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이야기

dabong 2020. 5. 25. 08:43
<작은 비>
농사를 해 본 사람이면 비가 보배라는 것을 다 안다. 과학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영역 중 하나가 비이다. 이렇게 소중한 비임에도 지나치게 내리면 큰 화가 되기도 하니, 천천히 적당하게 내리는 작은 비(小雨)야말로 보약이자 보배가 아닐 수 없다. 고려(高麗)의 시인 이색(李穡)은 작은 비가 만들어 내는 윤택한 사물과 거기서 느끼는 한가로운 정을 예리하게 포착하였다.

작은 비(小雨)
細雨濛濛暗小村(세우몽몽암소촌) 가는 비 자욱히 내려 작은 마을 어두어지고
餘花點點落空圜(여화점점낙공환) 남은 꽃들 점점히 빈 뜰에 떨어지네
閑居剩得悠然興(한거잉득유연흥) 바쁜 일 없는 집에 여유로운 감흥은 덤이니
有客開門去閉門(유객개문거폐문) 손님 오면 문 열고 손님 가면 문을 닫네

시인은 인적 드문 시골집에서 초여름의 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번거로운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인데, 여기에 가늘게 내리는 비까지 보태져 격리감은 배가된다. 번거로움으로부터 거의 완벽하게 벗어난 시인에게 남은 것은 한가함과 여유로움 뿐이다. 봄에 일제히 피었던 꽃들은 하나 둘 제 갈 때를 알아서 떨어진다. 그저 봄과 함께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은 이 참에 공중으로 몸을 날린다. 낙화의 애상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자연에 순응하는 편안함이 느껴질 뿐이다. 시인이 과거에 관직 생활을 하느라 도회지에 살 때는 늘 번거로운 인사로 인해 한가로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사정이 다르다. 세속의 일과 무관한 시골집에서 한가롭게 살다 보니 예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감흥이 아득한 곳에서부터 일어남을 느낀다. 한가로움이 주는 감흥을 즐기다가 손님이 오면 사립문을 열었다가 손님이 가고 나면 사립문을 닫는 게 그나마 번거로운 일의 전부이다.
사람들은 자유롭기를 갈망하면서도 선뜻 그 길로 나서지는 못 한다. 어려워서가 아니다. 세속에 대한 미련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누구나 평생 수행하며 사는 스님들처럼 출가할 수는 없다. 그저 하루 이틀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작은 용기만 있으면 그만이다. 번거로움을 놓으면 한가로움이 찾아 오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