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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rcola 2013. 8. 15. 08:07

 

* Report 제목: 일본강점기때 폐지.왜곡된 성균관. 해방후에 설립(재건승계)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백과사전.성균관대 학교당국의 현대 한국사적 입장에 대한 학술적 고찰. 그리고 한국사의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이어짐)와 세계사를 연계하여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설립된 敎皇聖下 윤허대학인 예수회의 서강대와의 Royal.Imperial 특성의 공통점 고찰.

본 블로그에 대한 사이버테러는 국제법과 국내법에 저촉될 수 있음. 이 블로그는 UN적국 일본(패전국, 전쟁범죄국가)에 대한 규제조항을 어기려는 현상개변 저지, 한국내 일본 잔재 청산을 위한 블로그임.  이전 야후 코리아 블로그에 써놓았던 글 중 필요한 부분은 다시 手作業으로 본 블로그에 옮겨 적을 계획입니다. 아주 힘들고 벅찬 작업이 될것입니다. 인용자료는 비영리적인 목적으로 공공성을 가지고 Report자료로 사용하오니 이 점 충분한 양해 바랍니다. UN적국 일본 강점기의 죄상규명과, 한국인의 주권회복용으로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I. 序論.

기본적으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일본과 친일파등에 적대적 일 수 밖에 없는 독립투사들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계한 측면도 있으므로, UN적국 일본(패전국, 전범국)과 한국내 일본강점기 학교 및 여러 잔재들은 사회운동이나 국회차원의 결의, 정부조치등 어떤 형태로든 올바르게 제재.청산해 주는게 제대로 된 자세임.

일본강점기때 강제로 설립된 대학교의 대표 경성제대 후신이며, 해방후 미군정서 패전처리용으로 재편된 Monkey서울대.

1945,11.30 임시정부 요인들과 남북 유림들의 결의로 성균관대를 설립(조선시대에 설립된 국사영역 조선 최고대학 성균관 후신으로 600년 전통의 한국 최고대학 학벌. 그 이전의 유교 최고대학으로는 王朝가 각각 다른 고구려 태학, 백제의 오경박사, 통일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이 있었음. 불법적인 강제 한일병합이후 야만족 일본의 강점기에 교육기능이 폐지되어, 1945년 11월 재건형식 설립결의)키로 결의한것을 보았으면 경성제대나 일본 강점기학교들을 재활용하지말고 폐쇄하여 방치하여두는게 한국인에 대한 사죄인데, 그 당시 문교부장이던 친일파 유억겸(유성준.유만겸.유억겸 3명의 가족이 친일파) 주도로, 일본강점기학교 경성제대등을 다시 규합하여 아웃사이더같은 점령대상 일본잔재 친일파들의 국립대로 만들려고 하니까, 전국적인 국립대 설치안 반대운동(國大案 반대운동, 해방민족 한국인의 대한민국 공식정부가 출범하기 이전이고 일본 통치기구는 점령상태기 때문에 시기가 맞지 않는다고 반대함)이 일어난것임.

경성제대나 일본 국.공립 중고들은 재활용하지말고 방치.폐교조치했어야 민족정기가 제대로 회복되는것은 자명한 일이었음.  

일본 강점기학교, 임시정부.대한민국 정부차원에서 친일파로 두 번에 걸쳐 거론한 친일파, 일본강점기잔재에 대한 면죄부 부여는 불가하며, UN적국 등록처럼 방어조치를 해놓아야 됨. 한국정부가 없을때 헌법역할을 하던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서 한국을 해방시키기로 하여, 하위법인 미군정령이 준거법으로 작용하던 당시 해방 한국인의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패전국 일본의 통치기구인 총독부 인원을 재활용한것은 한국에대한 몰이해나 실수처럼 돌발변수로 발생한 한국 현대사의 보이지 않는 비극이었음. 점령대상 패전국 일본의 통치기구 잔재인 총독부에 남은 친일부왜배들이 하부 실무인력으로 해방한국의 하부토대를 공고하게 구축한것은 지금까지 한국유교와 성균관대, 한국 학교, 한국 전통과 반대작용을 하며 대립되고 있는 양상임. 한국인을 해방민족으로 대우하고, 일본 통치기구들(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 일본강점기 국.공립대학, 국.공립 중고등학교, 일본 총독부 포교종교인 신도.불교.기독교잔재, 총독부 및 행정기구, 군.헌병.경찰, 친일언론, 관변 억압기구등)은 점령대상으로 이분하여 대우하는것은 포츠담선언과 미군정의 입장이 다를수 없으므로, 경성제대가 주축인 그 후신 Monkey 서울대나 일본강점기 관립대학, 국.공립 중고등에 대한 행정처리는 승전국인 미군정 점령행정당시 3년정도 기간에 변경되거나 적용된 패전처리업무의 하나로 적용하는것이 옳음.    

II. 本論.

1].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정통성을 가진 최고학벌 성균관대(Royal, Imperial학벌)의 정통성에 대한 학술적 서술자료 검토.

각종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동아, 파스칼대백과등)을 보면 사립대학이 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한 것으로 의견이 일치되어 있는데, 국사에 나오는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의 승계대학은 현재의 사립 성균관대임은 분명함(泮宮.學宮.芹宮.태학의 宮 성균관대).

1. 정부출연 연구기관 자료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

1).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설명.

가. 한국학 중앙연구원(韓國學 中央硏究院).

한국문화 및 한국학 제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는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의 설명자료임.

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 大百科辭典).

........
발간된 경위를 보면, 1979년 9월 25일 대통령령 제 9628호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였고, 동 규정에 근거하여 1980년 3월 18일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편찬사업 담당부서를 두었으며, 1980년 4월 10일 제 1차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1991년까지 12년의 기간동안 3백여명의 편집진과 3천 8백여명의 집필자가 참여하였다.  

* 필자 주 1). 1979년이면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통치하던 당시인데, 임시정부에서는 위관출신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대상황을 가장 잘 반영하던 당시의 임시정부 요인 기준으로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공식적인 친일파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음.  

 

* 필자 주 1-1).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행각에 대해 시중에서 여러 이견이 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필요에 의해 광복군 제 3지대 소속으로 편입된 형식적 자격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것. 다음은 군사쿠데타 이전의 전력에 대해 언급한 글입니다.    

   

 

-군사 쿠데타 이전의 전력-

박정희는 1932년 3월 25일 구미공립보통학교[현 구미초등학교], 1937년 3월 25일 대구사범학교[현 대구교육대학교], 1942년 3월 25일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1944년 4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박정희는 1937~1939년까지 문경공립보통학교[현 문경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하고 만주군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듬해인 1945년 7월에는 만주군 중위로 승진하였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박정희는 중국으로 가서 1945년 8월 29일 광복군 제3지대 소속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2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8년 11월 남로당 관련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무기 징역에서 감형되고 다시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1950년 6월 25일 소령으로 복귀했으며, 1958년 3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출처: 박정희[朴正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 이칭별칭

    성균관대, 성대

  • 유형

    단체

  • 시대

    현대

  • 성격

    대학교, 사립종합대학교

  • 설립일시

    1398년

  • 설립자

    김창숙(金昌淑)

  • 대표자

    김준영


(연혁)
그 전신은 조선초인 1398년(태조 7) 현재의 위치인 숭교방(숭교방)에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성균관에서 출발하였다. 당시 성균관은 최고의 국립 대학으로서, 국가에 필요하고, 유능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실시하였다. 갑오경장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하여 성균관은 제향기능을, 경학과는 교육기능을 맡게 되었다. 수업연한은 3년이며, 교육과정은 유학경전을 위주로 하되, 역사학.지리학.수학등 근대적인 교과목이 부과되었다.

그 밖에 교육의 목적, 교육과정의 운영, 입퇴학절차, 각종 시험 및 학생의 특전, 학기제 채택등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학교로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권상실뒤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으로 개편되어,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주로 문묘(文廟)의 제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구실만 담당하게 되었다. 1930년에는 경학원에 명륜학원을 설치하였으며, 그 뒤 명륜전문학원으로, 1939년에 명륜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44년 일제의 강요로 명륜연성소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광복과 함께, 같은 해 9월 명륜전문학교로 재개교하였다. 명륜전문학교는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것은 아니었지만,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그 맥을 함께 하고 있다.

1946년에 전국 유림대회(儒林大會)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설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이에 따라, 이석구(李錫九)가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의 재산을 희사하고,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하여, 같은 해 9월 성균관대학으로 인가되었다.

초대학장에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으며,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였다. 1953년 2월에 종합대학으로 개편되어, 문리과대학, 법정대학, 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대학원으로 편성하였다.

같은해 6월, 각 도의 향교재단(鄕校財團)이 재산을 갹출하여,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변경하고, 1963년에 다시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조직 변경하였다.

이하생략....

2. 출판사들이 편찬하는 백과사전류에 나타난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들.

1).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 사립

  • 특성

    종합대학

  • 개교일

    1398년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인문사회과학캠퍼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서부로 2066(자연과학캠퍼스)

  • 교목

    은행나무

  • 면적(㎡)

    627,025

  • 홈페이지

    www.skku.ac.kr

성균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지만 조선 개국 후 1398년(조선 태조 7)에 현 명륜동 캠퍼스에 설립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경학과는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하되 역사·지리·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과하여 근대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교육기능을 박탈당하고 경학원(經學院)으로 축소되었다.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8.15광복이 되자 1946년 재단법인(현재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정규 단과대학으로 발족하였으며, 초대학장으로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1979년 수원에 자연과학캠퍼스를 신축하였다. 1996년 11월에 삼성재단이 성균관대학교 재단을 인수하고 운영해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하 생략.... 

2). 파스칼대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설명

서울특별시 종로구(種路區) 명륜동(明倫洞)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1398년(태조 7) 현재 위치인 숭교방(崇敎坊)에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서 출발하였다. 광복뒤인 1946년 전국 유림대회(儒林大會)가 열려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이석구(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의 재산을 희사하고,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 같은해 9월 성균관대학으로 인가되었다.

이하 생략....

 

* 필자 주 2). 파스칼대백과의 위 내용은 이전에는 야후에서 포털에 제공하였으나, 야후가 한국에서 철수함에 따라서, 더 이상 포털에서 제공되고 있지 않습니다. 필자가 작성한 내용은 야후가 포털에서 파스칼 대백과의 위 내용을 제공하던 당시에 기록해 둔 것으로, 독자들은 위 내용에 대한 근거를 확인할 방법이 없으면, 학술 자료등의 출처로 이용하실 타당성이 없을것이므로, 출처자료등으로 이용하지 마십시오. 시중의 파스칼 대백과에서 인용이 가능하다면 출처로 이용하는것은 타당하겠습니다. 포털에서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 파스칼 대백과의 위 내용은 점차적으로 대안이 필요하게 되었음을 필자가 느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대체 방법을 찾아서 조치하겠습니다.        

3. 성균관이란 문구로  성균관대학교와의 상관관계를 살펴봄.

1).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 성균관과 현대 성균관대학교와의 관계를 살펴봄.

성균관.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
우리 나라 최고학부의 명칭으로 ‘성균(成均)’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298년(충렬왕 24)에 국학(국자감을 개칭한 것)을 성균감(成均監)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1308년에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감을 성균관이라 개칭하였다.....

이와 같은 성균관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그대로 존치되었다. 조선왕조의 한양천도(漢陽遷都)에 따라 새 도읍지의 동북부지역인 숭교방(崇敎坊) 부근(지금의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구내)에 터가 정해져서 1395년(태조 4)부터 건축공사가 시작되어 3년 만에 대성전(大聖殿 : 단종 때 大成殿으로 개칭됨.)과 동무(東廡)·서무(西廡)의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정록소(正錄所)·식당·양현고(養賢庫) 등의 건물이 완성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성균관이 경학 외에 기타 학과, 즉 신학문도 학습하는 곳으로 법규가 바뀌었다. 그러나 일본에 병탄된 지 1년 만에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강요당하여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면서, 최고학부로서의 교육기능을 상실당하고 석전향사(釋奠享祀)와 재산관리를 주임무로 하는 기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뒤 전국 유림들에 의한 성균관 교육기능의 회복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1930년에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院)으로 승격되는 부령(府令)이 공포되었으며, 1942년에 재단법인 명륜전문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어 신입생을 뽑고 교육에 임하였으나, 그 다음해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광분하느라 폐교 조치되고 말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명륜전문학교가 부활되고, 경학원도 성균관으로 환원되었다. 그 이듬해인 1946년에 명륜전문학교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그 대신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이 설립되고 현재의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하였다.

2).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
고려말과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조선 건국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3). 성균관. 종교학대사전. 1998.8.20/한국사전 연구사.

우리나라의 옛 대학(大學)으로 그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 국학(國學)을 성균관으로 개명한데서 시작되었으며 공민왕 때는 국자감(國子監)이라 부르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이조 일대를 걸쳐 우리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1398년 이태조는 숭교방(崇敎坊一明儉洞)에 성균관 건물을 준공하고 고려 제도대로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재(齋)를 두었으며, 태종은 땅과 노비를 지급하고 친히 문묘에서 제사를 지냈고 왕세자의 입학을 명령하였다. 이후 이것은 상례가 되었으며 여러 왕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연해의 섬(島), 전라남도 해안의 어장(漁場)과 많은 땅이 부속되었다.
................. 8ㆍ15해방 후에 성균관 대학교로 발전하였다.

4). 성균관
[ 成均館 ]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이은석/2006.11.15/(주)신원문화사.

조선 시대 최고 교육 기관이다. 고려 시대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을 성균관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의 것을 가리킨다......
.....1946년 성균관 대학이 설립되어 그 전통을 이어 나가고 있다.

 

 

 
4. 宮으로 표현되는 성균관에 대한 사전적 서술내용.  

한국민족문화 대백과는 성균관을 반궁(泮宮).근궁(芹宮)으로 서술함.  필자가 첨언하여 설명하면 泮宮은 학교형태의 宮이란 의미이고, 芹宮은 문묘(文廟:공자를 모신사당)를 가리키는말로 공자님에 대한 제사기능가진 제사기능의 宮이란 의미임. 국어사전에는 太學.學宮등이 비슷한 말로 되어 있습니다. 

 

5. 성균관대학교가 가지는 학술적 입장.

대학 소개란의 약사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였음.

600년 민족교육의 산실 성균관대학교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민족의 얼을 계승해 나아가는 민족의 대학으로 남아 있으리라!

우리나라 국립 최고학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해 수도에 태학을 설립해서 자제들을 교육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 왕조시대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던 보교의 역사는 바로 이 고구려의 태학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본교에서는 건학원년을 서기 1398년으로 잡고 있다. 그 이유는 성균관이라는 교명과 현 학교위치를 고려해서이다. 즉 조선조 개국후,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중앙의 국립 최고학부의 개설을 서둘러, 동북방 숭교방(현 명륜캠퍼스 위치)에 성균관을 설립했으니, 이가 바로 본 대학교의 개교다.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해서 국립 최고학부로 설립된 본 대학교는 역사의 변천에 따라 크게 고전대학시대와 근대 대학시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고전대학시대는 1398년에서 1894년까지를 말하며, 그 시대에는 전통적인 유교교육이 행해졌고, 제도적 운영도 고전적이었다.

그리고 근대 대학시대는 1895년에서 현재까지를 말하며, 이 시대에는 유교이념에 기본을 두고, 학문분야를 확대하여 유학이외에 근대학문이 요구하는 광범위한 교육이 행해지고 제도적 운영도 근본적인 것으로 발전하여 왔다.    

# 고전대학시대

....중략....

# 근대대학시대

근대 대학시대도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 1기는 개화기, 제 2기는 수난기, 제 3기는 발전기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개화기는 1895년에서 1910년 까지 즉, 을미년 성균관이 근대적인 대학으로 발족한때부터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때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1895년 칙령으로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를 설치하고 역사학.지리학.수학등 각종 강좌를 개설하는 동시에 교수임명제, 입학시험제, 졸업시험제를 실시하고 학기제, 연간의 수업일수, 주당 강의 시간수를 책정하는 등, 제도상 근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은 고전대학으로부터 근대 대학으로 일대 전환을 보게 되었다.

수난기는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안에 명륜학원이 설치되고, 다시 명륜전문학원으로 되었다가,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이 고등교육기관은 과거 최고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그 정통의 계승은 후에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나마 명륜전문학교는 민족해방 1년전인 1944년 명륜련성소로 개편되어 그 빛을 잃게 되었다.

# 현대 대학시대

발전기는 1945년 민족해방으로부터 현재까지이다. 그 중에서 제 1시기로는 성장기, 제 2시기로 발전기, 제 3시기로 확충기를 들 수 있다.

성장기는 단과대학시대라 할 수 있는데, 1945년에서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발전하기 직전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우선 1945년 9월 민족해방과 더불어 명륜전문학교를 부활시켰다. 명륜전문학교는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것은 아니었지만, 형식상 절차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 전국 유림대회가 열리고, 뒤이어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심산 김창숙 선생이 대표가 되었다.

이러한 성균관대학이 출범하려는 데에 있어서, 학봉 이석구(李錫九) 선생이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게 되고, 거기에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하게 되어,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이렇게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하여 출범한 성균관대학은 문학부와 정경학부의 2개 학부였는데 동양철학과, 문학과(국문학전공), 영문학전공, 불문학전공, 사학과가 문학부에 속하고 법률학과.정치학과.경제학과가 정경학부에 속하였다.

이하 생략...

 

6. 국자감과 성균관의 수업 연한. 그리고 조선의 과거제와 성균관 유생.  

 

1). 성균관의 수업연한.

 

조선 시대의 최고 교육 기관. 소과 합격자인 생원.진사가 입학 자격을 얻었다. 9년 간의 수업이 끝나면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출처: Basic 중학생이 알아야 할 사회.과학 상식, 2007.2.20/ 저자 이 안태/제공처 (주)신원문화사
2). 국자감(고려)의 수업연한.

 

.정원 및 수업 연한

 

고려의 학식(學式)에 의하면 정원은 국자학·대학·사문학이 각각 300인씩으로 모두 900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의 수용인원은 그에 미치지 못해 모두 60 내지 70인에 불과하였던 것 같고, 고려 말기에 가서 100인 정도의 정원을 확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기술학부의 정원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수요에 따라 증감이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조선 초기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율학이 40인 내외, 서학과 산학이 각각 15인 내외로 추측된다.

수업 연한은 대학에 진학하는 직접적인 목적이 과거준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과거에 합격하면 교육을 더 받을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수업 연한을 설정한다는 것은 별로 의의가 없었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자에게는 상한수업연한을 설정하였다. 유생(儒生)으로 9년, 율생(律生)으로 6년을 재학해 과거에 합격하지도 못하고 성업(成業)의 가망도 없는 자는 출학시켰다.

 

.수업 과목 및 교과 과정

수업과목과 이수연한은 『논어』·『효경』은 함께 1년을 한도로 이수하도록 되어 있고, 『상서』·『공양전』·『곡량전(穀梁傳)』은 각각 2년반, 『주역』과 『모시』·『주례』·『의례』는 각각 2년, 『예기』와 『좌전』은 각각 3년이었다.

그러나 중경(中經)에 해당되는 『주역』·『모시』·『주례』·『의례』가 각각 2년인데 비해 소경(小經)에 해당되는 『상서』·『공양전』·『곡량전』이 2년 반이라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결국 소경의 이수연한은 2년 반이 아니라 1년 반의 잘못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수연한은 최장의 연한을 말하는 것으로 능력에 따라 그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 율학 이외의 서학과 산학도 기록이 자세하지 않으나, 율학에 준해 최고 6년을 한도로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교과과정은 유학학부에 있어서 교양필수과목이 『논어』와 『효경』이었으며 전공과목은 『주역』과 『상서』·『주례』·『예기』·『의례』·『모시』·『좌전』·『공양전』·『곡량전』의 9경으로 되어 있다.

그 밖에 산술(算術)과 시무책(時務策)을 익히고, 여기에 매일 한장씩의 습자를 하였으며, 『국어(國語)』와 『설문(說文)』·『자양(字樣)』·『자림(字林)』·『삼창(三倉)』·『이아(爾雅)』를 읽도록 되어 있다.

산술과 시무책·습자를 과한 것은 장차 관리가 됨에 있어서 그 기초교양을 갖추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으며, 자전류(字典類)가 과해진 것은 문자생활의 원숙을 기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전공과목은 전공하는 경서 하나를 완전히 이수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옮기지 못하였으며, 전공하는 경서의 선택은 희망에 따라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특전

 

국자감의 학생에게는 과거응시에 대한 특전이 주어졌다. 과거에 응시하려면 전국에서 실시하는 예비시험에 합격해야 하였고, 다시 국자감에서 행하는 재시험 즉 감시(監試)에 합격해야만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국자감의 학생은 입학해 3년을 수학하면 성적에 관계없이 예비시험이 면제되어 직접 감시를 거쳐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더욱이, 학업성적이 우수한 자는 감시뿐만 아니라 과거의 제1장 또는 제2장까지 면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학예(學藝)를 시험해 그 성적이 4분(分) 이상 13분 이하가 되는 자에게는 과거의 제1장을 면제하고 제2장에 나아가 응시할 자격을 주었고, 14분 이상이 되는 자에게는 과거의 제1장과 제2장을 모두 면제하고 직접 제3장에 나아가 응시할 자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려시대의 최고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국자감은 성균관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그 명칭과 기능은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성균관

 

.출처: 국자감[國子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원점[圓點]

 

조선시대 성균관·사학(四學)에서 행한 출석 점수.

 

기숙하면서 공부하는 기재생(寄齋生)들의 거관일수(居館日數)를 확인하기 위하여 시행하였다. 특히 성균관의 경우 생원.진사를 성균관에 거재(居齋)하게 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아침·저녁 두 번 식당에 들어가서 서명해야 원점 1점을 얻고, 원점 300점을 취득한 자, 즉 300일간 성균관에서 거관한 유생에게만 과거(科擧:文科)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그러나 식년(式年:과거를 정기적으로 시행한 해)이 지난 다음 친상(親喪)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친 자와 70세 이상의 늙고 병든 부모를 모신 자에게는 원점에 관계없이 응시자격을 주었다. 생원.진사들의 성균관 거관을 장려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지만, 거관자가 많지 않았고 때로는 대리 서명하는 자가 있었다.

1487년(성종 18) 원점법을 강화하여 "생원.진사중 게으른 자가 거관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유적(儒籍)에 서명하여 원점 300점이 되는 자가 있으니, 차후로는 아침·저녁 식사때마다 관원이 친히 유생들을 점검하여 도기(到記:출석부)에 적어서 봉인하고, 월말에 장관이 담당관과 함께 친히 원점을 계산하여 명부에 기록하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이 서압(署押)하여 후일의 증거로 삼도록 한다"고 규정하였다.

 

.출처: 원점[圓點] (두산백과)

 

4). 성균관의 수업연한.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에 나누어 기숙하면서 공부하였는데, 이들은 아침·저녁 식사 때마다 식당에 비치된 명부인 도기(到記)에 서명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원점(圓點)을 계산하는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 아침·저녁 두번 식당에 들어가 서명해야 원점 1점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원점은 오늘날의 출석점수와 같은 것으로서 성균관 유생들로 하여금 동·서재에 기숙하면서 학업에 열중하게 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원칙적으로 이 원점 300점을 취득한 자, 즉 성균관에서 통산 300일 이상 기숙하며 공부한 유생에게만 관시(館試 : 성균관유생에게만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준 문과 초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성균관의 교육내용은 가장 기본적인 ≪대학≫·≪논어≫·≪맹자≫·≪중용≫의 사서와 ≪예기≫·≪춘추≫·≪시전≫·≪서전≫·≪주역≫의 오경을 비롯하여 ≪근사록 近思錄≫·≪성리대전 性理大全≫·≪통감 通監≫·≪좌전 左傳≫·≪송원절요 宋元節要≫·≪경국대전≫·≪동국정운≫ 등이었는데, 과거과목에 따라서 변동이 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시(詩)·부(賦)·송(頌)·책(策)과 같은 글을 짓는 방법을 비롯하여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頫)의 필법도 익히게 하였다. 주자학(朱子學) 이외의 이단서(異端書)는 학령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철저하게 배격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재학중 학습한 내용에 대한 교육평가로는 학령에 명시되어 있는 학관일강과 순과를 비롯하여 예조월강(禮曹月講)이 있었는데, 그 성적은 연말에 종합되어 식년시와 천거(薦擧)에 참작되었다.

한편, 성균관유생들은 과거에 있어서 여러가지 특전을 부여받았는데, 관시·알성시(謁聖試)·춘추도회(春秋都會) 등이 그것이며, 그 밖에 천거의 특전을 받기도 하였다.

성균관은 문과 준비를 위한 과업교육(科業敎育)을 담당하는 기관이었기에, 입학규정은 엄하면서도 일정한 재학기간이나 졸업일이 없었다. 과거에 합격하는 날이 바로 졸업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성균관[成均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성균관의 유생

성균관은 관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주로 양반의 자제들에게 입학 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양반의 자제라 하더라도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했다. 성균관의 입학자격은 첫째 성균관 입학시험에 합격한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둘째 사학(四學)ㆍ문음(門蔭)의 승보생(陞補生)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셋째 문과 향ㆍ한성시 일도(一度) 합격자, 현직 관리 중 참상(參上), 참외관(參外官) 등은 시험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생원ㆍ진사는 식년 과거의 소과인 생원ㆍ진사시에 합격함으로써 주어지는 명칭이다. 이 생원ㆍ진사는 향교의 교도나 미관말직에 취직할 수 있으나 고관으로 출세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많은 생원ㆍ진사들은 고관으로 출세할 수 있는 대과인 문과에 급제해야 했다. 이 문과에 급제하려면,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것이 빠른 길의 하나였다. 성균관에 입학한 생원ㆍ진사를 상재생(上齋生)이라고 했다.

 

. 출처: 조선시대의 교육(한국교육사이해, 2010.6.10, 도서출판 하우) /피정만  

 

6).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와 교육.

 

가) 과거의 종류와 내용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3년에 한 번씩 시행되었다. 이를 식년시(式年試)라고 한다. 식년시는 정규적인 시험이며 그 규모가 가장 컸다. 그리고 국가의 경축이나 필요가 있을 때에 과거를 보는 별시(別試)가 있었다. 식년시는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의 대표적인 시험으로 문과와 무과와 잡과의 3종으로 대별할 수가 있다.

문과 시험은 소과와 대과로 대별된다. 소과는 대과에 응시하기 전에 보는 시험으로서,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누어진다. 생원시는 경서를 외는 시험이고, 진사시는 문장을 짓는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대과는 관리(문관)로 임용되는 시험으로 조선시대에 최고의 시험 단계이다.

무과는 무관을 선발하는 시험이다. 무과는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생긴 과거시험이다. 고려 말기에 무과 시험을 제정했으나 실제는 시행을 하지 못하였다. 무과는 문과 시험에 비하여 중시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관제에서 양반을 형성하는 문관 무관 중에서 무관을 채용하는 시험이다. 잡과는 국가의 필요한 기술 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이다.

 

a. 문과(文科 : 대과(大科)

문과는 과거시험에서 최종 단계의 시험으로, 이 시험에 합격하면 관리로 등용되는 것이다. 문과 시험은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3단계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초시와 복시는 삼장연권법(三場連卷法)에 의하여 각각 초장(初場), 중장(中場), 종장(終場)의 3단계로 나누어진다. 과거시험의 초시와 복시는 고시 과목이 동일하다. 초시와 복시의 초장은 사서오경의 경학을 시험한다. 중장에서는 고시 과목이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으나 경국대전에서는 부(賦), 송(頌), 명(銘), 잠(箴), 기(記) 중에서 1편, 표(表)와 전(箋) 중에서 1편을 고사한다. 그러나 4글자씩 맞추어 짓는 송, 명, 잠, 기 등은 짓기가 쉽기 때문에 출제하는 일이 드물고, 부 1편 표와 전 중에서 1편을 시험보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종장에서는 책문(策問)만을 시험 보였다.

 

문과 시험에서의 선발 인원은 초시와 복시가 다르다. 문과 초시에서는 성균관에 재학하는 유생에서 관시로 50명을 선발한다. 그리고 도성에 거주하는 유생에게 시험하는 한성시에서 40명을 선발하고, 지방에 거주하는 유생을 시험하는 향시에서는 경기 20명,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각 25명, 경상도에서 30명, 강원도와 평안도에서 각각 15명, 황해도와 영안도에서 각 10명을 선발한다. 문과 초시의 선발 인원은 240명이다. 그리고 문과 복시에는 33명을 선발한다. 문과 복시에 합격한 유생은 다시 왕이 친임하는 전시에 가서 시험하며, 성적순에 따라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분류된다. 이 성적은 과거 급제자의 관리 등용에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b. 생원 진사시(소과(小科)

조선시대의 생원 진사시는 성균관의 입학시험이다.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은 성균관에서 300일을 재학하여 원점 300점을 취득한 후, 문과에 응시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의 원칙이었다. 생원 진사시의 시험 단계는 초시와 복시로 나누어진다. 생원시의 고시 과목은 조선 초에 사서(四書)의 의(疑) 1편과 오경(五經

 

. 출처: 조선시대의 교육(한국교육사이해, 2010.6.10, 도서출판 하우) /피정만

 

* 필자 주 3). 성균관의 교육 연한은 기본적으로 9년이었습니다. 9년을 공부하고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료를 대략 정리하면, 상재생으로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은 성균관에서 300일을 재학하여 원점 300점을 취득한 후, 文科(大科)에 응시할 수 있게 됩니다.  문과(대과) 시험은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3단계입니다.  문과 초시에서는 성균관에 재학하는 유생의 경우, 관시로 50명을 선발합니다. 다른 경로의 인원까지 합쳐, 문과 초시 선발인원은 240명, 문과 복시는 33명을 선발합니다. 문과 복시에 합격한 유생은 다시 왕이 친임하는 전시에 가서 시험하며, 성적순에 따라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분류된다. 이 성적은 과거 급제자의 관리 등용에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성균관 유생인 상재생 같은 경우 300점의 원점으로 대과 초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어, 합격하게 되면 복시, 전시까지 응시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9년이 지나도 불합격하면 그들 각자의 진로가 어찌되었는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연구해 본적이 없습니다.     

 

* 필자 주 3-1). 사부학당. 성적이 우수한 자로 15세가 되어 승보시(陞補試)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진학시킨 내용.

 

사부학당은 성균관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교육정도가 낮으나 교육방법·교육내용 등에서는 성균관과 비슷하였다. 따라서 성균관의 부속학교와 같은 성격을 띠었으며, 성균관과는 달리 문묘(文廟)를 설치하지 않고 교육만을 전담하였다.

학생정원은 학당마다 100명이었으며 재사(齋舍:기숙사)제도를 마련하여 학비 및 운영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하였다. 국가에서는 학생의 교육을 위하여 학전(學田)·노비·잡물 등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연안에 있는 여러 섬들의 어장(漁場)을 주어 그 세(稅)로써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교관 이하 학당에 필요한 모든 인원은 성균관에 소속된 인원이 파견되었다. 이에 따라 교수·훈도 각 2명을 두고 성균관 관원으로 겸직하게 하였으나 뒤에는 각 1명씩을 감하는 대신 겸직을 없앴다. 또한 성균관·예조·사헌부의 직원으로 하여금 학당의 수업상태를 항상 감독하도록 하였다.

입학자격은 양반과 서인의 자제로서 8세가 되면 입학을 허락하여 ≪소학≫과 사서오경을 위주로 교수하였으며, 그 밖에 ≪근사록 近思錄≫과 제사(諸史) 등을 다루었다. 성적이 우수한 자로 15세가 되어 승보시(陞補試)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진학시켰다.

학당에서는 5일마다 시험을 치르고 예조에서는 매달 시험을 쳐서 1년의 성적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또한 15일은 제술(製述), 15일은 경사(經史)를 감독하여 우수한 사람 5명을 뽑아 생원·진사시험에 직접 응시하게 하였으며, 매년 실시되는 6월회시(六月會試)의 우등자도 1, 2명은 생원·진사의 회시에 직접 응시하게 하였다. 그 밖에 유생에게 원점(圓點)에 따라 알성시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유생들은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유소(儒疏)·권당(捲堂) 등의 학생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새로이 진출한 사림(士林)을 도와 훈구관료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학당은 실제운영에 있어서 입학하는 학생수가 정원보다 적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는 등으로 보아, 교육활동은 다소 부진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 출처: 사부학당[四部學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3-2). 조선시대의 학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최고학부인 성균관을 서울에 두었고, 중등학교에 해당하는 4부 학당과 향교를 설치하여 양반 자제들의 교육을 맡게 하였으며, 그 밑에 사립 초등학교인 서당이 있었다.

근대에 이르러 신학문의 교육을 위하여 처음으로 세워진 학교는 1886년(고종 23)의 육영공원(育英公院)이었으며,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교육제도가 마련되어 각급 공립학교가 세워졌다. 사학계에서는 선교사들에 의한 배재학당(1885)·이화학당(1887) 등의 학교 설립에 자극되어 각지에 사립학교가 세워졌다. 한편, 국민교육기관으로서의 초등학교가 성립된 것은 1895년 이후의 일이다.

 

.출처: 학교의 역사(두산백과)

 

* 필자 주 3-3). 휘문고에 대한 설명. 필자는 을사조약 이전인 1904년 개교역사에 비중을 두고, 이후에 고종황제 칙명으로 휘문의숙이라 칭한점에 유의하고 있음. 민영휘는 현재 친일파로 지탄받고 있는 복잡함도 있으나 고종황제 칙명이 있어서 기록해 둠. 친일파 부분이 문제가 있는것은 알겠으며, 역사적으로는 광성의숙을 고종황제가 휘문의숙으로 칭한점을 인정하며, 이전의 "향교", "사부학당"같은  制度性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음.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사립고등학교이다. 1904년 9월 하정 민영휘가 '광성의숙'을 창립하여 개교하였으며 1906년 5월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휘문의숙'으로 칭하였다. 

 

. 출처: 휘문고등학교[Whimoon High School, 徽文高等學校] (두산백과)

 

* 필자 주 3-4). 양정고에 대한 설명. 국왕이 인정한 사례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이전의 "향교", "사부학당", "서원"같은 制度性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음.

 

 1905년 2월 양정의숙을 도렴방(현 도렴동 105-1 및 106-1)에 설립하였다. 1913년 2월 재단법인 인가를 받고 엄주익 선생이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13년 9월 양정고등보통학교로 개편하였다. 
 
. 출처: 양정고등학교[Yangchung High-school, 養正高等學校] (두산백과)
 
* 필자 주 3-5). 육영공원에 대한 설명.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이지만, 국왕이 관심가지고 개입한 사례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이전의 "향교", "사부학당"같은 제도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음.
 
. 개요: 조선 후기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으로 근대적 신교육으로 발전하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으나, 영어교육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고급 양반 자제만을 대상으로 삼는 등 국민 대중 교육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용

 

강화도조약(1876)의 체결 후, 서양 근대 문명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동시에 국내 선각자들도 해외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정부차원에서도 선진 문물을 도입하기 위해 해외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내에 근대식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해야 함을 절감하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관립 교육기관이 육영공원(育英公院)이다.

일본과 중국을 돌아보고 1883년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로 갔다가 돌아온 민영익(閔泳翊)을 비롯하여 개화파인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변수(邊燧) 등이 국가 근대화를 위해서 근대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갑신정변등 국내의 정치적 소요로 미루어 오다가, 미국에서 헐버트(H. B. Hulbert)·길모어(G. W. Gilmore)·번커(D. A. Bunker) 등 세 명의 교사가 옴으로써 1886년 9월 23일에 개교하였다. 학교 이름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은 ‘(젊은) 영재를 기르는 공립학교’라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서울 정동에 설립하였으나 1891년 전동으로 이전하였다.........

육영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교이긴 하였으나, 지나치게 영어만을 강조하고 외국인 교수만을 채용하는 한편 고급 양반 자제만을 대상으로 하는 등 서민들과는 친숙하지 못하고 국민 대중을 교육하여 계몽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재정난 등이 겹쳐 설립된 지 불과 8년 만에 폐교되었다(1894).

 

.출처: 육영공원[育英公院] (두산백과) 

 

* 필자 주 3-6). 배재학당. 그 역사적 출발이 1885년 서울에 설립된 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설명되며, "향교","사부학당"은 물론 아님. "서원"같은 제도성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음. 단지 근대적 중등과정 사립학교며, 고종이 교명과 額을 내려준 사실이 인정되고 있음.  

 

  • 사립학교

  • 설립일시

    1885년(고종 12) 8월 3일

  • 설립자

    아펜젤러(Appenzeller, H.G.)

정의

1885년(고종 12) 서울에 설립되었던 중등과정의 사립학교.

 

개설

미국의 북감리회(北監理會) 선교부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인이 설립한 근대적 사학(私學)이다.

 

연원 및 변천

아펜젤러는 1885년 6월 21일 인천에 두 번째 입국하여 7월 19일 서울에 들어와서 1개월 먼저 와 있던 의사 스크랜튼(Scranton,W.B)의 집 한 채를 산 다음 방 두 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 해 8월 3일에 이겸라(李謙羅)·고영필(高永弼)이라는 두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폴크 공사(公使)는 고종(高宗)에게 아펜젤러에 관하여 아뢰었고, 동시에 그가 영어학교를 설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 당시 고종은 아펜젤러가 열심히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또 앞으로 여러 학생을 교육할 학교를 세울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 학교 사업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1886년 6월 8일 인재를 배양하는 ‘배재학당’이라는 교명(校名)과 액(額, 학교 간판)을 내려 주었다.

 
.출처:  배재학당[培材學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3-6-a). 두산백과에서 배재학당에 대한 설명.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 이 설명을 인정하며 다른 부분은 여기에 기록해두지 않음.
 
배재학당[ 培材學堂 ]
 
 
. 요약: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
   . 개교일:1885년
  • 설립자

    H.G.아펜젤러

  • 소재지

    서울

  • 교훈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

. 출처: 배재학당[培材學堂] (두산백과)

 

* 필자 주 3-7). 이화학당에 대한 설명. 1908년 제 1회 중등과 졸업생 배출부분을 인정함. 을사조약 이후인 1910년 4년제의 대학과 설치는 조선정부의 전통적 제도가 아니므로 중등학교로서의 역사만 인정함.  여자교육이 없던 조선(한국)에서 서양문물에 관심가지던 당시 고종이 배재학당처럼 교명과 현판을 하사한점은 인정되나 배재학당이 사립학교인 "서원" 유교교육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는 유교 교육기구는 아니었기 때문에 다만 고종이 외국문물에 관심가지고 인정해 준 역사성만 인정해 줄수 있음. 이화학당은 그 역사적 출발과 성격이 을사조약 이전의 중등과 여자학교이므로 남자들의 "향교.사부학당"이 아니며, 사립 중등학교 과정인 "서원"도 물론 아님.  

 

이화학당

  • 국가

    한국

  • 소재지

    서울 중구 정동

  • 건립기간

    1886년

  • 건립자

    스크랜턴 부인(Scranton, M.F)

이화학당은 1886년(고종 23) 해외여성선교회에서 파견된 메리 F.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서울 황화방(皇華坊), 지금의 중구(中區) 정동(貞洞)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여성교육기관이다. 제1대 당장인 스크랜튼의 교육이념은 기독교 교육을 통하여 한국여성들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 양성하는 것’, 즉 한국인의 긍지와 존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한국인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887년 2월에는 고종황제가 외아문을 통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하였다. 이는 조선의 사액서원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이화학당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임을 의미한다. 이화라는 교명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은 점차 학제를 정비하여 1904년에는 중등과를, 1908년에는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함으로써 마침내 보통·중등·고등과정의 일관된 학제를 마련하였다. 이화가 중등과를 먼저 설치한 것은 이화의 교육이 여성의 고등교육을 지향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교사 양성이 시급했던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수렴한 것이었다. 이화학당은 1908년 6월 5명의 제1회 중등과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10년에는 4년제의 대학과를 설치하여 1914년 4월 신마실라·이화숙·김애식 등 한국 최초의 여대생을 배출하였다.  

 

. 출처: 이화학당[梨花學堂] (두산백과).

 

* 필자 주 3-7-a).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서의 이화학당 설명. 필자가 인정되는 부분만 발췌함.

 

이화학당

 

1886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초·중·고등과정의 사립학교.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의 교육제도와 교육내용은 남성을 위한 것이지, 여성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그 전대(前代)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여성은 독자적인 개인이라기보다 남성의 그늘로 이해되었다.

여기에 1886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Scranton,M.F.)부인이 한 여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1887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이름을 내린 것으로 시작된다.

 
.출처: 이화학당[梨花學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3-8).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대한 설명.
 
(가). 필자의 견해.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의하면, 그 전신은 1885년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 알렌이 고종의 위촉으로 설립한 국립병원 광혜원에서 비롯된다. 이를 볼 때 광혜원으로서 병원을 인정받은 특성은 인정됨. 그런데,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설명된 바 自意에 의해 조정과의 관계단절부분이 발견되었음. 그 내용은 ..."1894년부터 조정과 관계를 끊고 선교부에서 전담 관리하는 병원과 학교를 재조직하였다. 1899년 4월에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3년에는 학교 내에 간호원양성소를 설치하였다"는 부분임. 
 
이를 볼 때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는 조선 조정과 관계없으며, 1904년부터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가 기부한 기금에 의해 개편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가 세브란스 대학(1904년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모태임.  
 
(a). 연세대학교(1957년 세브란스 의대와 연희대를 통합)를 설명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에서 다음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음. "제중원 의학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되었고.... 이후 1909년 세브란스 의학교, 191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1917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과정 보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해당부분
 

....이후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L. H. Severance)가 기부한 기금으로 1904년 세브란스병원이 개원하면서 제중원의학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되었고, 1906년 간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간호대학)를 부설하였다.

1908년에는 제1회 졸업생 7명에게 정부로부터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는 최초의 의사면허증이 발급되었다.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 191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17년에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인가되었다 

 
(b). 조선 조정과 관계없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1904년의 일. 해방후 세브란스 의과대학)와 연희전문학교(해방후 연희대학)가 통합하여 1957년 연세대학교가 되었음. 이를 볼 때 원래의 의도대로 한국 국사에 나오는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과 연계되는 Royal대학 자격은 御 서강대(宮 성균관대=御 서강대) 이외의 대학에 부여키 어려움. 다만 일본강점기 이전의 의학전문학교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자격부분은 인정함.  
 
(나). 세브란스의과대학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설명 
 
  
내용

 

그 전신은 1885년 4월에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 알렌(Allen,H.N.)이 고종의 위촉으로 설립한 국립병원 광혜원(廣惠院)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치료뿐만 아니라 학생을 선발하여 서양의술을 학습하게 하였는데, 1886년 3월에 일종의 의학실습교육으로 학생 16명을 뽑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광혜원은 그 뒤 제중원(濟衆院)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재정 및 운영이 곤란해지자 1893년 북장로회 선교본부에서 병원 일을 전담할 의사 에비슨(Avison,O.R.)을 파견하였다.

그는 1894년부터 조정과 관계를 끊고 선교부에서 전담 관리하는 병원과 학교를 재조직하였다. 1899년 4월에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3년에는 학교 내에 간호원양성소를 설치하였다.

1899년 미국에 있는 세브란스(Severance,L.H.)로부터 기증받은 기금으로 1904년에 병원을 신축하고 교육기관을 확장하여 의학교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08년 6월에 제1회 졸업생 7명에게 졸업증과 내과 및 외과 의사자격증을 주어, 이 졸업생들은 정부에서 정식 인정과 개업 면허장을 받기도 하였다.

1909년 7월에 교명을 세브란스의학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우리 나라 최초의 간호사 1명을 배출하였으며, 1913년에는 다시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처음으로 인턴제도를 실시하였다.

 
.출처:  세브란스 의과대학[─醫科大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다). 연희대학교에 대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의 설명.
 

한편, 연희대학교는 1915년 3월 미국 북장로교·남북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력을 얻어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가 YMCA 구내에 설립한 조선기독교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이 그 시초이다.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설립된 민족 교육기관으로 문과·이과·상과·농과를 설치하여 학교의 편제와 교과과정, 교수진이 대학의 체계를 갖추었고, 졸업생에게는 학사학위가 수여되었다.

초대 교장에 언더우드가 취임하고, 부교장에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교장이었던 에비슨이 겸임하였다. 한국인 교수로는 백낙준(白樂濬)·유억겸(兪億兼)·정인보(鄭寅普)·최현배(崔鉉培)·조병옥(趙炳玉)·백남운(白南雲)·이춘호(李春昊)·이관용(李瓘鎔) 등이 강단에 섰다.

1916년 12월 에비슨이 제2대 교장으로 선임되었고, 1917년 4월 연희전문학교로 개편하여 문과·상과·신과(神科)·농과·수물과·응용화학과를 두었는데,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1919년 최초의 졸업생 22명을 배출하였고, 1944년 4월 일제로부터 재산을 몰수당하고 한국인 경연진과 교수진이 추방되면서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광복과 함께 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환원하고, 유억겸이 교장에 취임하였다가 1945년 12월 백낙준이 후임으로 취임하였다. 1946년 8월 연희대학교로 승격하여 문학원·상학원·이학원·신학원에 11개 학과를 편성하고 초대 학장에 백낙준이 취임하였다.

 

.출처: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라). 연희대학교와 통합한 연세대학교에 대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의 설명.

 

 

세브란스의과대학의 모체는 제중원(濟衆院)의 의학부이다. 제중원은 1885년 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Horace Newton Allen)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의료기관이었는데, 이듬해인 1886년 3월 29일 이 제중원 내에 의학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최초의 입학생은 16명이었다.

1893년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에비슨(Oliver R. Avison)이 제중원의 4대 원장으로 취임하였고... 

이후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L. H. Severance)가 기부한 기금으로 1904년 세브란스병원이 개원하면서 제중원의학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되었고, 1906년 간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간호대학)를 부설하였다.

1908년에는 제1회 졸업생 7명에게 정부로부터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는 최초의 의사면허증이 발급되었다.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 191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17년에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인가되었다.

1922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본과 외에 연구과·별과·선과를 설치하였다. 1942년 일제의 강요로 아사히의학전문학교(旭醫學專門學校)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나 광복 후 1945년 8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회복하고, 1947년 6년제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개편하였다.

한편, 연희대학교는 1915년 3월 미국 북장로교·남북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력을 얻어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가 YMCA 구내에 설립한 조선기독교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이 그 시초이다.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설립된 민족 교육기관으로 문과·이과·상과·농과를 설치하여 학교의 편제와 교과과정, 교수진이 대학의 체계를 갖추었고, 졸업생에게는 학사학위가 수여되었다.

초대 교장에 언더우드가 취임하고, 부교장에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교장이었던 에비슨이 겸임하였다. 한국인 교수로는 백낙준(白樂濬)·유억겸(兪億兼)·정인보(鄭寅普)·최현배(崔鉉培)·조병옥(趙炳玉)·백남운(白南雲)·이춘호(李春昊)·이관용(李瓘鎔) 등이 강단에 섰다.

1916년 12월 에비슨이 제2대 교장으로 선임되었고, 1917년 4월 연희전문학교로 개편하여 문과·상과·신과(神科)·농과·수물과·응용화학과를 두었는데,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1919년 최초의 졸업생 22명을 배출하였고, 1944년 4월 일제로부터 재산을 몰수당하고 한국인 경연진과 교수진이 추방되면서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광복과 함께 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환원하고, 유억겸이 교장에 취임하였다가 1945년 12월 백낙준이 후임으로 취임하였다. 1946년 8월 연희대학교로 승격하여 문학원·상학원·이학원·신학원에 11개 학과를 편성하고 초대 학장에 백낙준이 취임하였다.

1950년에 대학원을 신설하고 문과대학·상경대학·이공대학·신과대학의 4개 대학 17개 학과로 증설하였다. 그 뒤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하였다가 1953년 8월 본교로 복귀하였고, 1954년에 정법대학을 신설하였다.

1957년 1월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이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새롭게 출범하게 되는데,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의 병합은 이미 1920년대에 그 시도가 있었다.

 
.출처: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3-9). 승보시[陞補試]

 

고려에서는 1147년(의종 1) 제정되어 시부(詩賦) ·경의(經義) 등을 시험하여 생원(生員)을 뽑았으며, 조선에서는 성균관(成均館) ·사학(四學) 제도가 정비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조선의 승보시는 소과(小科)의 초시(初試)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학 유생(四學儒生) 중에서 15세가 되어 성적이 우수한 자를 시험하여 성균관기재(成均館寄齋)에 입학시키는 제도인데, 여기에 합격하면 소과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이 시험은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정3품)이 매달 1일과 15일에 사학유생들을 부(賦) 1편, 고시(古詩) 1편을 시험하여 연말에 그 분수(分數 :점수)를 합산하여 10분(分) 이상자 10명(후에 12명)을 뽑아 예조에 보고하여 원에 따라 생원시 ·진사시의 복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거나 또는 성균관 기재생으로 입학할 자격을 주었다.

이들이 성균관에 입학하면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여 비록 정규 학생은 아니더라도 상재생(上齋生)과 함께 성균관 유생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사학유생들이 모두 서울의 명문 세도집안의 자제들이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승보시는 이들 명문가의 자제들에게 부여된 특권의 하나였다.

처음 매달 2회씩 시행하던 승보시는 뒤에 가서 1년에 10회, 또는 12회로 줄였다가 이것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6∼7회로써 끝내기도 하였다. 서울의 사학 외에 개성(開城) ·수원(水原) ·제주(濟州)에서도 실시, 유수(留守)나 목사(牧使)가 고시하여 개성과 수원은 4명, 제주는 2명을 뽑아 소과 복시의 응시 자격을 주었다.

 

 

. 출처: 승보시[陞補試] (두산백과)

 

마). 기타 왕이나 국가에서 개입하지 않고 舊韓末과 을사조약이후 일본 강점기에 조선(대한제국) 국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때 세워진 전문학교나, 학당(중등학교 정도), 여학교 정도의 비신분제 학교들.

 

이들 전문학교나 학당정도의 중등학교.여학교들은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 의전)나 이화학당과 마찬가지로  왕족이나 양반계층을 위한 대학(성균관), 중등학교(향교,사부학당,서원)들은 물론 아니었음.   

 

(a).  고려대학교.

 

.설립일시

 

1905년 5월 5일

 

  • 설립자

    이용익(李容翊)

  • 대표자

    김병철

정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설립목적

설립 당시의 교명인 ‘보성(普成)’은 널리 인간의 본성을 계발하고 인간성을 실현시키려는 설립정신을 나타내고 있으며, 인재 양성을 통한 주권 회복으로 독립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교육구국과 자주독립을 그 건학이념으로 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1905년 5월 5일 대한제국 내장원경(內藏院卿) 이용익(李容翊)이 한성 전동(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전(前) 아어학교(俄語學校) 건물을 교사로 해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로 설립하였다. 이용익은 일본에 납치되어 체류하는 동안 일본의 근대교육기관을 견학하고 신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아 귀국 후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신념에서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기존의 사립학교들이 외국 선교사가 세운 학교임에 반하여,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인에 의하여 설립된 근대식 고등교육기관이었고, 국내 최초의 전문학교였다. 수업연한 2년의 법률학전문과와 이재학전문과(理財學專門科)를 설치하고, 초대 교장에 신해영(申海永)이 취임하였다.

1905년 9월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학생 22명을 인계받아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였다. 1907년 1월 법률학전문과ㆍ이재학전문과를 각각 법학과ㆍ경제과로 개칭하고 수업연한을 3년으로 연장하였으며, 같은 해 2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용익이 을사조약 이후 해외로 망명하였다가 1907년 3월 분사(憤死)하게 되자,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李鍾浩)가 학교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종호마저 1909년 안중근의 이토포살의거(伊藤砲殺義擧)에 연루되어 구금되자 학교는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듬해 보성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 윤익선(尹益善)이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와 의논하여 학교의 경영권을 천도교가 인수하였다.

1915년 4월 재단법인을 조직해야만 전문학교 인가를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한 일제의 「전문학교규칙시행령」에 따라 격을 낮춰 교명을 사립보성법률상업학교로 개칭하고 3년제의 법률과와 실업과를 두었다.

3ㆍ1운동 직후 손병희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또다시 학교 운영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교장 고원훈(高元勳)이 총독부에 전문학교 승격에 관한 타진을 거듭하는 한편, 김병로(金炳魯) 등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여 사회 각 계의 독지가들에게 학교의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의 민간 독지가 58명의 공동 발의로 1921년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가 발족하고, 1922년 「조선교육령」에 의거하여 정식으로 보성전문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 뒤 조선총독부의 지나친 간섭과 경제공황, 재단 경영의 악화 등으로 재정난에 빠지게 되자 1932년 김성수(金性洙)가 세운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인수되고 김성수는 교장에 취임하였다.

 

.출처: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3-10). 고려대는 1905년 5월 5일 대한제국 내장원경(內藏院卿) 이용익(李容翊)이 한성 전동(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전(前) 아어학교(俄語學校) 건물을 교사로 해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로 설립함.

 

* 필자 주 3-11). 이 용익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설명. 조선말기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난 서민의 아들로 보부상행상으로 자금을 모으고, 거부가 되었다고 서술.    

정의

1854(철종 5)∼1907. 조선 말기의 정치가.

개설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에 서당에서 수학하였다. 그 뒤 고향을 떠나 한때 보부상(褓負商)으로 행상하여 자금을 모았고, 함경남도 단천에 와서 금광에 투자, 거부가 되었다.

 
.출처:이용익[李容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b). 숭실대학교

숭실대학교

[ 崇實大學校 ]
 
  • 설립일시

    1897년 10월 10일

  • 설립자

    배위량(裵緯良, W. M. Baird)

  • 대표자

    한헌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연원 및 변천

숭실대학교는 1897년 10월 1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裵緯良, W. M. Baird)이 평안남도 평양 신양리에 있던 자택에서 13명의 학생을 데리고 학당을 개설한 것이 그 시초이다. 1901년에 선교사 소안론(蘇安論)의 기금으로 한식 기와로 된 2층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고, 당시 한문 교사였던 박자중(朴子重)에 의해 숭실학당(崇實學堂)으로 명명되었다.

그 뒤 교육열의 고조로 고등교육의 필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1906년 9월 대학부를 설치하고 중학부는 숭실중학교, 대학부는 숭실대학이라 명하였다.1906년 감리교 선교부가 대학 운용에 참가하면서 합성숭실대학(Union Christian College)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2명의 학생이 입학하여 1908년 대학부 제1회 졸업생 2명을 배출하였고, 1910년에는 재학생 수가 54명으로 증가되었다.

 

. 출처: 숭실대학교[崇實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3-12). 숭실학당은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처럼 왕이 현판을 내려주는 절차가 없던 학교로 왕족.양반과 관계없고 조선 정부가 세우지도 않은 비신분제 학당(중등과정)임. 향교,사부학당, 서원과 관계없음. 고종이나 조선(대한제국)정부와 관계없이 을사조약이후에 대학부를 설치한것으로 여겨지며, 한일병합이후에도 그렇게 대학을 설립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숭실전문학교로 변한 과정을 보임. 1906년에 대학부 설치하여 1908년에 대학부 졸업생 2명을 졸업시켰다고 나오는데 2년제 과정의 대학으로 보임. 아마 숭실대학이라 명칭한데서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이라 스스로 주장하는것 같지만 이는 조선.대한제국의 왕이나 정부기구에서 개입하지 않은 비공식적 대학부 설치같음. 평양에 있던 학교 이름을 서울에서 사용하는것도 문제가 있는 학교가 숭실대로 판단됨. 대학교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世界史 漢나라 太學, 國子監(그 후신이 京師大學堂, 북경대) 및 한국사의 고구려 太學, 고려 國子監, 조선 성균관(그 후신이 경학과, 성균관대)은 가장 正論的인 교과서 영역의 대학들임. 그리고 숭실대학은 별로 역사성도 없고, 왕이나 정부기구가 개입하지 않은  사립학교 차원의 비공식적 대학부설치 의미에, 일본강점기 이후의 대학명칭 사용사실과, 해방후 평양에서 남한으로  위치가 달라져 숭전대학등으로 이어지다 숭실대로 교명 변경한 학교라 국사나 참고서, 교과서차원의 공식적인 견해로 채택하기는 어렵고 숭실대가 그렇게 비공식적으로 왕과 한국 정부 인가 없이 대학명칭을 사용했다는건 알겠음.

 

* 필자 주 3-12-a). 공식적으로 한국 최초의 대학은 고구려 태학임. 다음 시사 상식사전의 내용대로 고구려의 지배계급을 양성하기 위한 국립대학이 고구려 태학인데, 이후 통일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 조선의 성균관으로 이어졌다고 하는게 정설임.

 

* 필자 주 3-12-b). 고구려 태학 설명

 

우리나라 최초의 교육기관은 고구려의 태학(太學)인데 이후 통일신라의 국학(國學), 고려의 국자감(國子監), 조선의 성균관(成均館)으로 이어졌다. 이들 교육기관은 고급관리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태학(太學)은 우리나라 학교의 시초로 고구려(高句麗)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설립되었다. 태학(太學)은 고구려(高句麗)의 지배계급을 양성하기 위한 국립대학으로 그 교육내용은 경학과 문학 및 무예를 가르쳐 지배자로서의 지식과 무용을 기르는데 힘썼으며 입학자격은 귀족자제에 국한하였다.

 

. 출처:고구려시대 태학[太學]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c).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淑明女子大學校 ]

 
  • 설립일시

    1938년 12월

  • 설립자

    숙명학원

  • 대표자

    황선혜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 있는 사립 여자종합대학교.

개설

1906년 5월 고종의 계비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에 의해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지금의 숙명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되어 1909년 숙명고등여학교,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되었고, 재단법인 숙명학원이 인가되었다.

이후 교장 이정숙(李貞淑)이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5년 세상을 떠나자 1936년 숙명학원과 숙명고등여학교 졸업생 성의경(成義敬)·김현실(金縣實)·송금선(宋金璇)·이숙종(李淑鍾) 및 김성수(金性洙) 등 사회인사의 주도로 숙명여자전문학교창립추진위원회가 조직되고, ‘숙명여전 설립 모금운동’이 전개되어 이후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숙명여자전문학교의 설립에 이르게 된다.

연원 및 변천

1938년 12월 재단법인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1939년 4월 서울 용산구 청파동 현재의 위치에서 가사과·기예과 각 40명, 전수과 50명으로 개교하였다. 1940년 본관·소강당·기숙사를 신축하였고, 1945년 11월 광복 후 초대 교장에 임숙재(任淑宰)가 취임하였다.

1948년 5월 숙명여자대학으로 승격되어 문학부에 국문학과·영문학과·미술학과·음악학과, 이학부에 이학과·가정학과를 두었고, 1953년 2월 문학부에 정경학과와 이학부에 약학과를 신설하였다. 1955년 3월 종합대학인 숙명여자대학교로 개편되어 문리과대학·정경대학·음악대학·약학대학으로 편성하고 대학원을 설치하고, 초대 총장에 임숙재가 취임하였다.

 
.출처: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3-13). 을사조약 이후 조선(대한제국)의 국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혼돈기에 세워진 명신여학교(지금의 숙명여고)가 시초로, 그  여자중등학교는 향교.사부학당.서원과 같은 교육기관은 물론 아님. 고종이 현판을 내려주지도 않고 국가에서 세운 학교도 아닌 구한말의 혼돈기에 세워진 사립학교 성격의 여학교가 명신여학교.숙명고등여학교.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성격임.

일본 강점기인 1936년 숙명여전 창립추진위의 설립으로 전문학교가 되었는데, 이는 조선의 국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혼란기에 세워진 일본강점기의 사립 여자 전문학교 성격임. 숙명여학교의 제대로 된 성격은 왕이나 국가기관이 개입하지 않고 세워진 1906년의 중등학교 성격 사립 여학교인 명신여학교.숙명고등여학교.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임.   

 

7. 고종때의 경학원부설, 과거제 철폐(새로운 관리등용법 마련), 3년제 경학과[입학시험을 통하여 학생을 선발하되 20세 이상 40세까지의 연령제한을 두었고, 졸업시험 합격자에게만 졸업증명서 교부. * 필자 주 4). 이 때의 3년제 경학과는 현재의 유럽의 3년제 대학과 비슷함], 무효조약인 을사조약이후 한일병합을 거쳐 최고학부 교육기능 상실, 왜곡된 전문학교 과정, 폐지, 복구 과정.

 

...이에 성균관 교육의 강화를 위하여 1887년(고종 24) 성균관에 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지만, 이것이 특수 귀족학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다 종래의 유학교육만을 답습함으로써 당시의 개화풍조에 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큰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뒤 1894년(고종 31)에 갑오경장의 단행으로 대부분의 관제가 근대적으로 개혁되고, 과거제도의 철폐와 함께 새로운 관리등용법이 마련됨으로써 성균관은 인재양성의 교육기능을 상실한 채 학무아문(學務衙門)의 성균관 급 상교서원국(成均館及庠敎書院局)으로 변신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895년에 성균관은 관제가 새로이 마련되어 장(長 : 學部 奏任官이 겸임) 1인, 교수(敎授 : 學部 判·奏任官이 겸임) 2인, 직원(直員 : 判任) 2인이 두어졌고, 경학과(經學科)의 설치로 교육기능이 부활되었다.

 

이때의 성균관은 종전의 성균관과 달리 개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나가는 동시에, 이러한 자세를 바탕으로 우리 나라 근대화에 대처해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새롭게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경학과의 학제도 옛 학제와 달리 3년제 학교로서 학급이 편성되고 학년이 전·후 2학기로 구분되었으며, 입학시험을 통하여 학생을 선발하되 20세 이상 40세까지의 연령제한을 두었고, 졸업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만 졸업증명서를 주어 졸업시켰다.

학과목도 많이 달라져서 유학 등의 전통적 학과목 외에 본국역사(本國歷史)가 필수과목으로, 만국역사(萬國歷史)·본국지지(本國地誌)·만국지지(萬國地誌)·산술이 선택과목으로 설치되었는데, 이듬해인 1896년에는 선택과목도 모두 필수과목으로 바뀌었다.

그 뒤 1905년(광무 9)에 성균관의 관제가 개정되어 장이 칙임관(勅任官)으로, 교수가 3인으로 늘어나면서 판임관(判任官)으로 바뀌고, 박사(博士 : 판임관) 3인이 신설되었다. 박사는 1907년(융희 1)에 사업(司業)으로 개칭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성균관이 경학 외에 기타 학과, 즉 신학문도 학습하는 곳으로 법규가 바뀌었다. 그러나 일본에 병탄된 지 1년 만에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강요당하여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면서, 최고학부로서의 교육기능을 상실당하고 석전향사(釋奠享祀)와 재산관리를 주임무로 하는 기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뒤 전국 유림들에 의한 성균관 교육기능의 회복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1930년에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院)으로 승격되는 부령(府令)이 공포되었으며, 1942년에 재단법인 명륜전문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어 신입생을 뽑고 교육에 임하였으나, 그 다음해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광분하느라 폐교 조치되고 말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명륜전문학교가 부활되고, 경학원도 성균관으로 환원되었다. 그 이듬해인 1946년에 명륜전문학교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그 대신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이 설립되고 현재의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하였다.

 

. 출처: 성균관[成均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8. 현재도 이어지는 유럽의 3년제 대학에 대한 설명. 그리고 성균관의 600년 역사의 정통성을 다시 상기함.

 

경성제대는 2년제로 시작한 대학교였음. 위키백과의 괴팅겐 대학교 편을 보면 18세기의 정규학업기간은 3년제로 6학기 였다고 합니다.

 

* 필자 주 4). 서울대의 전신 경성제국대학의 수업연한 2년에서 3년 연장 내용.

 

1929년 4월 처음으로 법문학부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34년에는 학부의 수업연한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였으며, 1938년 이공학부를 증설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경성대학으로 바뀌었다가,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이 공포되어 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경제전문학교·경성치과전문학교·경성이학전문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경성사범학교·경성여자사범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수원농림전문학교 등 9개 전문학교와 통합되어 지금의 국립 서울대학교로 바뀌었다

.출처:두산백과.

 

* 필자 주 5). 18세기의 정규학업기간은 3년제로 6학기 부분 설명. 

 

.........학생들과 사회1745년쯤이 되어 학생들의 숫자는 약 600명 정도로 고정되었고, 대학교는 이전부터 계획했던 것 처럼 주로 상류 가문들로부터 빠르게 좋은 평판을 얻었다. 18세기의 정규학업기간은 3년제로, 6학기이었다. 특히 헬름슈테트, 예나, 할레에서 괴팅겐으로 학교를 옮긴 학생들을 통해서 급속하게 학생들의 풍습이 퍼졌고 프리메이슨, 향우회와 같은 학생연합이 새로운 대학교에 나타났다.

 

.출처:위키백과, 괴팅겐 대학교.

 

* 필자 주 5-1). 유럽의 대학중 3년제과정을 가진 부분 설명.

 

 

* 고대신문 1433호(2002년 09월 09일) 기사[민유기(프랑스 파리 통신원)]중 프랑스 대학의 3년제 과정 기사는 이렇습니다.

 

(해외 대학가) 추가시험의 긴장과 새학년의 설렘이 공존하는 9월의 프랑스대학. 철저한 유급제도로 긴장감 높아

.....프랑스 대학은 3년제로 1.2학년 과정을 마치면 대학 교양 학위를 수여하고 3학년을 마치면 학사학위를 수여한다....... 

 

* 영국문화원이 전하는 영국이야기

...........

 

Q1 영국의 학사과정

.........

 

영국의 학사과정은 보통 3년으로 그 기간이 우리나라나 미국보다 1년 짧습니다. A-Level이나 학부 예비과정(Foundation Course)에서 교양과정을 이수했기 때문에 대학에서는 전공과목만을 3년간 공부합니다. 그래서 영국 학생들은 1년의 시간과 유학비용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학기는 보통 9월에 시작하며 3학기제(9월,1월,4월)로 운영됩니다........

 

* 국제 교환학생센터 쿨스텝스(COOLSTEPS)를 보면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학사 과정은 3년  

 

9월 또는 10월에 학기 시작 , 1년 3학기

영국대학 학사과정은 9월에 시작하며 3학기제로서 (9월,1월,4월) 보통 3년 과정으로 교양과정 없이 곧장 전공과목을 시작하게 된다. 영국 고등학생의 경우, 대입 지원 시 영국의 대입 시험인 A Level 시험 성적, 그 외 각종 영국의 자격 시험 성적을 제출 한다....

 

현대의 미국이나 다른 나라 대학제도에 영향준 유럽 대학교들의 학제는, 그 역사성이 있고 따져보면 철저한 유급제도, 1년 3학기제, 교양과목없이 전공과목 시작등 자기나라 전통을 지키는 나라도 많은것 같습니다. 여하튼 조선 최고대학 성균관은 위 7번 항목처럼 성균관--고종때의 3년제 경학과, 해방후의 성균관대 변천과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수난기인 일본강점기때는 명륜학원, 명륜전문학교로 변경되면서 최고대학의 위상이 왜곡되었지만 그 굴욕의 역사이후 1946년 다시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그 당시는 Royal대학 전통으로 인원이 적어서)으로 복구되는 점은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브리태니커가 강제조약으로 규정한 을사조약 이후에 조선(대한제국)의 최고대학 성균관의 교육기능이 왜곡되고 오랫동안 암흑기를 가지다가 명륜학원.명륜전문학교등으로 일본강점기에 불법.강제에서 비롯된 수모를 겪어왔는데 이런 불법.강제적인 전문학교 과정이 있었어도 이는 일본의 불법 강제에 의한 조치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원래의 최고대학 성격인 조선 성균관과 유럽식 3년제 대학이었던 경학과에서 이어진점은 부정할 수 없음. 또한 일본이 2차대전때 항복하고 한국의 강점기간이 무효로 되었기 때문에 을사조약이후부터 한국을 불법강점했던 당시, 최고대학 성균관의 교육기능이 왜곡되고 명륜학원.명륜전문학교로 강등되는 수모가 있었다고 해서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의 자격이 소멸되거나 상실되지는 않습니다. 일본 강점기의 공백과 명륜전문학교 과정이 있었음에도 현재의 성균관대학교는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인점이 변할수 없는 것입니다.    

 

영국대학의 최근 3년제 과정은 1년 3학기제등 후발주자인 미국식 4년제 대학이나 현대에 4년제로 변한 대학들과는 다른 측면이 존재하며, 1년 2학기, 4년 8학기와 조금 다른 형태입니다. 

 

 

브리태니커는 한국에서 발생한 을사조약이나 한일합병을 강제로 보고 있는데 강제.강박은 무효입니다(일본이 패전국이라 그렇게 서술된 측면이 강하겠지요). 이에 반해 2차대전 때 일본이 항복하면서 받아들인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은 합법적인 국제조약에 해당됩니다. 승전국이 된 나라들(영.미.중.소)의 선언을 패전국이된 일본이 받아들인게 포츠담선언입니다.  

 

9. 시사 상식사전의 설명.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 1946년 다시 설립하였다는 내용.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은 교육 기관의 기능과 함께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모시는 사묘(祠廟)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일제는 경성제국대학을 국립대학으로 설치하고 성균관을 사설전문학원으로 만들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전국 유림대회가 열리고 1946년 성균관대학을 다시 설립하였다. 성균관대학은 1963년 학교법인 성균관으로 재단법인 성균관과 분리되었다.... 

. 출처:  유림 [儒林]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 필자 주 6). 이 하단부에 일본 강점기 포교정책에 따라 그 포교종교만 종교로 보는 일본강점기식 종교관도 섞여있으나, 이 부분은 세계사나 국사와 관계없이 일본 강점기 포교정책에 의해 생겨난 강점기 종교관으로 필자는 분류하며, 대학부분만 인용함.   

 

10. 그리고 성균관대학교의 일본 강점기 부분관련, 최고대학 지위가 상실되면서 전문학교등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는데, "충분한 설명이 없으면 을사조약이나 한일병합을 이 출판사가 인정하고 있는건가?" 오해가 생길수 있는 어법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 두산백과에서 사용한 어법이 강점기 관련 성균관대의 왜곡을 불식시켜주는적절한 어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다시 음미해 봅니다. ...

 

가).일본 강점기 관련, 두산백과에서 성균관대학교 역사에 대해 사용하는 어법.   

 
성균관대학교
 
 

성균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지만 조선 개국 후 1398년(조선 태조 7)에 현 명륜동 캠퍼스에 설립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경학과는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하되 역사·지리·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과하여 근대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교육기능을 박탈당하고 경학원(經學院)으로 축소되었다.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8.15광복이 되자 1946년 재단법인(현재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정규 단과대학으로 발족하였으며, 초대학장으로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 출처: 성균관대학교[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두산백과)
 
* 필자 주 7).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이런 어법입니다. 일제때 교육기능 박탈당하고 경학원으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일제가 명륜학원 설립하고, 일제가 주체가 되어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는 어법입니다.

 

 

위의 용어를 인식하셔야 함을 전제로 하고 다른 사전이나 서적의 설명을 소개합니다. 두산백과에서 사용하는 어법에 대한 이해를 하셔야 제대로 이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 교육학 용어사전의 성균관과 성균관 대학교 설명.

 

성균관[ 成均館 ]

 

고려·조선조 때 있었던 유학교육의 최고학부. 신라 시대는 국학(國學), 고려 시대는 국자감(國子監) 등으로 불리었다. 조선조 시대에는 태조 7(1398)년에 숭교방(崇敎坊;明倫洞)에 창설되었다.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제사하는 문묘(文廟)와 유학을 가르치는 명륜당(明倫堂), 그리고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 양재(東西兩齋) 및 부속 건물의 총칭이다.
문묘의 정전(正殿)인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의 유학자(94명)와 우리나라 유학자(18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성균관의 관원으로는 지관사(知館事;弘文館·藝文館大提學)을 두고 전임관원으로 대사성(大司成) 1명, 제주(祭酒) 2명, 사성(司成) 1명, 사예(司藝) 2명, 사업(司業) 1명, 직강(直講) 4명, 전적(典籍) 13명, 박사(博士) 3명, 학정(學正) 3명, 학록(學錄) 3명, 학유(學諭) 3명이 있었다. 이 가운데 박사 이하는 정원 외에 봉상시(奉常寺)의 관원과 사학(四學)의 훈도(訓導)가 겸직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額〕은 200명으로 생원(生員)·진사(進士)만 들어갈 수 있었으나 부족할 경우에는 사학의 생도 가운데서 보충하였다. 뒤에 경비부족으로 120명, 말기에는 100명으로 감축되었다.
구한말인 1895년에는 성균관 경학과(經學科)를 부설하여 근대식 유학교육을 교수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문묘 향사외 기능만이 유지되다가 경학원(經學院)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는 명륜전문학교에서 성균관대학교로 발전되었다.

. 출처:성균관[成均館] (교육학용어사전, 1995.6.29, 하우동설)

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성균관.성균관대에 대한 설명.

 

기원은 1398년(태조 7) 서울 동북방 숭교방에 설립된 성균관으로 볼 수 있으며, 1895년 고종의 칙령에 의해 성균관에 3년제의 경학과(經學科)가 설치되었다. 1930년 명륜학원이 설립되었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1946년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설립되면서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으로, 1953년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다. 1963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65년 삼성문화재단, 1979년 봉명재단(鳳鳴財團), 1996년 11월부터 삼성재단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라). 한자사전에 나타나는 成均館大學校

 

成均館大學校 

   

사립 종합() 대학()의 하나. 조선() 시대() 때의 성균관()을 모체로 발족()된 것으로 한일병합() 후() 경학원()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1930년에 명륜() 학원을 부설()하고, 1942년에 명륜 전문() 학교()로 승격(). 일제() 말기()에 명륜 연성소()로 개편()되었다가 1946년 성균관() 대학(), 1953년에 성균관() 대학교()로 됨. 1965년 9월 삼성 문화 재단()으로부터 기본() 재산()ㆍ시설비를 기증()받아 현재() 문리대ㆍ이공대ㆍ법정대ㆍ경상대ㆍ약대ㆍ유학대()의 6개 단과 학교()과 대학원()으로 구성()됨. 1977년 10월 이 재단은 학교() 운영()에서 손을 떼었음.

 

. 자료제공: 오픈 마인드. (주)오픈마인드인포테인먼트. Open mind infotainment.

 

11. 1945년과 1946년 유림대회. 그리고 을사조약이후 최고대학 지위를 상실당하고 왜곡되고, 전문학교가 되고, 폐지까지 되었던 오욕의 역사 있던 성균관의 설치(복구하여 재설치나 복구설립이지만 600년 역사는 현재도 그대로 인정함).  성균관에서 성균관대로 국가에 등록한 내용 및, 이승만, 김구, 김창숙 선생등 유림대표(그리고 임시정부 요인들)가 개입된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봄. 

 

 

 

가). 한국에 헌법상으로는 國王(王)이 존재치 않는건 어쩔 수 없지만 을사조약이 무효인 부분은 그대로 이어짐. 을사조약 무효상태에서 미군정기에 복구된 성균관이 국사에 나오는 조선(대한제국)최고대학 성균관의 승계대학이었었음. 그 최고대학 계승권자인 성균관이 대표대학으로 현재의 성균관대를 문교부에 등록시켜 대학.유교 교육부분은 현재의 성균관대로 복구.계승되어 6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음. 이는 해방후의 문교부 등록과정 및 국가출연 학술재단인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국가적 定說로 살펴볼 필요가 있음.

 

1946년 봄 전국 유림대회를 거치고 난뒤 복구된 상태(일본강점기에 경학원으로 변경시키고 나서 최고대학 기능이 상실되는 왜곡과정중에 명륜전문학교등으로 왜곡기를 겪었던 성균관이었음)의 성균관의 수장은 독립운동가 김창숙선생이었음. 다음은 1946년 봄에 성균관장으로 선출된 김창숙 선생이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는 과정 설명임.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 출처:김창숙[金昌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다시 필자의 글로 전환됩니다.

해방당시부터 문교부에 성균관대로 성균관의 교육승계대학이 그렇게 등록되어 국사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은 성균관대임은 절대 변하지 않음. 조선왕조 최고대학 성균관(국사에서 교육시키는 유일무이한 최고대학)에서 이어진 해방후의 성균관이 문교부에 국가적 차원으로 성균관대를 등록시켜서 성균관은 교육영역을 성균관대로 복구.계승시키고 성균관은 석전(문묘제사)의 제사영역을 복구.계승하며 제사 기구로 성균관의 이름으로 600년 역사를 이어온것임. 성균관의 600년 Royal전통은 그대로 이어지며 국사의 최고대학인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자격은 현재의 성균관이 아니라 해방후에 성균관이 국가기관에 대학으로 인가받은 성균관대학임. 해방 후 미군정기에 합법적인 승계과정을 거쳐 현재의 성균관대가 국사 성균관의 600년 최고대학 자격을 이어받은것임.

 

 

나). 1945년 11월의 전국 유림대회에서 성균관대 설립 결의 관련 내용. 을사조약.한일병합이 무효라 경학원.명륜학원.명륜전문학교.폐지등의 일련과정이 무효라, 복구 설립이며 현재도 600년 역사가 그대로 인정되고 있는 성균관대입니다.

 

a). 성균관대 홈페이지

 

약사

 

현대대학시대

 

발전기는 1945년 민족해방으로부터 현재까지이나, 그 중에서 제1 시기로는 성장기, 제2시기로 발전기, 제3시기로 확충기를 들 수 있다.

성장기는 단과대학시대라 할 수 있는데, 1945년에서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발전하기 직전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우선 1945년 9월 민족해방과 더불어 명륜전문학교를 부활시켰다. 명륜전문학교는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은 아니었지만 형식상 절차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 전국유림대회가 열리고, 뒤이어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심산 金昌淑선생이 대표가 되었다....

 

b). 다음은 그 당시 신문기사임. 그리고 이후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서술도 추가함.  

 

 

. 전국 유림대회에서 성균관대 설립 결의

 

ㄱ). 첫번째 전국 유림대회 

민족 고유문화의 근간인 유교도의(儒敎道義)의 혁신향상과 성균관대학의설치 재단완성등의중요안건을 결의.


 

 

1945년 12월 10일 조선일보 기사임.


成均館大學 設立을 決議(성균관대학 설립을 결의) 조선일보 보도기사.

 

西曆  一千 九百 四十 五年.

檀紀 四千二百 七十八年 十二月 十日(단기 사천 이백 칠십팔년 십이월 십일).    月曜日(월요일), (二).


 

成均館大學 設立을 決議(성균관대학 설립을 결의)

全國 儒林大會에서(전국 유림대회에서)

 

전국의 유림들이 일치단결하야 지난 十一月(십일월) 三十日(삼십일)부터 六일간 시내 성균관 명륜당[成均館]에서 전국 유림대회를 개최하엿다. 남북조선의 유림 천여명이 모힌가운데 임시의장 김성규[金成圭)씨사회로 성대히 대회가 진행되엿는데 민족 고유문화의 근간인 유교도의(儒敎道義)의 혁신향상과 성균관대학의설치 재단완성등의중요안건을 결의하였다. 당일 피선된 역원은 다음과 갓다.  


* 顧問[고문] 李承晩[이승만]  金九[김구]
* 委員長(위원장)  金昌淑[김창숙]

 

ㄴ). 두번째 유림대회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 조직

 

1946년 유림대회()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가 조직되고 독지가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토지를 희사하였다. 이에 김창숙()의 주도로 종전의 명륜전문학교의 재단을 병합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발족하면서 같은 해 9월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인가되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고, 초대 학장에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출처: 성균관대학교 [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다).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 성균관장을 겸임하던 김창숙 선생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한 사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출처: 김창숙[金昌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성균관대학 설립을 결의, 전국 유림대회에서...

 

전국의 유림들이 일치 단결하야 지난 11월 30일부터 6일간 시내 성균관 명륜당에서 전국 유림대회를 개최하엿다. 남북 조선의 유림 천여명이 모인가운데, 임시의장 김성규씨 사회로 성대히 사회가 진행되었는데, 한국 고유문화의 근간인 유교도의의 혁신향상과 성균관대학의 설치, 재단 완성등의 중요 안건을 결의하엿다. 당일 피선된 역원은 다음과 같다.

 

* 고문: 이승만,김구    * 위원장: 김창숙          

 

c). 다음은 매일신문 기사입니다. 2013,11,30 서 영관 객원기자의 기사에서 발췌.

 

.........

 

심산의 제안에 따라 1945년 11월 성균관 명륜당에서 전국 유림대회가 열렸다. 유림 1천여 명이 모였다. 대회에서는 민족 고유문화의 근간인 유교도의의 혁신과 향상, 성균관대학교 설립, 이를 위한 재단의 완성 등이 결의됐다. 단체 이름은 유도회 총본부로 정했다. 심산은 위원장을 맡았고 김구 이승만은 고문으로 위촉됐다....

 

 

2]. 한국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설립된 교황 윤허 서강대에 대한 한국내 학술자료 검토.

1. 성균관대(宮 성균관대, 泮宮.學宮이 성균관의 별칭임)와 서강대(御 서강대, 敎皇聖下 윤허 대학으로 귀족계파인 예수회에서 설립한 대학인데 교황윤허 및 한국유교와 성균관대에 대한 이해때문에 世界史的 측면에서 그 Royal자격을 인정하여 御 서강대라 함)의 한국 및 해외에서의 상호관계에 대한 대략적인 의견.

宮 성균관대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Royal.Imperial대학이며, 가톨릭 예수회는 교황청의 실세계파로 가톨릭의 위기를 막아낸 계파입니다. 일본 강점기 여파 및 해방후의 일본잔재 미청산으로  친일언론에서 비롯된 대중언론 의견들은 국사 최고대학인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성균관대로 600년 역사 이어짐) 중심이 아닌데, 이런 혼란상황에서도, 敎皇聖下 윤허의 御서강대 몇 몇 학자와 전문가들은 망각하고 있던 전통적인 宮 성균관대의 일반적 지위를 점차적으로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가는데 저와 개인적 인연을 가진분들 및 다른 분들 상당수가 드러내지 않고 다양하게 기여했습니다.  

종교적으로 유교와 가톨릭 예수회가 상호 전이가 가능하다는 마테오리치 신부님의 의견은 지속적으로 반영해 나갈것이며, 御서강대와 宮성균관대는 학풍이 다르고, 엄밀히 말해 종교가 같지는 않으며, 동양과 서양의 문화차이도 어쩔수 없는 것이기에 약간의 문화충돌이나 종교마찰은 불가피 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神道國家 일본이 항복하였고, UN국제법위원회에서 을사조약은 무효라고 UN총회에 보고하였기 때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은 가장 가까운 시대인 조선(대한제국)의 國敎인 儒敎를 이어받아 국제법과 역사.관습적으로 유교국입니다. 儒敎를 국제법적.역사와 전통측면의 관습법적 國敎로 하면서 모든 국민이 조선의 한문성씨와  본관을 의무적으로 등록하는 儒敎國이 한국입니다.

*필자 주 8). 敎皇聖下 윤허 대학들은 유럽에서 오랜 전통을 가졌으며, 예수회는 明나라 선교이후 유교문화권에대한 이해폭이 서양 기독교세력중 가장 넓은 계파며, 교황청의 실세로 불리는데, 예수회 산하 전세계적 네트워크가 있음.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연혁)

1960년 2월 서강대학의 설립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에 개교하였다. 설립배경은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요한 비오 12세의 허락으로, 대학설립을 기획하여, 1955년 창립사업이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Wisconsin) 관구에 이관됨으로써,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1956년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인가되어 현재의 위치에서 개교하였다.
초대학장에 킬로렌(Killoren,K.E.) 신부가 취임하였으며, 영어영문학과.사학과.철학과.수학과.물리학과.경제학과를 설치하였다. 1963년 독어독문학과.생물학과.경영학과와 1964년 국어국문학과.화학과를 증설하고, 제1회 졸업생 62명을 배출하였으며, 같은해 4월 <사립학교법>에 따라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하 생략....

 

 

3.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1956년 인가된 재단법인 한국 예수회에서 1960년 서강대학으로 설립하였다.

이하 생략....

4. 파스칼대백과에 나타나는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요약: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1960년 2월 서강대학의 설립인가로 같은 해 4월 개교하였다. 설립배경은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 12세의 허가로 대학설립을 기획, 1956년 재단법인 한국 예수회가 인가되어 현재의 위치에 개교하였다. 초대학장에 K.E. 킬로렌 신부가 취임하였고, 1964년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1967년 대학원을 설치하였다. 1970년 종합대학인 서강대학교로 개편, 초대총장에 J.P. 데일리 신부가 취임하였다.

이하 생략....

5.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사립 종합대학

법인명은 학교법인 서강대학교이며, 예수회의 교육이념에 근거하여, 교육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 1번지에 있다. 1960년 4월 예수회에서 서강대학을 설립했고, 1970년 3월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하 생략....

6. 서강대학교 홈페이지에 나타난 서강의 발자취.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 12세의 윤허로, 창립이 기획되어, 1960년 가톨릭 예수회에 의해, 6개학과 158명의 신입생으로 개교하였다.

개교 당시부터 국제화된 커리큘럼, 학생당 최적의 교수비율, 국내 최초 교수 안식년제 도입등으로 대학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1966년 경향 교육상 수상을 통해, 국내 최우수 모범대학으로 선정되었다.

 

3]. 해방이후 현대 대학시대로서의 성균관대를 근대의 수난기와 연결시켜 다시 살펴봄.

 

성균관대 홈페이지(www.skku.ac.kr)에 나오는 자료임. 홈페이지를 보면 대학소개 부분에 성대 600년자료가 있음. 성대 600년을 보면 약사부분이 있음. 약사(略史)부분에 보면 근대 대학시대와 현대 대학시대에 대한 설명 자료가 있음. 다음은 성균관대 홈페이지에 나오는 근대 대학시대와, 현대 대학시대에 대한 설명 자료임. 

 

1. 성균관대 홈페이지로 근대 대학시대와 현대 대학시대를 살펴봄.

 

# 근대대학시대

근대 대학시대도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 1기는 개화기, 제 2기는 수난기, 제 3기는 발전기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개화기는 1895년에서 1910년 까지 즉, 을미년 성균관이 근대적인 대학으로 발족한때부터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때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1895년 칙령으로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를 설치하고 역사학.지리학.수학등 각종 강좌를 개설하는 동시에 교수임명제, 입학시험제, 졸업시험제를 실시하고 학기제, 연간의 수업일수, 주당 강의 시간수를 책정하는 등, 제도상 근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은 고전대학으로부터 근대 대학으로 일대 전환을 보게 되었다.

수난기는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안에 명륜학원이 설치되고, 다시 명륜전문학원으로 되었다가,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이 고등교육기관은 과거 최고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그 정통의 계승은 후에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나마 명륜전문학교는 민족해방 1년전인 1944년 명륜련성소로 개편되어 그 빛을 잃게 되었다.

# 현대 대학시대 

 

 

그리하여 1945년 11월, 전국 유림대회가 열리고, 뒤이어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심산 김창숙 선생이 대표가 되었다.

이러한 성균관대학이 출범하려는 데에 있어서, 학봉 이석구(李錫九) 선생이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게 되고, 거기에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하게 되어,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이렇게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하여 출범한 성균관대학은 문학부와 정경학부의 2개 학부였는데 동양철학과, 문학과(국문학전공), 영문학전공, 불문학전공, 사학과가 문학부에 속하고 법률학과.정치학과.경제학과가 정경학부에 속하였다.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로 성균관대학교의 개설, 연원및 변천(근대 대학시대, 현대 대학시대)과정을 살펴봄.

 

개설

성균관대학교의 연원은 1398년(태조 7)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서 시작된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서 국가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연원 및 변천

갑오경장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성균관에 설치된 3년제 경학과(經學科)가 성균관대학교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시작이다. 성균관은 제향 기능을, 경학과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여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역사학·지리학·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도 부과되었다.

그 밖에 교육의 목적, 교육과정의 운영, 입·퇴학 절차, 각종 시험 및 학생의 특전, 학기제 채택 등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학교로의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권상실 뒤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經學院)으로 개편되어,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주로 문묘(文廟)의 제향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하게 되었다.

1930년 경학원에 로 교명을 회복하였다.

1946년 유림대회(儒林大會)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가 조직되고 독지가 이석구(李錫九)가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의 토지를 희사하였다. 이에 김창숙(金昌淑)의 주도로 종전의 명륜전문학교의 재단을 병합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발족하면서 같은 해 9월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인가되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고, 초대 학장에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1953년 2월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어 문리과대학·법정대학·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의 편제를 갖추었고, 같은 해 6월 각 도의 향교재단(鄕校財團)에서 재산을 기부함에 따라 재단법인을 성균관으로 확대해 개편하였다.

1958년 야간대학을 설치하였으며, 1963년 재단법인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이 대학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가 1979년 1월 다시 봉명재단(鳳鳴財團)이 학교의 운영을 맡게 되었고, 경기도 수원시 천천동에 자연과학캠퍼스을 신축하였다.

1981년 8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이과대학·공과대학·농과대학·약학대학 등을 설치하였고, 같은 해 11월 교육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83년 11월 경영행정대학원을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으로 분리하고, 1987년 11월 유학대학원, 1990년 2월 산업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7년 3월 의과대학, 9월 의학연구소, 10월 디자인대학원, 12월 경영대학원을 신설하였으며, 1998년 1월 건학 600주년 공식기 게양 및 현판 제막식 행사를 거행하고, 도봉선수촌 신관을 준공하였다. 같은 해 4월 북한 고려성균관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고, 6월 교수업적 평가제를 도입하였으며. 8월 도서관 100만 장서 확보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9월에는 건학 6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기념행사로 세계총장학술회의, 조선시대 성균관 재현행사, 동양학 학술회의, 연극공연, KBS 열린음악회 등을 개최하고, 『성균관대학교 600년사(成均館大學校六白年史)』를 발간하였다. 1999년 3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의과대학 건물을 준공하고, 5월 법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출처: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성균관을 승계하여 유교이념을 가지는 성균관대의 기능과 역할.
 
기능과 역할

조선시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교시(校是)인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유도정신(儒道精神)을 바탕으로 바른 인성을 갖고 글로벌 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교육목표를 하고 있다.

유학의 본향인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대학답게 유학동양학부와 유학대학원, 유학과(일반대학원)를 편성하고, 부속기관으로 유학동양학부와 대학원 학생들의 기숙사인 양현재(養賢齋)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학동양학부는 유교사상의 본질과 그 현대적 의미,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철학사상을 주 교육 내용으로 해서 한국문화의 창조와 동아시아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그 사명으로 하고 있다.

 

.출처: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Roya.Imperial대학으로서의 宮 성균관대와 御 서강대의 교류는 어느 정도 필요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본 강점기때 최고대학인 성균관의 교육기능은 왜곡되거나 격하로 수난을 겪었지만, 공자님(先聖,文宣王)과 맹자님 및 여러 현인들에 대한 문묘제사 기능은 그대로 남겨져서, 그 제사 기능을 성균관이 이어왔고, 성균관대 명륜캠퍼스가 과거 성균관의 위치에 그대로 있어서 그러한 역사적 근거들도 성균관대의 600년 역사와 전통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후 적절한 시기에, 일본강점기 잔재(교육분야 일본강점기 피해는 京城帝大및 일본 강점기 官立 전문대나 國.公立 中高 설립임, 京城帝大가 중심된 후발대학이 서울대임), 친일파나 친일언론등이 제재당하지 않아, 그들에서 비롯된 대중언론세력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成均館의 승계대학인 성균관대학교의 최고학벌 지위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중언론의 동태기때문에, 國史 성균관의 최고대학(Royal자격도 있음) 學閥을 승계한 해방후의 사립 성균관대학교는 한국의 가장 오래된 대학이자, 최고대학이며, Royal.Imperial대학의 學閥지위를 가졌다는것은 국가차원 및 학술적 차원에서는 분명합니다. 敎皇聖下 제도는 계속 이어지는 제도기때문에 韓國史의 최고대학인 성균관대학교(宮 성균관대)와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예수회 산하 서강대학교(御 서강대)가 연계하여 국내와 해외에서 동등한 Royal.Imperial 學閥을 확립하는것은 필요하며, 서강대는 세계사에 강한 특성으로 성균관대와 상호 의존적 Royal.Imperial대학으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 상호 교류 확대와 상호 지원등은 두 Royal대학사이에 필요한 조치로 판단됩니다.      


III. 결론

정부출연 연구기관과, 출판사들의 백과사전, 성균관대 학교당국이 현재의 私立 성균관대(王立과 私立 2중 형태를 가지며, 이는 서강대도 비슷함)가 조선(대한제국)의 王立(國立) 성균관을 승계했다고 공통된 의견을 보이는것은 일본이 패전국에 UN적국이되어, 강제적인 을사조약(을사늑약)부터 강제적인 한일합방(한일병합) 및 그이후의 불법 강제점령기까지 통틀어서, 일본의 월권적 행위를 무효로 보고, 일본이 폐지시킨 조선(대한제국) 최고의 대학 성균관의 최고대학 기능회복을 정당한것으로 보는것 같으며, 1945년 11월 30일의 전국 유림대회 및 그 이후의 유림들의 결의를 반영하여 그렇게 서술한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주안점은 일본의 강제점령기를 무효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서술한것 같습니다.

 

그런데 국사영역에서 가르치는 조선(대한제국) 唯一.最高대학 성균관(고종시대 3년제 대학인 경학과로 개편하면서도 그 역사성과 Royal자격은 이어졌고, 해방후에도 다시 그 最高대학.Royal대학 자격은 성균관대로 이어짐)은 일본 강점기에 타의해 의해 수난을 겪고 최고대학으로서의 기능을 상실당하며, 불법.무효의 강제조약인 을사조약.한일병합때문에 왜곡되어온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Royal대학입니다. 

 

불법.무효에 의해 최고대학의 기능을 상실당했지만, 성균관에서 이어진 정체성(영광과 수난, 복구설립의 역사)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오랜 역사가 있고, 그 자리에서 그 건물 그대로 있으니까 객관적으로 그 600년 역사가 존중되는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이면서 Royal대학인 宮 성균관대(한국 최고대), 성균관대,御서강대(가칭,세계사를 반영하여 교황 성하 윤허이기 때문, 국제관습법상 성대 다음 御서강대의 Royal대 예우).

 

일본의 무효.불법 강점기가 없었다면 여전히 한국 최고의 대학에 Royal대학자격을 가지는 대학이 성균관(경학과, 해방후에는 성균관대로 복구 설립)인데, 국권을 회복한 후세의 전문가들이 어떻게 서술하겠습니까? 을사조약이 무효라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고종때는 경학과)의 역사는 그대로 유효하며, 일본의 잘못이기 때문에 일본이 격하시키고 폐지시킨 성균관후신 경학과(명륜학원.명륜전문학교.명륜연성소.폐지)가 다시 성균관대로 복구 설립된 해방후의 성균관대 설립 신문기사등이 있어도 성균관대의 600년 역사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선 최고대학 成均館이고, 고종때 경학과로 이어진 最高대학이라 그렇게 600년 Royal大 역사를 가진 成均館(고종때는 최고대학 경학과-->해방후에는 복구설립된 최고대학 성균관대)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왜곡시키고 최고대학의 기능을 상실케 했지만, 을사조약 당시부터 국제법적으로 무효였고, 나중에 UN국제법 위원회에서도 무효라고 UN총회에 보고하였고, 나중에 한국의 국내법도 그렇게 적용되기 때문에, 더 확실하게 무효임(포츠담선언을 수락한 일본의 항복선언과 별개로 하더라도). 성균관의 최고대학 교육기능을 중단시키고 명륜전문학교등으로 격하시키며, 공자님에 대한 제사기능만 유지시키게 해주는 왜곡이 있었어도 성균관에서 이어진 성균관대학교 600년 역사는 그 강점기가 무효기 때문에 성균관대 600년 역사는 차감되지 않음. 교육기능 폐지된 한일병합(1910년이후) 당시부터 불법 강점에 의한 교육기능 중단임. 그래서 최고대학 교육기능 폐지된 1910년부터 해방이후 복구설립까지의 최고대학 공백기가 있어도 불법 강제의 강점기라 성균관대 역사는 600년 그대로인것임.

 

 

* 덧붙이는 말. 이 글은 논문이 아니고 Report입니다.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차원에서 일본 강점기 때문에 왜곡된 한국의 성균관대학교[국사에 나오는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에서 이어진 600년 역사의 대학]및 "을사조약 무효"를 더 잘 알리고자 여러 자료를 인용하였으니,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해방후 미군정당시부터 미군정 당국과 성균관, 전국 유림, 임시정부 요인들 입장은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승계대학이 성균관대였음.

가). 1편

http://blog.daum.net/macmaca/1502

 

나). 2편

http://blog.daum.net/macmaca/1503

필자가 글을 써 놓은 상기 블로그를 읽어보십시오.

 

3. 미군정령 제 194호 6조(1948년)는, 향교재단의 재산으로 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의 유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2381

 

4. 영상역사관, 1954 대한뉴스 제46호,이승만대통령 내외분,문교부장관등 참석, 공자님탄생 기념식

http://blog.daum.net/macmaca/2367

 

5. 을사조약이후, 일본 불법 강점기에 대항해 온, 을사조약 무효 이론(국내법과 국제법)을 현행헌법과,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조선.대한제국의 성균관이 해방후의 사립 성균관대로 승계되어 600년 역사를 가짐)의 의견까지 연결해서 살펴봄.   

http://blog.daum.net/macmaca/2026

 

6. 미군정당시 등록된 성균관대(교육기구)는 국사교육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과 같은 개념임. 성균관대(교육기구)는 국사교육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6백년 역사의 대학. 미군정당시 제사기구는 성균관으로 분리되어 현재까지 이름.

http://blog.daum.net/macmaca/2136  

 

7. 역대 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성균관. 개화기.대한제국기,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대한민국 수립후 1차 교육과정~7차 교육과정까지.

http://blog.daum.net/macmaca/1900

8.프랑스 공법학자 레이는 프랑스잡지≪국제공법≫1906년 2월호에쓴 특별기고에서 을사조약 무효 주장. 그리고 UN 국제법 위원회에서도 을사조약은 무효라 함. 

http://blog.daum.net/macmaca/1772

 

9.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의 무효에 대한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1905

10. 自然人에 대한 공평한 능력우대와 달리 法人體로볼때,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 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732

 

11.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이 현재의 사립 성균관대라고 정부측 의견이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공식화 되어 있는데, 황사손(이원)에 대해서는 정부측 학술사전으로 아직 언급된 내용은 없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1774

12. 세계사.한국사 교과서(참고서),사전,학술서가 바뀌지 않는한 유구한 역사의 기득권들도 바뀌지 않음.
13.한국은 2차대전의 승전국 반열임을 상기시킴.  
http://blog.daum.net/macmaca/1783

14. 교황청이 지속되고 서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가톨릭전통에 기독교국가라, 2차대전과 별개로 세계사를 바꾸고자 하는

세력은 없는것 같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1787
15. 국내법상 을사늑약이후의 역사적 해석은 승전국반열인 한국(對日 선전포고국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현행헌법에 반영)의 몫임. http://blog.daum.net/macmaca/1977

16. 최종결론. 세계사>UN. 수천년 인류문명과, 역사.전통이 크게 왜곡되지 않고 세계인이 공존하는 방법은, 세계사에 나타나는 사실을 바탕으로, 근대와 현대의 격변기에 대처하는게 적절한 방안 같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1981

17.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신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을 최고신으로 하여 여러 하위신이 계십니다. 유교에서는 하느님(天)을 초월적 절대자로 보고 숭배해왔습니다. 공자님은 하늘이 내려보내신 성인. 성인임금(文宣帝이신 공자님 이전의 요순우탕도 성인임금이심)이시자, 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이 점이 중요합니다. 공자님의 가장 큰 업적은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은주시대에 믿어온 우주만물의 지배자이시자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天)의 초월적 존재를 많은 제자들과 제후들에게 계승시키시고 가르치신 점입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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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너무, 너무 많이 올리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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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만 가득하시길 바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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