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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울수록 찰 수 있다.

자유의지와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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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철학

2020. 3. 25.

 

 

"자유의지", 이 단어는 아마도 인간의 존재적 욕망을 가장 확실하게 말해주는 표현 중 하나일 것이다이 표현을 통해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진 채 살아가고 있다고 믿으며, 그렇기에 매일 자신이 결정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자신의 의지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우리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의지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분명히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짜장과 짬뽕을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하나를 선택하거나 좀 더 영리하게 짬짜면을 먹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때 어떤 음식을 선택하든 결국 자신의 의지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설명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도 꽤나 치명적인 문제이다.  문제는 바로 중국집 자체에 있다.

 

중국집에서 짜장과 짬뽕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지의 증거가 될 수 있지만, 이미 중국집에 들어간 상태에서는 우리가 선택 가능한 음식은 매우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중국집에서 삼겹살을 시켜먹을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짜장과 짬뽕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은 그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먹을 것 중에서 극히 일부 음식만 가지고 선택의 자유를 실현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야말로 제한적 자유의지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좀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처음부터 왜 중국집을 갔느냐에 관한 것이다.

 

물론 중국 음식을 좋아해서 갔을 수 있다. 친구들이 가자고 해서 갔을 수 있다. 집 근처에 있어서 갔을 수 있다. 배가 고픈데 제일 가까운 음식점이 중국집이어서 갔을 수 있다. 직장 상사가 좋아해서 어쩔 수 없이 갔을 수 있다. 가진 돈으로 먹을만한 다른 음식이 없어서 그럴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지만 계속 먹어서 질려서 갔을 수도 있다. 아마도 이것들 말고도 수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갔든지 중국집 간 것 자체가 자유의지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선호하는 음식들은 생각보다 태생적으로 결정이 된다. 삭힌 홍어는 많은 사람들이 못 먹는 음식이지만 특정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이다.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어떤 문화권에서 태어나 자랐느냐에 따라서 선호하는 음식이 다르다. , 우리가 좋아하는 청국장, 김치 등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혐오음식이 될 수 있다. 또한 그 반대도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누군가의 음식 기호는 부모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 유전자적으로도 그렇고, 자라난 환경도 그렇다그렇기에 자유의지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 누군가가 어떤 음식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이미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어떤 문화권에서 자라느냐로 정해진다는 뜻이기에 그렇다. 여기에 개인의 자유의지는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까?

 

사람은 그 누구도 부모를 선택하거나 어떤 나라나 문화권에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 , 우리가 태어난 상태는 이미 중국집 자체에 들어와 있는 상황인 셈이다. 그리고 나서 그 안에서 짜장과 짬뽕의 선택이 이뤄지고 있다. 우리는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늘 그 안에서의 선택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제한적 선택은 할 수 있기에 자유의지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한계가 너무도 명확하다. 우리는 우주여행을 할 수도 있고, 에베레스트 산에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는 없다. 하늘을 나는 것도 자유이지만, 날고 싶다고 해서 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펭귄은 피해야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사실상 불완전하며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한 가지 새로운 문제가 대두된다. 그것은 바로 개개인이 저지른 범죄를 과연 어떤 명목으로 처벌할 수 있겠느냐 에 대한 것이다. 일종의 도덕론에 관한 질문이다.

 

범죄자의 DNA를 타고 태어나 범죄자 부모 밑에서 자라서 도둑이 되었다면 과연 그 사람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예전에 DNA에 관한 많은 것들일 밝혀 질 때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던 질문이다. 물론 지금 시대엔 당연히 그것과 상관없이 처벌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은 찾지 못하고 있다.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그렇게 태어난 것에 대해서 왜 죄값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정말로 형평성에 맞는 일일까?

 

별 것 아닌 것 같은 질문이지만, 이 질문의 정답을 찾는 일은 정말로 혼란스럽고 많은 말들이 오고 갈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범죄자들을 당연히 처벌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처벌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이것에 관한 어떤 확실한 판단기준을 찾을 방법은 없을까?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알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한 가지 오래되고 경직된 사고방식 하나를 버려야 한다. 그것은 바로 도덕의 절대성에 관한 믿음이다.

 

도덕을 절대적 기준으로 놓고 보면 방금 전 질문이 매우 혼란스럽다. 도덕이 절대적으로 옳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도덕적 판단이 옳아야 하는데, 타고나서 자라기를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둑이 된 사람에게 도덕적인 잣대를 통해 죄를 물어야 하기에 혼란스러운 것이다. 자유의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도둑이 된 사람을 처벌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이 있는 것이다.

 



분명히 죄를 묻는 것이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오직 그 사람만의 잘못도 아니기에 그렇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범죄자를 양성하는 도덕적 사각지대를 만든 사회 전체의 죄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자 한 명이 나올 때마다 사회 전체가 벌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꽤나 어렵고, 이 논리적 꼬임을 푸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하지만 도덕의 절대성을 끌어 내리고 나면 해결책이 쉽게 나온다. 도덕 자체가 상대적 기준점이라면 도덕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정해진 규칙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의 문제로 바뀐다.

 

옆 집 사람의 돈을 훔치는 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각해도 안될 말이다. 힘이 세다가는 이유도 다른 사람을 이유도 없이 때려도 된다? 이것도 역시 말이 안 된다. 더 심한 경우로 귀찮다는 이유로 낳은 아이를 굶어 죽인 부모의 행동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런 행위들을 상대적 개념의 도덕을 적용한다면 단순히 처벌을 할지언정 도덕적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그런데 누가 그럴 수 있을까?

그래서 도덕을 절대적 기준점에서 상대적 기준점으로 바꾸는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 방법만 제대로 알면 된다.

 

먼저 처음부터 도덕이 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고조선의 팔조법, 함무라비 법전, 성서의 십계명 등은 모두 도덕적 기준점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다. 도둑질 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라고 써 있다. 그 말의 의미는 아주 오래 전부터 도둑이 있었고, 간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도둑질을 하거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했다는 뜻이다. 이 말의 의미는 그런 행위들은 인간의 본능적 활동이라는 뜻이다. 일종의 욕망인 셈이다. 실제로 자연계에서 많은 동물들 사이에서도 도둑질과 간음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그 동물들에게는 딱히 어떤 도덕적 기준점이 없기 때문에 당한 놈만 억울할 뿐 딱히 공론화 되지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인간사회에 만연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사회의 혼란이 가중된다. , 다수가 모여서 살기에 너무 힘들어진다. 사방에 도둑이고, 사방에서 간음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면 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이뤄서 살려고 하겠는가?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을 선택하거나, 매일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서 버텨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도덕이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살기에 필요한 기준점을 정하는 것이 바로 도덕이며, 그것을 체계화 시킨 것이 현대의 법률이다.

 

그렇다면 도덕은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까에 대한 답이 나온다.

 

도덕은 공동체의 번영을 목적으로 한다. , 도덕은 인간사회의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도덕은 매우 좋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정말로 심각한 숨겨진 문제 하나가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 자신의 문제가 아니기에 쉽게 간과된다. 그것은 바로 도덕을 기반으로 한 인간사회의 발달이 가져오는 일종의 부작용이다.

 

바로 지구의 황폐화이다.

 

도덕을 기반으로 한 인간사회의 발달은 지구 상에서 인류를 최상위 포식자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딱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경쟁자를 모두 물리 친 후 절대자의 지위에 오른 인간은 그 힘을 마구 휘두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지구 상의 수 많은 동식물들을 멸종시키고 있으며 더해서 지구 자체도 파괴시키고 있다.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승자로써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권리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로 인해서 수 많은 패자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 여기까지 이해했다면 도덕을 다시 한번 바라보자. 도덕은 인간사회의 발전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인간사회가 발달하면 할수록 지구에 대한 인간의 권리는 점점 더 강해진다. 만약 이대로 인류가 더 많이 발달하면 태양계, 은하계에 속한 항성과 행성들이 모두 인간의 것으로 될 것이다. 더 발달한 외계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무튼 인간의 발달은 우리가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것들의 한계를 넓혀준다.

 

여기에서 도덕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도덕이 인간 전체의 이기심과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도덕은 어떤 절대적 기준점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의 총합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도덕을 선과 악의 관점에서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결국 도덕은 원래부터 옳고 그름, 선과 악, 정의와 불의와 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절대적 개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저 인간이 좀 더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이기심의 정점일 뿐이다. 그러니 도덕적 판단이란 말의 의미는 바로 우리가 속한 사회가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방향이면 된다.

 

도덕이 절대적 기준점이 아닌 이런 식으로 우리의 이기심의 총합이라고 정의되면 앞에서 말한 도덕적 판단에 대한 회의는 쉽게 사라진다.

 

범죄자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 어떤 환경에서 자랐든지 상관없이 범죄는 사회를 혼란 시키기에 처단하면 그만이다여기엔 아무런 혼란스러움이 없다. 사회가 발전할 수만 있다면 어떤 판단을 해도 상관이 없다. 단지 인간인 이상 잘못된 판단은 충분히 내려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실수조차도 잘 복기해서 미래를 위해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실제로 성공사례보다 실패사례를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 전체를 위해서 앞을 가로 막는 장애물을 과감히 정리하고 나가면 그만이다. 그런 면에서 개인이 진정으로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나도덕이 정말로 옳을 수 있느냐를 따질 필요가 없다. 물론 그런 종류의 담론은 꾸준히 해야 하겠지만, 그 역시도 결국 인간사회의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사회를 멸망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담론은 금세 눌리고 비난 받고 사라지고 만다. 최근 100년 동안 아주 큰 영향을 끼쳤지만 결국엔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결론 난 공산주의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도덕이 인간사회 이기심의 총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의 눈을 뜰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양심의 가책이나 자기 비난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매일 사회로부터 교육받은 수 많은 도덕적 기준점을 기반으로 해서 우리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남을 왜 돕지 않는가? 왜 더 착하게 살지 않는가? 왜 더 열심히 살지 않는가? 왜 더 부지런하지 못한가? 왜 더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는가? 등등 매일 사람들을 은근히 괴롭히고 있는 도덕적 판단들이다.

 

자신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다. 타인에게도 끝없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 왜 그렇게 사는지, 왜 바람을 피우는지, 왜 이기적으로 구는지, 왜 더 열심히 살지 않는지, 왜 살을 빼지 않는지, 왜 결혼을 하지 않는지, 왜 돈을 모으지 않는지 끝없이 참견한다.

 

도덕을 절대적인 가치 기준점으로 삼고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끝없는 참견을 한다. 그리고 매일 갈등하고 싸우고 반목한다. 선과 악을 구분하고 네 편과 내 편을 가른다.

 

도덕이 어떤 개념인지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 짓을 멈춰야 한다. 남을 비난하는 것도, 나를 비난한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도덕은 단지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일종의 규칙일 뿐이다. 선과 악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 아니다. 그러니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살인은 나쁜 것이지만 적과 싸울 때는 당연한 일이 된다. 오히려 많이 죽이면 영웅이 된다.

 

물론 전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 조차도 어떤 면에서는 인간사회의 발전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무엇이 더 미래에 도움이 될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비난을 멈추는 것이다. 게으른 자신, 열심히 살지 않는 자신, 성공하지 못한 자신, 뭔가 업적을 남기지 못한 자신, 잘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비난을 멈추는 일이다. 내 행복이 중요하지 도덕에 기반한 사회의 발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회가 우리를 열심히 살도록, 성공하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부지런하도록, 성실하도록 교육시키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사회가 발전하기에 그렇다.

 

그러니 그저 수단일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런 요구들이 절대적 기준점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이 작은 흐름의 변화를 통해서 삶을 바라보는 방법을 바꿀 여지는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시간이 더해지면 뭔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들으면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바로 내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가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할까? 에 관한 것이다. 나는 결국 타고난 대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인가? 나는 결국 이미 정해진 내 삶의 굴레 안에서 평생 아등바등 거리다가 죽어야 하는 존재인 것인가? 이런 존재적 한계점이 잘 납득이 안 된다.

 

꽤나 슬픈 일이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랐기에 평생 한국에서 살다가 죽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한국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그것은 결국 비탈길에서 뒹굴어서 떨어지다가 우연히 멈춰선 자리에서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 자신의 의지인 냥 자랑하는 것과 같다.

 

지구에서 태어나서 자랐기에 평생 지구에서 살다가 죽어야 한다. 한번 정해진 부모는 평생 바뀌지 않으며, 한번 좋아하게 된 음식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내 삶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이미 99%가 정해졌고 나는 이후 1%의 선택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되면 내 삶은 내 삶이 아니다. 누군가는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냐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오늘 선택한 것이 내 자유의지가 아니라면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미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도록 태어난 것인데 말이다.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었다면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내가 가치 있다고 느끼거나 없다고 느끼는 것, 내가 의미 있다고 여기는 것이나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모두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매일 매 순간 호흡을 하는 일은 내 생존에 너무도 중요한 일이지만 이미 그렇게 태어났고 하지 않으면 고통스럽기에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호흡은 중요하지만 의미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만약 호흡이 의미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이유로 인해서 숨이 막힌 사람들일 것이다.

 

자유의지의 부재는 내 삶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 사람들마다 아이가 아무리 소중해도 그저 우연히 태어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누가 자신의 아이를 '넌 우연히 섹스를 했다가 태어난 아이라고' 할 것인가설령 아이를 낳을 목적으로 했다고 해도 수십 억 정자 중에서 어떤 정자가 난자에 도착할지 여부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니다. 그러니 아이는 온전히 우연함의 산물일 뿐이다.

 

의지라는 개념이 사라지게 되면 인간에게 있어서 의미와 가치도 함께 사라진다. 의지 없이 이뤄진 것들은 모두 우연함일 뿐이다. 인류가 자랑하는 모든 유산과 그간 이뤄 낸 업적들, 개인이 자랑스러워 하는 수 많은 업적들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탄생 자체가 우연으로 시작했기에 평생 우연함 속에서 살아가다가 죽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가지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것인가?

 

아니다. 방법이 있긴 하다. 사실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따로 있어서 그렇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늘 '살고 싶어하기에'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 살고 싶지 않는 방향으로는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기에 그렇다. 설령 자살을 하는 사람조차도 그렇다. 그들은 살고 싶지만 살 수 없기에 죽는다.

 

그래서 만약 삶과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선택이 가능해진다. 죽거나 사는 것이 동일하다면 그때는 사는 것을 '선택' 할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은 삶을 선택할 수 없다.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살기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이 다 선택이 된다. 반대로 삶을 선택할 수 없었기에 그 후로 이뤄지는 모든 선택은 제한적 선택이 되고 만다.

 

그런데 어떻게 삶과 죽음을 동등하게 볼 수 있겠는가? 그것이 남은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