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의 바람

Kay 2020. 9. 12. 22:42

 

나는 정치와 종교 같은 개인적 이념에 대하여는 가급적 언급을 피하려 한다. 그것은 각 개인의 이념(선향과 가치)의 문제이어서 언급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때로 정치와 종교의 현실에 매우 화가 나기도 한다,

 

광주광역시 서구 마륵복개로 188 (운천저수지 근처)SOCAR zone 광주 안디옥 교회라는 것아 있다고 한다. 광주 출신인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2020년 현재에 69세라고 하며 광주사태에 죽을 뻔 하였다니, 나와 상당히 비슷한 연령대인 모양이다, 그는 교회들이 WEC (Worldwide Evangelization 복음전도 for Christ, 국제선교회   : 1913년 설립) 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 世界敎會協議會 : 1948년 설립)을 탈퇴하여야 하고, COVID 19 가 재확산(再擴散)되는 이 시점에도 목숨을 걸고 (잘못되면 죽기뿐이라며) 대면예배(對面禮拜)를 진행하여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반대하는, 나는 광주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였고, 상무대에서 육군보병학교와 육군화학학교를 수료하였으며, 이후 광주사태 때 전교사(전투병과교육사령부)에서 근무하였었다, 집은 마륵리(지금의 서구 서창동 행정관할 내 법정동인 마륵동)에 있었다. 하여튼, 나는 광주사태에 폭도를 진압하여야 하는 계엄군이었고, 그는 진압대상인 시민군 이었다. 나도 광주사태에 죽을 뻔 하였다.

 

나는 이후 (품질관리 업무 담당 이후 사업기획 업무 담당) 직장생활을 하였고, 그는 종교계로 피신한 것 같다, 내가 육군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으며 백일사격장(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하였다)을 오갈 때는 안디옥 교회라는 것아 없었으니, 그 이후에 생긴 모양이고, 그가 NL(주체사상파)을 적대적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는 PD(민중민주) 계열인 것 같다. PD ‘NL 이 그들을 탄압한다하고, NL ‘PD 가 그들을 협박한다고 한다. NL 이나 PD 나 모두 좌익이다,

-       NL : National Liberation

-       PD : People's Democracy

https://angstarz.tistory.com/498

https://angstarz.tistory.com/865

 

하여튼, 사회주의에 대항하여 싸웠던 김백일 장군(1917년생, 길림 생, 함경북도 출신)의 자취는 급격하게 지워져 가고, 오정렬(1938년생, 전라남도 광산 출신, 전교조 설립) 이나 정율성(1914년생, 전라남도 광주 출신, 작곡가,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 등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떠받치기가 급격하게 진행되는 현실이 매우 우려된다.

광주 안디옥교회.pptx
2.26MB

 

 
 
 

서북의 바람

Kay 2019. 12. 18. 09:58

 

어느 매체가 게재한 글을 보다가 나는 당황하였다.

 

5·18 계엄군 장교 "무장시민 없었다"

https://news.v.daum.net/v/20191218060209928

 

만약 그렇다면, 내가 본 전남대 상공에서 최루가스를 뿌리다 총격을 받고 회항한 헬리콥터는 무엇이었으며, 광주공항 앞에서 무기의 반환을 요구하는 군인들 앞에 송정리 방향에서 나타난 유리창 깨어진 버스에 내려 제 키만한 총을 메고 다니던 소년들은 무엇이었을까? 그때, 광주 통합병원 앞은 시민군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나는 불과 40년 정도밖에 안 되는 그 시절을 잘못 기억하고 있으며, (환상의) 것을 본 것일까? ^^*

 

당시 군은 몇 방향에 주둔하고 있었다. 광주시의 서쪽 상무대가 한 축이었고, 광주시의 동쪽 31사단이 한 축이었으며, 뒤늦게 투입된 공수부대가 광주시의 남쪽 조선대와 무등산으로 축을 이루고 있었고, 맨 마지막에 합류한 20사단이 광주의 서쪽 상무대내에 주둔하였다.

 

나는 당시 계엄군 지원부대의 장교로 주로 광주시의 서쪽에서 활동하였으니, 동쪽과 남쪽은 잘 알지 못한다. 자신이 활동하는 좁은 영역 외의 사정은 잘 알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단지 계엄사령부 지역에 있었으므로 이런저런 나도는 몇 말들을 들을 수는 있었다.


우리 표현에 추기급물(推己及物)’이라는 것이 있다. ‘추정()의 근거를 자기()로 삼아, 미루어() 다른 사물()의 형편을 짐작한다는 말이라 한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아는 바를 일반화시키려는 이상한 논리로 생각된다.


물론, 아직도 --를 읽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거짓으로 다른 사람들을 오도하기 보다는, 정직하기 위하여 노력함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518 과 계엄군.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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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과 계엄군.pptx  
   

 
 
 

서북의 바람

Kay 2017. 12. 2. 04:40

 

오래 전의 사진들이 공개되었다. 광주사태 때라 생각하면, 내가 그 지역의 계엄군으로 근무하던 약 37년 전 이다.

 

누군가는 내게 묻는다. ‘그 당시에 광주에 근무했으니, 소문보다 더 알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한 것은, 후세에 평가되겠지요. 나는, 상당한 내 전우들이 죽었다는 것 외에는 현재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도 죽을 뻔 했지요. 장교들은 군인아파트에서 room sharing 을 하였고, 하사관들은 부대 내 막사에서 보호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사자들을 운송하는 helicopter 로 전입명령을 받는 부대로 이동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군인아파트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아내 때문에, 나는 틈나는 대로 집에 들려 가족들의 안위를 확인하였다. 그때마다, 부대 후문에서 나는 경비병에게 말하고는 하였다. ‘나는 저기에 보이는 집으로 간다. 그리고 30분 정도 후에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 그때 내가 휴대한 총기들을 보며 아빠, 이게 총이야?’ 하던 아이들이 이제 나이 40 을 훌쩍 넘겼다.

 

그런데, 최근 모 기관에서 그때의 사태와 관련한 몇 사진들을 공개하였다.

 

내가 기억하기에, 몇 특전사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안개처럼 뿌옇던 예측할 수 없던 사태는, 1980 5월말 정도(5 27 ?)에 계엄군의 본격적 작전으로 정리되었다. 내가 생각할 때, 그때는 패색이 짙은 반군세력들이 분열하며, 내부적으로 정리하는 단계였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지역 계엄사령관은 소준열장군이었다. 몇 번 진입작전이 수립되었지만, 작전계획의 누출로 봉쇄작전만 계속되었을 뿐 그 실행은 연기되었다.

 

하여튼, 별다른 나의 의견을 달지 않고, 매체에 공개된 사진만을 첨부하였다. 그 판단은 후세에 이루어지겠지만, 현재의 사람들도 나름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첨부한 file 의 마지막 slide , 사태의 당시 몇 세력들에 의하여 유포된 소문의 사실여부를 확인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첨부하였다.

 

 

광주시태 _ 171201.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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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태 _ 171201.ppt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