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戊洋 2009. 7. 3. 23:35

조선왕릉 순례(5) : 목릉, 원릉 (동구릉 내)


답사지 : 목릉 (穆陵), 원릉 (元陵), 경기 구리시 동구릉 내
일자 : 2009년 6월 28일 (일)
날씨 : 맑음


동구릉(東九陵) 개관

동구릉은 사적 제193호로서 조선왕릉 중에서 9릉 17위(位)의 왕과 왕비릉이 있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建元陵)이라 이름한 뒤, 1855년(철종 6) 익종(翼宗)의 능인 수릉(綏陵)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동오릉·동칠릉 등으로 부른 사실이 실록에 전해진다.

59만여 평을 헤아리는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顯陵),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穆陵),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崇陵),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徽陵),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惠陵),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元陵),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景陵),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 등 9개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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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선릉,정릉, (2)헌릉,인릉, (3)홍릉,유릉,

(4)동구릉A, (5)동구릉B, (6)조종의구분,
(7)영릉,녕릉, (8)융릉,건릉,

(9)서오릉A(10)서오릉B(11)사릉~태릉, 
(12)광해군묘~연산군묘, (13)광릉,
(14)장릉 

 


동구릉(東九陵)의 구성

건원릉 (健元陵) : 태조(太祖)의 능 (단릉)
현릉 (顯陵) : 제5대 문종(文宗)과 비 현덕왕후 권씨의 능(동원이강릉)
목릉 (穆陵) : 제14대 선조(宣祖)와 비 의인 왕후 박씨 및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동원이강릉
휘릉 (徽陵) :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의 능 (단릉)
숭릉 (崇陵) : 제18대 현종(顯宗)과 그의 비 명성 왕후 김씨의 릉(쌍릉)
혜릉 (惠陵) : 제20대경종의 원비인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릉(단릉)
원릉 (元陵) : 제21대 영조(英祖)와 계비 정순 왕후의 능 (쌍릉)
수릉 (綏陵) : 제23대 순조(純組)의 세자이며  제24대 헌종의 부인 문조(文祖)와 비 신정 왕후의 능 (합장릉)
경릉 (景陵) : 제24대 헌종(憲宗)과 비 효현왕후(孝顯王后) 및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릉(3연릉)

 

목릉 (穆陵)


목릉 개관 : 제14대 선조(宣祖)와 비 의인 왕후 박씨 및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동원이강릉

 

동구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목릉에는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세 사람이 잠들어 있다. 같은 능역 안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목릉의 능역은 원래 1600년(선조 33)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 선조 승하 후 선조의 능인 목릉은 원래 건원릉의 서편에 조영되었는데,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1630년(인조 8) 현 위치로 천장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632년(인조 10)에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영하게 되어 오늘날의 세 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정자각도 세 능이 들어설 때마다 자리를 바꾸게 되었다. 원래는 동편의 의인왕후릉 앞에 있었던 것이 후에 왕릉이 천장되면서 왕릉 앞에 정자각이 서고 왕비릉의 정자각은 헐리게 되었다. 여기에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들어서자 한때 왕릉 쪽으로 치우친 정자각을 다시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전이 번거롭다 하여 왕비릉은 신로만 정자각에 접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현재 목릉의 정자각은 왕릉을 향하여 서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다. .


사진 및 메모 (목릉)

 

 

 

목릉의 능역 :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목릉에는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세 분이 잠들어 있다.
같은 능역 안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세 릉이 각각 거리를 두고 있는 경우는 흔치 않으며, 능역도 상당히 넓다.
홍살문에서 보았을 때 왼쪽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홍살문, 신도와 어도를 따라 정자각으로 간다. 
홍살문(紅살門)은 능으로 올라오는 입구에 세운 붉은 칠을 한 문으로 9m 이상의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놓고,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이 있다.

참도(參道),신도(神道),어도(御道) :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돌을 깔아 놓은길,
참도에는 신이 다니는 신도 (약간 높은 길), 왕이 다니는 어도가 있다.

 

 

정자각과 비각
정자각(丁字閣)
: 정(丁)자 모양의 능의 앞 중심에 있는 건물로,
능에서 제례를 지낼때 내부에 제례 음식을 차리고 모든 의식을 진행하는 곳이다
비각(碑閣) : 비석이나 신도비를 보호하는 건물. 

 

 

 

목릉의 능비
朝鮮國 宣祖大王穆陵
懿仁王后附中岡
仁穆王后附左岡

 

 

 

장명등, 혼유석, 난간석, 병풍석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여기에 난간석과 혼유석, 망주석 1쌍과 석양, 석호 2쌍이 배치되어 전형적인 상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장명등(長明燈)
은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등이다. 잡귀가 불을 무서워 하기 때문이며 왕릉에는 반드시 설치한다
병풍석(屛風石)은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다. 병풍석이 없는 왕릉도 많다
(
세종의 영릉, 영조의 원릉에도 없다. 세조때 백성들의 노고가 크다고하여 쓰지 말라고 했으나 꼭 지켜지지는 않았다)
난간석(欄干石)은 병풍석 바깥으로 띠 모양의 난간으로 빙 둘러싼 석물로서 왕, 왕비릉에는 다 있다.
혼유석(魂遊石)은 능 앞에 놓은 큰 직육면체의 돌로,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하는 것이라 한다. 

 

 

   망주석과 문인석, 무인석, 석마
조선후기 전에는 능침 주변은 초계(상계), 중계, 하계의 3개 권역으로 나누어지고
그 사이에는긴 띠모양의 돌로서 구분하고 있다.

초계에는 석양(양석), 석호(호석), 혼유석, 망주석을 배치하고,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문인석)과 석마(마석)을,
하계에는 무석인(무인석)과 석마(마석)을 배치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지고 문석인과 무석인이 같은 레벨에 배치된다

 

 

 

 병풍석의 십이지신상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에는 열 두 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사진에서 자세히 보면 연꽃, 구름 속에 12지신상의 조각이 보인다. 
 

 

 

 

 병풍석 상단의 문양
병풍석을 돌아가며 꽃을 조각했는데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좌측) 다산을 의미하는 해바라기(규화,葵花)을 새겼다.

 

 고석
 혼유석의 받침돌, 사악한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귀면 (귀신얼굴)을 세겼다 

 

  석양(양석)과 석호(호석)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왕을 지키는 영물들로, 밖을 향하여 언제든지 방비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양석은 악귀나 재앙의 침입을 막고자 하는 목적이며, 양은 선함을 의미하여 사악한 것을 피한다는 뜻도 있다. 
호석는 능을 맹수로 부터 보호하고 내쫓기 위해 외부를 향하여 서 있다.

 

 망주석
망주석(望頭石)은 무덤 앞에 놓은 혼유석의 좌우에 벌려 세우는 한 쌍의 8각 돌기둥으로, 
망자의 혼이 밖으로 놀러 갔다가 망주석을 보고 찾아오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과, 
음양의 조화, 능의 위치표시, 왕릉의 생기보존 등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망주석에는 조선 초기에는 중간에 귀모양의 돌출부에 구멍을 만들어 놓았으나
나중에는 
세호(細虎, 작은 호랑이)라고 하는, 모습이 도롱뇽이나 다람쥐를 닮은 형상의 작은 동물을 조각하였다. 
위의 조각은 초기의 귀모양(구멍이 있음)과 후기의 꼬리가 긴 세호의 중간쯤 뙤는 모양인데
무슨 형상인지 제대로 설명된 곳이 없다.


 

 망주석 세호(細虎)에 대하여

 

후기의 좌우 망주석에는 세호가 새겨져 있다. 기록에서 보면, 《세종대왕실록》134권(세종32년) ‘흉례의식·치장조’에 의하면 ‘염의 아래에 귀를 만들고 구멍을 뚫는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호’라는 명칭이 언급된 것은《국조상례보편》(1752)인데, ‘세호를 조각하여 왼쪽의 망주에는 오르게 하고 오른쪽의 망주에는 내려가게 하였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즉,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에 보이는 명칭인 ‘세호’는 아직 새기는 목적과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 그 상징성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장식화되었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구멍이 막혀 있으며, 꼬리가 긴 동물의 형태로 조각된다.

 


 

 의인왕후 능

 의인왕후 능 (곡장에 둘러쌓인 능침)
의인왕후릉은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만 둘러져 있다.
임진왜란을 치른 후 능을 조성했기 때문에 석물들의 크기만 클 뿐 사실적이지도 입체적이지도 못하다.
그러나 망주석과 장명등 대석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인조 장릉의 병풍석에까지 새겨지는 등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난간석과 혼유석

 

문석인, 무석인

 

 

망주석, 선조능과 유사하다.

 

 


 

인목왕후릉

 

 

인목왕후릉
인목왕후릉 역시 의인왕후릉과 같은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좀 더 생동감이 있어 보인다.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로 광해군 즉위후 어린나이로 죽은 영창대군의 모후이고
인조반정후 대왕대비로 지위를 되찾은 인목대비로 더 잘 알려진 왕후이다. 
 


 

원릉(元陵)

 


원릉(元陵) 개관 : 제21대 영조(英祖)와 계비 정순 왕후의 능 (쌍릉) 

 

1776년(정조 즉위) 3월 5일 영조가 승하하였다. 영조는 무려 52년에 이르는 긴 재위 기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산릉원을 조성하거나 천장하는 등 산릉제도에 관심이 컸다.
원비 정성왕후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을 자신의 자리로 정해 쌍릉으로 조영하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는 영조가 승하한 그 해 7월 27일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그를 안장하고 원릉이라고 했다.
원래 이곳은 1660년(현종 1) 10월 효종 능인 영릉이 조영되었던 곳인데, 1673년(현종 14) 석물에 틈이나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하여 천봉하기로 하고 봉분을 열었으나 깨끗하여, 끝내는 당론으로 번져 전날의 영릉도감의 책임자까지 파직되었던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원릉을 조성한지 29년이 지난 1805년(순조 5)에는 61세의 나이로 승하한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씨를 원릉의 옆에 모셨다.


사진 및 메모 (원릉)

 

 

 홍살문, 신도와 어도를 따라 정자각으로 간다. 

 

  정자각과 처마위의 잡상

 

   정자각의 신계(혼령이 오르내리는 계단)와 동계(왕, 제관이 오르내리는 계단)

 

영조 원릉의 능비
 
영조의 능비는 2개이다.
하나는 정조때 세운 영종 능비이고, 다른 하나는 고종때 세운 영조 능비이다.
조선국 영종대왕 원릉 (朝鮮國 英宗大王元陵)
조선국 영조대왕 원릉 (朝鮮國 英祖大王元陵)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처음에 영종(英宗)이었던 능호가 고종 때 영조(英祖)로 바뀐 점이다.
영조는
숙종(肅宗)의 후궁 숙빈(淑嬪) 최씨 소생이었으나 선왕이자 형인 경종(景宗)이 후사가 없어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사후에 '영종(英宗)'이란 묘호로 불렸지만 나중에 '영조(英祖)'라고 고쳐졌다.
~조(祖), ~종(宗)으로 부르는 왕의 능호 또는 호칭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이 있다.
내용이 많으므로 별도로 알아보기로 한다.(조선왕릉 순례 6 참조)

 

 영조 원릉의 비문

 

쌍릉 형식인 원릉 
원릉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을 둘러 만든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놓여 있고,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다

 

혼유석, 장명등
능의 중간에 놓인 사각옥개형 장명등은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 중, 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장명들이 4각형인점이 눈여겨 볼만하다.

 

 난간석
52년이나 재위에 있었던 왕의 능인데 병풍석이 없다니 의외이다. 

 

문석인과 무석인
능침아래 석물배치는 조선중기까지 3계로 구분하여 문석인(문인석)은 중계에, 무석인(무인석)은 하계에 배치하였다.
원릉에는 중계와 하계의 구분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이 같은 높이에 배치한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와같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숨어있는 작은 차이점이 조선왕릉에는 많다.
 문석인은 전체적으로 비율과 입체감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나, 사실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또한 무석인은 장군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위풍당당하기보다는 유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무석인의 얼굴에서도 잔잔히 머금고 있는 미소를 찾을 수가 있다.

 

양석과 호석
일반적인 배치이다.

 


망주석의 세호
조선왕릉 답사에서 놓치지 않아할 것이 망주석의 세호(細虎)이다.
모양도 다양하고 해석이 분분할 뿐더러
조각의 모양이 흥미롭고, 어떻게 보면 왕릉에 있는 조각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귀여운 형상이다.

원릉의 망주석은 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다.
좌우 세호 중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고,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기어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