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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識論(구식론)과 人間(인간)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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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法 .SGI

2020. 5. 20.

九識論(구식론)과 人間(인간)의 마음


인간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깊이에 대해서는 西歐(서구)에서도 深層(심층)心理學(심리학) 등에 의해서 今世紀(금세기)에 와서 해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불법에서는 이미 일직부터 깊은 통찰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론적인 해명의 단서는 4~5세기의 世親(세친=부친)에 의해 시작된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 완성된 것이 「九識論(구식론)」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이 識(식)이라는 단어의 意味(의미)에서 설명하면, 불교에서는 생명 근본의 작용을 이루는 것을 識(식)이라고 합니다. 識別(식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생명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外界(외계)의 조건을 識別(식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식물도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과, 이 기온의 차이를 識別(식별)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추운 겨울에 넓고 큰 잎을 무성케 하고 있다면 水分(수분)을 빼앗겨 버리고 나무는 말라버리고 말 것입니다. 外界(외계)의 기온 변화를 식별하여, 겨울에는 잎을 떨어뜨리고, 그 추운 겨울을 꿋꿋하게 살아가도록 對應(대응)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도 식탁에서 나란히 있는 음식을 보고, 이것은 먹을 수 있다. 먹을 수 없다고 식별함으로써 접시를 갉아먹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경우에 예를 들면 아주 비슷하게 납으로 만든 빵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들은 그것을 눈으로 보고, 진짜 빵인가 가짜인가를 구별하고, 그래도 알 수 없다면 냄새를 맡아서 확인하고, 그래도 알 수 없다면 베어먹어보고, 맛을 보며, 이것은 빵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가짜 빵을 먹는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가짜 빵을 먹는다고 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근본 작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 識別(식별)인 것입니다.

 

▶ 五陰(오음)은 外界(외계)와의 생명 交流(교류)

 

그러한 外界(외계)와 서로 관계하는 우리들은 생명의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세운 원리가 五陰(오음)이라는 思考方式(사고방식)입니다. 생명의 활동은 外界(외계)로부터 물질이나 정보를 받아들여서 그것을 판단하고, 그것에 의해 外界(외계)에 對應(대응)한다는 관계성에 의해 성립됩니다. 그러한 생명의 창구가 되는 것이 目.耳.鼻.舌.皮膚(목이비설피부)입니다.

이것이 五陰(오음)중의 첫째 色입니다. 예를 들면 길을 걸어가는데 자동차 소리가 났다. 이것은 귀로 들립니다. 눈으로 보고,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합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다는 것은 五陰(오음) 중의 둘째인, 受입니다. 좁은 길에서 큰 트럭이 오면 이것이 위험한가 안전한가라는 판단을 한다. 판단이 相으로 됩니다. 위험하면 옆으로 몸을 피한다. 안전하면 그대로 걸어간다고 하는 行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色受相行(색수상행)이라는 것을 구성하는 작용의 근원에 있는 것이 다섯번째의 識인 것입니다. 이 식은 제일 표면에서는 目.耳.鼻.舌.皮膚(목이비설피부) 소위 五根(오근) 각각에 갖추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생물에 따라서 이 다섯가지를 전부 갖추고 있는 것도 있고, 그 중의 하나 밖에 가지고 있지 않는 덕도 있습니다.


어쨌든 인간의 경우에서 본다면 눈이면 눈 그 자체, 귀라면 귀 그 자체가 각각 識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눈의 識이라고 하는 것은 눈 그 자체가 식별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만, 일상생활 속에서 뭔가 물건을 잃어버린 경우에 열심히 찾습니다. 그런데 방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을 모른다. 눈은 보고 있습니다만, 알지 못한다. 그것은 눈이 혼자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다고 하는 선입관에서 실제로는 보고 있어도 그것을 大腦(대뇌)에까지 보고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目.耳.鼻.舌.皮膚(목이비설피부)의 각각이, 가지고 있는 독립한 識을 五識(오식)이라도 합니다.


그러한 五根(오근) 등의 器官(기관)에서 받아들인 여러가지의 정보, 다시 말해서 눈으로는 빛, 귀로는 소리 등의 정보를 종합하여 거기에 그 전체를 판단하는 식별능력이 第六識으로 됩니다. 第六識의 意識(의식)이라는 것은 外界(외계)와의 관계에 의해 성립되는 識이며, 또한 외계에 대응하는 識이라고 행각해도 좋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異性(이성)도 이속에 포함됩니다.


그것에 대해 第 七 識 (제 7 식)을 末那識(말나식)이라 합니다. 末那(말나)란 산스크맅의 소위 思惟(사유), 思考(사고), 생각한다고 하는 의미에서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第 七 識 (제 7 식)은, 그러면 어떠한 것을 식별하는가 하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외계의 물질을 대상으로 한 識이 아니라 물질로 포착할 수 없는 것,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여 식별하는 능력이 제7식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지금까지 삶의 자세를 반성하고, 이러한 삶의 자세를 취해야 되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거기에 올바른 삶, 잘못된 삶, 善(선), 惡(악)을 판단하는 것이 제7식입니다. 어려운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선악 혹은 정의한 뭔가를 철학의 과제로서 제기했습니다. 그러한 문제를 생각하는 識(식), 意識能力(의식능력), 이것이 제7식에 해당합니다.

 

▶ 第(제) 八識(식)에 業(업)이나 경험이 畜積(축적)

 

다음에 제8식은 산스크리트로 阿賴耶識(아뢰야식)이라고 명명되어 있습니다. 阿賴耶(아뢰야)란 藏(장)이라는 意味(의미)있니다. 왜 藏(장)이라는 名稱(명칭)이 붙여졌는가 하면, 지금까지의 자신 생명이 계속 쌓아 온 業(업)이나 경험의 일체가 축적되어 있는 곳이라고 하는 점에서 藏(장)으로 본따서 阿賴耶識(아뢰야식)이라고 호칭됩니다. 예를 들면 현재의 인생만을 생각해 보아도 태어난 후부터 오늘까지 어떠한 나라에 태어나고. 어떠한 말을 배우고, 어떠한 사회습관 속에서 지식을 몸에 익혀 왔는가 라는 것에 의해 현재의 자신의 인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한 자신을 형성해 온 것에 의하여 사물에 대응하는, 방법도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억압된 환경속에서 살아온 경우에는 모든 일에 대하여 반발적으로 되거나 도피하려고 하거나 모든 일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없지요. 자신의 我見(아견)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이고 만다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시절 개에게 물렸던 무서운 추억이 언제까지나 떠나지 않고, 설령 지금 있는 개가 작은 개일지라도 무의식의 몸체속에 그것을 두려워하여 피하려고 하는 힘이 나오고 마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현재의 인생 속에서의 阿賴耶識(아뢰야식)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게 말하면 성장해 온 文化的(문화적) 土壤(토양)에 의하여 모든 일에 대응하는 방법, 사고방식도 차이가 있습니다. 소위 민족, 문화에 의한 차이입니다. 그것을 다시 더 깊이 파고들어 가서, 이 생명이라는 것의 오저를 살펴보면 과거세의 행위, 과거세에 축적해 온 것에 의해, 規定(규정)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태어나면서 성격이 다르다고 하는 것도 그 차이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가 하면 과거의 業(업)이라는 것에 의해 나타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현재의 인생 곳에 뿐만 아니라 과거 무수한 인생의 반복을 해온 그 속에 구축해 온 모든 경험, 業(업)이라는 것이 축적되어 있다. 이 생명의 부분을 제 8식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이 제8식은 개인으로서의 존재의 골격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종파 중에 있어서도 제 8식이 생명의 本體(본체)이며 심왕이라고 하고 있는 종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8식이라는 것은 과거의 여러가지 경험의 축적이며, 固定性(고정성)은 없고, 항상 변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구극의 本體(본체)라고 하는 불교의 종파가 목표로 하는 것은 숙업을 일체 없애버리고 자기라는 것을 解消(해소)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無我(무아), 空(공)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 異想(이상)으로 됩니다. 그들은 이것을 涅槃(열반)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불교중에서 小乘敎(소승교)의 灰身滅智(회신멸지), 空(공)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가르침, 또한 權大乘敎(권대승교)중에서 다른 곳의 淨土(정토), 사바세계를 떠난 국토에 往生(왕생)한다는 것을 理想(이상)으로 세운 것은 어느쪽도 그러한 생명의 究極(구극)을 제 8식으로까지 밖에 포착하지 못하고, 따라서 일체의 숙업을 없애는 것이 理想的(이상적)인 경애라는 사고방식에서 세워졌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결국 그러한 小乘敎(소승교), 權大乘敎(권대승교)의 사고방식의 결론은 생명 그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한 생명의 행복, 생명의 충실이라는 것은 거기에는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에 비해, 진실한 생명의 충실, 이 현실의 세계에 살아가면서 진정한 행복을 실현해 가는 방도를 확립한 것이 法華經(법화경)의 불법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제 8식인 자기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그 제8식에 구축해 온 여러가지 숙업에, 그저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주체성과 그것을 움직여 가는 힘을 갖는다는 것이 진실한 행복의 길이라는 것이 그 근본의 사고방식입니다.
현재의 인생중에서 상식적인 문제에서 생각해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마이너스요인을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플러스요인으로 할 수 있다는 例(예)가 있습니다. 큰 의미에서 말하면 체모가 없기 때문에 의복을 발명하는 등, 문화 그 자체가 인간이 공통으로 가지도 있는 마이너스의 業(업)에 대한 도전이며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전환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外界(외계)와의 관계에 따르는 마이너스 요인만이 業(업)이 아닙니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내면에 여러가지 마이너스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解決法(해결법)은 외계의 경우에는 물질적인 기술의 힘에 의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만 자기 내면의 문제에 대하여 해결하는 방법은 지금까지의 문화에는 없는 것입니다.
제8식에 축척된 어떠한 숙업에 대해서도 강한 주체성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기 위한, 그것을 전환하고, 움직여 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기반이 제 9식입니다. 제 8식의 더 깊은 오저에 있는 宇宙大(우주대)의 생명입니다.

 

▶ 宿業(숙업)을 움직이는 기반이 第(제) 9識(식)

 

法華經(법화경)에서는 이 구극의 자체를 諸法實相(제법실상)의 實相(실상), 혹은 법화경의 虛空會(허공회)의 의식에서 나타내시는, 영원한 佛性(불성)으로서 示唆(시사)하고 있었습니다만 너무나도 심오하여, 용이하게 밝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宇宙大(우주대)이며 無始無終(무시무종)이며 생명의 본체, 구극에 있는 것, 이것을 日蓮(일련)대성인은 스스로 각지하시어 南無妙法蓮華經라고 설하시고 이것을 御本尊(어본존)으로 도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제 9식으로 범어에서는 阿摩羅識(아마라식)이라고 합니다. 阿摩羅(아마라)란 더럽혀지지 않은 근본의 깨끗한 識(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御本尊(어본존)에 대한 信(신)에 의해, 이 제 9식을 나타내 갈 때, 이 위에 있는 제8식의 어떤한 숙업도 움직여서, 그것에 휘둘리는 일없이 주체성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물에 떠있는 나무는 물의 흐름에 의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다. 그것에 대하여 바위섬은 아무리 강한 파도가 밀어닥쳐와도 떠내려 가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하면 大地(대지)와 같은 根源(근원)인 제9식에 견고하게 발을 밟고 있으면 제 8식인 물의 흐름에 밀려 떠내려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비유적으로 말하면, 책상을 움직이려고 하는데, 자신이 책상 위에 올라타고 아무리 열심히 들어 올리려고 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책상 밑에 있는 마루바닥에 발을 밟지 않으면 들어 올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대성인의 불법에서 가르치고 있는 삶의 자세는 9식이라는 생명의 根源(근원)에 견고하게 자기 존재의 기반을 두고, 거기에서 모든 숙업에 대하여 자기가 주체성을 가지고, 그것을 움직여서 전환해 가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숙업을 일체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숙업의 결과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특색을 살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日蓮(일련)대성인은 櫻梅逃李(앵매도리)의 원리로 밝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벚나무라면 최고의 벚꽃을 피워간다. 매화라면 매화꽃이라고 하듯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최고로 피워가는 그 근본이 南無妙法蓮華經(남무묘법연화경)이며 御本尊(어본존)에 대한 信心(신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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