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베르나르도 똘로메이/몬테 올리베또 연합회 영성

올리베따노 2013. 2. 22. 16:52

Antonio da Barga, CHRONICON MONTIS OLIVETI (抄譯)


 

 

저자의 머리말

1. 수도승 안토니오다 바르가가 그리스도 안에 한량없이사랑하는 아들 요한 데 마르카 노바에게 인사합니다.

 

작년에 제가 아빠스님을 수행하여 (수도원) 방문차 베네토 지방에 갈 때, 플라미니아 지방에서 그대를 위해 제가 쓴 책 한 권을 들고 갔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토스카나 사람들의 출신지인 토스카나 지방의 길이와 넓이에 대해 묘사해 보았습니다. 토스카나 사람들의 풍속과 그들의 전쟁 - 이 때문에 이들을 토스카나 사람들이라고 부르거니와 -, 그리고 그들의 종교 의례에 대한 책이었지요. 그리고 배운 데 없고 경험도 부족한 제가 펴낸 이 책은 그대와 요한 데 프라토의 (정신의) 위대함의 후의를 입었습니다. 요한 데 프라토는, 그대도 아시듯이, 파도바 시에 도착하여 민법을 가르쳤고, 그대도 거기서 철학을 읽었습니다(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두분 다 제게 우리 수도회의 기원이 어디 있는지를 물어 왔지요. (그런데 같은 것을) 우리 수도회의여러 어른들과 형제들(도)patres et fratres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이리하여, 그대와 다른 여러 친구들을 위해, 순시자visitator의 소임에서 물러나 다시 사랑하는 프라토의 고독으로 돌아온 이제, 우리(회의) 거룩한 수도 생활의 기원이 어떠했으며, 어떤 분이 첫번째 창설자였고, 또 그러한 수행의 생활을 착수하도록 (성령의) 거룩한 바람이 그에게(창설자에게) 동료로 붙여준 이들이 어떤 분들인가를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quam alma nostra religio, habuit originem, quisve huius primus extitit fundator, quosque ei socios ad tanti exercitii opus incoandum, divina concessit afflatio,intimare censuimus. 방금 말씀드린분들은 (한편으로) 놀라운 환시를 겪은 분들이어서, 우리는 (이 환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들은 또한 아레쪼의 주교에 의해 흰 수도복을 받아 입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수도원을 지었던 장소가 이 주교의 교구 관할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뒤에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 시기에 교회를 이끌던 각 교황님들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교황께서 우리 수도회(의 인준을) 확인해 주셨는지에 대해서도 (이 책에서) 썼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들의 기억을 영구히 이어가기 위해, 지금 우리 수도회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 시대까지의 (총)아빠스들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그 가장 중요한 행적들과함께 이야기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쓴 것은, 일부는 몬떼 올리베또의 문서실에서 (그 근거를) 얻은 것이고, 또 일부는 노수사(老修士)님들에게서 얻어 들은 것이며, 다른 어떤 것들은 눈으로 직접 본 것들입니다.

만일 삶이 따라 준다면(충분히 살 시간이 허락된다면si vita nobis comes fuerit) 우리는 분명히 다른 책을 한 권 더 써서, 우리 수도회가 키워낸 유명한 인물들의 행장(行狀)과 그들이 행한 기적들에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펴낸 지혜로 풍부한 책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 참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plicit epistola vel prologus.

 

 

 

연대기

 

몬떼 올리베또 수도회의 발전에 대해 같은 회의 서원자인 안토니오 다 바르가 형제가 편찬한 책 혹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narrationis sermo의 시작.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2. 토스카나 지방 시에나 시에 베르나르도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다 바르가의 연대기(이하 ChBa로 약칭)는 여기서 시에나를 떠난 후에 요한에서 베르나르도로 개명(改名)한 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상서관 연대기 A>(이하 ChCa로 약칭) 19와 각주 1, ROCHER p.368 참조. 삶으로(가문으로) 고귀하였으나 그 행실로 더욱 고귀하였던 그는 똘로메이 가문 똘로메이 가문은 시에나에서 가장 부유하고 세력이 큰 귀족 문중들 중 하나였다. 주로 프랑스와의 무역에서재산을 일으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 미노 님의 자제였으며, 두말 할 나위 없이 뛰어난 기사요 박사 miles atque doctor eximus였다.

 

성령의 영감으로divino afflatus Spiritu, 그리고 격렬한 내적 열정에 사로잡혀 시에나 사람들인 고귀한(귀족 가문의) 친구들 빠뜨리찌가의 빠뜨리찌오 빠뜨리찌오의 부친은 1288년 시에나 공국의 최고위직에서 다스렸다. 및 프란체스코 안토니오 다 바르가 만이 베르나르도와 같이 시에나를 떠난 사람으로 프란체스코를 다른 두 동료와 함께 거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출신 가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올리베따노 전통은 이후 이분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이분이 다른 두분 처럼 총 아빠스가되지 않으셔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암브로지오 암브로시오는 13세기에 매우 세력을 떨쳤던 ‘삐꼴로미니’ (상업 회사)의 경영주이던 삐꼴로미니 가문 출신.와 함께 살면서 밤낮으로 천상 것을 열망하였다. 그들은 함께 세상의 하찮음(하찮은 것들nugis secularibus)에 – 하찮은 세상사에 – 등을 돌리고alienantes 뇌성벽력의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전심 전력을 다 하였다 이렇듯 몬떼 올리베또의 창설자들은 연대기의 시작에서부터 이후로도 줄곧 함께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올리베따노 영성의 한 큰 특징인 ‘친교의 의지’의 첫번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cf. ChF p.52의 각주 4와 <신뢰 서약서AdC> p.101이하. 한편, "뇌성 벽력의 하느님Deo tonanti"이란 표현은 욥기 37,5의 tonavit Dominus in voce sua mirabiliter의 암시이다. .

 

그러나 이러한 항구한 노력을 하면서 같은 시민들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에, 그들은 한적한 곳으로 물러났다. 뱀과 함께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귀족인 베르나르도는 시에나의 들판에 매우 아름다운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시로부터 약 15마일 떨어진 이곳에는 통상 아꼬나라고 불리는 아주 작은 촌락이 있었는데, 물론 아레쪼 교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여기서 그는 흙집을 하나 세웠는데 이것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아꼬나에서의 수도승 생활의 시작

3. 이리하여 사람이 되신 말씀의 탄생 이후 제 1313년에위에서 말한 하느님께 사랑받는 세 사람은 필요한 물품과 책들을 들고서 하느님을 열심히 섬기기 위해 위에서 말한 장소로 갔던 것이다 쟝 르끌레르는 수도승들이 제 손으로 일하여 먹고 산 이유가 "정확히 그들의 삶이 엄격하게관상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여러 (중세) 수도승 성인전들이 강조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Cf. Etude sur le vocqbulqire ,onqstiaue duAge, Roma 1961, p.105.. 그들은 또한 사도의 모범을 따라(cf. 1고린 4,12) 손수 일하여 필요한 먹거리를 장만하였다. 그런데 세련된 사람들이요 또 에집트에서 갓 나온 것과도 같았던 이들에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한편으로는 베르나르도의 작은 소유물(지)들로부터 얻어 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손 노동으로 얻어 내었던 것이다. 조금 지난 후에는 세속의 복장을 벗어 버리고 더 품위있는 옷을 (수도복을) 입었다. 신발도 벗어 버리고 나막신을 신었다. 이렇게 가난을 더 잘 실천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기도했으며 대단히 깊은 침묵을 지키면서 하느님께 찬양 드리는 일에 열정적이었다. 그들은 몸소 건축한 경당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훌륭히 경신례cultum divinum를 거행하였다 하느님의 일Opus Dei의 거행에 대한 배려는 올리베따노 초기 문헌들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로서, 깊은 ‘전례적 영성’의 표현이다. Cf. ChF의 해제 p.38-43과 ChBa 21.. 사실상 하느님께 사랑받던 베르나르도는 보통 학식을 지닌 분이 아니셨고, 영성적이고 인문적인 지식의 향을 풍기는 그분의 편지들은 아직 그 수도원에 보관되어있다 이 편지들의 친저성(親箸性)은 B. Mattoscio, "The Letters of Blessed Bernard Tolomei : a study", in Saggi e ricerche nel VII centenario della nascita del B. Bernardo Tolomei(1272-1972), Monte Oliveto Maggiore 1972, p.85-105에서 확인된 바 있다. 복자 편지에 대해서는 이 외에도 다음의 글들을 참조할 것 : J. Leclercq, "pour un portrait spirituel du Bx. Bernard Toloméi", ibidem, 11-12 ; E. Porcelloni, "Testimonianza monastica nell’epistolario del Beato Bernardo", in L’Ulivo 9(1979) n.2 12-18 ; G. Palmerini, "Brevi note sulle lettere de B. Bernardo Tolomei", in L’Ulivo 8(1978) n. 3, 43-45 ; 이태리어 번역으로 A. Donatelli, Giovanni Bernardo Tolomei Padre e Maestro dei monaci, Siena 1977, 93-181이 있다.

 

 그분은 자신들을 위해, 알고 지내고 열심하던 사제들로 하여금, 내가 눈으로 직접 본 그 경당에서 거룩한 신비들(미사)을 거행하게 하였다. 이분들의 경건한 생활에 대한 평판은 즉시 도처로 퍼져 나갔기에, 귀족 출신이나 그렇지 못하거나를 막론하고 많은 토스카나 사람들이 이 세상의 즐거움을 모두 버리고 그들의 어려운 삶을 애써 본받으려고 (그들과) 합류하였다 몬떼 올리베또의 창설자들의 이러한 공동체 생활에 대한 기록은, 후대의 복자 전기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이 은수생활이라는 최초 단계를 거쳤다는 이야기가근거없다는 점을 일러 준다..

 

조사

4. 이어서, (당시의) 요한 교황께서, (교회법으로) 인준된 장엄 서원을 하지 않은 채로는 누구라도 수도복을 입고 모여서 살지 못하도록 조사를 하도록 명하여 (그 조사가) 시에나 지역에 이르렀을 때, 삶의 형태로 고귀하지만 신앙과 거룩함으로 더 고귀한 (어떤) 베르나르도와 그 동료들이 살고 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을 본 이 조사관은 그들에게 경의를 표했고, 가톨릭 교회의 으뜸이신 분의 명에 순명할 것을 호의로써 권장하였다.

 

첫번째 주교 방문

5. 위에 말한 사부들은 해야 할 일에 대해 상의하기위해 가능한 한 빨리 아레쪼의 주교를 방문했다. 주교는 그들의 열망을 (알고)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이제 여러분은세상에 등을 돌렸으니, 분별에 뛰어나고표현에 명쾌한 공경하올 사부 베네딕도의 규칙서보다 더 경건한 열망에 맞갖으며 더 거룩하고 더 실증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출신 시의 시민들이 동정녀의 보호와 깃발 아래 (유달리 구별되어) 있음을 자랑하고 있으므로et cum vestri concives titulo Virginis insigniti glorientur, 이 영광스런어머니의 지극히 순결한 동정성 때문에, 여러분들이 내면에서 내면에 비밀스레) 즐기고 있는 순결함이 외양으로도 드러나도록 하기 위하여, 흰 수도복을 입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사료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의심할 수 없는 <창설 인가서Charta Fundationis>에서 명확히 보듯,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와 흰 수도복을 채택한 것은 복자 베르나르도와 그 동료들이며, 주교는 이를 허락해 주었을 따름이다. Intr,ChF p.34와 각주 2, p.246을 보라. 그리고 그들을 흰 옷으로 장엄하게 입히고 규칙서를 부여한 후, 주교는 자신의 대표자들로 하여금 몬떼 올리베또에서 성당 건축을 위한 첫 (머리)돌이 서도록 하고 (이것이) 공증인을 통하여 문서로 기록되도록 명하였다.

 

계단의 환시

6. 그런데 (이런 일이 있기) 조금 전에, (우리에게) 거룩한 기억으로 남아 계신bone memorie prelibatus Bernardus 베르나르도께서는, 현재 성당이 있는 곳에서 기도하시던 중에 하느님의 계시로 은으로 된 계단을 보셨다.

 

이 계단은 동쪽으로 향해 있었으며하늘에 닿아 있었다. 그 꼭데기에는 주 예수님께서 당신 모친이신 복되신 마리아님과 함께 빛나는 흰 옷을 입고 서 계신 것이 보였다. 마리아님은 가슴에 놀랄 만큼 아름다운 별을 달고 계셨다. 많은 수도자들이 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천사들은 또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었다.

 

베르나르도께서는 이를 보시고 즉시 형제들을부르시어 이 환시를 보여 주셨다. 형제들은 이를 보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다. 사료들이 이 환시에 대해 일관된 증언을 해 주고 있음은 이 사건의 진정성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안토니오는 다른 형제들도 이 환시의 증인으로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것이 다른 사료와 다른 점이다. 복자의 편지 하나에도(7) 그가 한 또다른 환시의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A. Donatelli, ibidem, 107 참조). 안토니오의 엄격한 서술 방식이나 특이한 일들에 대한 극히 절제된 표현 등을 감안한다면, 그가 근거도 확인하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 환시가 미래의 일들에 대한 큰 전조(前兆)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사실, 후에 사실로 확인된 바이거니와, 많은 이들이 같은 계단을 통하여 하늘로 올라갔던 것이다. 하느님의 천사들이라는 말은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도우심이라고 해석함이 옳을 것이요, 계단은 아름다운 삶의 무구(無垢)함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룩히 살진대, (이런 우리에게) 이승의 삶이 하늘로 딛고 올라가는 계단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주님께서도 계단의 꼭데기에 서 계신 것으로 나타나신 것이니, 이는 그분께서하늘 나라를 위해 분투하는 이들을 돕기 위한 준비를 늘 갖추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서있다 함은 싸우는 이나 돕는 이 특유의 자세이다. 그리고 싸우는 이는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환시의 상징이나 흰 수도복의 상징에 대한 설명은 사실 베르나르도 자신의 강론이 반영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Intr.ChBa 222이하를 보라.

 

흰 수도복

7. 이 (일이 있고난) 후 그들은, 회의를 거쳐서inito consilio, 흰 색의 수도복을 입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대로 실행하였다. 이 이야기와 위의 ChBa 5에서 한 이야기(주교가 RB와 흰 수도복을 권유했다는 이야기)는 서로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아마도, 다 바르가가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 이전부터 이 주제에 관해 입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이 두 가지였기 때문이라고 추정해야 하리라. 어떻든 이미 말했듯이 ChF가 우리로 하여금 어느 이야기가 맞는 것인지를 쉽게 가려낼 수 있도록 해 준다. 흰 색이라면 보통 순결을 뜻한다고 제대로 알아듣는다.

 

그래서 솔로몬도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 "언제나 네 옷을 희게(깨끗하게) (손질) 하라"(전도 9,8). 요한 역시 묵시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 "흰 옷을 입은 스물 네 장로를 보았다." 리까르두스(성 빅토르의)에 따르면 이들은 신구약의 아버지들(족장들, 사부들?)과 개선하며 싸우는 교회의 영광을 뜻한다. Cf. Richard de Saint Victor, In Apocalypsim, liv.2, ch.1. PL 196, 747B/749B. 또한 선택된 만 이천명을 두고도 "이들 모두는 흰 옷을 입고 손에 빨마 가지를 들고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흰 옷이 영혼의 순결이 아니라면다른 무엇을 뜻하겠는가? 한편 빨마라 함은 전장에서 승리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이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귀양살이의 전투를 끝내고 승리자로 조국에, 즉 천국에 돌아오는 이들은 주님께로부터 영원한 승리의 빨마를 얻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실상 사람의 이승 살이는 일종의 군복무에 비길 수 있다. 이런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 "승리한 이는 이런 옷을 입게 되리라."(묵시 3,5) 또 다른 곳에서는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걷게 되리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묵시 3,4) 사실 주님의 부활을 알리러 왔던 천사들 역시 흰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음을 상기하면 이는 더욱 믿을 만한 이야기이다. 뿐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때에도 그분의 옷이 눈과 같이 희게 빛났다고 했다.

 

그러기에, 모든 점에서 공경할 시인 꼴루쵸 살루따띠 1331년에 태어나서 1406년에 죽은 이탈리아 인문주의 문필가로 당대 이탈리아 문화계에깊은 영향을 미쳤다. 까말돌리 수도승들을 두고 쓴 <세상과 수도원De seculo et religione>이란 시집 제 2권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던 것이다 : "너도 (나름으로) 이 흰 옷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cogita tecum …. 이 (옷)들은 순결의 강한 끈으로 너를 동여 주지 않는가." 나는 나름대로 자주 이 흰 옷에 대해 생각하면서, 성모님께 돈독한 신심을 지니셨던지극히 거룩한 아버지 (성) 베르나르도와 그대의 성 로무알도께서 하늘스런 계시로 흰 옷을 입은 수도자들이 천국의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셨다는 사실에 경탄하게 된다. 안토니오 다 바르가는여기서 까말돌리 수족의 창설자 성 로무알도(+1027경)에게 생겼다고 은수자 예로니모가 전한 바 있는 일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느날 로무알도는 은수처를 찾으려 아펜니노 산으로 갔다가, 어떤 샘 옆에서 잠이 들었다. 꿈에서 그는 옛날 성조 야곱이 그랬듯이 바닥이 땅에 닿고 꼭데기가 하늘에 닿는 계단을 보았다. 그는 이 계단을 통해 흰 옷을 입은 그의 수도자들이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예로니모, <Vita S. Romunaldi>, AASS Febr., II, p.137A. 그레고리오 펭코의 한 아티클(수도승 전통에서 계단의 환시에 대한)도 참조할 것.

사실 흰 색은 수도 생활에 더없이 적합한 것이니, 그 얼마만한 순결무구함과 그 얼마만한 열심으로 우리가 우리 삶의 순간들을 보내야 할 것인지 늘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물론 검은 색 역시 큰 신비의 힘을 품고 있다. 그것은 사실 겸손과 포기의 상태뿐 만 아니라nec non humilitatis, abiectionisque statum prefigurat 사실 보속의 고통이나 우리 (이승의) 귀양살이의 슬픔을 예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흰 색은 이보다 좀 더 큰 무엇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이승의 삶과 저승에서 누릴 생명이 지닌 찬란한 빛을 동시에 상징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초대 교회에서 모든 새 영세자들이 흰 옷을 입었던 것이다. 흰 수도복의 상징이 지닌 풍요로운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 1) 마음의 순결 2) 종말론적 의미(묵시록의 선택된 이들) 3) 거룩한 변모, 부활 그리고 승천의 신비를 상기시킨다 4) 성모님 공경 5) 세례의 삶

 

두번째 주교 방문. 창설 인가서

8. 이야기가 옆길로 좀 샜으니 이제 다시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수도복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저 하느님의 사람들은 위에 말한 아레쪼 시의 주교에게 다시 가서 정중하게 모셔졌다. 그들은 방문의 이유를 알리고 그들의 완전한 장엄 서원을 받아 줄 것을 간곡히 청원하였다.

 

 

그는 이 경건한 원의를 기꺼이 받아 들여 주교좌 성당에서 구세주의신비들을(미사를) 장엄하게 거행한 후, 아레쪼 교구 삿소(수도원)의 아빠스인 요한 이 수도승으로부터 흰 수도복을 받아 입었다는 기록이 올리베따노 수도승들과 까말돌리 수도승들 사이에 있었던 한때 떠들썩했던 논쟁의 시발점이다. 어떤 이는 사실, 이 요한이라는 이는 까말돌리 회원으로서 그가 올리베따노 창설자들에게 자기 수도회의 수도복을 입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을 보자면, 까말돌리 회원들은 1414년에나 가서야 사소 수도원을 접수했고, 그 이전에는흑의의 베네딕도 회원들이 거기 살았다. P. Lugano, Origini e primordi dell’Ordine di Monteoliveto 1313-1450, Abbazia Settignano, Firenze 1903, 93-94 참조.이라는 분을 불러와 그를 대신하여서원을 하도록 명하였다. 이것은 말씀의 강생 후 정확히 제 2 회계기의indictione secunda 1319년 3월 26일에 생긴 일이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일은 성 밖에 위치한 성 삼위일체 성당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다른 사료들을 종합하여 판단하건대, 정확한 장소는 "성밖의 성 삼위일체 성당"이었다. P. Lugano, 88이하 참조.

 

 

이때 교회를 다스리시던 이는 교황 요한 22세이셨다. 한편 위에 말한 주교는 피에트라말라의 귀도님 이었는데 마음이 넓고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었다. 이 일들이 있고 난 후 그는 우리 사부들이 거처하시던 곳으로 다시 돌아올 때 (그들과 함께) 아레쪼의 성 삼위일체 성당의 담당 사제cappellanus 레스타우로 신부를 함께 보내어 성당이 세워져야 할 장소를 정하게 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그는 기껍고도 충실히 명을 이행하여, 기초의 첫번째 돌을 몸소 놓고 강복할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충실한 증언으로, 이 모든 일들에 함께 있었던 아레쪼의 공증인 과르디노씨가 문서로 (공증을) 작성하였는데, 수도회(가 창설 때에 받은) 특전들이 보관되어 있는 궤 속에 아직 그 사본이 한부 남아 전한다.

 

요컨대 <연대기>에 따르면 우리 사부들은 다음과 같이 두 번에 걸쳐 주교를 방문했다 :

 

 

첫번째 방문 : ㄱ) 주교가 그들에게RB와 흰 수도복을 권유하면서 인준을 선포 ㄴ) 흰 수도복과 RB의 채택 ㄷ) 초석을 놓기 위해 몬떼 올리베또로 대리인을 보내다 ㄹ) 공증으로 남기다.

 

두번째 방문 : ㄱ) 사부들의 장엄 서원 ㄴ) 사쏘의 요한 아빠스가 주교의 이름으로 장엄 서원을 받다 ㄷ) 레스타우로 신부가 주교를 대리하여 몬떼 올리베또 성당 부지를 선정하고 초석을 놓도록 위임을 받다 ㄹ) 아레쪼의 공증인 과르디노가 이를 문서로 공증하다.

 

사실 우리는 <창설 인가서>를 통하여 흰 수도복을 입고 서원을 발한 것이 같은 날 같은 예식 중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 몬떼 올리베또 성당 초석에 관한 이야기가 이중으로 등장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일들을 확인해 줄 사료는 <창설 인가서> 하나 뿐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주교 방문이 두번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을까? 아마도 안토니오는 주교가 규칙서와 흰 수도복을 선정해 주었다는한 전승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결국 첫번째 방문의 목적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이 첫번 방문 중에 규칙서와 흰 수도복을 받아 들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보았듯, <창설 인가서>를 주의깊게분석해 보면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결국, 두번째 방문 만이 역사적으로 확실한 것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다.

 

이 성당은 현재의 성당 가까운, 현재 형제들의 묘가 있는 곳에 기초되고 축조되었다. 우리는 아직 완전히 허물어 지기 전에 이 성당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다.

 

장소의 묘사와 몬떼 올리베또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

9. 이제 원하신다면 장소를 묘사해 볼까 한다. 이곳은 숲이 매우 깊은 곳이며, 주위가 커다란 바위와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더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오는 길이 아니면) 그곳으로 가는 길은 없다. 이 때문에 여기에 성채(요새)로 쓰일 수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 이 건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수도원이 있는) 장소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이곳에는 필요한 모든 먹거리들이 보관되어 있는 작지 않은 규모의 광이 있다. 같은 이 장소에는 사실상 모든 종류의 과일과 채소가 풍성하다. 나무들과 숲들이 주위로 우거져서, 여기 사는 이들에게 많은 양의 땔감을 제공해 준다. 여기에는 올리브 밭도 넓은데, 이 (올리브라는) 말로부터 산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사실 (이곳을) 올리브 산Mons Oliveti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보통 기도에 열중하시고 앉으셔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정녕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다른 많은 신비들을 행하시던 그 (성서의) 올리브 산과는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은 (성서의 올리브 산과 관계된) 그것들의 어떤 면을 자신 안에 갖추고 있는 듯 하다. 몬떼 올리베또라는 이름에 대해서는G. Picasso, "Il nome di Monte Oliveto", in Saggi e ricerche nel VII centenario…, Monte Oliveto Maggiore 1972, 107-111을 보라. 사실 많은 덕행들의 풍성함, 즉 겸손과 애덕, 순명과 정결 등, 지금으로서는 짧게 줄이기 위해 말하지 아니하고 지나갈 수 밖에 없는 다른 많은 덕행들이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의심할 나위 없이, 주님께서는 한때 에집트와 테바이데에서 그러하셨듯이, 오늘날 당신의 종들에게 그러한 장소를 선사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께 영광을 드리고 당신을 섬기도록 하셨다고 믿어야 한다. (바로) 이 (장소) 한 가운데에서 우리 사부님들은 이마에 땀을 흘리시며 대단히 아름다운 수도원과 성당을 지으셨던 것이다.

 

초창기 수도승들의 수도승 규율 준수

10. 오늘날까지도 (그 곳에서) 얼마나 엄격하게규칙 준수가 실행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어떤 열정으로 좋은 수도승들이 덕행의 정상에 도달하려고 애썼는지에 대해서, 우리 이야기는 충분히 전해줄 수 없다.

 

사실 그들은 얼마나 기도에 열심했던지, 복된 마르띠노에 대해서 전하는 다음의 말을 비록 꼭 같은 모양으로는 아니지만 얼마든지 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 "그들은 기도로 불굴인 영혼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invictum ab oratione spiritum non relaxabant." Cf. Sulpice Sévère, Vie de saint Martin, ed. J. Fontaine, t. 342, Sources chrétiennes 133. 끝기도 후 ‘Ominpotens sempiterne Deus, qui vivorum dominaris…"로 계속되는 기도와 함께, "미세레레"나 "깊은 곳에서 주님께 부르짖사오니"를 낭송하는 데 걸리는 시간 만큼 그들은 편태로 육신을 괴롭혔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또한 밤기도의 모임 후에는 누구든 잠시라도 눈을 붙이지 못하는 관례도 도입하였다. 모두가 기도나 독서에 전념하는 것이다sed unusquisque aut orationi, aut lectioni vacabat. (이 시간에) 필요한 사람들은 열성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cf. RB 8,3). 이른 아침 제 일시경이 끝난 후, 미사를 거행하였다. 미사가 끝난 후 제 삼시경과 제 육시경을 정성되이devote 바쳤다. 그런 후 일하러 나가 제 구시경까지 침묵과 겸손으로, 불평없이, 그들에게 필요한 육체(손)노동을 하였다manibus suis operabantur, quod eis necessarium erat. (건물의) 기초 위에 가마를 지었는데 (그것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거기서 그들은 건축에 없어서는 안될 벽돌을 구워 내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인 그들은) 날마다 (거기서) 벽돌을 뽑아 내면서, 그들 자신이 (바로) 인욕(忍辱)의 불가마의in fornace humiliationis 금과 같이 정련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가장 엄격한 침묵을 지켜, 끝기도 후의 시간 뿐 아니라, 낮과 밤의 다른 시간에도 침묵을 깨지 못하도록하였다. 그리고 육체 노동의 시간과 식당에서, 안정원에서, 침실에서, 요컨대 모든 시간에 침묵을 지키게 하였다. 이리하여 공주 수도원이라기 보다는 은수 암자와도 같아 보였다. Silentii vero summam ita arripiebant, ut non solum post completorium, aliisque nocturnis atque diurnis horis, quibus nefasest infringere ; verum etiam in exercitio manuali, in refectorio, in claustro, et dormitorio ; omnibus videlicet horis, ut potius heremus, quam cenobium videretur. 당시의 관례를 (이렇게 여러분에게) 알려 드렸다 : 행여 누가 말삼감taciturnitas에 대한 이 규정을 어기면, 그날 그는 포도주를 한방울도마시지 못하였다. 그들은 결코 (이점을 완화해 주도록) 교황께 관면을 청하지 않았다.

 

가난

11. 그 누구도 감히 어떤 것이 자기 소유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우리의 거룩한 사부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 따라, 모든 것은 우리의 공동 소유이다. 각자는 자기의 사용을 위해 두벌의 수도복을 한벌의 성의(聖衣, 스카풀라) 및 쿠쿨라와함께 가질 수 있었다. 사실 아주 초라한 (옷을 보관하는방)에는 낡은 것이긴 했지만 몇벌의 수도복이 있어서 (자기 수도복을) 세탁해야 할 수도자들이 (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자기 옷을 빨아서 (다시 갈아 입은) 후에는 낡은 수도복을 다시 (옷 보관소에) 반환하였다. 이렇듯 그들은 가장 엄격하고 자발적인가난을 (실천하며) 살았다. 침대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침대 옆에 못으로 둘레를 죄다 고정시켜 놓은 (속을) 짚으로 꽉 채운 자루들을 가지고 (사용하고) 있다Pro lectulis autem sacculos paleis plenos habemus, ex omni parte lateribus lecti clavis affixos. 그 위에서 자면서 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부들은 양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양털로 천을 짜게 해서 외투나 모포를 만들어 잘 때 덮었을 뿐 아니라, 수도원 안에서 다닐 때 혹은 식탁에서나 성당에 있을 때 걸쳤다. 그 천은 어두운 색깔로 촌스럽고 거친 것이어서 시골 사람들이나 쓰는 (천과) 비슷했다. 그러나 위에서 그들이 흰 옷을 입고 다녔다고 말했대서 (독자께서는) 놀라지 말기 바란다. 그들은 사실 복되신 베네딕도께서 그들에게 색깔에 대해 토를 달지 말라고 이르셨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런 색깔의 외투를 걸쳤던 것이다. 어떻게 (언제부터:佛譯) 그것들을 (어두운 색깔의 외투를) 입지 않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어쨌든) 현재 우리는 (이 색깔의 외투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단지 흰 색(의 수도복만을) 사용하고 있다.

 

음식에 관한 관습

12. 그들은 특히 먹고 마심에 절제가 있었다. (사실) 그들은 포도 수확 철에 포도 액을 (포도)송이로부터 짜낸 후 물을 (짜내고 남은 포도 송이의) 찌꺼기에 섞어, 옳다고 생각되는 바에 다라 한 사흘 고았다. 그런 다음 그것을 포도주 통에 가득 채워서 겨울 내내 사용하였다. 규칙서의 본문에 따라 우리는, 극심한 병에 걸려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이곳은 매우 고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고in vasta solitudine situs habetur 강이나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그들은 고기도 (드문 경우가 아니면 결코)raro aut numquam 먹지 않았다. 결국에는 목요일과 주일에만 각자에게 계란 두개를 주도록 (법으로) 정하였다. 교회에서 정한 축일들에도 그렇게 하였는데, 특히 더 큰 축일들에는, 단식 기간은 제외되지만, 각자는 점심 때 자기 몫의 식사로 계란 두개를 (더) 받았다. 여름철에는 저녁 식사에 (먹을 것으로ad cenam, pour la réfection), 위이 서 말한 날은 제외하고, 빵과 치즈만을 소금과 함께 먹었다. 교회에서 정한 성인들의 축일 전야 밤샘 기도(가 있는) 때에는 아무도 익힌 것을 먹지 않았다.

 

 

내가 몇몇 노 수사님들께 들은 바로는, 매년 사순절이 시작될 때 사순 첫째 주간의 첫날에는 모든 모든 (음식) 창고의 문을 폐쇄하기로 공동체적으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고대 교부들의 모범에 따라, 술은 수도승들에게는 결코 합당하지않은 (것이라는 말씀을) 확증하였던 것이다ita ut aclamarent exemplo antiquorum patrum.. (나아가) 사실 둘째날(도) 부엌의 문을 폐쇄하여 아무도 익힌 것을 먹을 수 없도록 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깨어있고 열심한 정신으로alacri devotaque mente 거룩한 부활절을 기다렸던것이다. 포도 수확철에는 포도주 통을 골짜기 절벽 밑으로 내던져 버렸다. 덧없고 무익한 이런 일들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예언자의 말씀을 열심히 곱씹었다 : "저를 위해 누가 하늘에 계시나이까!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제가 바랄 것이 없나이다. 제 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제 마음의 바위,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이시나이다."(시 72,25-26)

 

몬떼 올리베또의 확산

13. 그러는 동안 평판과 (회원) 수에 있어 자라나면서 (그들의 명성은) 삽시간에(얼마 되지 않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시에나의) 시민들은 이 좋은 평판을 들으면서 이들에게 기꺼이 수도원들을 덧붙여 주었다archesteria contulebant. 자기 도시에 이런 수도승들의 공동체(이런 수도원을)를 두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선익)이라 믿었던 것이다ducentes pro maximo, si in sua civitate unusquisque talium mereretur habere congregationem. 사실 많은 귀족들과 평민들multi nobiles de genere atque mediocres이 고해의 풍파에서 벗어나려는 소망으로cupientes maris naufragium evadere 에집트를 빠져나와저러한 수도 생활의 고독을 찾아갔던것이다ad solitudinem religionis veniebant. 이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수가 늘어나 우리 수도회 안에 삼백명이 넘는 수도승의 수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그렇게 수는 많아도) (그들 모두의) 마음과 뜻은 오직 하나일 따름이었다uno tamen animo et voluntate 여기서 강조점은 형제들 사이의 친교에 있다. 이러한 강조점은 벌써 1350/60년의 회헌 37,40.49에서 발견된다.

 

당대 수도 생활의 쇠락(衰落)상에 대하여

14. 이 시대에는, 프랑스Gallia와, 이탈리아 그리고 모든 로마(교회)권 세계에서, 즉 시토회와가말돌리회, 발롬브로사회 뿐 아니라 설교자회(도미니코회)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꼬회)를 막론하고, (수도 생활의) 규율 준수가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라지고 없었다.

 

사실, 작은 형제회에서 현재 시행되고 있는 규율 준수는, 나와 깊은 교분을 맺고 있는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는 1380년에 태어나 1402년에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프란치스꼬회 안에서 이른바 ‘규율 준수의 개혁’의 선구자였는데, 이 개혁의 이상에 따라 많은 공동체를 설립하여 1438년에는 그 vicario generale가 되었다. 그는 아퀼라에서 1444년 5월 20일 귀천하였다.

 

 안토니오 다 바르가가 여기서 베르나르디노에게 ‘성인’이란 호칭을 붙인 것은 <연대기>의 저작 연대를 알게 해 주는 귀중한 요소가 된다. 사실 베르나르디노의 시성식은 1450년 5월 24일에 있었다. 가 시작한 것이다. 물론 나는 수도 생활에 연륜이 깊으신 분들과 연로하신 어른들로부터ab expertis et antiquis patribus, 매우 엄격한 생활 속에서 오랫동안 지내기란 정녕 힘든 일이기에, 한 수도회가 그 규율 준수를 백년 이상 (그대로) 유지하는 일이 드물다고 들었다. 육체 노동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우리가 (잘) 보듯이, (누구라도) 어떤 일(기술ars)을 시작은 큰 열심으로 하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소홀히 하게 되면서는 결국 틀림없이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negligendo paulatim anullatur. 사실 우리는, 구세주의 특별한 은총의 도우심으로써 나날이 쇄신되지 않는 이상 (그 규율의) 무게(가 주는) 혐오감으로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진리란 힘든 것들 속에 있다Virtutem in difficilibus consistere"고 잘라 말했던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II,9). 이리하여 갓 시작한 우리 수도회는 즉시 많은 수의 형제들을 얻게 되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신 때문이기도 하고, 카르투시오회의 그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수도 규율도 지켜지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예언자와 함께 "우리를 돌이켜 세워 주십시오, 주님. 그리하면 우리가 (발길을 당신께로) 돌이키리이다. 우리의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해 주십시오 Converte / nos, Domine, et convertemur : innova dies nostros sicut a principio"라고 기도해야 하겠다. 이제 (지금까지 말했던 바는 그대로) 남겨두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nunc itaque hiis pretermissis ad sequentia veniamus.

 

형제 베르나르도 아빠스님. 수도회의 confirmation

15. 위에서 말한 바 있는 베르나르도 형제frater Bernardus 는 삼년 후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그는 매년 사임할 수 있기를 간청했지만 (매번) 되풀이하여 재임(명) 되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27년을 아빠스로 지냈다. 하느님의 호의로Deo favente 그는 수도회를 수도원들과 수도승들로 커지게 했다 (많은 수도원들과 수도승들로써 수도원을 성장시켰다) Hic monasteriis ; et mona[ch]is, Deo favente, ampliavit ordinem.

 

사실 그는 모든 면에서 지극히 경탄스럽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뿐 아니라 그는 (수도회의) 수도원들에 그의 모든 재산을 헌납했다. 그리고 수도회의인가를 얻기 위해 몸소 아비뇽에 갔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6세(재위 1342-1352)는 베네딕도회 수도승 출신으로 프랑스의 아비뇽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베르나르도가 실제로 아비뇽으로 갔을 개연성은 희박하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그러하다.. 당시 아비뇽에 거주하고 있던 교황 클레멘스6세는 그의 소청을 기꺼이 들어 허락하였고, 아레쪼의 주교 귀도 다 피에트라말라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모든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의 선량함으로ex sui clementia 동정순교자 성녀 아녜스 축일인 1월 21일 우리 수도회를 인준하고 확인해 주었다approbavit atque confirmavit. (따라서) 이날을 우리는 매우 큰 축일로 지내고 있다.

 

베르나르도는 그의 아빠스직 제 27년이 되던 해 귀천(歸天)하였다. 그의 사후, 더 뒤에서 다루게 될 모든 아빠스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 베르나르도의 죽음에 관해서는 더 뒤에(ChBa 28) 아빠스들의 연대기를 저술하면서 다른 소식을 더 전해 주고 있다.

 

다음은 ChBa 28의 본문이다 : "네번째 아빠스는 시에나 출신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였다. 총회가 별도로 소집되어서 매년 사임할 때마다 다시 선출될 수 있도록 정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아빠스로 선출되어서 27년간 재임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 첫번째 창설자가 된 수도회를 크게 성장시켰다. 그는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에자기 몫으로 돌아온 유산인 많은 재산을 증여하였다. 특히 그의 재임시에많은 수도원들을 얻었다(설립하였다). 시에나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 아레쪼의 성 베르나르도 수도원, 피렌체의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 캄프레나의 성 안나 수도원, 구비오의 성 도나또 수도원(먼 훗날 이 수도원을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구비오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과 맞바꾸었다), 폴리뇨의 성 니콜라 수도원(이곳은 주후 1432년 폐하였다), 볼테라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 산 지미냐노의 성 마리아 수도원,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폐한 다른 여러 수도원들이 (다 그의 임기 중에 얻은 것이다.)

 

그는 학문이 깊은 사람doctus vir이었다. 그는 아빠스 임기 중 주후1348년 큰 역병이 돌던 시절, 사망 수도승 명부가 말해 주듯, 82명의 우리 형제들이 죽을 때에 (같이) 귀천하였다. 그리고 (그 시신은) 시에나의 성 베네딕도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5세기의 수도승 규율 준수 : 단식

16. 지금까지 쓴 것을 (이상의 글을) 쓴 이유는, (이 글을) 읽는 이가 서원자라면 그로 하여금 (그분들이) 지키셨던 규칙의 적어도 어떤 부분은 본받고 있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아직 서원하지 않은 경우라면, 만일 그가 그분들이 누리고 계시는 영광에 도달하기를 기꺼워 한다면, 그로 하여금 세속에 등을 돌리고 그분들을 본받도록 노력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실 9월 13일부터 주님의 부활절까지 우리는, 주님의 성탄 축일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어김없이 매일 단식한다. 성탄 날은 그토록 큰 축제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아 (음식의) 극기가 전혀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어떤 visitator이나 혹은 총 아빠스가어떤 이의 필요나 기력회복을 위해 그에게 관면을 줄 때나 순례 중인 형제들이 도착했을 때는 단지 그들에게만 (관면이) 허용된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은 드물게 생긴다. 포도 수확 철에는, 단지 수확할 것이 있을 경우에만, 관례상 오늘날까지 관면을 준다. 이런 날들을 제외하고는, 원장이라 할지라도 총 아빠스나 visitator의 허락 없이는 관면을 줄 수 없다. (그런데 이 역시) 쉽게 생기는 일이 아니다. 부활절부터 성령강림절까지는 규칙이 명하는 바에 따라(RB 41,1) 단 하루도 단식하지 않는다. "신랑의 아들들은, 그들과 함께 신랑이 있는 동안에는단식할 수 없다"(마태 9,15 병행 참조)는 주님의 말씀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 강림절부터 거룩한 십자가 현양 축일 까지 형제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한다. 이는 여름철에더위가 지나칠 때가 아니면 결코 어기지 않는 규정이다(RB 41,2 참조).

 

대림절과 사순절, 그리고 교회가 정한 밤기도vigilia와 매주 금요일은 유제(乳劑) 식품도 계란도 먹지 않는다. 육식은, 극심한 병으로 인해 필요할 때가 아니면 결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병자도 병세가 호전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즉시 육식을 끊고 자기 공동체의 관례로 돌아간다(RB 36,9 참조).

 

의복

17. 옷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를, 보잘것없고 적은 (양의) 천을 사용하던 옛날의 사부님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로바꾸스들과 닮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가 봐도 명백히 그럴 필요가 있을 때가, 즉 병 중에 있을 때가 아니면 작은 수도복tunichinum을 걸치고 다니지 않는다nam tunichinum penitus, sine evidenti necessitate, videlicet infirmitatis, tenemus. 우리는 면이나 아마로 짠 윗도리를 걸치지 않고 맨 살 위에 바로 수도복만 걸친다.

 

ROCHER의 불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 밑에 작은 수도복을 걸치고 다닌다고 해서, 우리가 기로바꾸스와 비슷하다고는 생각하지않는다. 병으로 인해 명백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면이나 아마로 짠 윗도리를 걸치지 않고 단지 살가죽 위에 (바로) 수도복 한벌만 걸칠 따름이다." 우리 각자는 자기가 사용하기위해 세벌의 수도복을 쿠쿨라 한벌 및 스카풀라 한벌과 함께 지닌다. 각자에게 한켤레의 신발(샌들pedules)과 필요한 두건들이 주어진다. 사실 병이나 노쇄함으로, 혹은 명백한 이유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두가 주어지는일은 거의 없다.

 

규율 준수의 이모저모

18. 우리 각자는, 설혹 늙었거나 병약하다고 해도, 결코 (편한 데서 오는) 기쁨을 찾지 않는다deliciis omnino…non utitur. 목욕실의 사용은(을 위해서는) 필요한 경우에(RB 36,8 참조) 아빠스나 순시자들visitatores로부터 허락을 얻게 되어 있다. 수도승 각자는 자기 원장의 허락 없이는 먹거나 (포도주를) 마시지 못한다. 그리고 그 허락도 일년을 단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시간 얻어야 한다. 혹 누가 허락 없이 먹거나 마시면서이와 다르게 처신하면 그 사죄는 원장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이 경우 사죄의 권한은) 아빠스에게 유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 짐짓 음란한 마음으로아무리 작은 일에서라도 단정치 못한 처신을 하면qui autem contra honestatem, quid vel in minimo actu, impudico videlicet animo, 같은 벌을 받게 된다.

 

우리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규칙서의 규정에 따라(RB 8장-11장 참조) 밤기도 모임을 열심히 거행한다. 장상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아침기도 후에 자지 못한다(RB 8,3 참조). 이 때문에 어떤 아빠스는독방들의 문마다 구멍을 두개 뚫어서 – 어떤 수도원들에는, 구멍은 메워졌지만, 아직도 이 구멍들을 볼 수 있다 – 원로한 수사로 하여금 누가 자는지 아니면 깨어 있는지를 볼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순명

19. 따라서 세상의 염려 거리들로부터 등을 돌린 이들이 발한 서원들은 지금까지 우리 수도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더없이 잘 지켜지고있는 것이다Vota proinde, que profitentur hii, qui mundialibus curis dorsa vertentur, optime hucusque in nostro ordine, communiterque servantur. 모든 수도 생활의 힘과 기반이 되는 순명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매년 아빠스와 순시자들은 각자의 영혼의 구원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바에 따라 형제들을 한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원으로 옮기도록 하면서 공동체들을 새로이 형성한다omni quidem anno ab abbate et visitatoribus, fiunt de novo familie, mutantesque fratres de loco ad locum, ut melius noverint saluti anime singulorum convenire. 그들은 매년 각 공동체에 (형제들의 이동이 적힌 공문을) 보내고, (각 공동체는) 장상이나 수하 수도자를 막론하고 마치 복음에 순명하듯 이에 순명한다. 그리고 한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원으로 순명으로 옮기는 이들에게는 떠나는 수도원의 원장이 여행 중에 필요한 식비(경비)를pecunia, eorum victui necessaria, dum itinerantur 주었다.

 

가난

20. 우리는 복되신 사부들의 법에 따라 공동으로(공동 소유로) 살아가며 아무도 감히 무엇을 자기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사도 4,32 참조). 사실 순시자들은 적당한 때에 개인 소유에 관한 세심한 조사를 실시한다. 관습대로 그들이 정해준 사흘이라는 기한이 끝난 후, 장상들의 뜻에 어긋나게 누가 크든 작든 무엇을 소유하고(도) 자신의 허물을 자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그는 즉시 파문의 벌에 처해 진다. 그리고 순시자들은 방문한 수도원을 떠나기 전에 형제들의 독방들을 면밀히 검사하여 아무도 그처럼 크게 불경스런 죄 속에 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고 (지나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ceterum visitatores, de monasterio quod visitaverunt, antequam recedant, soliciter scrutantur cellas fratrum, ne aliquis in tam gravi, nefandoque delicto iaceat ignotus. 과연 옛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형제들은 절도있는 행실로써 규율을 준수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일

21. 하느님의 일Opus Dei의 낮과 밤에 걸친 의무는(낮과 밤의 성무일도는) 노래로나 낭송으로나 큰 정성으로 거행된다. 대부분의 수도원들에서 겨울 내내 아침기도는 노래로 바쳐진다. 특히 몬떼 올리베또의 경우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거의 모든 성무일도가 노래로 거행된다. 그들(몬떼 올리베또 수도승들) 중 어떤 이들은, 혹은 노래가 (너무) 길어서, 혹은 너무 길어지는 (기도의) 실행 자체로tum propter exercitium, quod nimis prolixe extenditur ROCHER의 불역은 "너무 힘을 쏟아서 기력이 쇠진한 나머지soit épuisés par une trop grande dépense de forces"라고 옮기고 있다., 혹은 단식과 철야로 말미암아, 노래하는 중이나 읽는 중에 (땅)바닥에 쓰러지기도 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시시한 이야기처럼 비쳐지지 않도록 우리는 만토바의 바르톨로메오 형제라는, 얼마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떠난 한 훌륭했던 인물의 실례를 공공연히 들고자 한다. 그는 사실 독서대 앞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노래하면서 바닥에 쓰러져 버린 바 있다. 무슨 병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 대로, 기진맥진 해서였던 것이다.

 

몬떼 올리베또의 수도회

22. (지난 한) 총회에서는 수도회 안에 한마음으로 살고 있는existentes unanimiter 친교의 영성에 대한 강조를 다시 한번 주목할 것. 형제들의 수가 사백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옛날 다윗이 제 백성의 수를 알고(세고) 난 후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그에게 "내가 너에게 세가지를 내보일 테니 너는 그 가운데서 하나를 골라라…"(2 사무 24,12)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큰 역병이 창궐했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그 비슷하게되었다. 정녕 한때 많은 수의 형제들이 있었음을 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많은 숫자에 더 이상의 형제들을 보태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수를) 줄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희망과 기쁨을 형제들의 많은 숫자에가아니라 하느님과 덕행들에 두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리하여 거의 온 이탈리아를 휩쓴 현재의 이 역병으로 말미암아 대략 오십명의 형제들이 죽었다.

 

수도회의 제도

23. 한편 우리 수도회의 제도는 늘 (변함없이) 일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uniforme. 사실 어른들(선배 수도승들)에게 더 낫다고 여겨지는 대로 시기에 따라 자주 임시적으로 변경되었다nam crebro mutatum est pro tempore, ut melius maioribus visum fuit. 수도원들과 형제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들의 원의들도 (그 수가) 늘어갔(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애초에in principio 불역 : "수도회의 우두머리로" 단지 일년 임기의 아빠스를 세웠다. 뒤이어 아빠스로위에서 말한 베르나르도 형제를 세웠다. 그는 매년 사의를 표명했지만 (그때마다 그에게 형제들은) 새로이 이 최고 아빠스의 직무를ad eiusdem abbatiatus apicem 떠맡게 했다. 한때는 아빠스를네명의 장로들이 선출했는데, 이들은 아빠스의 협조자들socii abbatis이라 불렸다. 그리고 다른 네명의 형제들이 있어서 이들을 순시자visitatores들이라 불렀다. 이들은 온 수도회를 방문하고 다니며 아빠스에게 받은 큰 권한을 행사하였다. 그 후 로마 시에서, 훌륭하게 기억되고 있는 교황 마르티노(5세)가 형제들에게 조언하여, 순시자들의 수를 여섯으로 늘려 이태 동안 임무를 맡게 하며, 임무가 끝나면 적어도 뒤이은 이태 동안은 재임하지 않게 정하도록 해 주었다(Papa) concessit amonuitque fratres, ut fierent sex visitatores, qui durarent duobus annis, et absoluti, aliis ambobus annis, vacarent ad minus.

 

옛날에는 총회를 매년 개최하였다. 그래서 우리 수도원들의 모든 원장들은 발언권을 지닌 자기 공동체의 두 사람과 함께 이 총회에 참석하러 갔다. 이 규정은 대략 백년 동안 깨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총회를 이태 만에 한번씩 개최하도록 하고, 또 이를 위한 (참석자의 수도) 수도회의 모든 장상들과 발언권을 지닌 (해당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줄였으며), 아빠스의 임기는 사년으로 (늘였다). 그리고 (아빠스) 임기가 끝나면, 적어도 팔년이 지난 후라야 같은 직무에 재선될 수 있도록 하였다. 아빠스가 수도회의 으뜸으로서 중심적 역할을 맡음과, 그의 권한으로부터 순시자들의 권한이 유래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것. 사실 최초의 올리베따노 법 규정은 아빠스를 수족의 일치를 보장하는기반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RB가 수도원 안에서의 아빠스가 가진다고가르치는 동일한 권위와 권한을 전 수족에 행사하는 것이다. (Cf. Intr.ChF 54; Intr.AdC 103) 그러나 후대의 올리베따노 법 규정은 이 권한을 약간 축소시켰다. 1350/60년의 회헌에는 아빠스의 "협조자들socii"이 조언자의 역할만을 맡았을 뿐이었음에 반해(48장), 1430년 이후에는 아빠스가 이들의 견해를 듣고 동의를 구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첫째 수족이 수도원과 수도승의 수의 증가와 함께 날로 커갔다는 것에서, 둘째 이미 15세기부터 아빠스직의 남용과 어려움이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사실(ChBa 50참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결론

24. 위에서 우리 사부들이(선배 수도승들이) 자주 우리 수도회의 예식들ceremonias과 제도를 바꾸었노라고 말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그들이 경솔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사실 그들이 선대 사부들의 제도들을 가끔씩 변경했던 것은 피치 못할 필요에 따라서였을 뿐이었다. 로마 교회 역시, 그리고 여러 민족들도 자주 그들의 법과 제도를 바꾸었다. 한편으로 우리 사부들은 규율 준수의 규정에는 결코 예외를 두지 않았다porro patres nostri regularis observantie normam dispensarunt numquam.. 사실 교황이나 교황이 허락한 이들에게가 아니면 – 이 경우에도 단지 꼭 그럴 필요가 있을 때에만 한정되거니와 – 아무도 성인들이 정해 놓은 법들을 관면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 젤라시오도 "꼭 그럴 필요가 없다면, 거룩한 교부들의 법규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바뀌어서는 안된다ubi necessitas non est, inconvertibilia maneant sanctorum patrum decreta" GELASIUS, ep. IX ad episcopos Lucaniae, titulus decreti 2 : "Ut ubi nulla perurget necessitas, constituta patrum inviolata servantur." PL 59, 1005B; ep. 119, 1043A. 했고, 교황 레오도 "꼭 그럴 필요가 없다면, 거룩한 교부들이 제정한 바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어겨서는 안된다ubi necessitas non est,nullo modo violentur sanctorum patrum constituta"고 하면서 덧붙이기를, "그러나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필요할 때라면, 그럴 권한을 가진 이는 관면을 줄 것이다ubi ergo necessitas fuerit ad utilitatem Ecclesie, qui potestatem habet, ea dispenset"라 했다. LEO, PL 54, ep. XII, 651.663A; ep. XXII, 728; ep. XXVI, 743B; ep. CVI 1005B; ep. CXIX, 1043A.

 

복되신 성 베르나르도가 말하듯, 법의 변경은 필요에서 생기는 것이다. Cf. S. Bernardus, De precepto et dispensatione, 5. 여기서 보듯이 정녕 그래야만할 필요가 없을 때는 고위 성직자들조차 관면을 줄 수 없는 것이다nisi maxima necessitas aderit. 그리고 주님의 계명들은 그 어떠한 인간적 관면도 허락하지 않는다. 지극히 복되신 성 베르나르도께서 말씀하시듯, 오직 하느님만 원하실 때에 원하시는 이들에게(저러한 계명들로부터) 관면을 베푸실 수 있다Deus tantum …horum quod voluit, quando voluit, solvit. Cf. 출애 33,19 거룩한 교부들의 규정들이 때로 어쩔 수 없이 수정되거나 관면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뛰어난 박사 예로니모가 에우스토키오에게 보낸 규칙(편지)의 말미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 "미구에 수많은 결점을 지니게 되지도 않고, 그래서 어느날인가는 교정할 필요도 없을 만큼 완전히 거룩하고옳고 선견지명이 있는 규정이란 아무것도없다. 그러기에 사도적 삶과 수도 생활을 위한 이 작은 규칙에서 몇가지 점이 관면이나 수정, 혹 변경을 필요로 한다면 나는 이를 (으뜸으로 임명되고) 거룩한 사제인 우리 주교에게 일임하는 바이다. 그가 성령의 충만함에 따라서 관면하고 변경하며수정할 것이다Nulla enim tam sancta, tam iusta et diu provisa est constitutio, que in futurum plurimos non patiatur defectus, que aliquando correctione non egeat. Propterea si quid in hac normula apostolice vite et religionis, dispensatione, correctione, vel mutatione indiget, episcopo nostro, preposito viro presbitero sancto comitto, ut secundum plenitudinem Spiritus Sancti dispenset, mutet et corrigat." PL 30, 425-426 (이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는 성부와 성자를 섬길 수 있으니, 성자께서는 같은 성령의 일치 안에서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성베르나르도 똘로메이/몬테 올리베또 연합회 영성

올리베따노 2013. 2. 19. 15:23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와 몬떼 올리베또 연합회의 영성

 

머리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쓰는 일보다 더 까다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그 사람이나 사물을 자기만큼이나 혹은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더 부담스런 일이다.

 

이것이 바로, 주로 연합회의 젊은 수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몬떼 올리베또 수도회 창설자들의
카리스마에 대해 쓴 이 글이 져야 할 부담이다. 독자들이 이 글에서 기대하는 바는 제각각 다를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와 초기 스승들이 물려준 우리 수도회의 신원을 생각함에 있어서,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정한 면모들이 사람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바도 없는 역사 재구성 작업의 가치에 단순히 찬성하는 그런 태도로 역사를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이것은 어떤 부르심에 응답하는 태도요, 오늘날의 우리

수도생활을 힘있게 조형하는 우리 수도회의 은사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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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작업이 어렵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앞에 놓인 위험들을 무시하지 말고, 다만
시작부터 믿을만한 방책을 택하여 그 어려움이 오히려 도약의 기회가 되도록 맞서는 것이 좋겠다.

무엇보다도 최근 10여 년간 놀랍게 증가하고 있는 같은 주제의 연구들을 반복하거나 요약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 이론적인 작업이 되는 것 역시 피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관점으로 우리 수족의 기원을 대하는 것이 바람직할 터인데, 지금까지
해온 연구가 더 이상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알려지지 않은 방법들이 때로 우리가 이미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던 것들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안토니오 다 바르가의 연대기나 당가 신부가 쓴 연대기를 뒤로 하고, 14세기 자료들만
다루기로 하였다. 앞의 두 문헌이 담고 있는 역사적인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15세기 수도승들의 해석에 기초하여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첫 번 째 시도에 포함된다.
그들의 분석은 올리베또 수도승 전통의 역사를 다룬 이 총서의 두 번째 부분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베르나르도 똘로메이가 쓴 편지 조각들과 1350-60년대의 회헌들을
포함하여 14세기 문헌들이 가장 중요한 자료로 사용된다. 이 문헌들의 라틴어 원문을 세밀히
다시 읽으면서 그 가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대 문헌을 번역하는 것은 하나의 해석이다.
하지만 라틴어가 갖는 풍부한 의미를 직접 마주할 때, 세월의흐름과 문화적 차이로 오랫동안
가로막혀 있던 새롭고 예상치 못한 견해가 때때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뒤에 번역을 덧붙이지만 사부들의 글을 라틴어 원문 그대로 인용하기로 한 우리의 결정에
대해서는 라틴어를 잘 모르는 분들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라틴어로는 표현되지만 그것을 문자
그대로 번역할 때 옮기기 어려운 감추어진 의미들이나 모호한 표현들을 살리기 위한 결정이었다.

 

이 책은 모든 것을 다 다루지 않을 것이다. 베르나르도의 편지 중 아직 상당히 많은 것들이 더
상세한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 14세기 당시 연합회의 제도적인 모습들을 보다 면밀히
연구하는 것은 아빠스와 총회 양쪽으로 나누어진 권위의 관계를 더 분명히 규명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는 이런 문제들을 깊이 다루기에 바람직한 자리는 아니다. 그보다는 한 인물이나
태도, 혹은 그 중요성이 오래동안 사라지지 않고 전해지는 제도적 결정들을 선별하여 앞으로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이런 접근 방식은 주관적인 해석을 피하기 어려운데 이것은 처음부터 수용되었고 인식된 것이다.
읽는 이들에게 어떤 정보를 제공하기 보다는 영감과 놀라움을 주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우리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흥미를 갖게 된 독자들이 이 책 뒤에 있는 참고목록의 더
자세한 연구들에 관심을 갖게 되길 바란다.

 

14세기 문헌들을 다루는 이 작업은 우선 우리 수족을 창설한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와 그의
동료들의 ‘카리스마’에 대한 연구이다. 그런데 이 단어나 접근 방식은 모두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창설자의 카리스마’란 보통 다른 수도회와 구별되는 한 수도회의 독특한 특성을
의히한다. 그렇기에 문헌을 분석하면서 가장 본질적인 어떤 것을 찾으려고 상당히 노력하게
마련이다. 이런 수고는 대개 만족할만한 결과를 내기 어렵지만, 창설자들이 수도승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수도승은 베네딕도로부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바실리오와 안토니오, 결국
사도행전과 복음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전통의 흐름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로, 먼저 우리 신원에 관한 물음이 우리 사부들을 향한 옳은 것인지를 묻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분들이 자신들의 신원을 어떻게 정의하고 또 어떻게 응답하였는지 질문하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카리스마’ 대신 ‘영성’이나 ‘은사’라는 단어에 더 많이 친근감을
보여온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 단어는 베르나르도 자신과 초기 수도자들에게 사용되었는데,
그분들은 보통스럽지 않은 뭔가 독창적인 것을 말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하느님 체험의 중심에 있었던 것에 대해 단순하게 말하며, 오로지복음 말씀을 되풀이하였고
이렇게 함으로써 잘못 정의된 신원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확고히 복음에 기반을 두었음을
증명하였다.

 

친교를 강조하는 책은 그 자체로 친교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 원의는
미켈란젤로 총아빠스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분의 부드러우면서 확고한 뜻에서 이 연구는
시작되었고 또 마무리될 수 있었다. 우리가 이 도전을 받아들여 완성하게 만든 것은 순전히
그분의 후원이었다. 더불어 초고를 읽고 관찰과 비평으로 원문을 더 풍요롭게 해준 모든 형제들,
특히 믿음과 격려로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 피카소 조르죠 신부, 프랑수와 아빠스, 쟈코모
페라리 신부, 로베르토 나르딘 신부, 이 요나 신부, 베르나르도 부쇼 수사, 베르나르도 쟌니
수사에게 감사한다.

 

이 글은 무엇보다도 젊은 수도자들을 위해 쓰여졌기 때문에 최소한 그들 중
한 사람의 견해가 필요했다. 마일리스 공동체에서 실험 대상이 되는 것에 익숙한 올리베또
제라르딩 수사가 고맙게도 사랑과 재치로 그 부분을 맡아 주었다.

 

우리 연합회 가족들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로 번역하진 못했어도 이 책을 세 언어로 출판하는

것은 역시 친교의 열망을 표현하고자 함이다. 한국어와 스페인어, 포루투갈어로도 번역 작업이
하루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태리어 번역은 피렌체의 성 미니아또 수도원의 그레고리오
바를렛다 신부의 인내롭고 관대한 작업으로 완성되었고, 영어판은 크리스토퍼 아스프레이,
토마스 콘놀리, 필립 맥코스커 그리고 바울리네 마타라쪼의 충실한 우정의 표시이다. 프랑스어로
쓰여진 원본의 교정은 마일리스의 봉헌자 앤 마리 코르딘이 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우리 수족의 첫 세기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과 그 연도를 보도록 하자.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접하게 될 사건과 인물들이 역사 안에 어느 자리에 있는지 이해하게 할
것이다.

 

 

 

 

길잡이

* 베르나르도 똘로메이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성 보나벤뚜라가 선종하기 2년 전, 단테
알리기에리(1265년 출생)가 태어난 지 7년 지난 1272년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빠뜨리찌오 빠뜨리찌, 암브로시오 삐꼴로미니는 1313년 도시로부터 약
25Km 떨어진 베르나르도의 소유의 시골 집(키유수레의 작은 마을 근처에 있는 아코나라고
불리는 곳)에 은둔하기 위해서 시에나를 떠났다. 이때는 교황이 아비뇽으로 유배를 간 후 4년째
되던 해로, 유배는 1378년까지 계속되며, 단테는 1316년경에 신곡을 쓴다.

* 교황청으로부터 탄핵을 받고 있던 영성주의 그룹들, 특히 토스카나의 형제들과는 대조적으로
베르나르도와 그 동료들은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을 창설한다. 이들은 1319년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과 흰옷을 채택하고 이를 위해서 교구 주교의 허락을 얻는다.

* 1322년부터 몬떼 올리베또 수도원은 다른 수도원들을 설립하기 시작하는데, 이미 10개의
수도원을 가지고 있던 1344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몬떼 올리베또 베네딕도 연합회의 인가를
받는다. 베르나르도는 1322년부터 1348년까지 아빠스직을 수행했는데, 몬떼 올리베또에서
해마다 열리는 총회에서 재선되었다. 이 총회에는 모든 수족의 원장과 수도자 대표들이 참석했다.

* 1348년, 베르나르도와 80명의 동료 수사들은 1347년부터 전 유럽을 뒤덮은 흑사병의
희생물이 된다. 1347년은 우리 수족과 아주 가깝게 지낸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1347-1380)가
탄생한 해이기도 하다.

* 같은 해인 1348년, 베르나르도의 뒤를 이어 프란체스키노 귀두치가 몬떼 올리베또의 아빠스로
선출되는데, 그는 형제들과 함께 ‘1350/60년의 회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회헌의 초안 작업을
시작한다.



 이탈리아 시에나의 아꼬나 황무지위에 세워진 몬테올리베또 대수도원

 

 

14세기 원문에 기초한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와 몬떼 올리베또 수족의 영성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역사는 거룩한 역사이며 모든 거룩한 역사는 한 사람의 부르심에서
시작한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즐겨 소개 하신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해서는 부르심 받은 사람들의 삶 안에 현존하시고 개입하시는 그분을
만나야만 한다. 주님은 그 사람들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인류 전체를 축복하셨다.

이 책의 목적은 단순히 사건들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안에서 ‘거룩한 역사’를 찾아내면서
올리베또 수족의 뿌리를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일상적 방법에 마음을
열고 우리 수도 가족 위에 하느님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 도구로 쓴 사람을 주시해야 한다. 바로
복자 베르나르도 똘로메이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의 자서전을 쓰기 위한 자료는 너무 부족하다. 그러나 오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발자국을 찾는 ‘거룩한 역사’의 식별을 위해서는 이 적은 자료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아브라함이나 마리아, 예수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은 실제로 아주 적지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베르나르도를 알기 위해 우리에게 자료가 되는 것은 그분이 쓴 서간들이다. 몬떼 올리베또의
아빠스로 있었던 1322년과 1348년 사이에 쓴 약 50여 통의 편지가 남아있다. 그 편지들은
거의 모두 주변에서 일어난 특별한 상황들을 서술했는데 행동하는 아빠스를 보여준다.

 

 

 

                                           창설자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겸손한 아빠스

베르나르도의 서간문에서 두드러지는 그의 특징 중 하나는 겸손이다. 그가 쓴 두 번째 서간은 첫
증거가 된다. 베드로라는 사람에게 쓴 이 편지는 ‘겸손에 대한 권고’(propositum humilitatis)를
주고 있다. 자기 자신과 자기가 소유하는 것, 또 자기의 뜻에 대한 포기로 묘사되어 있는 이
권고는 곧 바로 베네딕도 규칙서를 상기시킨다. 네가 갖고 있는 것, 즉 네 자신과 네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그분께 드려라. 그리고그분의 거룩한 뜻에 합당하게 네 자신과 모든 것을
준비하여라(quod est tibi da, te et omnia, ut te et omnia disponas secundum eius santissimam
voluntatem).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겸손에 대한 권고’를 목적이 아닌 하나의 도구로 소개한다. 이 편지에서
그가 찾는 것은 성령께 의탁하는 태도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의 온순함이다. 이 편지에서 그는
이사야서 66장을 탁월하게 인용하는데, 겸손은 성령께 승복하도록 자신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령께서는 누구에게 머무시는가? 그분은 겸손한 사람, 곧 ‘고요함 quies'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 위에 머무신다(Humili e
quieto et trementi sermones suos). 수도승의 고요함(quies)과 평화와 관련된 비슷한 글은 많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겸손에 대한 권고’를 주면서도 “제 말이 당신들에게 유익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나의 simplicitas와 나의 stultitia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
단어들은 ‘단순함’과 ‘어리석음’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렇듯 베르나르도는 솔직하다. 그는 영적인
주제의 글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데는 한계를 느꼈다. 그의 강점은 오히려 법적인 문서, 즉
재단의 문서들, 교황과 주교들에 대한 탄원서들, 관습법(ordinamenta) 등에서 나타난다.

 

 베르나르도가 그의 편지에서 자주 인용한 이 관습법은, 그의 선종 후 몬떼 올리베또의
회칙을 만드는데 함께 사용된다. 몬떼 올리베또 수족의 생활과 관련된 초기 문헌들은 모두 이런
법적 문서들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닌 영성적인 글이나 서간들은 다음 세기에 나온다.
베르나르도의 것으로 생각되는 강론의 단편이나 우리들에게 전해진 그의 편지들을 읽을 때,
우리는 그가 단지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영적 세련됨은 베르나르도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가 아니라 베네딕도 성인에 가깝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그의 여덟 번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베르나르도는 “관상은 모든 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한편 “겸손과
순종에 자기 자신을 헌신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한다. 그는 평범한 언어로 심오한
말을 한다. “겸손이 결여된 덕은 바람에 던져진 먼지와 같다!”(qui ceteras virtutes sine humilitate
congregat, quasi pulverem in ventum iactat).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겸손과 같은 문제를 언급한
것을 사죄하고, 자기 영혼의 빈곤함을(mendicitas spiritua) 한탄하며, 자신은 영적인 아버지가
되기보다 오히려 조언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겸허한 태도 없이 겸손이라는 이 작은
진주가 베르나르도의 글에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베르나르도의 표현이 너무 과장된 것일까? 인위적인 미사여구 또는 칭찬을 받기 위한
태도(captatio benevolentiae)에 불과할까? 그의 일곱 째 편지를 읽고 평가하기를 바란다.

일곱 번째 편지는 매우 의미있는 일화를 우리에게 자세히 전한다. 베르나르도는 당시 자신이

태어난 도시, 시에나를 방문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베르나르도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그는 대단히
부유한 시에나의 귀족, 사막으로 은둔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다. 그는 자신처럼
부유하고 귀족 출신인 친구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하는데 성공하여 함께 가난하고 단순하게 살며
금욕과 기도에 전념한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놀라운 성덕으로 명성을 얻었고, 이 명성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그에게 몰려왔다. 그래서 절대적인 힘을 지닌 이단으로 의심을 받기도 하지만
결국 주교들과 교황의 열렬한 승인을 얻는다.

 

어느 날, 새로운 수도승 가족의 창시자이며 아빠스인 베르나르도가 자신의 명성이 정점에 달한
시기에 시에나로 향한다. 그가 이 편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는 시에나에서 흰 수도복을 입고 어김없이 형제 수도승을 동반하고 있을 베르나르도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방문이 시에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고 있다. 어느
누가 도시의 좁은 길을 가로지르는 이 작은 순백의 파견자를 주목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기도를 청하기 위해서 앞을 다투어 나왔을 것이다. 시에나의 귀족들은 베르나르도
똘로메이를 알아보고 경의를 표하며 인사를 하고, 그의 강복을 빌며 잠시 그들의 성에 머물기를
청한다.

 

베르나르도는 무엇을 하는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무엇을 찾고 있는가? 이것을 어렵게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베르나르도 자신이 명확하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나에
도착하여 나는 지난날 내가 생각없이 누렸던 것들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맛있는 꿀처럼,
그것들을 포옹하고, 듣고, 맛보고 싶은 욕망으로 불탔습니다”. 그가 시에나에서 찾았던 것,
그로인해 이 편지의 주 내용이 된 죄책감을 일으킨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과거의 것들! 다시
말해서 선망과 존경, 경탄에가득 찬 다른 이들의 시선, 특히 한때 동료들이었던 귀족들로부터
인정이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시에나로 되돌아 온 베르나르도는 자신을 그 어떤 때보다 더
강하게 똘로메이 가문의 한 사람으로, 시에나 사람으로, 귀족으로, 부자로, 게다가 더 높은
이상을 위해 그것들을 포기했기에 더 커진 명성과 재산을 가진 자로 의식하였다. 베르나르도는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과 자신에게 돌아올 명성을 너무나 잘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베나르도는 겸손한 사람이다. 그가 이렇게 동요하고 있었음을 누가 알아차렸겠는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의 마음 안에서 일어났다. 베르나르도는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용서받지 않았을까? 의심할 여지없이
사막의 교부들이 두려워하던 사탄의 악습들, 즉 자만과 허영심처럼 위험하고 방심할 수 없는

악습들을 쳐부수기에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르나르도는 영적 스승에게 편지를
쓴다. 그의 스승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으로 베르나르도 안에서 자녀다운 영성이 성장하도록
자애롭게 돌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이번만큼은 그에게 채찍을 들어 달라고
호소한다. 그는 자비가 정의를 가로막지 않는다는 것을 예리하게 알았다. “제게 회초리를
드십시오!(Utamini baculo!) 나를 감쌀 구실을 찾지 마십시오! 그것은오히려 내 죄를 더 즐기게
할뿐입니다.

 

그의 말에서 우리가 흔히 영적 지도자들을 향해 느끼는 성급함을 볼 수 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보속을 하러 가면 지도자는 우리를 평범한 규칙으로 되돌려 보낸다.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한
참회로 충만해서 가면 그는 우리에게 용서, 인내, 온순, 자기승복을 말하면서 돌려보낼 것이다.
여기가 바로 겸손이 사라지는 곳이요, 동시에 겸손이 승리하는 자리이다. 베르나르도는 이것을
잘 알았고 그의 여덟 번째 편지에서 증명한다. “겸손을 얻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너의 생각과
원의를 버리고 다른 이들에게 의지하라.” 일곱 번째 편지에서 베르나르도 자신이 말한 것의 한
예를 보여준다: “아버지, 당신께서 직접 징벌을 내려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오십시오. 오셔서연민으로 가득 찬 당신의 손으로 행해 주십시오(per se faciat pia manus)". 엄격함, 정의,
처벌을 거듭 간청한 후에, 베르나르도는 겸손의 온순함을 되찾고 그의 영적 스승이
베르나르도에게 줄 유일한 처방, 즉 연민으로 가득한 손(pia manus)에 미리 자신을 맡긴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다. 그가 자신에 관한 명예롭지 못한 증거를 남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는 자신 주위에 성스러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성인 행세를 하지 않았다. 미래에 있을 그의 성인품을 위해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

1347년 5월 4일,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기록에서, 몬떼 올리베또의 수도승들은
베르나르도의 거룩함을 인정하여(propter eius sanctitatem) 그를 완전히 신뢰한다고 장엄하게
선포한다. 그들이 머리 숙인 베르나르도의 ‘거룩함’은 새로운 공동체의 창설자들에게서 흔히
드러나는 이상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베르나르도의 거룩함은 죄인의 거룩함이다. 전에는
죄인이었으나 참회하여 이제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의 거룩함이 아니다.
오히려 아빠스였을 때에나,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있을 때에나, 명성이 최고에 달했을 때에도
역시 죄인인 사람의 거룩함이다. 베르나르도의 거룩함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지하는 겸손한 사람의 거룩함이다.

 

이것이 그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단순함(simplicitas)과 가난함(mendicitas)으로, 그의
면면이 보여주는 솔직한 가르침의 핵심에 접근하게 하는 요소이다. 첫 번째 편지에서


베르나르도는 스스로 말한다: 나는 어떤 영웅적인 덕행보다 자신의 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miror humillimam peccatorum confessionem quam tot gesta virtutum).
베르나르도는 “성인들의 모든 가르침은 겸손의 가치를 말하는 메아리이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해서 겸손을 가르치고, 우리를 겸손으로 되돌아오도록 설득한다(omnis doctrina sanctorum
hoc sonat, hoc docet, ad hoc omnibus persuasionibus vocat)”로 요약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겸손에서 모든 선이 솟아 나오고, 겸손을 거슬러 모든 악이 나온다. 자신의 죄를 겸손하게
인정함은 모든 영적 풍요함이 솟아나는 생명수의 원천과도 같다. 같은 편지에서 베르나르도는
“겸손은 어머니”라고 말한다. 겸손의 힘으로 우리는 가난한 삶을 사랑하며 성장할 수 있다.
겸손이 없다면 가난한 삶을 경멸하게 된다. 계속해서 베르나르도는 겸손은 모든 것을 온유와
자녀다운 진실한 순명으로 견뎌낼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겸손은구약에서 할례의 표시처럼 우리
마음과 입과 모든 행위들을 성화시키고, 그것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도록 만든다. 또 그는
말한다: 겸손은 자신을 기만하지 않게 하여 다투거나 자신을 방어하거나 또는 변명의 구실을
찾는데서 더 이상 기쁨을 느낄 수 없게 만든다. 어떻게 겸손은 그렇게 풍부하고 힘이 있는가?
어떻게 겸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그렇게 큰 영향력은 미칠 수 있는가? 겸손은 사랑의
표현이다. 겸손의 어머니는 애덕이다.(mater est caritas). 겸손은 하느님께서 주신 순순한
선물이다. 오직 교회의 정배이신 그리스도만이 겸손을 나눠줄 수 있다. 겸손을 찾고 지키기
위해서는 부드럽기만 한 기도가 아니라 강력한 기도가 필요하다.(inventrix et conservatrix oratio,
non solum dulcis, sed violenta). 베르나르도에게 겸손은 결코 이겨본 적이 없는 하나의 투쟁이다.
중요한 것은 이 전쟁터가 주로 자녀다우면서도 한편 대범한 기도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베르나르도와 그의 동료들이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교회에 의해 성 베네딕도 규칙을
채택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몬떼 올리베또 수도회 설립문을 보면 베네딕도 규칙은 수도승들
자신의 선택이고, 주교는 단지 그것을 승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서상의
증거 외에도, 겸손과순명에 관한 장을 베네딕도 규칙의 중심으로 볼 때, 베르나르도가 수행의
참고서로서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지혜의 샘으로 이 규칙서를 중시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겸손에 대한 베르나르도의 사랑은 주목할만한 그 밖의 다른 자취들도 남긴다. 베르나르도는
겸손과 관련된 징표들을 찾게되면 조심스럽게 그것에 빛을 비추었다. 자녀들을 비극적으로 잃은
사람에게 쓴 그의 열 번째 편지에서, 믿음과겸손의 참된 가치는(virtus fidei et humilitatis
discernitur)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는 바로 그 행위 안에서 확실히 드러난다고 말한다.


특별히 베르나르도의 마음을 움직인 성서의 두 인물을 보자.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박해를
받았던 다윗의 순종과 거름더미 위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욥이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렸으며, 온유하면서도 굴하지 않는 끈기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신뢰하였다.
베르나르도는 그의 네 번째와 열 번째 편지에서처럼,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즐겨 그들에
관해 이야기 한다. 그는 세 번째 편지에서, 고통 중에서나 시련 중에서나 그분에게 한결같이
감사드릴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서 견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련은 분노한 하느님,
차가운 신적 정의가 아니라 감미롭고 부드러운(dulcissimus Christus)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시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고, 교육시키고, 성장시키는 도구이다. 시련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시련 뒤에 항상 평화의 안식이 있다(Semper autem parat diligentibus se post
adversitatem tranquillum): 겸손의 가치는 사랑의 가치에 달려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diligentes)
시련의 시간을 견디는 인내 중에 보다 깊은 평화(tranquillitas)가 솟아난다는 것을 안다(넷째
편지).

겸손은 개인의 영성생활과 한 공동체의 일상 생활 뿐만 아니라, 설립 이후 몬떼 올리베또
수도회의 놀라운 성장을 관리하는 방법에도 포함되었다. 그는 첫째 편지에서 모든 다툼을 피하는
것(litis depositio)이 겸손의 결실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중상과 불화의 원인이 되었던 한
수도원(un locus)과의 연합을 그가 포기한(45번째 편지) 이유를 이해하게 한다. “형제들과 나는
불화의 대상으로 드러난 이 수도원과의 연합을 지금 완전히 포기할 것을 원합니다(Fratres et ego
volunmus unioni lici, pro quo causamur, ad presens renuntiare in totum).” 편지의 문체는 겸손한
티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보란 듯이 과시하며 물러서는 것도 아니요, 오만한 자세로 무시하면서
도덕적인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기지 않은 자의 승리이다. 베르나르도는
그와 그의 형제들이 해야 할 숙제를 안다. “만일 누군가가 너의 겉옷을 갖기 원한다면, 네
망토까지 주어라!(Auferenti tibi tunicam, da sibi et pallium)” 이 엄격한 계명 뒤에 그는 이어서
말한다. “우리는 복음적 완전함의 스승들이 아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이 겸손의 길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겸손이다. ‘온화하면서도 강력한’ 기도(non solum dulcis, sed
violenta)의 결실 이다.

 

대담한 아빠스

베르나르도의 겸손은 자연스럽기 때문에 순수하다. 진정 겸손한 사람은 상투적인 것을 따를
필요가 없다.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겸손한 사람은 진리 안에 사는
사람이다. 그는 지적인 것을 넘어서는 내면의 인식, 평화와기쁨이 우러나는 통찰로, 그가 가진


모든 것과 그 자신의 모든 것이 매 순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음을 알기 때문에 아무 것도 자신에게 속하게 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너무나 분명히 알았기에 자신을 증명하려는 유혹에서 철저히 자유로웠던 베르나르도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에 정당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고린토인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한 바오로 성인의 겸손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가끔은 베르나르도의 글에서 이런 진정한 자부심의 기상이 밖으로 퍼져 나온다. 한 젊은이에게
쓴 스물네 번째 편지에서 “사랑하는 이여, 우리 명성의 메아리가 너에게까지
이르렀구나”(Adudivisti, carissime, famam nostram)라고 말하며 그는 몬떼 올리베또 수도승
가족의명성을 의식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다섯 번째 편지에서는, 그는 ‘수도회가 바다에서
바다에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확장되는’ 꿈을 꾸었음을 말한다. 스무 번째 편지에서, “우리뿐만
아니라, 전체 우리 수도회가 당신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nos vero, quot et quanti sumus
ordinis nostri,vestri sumus obnixe)라고 쓴 베르나르도는 그 편지를 받을 사람이 감동할 것을
알았다. 이것은 그의 수도회가 대수롭지 않은 수도회가 아님을 알게 하는 말이다.

그의 어조는 가끔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중의 의미를 지닌 문장에서
(36번째 편지), 똘로메이 가문이 누리던 힘과 열정을 다시 드러낸다. “우리수도회가 공격 받을
때, 제가 우리에게 필요한 보호를 청할 수 없을 만큼 친구와 친척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귀하께서는 확실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어투는 좀 뜻밖이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올리베타노 수도승 가족의 작은 새순이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되었을 당시는 수도원의
자립을 보존하고 주님으로부터 받는 은사를 보호하기 위해 투쟁이 필요한 시대였다. 독선적인
지역 영주들이나 그리스도의 양떼를 지키는 목자로서의 의무보다는 세속화되어 재산에나 신경
쓰는 주교들의 권력에 모든 것이 달려있었다. 세속적인 권력과 교회의 권력이 서로 결탁된
시대에, 수도원은 수입의 원천이자, 정치적영향력의 본거지였으며, 무엇보다도 싼 값으로
믿을만한 시민 장교들을 건져올 수 있는 어장이었다.

 

베르나르도는 두 통의 편지에서 회계를 담당할 수도승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아테네의 공작, 피렌체의 영주, 괄띠에로 왕자로부터 온 것이었다. 베르나르도의
거절은 그와 그의 형제들이 영주들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이런 종류의 압박에서 견뎌낼 수 있도록
계속해온 노력에 확실히 역행한 것이었다. 이것은 영주들의 통치 하에 있는 도시에 설립된 수족
수도원들의 평화와 생존이 걸린 일이었다. 베르나르도 편지의 대부분은 도움을 구하거나 이미
받은 도움에 대한 감사였다. 만일, 그런 주교나 아비뇽에 있던 교황, 혹은 이탈리아 주재


교황대사관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의 호의와 지지를 얻지 못했다면, 그 시대 베네딕도 수도생활의
일반적 쇠퇴를 가져왔던 위험한 문제들로부터 도망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위의
편지를 볼 때, 몬떼 올리베또의 잘 알려진 성공적인 창립이 얼마만큼이나 똘로메이, 삐꼴로미니,
빠뜨리찌 세 명의 창설자들의 가문의 이름 덕분인지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