원들을 불러 담배를 피러나갔다. 이대리는 다음 프로젝트를 논의하는 척 하며 진수에게 들은 C전자의 상황을 동수와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이럴 때 꼭 자기자리를 지키며 그대로 앉아 있는 사람은 경미씨와 나 뿐이다. 담배라도 배워둘걸 그랬지.


은주씨?

네.

잠깐 이리 좀 와봐.


한참을 찌그림 상을 하고 앉아있던 팀장이 나를 불렀다. 벌떡 일어나 팀장 자리로 갔다. 또 뭔가 시작하려나보다.


내가 말이야 은주씨. 그렇게 안 봤는데 오늘 가만히 보니까 안 되겠어. 옷이 그게 뭐야 응? 여기가 학교야? 좀 차려 입어. 응? 무릎에 딱 떨어지고 그거 왜 알지? 엉덩이 꽉 끼는 치마 알지 응? 스튜어디스 입는 거 그런 거. 알지 응? 그러고 다니니까 다른 회사 사람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팀장이 다혈질 기질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깐깐한 완벽주의자에게 실패의 경험은 차라리 수치이다. 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실패를 나에게, 그것도 내 옷에게 돌리는 것은 이상하다 싶었다. 아니, 이상하다는 말도 아까울 만큼 황당했다.


알겠어? 내가 지켜볼 거야.

네.


어이없는 말에 어이없게 대답을 하고 돌아서니 갑갑했다. 엉덩이에 꽉 끼는 치마? 문득 내 옷장에 걸려있는 치마들을 떠올려봤다. 꽉 끼는 치마? 그런 건 없다.


그 날 부터였다. C전자와 거래는 다행히 끊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C전자의 신임 사장은 우리 회사를 한 번 더 믿어준다고 했고, C전자의 새 브로슈어를 만드는 작업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야근과 회의의 반복이었다. 그만큼 팀장과 함께 있는 시간도 다시 많아졌다. 다혈질은 원래 그런 것이다. 평소에 차분하다 못해 친근하다가도 지 입맛에 안 맞으면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변하는 법이다. 팀장은 프로젝트가 시작된 후 다시 순한 양으로 돌아왔다. 한 가지만 빼면.


오늘은 뭐 입었나. 바지네?


모든 회의를 농담으로 시작하는 것은 팀장의 습관이었다. 그래야 팀원들의 긴장도 풀어지고 아이디어도 잘 나온다는 것이 되도 않는 농담을 던지던 팀장의 변이었다. 벌써 며칠째 팀원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팀장의 유머 소재는 ‘은주씨의 하의’였다.


오늘은 뭐 입었나. 바지네?


팀원들이 웃는다. 이대리, 진수씨, 강대리는 그렇다 치자. 입사 동기 동수, 너마저 웃는다. 내 눈치를 보며 난처함을 안 듯 얼굴을 찌그리는 것은 경미씨 밖에 없다. 


그러게요. 은주씨는 청바지가 진짜 잘어울려요 진짜. 하하.


이런 맞장구까지. 제일 친하고 잘 지냈던 친구. 그래. 선배 누나 돌잔치 이후 다시는 하지 말자던 친구네 집 경조사 봉사도 동수의 큰 아이 돌잔치에서 깨졌는데. 처음엔 동수에게도 어쩔 수 없는 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수와 팀장의 짝짜꿍은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팀장의 회의 자리 첫 농담은 변하지 않았다. 회의를 시작하고, ‘오늘은 뭐 입었나, 바지네?’ 농담이 나오고, 팀원들이 웃고, 나는 난처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면 동수를 불러 화를 냈다. C전자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두 주를 꼬박 그렇게 보냈다.


좋다고 맞장구라도 치지 말라고. 나 당황하는 거 안보이니?

누가 입고 오랬냐. 너도 팀장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고 온 거였잖아. 자업자득이지.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이잖아. 맨날 나한테 짜증내고 뭐냐. 정 그러면 팀장한테 말 하든가.


동수의 말을 따르자면, 이 상황은 그 날 그렇게 옷을 입었던 나의 실수 때문이었다.

팀장이 나에게 치마 타령을 했던 그 다음날, 난 정말 회사에 (적당히 낀) 치마를 챙겨 입고 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 때 내 생각엔 벗으라는 것도 아니고 입는 건데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팀장이 나를 불러 치마를 입으라고 했던 그 날, 그는 퇴근시간까지 나의 ‘옷’을 갖고 짜증을 냈고, 남자 팀원들은 갖은 말들로 팀장의 비위를 맞췄다. 그 날 팀장의 짜증을 종합하여 추려보자면 나는, 나의 옷차림은, 면바지에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여직원인 나는, 중소기업의 애환과 무능력의 상징이었다.


그 여직원 말야. 알지? 응? C전자 박상무 비서. 걔가 내가 그 회사 들어갈 때 마다 날 얼마나 무시하는 줄 알아?

알죠. 싸가지가 없더라고요.

몸매 좋고 얼굴빨로 비서일 하는 주제에 뭣도 아닌 게 정말.

무시하세요.

우리도 사장님한테 말해서 인테리어 싹 바꾸고 팀장실도 제대로 꾸리고 여자애들 옷도 좀 입힐까봐 응?

아 그러게요. 사장님 그런 거 보면 진짜 무심하세요.

맨날 티 쪼가리에 바지입고 저게 뭐야 저게.


원래 디자인 회사는 복장이 자유로워야 한다며 신입사원이던 나를 격려하던 팀장이었다. 풋풋한 여대생 느낌이라며 좋아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옆에서 적절하게도 잘 대꾸하던 동수는 정말. 일주일을 가야 바지 하나 티 하나로 출근하는 동수는. 아니, 그의 옷차림은 둘째라고 해도 대학 졸업하고 만난 사람 중 제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동수는. 그 때부터 그에게 묘한 배신감이 들었다. 그 날 밤. 집에 가서 티 쪼가리가 넘치는 내 옷장이 아닌 언니 옷장을 뒤졌다. 스튜어디스 치마. 꽉, 까지는 아니어도 적당히 끼는 치마를 골랐다. 치사해서 보란 듯이 입어주마 싶었다. 정말 입으면 다시는 그런 이상한 소리는 안하겠지. 그래. 꼭 팀장 말 때문만이 아니라 입어봤더니 예쁜 것도 같았다. 한 번 입고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팀장이고 뭐고 일단 입으니 내 눈에 보기 좋았던 거다.


뭐야? 은주씨 치마 입었네?

네….

혹시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런 거야? 그러지마. 내가 괜히 미안하네. 허벅지 굵어서 못 입는거 뻔히 아는데 말이야. 여러분 미안해~.


치마를 입고 회사 문을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팀장은 웃기 시작했다. 그의 그 날 첫 농담은 ‘은주씨의 치마’였다. 팀원들에게 돌아가면서 사과하는 그의 모습에 남직원들은 넘어가게 웃었고 난 다시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치마 입은 모습이 이상하다고? 그렇다면 모든 것은 내 착각이 문제였던 것인가. 그날, 내가 회사에 처음으로 아가씨 치마를 입고 오던 날 이후, 나의 하의는 ‘괜찮은 유머 소재’가 되었다. 내 다리의 굵기 까지도.


*  *  *


언니 바보예요?

뭐?


C전자 프로젝트의 마지막 회의가 있던 밤, 회식자리였다. 경미씨는 화장실을 가던 나를 쫓아와 벌게진 얼굴로 쏟아부어대기 시작했다.


언니 진짜 바보 맞죠. 왜 화를 안내요?

내가 뭘.

진짜 언니는 기분이 안 나쁜가봐요. 난 옆에서 보기만 해도 속이 터지는데. 남직원들이 언니 다리 이야기하고 그러면 좀 화를 내라구요.

그냥 좀 민망한 거야. 그냥 그래 난 괜찮아.

한 두 번이 아니까 그렇죠. 나 회사 들어오고 나서부터니까 다섯 달은 됐겠네. 살쪘다고 놀려 미련하다고 놀려 너 같은 여자 누가 데려 가냐고… 언니한테 다 그러는 거, 그거 다 성희롱이예요.

야 오버하지말고 들어가.


화가 버럭 났다. 성희롱? 살쪘다고 놀리고 치마 입었다고 놀리는 게 성희롱이면 난 회사 생활을 계속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취한 얼굴로 ‘언니’라는 말까지 써가며 화를 내는 경미씨의 행동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런가. 성희롱? 아니다. 그렇지 않다. 설마. 동수가 나에게? 이대리가? 팀장이? 아니다. 조금 개념이 없는 사람들일 뿐이지 악의는 없다. 근데 무슨 성희롱이란 말인가.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니 분위기가 싸늘했다. 경미씨의 얼굴은 나를 쫓아왔을 때보다 더욱 붉어져있었다. 머리를 뒤로 넘기며 씩씩거리고 있는 경미씨 옆으로 난처한 표정의 이대리와 알 수 없는 표정의 팀장이 앉아있었다. C전자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망치고 왔던 그 날의 표정보다 더 못 봐줄 지경이었다. 동수는 알 수 없는 입모양으로 나에게 무어라 하고 있었다. 다른 남직원들은 나의 등장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들 사과 하시라구요. 네?


경미씨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했다.


경미씨 많이 취했네. 이제 그만해요 팀장님도 계신데.


동수가 경미씨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그래요. 경미씨. 많이 취했다. 내가 잘못했어. 응?


동수에 이어 다른 남직원들이 하나 둘 경미씨를 달래고 분위기를 바꿔보려 안간힘을 쓴다. 팀장은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아까 그 표정을 하고 앉아있다. 이 싸늘한 분위기의 원인이 경미씨가 아까 나에게 했던 말이라면, 나는 지금 어떤 말이든 해야 한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멍하니 고민 하는 사이에 경미씨가 가방을 꾸리고 외투를 입기 시작했고, 먼저 들어가 보겠다는 말을 하고 휙하니 술집을 나갔다. 이제 나와, 남직원들만 남았다. 더 난감하다. 정말 그 이야기 때문이라면 어쩌지?


은주씨. 그렇게 기분 나빴으면 나한테 직접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응? 왜 순진한 후배시켜서 사람들을 놀래고 그러나. 은주씨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네. 응? 안 그래?


찌그러진 팀장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 은주씨. 좀 그러네.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다 동기 못 챙겨준 내 탓인 거 같다. 내가 사과할 테니까 앞으론 경미씨한테 함부로 그런 말 하고 그러지 마.


웅얼대고 있던 동수 입에서 나온 말은 더 황당했다. 하려던 말이 저 말은 아니었을 텐데. 난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모두들 나를 지켜본다. 나를 놀리던 팀장이 불쾌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그런 단어를 써서 입으로 뱉어내고 구제받고 싶은 그런 불쾌감은 아니었다. 그럼 뭐였지? 경미씨 말대로 그냥 성희롱? 그래서 내가 삭히려 했던 걸까? 아니다. 저 사람들이 내 몸을 만진 것도 아니고 내 앞에서 음란한 이야기를 했던 것도 아니니까.


팀장님!


팀장이 일어난다. 다른 남직원들도 일제히 일어나 지갑을 꺼내는 팀장에게 매달린다.


나, 갈게. 있어봤자 불편할 거 아니야? 술 따르라고 했던 것도 이를 갈겠다 싶어 무서워서 못 있겠어. 나 참. 안 그래? 응?


우르르. 남직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팀장이 술집 문을 나섰다. 몇 명은 먼저 가겠다고 팀장을 따라 일어났다. 파하는 분위기가 되니 하나 둘 씩 사라지고 결국 동수와 나만 남았다. 팀장이 나간 이후로 계속 나만 째려보고 있던 동수.


너 진짜 뭐냐. 나한테 그렇게 짜증을 내더니 결국 이렇게 후배 시켜서 복수를 해? 경미 씨 그 말 나한테 들으라고 시킨 거지. 아니야?

뭐가. 엉? 나도 황당해. 경미씨가 아까 나 화장실 갈 때 쫓아오면서 화 좀 내라고 그러더라. 남직원들이 나한테 막한다고. 나 우리 팀 직원들한테 그런 불만 없어. 좋다고. 그래 너한테 해댔던 건 네가 너무 나는 안중에도 없이 팀장한테 싸바싸바 하는 게 화가 나서 그랬다 왜. 너 같으면 안 그러겠냐? 팀장이 너한테 뭐라 하는데 내가 팀장 편에서 베시시 웃으면서 동조해봐. 넌 안 서운하겠냐고.

농담이잖아 농담. 응? 농담인데 뭘 그러냐고. 다 분위기 좋게 하자고 그러는 거 아니야. 내가 몇 번을 말하냐 너는? 그걸 못 알아 듣냐.

아무튼 내가 경미씨한테 시킨 거 아니라니까. 나도 억울해. 됐어 가서 니 마누라나 챙겨.


다시 쭝얼대는 동수를 남겨두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아직 배도 다 못 채웠는데. 허기와 억울함과 황당함에 서러워졌다. 동수야 그렇다 치자. 내일 사무실에서 팀장 얼굴을 어떻게 봐야하나. 또 경미씨랑은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이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했는데 뭔가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근데 무슨 말을 하지?


*  *  *


한참 정신없이 걷고 있으려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 건너편에 서있는 남자들 한 무리. 우리 팀 직원들이다. 깔깔깔. 거창한 웃음소리를 들으니 저 사람들이 10분전까지 심각하게 앉아있던 그 사람들이 맞나 싶다. 팀장도 함께 있다. 팀장이 2차를 쏠 모양이다. 둥그렇게 모여 있던 무리들은 어디론가 함께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팀장님을 부르며 해맑게 달려오는 동수가 보인다. 동수도 함께, 아마도 그들은 2차를 갔을 거다. 돈독하게.


*  *  *


편의점에 들어가서 컵라면을 샀다. 온수를 붇고 라면이 익기를 기다린다. 팀원들이 사라진 골목길을 쳐다보며, 이 묘한 감정이 뭘까 들쑤셔본다. 팀장이 나에게 화를 내고 나간 것은 비상사태다. 갈수록 서운해지는 동수. 그리고. 경미씨가 들어온 다섯 달 내내 직원들이 나를 괴롭혔다고? 팀장이 나를 놀리기 시작한 것은 3주밖에 되지 않았다. 팀장이야 다혈질에 화가 나면 막말을 해대는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니 내 다리를 계속 지켜봤을지 모른다. 허벅지가 굵어서 치마를 못 입는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내 앞에서 할까. 뚱뚱하다는 말? 가끔 이대리가 몸매 관리하라며 자기 부인이 다니는 관리실 전단지를 가져다주긴 했다. 이대리도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여자들은 다 이런 걸 좋아한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 그리고 박대리. 그가 결혼 전 연애기를 늘어놓을 때면 늘 은주씨 정도면 생활력이 있으니까 사귈만 하다는 말을 했었다. 그래. 그건 좀 기분이 나빴다. 그래. 점심시간에 잠자리 이야기 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왜 지들 성생활을 내 앞에서 까발리고 그럴까. 그리고 또 뭐가 있지? 그러니까 이 모든 일들에 일일이 내가 성희롱 피해자라며 화를 내야 하는 걸까? 성? 희롱?


*  *  *


사무실 문을 열었다. 팀장의 자리는 사무실 입구에서 일직선 방향이다. 사무실 문을 열면  직원들의 출근 순서를 파악하기 위한 팀장의 눈동자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오늘은 도대체 어떻게 웃어줘야 할까. 차라리 오늘 하루쯤은 무시해야 할까.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경미씨 말만 듣고 삐쳐서 나에게 막 말했던 팀장은, 원래도 그렇지만, 존경하고 웃어줄만한 사람도 못되잖아. 문을 여니 복잡한 마음과 달리 사무실은 조용했다. 각자 자리에서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어색한 모습이란.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일을 대체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아주 정신을 놓지 그래. 응? 아니야?

면목이 없습니다.

김팀장 내가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엉? 일도 못해 팀원 관리도 못해. 이제 보니 성격도 이상한가봐?

죄송합니다 사장님.

당신 맨날 대기업에서 왔다고 잘난척하고 다닌다며. 여직원한테 성희롱도 한다며. 응? 아니야? 내가 이 나이에 일개 직원한테 그런 보고까지 받아야겠어?

죄송합니다.

당장 짐 싸. 농담 아니야. 알지?


팀장은 질린 얼굴로 허리를 반쯤 수그리고 입술을 축여가며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사장은 화를 내는 와중에도 간간이 팀원들을 휙 휙 둘러봤다. 성희롱? 나를 찾는 건가? 짐을 싸라는 말, 팀원들 앞에서의 면박. 팀장을 바닥까지 쭉쭉 끌어내린 사장은 헛기침을 하고 넥타이를 고쳐 메며 유유히 사라졌다. 팀장은 반쯤 숙였던 허리를 다시 90도 가까이 숙이며 사장에게 인사하고 맥이 풀린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이제까지 내가 본 중 최악의 찌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라는 반자동적 인사말이 왜 그날은 ‘저 왔습니다’로 튀어나왔던 것일까. 어쨌든 팀장도 남직원들도 동수도 경미씨도 인사를 하는 나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날 오전시간은 모두 묵묵히 자기 일에 매달렸다. 익숙하게 팀장이 원하는 점심을, 우르르. 먹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묵묵히 자기 일에 매달렸다. 퇴근시간 5분 전. 팀장이 짐을 꾸리더니 일이 있다며 먼저 퇴근을 했다. 팀장이 나가자 모두들 술렁였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다. 나는 아니니까 경미씨가. 아마도 사장에게 성희롱과 관련된 글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나로 알겠지? 사내 내부고발은 회사 규정에도 비공개로 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그러니 경미씨가 모두에게 고백하지 않으면 나는 끝장이다. 어쩌다가 팀원들에게 따돌림 받을 것을 걱정하는 지경이 되었나 따져본다. 경미씨 때문에? 회식자리에서 팀장이 나를 노려보며 화를 낼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경미씨가 팀원들에게 했던 ‘사과하라’는 말은 어찌 보면 내 입으로 했어야 할 말이었다.  


야. 뭐야? 진짜야? 팀장이 실수한거야?

그러게요. 팀장이 말도 잘 못하고 오락가락하니까 박상무가 그냥 나가버리더래요. 끝난거죠.


C전자를 다니는 친구를 둔 진수가 모가지를 댕강, 잘라내는 손 시늉을 하며 말했다. 이야기는 이랬다. 회식이 끝난 후 토요일에 있었던 프레젠테이션에 팀장이 지각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날 저녁 남직원들과 2차를 갔던 팀장은 과음때문에 일찍 일어나지 못했고, 엉망인 모습으로 프레젠테이션 자리에 나타나 C전자 홍보실 사람들 모두가 놀랐다는 것이다. 물론, 남직원들의 이야기에는 본인들이 팀장과 함께 2차를 갔다는 이야기가 빠져있었다.


왜 그러셨지. 그냥 가신 거 아니였어?

좀 속상하셨나보네. 그 날 경미씨랑 은주씨한테 팀장님이 상처 많이 받으셨나봐.

그러게 술도 많이 드시고.


일주일 후 팀장은 부산 지사로 발령이 났다. 옆 팀의 신대리가 팀장으로 승진하여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팀장과 잘 지내보려 노력하던 유부남 대리들은 일찍 승진한 신대리를 시기하는 사람들 대 여전히 ‘팀장’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의 두 편으로 갈려졌다. 신팀장이 다혈질이 아닌 것에 정말이지 기뻤다. 가끔 왠지 모르게 떠난 팀장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도, 그보다 100배는 친절할 법한 신팀장의 행동에 잘됐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팀장이 잘린 이후, 이제 누구도 나의 외모를 갖고 농담 하지 않았다. 더불어 팀원들과의 대화도 줄어들었다. 혹시 나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그들은 나에게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닐까. 남직원들과 대화는 가끔 애인 생겼냐는 질문을 빼면 거의 비품 관련한 이야기나 어제 본 텔레비전 이야기뿐이었다. 나에 대한 대화들이 사라지니 오히려 편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여러모로 팀 내 남직원들과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 같은 것이 생겼다. 그래도 경미씨와는 전보다 친해졌고, 회사생활은 외롭지 않았다.


 *  *  *


근데요 언니, 지금 말하긴 진짜 뭐하지만. 난 진짜 그거 누가 말했는지 암만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뭐가?

성희롱 말이에요. 팀장이 언니 성희롱한 거. 그거 나 아니거든요. 언니는 난 줄 알았죠?


지난 주 초. 식사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경미씨가 말을 꺼냈다.


뭐? 아니야? 그럼 누구야?

그러니까요. 난 언니가 맘 변해서 확 지른 줄 알았거든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남자래요 남자.

어떻게 알았어?

지난 주에 신팀장님이 그러더라고요. 진짜 놀랬어요. 누군지는 말 못해도 언니는 아니라고. 남자라던데요? 그래서 내가 막 관찰해봤죠. 근데 웃긴 게, 열심히 관찰 해봐도 우리 중에 사장님한테 팀장을 일러바칠만한 인물은 없는데. 그렇지 않아요? 누굴까 정말.

정말 누구였을까. 성희롱 내부 고발자. 정의의 의롭고 멋진 동료? 라는 감동보다 코웃음이 나왔다. 못 먹는 메뉴라도 밥은 함께 먹던 희생정신, 싫은 눈치 못 줘가며 잠자리 사정 만 천하에 공개하던 우울한 얼굴, 친한 친구 외면하며 아부하던 비겁자. 그렇게도 단단하던 결속체는 참. 팀장이 실수하던 그날 밤, 머리 좋은 누군가가 윗선에게 보낸 고발 메일 한 통으로 한 번에 날아갔다. 깔깔깔. 열심히 웃어가며 골목으로 사라지던 한―무리 떼가 떠올랐다.


*  *  *


성. 희롱이라는 말은 입에 붙지 않는다. 불편하다. 세상에서 가장 몹쓸 일을 당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이제는, 내가 겪었던 일이 충분히 성희롱으로 이름 붙여질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말이다. 성희롱이라는 말이 불편한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나는 그냥 내가 느끼고 받아들이는 대로 사람들과 관계 맺고 지냈을 뿐이다. 다만 조금 더 내 속의 생각들을 길고 긴 실타래를 만들어 풀어냈다면, 더 많은 감정들이 나올 수 있었는데 그렇게 못했다는 것에 내 자신이 안타까울 뿐이다. 불쾌한 일을 당했다는 말 보다 그런 표현이 낫지 않나? 바로 그 점에서 말인데, 지금 이 마음으로 두 달 전으로 돌아간다면, 내 감정들을 뽑아내어, 팀장 뺨 세 대, 동수 한― 발길질, 이대리 뒤통수치기, 진수 뒷담화 좀 날려주고 싶다. 근데 정말 해볼 수 있었을까? 깔깔깔.


*  *  *


경미씨 말대로 내가 사과를 받아야 했다면, 가장 받고 싶었던 사람은 동수가 아니었나 싶다. 내 이야기를 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팀장에게 가장 화를 냈지만, 난 아니었다. 지금도 나를 외면하는 동수는, 정말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어떤 곳에서 다시 일하게 된다 하더라도 너 같은 새끼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하하하.

 

 

* 위 글은 2008년 12/7  오마이 뉴스에 게재된 바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ss_pg.aspx?CNTN_CD=A0001027063

우와~~ 이런 글이 아직도 댓글 하나 붙지 않았다니!! 넘넘 실감나요, 넘넘 공감가요~~
잘 봤습니다. 링크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