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한민족 역사 - LOST C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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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제국

2019. 5. 25.

오스만 제국

최근 수정 시각: 

파일:나무위키+하위문서.png  하위 문서: 오스만 제국/국가
숭고한 오스만 국
دَوْلَتِ عَلِيّهٔ عُثمَانِیّه'
Devlet-i Aliye-yi Osmâniye[1]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Osmanli-nisani.svg.png
국기[2]
국장[3][4]
표어
دولت ابد مدت
(불멸의 제국[6])
위치
쇠위트 (1299~1335)
부르사 (1335~1453)
에디르네 (1363?~1453)[7]
코스탄티니예 (1453~1922)
정치 체제
국가 원수
베이[10]  술탄 → 파디샤(황제)[11]
오스만 터키어(공용어)[12]
종족
주요 사건
1299년 건국
1354년 갈리폴리 점령 (유럽 진출)
1389년 코소보 전투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
1402년 앙카라 전투
1444년 바르나 전투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1514년 찰디란 전투
1517년 이집트 정복, 칼리파 위 획득[15]
1526년 모하치 전투, 헝가리 정복
1529년 1차 빈 공방전
1534년 프레베자 해전
1571년 레판토 해전
1672년 포돌리아[16] 점령, 최대 판도 구축
1683년 2차 빈 공방전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
1739년 베오그라드 조약
1743-1746년 오스만 페르시아 전쟁
1774년 쿠축카이나르자 조약
1798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1827년 나바리노 해전
1839년 탄지마트 개혁
1853-1856년 크림 전쟁
1876년 미드하트 헌법 제정
1878년 산 스테파노 조약
1908년 2차 헌법 제정
1912-1913년 발칸 전쟁
1915년 갈리폴리 전투
1919-1923년 터키 독립전쟁
1922년 제국 멸망
통화
악체
쿠루쉬
리라[17]
크기
5,400,000km2 (1683년)
1,700,000km2 (1914년)
성립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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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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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국명3. 역사
3.1. 초기
3.1.1. 성립 배경3.1.2. 건국3.1.3. 파죽지세(14세기)3.1.4. 위기의 시대(15세기 초)3.1.5. 빠른 회복
3.2. 제국으로서3.3. 몰락의 시작3.4. 메흐메트 알리의 반란과 이집트의 준독립3.5. 민족주의와 제국의 해체3.6. 멸망과 새로운 시작
4. 국력
4.1. 영역4.2. 인구4.3. 군사
5. 행정 구역6. 세금 제도7. 종교 국가?8. 튀르크족의 국가?9. 평가10. 국가(國歌)11. 역대 군주 목록12. 대중매체에서의 오스만 제국
12.1. 창작물에서 모티브를 딴 것들
13. 역사 틀 둘러보기

언어별 명칭
오스만 터키어
دولت عليه عثمانيه
(Devlet-i Alîye-i Osmânîye)
Osmanlı İmparatorluğu
/ Osmanlı Devleti
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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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동유럽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이다. 참고로 왕가의 종교는 이슬람이었지만, 밀레트 제도에 의해 타 종교 및 그들의 종교법 또한 존중했기에 이슬람을 국교라 하기에는 애매하다. 실제로 제국 헌법에서 이슬람을 국교로 명시한 시기는 압뒬하미트 2세의 시기에 미트하트 파샤가 주도한 1876년 헌법(1876 kanun-ı esasi)이 처음으로 제국의 존속기간(1299~1922)을 따져보면 꽤나 늦다.

1299년 아나톨리아 내륙의 오스만이라는 베이(Bey, 부족장)가 다스리던 작은 소국으로 시작해 정복 전쟁을 통해 인근 소국들을[19] 병합하며 성장, 아나톨리아를 장악하였다. 마침내 1453년에는 건국 이래 2200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며 교통과 무역의 요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 수도로 삼고 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진출해 북으로는 오스트리아 폴란드, 서로는 모로코, 남으로는 에티오피아, 동으로는 이란과 접하여 그 당시 전 세계적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패권국 중 하나로 성장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능한 황제까지 잇따라 배출되어 국가 막장 테크를 타더니, 제1차 세계 대전  동맹국의 일원이 되는 최악의 수를 두었고 결국 연합국에 패배. 이후 내부 소수민족 대다수가 독립하고, 그리스에게 국가의 발상지인 아나톨리아의 해안가까지 점령당하며 강대국들에 의해 분할되어 열강들의 위성국으로 전락할 뻔했으나, 아타튀르크의 지휘 아래 기사회생해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튀르크족의 국민 국가 터키 공화국으로 개편되어 1922년 11월 1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파일:costumes-des-maures-et-des-turcs-au-seizieme-siecle-53086d70.jpg
(오스만 제국의 복식을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랍 복식보다는 동로마 복식에 가깝다. 국제적이었다는 셈이다.)

2. 국명

오스만 제국이라는 이름은 제국 황가인 오스만 가문에서 따 온 것이며, 오스만 가문은 제국의 초대 군주인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an Gazi)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영어로는 오토만(Ottoman)이라고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오스만 제국, 오스만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 제국 등으로 부르며, 과거에는 오스만 터키라고 하기도 했다. 터키어 발음으로는 투르크가 아니라 튀르크이기 때문에 오스만 튀르크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다만 학술적으로는 오스만 투르크나 오스만 튀르크나 둘 다 틀렸고, 오스만 제국이 가장 적당한 표현이다.

튀르크(Türk)라는 말은 오스만 제국 당대에도 있었지만 특정 종족이나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척박한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가난한 농민들이나 유목민 부류를 가리킬 때 쓰던 말이었다. 가난뱅이, 시골뜨기처럼 좋지 않은 뉘앙스의 말이었기 때문에 남을 욕할 때나 쓰였고 개인이나 집단 차원에서 튀르크를 자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스와 발칸 반도 지역의 기독교도 신민들도 투르크라는 말을 썼는데, 이 경우에는 민족이나 혈통과 상관없이 그냥 이슬람교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예컨대 그리스 혈통이고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이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면 그리스인들은 그 사람을 투르키(τούρκοι)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도 발칸 지역의 일부 국가들에는 이슬람교도를 싸잡아 투르크, 터키 놈이라고 부르는 습관이 남아 있다.

튀르크가 민족 정체성을 뜻하게 된 것은 오스만 제국 말기의 일이다. 오스만 제국이 강성하던 시절에는 수많은 민족들을 지배했는데, 이 때의 제국은 신민들을 종교에 따라 나누어 다스렸을 뿐 민족 정체성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제국 말기가 되자 유럽에 불던 내셔널리즘 열풍의 영향을 받은 신민들이 민족 의식을 형성하고 단일 민족 독립 국가 건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를 시작으로 이런 독립운동들이 성공하면서 제국의 다민족국가적 특성은 점점 약해졌고, 거기에 더해 제국의 국력 자체가 쇠퇴하여 많은 영토를 유럽 열강에 빼앗기면서 제국 내에서 '수니파 이슬람을 믿고 오스만어(터키어)를 쓰는 아나톨리아 출신 사람들'의 인구 비중이 전례 없이 커지게 되었다. 이들을 가리키기 위한 표현으로 재발견된 말이 바로 튀르크이다. 이후 튀르크 민족주의가 제국 내에서 큰 지지를 받게 되고, 그 거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튀르크 민족국가를 표방한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면서 튀르크 민족이라는 개념이 완성되었다.

오스만 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신민들을 가리킬 때 쓴 말은 오스만인(Osmanlı)이었다. 이 말은 오스만 제국이 소규모 부족 국가이던 시절 오스만 가문의 추종자들을 의미하던 말인데, 제국이 거대하게 성장하면서 중앙 정부의 관리나 군인 등 제국 지배체제의 핵심에 가까웠던 사람들이 주로 쓰는 말이 되었다. 부유하고 인구밀도가 높아 오스만 제국의 핵심 지역이었던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지역의 주민들은 룸인(Rumi)이라는 표현도 썼다. 룸은 로마라는 뜻인데, 위 지역들이 옛 로마 제국의 중심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룸이 곧 지명으로 쓰이게 되었고, 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룸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다만 룸인이란 표현은 점점 제국 내의 그리스인들을 가리키는 쪽으로 의미가 변하여 그리스 독립 이후에는 확실하게 후자로 의미가 고정되었다) 오스만 제국 바깥의 다른 튀르크계 국가나 민족들 역시 오스만 제국과 발칸, 아나톨리아 지역을 오스만 혹은 룸이라고 불렀다. 제국 말기에 튀르크 민족주의가 득세하기 전까지 오스만인들은 튀르크라는 정체성이 없었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국가/민족들도 범튀르크주의와 투란주의가 유입되기 전까지 오스만인들을 튀르크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튀르크 민족의 이런 상세한 사정에 대해 잘 몰랐고, 오스만 제국 사람들을 전부 싸잡아 '투르크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 당대에도 정식 국호인 오스만을 잘 쓰지 않고 그냥 투르크 제국(Imperium Turcicum, Imperium Turcarum), 터키(Turchia) 등을 훨씬 많이 썼다. 오스만 투르크라는 표현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 무지한 사람들이 기존의 관습적 표현인 투르크에 원래 국호인 오스만을 덧붙여 만든 잘못된 이름이다.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기 이전엔 그냥 투르크나 터키라고 불렀는데,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들어서자 오늘날 터키(터키 공화국)가 아닌 옛날 터키(오스만 제국)를 가리키기 위해 투르크, 터키 앞에 오스만을 덧붙인 것이다. 21세기 들어 용어를 엄밀하게 따지는 학술적인 글에서는 이제 거의 쓰이지 않지만, 일반인들의 글에서는 한국이든 서구권이든 오래된 습관이 잘 바뀌지 않아서 아직까지 오스만 투르크, Ottoman Turk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고 있다.

3. 역사


3.1. 초기[편집]

3.1.1. 성립 배경[편집]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를 사로잡고 그 군세를 대파한[20] 알프 아르슬란 이후 셀주크 제국 본가에서 떨어져 나와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세력을 규합하며 소아시아를 호령하던 룸 술탄국 십자군 전쟁을 맞은 이후로 심심하면 형제간 반목질과 반란으로 비실대면서 마누일 1세 콤니노스 황제 이후 덩달아 비실대던 동로마 제국과 함께 아웅다웅하고 있었는데, 1243년 몽골이 아나톨리아를 침입해 룸 술탄국을 조공국으로 만들어버리고 50여 년에 걸쳐 역사에서 증발할 때까지[21] 룸 술탄국은 분열을 거듭한다.

3.1.2. 건국[편집]

이 와중에 생겨난 몇몇 튀르크 소국들 중 하나가 바로 오스만 조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오스만 가문의 시조는 쉴레이만 샤로 원래 이란 서부와 중앙아시아 쪽에 있던 튀르크멘(Türkmen) 유목민의 부족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으로 고향을 버리고 아나톨리아로 도피하여 룸 술탄국의 보호를 받았다. 몽골의 침입이 좀 잦아든 뒤에는 돌아가려 했으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다 익사해버렸고[22] 그 후 그의 아들인 에르투으룰 가지는 그대로 정착하여 룸 술탄국 편에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수행해 공을 인정받아 오늘날 앙카라인근에 봉토를 받고 베이가 되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오스만 베이국(Beylik)의 건국자인 오스만 1세이며 그는 룸 술탄국의 붕괴를 틈타 독립[23]하여 당대에 아나톨리아의 동로마 잔존 세력을 격파하고 2대 술탄 오르한 가지는 남동유럽에 교두보까지 구축하여 오스만 베이국의 위용을 떨치고 일백년후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을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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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년 여러 베이들의 영토로 분열된 아나톨리아. 북서쪽 마르마라 해 근처에 오스만국(Ottomans).

3.1.3. 파죽지세(14세기)[편집]

이후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소국들을 복속시켜가며 소아시아에서의 입지를 다지는 한편, 팔레올로고스 황가 밑에서 이전보다 배이상 비실대던 동로마 제국과[24][25] 전성기를 막 지나 기울어가고 있었던 세르비아 불가리아를 속국으로 삼으며 위엄을 떨치며 발칸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특히 당시 발칸의 패권국이던 코소보 전투가 유명하다.[26] 이에 서유럽 국가들이 십자군을 파견하였으나 1396년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바예지트 1세는 그마저도 대패시키는 위엄을 보였다. 이 시기를 오스만의 1차 전성기로 본다.

3.1.4. 위기의 시대(15세기 초)[편집]

역사책에 기술될 내용을 약간 더 앞당기는 듯싶었으나, 동쪽에서 갑자기 티무르라는 인물이 나타나 칭기스 칸 가문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후 아나톨리아를 침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오스만 베이국은 아나톨리아 지방에 할거하던 여러 튀르크계 소국들을 병합하였는데, 이로 인해 쫓겨난 군주들이 티무르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이때다 싶었던 티무르가 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것. 니코폴리스 전투 등에서 알수 있듯이 싸움에는 자신 있었던 당대 오스만의 술탄 바예지트 1세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호령하던 무시무시한 튀르크 군대를 직접 이끌고 출발했지만, 더 무시무시한 중앙 아시아의 전투민족조차 굴복시킨 티무르에게 패배하고 만다. 바예지트 1세의 별명이 이을드름(Yıldırım), 터키어 뇌제(雷帝)였는데, '뇌제' 라는 말은 지휘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성격이 불같았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앙카라에서 탈탈 털린 것도, 여름의 더위가 걱정이니 장기전을 펴야 한다는 신하들의 말을 무시하고 정면 대결을 한 탓이 크다. 앙카라 전투 문서 참고.
  • 쉴레이만·이사 vs 메흐메드
    술탄은 굴욕을 이기지 못해 자살(또는 병사)하고 오스만은 바예지트의 네 아들 사이의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또한, 이전까지 정복했던 튀르크계 소국들도 모조리 독립을 되찾아, 오스만은 약 십여 년간의 암울한 전간기를 맞으며 혼란에 빠진다. 이른바 오스만 공위시대. 바예지트 1세의 장남은 1400년에 요절했으므로 사실상 둘째 술레이만이 전투 당시 수도 에디르네에서 루멜리아, 즉 유럽을 관정하고 있었다. 셋째 이사는 부르사, 넷째 메흐메드는 아마시아를 맡아 각각 아나톨리아를 통치했다. 그러던 1403년, 바예지트는 티무르 진영에서 죽었고 티무르는 메흐메트를 술탄으로 지목했다. 그러자 사실상 장남이던 술레이만과 동생 이사가 반발하며 내전이 발발하였다. 먼저 1403년에 이사와 메흐메드가 싸웠는데 후자가 승리하여 부르사에 입성하였고, 이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재차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카라만 후국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그는 목욕 중에 메흐메드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된다. (1406년)
  • 쉴레이만 vs 메흐메드·무사
    양측의 완충 역할을 하던 이사가 퇴장하자 쉴레이만은 즉각 행동을 개시하여 1404년에 보스포루스를 건너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부르사, 그리고 앙카라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메흐메드는 섣불리 싸우기 보다 병력을 보존하며 아마시아로 후퇴, 수비에 일관하며 때를 노렸다. 그리고 티무르 측에 요구하여 포로였던 동생 무사를 데려와 휘하에 두었다. 1405년부터 1410년까진 별다른 전투가 없었고 쉴레이만이 사실상 오스만 대부분을 다스렸다. 그러던 1410년, 조용히 세력을 키운 메흐메드는 동생 무사에게 흑해를 건너 트라키아에 상륙하게 하여 술레이만의 후방을 쳤다. 하지만 무사를 돕기로 했던 세르비아의 부크 라제로비치가 그를 배신하며 무사는 패주하였다. 이후 자만해진 쉴레이만은 사치스럽게 지냈고, 그 틈에 세력을 회복한 무사가 에디르네로 진격하자 수비대가 항복하였다. 이에 쉴레이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하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1411년)
  • 무사 vs 메흐메드 
    루멜리아를 장악한 무사는 쉴레이만 편을 들었던 동로마 제국을 응징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고, 이에 황제 마누엘 2세는 메흐메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무사가 쉴레이만의 주의를 끄는 틈에 앙카라와 부르사 일대를 수복한 메흐메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수비 병력을 파견함과 동시에 보스포루스를 건너 무사와 겨루었으나 패하였다. 메흐메드는 자신의 말이 칼에 베이는 수모까지 겪은 후 소아시아로 철군하였다. 그리고 1413년, 재차 보스포루스를 건넌 메흐메드는 세르비아의 데스포트 스테판 라제로비치의 지원을 받아 소피아 인근의 차무릴 전투에서 무사를 격파하였다. 이후 무사는 배신의 댓가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0년만에 내전을 종식한 메흐메드는 공식적으로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3.1.5. 빠른 회복[편집]

흡사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의 동로마 제국을 보는 듯한 이 전간기를 끝낸 것이 메흐메트 1세로, 제위 경쟁자였던 형제들을 모두 주살하고 아나톨리아와 유럽의 영토를 어느 정도 규합하는 데 성공한다. 유럽의 신하국들에게 다소 지나친 요구를 하며 오스만의 위엄을 과시했던 바예지트와는 달리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며 신하국으로서 붙잡아두었고, 아나톨리아에서는 티무르 제국을 의식하여 대체로 현상 유지 정책을 폈다. 이후 아나톨리아에서 바예지트 시대의 영토는 무라트 2세 때에 들어서 모두 탈환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1444년에 다시 강성해지는 오스만을 경계하기 위해 재차 편성된 십자군을 바르나 전투(1444년), 그리고 코소보 전투(1448년)에서 모두 격파하며 오스만의 완전한 부활을 알렸다. 

14세기 초부터 술탄은 그저 거의 동등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튀르크멘 지배자라기보다는, 이론적으로 절대적 군주라는 논리가 진화하기 시작했다. 고위 관료와 야전군사령관들은 이에 치열하게 논박했지만, 이 관계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극적으로 변한다. 이 정복으로 엄청난 권위를 갖게 된 술탄 메흐메트 2세는 가끔 독립적인 행보를 했던 거물급 튀르크멘 지도자들의 부와 권력을 빼앗았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직후 재상이자 튀르크멘 명문 출신인 할릴 파샤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그 후임 재상으로 데브시르메 출신인 자아노스 파샤를 임명했다. 이로써 튀르크멘 지도자들의 정치적 지위는 크게 하락,[27]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들을 이용한 중앙집권화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이런 흐름은 데브시르메 출신자들에 의해 크게 강화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메흐메트 2세는 절대적 권력의 논리를 법제화했다. 그 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술탄은 이론적이긴 하나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고, 신료들에 대해 생사 여탈권마저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정확하게 적자면 1300년부터 1453년 즈음까지)의 오스만 지도층은 이슬람의 세력을 확장하고 방어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기는 가지(Gazi)들[28]과, 성직자, 학자 등 지식인 계층인 일미예(İlmiye)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튀르크계였는데, 동쪽에서 몽골이 맹위를 떨치자 서쪽으로 피신하다가 나름 훌륭한 지휘관인 데다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성전을 벌이고 있다는 오스만에게 주목하게 된 것. 이후 그들은 오스만의 개국공신 세력으로서 군사와 행정 양쪽에 걸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지만, 그로 인해 술탄은 전제 군주라기보다 가지와 일미예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하고 때때로 타협을 하는 등 제1인자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에서 벗어나 보고자 하는 술탄들의 노력 결실이, 바로 예니체리와 예니체리 징집제도인 데브시르메 제도다. 즉 군사적으로 '새로운 피' 를 수혈하려고 시도했으며, 그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판단되자 데브시르메로 관료 예비군도 징집하기 시작한 것. 이후 데브시르메 징집자들은 메흐메트 2세 시대에 이르러 일종의 여당으로서 정권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다.

여기서 데브시르메란 예니체리 양성 제도를 뜻하지만, 비단 예니체리뿐만이 아니라 기술자나 예술가, 종교인, 정치가 등도 양성했다. 징집한 소년들의 자질을 검사한 뒤, 군인 체질이다 싶으면 아제미 오을란(Acemi oğlan)이라는 과정을 이수시켜 예니체리로 만들고, 군인으로 만들어도 좋지만 그러기에는 영특함이 아깝다고 생각될 경우 이츠 오을란(İç oğlan) 과정을 가르쳐 관료로 만들었다. 또한 예니체리로 만든 뒤에도 건축이나 기타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뛰어난 재능을 보일 경우 그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정리하면, '데브시르메=예니체리 징집제도'가 아니라는 말. 바로 위에 나오는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들을 이용한 중앙 집권화를 확립'이라는 말도, 사실 '예니체리'가 아니라 '데브시르메 출신자'로 바꾸어야 옳다.

3.2. 제국으로서[편집]

파일:external/www.chuchotezvous.ru/ottoman-empir_6_20150216_1886333622.jpg
15-16세기의 팽창기는 '14xx년/15xx년, 어디어디를 누가 정복함'의 단순한 나열에 불과하게 된다.

유럽에서는 1354년 갈리폴리에 교두보를 확보한 이래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기까지 불가리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등을 병탄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에는 1459년 세르비아, 1460년 모레아, 1462년 보스니아, 1475년 크림 반도의 카파, 1479년 알바니아, 1541년 중부 헝가리를 차례차례 정복해 나간다.

정복 뿐만 아니라 속국들의 복속 또한 이어져서 1458년 라구사를 시작으로, 1462년 왈라키아 공국[29], 1478년 크림 칸국, 1484년 몰다비아, 1526년 동헝가리 왕국[30]을 속국으로 삼는다. 숙적 베네치아와는 동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밀고 당기는 혈투를 벌이며 1430년 테살로니키 전투를 시작으로 1479년 네그로폰테, 1501년 두라초, 1503년 베네치아의 모레아 거점인 모돈과 코론, 1522년 로도스 섬, 1566년 키클라데스 제도, 1571년 키프로스, 1669년 크레타를 정복한다.

한편 유럽 밖에서도 1461년 잔다르 베이국과 트라페준타 제국 정복을 시작으로 1487년 카라만 베이국을 정복, 1514년 셀림 1세 찰디란 전투에서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유프라테스 너머로 진출하며 1517년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셀림 1세의 아들 쉴레이만 1세도 여러 차례의 원정을 통해 1534년 이라크, 1538년 예멘, 1549년 반과 1551년 리비아, 1555년 에리트레아 지부티, 1556년 알제리 일대를 정복했다. 쉴레이만 1세의 긴 재위 기간이 끝날 무렵 제국의 영토는 3대륙에 걸쳐 227만 3720 km²에 달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부터 1566년 쉴레이만 1세 사망 시까지의 시기를 고전기(Klasik Çağ)라고 하며 이 시기의 제국은 한번 떴다 하면 모든 국가를 긴장 태웠을 정도의 막강한 서반구 최강국으로 군림했다.

당대 유럽에서 오스만군은 악마의 가호를 받는 무적의 군대 정도로 취급받았다. 아닌 게 아니라 15, 16, 17세기 오스만 제국을 보면 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을 철근처럼 씹어먹으며 땅을 넓혀나가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렇듯 미친 듯이 영토 확장에 골몰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아래의 '오스만 제국의 행정 구역' 문단에 소개되어 있지만, 각 지방의 총독이나 대총독은 각자 맡은 지방에 주둔하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관까지 겸했다. 즉 지방 행정 단위와 군대 편제가 일치되어 있었고, 그런 만큼 총독이 근무를 얼마나 잘했느냐를 평가해서 승진시킬 것이냐 강등시킬 것이냐를 따질 때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군공이었다. 이런 탓에 오스만 제국 궁정이나 지방관들 가운데에는 언제나 호전파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16세기 후반 이후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부터는 이들이 아예 중앙 정부의 뜻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군사 원정을 단행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바로 위에 소개했듯이 오스만 제국의 창건자 오스만 1세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가지(Gazi)들을 끌어들여 나라를 세웠는데, 그들을 끌어들이려는 방법의 일환으로 오스만은 가지를 자칭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오르한 역시 가지를 칭했는데, 그러다 보니 '이교도를 쳐 없애, 이슬람의 땅을 넓힌다'는 것은 마치 오스만 제국의 국시처럼 되어버렸다. 3대 군주인 무라트 1세 때부터는 나라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힌 관계로 가지를 칭하지 않았지만, 제국의 개국 공신들로 자리를 잡은 가지들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과 함께 공신 세력으로 자리 잡은 성직자들도 가지들과 의견을 같이했다.

또한, 제국의 황제들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후 자신을 '로마황제(카이세리-룸)', '카이사르의 후계자'라고 칭하였고 튀르크인들은 간접적으로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가령 16세기 전반에 헝가리 영토를 두고 합스부르크 황가와 조약을 맺을 때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는데, 당시 합스부르크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나름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동시에 스페인의 왕이었고 그 동생인 페르디난트가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황제 대리로서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우위에 서서 체결[31]한 두 번의 조약에서 카를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스페인 국왕'으로만 표기되고, 페르디난트도 '로마의 황제 대리'가 아니라 '독일 왕'으로 표기되었다.

서로마와 동로마를 별개의 국가로 생각하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당대의 인식으로 따지든 정치적 · 역사적 정통성으로 따지든 여러모로 봐도 동로마는 로마에서 떨어져 나온 별개의 제국이 아닌 로마 제국 그 자체였으니 로마 제국을 쓰러뜨린 황제들이 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로마 황제를 자처한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의 주장을 두 가지 근거로 뒷받침했는데, 먼저 로마 제국이 수도로 삼았던 도시를 수도로 하는 제국의 군주라는 것. 그리고 선대 술탄인 오르한이 동로마 황녀와 정략 결혼한 적이 있으므로 동로마 황실과 오스만 황실은 남남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유럽 입장에서는 그런 거 알 게 뭐야라는 태도로 나왔지만,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입장에서는 조금 거슬렸던 모양. 이후 쉴레이만 1세 시대에 합스부르크 황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체결한 조약에서, 쉴레이만은 '황제' 로 표기된 반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 5세는 황제 칭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스페인 왕'으로만 표기되었다.

로마 황제는 대 유럽용, 술탄 내지는 파디샤는 이슬람 세계 전용 명칭이고 대내적으로는 튀르크인의 전통적인 군주 칭호인 칸이라고 통칭했다. 아타튀르크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망하자 칸 역시 사라졌다. 오스만 제국뿐만 아니라 라이벌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사파비 왕조들도 비슷하게 전근대 다민족, 다종교 제국들은 각기 다른 신민들에게 다른 직함과 명분을 내걸고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러니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부터는 저런 다민족 제국들이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해체되어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만 하더라도 자국의 유럽계 신하들과 주변국들에는 이 로마 황제로서의 권위를, 아랍계가 주도하는 시리아~메소포타미아~아라비아~이집트 일대는 정통 아바스 왕조 칼리파에게서 양위 받은 칼리파로서의 권위를, 아나톨리아와 카프카스, 타타르족이 지배하는 우크라이나 남부 일대에서는 칭기즈 칸을 계승한 카간으로서의 권위를 강조했다. 이 중에서도 로마 제국, 특히 동로마 제국의 유산은 종교적 차이를 떠나서 지중해권 전체의 아랍인들과 이집트 등지에도 강렬한 문화적 자취를 남긴 가장 힘이 센 직함에 속했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특히 "대제"로까지 칭송받는 쉴레이만 1세의 치세는 오스만 제국의 최대 번영기로, 당시 카를 5세 치하의 서유럽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을 상대로 1차 빈 공방전이 있었고, (결국은 물러나긴 했지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32]는 사치와 부의 극을 달렸으며 수많은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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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에 비견되기까지 하는 오스만 제국 최대의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Mimar Sinan),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평가받는 푸즐리(Fuzûlî), '시인들의 술탄'이라는 별명을 가진 바키(Bâkî) 등이 모두 쉴레이만의 후원을 받으며 활약했다. 또한, 쉴레이만 본인도 무히비(Muhibbi, '연인' 이라는 뜻)라는 필명으로 시를 남겼으며, 제국 각지에 수많은 모스크를 짓는 한편 메카와 예루살렘의 모스크를 수리했다.

1530년대에는 에게 해의 제노바인들과 베네치아인들의 거점이 남김없이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며 오스만 군대가 이탈리아에까지 상륙했고 로마 함락이 멀지 않은 듯싶었다.

3.3. 몰락의 시작[편집]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쉴레이만 1세의 치세를 오스만 제국의 쇠퇴 기점으로 만든다. 왜냐면 연이은 정복으로 인해 비대해진 제국을 지탱하기 위해 쉴레이만 1세는 사법 제도의 정립과 예니체리의 확대 등 여러 관료주의적 개혁을 진행했는데, 이것은 먼저 관료제의 비대화를 불러오게 된다. 또한, 제국의 창건자 오스만을 도와 개국 공신으로 활약했던 가지와 일미예 세력이, 이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몰락했다.

메흐메트 2세 시대부터 쉴레이만 치세 초기까지는 데브시르메 징집자 세력이 여당, 옛 개국 공신 세력이 야당으로서 서로 정치적으로 견제하며 황제에 대한 충성을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데브시르메 징집자가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두 세력을 서로 견제시키면서 전제군주로 군림해 온 황제의 입지가 굉장히 애매해지게 된다. 한편 예니체리의 엘리트 군사 조직으로서의 정체성이 붕괴하고 군벌화가 촉진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하었다. 예니체리들의 전투력 쇠퇴로 생긴 공백은 크림 칸국의 군사력이 대신했다. 이 관계는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에서 오스만 황제와 크림 칸의 유대 관계가 끊어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크림 칸들이 오스만 황족들의 황통이 끊길 경우 오스만의 황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헛소문이 현대까지 남아 있을 정도이다. 크림 칸국 항목 참조.

또한, 쉴레이만 1세의 치세 동안 하렘 출신 황후의 정치적 위상이 격상되었는데. 본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쉴레이만 대제 이전까지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쉴레이만 1세가 그가 사랑한 우크라이나 출신 노예였던 휴렘 술탄을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하고 결혼하게 되면서 오스만 제국에 하렘 출신 황후들이 생겨났다. 쉴레이만 사후 무능한 술탄들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태후들이나 황후가 실질적으로 술탄의 자리에 오르면서 종전의 절대 군주적 위상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술탄들이 무능한 데다 그저 하렘의 후궁들이랑 향락에 빠져 사니 정치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일례로 1주일에 4번 있었던 국무 회의를 쉴레이만 1세 이후의 술탄들은 1번만 참석하거나 나중엔 아예 참석 안 하고 재상보고 주재하며 다 알아서 하라고 했다.

황후와 태후들, 거기에 황녀들의 힘[33]이 강해져 이들이 나랏일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휴렘 술탄이 황후로 책봉된 1534년부터 투르한 하티제 술탄(Turhan Hatice Sultan)의 권력이 쾨프륄뤼(Köprülü) 가문[34]으로 넘어간 1656년까지의 기간을 여인들의 왕조(Kadınlar Saltanatı)(직역하면 "여성들의 지배")라고 부른다. 

예니체리와 함께 오스만 제국 엘리트 군제의 또 다른 축이었던 티마르 제도와 티마를르 시파히 또한 붕괴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제도들은 정복지의 부족으로 인해 붕괴가 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엘리트 기병대였던 티마를르 시파히는 티마르 제도를 통해 정복지를 봉토로 하사받았는데, 제국의 팽창이 한계에 이르자 더 이상의 봉토가 나올 리가 없었고 티마르 제도 자체가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티마르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던 티마를르 시파히 또한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 군사력의 양익이 모두 쉴레이만 1세의 치세 도중 무너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군사적 쇠퇴기에 들어가던 17, 18세기의 오스만 제국은 튤립 시대(Lâle Devri)'라 불리는 최고의 문화적 전성기를 맞았다.

한편 쉴레이만 1세가 정복한 영토들의 상황도 모두 시원치 않았다. 사파비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획득했던 영토 중 타브리즈를 비롯한 상당한 부분은 결국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그냥 돌려줬고,[35] 그나마 획득한 영토도 유지를 못 했고 영토를 되찾으려는 페르시아와의 끝없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특히 동유럽 영토는 가혹한 세금과 통치를 일삼는[36] 오스만 제국을 증오하여 틈만 나면 반란을 일으켰다. 헝가리는 수탈과 전쟁으로 인해 수백 년 동안 풍요로웠던 옥토가 졸지에 황무지로 변해버리면서 오스만 제국의 최대 골칫거리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달마시아와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넘어오는 약탈자들과 해적들에 의해 피폐해졌다. 

쉴레이만 1세 사후 베네치아와의 길고 긴 물량전과[37] 레판토 해전의 패전, 그리고 페르시아와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정체기에 들어간다. 레판토 해전에서 패한 당시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은 "키프로스 장악이 유럽의 팔을 자른 것에 비할 수 있다면, 우리의 패배는 고작 수염을 자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평했고 실제로 레판토에서 상실한 함대는 겨우 2년 만에 3배의 규모로 재건한 뒤 스페인이 1535년 뺏은 튀니지를 탈환했다. 물론 배는 그렇다 쳐도 경험 많은 해병들이 그렇게 죽어 나갔으니 전투력은 많이 손실을 보았겠지만 말이다.

특히 1683년 시도한 2차 빈 공방전은 침체하는 오스만 제국의 위신을 세우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일발 역전시킬 기회였지만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패배하고 만다. 그래서 이 패배를 만회하려고 무스타파 2세가 친정한 젠타 전투는 더 참담했는데 8만의 병력으로 5만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 했건만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3만의 사상자를 냈고 술탄의 하렘 궁녀들, 87문의 대포와 오스만 왕가의 보물, 오스만 제국의 국새까지 빼앗겼다. 무스타파 2세는 겨우 살아 돌아갔다. 반면에 오스트리아군 피해는 고작 500명의 사상자. 그러다 보니 오스트리아도 놀랐을 정도였다. 거기다 이때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사부아 공자 외젠이 그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장이었다. 한마디로 상대를 잘못 만난 셈이다. 이 젠타 전투로 인해 이제는 유럽의 군세가 오스만을 능가한다는 것이 드러났고 더 이상의 대유럽 정복전쟁은 불가능해졌다. 이후 오스만은 유럽 정복을 포기하고 영토 유지에만 들어가게 된다.[38]

이 와중에 스페인령 아메리카발 물가 혁명이 오스만 제국에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하자 이미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폐화된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더는 가중되는 부담을 버틸 수가 없었다. 정복지의 지주 계급으로서 군비의 약 절반 가까이 지탱해 주던 티마를르 시파히들이 감당을 못하고 몰락하자 티마를르 시파히들이 부담하던 군비까지 중앙에서 전부 떠안아야 했다. 따라서 끝없이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재정적 출혈은 이제 오스만 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다만 대포를 비롯한 화기의 발달로 기병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보병이 대두하기 시작하자,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티마를르 시파히의 수를 줄이고 봉토를 중앙 정부가 몰수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상비군을 갖추는 게 낫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즉 티마를르 시파히가 가지고 있던 봉토가 고스란히 제국 정부로 들어갔더라면 '재정적 출혈'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맞지 않는 말이 되었겠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나오는 예니체리들. 결국, 1585년 오스만 제국은 태후 사피예 술탄과 관료들의 주도로 공용 화폐였던 "악체(Akçe)화"[39][40]의 평가절하를 결정했으며[41] 이후 100년 동안 끔찍한 인플레이션을 맛보기 시작하면서 쉴레이만 1세 사후 20년 만에 오스만 제국은 차츰 멸망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한편 이 위기는 쉴레이만 1세의 정책으로 막강한 정치 권력을 손에 쥔 이후 경제권까지 넘보기 시작하던 예니체리 계급의 세력 확장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예니체리들은 떨어진 수입만큼 자기 뱃속을 채우기 위해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던 무력으로 토지를 강탈하는 등 온갖 더러운 짓을 해댔는데, 오스만 제국의 세수는 대부분 이런 농토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므로 특권층인 예니체리들이 토지를 집어먹는 만큼 가뜩이나 좋지 못한 오스만 제국의 재정 위기는 심화하여 계속 악체화의 평가절하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수치상 급료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악체화의 실질 가치가 폭락하다 보니 실질적으로는 급료가 줄어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 이들은 떨어진 수입에 반발해 폭동도 자주 일으키게 되었고, 무력을 뒷바탕으로 상공업 분야에 손아귀를 뻗치기도 했다. 관료들도 어떻게든 승진하기 위해 뇌물을 바치는 등 불법적인 방법도 거리낌 없이 동원했다.

이제 국가의 국토란 국토는 다 집어먹은 예니체리들은 오스만 제국을 일종의 폴란드식 귀족 공화국으로 만들어 술탄을 쥐고 흔들며 입맛에 맞게 갈아치우기 시작했다. 이는 모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개혁 시도를 무력으로 중단시켰던 폴란드의 귀족들처럼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18세기부터 서구화된 군사 제도를 도입한 러시아 제국이 계속 팽창하였고 부동항을 얻는 것을 지상 과제로 내세운 러시아는 발트 해로의 진출을 꾀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흑해와 지중해로의 진출을 시도하게 된다. 이는 오스만 제국과 한판 벌이겠다는 말과도 같았고, 오스만은 러시아와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 러시아는 국력에서 이미 오스만을 압도했기에 오스만 제국과 계속해서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벌여 이기면서 제국의 영토를 많이 빼앗아 축소한다.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흑해와 카스피 해, 캅카스 방면의 영토를 상당수 상실했으며, 동유럽 영토들도 유럽과 러시아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켜 죄다 독립하는 바람에 인구와 영토가 크게 약화된다. 게다가 유럽 국가들에게는 항상 어찌 못하고 쩔쩔매서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한 시대의 강자는 "유럽의 환자"라고 불리며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1808년에 제위에 오른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사촌 형이었던 셀림 3세 니자므 제디드 개혁을 통해 왕권을 농단하는 예니체리들을 박살 내려다가 도리어 암살당한 것을 잊지 않고 예니체리들을 안심시키면서 민심을 얻고 최신 병기와 새 편제를 도입해 친위대를 양성했다. 뒤늦게 조짐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챈 예니체리들은 술탄을 쫓아내기 위해 평소 밥 먹듯이 하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마흐무트 2세는 몰래 양성한 친위군을 직접 지휘하여 예니체리의 반란을 진압한다. 이때 유럽에서 들여온 대포 15문이 30분에 걸친 포격에 예니체리 만여명이 여기저기서 죽어나갔다고전해진다. 이렇게 해서 일생 일대이자 전 오스만 가문의 원수였던 예니체리가 해체되었다. 그러나 아직 진통이 남아 있었다.

이 무렵의 권력 구조 양상을 보면, 이미 쉴레이만 1세 재위 기간 중 권력은 군주 개인에서 그의 해방 노예, 피후원자라 할 수 있는 데브시르메 출신자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데브시르메 관료들은 그 이전부터 통제받지 않는 특권 집단으로 자리 잡은 예니체리 계급이나 태후, 황후와 결탁하여 실질적으로 제국을 장악했는데, 이는 북쪽으로는 헝가리와 크림 반도, 남쪽으로는 수단, 서쪽으로는 알제리, 동쪽으로는 캅카스와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비대해진 제국을 술탄 혼자서 다스리는 것이 불가능해진 까닭에 영토를 다스리고 유지할 행정 관료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브시르메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친히 군사 원정을 벌이거나 통치를 하는 황제는 필요가 없어지고 관료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황제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이 시기에 즉위한 황제 가운데 대다수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거나 나이가 어려 태후의 섭정이 필요했다. 결국 오스만 2세 무라트 4세의 경우를 제외하면 19세기의 마흐무트 2세와 압뒬하미트 2세가 통치하기 전까지 잠깐이라도 문자 그대로의 전제 군주로 군림했던 황제는 없었다.

국가의 권력은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재상과 파샤 가문으로 넘어갔다. 술탄의 권력이 있던 곳에는 예니체리 군벌을 등에 업은 민간인들의 과두제가 등장하고, 옛 관례들의 자리는 새로운 관례들이 차지했다. 데브시르메에 의한 관료 등용은 지배 계급의 권력 세습으로 대체되었다. "아직은" 이스탄불의 중앙 정부가 실제로 통치권을 갖고 있었지만, 군주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실권을 지고 있었다. 이는 유럽에서 군주들이 권력을 다지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3.4. 메흐메트 알리의 반란과 이집트의 준독립[편집]

전통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지방 총독의 권세가 대단히 강력했다.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 한해서지만 군사권과 행정권, 경찰권을 보유했으며, 제국의 중앙 정부가 파견한 법관의 판결만 떨어진다면 법을 집행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그러다보니 무늬만 중앙 집권이지 실질적으론 봉건제에다 지방 자치나 다름없었다. 특히 황제의 명을 받고 총독으로 내려왔을 터인 이들은 제국의 통제가 약해지면서 중앙 정부가 파견한 법관을 우습게 보는 것도 모자라 점차 독립적인 성향을 띄기 시작했고, 19세기가 되면 현 터키 국경 밖의 영토는 전부 준 독립화했다. 당대 이집트도 실제로는 독립국이나 다름없었지만,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총독 통치 하에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법관을 파견하는 한편 각지의 주요 도시에 예니체리 군단을 주둔시킨 다음 예니체리가 주둔하는 도시는 그 지방을 관할하는 총독이라도 들어갈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코스탄티니예의 예니체리가 황제를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등 변질되자 이들도 지방의 마피아 비슷한 조직으로 변화하여, 총독 견제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 틈을 탄 총독들이 힘을 길러 중앙을 무시하고 군벌로 성장한다.

이렇게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된 지방들 중 오스만 제국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고 제국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킨 곳이 이집트였다. 알바니아 출신 이집트 총독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현대화를 추구하여 서구식 조병창을 건설하고 유럽식 교육을 도입하는 등 기세등등하게 근대화를 진행하는 중 그리스 독립 전쟁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는 것을 보자 전쟁에 원군을 보내주는 대가로 중앙 정부를 상대로 이집트 총독 자리를 임명직에서 세습직으로 바꿔줄것을 요구했다. 술탄은 이를 거부했고 메흐메트 알리는 수틀려서 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 장교들이 지휘하는 이집트군은 연이은 전쟁의 충격으로부터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뒤 곧장 코스탄티니예로 향했다. 개혁이 완료되지도 않았고 예니체리가 남긴 상처가 여러 곳에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오스만군은 어처구니없는 졸전을 펼쳤다. 오스만 제국은 큰 충격을 받았으나 메흐메트 알리의 이집트군을 막을 힘이 없었다. 그러다가 유럽 열강의 도움으로 제위와 팔레스타인 영토는 보존했고 이집트는 형식적인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았으나 시리아를 통째로 메흐메트 알리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외교권에 치명타를 주어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을 더욱 깔보게 된다.

분통이 터진 마흐무트 2세는 개혁을 가속하면서 메흐메트 알리를 손봐줄 그 날만 기다리고 있었고, 메흐메트 알리가 시리아를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곧바로 8만 대군으로 시리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오스만군은 서구식으로 훈련된 4만여 명의 이집트군의 반격에 의해 또 패배했으며 알렉산드리아를 봉쇄하기 위해 출항했던 전 오스만 제국 해군 메흐메트 알리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마흐무트 2세는 홧병으로 결핵이 악화하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형편없고 약해졌는가를 전 유럽에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이다. 

오스만의 연이은 졸전을 보고 황당해진 유럽 열강들은 이집트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영국이 함대를 파견해 철수할것을 요구하며 침공 위협을 해 보이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후원을 믿은 메흐메트 알리는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서야 이집트는 침공을 중단한 후 시리아를 도로 돌려주고 형식적인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알리는 최초의 목적인 이집트와 수단, 팔레스타인의 세습을 확립했고, 이후 1956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는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무함마드 왕조를 설립하게 된다. 이집트의 왕은 아니고 총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권력은 왕이나 다름없었다.

이로써 이집트는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긴 하지만 사실상 오스만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이때 이집트에서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으로 세금을 납부했으며, 1860년대까지 오스만 제국 전 속령 중 가장 돈이 많이 들어오는 지역이 남동유럽 다음으로 바로 이집트였다. 그래서 이집트가 완벽하게 독립했을 때는 오스만의 세수를 감소시켜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3.5. 민족주의와 제국의 해체[편집]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전 유럽을 휩쓴 민족주의 사상은 오스만 제국에도 서서히 유입되기 시작했다. 남동유럽 지역의 그리스인(아직까지는 그리스인이라기보단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하지만)들은 한때 오스만 제국의 다수 민족을 차지하고 있었고, 비록 즘미라는 이름으로 무슬림보다 못한 대우를 받기는 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사업과 무역을 통해 부를 이루고,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가문들이 있었다. 그리스어로 파나리오테스(Φαναριώτες)라고 불리는 이 가문들은 오늘날 이스탄불의 페네르(Fener, 오늘날에도 그리스인이 많이 사는 동네)를 중심으로 거주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민족의식을 각성하기 시작했다.

파나리오테스의 발생에 대해 좀 더 설명하자면, 이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탄생한 신흥 부르주아지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파나리오테스 다수가 그리스인이지만, 훗날의 루마니아인과 알바니아인을 포함하는 이들 기독교인은 16세기 후반에 서서히 출현하기 시작해 18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장악한 남동유럽 지역의 기독교인들과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점차 부를 축적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오늘날도 페네르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성당 근처에 저택을 짓고 모여 살았으며,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에 따라 제국 내 모든 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세속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선출에 개입하는 등 점차 큰 권력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과 서구의 정치, 외교적 교류가 증대하기 시작하는 18세기 초부터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서방 교류를 위해 특별히 설치한 관직인 드라고만(Dragoman)을 세습, 독점하기 시작하면서 이들 중 상당수는 이에 대한 대가로 도나우 공국의 대공이 되어 정치적 권력을 키워나갔다. 이로써 18세기 내내 그리스인의 영향력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나날이 높아져만 갔으며, 이 시기 그리스인들의 힘을 억압하기 위해 이슬람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특정 복장의 제한, 말 사용의 제한, 거주지의 제한, 가옥 크기의 제한 등 제약을 가하려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거의 지켜지지 못했다. 당연히 기득권을 획득한 파나리오테스들은 자신들의 권력기반이 되는 오스만 제국에 충성했으며, 오스만 제국도 서구와의 외교, 협상, 무역을 위해서 이들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상호공존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존은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유입하는 19세기 초에 깨어지기 시작한다.

파나리오테스 가문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빨리 서구 문명을 접할 수 있었으며, 거상, 드라고만, 전문 통역사 등으로 관직에 진출한 파나리오테스들은 자식들을 서구식으로 교육시켰다. 그리고 서구식 교육에서 고대 그리스 고전, 문학, 법 등을 통해 그리스적 정체성을 굳건히 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 안에서 고대 그리스의 판헬레니즘적 마인드를 갖춘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814년 에데사에서 파나리오테스들이 주축이 되어 성립한 비밀 결사 '친우회'(Φιλική Εταιρεία, 필리키 에테리아)는 그리스 민족의 독립을 목적으로 꾸려졌으며,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당시 파나리오테스 가문이 통치하던 도나우 공국에서 독립된 그리스 민족의 국가를 성립하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오스만 제국 또한 이를 알고 있었으며, 민족주의의 위험성 또한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인에 대해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정교회를 믿는 것은 기존대로 허락하되, 그리스 역사 교육을 금지하고 그리스어 출판물에 대한 검열을 강화했다. 하지만 나날이 늘어가기 시작하는 독립주의자들은 성당을 중심으로 '비밀학교'를 열어 교육을 계속했으며, 그리스인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렇게 해서 1821년 3월 6일, 친우회가 주축이 되어 도나우 공국에서 반 오스만 봉기가 일어났다. 이 반란은 곧 오스만 제국에게 제압되었으나, 이에 자극받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그리스인들이 3월 17일 반란을 일으켰으며, 같은 해 10월,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θεόδωρος κολοκοτρώνης)가 트리폴리를 점령하고 도시 내의 터키인 3만 6천 명을 학살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리스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반란의 불길은 크레타, 마케도니아, 중부 그리스에서도 이어졌으나 결과적으로 성공한 반란은 펠로폰네소스에서의 반란이었으며, 이 와중에 키오스 섬 의 학살, 유럽의 개입, 나바리노 해전 등이 이어져 1832년 그리스 왕국이 건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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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의 초상

그리스 독립 전쟁은 이전까지 간혹 그리스인들이 벌여온 반란과 본질에서 배경 및 내용이 달랐다. 이전까지의 그리스인들의 항쟁은 어디까지나 반이슬람,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명분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은 그리스 정교를 바탕으로 민족적인 자긍심과 민족성에 호소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대 민족주의를 토대로 그리스인이 왜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해 자신들의 국가를 세워야 하는지, 그리고 그리스인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민족주의 사상을 통해 세웠다는 점이다. 민족주의 이전까지 단순히 로마인(Rumlar, Ρωμαίοι)이라고 불린 - 그나마도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모든 민족을 이렇게 불렀다. - 그리스인들이 자신을 엘리네스(Έλληνες, Hellenes)라고 부르고 자신들의 민족적 기원을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찾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의 독립 이후 민족주의는 들불처럼 오스만 제국에 번지기 시작했으며, 곧 오스만의 영토였던 남동유럽 지역의 보스니아인, 알바니아인,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등의 민족들도 민족적 정체성을 찾으며 하나둘 봉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루마니아인의 경우 파나리오테스가 다스린 도나우 공국에 속해있으며,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상류층들은 그리스어로 의사 소통하고 그리스어로 예배를 보는 등 철저히 그리스화 되어 있었지만 차츰 오늘날의 루마니아 민족으로서의 자각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각각의 민족 집단들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고대 일리리아, 고대 불가르족, 고대 로마인 등등 스스로 민족사를 이데올로기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등 대규모 재해석, 언어 순화 운동이 펼쳐지지만 이건 이 항목과는 해당 사항이 없으니 생략한다.

한편 오스만 제국에서는 제국 내 민족들의 독립 시도를 저지하고,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그들의 정체성을 일치시킬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1839년 탄지마트 개혁은 즘미와 무슬림의 차이를 없애고, 이전까지 무슬림에게만 부과되었던 의무 병역을 즘미에게도 부과하되 즘미에게만 부과되던 종교세를 면제하는 식으로 오스만 제국 내 모든 신민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하지만 즘미들은 군대 가기를 싫어해서 병역 의무의 부과에 대해 "차라리 세금을 내겠다!" 며 반발하고[42], 무슬림들은 무슬림 나름대로 비무슬림과의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것에 반발했다. 탄지마트 개혁은 이뿐만 아니라 유럽 열강의 간섭, 제국내 반동 세력의 반발 등도 원인이었지만 이로써 실패로 끝나고, 그 대신 나타난 압뒬하미트 2세(II. Abdülhamit)는 탄지마트 시대의 중앙 집권 강화는 유지하되 오스만 제국의 구심력을 칼리파로 대표되는 범이슬람주의로 상정했다. 심지어 제국 내 공용어를 아랍어로 하려 하는 등 이 시기에는 남동유럽 지역과 중동 지역의 민족주의 운동을 기독교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개입하려는 러시아 프랑스에 맞서 이슬람을 중심으로 뭉치려 했다. 오스만 제국사 전체에 걸쳐 기독교, 소수종교, 알레비파에 대한 박해가 가장 심했던 시기도 이때의 일이다. 그리스의 독립 이후 드라고만에 채용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박해와 이에 맞선 독립 요구도 이 시기에 불거진 문제이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은 찢어지기 시작했다.

3.6. 멸망과 새로운 시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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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가 거의 다 날아간 1913년 오스만 제국.

비록 오스만 제국의 중근동 영토의 정세가 일시적으로 안정되기는 하였으나, 반대편 유럽 영토는 1821년부터 1827년 사이에 발발한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패배하고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기에 이르는 등 '유럽의 화약고'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탄지마트(Tanzimat) 개혁을 통해 근대식의 의회 제도와 헌법을 도입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지만, 국내 보수 세력의 반발과 속셈을 알아차린 열강의 간섭으로 인해 좌절한다. 1853년 러시아 제국과의 사이에서 발발한 크림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는 유럽 연합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승리하였으나 제국의 피폐화를 가속시켰으며, 승리도 부질없이 20년 후 다시 쳐들어온 러시아에게 결국 참패했다.

이렇게 동유럽의 영향력을 잃어가던 오스만 제국은 형국의 유지를 위하여 범이슬람주의, 범튀르크주의를 제창하고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일으키는 등 국내의 소수 민족 및 불만 세력을 가혹하게 진압하였다. 하지만 이럼에도 오스만의 상황은 여전히 유럽과 러시아에게 열세였다. 가뜩이나 인구가 1914년 기준 2300만에 불과하여[43] 유럽, 러시아보다 적은 데다 경제 수준도 굉장히 떨어졌다.[44] 사실 1830년대 부터 시작된 탄지마트 등 여러가지 개혁, 근대화 정책을 통해 의복, 제도 등은 수도 코스탄티니예를 중심으로 진작 서구화 됐고[45] 철도 부설, 서구식 군제 개편과 서유럽산 무기 도입, 무장[46] 등 물질적인 근대화의 속도는 빨랐지만[47] 산업화가 미진해 경제는 1차 산업인 농업에 여전히 의존하다 보니 다른 산업은 굉장히 낙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많은 비용이 드는 개혁을 무리할 정도로 강행하다 보니 재정 적자가 심할 수밖에 없고 이를 메우려고 국민에게 높은 세금을 매겨 제국의 국민들은 높은 세금에 시달렸다. 이후 독일에게 접근[48]하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해 10월 29일 동맹국 측에 참전을 결정,[49] 결국 패전국이 되어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나라가 갈기갈기 찢겨나가게 된다. 거기다 이 틈을 노려 그리스까지 고토수복을 외치며 쳐들어온다.

그리고 이때 일어난 사람이 1차 대전의 영웅인 아타튀르크였다. 그는 본래 술탄 메흐메트 6세의 명으로 아나톨리아 내륙을 장악한 독립 분자들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1919년 삼순으로 떠났지만, 그곳에서 독립군에 가담하고는 연합군에 항복한 술탄 정부를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하고 같은해 시바스에서 대국민 의회(Türkiye Büyük Milli Meclisi, TBMM)[50]를 열고, 군대를 모아 아나톨리아 앙카라를 거점으로 3년에 이르는 터키 독립전쟁을 펼친 끝에, 그리스군을 쳐부순 후 술탄을 폐위시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터키 공화국을 세웠다. 그 다음엔 그리스군을 격퇴하였고 연합군과 새로운 협상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1922년부로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의 시대가 열리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도도 코스탄티니예에서 앙카라로 이전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멸망으로 그나마 뭉쳐 있던 서아시아권의 이슬람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더 이상 뭉치는 일이 없다.[51] 뭉치더라도 그저 이득에 따라 할 뿐이지 나중에는 이슬람 국가들끼리 배신하거나 협조도 하지 않으니 제대로 뭉치지 않는다. 오스만 제국의 멸망과 이슬람권의 분열은 국제 무대에서 이슬람권의 추락을 의미했다. 그나마 아랍연맹 OPEC, 이슬람 협력기구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 기구들은 그저 이득을 위해서 뭉친 연맹에 불과해서 진정한 연합이 아니다. 당장에 중동전쟁만 봐도 이슬람 국가들의 단합력이 얼마나 저질인지를 알수 있다. 이후 이슬람권은 지금까지도 서구에 정치, 경제, 기술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특히나 이슬람권은 날이 갈수록 서구권과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으며 열세인 형편이다. 그러다보니 터키에서는 서구에 대한 반감과 열등감이 굉장히 커서 유럽이 두려워하던 오스만 제국을 동경하는 이들이 많다. 터키 역사학계에서도 오스만 제국을 많이 띄워주고 있다. 터키 정부도 국가의 자존심을 세울 때 항상 내세우는 것이 오스만 제국이다. 그러나 과거 오스만 제국 시절 터키에게 지배받았던 시리아나 이라크, 요르단, 쿠웨이트 같은 중동의 아랍 국가들에서는 오히려 광분하며 이를 간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인들의 입지는 되려 기독교를 믿던 그리스나 불가리아, 세르비아 같은 남유럽 피지배 민족들보다 더 낮은 취급을 받았으니 말이다.[52]

4. 국력[편집]

역대 중동 제국 중에서 가장 강한 제국이었다. 한번 마음먹고 군대를 보냈다 하면 전 유럽을 발칵 뒤집어놓을 정도로[53] 강력한 제국이었으며[54] 유럽 동부에 제대로 된 공포를 느끼게 해 준 단 둘뿐인 제국인 데다가 메흐메트 2세, 쉴레이만 1세 등 멋진 명군이 활약한 이야기는 세간에 유명하기도 하다. 유럽사에서 악의 축이나 마왕 같은 이미지로 서로 전투를 벌이던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이 상대라면 한뜻이 되어 연합군을 편성하는 일도 빈번했다. 유럽 국가뿐 아니라 카라만 공국, 백양 왕조, 사파비 왕조, 맘루크 왕조도 다 같이 유럽 국가들과 손을 잡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려 하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었다.

오래 있던 왕조 중 하나인데 600여 년간이나 존속하였다. 웬만한 이슬람 왕조는 단명하는 사례가 많지만 오스만 왕조는 600년이나 갔다. 게다가 적어도 부르사, 에디르네 초기 양대 수도 점령 이전까진 거의 구전 설화 수준으로 기록이 없긴 하지만, 이후로는 몇몇 술탄 개인이 문약한 성격이었거나 술탄의 모후들이 권력을 휘두르거나, 예니체리 친위대에게 황제권이 농락 당한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이슬람 왕조들 중 독보적으로 오랫동안 안정적인 황제권을 휘두른 국가이다. 동시대 사파비 왕조는 훨씬 일찍 18세기 초반, 그것도 내부 권력 구조의 취약함이란 근본적인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체 지방 토후였던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반란으로 멸망했고, 무굴 제국 또한 알람기르 1세 치세의 과다한 전쟁으로 인해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반란을 틀어막지 못한 채 18세기 초중반 이후로는 델리 일대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한 식물 정권으로 마지막 한세기를보낸 걸 보면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은 끝에서 네 번째인 압뒬하미트 2세 (1876~1909년 제위)까지만 하더라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그대로 전제 권력을 유지했으니 이슬람 왕조 국가들 중에서는 독보적으로 근대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중앙 집권 전제군주정을 유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핵심이었던 소아시아의 튀르크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계승하여 터키 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터키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특성을 상당 부분 부정하고 세워졌기에 둘 사이의 연속성은 있더라도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다. 당장 무스타파 케말의 개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케말리즘 또는 '여섯 개의 화살'은 공화주의, 민족주의, 인민주의, 국가 통제, 세속주의, 혁명인데, 이 가운데 공화주의는 오스만 제국에 명백히 반대하는 것이고, 민족주의도 오스만 제국의 체제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하다. 또 모두는 법 앞에등하다는 인민주의도 무슬림과 무슬림이 아닌 자(즘미)를 차별하던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이슬람을 국교로 삼은 데다 황제가 곧 칼리프이기도 했던 오스만 제국의 체제와 세속주의 역시 명백히 위배된다. 물론 오스만 제국이 터키 공화국의 전신인 것은 맞지만[55] 오스만 제국과 터키 공화국의 관계는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관계와 유사하다.

4.1. 영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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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절에는 터키 본토는 물론이고 흑해 일대와 남동유럽(발칸 반도) 전체, 헝가리, 북아프리카[56], 서아시아[57], 카프카스 아르메니아, 아라비아 반도 남부 예멘까지 세력이 뻗칠 정도로 거대한 제국이었다. 한창 전성기이면서도 기독교 세계와의 대립이 가장 치열했던 16세기 후반~ 17세기 초중반에는 헝가리,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직접적인 대결뿐만 아니라 저 멀리 있는 현대 인도네시아 아체 지방에서 포르투갈과 대립하는 현지 무슬림 소국들에 병력과 무기를 지원해 주고 남쪽 소말리아 해안에서 역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는 기독교 왕국 에티오피아에 맞서 무슬림 아달 술탄국의 물주 노릇을 했을 정도로 본격적인 세계 제국으로서의 국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직접 지배하고 있는 곳 외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수니파 이슬람권의 큰형님 노릇을 하기도 했다. 몰디브나 인도의 이슬람 제후국들, 소말리아의 무슬림 국가들과 인도네시아 아체의 지원 요청을 받고 원정군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대부분 포르투갈인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인도양의 무역 루트를 둘러싼 이슬람-가톨릭 세력의 갈등으로 보기도 한다. 자세한 건 영문 위키의 일련의 사건 참조.

4.2. 인구[편집]

그러나 그 거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1683년의 2차 빈 공방전 직전 최대 판도를 자랑할 당시의 인구가 대략 3천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고대 로마 제국 동부의 인구가 3400만 명 정도, 동시기 프랑스 인구가 2천만을 넘었다. 프랑스는 농토의 비율이 높아서 비슷한 면적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봐도 인구가 많은 편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사실 13세기 흑사병으로 1/3이 죽었는데도 1100만 명 수준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최전성기인 카를 5세의 제국이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을 사실상 다 장악하고 있었는데도 유럽 내 영토의 인구만 놓고 보면 동시기 프랑스와 간신히 비슷하거나 조금 많았을 정도였고, 러시아조차도 프랑스에 크게 밀렸던 시절이다. 카를 5세가 괜히 프랑스를 경계한 게 아니다.[58] 이 당시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포함한 열강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았다. 러시아는 아직 변변치 못했다.[59] 여담으로 16세기 초반의 영국 인구는 400만에 불과했다.[60]

프랑스와 오스만 간 영토 크기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로마 제국 동부 역시 오스만 제국보다 작다. 반면에 동시대 유럽 전체의 인구가 1억 2천만이 넘어 오스만의 4배나 되었다. 그나마 3천만 명도 오스만 제국이 전성기 때의 인구로, 인구상으로 최정점을 찍은 시기인 1856년에 고작 3500만 명, 코스탄티니예 주변과 중동 일대만 간수한 말기인 1914년에는 2천만도 안 되는 1852만에 불과했다.(참고로 1906년 조사 기준으로 무슬림 인구 비중이 74%에 불과했다. 그리스인이 14.6%, 아르메니아인이 5.5%, 불가리아인 3.7% 등 기독교인 인구도 많았다. 문제는 이 당시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적었던 열강인 이탈리아보다 1천만 이상이나 적었다. 즉, 20세기에 와서는 인구에서 유럽 전체도 아니라, 유럽 열강의 한 국가 보다도 열세였던 것. 오스만이 망하고 들어선 신생 터키 공화국도 인구가 고작 1463만에 불과했다. 참고로 신생 터키 공화국과 한바탕 전쟁을 벌인 당시 그리스 인구가 약 750만 정도로 터키에 거주하는 그리스계가 200만 명 정도이니 그리스 입장에선 해볼 만하다고 느낀 셈이다.)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인구와 농토가 로마 시대에 정점을 찍었으나 지속적인 사막화로 인구부양력이 오히려 감소한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인구가 오늘날까지 유럽보다 적은 것도 이것 때문이다. 인구와 농토가 지속해서 감소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시대에 이르면 풍요롭던 옥토의 상당수가 사람 살기 어려운 땅으로 변해버렸고, 살 만한 땅도 끊임없는 전쟁과 간헐적인 학살로 인구가 상당히 감소했다.[61]

4.3. 군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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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군사 조직은 크게 지방의 군사 봉토를 받아서 그곳에 거주를 하면서 징세권을 행사를 하던 지방 상비군인 시파히와 중앙 상비군인 카프쿨루가 있었다. 카프쿨루의 인원은 주로 데브쉬르메 제도에 따라 제국에 거주를 하는 그리스도인 자제들을 징집을 하는 것으로 충당을 했다. 카프쿨루 군단은 수행 임무에 따라서 7대 단위 부대로 구성이 되었다. 부대의 구성은 아제미, 예니체리, 제베지, 톱추, 토파라바즈, 훔바라즈, 라음즈의 7개 단위로 구성을 했다. 그 중에서 최정예인 예니체리는 화기가 등장을 하던 16세기에 그 중요성이 부각이 되어서 거대한 군사집단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동원력이 뛰어났는데 황제가 친정을 하면 10만 아니면 10만이상의 병력이 동원될 정도였다.

오스만 관료들은 원정이 있기 전 군대에게 필요한 식량의 양을 계산해야 했다. 그리고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식량을 전부 현지에서 구매하거나 현지에 세워둔 창고에서 해결하려 들면 해당 지역의 물가가 심각하게 교란될 수 있었으므로, 관료들은 이전 원정에서 남은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 또 새로 구입해야 하거나 보급해야 하는 식량은 얼마나 되는지 분석해서 필요한 식량의 양을 결정해야 했다. 또 다음해의 원정을 위해 그 해에 모은 식량을 몽땅 써 버릴 수는 없었으니 잉여분도 충분히 잡아야 했다. 오스만 제국은 군대에 필요한 식량을 징발한 게 아니라 구입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관료들은 식량 운송비는 물론 식량 구입비까지 계산해야 했다. 주둔지나 행군경로 인근의 작황이 좋지 않으면 당연히 구입비가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았다가 남은 식량은 비축되기도 했지만 봄이나 추수기에 구입한 가격으로 다시 해당 지역에 되팔았는데, 대개 원정이 겨울에 끝나다보니 식량 가격이 많이 오른 상황에서 정부가 저가로 식량을 판매하는 것은 물가 안정에도 도움이 되었다.

오스만 군은 보급부대와 함께 다수의 상인들을 데리고 다녔다. 1570년대 크레타 원정 시에는 식료품상과 외과의들이 동행했고, 1730년의 동방 원정 시에는 식료품상뿐만 아니라 제화공, 이발사들도 동행했다. 이들은 군대에 필요한 식량이나 무기, 장비들을 공급하면서 자신들의 이익도 챙겨 갔다. '징발'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스만 상인들은 원정이 자신들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항상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 나온 1730년 원정 시 참가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충분히 지켜지지 않았다고 느끼고 불만을 품고, 결국 이 불만이 폭발해 술탄 아흐메드 3세가 퇴위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기도 한다. 중동에서 상인들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해서, 19세기 말~20세기 초에도 이란의 상인들은 영국의 담배전매권을 취소시킨다든지, 헌법을 도입하게 만든다든지 하는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16세기 후반부터 오스만 제국은 화폐가치가 하락하면서 물가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르기 바빴는데, 1586년 오스만과 사파비 페르시아와의 전쟁 시 타브리즈의 수비군들은 자신들의 지급받은 화폐의 가치가 이전의 3/5로 떨어지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이 시기 원정을 다룬 역사가 무스타파 알리에 따르면 당시 카프카즈 지역에서 밀가루 1옥카(okkas=1.28kg)는 66악체, 빵 1옥카는 알툰(altun)금화 두개, 즉 250악체와 맞먹었는데, 여기 주둔하던 병사들의 급료는 하루 5 악체로 고정되어 있었다는 것. 병사들은 당연히 이 지역에서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군대는 통솔을 잘 따르지 않거나 아예 반란에까지 동참하게 되었고, 예니체리들마저 부업에 나서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독립된 공군을 창설, 운영한 나라다. 오스만 제국에 비행기가 들어온건 1909년 11월에 벨기에인 파일럿 바롱 드 카테르(Baron de Catters)가 코스탄티니예에서 시연한 부아생(Voisin)형 비행기로 중량 500kg, 최대 시속 76km로 날 수 있는 모델이었다. 이를 본 술탄 메흐메트 5세가 앞으로 전쟁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청년 튀르크당과 함께 1911년에 공군을 창설했으며 초기에는 17기밖에 안되는 비행기를 가지고 정찰 및 전령 목적으로 운영했지만 1912년에 발발한 발칸 전쟁과 같은 해에 있었던 리비아 전쟁에서 대활약을 하고, 공화국 성립 이후 터키군이 이 부대를 인수받아서 오늘날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또 오스만 제국 공군은 세계 최초의 흑인 파일럿인 아흐메트 알리 첼릭텐(Ahmet Ali Çelikten)을 배출했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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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남동 유럽 전쟁 당시 오스만 공군의 모습

오스만 제국은 인류 역사상, 적어도 유럽 사상 최초로 군악대를 운용한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고대부터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한 용도로 나팔 소리 같은 것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순수하게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목적만으로 음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오스만 제국의 정예군인 예니체리. 예니체리 내에 딸린 군악대를 메흐테르(Mehter)라고 하는데 이는 해당 항목 참조.

5. 행정 구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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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alet 행정 구역, 1609년.
Vilayet 행정 구역, 1904 - 1912년.

오스만 제국의 행정 구역은 크게 1867년 이전과 그 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 해 1월 21일을 기하여 최상위 지방 행정 구역이 에얄레트(Eyalet)에서 빌라예트(Vilayet)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먼저 1867년 이전까지 지방의 최상위 행정 구역이었던 에얄레트는 베일레르베일릭(Beylerbeylik)또는 파샬륵(Paşaıik)라고 했는데, 1365년 무렵에 오스만 제국령 남동유럽을 통째로 '루멜리 에얄레트(Rumeli Eyalet)' 로 묶은 것이 시초로 여겨지고 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남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는 있었지만 아나톨리아 반도와의 사이에 동로마 제국 영토가 놓여 있어 소통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63], 이에 루멜리 전체를 지방 행정 구역으로 묶어 관리하려던 것. 이후 바예지트 1세가 루멜리로 군사 원정을 떠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도 아나돌루 에얄레트(Anadolu Eyalet)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이게 되었고, 1398년에 아나톨리아 동부의 튀르크계 공국이었던 에레트나 공국을 멸하고 그 땅에 룸 에얄레트(Rûm Eyalet)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15, 16세기까지 메흐메트 2세, 셀림 1세, 쉴레이만 1세 등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이면서 에얄레트가 계속해서 설치되게 된다. 각 에얄레트는 베일레르베이(Beylerbey)[64]라 불리는 총독이 관할했으며, 하위단위인 산작(Sancak)으로 나누어졌지만 일부는 시파히들에게 하사하는 영지로 편성되기도 했다. '메흐메트 알리' 문단에 소개된 것처럼, 베일레르베이들은 각자가 담당한 에얄레트 내에서는 군사권, 행정권, 경찰권 등 폭넓은 권한을 보유하며 그 지방 내에서는 황제와 거의 유사한 권한을 행사했다.

각 에얄레트 아래에는, 산작이라 불리는 하위 행정 구역이 있었다. 각 산작은 산작베이(Sancakbey)라 불리는 지방관이 관할했으며, 에얄레트의 하위 단위인데다 그만큼 관할 범위도 좁다는 것을 제외하면 에얄레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다만 처음 생겨난 것은 이쪽이 조금 더 일러서, 2대 군주 오르한 때인 1340년 무렵으로 여겨진다. 또한 각 산작 아래에는 카자(Kaza)라 불리는 최하위 행정 구역이 있었는데, 이쯤 되면 향촌 단위로 카디(kadi)라 불리는 법관이 통치하거나[65] 오스만 제국이 정복하기 이전에 유력한 부족이나 귀족이 통치하고 있던 경우 자치를 인정해주었다. 특히 아나톨리아 동부의 쿠르드족과 남동부의 아랍인들은 동쪽에 위치한 강력한 적인 사파비 왕조에 맞서기 위해 이들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공화국시기 직전까지도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에얄레트와 산작은 지방 행정 단위이기도 했지만, 그 동시에 군대 편제이기도 했다. 먼저 베일레르베이와 산작베이는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각자 맡은 구역에 대한 군사권도 가지고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산작베이는 각자가 맡은 산작이 속한 에얄레트를 다스리는 베일레르베이의 지휘하에 들어가고, 각 베일레르베이는 원정을 총지휘하는 황제 또는 재상의 지휘하에 들어가거나 원정의 규모가 작다면 베일레르베이가 총사령관을 맡는 체제였기 때문. 실제로 산작라는 말 자체가 터키어로 '군기'라는 뜻이다.

1867년 이전까지의 최상위 행정 구역이었던 에얄레트와 그를 대신하게 된 빌라예트의 가장 큰 차이는, 각 에얄레트(또는 빌라예트)의 크기가 대체로 일정한가 그렇지 않은가였다. 그때그때 정복한 땅에 설치되었던 에얄레트는 크기가 완전히 제각각이어서 두어 개의 산작만을 거느린 에얄레트가 있는가 하면[66] 스무 개가 넘는 산작을 거느린 에야레트도 있을 정도였는데[67], 오스만 제국이 잘 나갈 때야 지방 행정 구역을 어떻게 짜든 상관이 없었지만 남동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독립 운동을 일으키고 심심하면 러시아가 쳐들어오고 하는 상황에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방 행정 제도가 필요했던 것. 1878년 당시의 오스만 제국의 빌라예트 체제는 다음과 같다. 자세히 보면 당시의 오스만 행정 구역이 거의 정확하게 이라크(무술, 바으다트, 바스라 빌라예트), 이집트(므스르 헤디브령), 리비아(트라블루스가르프 빌라예트),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보스나 빌라예트)의 전신임을 볼 수 있다.

6. 세금 제도[편집]

밀레트 제도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백성들은 각자의 종교에 따라 서로 다른 세금을 납부했다. 무슬림은 소작민의 경우 지대, 도시민의 경우 도시세, 종교세이자 소득세 역할을 한 제캬트(Zekât)[68], 그리고 병역 혹은 병역을 대신할 세금을 납부했으며 기독교인은 소작민의 경우 지대, 도시민의 경우 도시세, 교회에 납부하는 십일조, 비무슬림에 대한 생명 및 재산 보호세 명목이지만 사실상 소득세의 역할을 한 지즈야(Cizye)를 납부했다. 기본적으로 세금은 각 가정의 노동이 가능한 성인이자 자유인인 남성 인구를 대상으로 부과되었으며, 어린이, 여성, 장애인, 노인, 노예등은 모든 세금에서 면제되었다. 지즈야를 납부하는 비무슬림 인구는 지즈야가 소득세 겸 병역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군대에 징집되지 않았다. 지즈야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세금들은 빈민층, 특히 농노에게는 가혹했지만 부유층에게는 그다지 높은 세금이 아니었다. 세금을 걷는 관료는 각 세금 종류마다 다 다른데, 이를테면 제캬트와 십일조는 각자의 종교시설에 납부하는 세금이고, 지즈야의 경우 지즈예다르(Cizyedar)라고 불리는 지즈야를 책정하고 걷는 세무원에게 납부하고, 지대와 도시세는 봉건 영주 혹은 각 도시의 총독에게 납부하는 세금이다. 이렇게 걷어진 세금은 각각 중앙에 납부하는 할당량을 제외하고는 해당 주체가 자유롭게 유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 중앙에서 할당한 세금보다 많은 양을 거두어 지방, 도시, 모스크, 교회에서 예산으로 활용했다.

당시 조세 저항이 가장 심했던 오늘날의 알바니아 지역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알바니아 산골 마을에 지즈예다르가 찾아왔다. 목적은 당연히 지즈야를 거두려는 것인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총을 가지고 나와 허공에 대고 쏘면서 "우리는 무슬림이다. 지즈야를 낼 수 없다!" 고 뻗대기에 지즈예다르는 소득없이 돌아갔다. 그 후 모병관이 마을을 찾아와서 "당신네들은 무슬림이니 군대를 가거나 병역세를 내라!" 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총을 쏴대면서 "우리는 조상 대대로 기독교인이다. 우리가 왜 군대를 가야 하냐?" 라며 모병관을 쫓아버렸다. 그러자 그 다음 달에는 지즈예다르가 다시 찾아왔고, 또 총을 쏴대면서 "우리는 무슬림이다!" 라며 쫓아내어 마을 사람들은 사실상 면세를 누렸다는 일화인데, 오스만 제국의 복잡한 세금 제도와 부실한 지방 장악력이 드러나는 일화. 실제로 오스만 제국의 지방 통치는 주요 거점 만을 장악한 형태로, 촌락, 부족, 지주들의 영지는 각 촌장, 부족, 지주 등 유력자에 의한 자치가 이루어졌으며, 이들의 고유 권한은 중앙 정부나 지방 총독도 간섭할 수 없었다.

7. 종교 국가?[편집]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초창기에는 튀르크 부족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로마와의 성전"을 명분으로 세력을 끌어모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시기 까지 가지(Gazi)로 대표되는 종교 이데올로기는 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영토 확장으로 대규모의 비무슬림 피정복민들을 끌어안는 상황이 되자 이는 수정이 불가피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급속도로 팽창한 15세기 초부터 발칸 지역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 19세기 말까지 대략 4세기 동안 제국 내에는 무슬림보다 비무슬림 인구가 더 많았다.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멸망 당시 까지도 제국의 백성들을 '그들이 믿는 종교'에 따라 공동체(Millet, 밀레트)를 형성하게 하여 각자의 종교법에 따라 통치하고, 형법(Kanun) 만큼은 모든 밀레트가 공통적으로 지키게 했다.

그리고 가지의 의미가 이슬람 전사라 하더라도 딱히 십자군 전쟁 같이 종교적인 이유에서 전쟁을 한 것도 아니다. 상술 된 오스만 건국에 대한 일화가 보여주듯 기독교계라도 이해 관계가 일치한다면 얼마든지 동맹이나 파트너가 될 수 있었고, 초기 오스만 공국 입장에선 동로마가 워낙 가깝고 군침흘릴만한 문화 유산이 많았긴 했어도, 인근의 아이딘 공국 같은 다른 무슬림 아나톨리아 튀르크 공국들도 실컷 털어먹었다. 14-15세기아나톨리아 문맥에서 '가지'의 종교성은 사실 저렇게 노략질로 벌은 돈으로 수피 순례자들 모시고, 이마렛이라 하는 모스크와 그 옆에 딸려 있는여행자용 편의 시설을 건설 하는 등 비전투적인 면에서 더 자주 나타난다. 

때문에 민족주의 열풍으로 제국이 조각나기 시작하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종교 문화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이질적이었다. 각자의 종교법에서 금지하는 것[69]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혹은 서로 다른 밀레트 간의 민사 갈등을 해결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의 밀레트에 속하지 않은 판관에게 가서 재판을 요구하는 일도 매우 흔했다. 

마크 마조워의 <발칸의 역사>가 당시의 풍토를 잘 묘사하고 있는데, 자신을 소를 떼먹고 돌려주지 않는 아들에게 샤리아법대로 돌려받기를 원하는 정교회 신자 아버지나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척)하고 남편을 '불신자'로 보아 혼인 무효를 이끌어내는 크로아티아인 가톨릭 여성,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튀르크인 선원, 마을에 알 수 없는 재난이 자꾸만 발생하자 정교회 성직자, 가톨릭 성직자, 유대인 랍비, 이슬람 이맘을 불러 구마 의식을 하다가 도저히 해결 안되자 튀르크인 마법사를 불러 푸닥거리를 하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불가리아의 한 시골 마을 같은 이야기를 보면 당시의 사회가 오늘날 이슬람의 관점에서 봤을 때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심지어 무슬림은 튀르크인들 조차도 포로로 잡힌 영국 선원들에게 '이슬람을 믿을 것을 권하다가' 이들이 한사코 개종을 거부하자, 선실 하나를 내주어 교회로 개조하게 하여 '그럼 기독교라도 열심히 믿어야지!' 하며 예배를 독려하는 튀르크인 선장 이야기라든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자 '왜 성모님께 기도하지 않소?' 라고 개신교인 선원에게 힐난하는 무슬림 선원 등의 일화가 줄줄이 나열된다. 

황제들 또한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보호하는데 헌신적이었는데, 성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바꾼 장본인인 메흐메트 2세 조차도 전란으로 허물어진 로마 제국 시절의 정교회 성당 복구에 금전 지원을 했고 보스니아를 정복한 뒤에는 '제국 신민들 중 그 누구도 기독교도들이나 기독교회에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라는 내용의 포고령을 내리기도 했으며[70], 셀림 1세 아토스 산에 막대한 지원을 하여 수도원들을 수리하게 하는 동시에 "그간 전쟁, 천재지변으로 무너지거나 손상된 정교회 성당, 수도원을 수리할 것이며 이들을 절대로 파손해서는 안 된다." 칙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후의 황제들도 정교회나 가톨릭, 유대교에 대한 지원을 간간히 한 기록이 발견되며, 성 니콜라오의 교구였던 미라의 성당 또한 러시아 차르와 함께 오스만 황제의 지원을 통해 복원이 이루어졌다.[71] 

일각에선 바티칸에 비교하면 피상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좌를 보고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그 동기로 지목하는 모양이다. 물론 동로마 제국이 망한 이후 아예 국가적 차원에서 정교회를 대표하는 정치적 교권은 아예 상실했지만, 딱 이 이상으론 본 적이 없는 수박 겉핥기 수준의 피상적인 평가다. 정복 후 총대주교좌 또한 처음에는 하기아 소피아 다음으로 격이 높았던 성 사도 성당을 쓰게 해주었다. 성 사도 성당은 몇 년 뒤 다시 뺏기고 아예 해체, 현재 그 자리에 있는 정복자의 모스크로 바뀌었지만 이건 황실의 종교적 편협성과 심술보의 산물이 아니라 건물 자체의 노후화 문제로 생긴 문제로, 옮긴 옆의 파마카리스토 성당 또한 상당히 권위 있는 건축물이었다. 파마카리스토 성당 또한 16세기 후반 오스만 황실이 뺏어 모스크로 개조했지만, 이때 새로 받아 아직까지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성당인 성 제오르지오 성당(아야 요르기)도 상당히 유서깊었던 건물이었다. 교회의 사이즈는 모스크보다 작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크기 자체는 작으나 적어도 지금 현대 모습으로 18세기 재건축 할 때는 황실에서 당대 최신식 유럽의 건축가, 건축 기술 다 끌어오며 공들여 지은 것이며, 자세히 조목조목 살펴보면 당장 외부부터 대리석 떡칠에 속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호화롭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현대 이스탄불에서 백년 전엔 이 도시의 반이 그리스어를 쓰며 정교회를 믿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로마인이라 불렸던 현지 그리스계 공동체가 사라진 건 오스만 제국이 망한 이후 공화정 시절 각종 재산권 분쟁을 빌미로한 실질적인 민족 탄압 정책 이후 생겨난, 가슴아프게도 상당히 근대의 사건들이다. 

8. 튀르크족의 국가?[편집]

오스만 제국의 기원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단 투르크족이 세운 나라인 건 맞다. 하지만 요즘 터키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사학자들이나 극우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오스만 제국을 튀르크 민족국가라고 보기엔 여러가지 무리가 따른다. 일단 황제의 모후들 부터가 휘렘 술탄이나 쾨셈 술탄, 나크시딜 술탄등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그리스인, 슬라브인, 캅카스인(조지아인, 체르케스인 등), 알바니아인들이 대다수였던지라 제국의 황가는 비(非)튀르크계 혈통이 상당히 많이 섞였기 때문에 오스만 1세 오르한 정도라면 모를까 후대로 가면 갈수록 '튀르크인' 이라고 하기 어려워지며[72], 제국이 팽창하고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는 민족이고 출신이고 안 가리고 오직 능력에 따라 등용하고 활용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고향에서 헐벗은 소작농 출신의 아이도 능력만 인정받으면 이스탄불의 최고급 교육기관에서 수학하고 황제의 근위병이 되거나, 건축, 군사, 교육 분야의 능력자가 되거나, 심지어 고향에 총독으로 부임할 기회나 황제 다음으로 높은 자리인 재상까지 오를 기회도 열려있었다. 당장 오스만 제국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들만 하더라도 순수한 튀르크 혹은 이슬람 배경을 가진 인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제국의 역대 재상들은 대부분 발칸 반도 캅카스 출신들이었다. 

제국의 영토였던 동유럽 출신 인사들을 고관으로 기용된것만큼 잘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제국 외부의 기독교 세계인 서유럽 출신 인물들이 관직에서 활약한 사례도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발견할 수 있다. 해적 출신들도 있었지만 당대 유럽의 상위 계층들이 다른 나라로 이주, 초빙되어 활동했던것 처럼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 개종 후 기용된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18세기 오스만군의 군제 개혁을 이끈 프랑스 출신 훔바라즈 아흐메트 파샤[73], 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활약한 독일 출신 메흐메트 알리 파샤[74], 폴란드 출신 무스타파 젤라레딘 파샤[75] 등이 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 지도자인 도제의 서자로 쉴레이만 1세 시절 오스만에서 베이오울루라는 이름으로 오스만의 동유럽 원정에 협력한 알비제 그리티(Alvise Gritti)의 사례도 있다.

1908년 오스만 제국 의회 의원들의 출신 민족을 나타내는 지도
동유럽, 북아프리카 영토가 독립, 혹은 서구 열강에 떨어지고 있던 제국 말엽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의회 의석들을 보면 142명의 튀르크인 의원들 외에도 아랍인 의원 60명, 알바니아인 의원 25명, 그리스인 의원 23명, 아르메니아인 의원 12명, 유대인 의원 5명, 불가리아인 의원 4명, 세르비아인 의원 3명, 블라흐인[76] 의원 1명등 절반 가량의 의석이 비튀르크인들이 점유하고 있는걸 볼 수 있다.

심지어 민족주의의 시대에 접어들어 그리스를 비롯한 피지배국들이 독립하던 시절에도 압뒬하미트 2세는 민족주의가 아닌 범이슬람주의를 내세우며 제국의 공용어를 아랍어로 정하고, 제국 내에 튀르크인보다 수가 많은 아랍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기까지 했다. 아타튀르크 항목을 보면 당시에 대한 아타튀르크의 기억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이러한 배경이 청년튀르크당의 혁명을 초래하기도 했다. 분명한 건 오스만 제국은 현재의 민족주의적 핀트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다민족, 다문화적 배경을 가진 제국이었다는 점이다. 

여담이지만 현재의 "터키 공화국 영토 내에서 거주하고 터키어를 사용하며, 터키 문화속에서 자랐으며 스스로를 터키인으로 인식하는 자는 모두 터키인이다." 라는 케말리즘적 튀르크 민족주의의 정의를 최초로 내린 사람인 오스만 제국의 사회학자인 지야 괵알프(Ziya Gökalp)는 자자족출신이며, 현대 터키 공화국의 국가인 독립행진곡(İstiklâl Marşı)을 작곡한 메흐메트 아킵 에르소이(Mehmet Âkif Ersoy)는 알바니아계 출신이다. 아타튀르크 본인도 그리스의 테살로니카 출신에다 금발벽안의 백인의 외모를 하고 있으며, 그의 동료이자 공화국 2대 대통령으로 제임하는 이스메트 이뇌뉘는 쿠르드인이며 3대 대통령인 젤랄 바야르는 불가리아계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오스만 제국을 튀르크인의 민족국가로 정의하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9. 평가[편집]

메소포타미아[77] 레반트[78] 모두를 400여년 가까이 지배하여 역사상 최장 기간 지배한 기록을 세웠다. 그 뒤로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약 200여년 간 지배하였다. 로마 제국(동로마 포함)은 이집트와 레반트는 오래 지배했지만[79] 북부 일부를 제외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에 잠시 차지했던 것 외에는 지배한 적이 없다. 그곳 자체가 파르티아-사산의 중심부였기 때문에, 거리도 서로 멀고 국력도 강해서 완전 병탄을 할 수 없는 로마 입장에서는 잠시 찔러볼 수는 있을지언정 영유할 수는 없었다. 최전성기의 로마 제국부터 19세기의 슈퍼 파워 영국, 20~21세기 슈퍼 파워 미국조차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장기간, 그것도 완벽히 지배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기록이다. 그리고 미마르 시난의 작품들로 대표되는 오스만 제국 특유의 비잔티움 건축 양식을 계승한 돔형 지붕의 거대 모스크들은 북쪽으로는 헝가리로 부터 시작하여 유럽에서는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그리스,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에 걸쳐 남쪽으로는 이집트, 튀니지, 수단 해안 지대, 예멘까지 엄청나게 넒은 지역에 오랜 시간 동안 수난을 당하면서도 꿋꿋히 남아 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세계사적 위세와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오스만 제국 국력의 원천지이자 정치적, 경제적 핵심지였던 지방은 흔히 생각하는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반도 내륙 등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해안 도시들과 '로마인들의 땅'이란 뜻인 루멜리아라고 불렸던 남동유럽의 현대 그리스,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지방 일대였는데, 정작 이곳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문화재가 많이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이 동네가 19세기 이후 각각 민족 국가로 독립하면서 소위 과거사 청산을 위해 많은 수의 오스만 모스크들과 목욕탕, 정부 건물 등 사적들이 기독교 교회로 강제 개조하거나, 심한 경우아예 국가 차원에서 무신론을 밀었던 공산 정권 시절 방기, 혹은 파괴당했다. 물론 독립 투쟁의 열풍이 지나간 이후 이 또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사적이라는 점을 뒤늦게 깨닫고 보존, 유지한 경우도 많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자체가 상당히 더디게 진행 되다가 발칸 전쟁과 1차세계대전이란 거대한 참화를 맞고 중단 된 과정이다 보니 이 와중 역사적으로 제국 두번째 도시였던 테살로니키가 1917년에, 세번째 도시였던 스미르나가 1922년에 대방화 사건을 겪고 [80] 구시가지가 싸그리 불타는 등 20세기의 영 안좋은 참혹한 편지풍파를 살아남지 못한 경우가 많다. 당장 16~17세기에 걸쳐 변방 도시로서 굉장히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자 무역로에도 위치해 있어 오스만 제국이알토란 같이 잘 개발해 놓아 16세기 말에는 인구가 10만명이 넘는 대도시였던 베오그라드만 하더라도 현대에는 한때 존재했던 273개의 모스크 중 남아 있는게 하나밖에 없다#. 이에 덧붙여 추가로 설명하자면 학계 내부에서라도 민족주의적 앙금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어디까지나 최근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오스만의 과거 유럽 속주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자국 통치 시기를 무조건적인 암흑의 시대로만 규정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오스만의 유산에 대해 호의적인 터키 쪽에서도 핀트가 심하게 어긋난 근대 민족 국가적 관점이나, 이슬람주의적 관점에서 오스만 제국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하여 현대적 의미의 동-서양 구분을 뛰어넘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적 정체성이 왜곡당한 면이 더욱 심했다.

오스만 제국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했던 16~17세기 시절에도 오스만 제국의 핵심 알토란 땅은 우리가 생각하는 '중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남동유럽, 아나톨리아가 핵심이었고 그밖의 영토 중에서는 기껏해야 시리아의 알레포, 다마스쿠스 정도가 쓸만한 땅이었다.[81] 다마스쿠스는 초기 칼리파 시절 부터 근 9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시리아 지방 행정 수도였고, 알레포는 십자군 전쟁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제노바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을 통한 대서방 교역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이 지방은 오스만 제국의 핵심이었던 서부 아나톨리아와 그리스 일대에서는 그나마 짦은 시일 내에 군대와 관료를 파견할 수 있는 거리다. 이집트는 복속 이후로도 토착 맘루크 세력의 견제 때문에 제국 중앙의 권력이 잘 안 닿았으며, 아라비아 반도는 이슬람의 두 성지(메카 메디나)가 있다는 종교적 의미를 빼면 쓸모 없는 사막이 대부분인 불모지였고, 튀니지, 알제리 등의 북아프리카 일대는 사막이 많은 불모지에다 제국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여 실질적으로는 제국의 직할지가 아니라 현지 사략 해적 군벌들의 영지에 가까웠고, 현대 이라크지방 또한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와의 접경 지대로서 안정적으로 개발하기 힘든 땅이었다. 험준한 산맥 지형으로 인해 예나 지금이나 인구가 밀집되어 있지 않고, 현지 토착 민족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중앙의 통제가 힘든 동부 아나톨리아 캅카스 산맥이야 말 할것도 없다.

이 와중에 오스만 제국이 직접적으로 운영하며 정치, 군사 엘리트들이 대거 배출되었고, 인구 또한 가장 많았던 비옥하고 중요한 알토란 땅들은 당연히 이스탄불를 필두로, 셀라니크, 위스퀴프, 얀야, 이즈미르, 에디르네, 트라브존, 마나스티르, 필리베, 사라이보스나, 이슈코드라, 퓌르졘, 베오그라드, 테메슈바르 등의 현대 아나톨리아 해안가, 그리스, 남동유럽에 걸쳐져 있던 땅들인데, 이들은 로마 제국 동부의 요충지로 시작하여 동로마 제국을 통해 헬레니즘에 중점을 둔 동일한 문명권을 형성하던 지역들이다. 남동부 유럽이 터키 동부보다 백년 일찍 오스만에게 정복된 사실도 있다. 오스만이 남동부 유럽의 패자가 된 것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2차 불가리아 제국이 무너진 14세기 후반인데, 오늘날의 터키 중부 및 동부까지 오스만에 복속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중반인 메흐메트 2세 치세다. 오늘날 터키가 완전히 정복된 것은 셀림 1세 때.

오스만 제국의 술탄 파디샤들은 이러한 지정학적, 문명적 연속성을 근거로 러시아 제국보다 백년 먼저, 그것도 상당한 세월 동안 더욱 설득력이 있게 로마의 카이사르 (Kayser-i Rum)를 자처했던 것이다. 애초에 이 지방 사람들이 보아왔으며 익숙했던 로마 제국의 일면은 게르만 족의 침공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300년 이상 제국의 단절을 겪었던 현대 서유럽 지역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통해 끊임 없이 계속 이어져 왔던 그리스-오리엔트 쪽 측면이기도 했다.

아무튼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술탄제에 이어 칼리프제도 폐지하고 오스만 가문 구성원들을 모조리 국외 추방하면서 평가가 매우 부정적이었으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집권 하에서는 어느 정도 재평가하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이쪽은 또 상술했다시피 오스만 제국은 종교성이 그렇게 강하지도 않았고, 국가의 핵심 이데올로기 몇가지 중 하나에 불과 했으며, 무엇보다 튀르크인, 무슬림만의 것이 아닌 보편 제국[82]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슬림 터키인들만의 전유물이었던양 포장하려고 들어 이건 또 나름대로 문제가 심각하다. 현대 터키에서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오스만 제국을 조상들의 역사로 기리며 인정하고, 자부심을 담아 묘사하려고 한다면 그때 그때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추어 어설픈 선전 영화나 찍어내고 리인액터들이나 부를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성공 비결이었던 유연한 사고 방식과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10. 국가(國歌)[편집]

오스만 제국의 국가는 본격적으로 서구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마흐무트 2세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오스만 제국/국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역대 군주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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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 칼리파
정통 칼리파 ~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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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아바스 왕조 ~ 오스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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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로 불리는 것은,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로마 황제'를 자칭. 이것이 오스만 제국 군주의 공식 명칭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탄'이라는 명칭도 관습상 계속해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러시아의 차르와 비슷한 경우.

※ 참고로 여기 나온 황제 이름들은 터키식 발음이다. 아랍식 발음은 좀 다르다. 예를 들어 메흐메트: 무함마드, 압뒬하미트: 압둘하미드,[83] 쉴레이만: 술라이만 같은 식. 또한 현대 터키어에서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인명들 중에 끝이 'd'로 끝나는 것을 't'로 발음하고 표기한다. 이를테면 메흐메트(Mehmet), 무라트(Murat) 같은 이름들을 터키 공화국 이전에는 아랍 문자의 'd' 음가로 표기하여 메흐메드(Mehmed), 무라드(Murad)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터키어 발음에서 유성음이 끝에 위치하면 무성음화되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발음상으로는 끝에 d가 오든 t가 오든 둘다 무성음 t발음으로 나므로 의미가 없다. 또한 오늘날에도 오스만 제국을 지지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옛날식 표기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터키에서는 이 d와 t의 차이가 굉장히 중요하다.
대수
이름
즉위년일
퇴위년일
비고
00
에르투으룰 가지(Ertuğrul Gazi)[84]
1230
1281
01
오스만 1세(Gazi Birinci Osman)
(1281)1299
1324
02
오르한(Orhan Gazi)
1324?
1360
03
무라트 1세 휘다벤디갸르(Birinci Murat Hüdavendigâr)
1360
1389.6.15
04
바예지트 1세 '뇌제'(Yıldırım Sultan Bayezit)
1389.6.15
1402.7.20
혼란기 (1402~1413)[85]
05
메흐메트 1세(Birinci Mehmet)
1413.7.5
1421.5.26
06
무라트 2세(İkinci Murat)[86]
1421.6.25
1444
07
메흐메트 2세 '정복제'(Fatih Sultan Mehmet)[87]
1444
1446
-
무라트 2세(İkinci Murat)[88]
1446
1451.2.3
-
메흐메트 2세 '정복제'(Fatih sultan İkinci Mehmet)[89]
1451.2.3
1481.5.3
08
바예지트 2세 '정의제'(Veli İkinci Bayezit)
1481.5.19
1512.4.25
09
셀림 1세 '엄격제[90]'(Yavuz Sultan Selim Han)
1512.4.25
1520.9.21
칼리프 지위 획득
10
쉴레이만 1세 '대제', '입법제'(Kanuni Sultan Süleyman)
1520.9.22
1566.9.5
최장 즉위(45년 359일)
11
셀림 2세(İkinci Selim)
1566.9.29
1574.12.21
12
무라트 3세(Üçüncü Murat)
1574.12.22
1595.1.16
13
메흐메트 3세(Üçüncü Mehmet)
1596.1.27
1603.12.20
14
아흐메트 1세(Birinci Ahmet)
1603.12.21
1617.11.22
15
무스타파 1세(Birinci Mustafa)[91]
1617.11.22
1618.2.26
16
오스만 2세(İkinci Osman)
1618.2.26
1622.5.19
-
무스타파 1세(Birinci Mustafa)[92]
1622.5.20
1623.9.10
17
무라트 4세(Dördüncü Murat)
1623.9.10
1640.2.8
18
이브라힘(İbrahim)
1640.2.9
1648.8.8
19
메흐메트 4세(Dördüncü Mehmet)
1648.8.8
1687.11.8
중흥기·쇠퇴기
20
쉴레이만 2세(İkinci Süleyman)
1687.11.8
1691.6.22
21
아흐메트 2세(İkinci Ahmet)
1691.6.22
1695.2.6
22
무스타파 2세(İkinci Mustafa)
1695.2.6
1703.8.22
23
아흐메트 3세(Üçüncü Ahmet)
1703.8.22
1730.10.1
24
마흐무트 1세(Birinci Mahmut)
1730.10.2
1754.12.13
25
오스만 3세(Üçüncü Osman)
1754.12.13
1757.10.29
26
무스타파 3세(Üçüncü Mustafa)
1757.10.30
1774.1.21
다시 쇠퇴기
27
압뒬하미트 1세(Birinci Abdülhamit)
1774.1.21
1789.4.6
28
셀림 3세(Üçüncü Selim)
1789.4.7
1807.5.29
29
무스타파 4세(Dördüncü Mustafa)
1807.5.29
1808.7.28
30
마흐무트 2세(İkinci Mahmut Han)
1808.7.28
1839.7.1
31
압뒬메지트 1세(Birinci Abdülmecit Han)
1839.7.1
1861.6.25
32
압뒬아지즈(Abdülaziz Han)
1861.6.25
1876.5.30
33
무라트 5세(Beşinci Murat Han)
1876.5.30
1876.8.31
최단 즉위(93일)
34
압뒬하미트 2세(İkinci Abdülhamit Han)
1876.8.31
1909.4.27
35
메흐메트 5세 레샤트(Beşinci Mehmet Reşat Han)
1909.4.27
1918.7.3
36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Altıncı Mehmet Vahidettin Han)
1918.7.3
1922.11.1
최후의 술탄
37
압뒬메지트 2세(Halife İkinci Abdülmecit)
1922.11.19
1924.3.3
최후의 칼리파
폐위 이후 오스만 가의 수장[93]
-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Altıncı Mehmet Vahidettin Han)
1922.11.1(1922.11.19)
1926.5.16
-
압뒬메지트 2세(Halife İkinci Abdülmecit)
1924.3.3(1926.5.16)
1944.8.23
38
아흐메트 니하트(Ahmet Nihat Osmanoğlu)
1944.8.23
1954.6.4
39
오스만 푸아트(Osman Fuat Osmanoğlu)
1954.6.4
1973.5.19
40
메흐메트 압뒬아지즈(Mehmet Abdülaziz Osmanoğlu)
1973.5.19
1977.1.19
41
알리 바스프(Ali Vâsıp Osmanoğlu)
1977.1.19
1983.12.9
42
메흐메트 오르한(Mehmet Orhan Osmanoğlu)
1983.12.9
1994.3.12
43
에르투으룰 오스만(Ertuğrul Osman Osmanoğlu)
1994.3.12
2009.9.23
44
오스만 바예지트(Osman Bayezit Osmanoğlu)
2009.9.23
2017.1.7
45
뒨다르 알리 오스만(Dündar Ali Osman Osmanoğlu)
2017.1.7

12. 대중매체에서의 오스만 제국[편집]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이슬람의 검 DLC가 있다면 1299년~1337년[97] 사이에 플레이할 수 있다. 에르투으룰로 플레이하려면 1270년대~1280년대부터 가능하며 독립 세력으로서의 오스만은 1299년부터다. 1편에서도 오스만이 있지만 1편은 기독교 국가만 플레이할 수 있어서 오스만으로 할 순 없다.

12.1. 창작물에서 모티브를 딴 것들[편집]

13. 역사 틀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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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황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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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와 몰도바의 역사 (Istoria României şi Moldov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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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터키어로는 Osmanlı İmparatorluğu(오스만 제국)이라고 해서 오스만 제국 시절의 국호와는 상당히 다르다. 오스만 시대의 오스만 터키어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반면, 현대 터키어는 아랍어, 페르시아어 어휘와 문법을 최대한 없애고 고대 튀르크어식 어휘 문법과 서구식 어휘로 대체하는 인위적인 언어 '정화' 작업을 거쳤기 때문이다.[2] 참고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등의 게임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 오늘날의 터키 국기 등의 이유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국기라고 하면 무조건 붉은 바탕에 흰색 초승달+별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와 유사한 디자인의 깃발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오스만 제국 후기에 해당하는 1793년이다(게다가 초승달이 세로로 길쭉하고, 별의 모양도 다르다). 그 이전까지는 큰 초승달을 쓰지 않거나 붉은색 바탕에 노란 초승달을 사용하거나 하는 등 다양한 디자인을 사용했는데,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링크 참고.[3] 1882년에 황제 압뒬하미트 2세가 채택.[4] 근대의 오스만제국의 국장이 들어가 있는 회중시계 파일:976171339_tp.jpg파일:976171347_tp.jpg[5] 오스만 제국의 팽창 과정. 다만 진한 빨간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무라트 2세 때 확장된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 이전에 정복된 지역과 무라트 때 정복된 지역이 함께 칠해져 있다. 앙카라 전투 이후 일시적으로 주춤했던 제국이 완전히 복구된 것이 그의 시대라 한꺼번에 표시한 듯.[6] Devlet-i Ebed Müddet[7]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반도와 남동유럽 사이에 동로마 제국이 끼어 있는 형국이었기에 소통이 어려워 유럽(루멜리 에얄레트)에 하나, 아시아(아나돌루 에얄레트)에 하나, 총 두 곳의 수도를 필요로 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며 그 곳을 수도로 삼으면서 두 곳의 수도는 하나로 통합되었다. 또한 에디르네가 정확히 몇 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되었으며 언제 수도가 되었는지는 사료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무라트 1세 대에 수도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8] '황제(파디샤)' 대신 '술탄'을 칭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스만 튀르크. 즉 제국 성립 이전의 술탄들은 재상 이하 여러 귀족 관료들의 눈치를 어느 정도 살펴야 했기에 '전제군주'로서 군림하지는 못했다. 이 귀족 관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데브시르메 출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전제 군주정을 확립한 인물이 메흐메트 2세.[9] 1876~1878, 1908~1920년 간[10] 1299~1383년. 베이(bey)는 본래 지방 태수라는 뜻으로, 오스만 제국이 룸 술탄국에서 떨어져 나온 나라임을 잘 보여주는 용어라고 할 만하다. 대략 왕 정도에 해당하는 술탄보다는 지위가 낮아서, 의역해서 생각하자면 '공작(公爵)' 정도라고 할 수도 있겠다.[11] 황제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인 파디샤(Padişah), '술탄 중의 술탄'을 뜻하는 '술탄 에스 셀라틴(Sultan es-Selatin)', '로마 황제'라는 뜻의 '카이세리 룸(Kayser-i Rûm)' 등이 쓰였다. 이 밖에도 몽골어인 을 쓰기도 하고 셀림 1세  칼리프를 칭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제국 말기에는 칼리프를 칭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여전히 술탄이라 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동안 술탄이라 했던 것이 관습화된 것으로 러시아의 군주가 차르에서 황제를 칭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줄곧 차르라 했던 것과 비슷한 예.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서구권(과 그 영향을 받은 한국)에선 오스만 황제들을 '술탄'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일반화되어 있다. 반면 터키에서는 오스만 황제들을 '파디샤'라고 부른다.[12] 터키어를 쓰지 않는 지방에 칙령을 내리거나 공문서를 작성할 때는 현지의 언어도 함께 썼다. 종교인들은 아랍어, 학자와 문필가들은 페르시아어를 쓰기도 했으며, 오스만 터키어는 이 두 언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3] 다만 당대에는 무슬림이냐, 정교회 기독교인이냐, 유대인이냐, 아르메니아 정교회인이냐 등등을 따졌으며 언어와 민족에 상관 없이 구분되었다. 심지어 그리스인이나 터키인 항목을 가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지만 현대의 관점에서는 같은 민족으로 여겨지는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이나 폰토스 그리스인이나 북부 그리스의 그리스인이나 남부 그리스인이나 서로 동족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위에 언급한 민족들은 19세기가 되어서야 구분되기 시작해서 20세기에야 완성되는 개념이다.[14] 다수파는 아니지만 중동의 오리엔트 정교회 신자도 있었고 중앙 유럽 일부까지 정복한 관계로 가톨릭이나 개신교도 있었다. 짐미, 즉 비(非)무슬림들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를 막지 말라는 포고를 내린 적도 있었다.[15] 맘루크 왕조의 멸망,명목상으로나마 카이로에서 명맥을 잇던 아바스 왕조의 멸망[16] 우크라이나 중남부[17] 오스만 제국 후기 리라화 개혁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이슬람 세계와 마찬가지로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17세기 쿠루쉬화를 발행하기 이전까지 3악체=1파라 였으며, 쿠루쉬화 등장 이후 40파라=1쿠루쉬였다. 다만 은화로는 고액 결제나 유럽과의 무역에서 불편함이 있었으므로 은본위제를 채택하되 고액권으로 금화를 발행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금본위제 개혁으로 발행된 터키 리라화(100쿠루쉬=금화 1리라)이전에는 시기마다 다르지만 이스탄불 제리 마흐붑(Zer-i Mahbûb=6.5쿠루쉬), 이집트 제리 마흐붑(Zer-i Mahbûb-î Mısıriye=5.5쿠루쉬), 제디드 마흐무디예(Cedid Mahmudiye=25쿠루쉬), 하이리예(Hayriye=12쿠루쉬), 메지디예(Mecidiye=20쿠루쉬), 루미(Rumî=48쿠루쉬), 아딜리 알튼(Adlî Altın=660파라) 등의 금화들이 발행되었으며 플로린, 리브르, 파운드스털링 등 해외금화도 유통되었다. 한편 이 금화들은 시장가치에 따라 가치가 변동되었기 때문에 시대마다 그 가치가 조금씩 다르다.[18] 이전 항목에는 1540년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1456년에 사실상 합병했다. 이후 세르비아 공작의 핏줄은 동맹국이었던 헝가리로 건너가 명목상 세르비아 공작에 임명되었으나, 1521년에 이르면 그마저도 단절되었다[19] 룸 술탄국의 멸망으로 아나톨리아에는 온갖 소국들이 난립하였다.[20] 사실 여기에는 로마노스 4세에 반대하여 5만 명의 대군 중 2만 명을 수도로 돌려버린 막강한 수도 관료 귀족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공이 지대했다... 이후 로마노스 4세가 어찌어찌해서 풀려나오기는 했는데 황제를 갈아치우다가 사망한다.[21] 당시 룸 술탄국의 종주국이던 일칸국의 지배자들이 최후의 술탄이 죽은 뒤에 후임 술탄을 임명하지 않아서 그냥 사라져버렸다. 비록 술탄이 주도하지는 않더라도 몽골에 맞선 반란에 참여는 하거나 그의 이름을 빌려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하는 일이 잦자, 차라리 총독을 보내자는 쪽으로 이야기된 것.[22] 때문에 쉴레이만 샤의 무덤은 시리아에 있다. 1970년대까지 이 무덤만큼은 터키의 월경지로 남아있다가 현재는 시리아로 귀속된 상태이며, ISIS가 파괴하려고 노리고 있는 상황. 결국, 터키가 군사를 보내 무덤을 터키로 이장해 왔다.(기사)[23] 다만 에르투으룰 대에 봉지를 쇠위트로 이전당했고, 그후 1290년에 상인 길드가 지배하는 독립국이 되었다가 1304년 부터 일 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에 따라 오스만의 첫번째 수도는 오늘날 부르사 근처의 쇠위트(Söğüt)로 정해졌으며, 오스만이 다시 앙카라를 차지한 것은 2대 군주 오르한 때인 1356년.[24] 동로마 제국은 팔레올로고스 황가의 황제들이 무능했거나 폭군이었다기보다, 일이 제대로 꼬였다는 느낌이 강하다. 우선 4차 십자군에 의해 함락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은 팔레올로고스 황가의 초대 황제 미하일 8세는 수도를 복구하고 제국의 국방을 위해 국민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고, 그 뒤를 이은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는 국방력을 희생하더라도 세금을 감면해 주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스만 베이국을 비롯한 여러 튀르크계 소국들이 아나톨리아 반도를 마구 집어먹기 시작했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는 남동유럽에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보나 인구로 보나 중심지는 바로 아나톨리아 반도였다. 결국, 이후 동로마 제국은 만성적인 재정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뭘 하고 싶어도 병사와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25] 사실 그 이후인 안드로니코스 3세 때조차 튀르크의 침공으로 아시아 영토를 잃을지언정 그럭저럭 싸우기도 했고, 그리스 쪽 영토를 수복하기도 했으나 그의 죽음 이후 어린 나이의 요안니스 5세가 즉위하자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가진 섭정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를 불신하던 황후, 대주교, 그리고 그 수하였다가 배신한 알렉시우스 아포카우코스가 칸타쿠제노스가 아카이아 공국의 항복을 받으러 수도를 비우자 그를 반역자로 선포, 내전에 돌입한다. 세르비아와 교황과 튀르크 용병(이때 오스만의 술탄 오르한도 칸타쿠제노스 편에 참여했다)들이 모두 참여한 오랜 내전으로 제국은 개판이 되었고 그 와중에 대지진이 갈리폴리 반도를 강타해 튀르크가 그를 통해 유럽으로 밀려들어 온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그리스를 집어삼키고 유일하게 발칸 반도에서 튀르크를 막아낼 능력을 지닌 세르비아 제국 스테판 두샨은 제국을 안정시키기 전에 급사하는 바람에 결국 둘 다 망한다.[26] 세르비아의 입장에선 비록 코소보 전투에서 패했으나 전투의 무대가 된 코소보는 오스만에 맞서 싸운 성지로 여겨졌는데, 코소보가 오스만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알바니아계 민족이 하나둘 뿌리를 박아 알바니아인들의 땅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수백년 후인 1998년 벌어진 코소보 전쟁의 단초가 된다.[27] 역대 재상 가운데 처형된 건 그가 첫 번째.[28] 간단히 이야기해서 이슬람 세계의 십자군이라고 보면 된다.[29] 당시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보이보드)이었던 인물은 바로 블라드 가시공이다. 메흐메트 2세가 제국에 항거하던 블라드 가시공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순종적인 가시공의 친동생인 라두를 공작에 임명했던 것[30] 1570년부터는 트란실바니아 공국.[31] 헝가리 서부만 떼어주고 중부와 동부는 오스만이 먹은 데다, 서부를 떼어주는 대가로 연공을 요구했다. 물론 합스부르크 측은 말로만 보내주겠다고 했지 제대로 보내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스만은 이를 구실로 합스부르크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32]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오스만 제국 멸망 8년 뒤인 1930년에 무스타파 케말의 명으로 우편법 개혁이 단행되면서 공식화되었고, 쉴레이만 당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아랍식 표기인 알 쿠스탄티니야(al-Qusṭanṭīniyya)의 터키식 발음인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로 불렸다.[33] 셀림 2세 제위 기간에는 황후도, 태후도 아닌 셀림 2세의 누나 미흐리마흐 술탄이 정치에 개입했다. 태후 역할을 할 휴렘 술탄은 셀림 2세가 즉위하기 전에 죽어버렸기 때문이다.[34]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코프룰루 구역의 이름이 이 가문에서 따온 것.[35] 군세에서는 오스만이 압도적이지만 페르시아는 찰디란 전투의 패배 이후 전면전으로 나서지 않고 방어 모드에 올인하고 전면전을 피하며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다 보니 보급 능력이 딸리고 서유럽, 러시아와도 전쟁하던 오스만으로서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36] 근본적인 원인은 재정 악화를 메우기 위한 세금을 가혹할 정도로 높게 매겼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근본주의로 통치한 것은 아니기에 종교가 원인이 아니다. 오스만 제국의 중심 민족인 튀르크인은 애초부터 이슬람과 거리가 먼 세속적인 민족이라서 제국 내의 타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했다.[37] 베네치아가 수백 년에 걸쳐 영토를 상실하긴 했지만, 당대의 최고 부국답게 국가의 모든 물량을 다 동원해서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특히 크레타 섬을 두고 무려 2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번의 휴전도 없이 계속 싸웠다. 17세기 말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던 와중에는 십수 년에 불과하긴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집어먹기도 했다. 문제는 이로 인해 베네치아도 망했어요.[38] 단, 이 시점에서 오스만이 유럽의 환자가 된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1735년~1739년에 일어난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있는데, 이때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아군으로 참전하자, 오스만은 오스트리아를 세 전투에서 연달아 패배시켜, 과거 잃은 영토(세르비아, 바나크 남부, 보스니아 북부)를 제법 수복할 수 있었다.[39] 악체는 오스만 시절의 화폐로 1악체는 1.154g으로 만들어졌으며, 3악체가 1파라(para)의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평가절하를 한 방식이 전근대 화폐들이 다 그렇지만, 은에다 주석이나 아연을 섞는 식이었다.[40] 악체화의 무게는 매우 가벼운 편이라 더는 버틸 수가 없게 된 오스만 제국은 결국 1687년에 쿠루쉬(Kuruş)를 도입했다. 이 쿠루쉬화는 120악체=40파라=1쿠루쉬의 가치를 가졌으며, 이후 1843년 1월 5일, 100쿠루쉬(=400파라=1200악체)의 가치를 가진 금화인 터키 리라화가 도입될 때까지 법정 최고액 통화였다.[41] 15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순은 100%이었던 것이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은 함유율 80%로 떨어졌고, 다시 백 년이 지난 1600년에는 34%로 급락했다. 다시 백년이 지나 1700년이 되면 15%, 또 1800년에는 6%. 이러한 몰락은 마치 고대 로마 제국의 3세기의 위기를 보는 듯하다.[42] 지즈야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비무슬림인 즘미들에게 부과되는 지즈야는 빈민들에게는 상당한 고액의 세금을 요구했지만 중산층, 부유층에게는 별로 큰 세금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즘미들 가운데 빈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등 빠져나가고, 즘미들 스스로가 계급적으로나 교양적으로나 엘리트화되어갔다. 인구교환과 추방조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이스탄불에 남아있는 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등의 비무슬림 가문들은 여전히 상당한 재력을 자랑하는 나름대로의 엘리트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그동안 내던 세금대신 군대로 가서 몸으로 때우라고 하면 당연히 반발이 심할 수 밖에.[43] 특히 근 100년간 많은 영토를 상실하면서 있던 인구도 대부분 날려먹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나톨리아 반도는 인구 밀도가 매우 낮은 지역이었다.[44] 1914년 기준으로 영국이나 러시아, 독일에 비하면 국가 총 GDP가 1/10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신흥 열강으로 떠오른 일본과 비교해도 1/3에 불과했다.[45] 지리적으로 서유럽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보수적 이슬람 세력들의 반대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서유럽과의 교류, 튤립 시대를 거치면서 근대 문물들과 서구 문화는 진작 소개되고 있었다. 이미 18세기 말에 코스탄티니예에서 오스만 제국 최초의 오페라 공연이 열렸다. 멸망하기 직전 서구화에 올인했던 크림 칸국보다는 시기가 다소 늦지만 탄지마트 자체가 양무운동, 메이지 유신보다 시작이 수십년 앞선 것이다.[46] 서구 열강들보다는 다소 느리긴 했지만 전근대적인 무장이었을거라는 일부의 편견과는 달리 19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군의 무장 자체는 충실히 근대화되고 있었다. 뒤에 나올 공군은 물론이고 당대에 극소수 국가들만 보유하고 있던 잠수함도 도입할 정도로 군 현대화에 열의를 보였다. 19세기 이후 오스만 군의 문제는 무장의 전근대성보다는 장교진의 전문성 부진, 전술 문제가 컸다.[47] 파이타흐트: 압뒬하미트 등 제국 말기를 배경으로 한 터키 사극에서 서구화된 제국의 시대상을 볼 수 있다.[48] 참고로 당시 술탄이던 메흐메트 5세는 독일과 손을 잡는 것을 극구 반대했으나, 청년 튀르크당 출신의 국방 장관으로 사실상의 주권자였던 이스마일 엔베르의 독단으로 결국 독일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49] 전쟁이 발발할 때에는 이탈리아처럼 참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론이 친영파와 친독파로 갈리어 싸우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근대식 해군 양성을 위해 영국에게 드레드노트급 전함 및 다수의 군함을 발주해 인수받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인수받는 날짜가 딱 1914년 8월이었다) 군함이 필요하단 이유로 대영제국의 해군성 장관 나으리께서 먹튀를 하시는 바람에 여론이 폭발했다. 그럼에도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나 당시 영국 지중해 함대에 쫓겨 이스탄불로 피난 와있던 독일 군함 2척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오스만에게 무상 양도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오스만은 무상 양도에 대해 인정한 적도 없고 양도받은 군함도 장교와 수병 전부 독일인이었다. 사실상 선적만 오스만으로 옮기고 독일 군함으로 굴린 것). 이 두 척이 크림 반도의 러시아 함대를 독단적으로 공격하면서 결국 강제 참전. 여담으로 이때 메흐메트 5세는 이스마일 엔베르의 협박을 받았는지 칼리프로서 지하드를 선포했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상 칼리프가 선포한 최후의 지하드다. 단, 이슬람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아랍인들이 거부하며 오히려 지하드에 맞서는 등, 뭔가 나사가 여럿 풀린 지하드.[50] 참고로 오늘날까지도 터키 국회 역할을 맡고 있다.[51] 훗날 아랍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아랍국인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등이 통합을 의논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성사되지 못했다.[52] 당장에 오스만 제국의 하렘 후궁들만 찾아봐도 대부분이 유럽과 터키 출신이지 아랍 출신은 소수였거나 거의 드물었다.[53] 중동 제국들 중에서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국가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밖에 없다. 다른 중동 제국들은 많이 동원해봐야 10만 명 미만이었다.[54] 영토의 크기를 기준으로 보면 우마이야 왕조보다는 적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아나톨리아와 그리스를 차지하고 동유럽까지 영향력을 끼치기는 하였으나 우마이야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알 안달루스)와 페르시아까지 정복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이 우마이야 왕조보다 더 강한 역대 이슬람 제국 중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1) 우마이야 왕조보다 영토 전반에 대한 장악력과 동원력이 더 높았고 2) 동로마 제국 프랑크 왕국에 틀어막혀 유럽 중심부와 동유럽, 발칸 반도에 대한 공세가 좌절된 우마이야 왕조에 비해 대항해시대 르네상스 시대 세계에 대한 자신감이 팽배했던 근세 유럽의 영역에 끊임없이 공세를 가함으로써 이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유럽 국가들의 입장에서 '더 무서운 적'이었으며 3) 이와 연관하여 후대에 들어와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열강들 중 약체화 된 18~19세기 이후는 유럽 식민 제국주의가 나머지 비서방세계를 비교적 일방적으로 침략, 정복할만한 절대적 군사적 우위를 누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최후의 서구 문명을 위협한 동방의 비서구 정복 제국' 기믹을 뒤집어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55] 다만 이조차도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역사가 오늘날 이탈리아를 비롯해 프랑스, 그리스, 터키, 이집트, 알제리, 튀니지 등등의 역사이기도 하듯이 오스만 제국사 역시 터키는 물론 그리스, 세르비아 등 많은 나라들의 역사이기 때문. 더군다나 로마 제국이 이탈리아인만 우대하지 않았듯이 오스만 제국도 투르크인만 대접하는 나라가 아니었다.[56] 튀니지, 리비아, 알제리, 이집트[57] 팔레스타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58] 현재의 프랑스 인구가, 8천만을 자랑하는 독일이나 오스만 제국의 일부분에 불과한 터키에게도 밀리는 건, 19세기 중반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시기까지 프랑스의 고령화 + 전쟁으로 인한 청년들의 대규모 전사 + 저출산이 3종 세트로 터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냉전 이래로 혼외 가정의 합법화, 셋 이상의 자녀를 출산한 여성에 대한 연금 지급 등 각종 인구 부양책에 힘입어 선진국들 중 가장 높은 출산율을 자랑하고 있다.[59] 인구학자들이 만약 프랑스가 이 당시에 인구가 증가했다면, 인구 1억을 넘는 인구 대국이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할 정도면 말 다한 셈. 물론 최근엔 출산율의 상승과 이민으로 다시 독일을 능가할 것으로 예측된다.[60] 심지어 1707년에 스코틀랜드와 합치고도 인구가 천만도 안되는 700만에 불과했고 1800년대에 들어서야 천만을 넘겼다.[61] 15세기의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체 인구가 중동 1800만, 북아프리카 800만의 2600만밖에 안 되었다. 반대로 유럽은 이시기에 벌써 8천만을 넘겼다. 현재도 유럽은 인구가 7억 4천만에 달해 2억 6천만인 중동과 2억 3천만인 북아프리카 인구를 합쳐도 더 많다.[62] 오스만 제국의 아프리카 영토 일부, 아라비아 반도 일부 지역에 흑인 거주민들이 있었으며 수도에도 흑인 노예들, 황실 하렘의 흑인 환관들도 존재했다.[63] 따라서 수도도 루멜리(루멜리아)에 하나(에디르네), 아나돌루(아나톨리아)에 하나(부르사). 이렇게 두 군데 두어야 했다.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수도가 두 군데 있어서는 효율적인 통치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64] 장군 중의 장군이라는 뜻으로 본래는 군대 총사령관이라는 뜻이지만, 에디르네를 중심으로 루멜리 에얄레트를 창설할 때에 에디르네 함락을 주도한 지휘관에게 베일레르베이라는 칭호가 하사된 이래로 지방 총독을 뜻하는 말로 바뀌기 사작한다.[65] 다만 카디가 모두 카자를 통치한 것은 아니고, 베일레르베이나 산작베이의 측근으로 재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66] 이런 경우는 주로 국경 방어를 위한 경우였다.[67] 가령 그리스와 보스니아, 다뉴브 강 하류 일대를 제외한 남동유럽 거의 대부분을 관할하는 루멜리아 에얄레트가 대표적인 예. 루멜리아 에얄레트를 통치하는 베일레르베이는 모든 베일레르베이 가운데 가장 윗자리로 여겨졌으며, 때로는 재상 이하 고관들의 중앙 회의 기구인 디반(Divan)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다.[68] 연간 수입의 1/40을 매년 1회 납부[69] 이를테면 가톨릭과 정교회의 이혼, 이슬람의 이자대출[70] 이 칙령이 담긴 문서는 오늘날까지도 보스니아의 한 수도원(정확한 위치는 추가 바람)에 보관되어 있다.[71] 메흐메트 4세만 해도 카자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을 무슬림들의 희망이자 기쁨, 예수 그리스도의 묘를 지키는 단호한 파수꾼,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수호자라고 칭했다.[72] 사실 황가고 일반 농민이고간에 여러 민족의 피가 마구 섞였기 때문에 '터키인' 을 혈통이나 민족상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 같은 경우도 고민하다가 혈통이 아니라 '터키어를 사용하며 터키에서 살아가면 터키인' 이라고 정의했다.[73] 본명은 클로드 알렉상드르 드 본느발(Claude-Alexandre de Bonneval).[74] 본명은 루트비히 카를 프리드리히 데트로이트(Ludwig Karl Friedrich Detroit).[75] 본명은 콘스탄티 보르젱츠키(Konstanty Borzęcki).[76] 동유럽에 거주하는 라틴족의 갈래. 말하자면 현대 루마니아 민족의 역사적인 명칭이라 봐도 되긴 한데, 사실 서로마 멸망 이후 수 천년 동안 그 일대에 살던 라틴족들이 슬라브, 오스만 문화에 동화되어 정체성을 상실한 경우도 많고, 게다가 블라흐란 단어 자체가 루마니아를 구성하는 역사적인 3개 지방 중 왈라키아 중심적인 말이며, 또 발칸 반도 현지에서는 무식한 촌부를 지칭하는 경멸적인 단어로 사용 된 흔적도 있어 적어도 현지인, 학자들은 사용할 때 주의를 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더 자세한 건 루마니아 전공자들의 추가 바람[77] 오늘날 이라크[78] 오늘날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79] 이집트는 BC 31 ~ AD 641에서 중간의 팔미라 제국과 말기 사산왕조의 점령을 제외하면 650년 내외, 레반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병탄 시점인 BC 63년을 기준으로 할 경우 630년대 후반까지 거의 정확하게 700년에서 마찬가지로 팔미라와 사산을 빼면 600여년 후반 정도.[80] 참고로 생뚱맞은 대목이지만 이 스미르나 대화제는 태평양 전쟁을 다룬 미국의 대하드라마 더퍼시픽에서도 레키가 호주에서 작업 걸던 이민자 여성의 이야기로 언급 된다.[81] 물론 중동 지역이 남동유럽과 아나톨리아보다 척박한 것도 있다.[82] 비록 무슬림을 핵심적인 지배 계층으로 추구하긴 했지만, 동시대에 비슷하게 세계적인 보편제국 (monarchia universal)을 추구했음에도 종교적 통일 이룬답시고 나라 안에 경제적, 기술적으로 핵심 계층을 이루었던 무슬림,유대인들을 일괄 싸그리 추방해버린 합스부르크 스페인 제국과 비교해 보자.[83] 문자로 적으면 '압드 알하미드'이나, 실제로는 여러 법칙에 따라 줄여져 압둘하미드라 읽힌다.[84] 에르투으룰 가지는 오스만 1세의 아버지로, 오우즈족에 속하는 카이으(kayı) 부족을 이끌던 지도자였다. 본래 몽골의 침입을 피해 그의 아버지대에 부족이 아나톨리아로 임시로 피난을 왔지만, 당시 룸셀주크와 동로마와의 전쟁에서 셀주크를 지원하면서 오늘날 앙카라 인근에 위치한 카라자 다으(Karaca dağ) 일대를 봉토로 받고, 쇠위트(Söğüt)에 수도를 정해 공국을 세웠다. 그의 아들인 오스만 1세는 에르투으룰 가지가 죽고나서 이 공국을 상속받았고, 1299년에 독립해 오스만 제국을 세웠기 때문에 터키에서는 에르투으룰 가지의 공국도 오스만 역사로 포함시킨다.[85]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힌 이후, 그 아들 사형제가 황위를 두고 내전을 벌인 기간. 결국 셋째인 메흐메트 1세가 승리하여, 단독 술탄이 되었다.[86] 1차 재위[87] 1차 재위[88] 2차 재위[89] 2차 재위[90] 괄호 안의 부분에서 '엄격제' 에 해당하는 부분은 'Yavuz'인데, 이걸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해진 것이 없는 듯하다. 터키 원어의 뉘앙스를 적절히 살릴 수 있는 단어가 다른 언어에 없는 탓이기 때문인 것 같은데, 문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엄숙하다는 뜻이지만 근엄하다거나 완강하다는 정도로 의역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강인한 황제' 라고 창작에 가깝제 의역하는 경우도 있다.[91] 1차 재위[92] 2차 재위[93]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터키 공화국 정부는 오스만 가문(Osmanoğlu)을 터키에서 추방해버렸다. 이 조치는 1974년에 해제.[94] 11월 1일에 술탄에서 폐위당했지만 칼리파는 17일이 지나서야 터키 의회가 사촌인 압뒬메지트를 후임자로 선출했기 때문이다.[95] 이시형 교수의 에세이로 유명해진 인물. 하지만 그 이야기는 사실과 좀 다른 면이 있다.(참고)[96] 2004년에서야 터키 국적을 회복한다. 간혹 최후의 오스만이라고 일컬어 진다. 계승자들이 제국 붕괴 이후 태어났기 때문.[97] 북마크의 마지막 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