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 왕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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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2020. 3. 1.


헤롯 왕 궁








헤롯은 유다의 왕 궁


로마로 도망친 헤롯은 안토니우스의 후원을 얻어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의 왕으로 인정받았다(유대전쟁사 1.282~284, 고대사 1.388).

얼마간 영토 없는 왕이 된 헤롯은 로마가 파르티아를 시리아에서 몰아내자마자

예루살렘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3년에 걸친 전쟁을 치러야만 하였다.

기원전 37년 안티고누스는 헤롯에게 패배하여 참수형에 처해지고,

예루살렘은 헤롯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로써 헤롯은 유다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였다.

 

로마의 앞잡이로 인식되던 헤롯은 유대인의 지지를 충분히 얻지 못하자

 하스모니안 가문의 유대인 여자 미리암 1세와 결혼함으로써

왕조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고대사 14.467).

이는 그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34년간이나 유다 왕국을 통치하면서 대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헤롯은

통치 초기 구()왕조의 일족과 추종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였다.

 80세가 넘은 전 대제사장 힐카누스 2세를 죽이고, 또 자신의 사위이자

대제사장이었던 아리스토불러스 3세를 여리고 왕궁에서 살해하였다.

, 자신의 아내이자 하스모니안 왕조의 딸 미리암 1세를 부정한 여인으로 몰아 처형했으며,

자신의 장모를 클레오파트라 7세와 공모했다는 죄목으로 죽였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갈등은 헤롯의 지위를 다시 한 번 크게 흔들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월등한 전략과 우세한 병력을 가진 옥타비아누스 장군은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승리하면서,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얻어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로써 공화정이 막을 내리고 로마 제국이 탄생하자, 헤롯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로부터 얻은 헤롯의 통치권이 온전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해 팔레스타인에는 대지진이 발생하여 쿰란의 에세네 공동체의 거주지가

완전히 파괴되는 등 심각한 재난까지 덮쳤다.

 

헤롯은 로도스 섬에 머물던 옥타비아누스를 알현하고, 왕관을 승리자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황제는 헤롯에게 유다의 왕권을 복권시켜 주었다.

헤롯은 이집트 원정길에 오른 황제와 동행해서 그의 군대에게 식량과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등 환심을 사기에 충분할 만큼 정치적 ·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로써 헤롯은 자신의 왕국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가 미처 점령하지 못하였던 도시들 - 힙포, 가다라, 갈릴리 지역, 바산, 바니야스,

사마리아, 여리고 등 - 을 황제로부터 선물로 얻었다.

헤롯은 그가 죽을 때까지 아우구스투스의 신뢰받는 가신(家臣, client)으로서

절대 군주의 지위를 결코 빼앗기지 않았다.

헤롯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낡은 이상을 갱신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아우구스투스의 '팍스 로마나'의 정책을 흉내냈다.

 

통치 중반, 헤롯은 자신의 명성을 로마 제국 내에 알리는

대규모의 건축 사업을 벌여 나갔다.

엄청난 재정적 · 기술력 능력이 이를 뒷받침하였다.

우선 그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복구되고

하스모니안에 의해 파괴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를 재건하여 신전과 도로,

화려한 궁전을 지어 자신의 왕권을 보호해 주는

로마의 옥타비아누스 황제에게 봉헌하고,

그 이름을 '고귀한 자'라는 뜻의 세바스티아라 칭했다.

, 지중해 연안에 가이사랴라 불리는 항구 도시를 건설하고

로마와의 해상로를 열어 놓았으며,

자신의 왕궁을 비롯하여 대규모의 수로와 로마식 경기장,

그리고 원형 극장 등을 화려하게 건설하였다.

아울러 마사다의 요새에 자신의 견고한 왕궁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