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노세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 이요 달도차면 기우나니

부소산성

댓글 2

충청도여행

2012. 9. 29.

부소산성

 


 

 

 

 2012년 9월 24일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고 배고프면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아무 소용 없잔아요,

부소산성(흔히 낙화암이라고 부르는곳) 앞 관광안내센타 앞에 주차후 길건너 음식점에 왔습니다.

서양분들이 십여명 식사하시고 계셨는데 입맛에 맞을련지...우렁연잎밥(1인당 10000원)을 시켰더니

 보시는 것과 같이 한상 나왔습니다. 우렁밑에 쌈장하고 버무려서 야체하고 쌈싸먹는 방법입니다.

 

 

 

▼식사후 부소산성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성내에는 사자루, 영일루(迎日樓), 반월루(半月樓), 고란사(皐蘭寺), 낙화암(落花巖), 사방의 문지(門址),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사비성, 소부리성(所扶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약 1.2km에 위치한 낙화암으로 가본다.

고목의 밑둥이가 고난의 세월을 대변 하는것 같다.


 

 

▼저쪽에 어르신들 빙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시는것 같아서 그곳으로 가본다.


 

 ▼고스톱.

한참을 재미있게 구경을 한다. 어른신들 소일거리라도 있으니 즐겁습니다.


 

▼딱다구리의 분주한 머리치기중.


 

 

▼낙화암으로 가기전 사자루에 왔습니다.

부소산성에서 제일 높다는 사자루는 백마강 바로 옆 벼랑 위에 서 있다. 이지역은 백제시대 망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낙화암 가기전 연리지 소나무.


 

▼백화정 입니다.

충남 부여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백화정 정자에서 금강을 바라보면서 나라가 궁지에 몰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략하자 백제의 3,000 궁녀가 백마강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백제 멸망 이후 타사암을 미화하여 낙화암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고기에는 부여성 북쪽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 강물을 임하였는데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 함께 화를 면치 못할 줄 알고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고 서로 이끌고 와서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하여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항복한 후, 당에 압송된 후 병으로 죽었다. 3,000 궁녀도 부여성이 함락된 후 당의 군사들을 피해 도망치던 아녀자들이었다는 설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바위면에 '落花岩'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낙화암 천년송

남부여국 사비성에 뿌리 내렸네 칠백년 백제역사 오롯이 숨 쉬는곳 낙화암 절벽위에 떨어져 움튼 생명 비바람 눈서 다 머금고

백마강 너와 함께 천년을 보냈구나 세월도 잊은 그 빛깔 늘 푸르름은 님 항한 일편단심 궁녀들의 혼이런가

백화정 찾은 길손 천년송 그마음.(표지판에 글)


 

▼백화정과 천년송입니다.


 

▼백화정을 뒤로하고 고란사로 내려 갑니다.


 

▼고란사

고란사(皐蘭寺)는충청남도 부여군에 위치한 절로,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가 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이었다고도 전한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년)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고란초와 약수로 유명한데 특히 이 약수는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즐겨 마셔 어용수라고 불리웠다.


 

 

▼바위사면에 고란초 몇 잎이 보인다.


 

 

 

▼영종각


 

▼꿈꾸는 백마강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하암 그늘아래 울어나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구나.

(대사)백마강 흘러 흘러 칠백년 역사도 흘러가고 고란사의

종소리는 누군가 치길래 끝없는 낙화암에 저녁노을 슳기도 하다,

       무너진 부여성의 그전설을 안다면은 길손은 시 한수를 읅고 가리라.


 

 


▼고란사를 둘러본후 낙화암쪽으로 올라가면서 당시 백제인들이 처한 그날을 생각 합니다.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타사암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통해, 또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될 당시 도읍이었던 이곳 부여(당시 사비성)의

 "비빈(妃嬪)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을 통해 낙화암이 백제 최후의 저항이 있었던 곳임에는 틀림없고,
다만, 상황이 급박했던 당시 이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죽어간 이들 대부분이 백제의 군사들과 백성들이었음이 분명한데도 그들의 자취는 온데간데 없이

 묻힌 채 궁녀들"만"이 그랬다는 듯이, 더구나 그 "꽃"의 수가 3천이나 될 만큼 많았다는 낙화암 "전설"은 백제 멸망의 비장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과장, 왜곡된 이야기지만 그래도 현실 이라고 받아 들이고 싶네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