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후기영토

소오강호 2009. 1. 14. 09:36

임금이 장차 서쪽 지방을 순행(巡幸)하려고 하여,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 에게 이르기를,

내가 전부(轉附) · 조무(朝儛)3156)

에 구경하러 가려고 한다.”

세조 14권, 4년(1458 무인 / 명 천순(天順) 2년) 11월 14일(무술) 2번째기사

서쪽 지방을 순행하려는 일로 영중추원사 이계전에게 이르다

전부(轉附) · 조무(朝儛) : 《맹자(孟子)》의 양혜왕편(梁惠王篇)에 나오는 지명. 모두 중국의 동해(東海), 즉 우리의 서해에 면하고 있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경내의 두 산으로, 바다의 장관을 내려다볼 수 있음

 

세조당시에는 조선영토가 최대였는데 조선은 서쪽으로 사막을 지나 한해에 이르고 즉 몽골중앙부까지 진격하였고 북으로 수만리즉 대황의 땅 북극에 이르고 남으로 제주도와 대마도를 차지하고 유구(대만)와 일본서쪽섬들의 종주국이었다. 산둥에 있는 산에 세조가 구경하러 간다고하니 산둥의 일부까지 조선영토였던 것 같다. 혹은 산둥의 산이 바로보이는 곳까지 조선땅이었다. 조선의 황해도는 동국여지승람에 남쪽에 발해가 있다고 하니 현재의 황해도가 아니라 중국 발해만이 바로 조선의 황해도이다. 그곳과 산둥은 가까우니 세조때 산둥가까이 조선땅이 있었따는 증거이다.

 

임금이 청성묘(淸聖廟) 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내렸다. 해주(海州) 에 수양산 형제동(首陽山兄弟洞)이 있는데, 해주 의 유생(儒生)들이 일찍이 상소하여 사우(祠宇) 를 건립하여 백이(伯夷)·숙제(叔齊)를 제사지내는 곳으로 삼기를 청하였으므로, 숙종[肅廟]이 친히 청성묘(淸聖廟) 라고 써서 사액(賜額)한 것이었는데, 올해가 바로 사우를 건립한 지 회갑(回甲)이 된 해이다

영조 97권, 37년(1761 신사 / 청 건륭(乾隆) 26년) 6월 11일(무인) 3번째기사

해주 청성묘에 치제를 명하고 제문을 내리다

 

돌아오는 길[復路] ○ 갑자년(1804, 순조 4) 2월[2일-29일]

  

8일(무진)

흐림. 이제묘(夷齊廟)까지 40리를 가 점심을 먹고, 영평부(永平府)까지 20리를 가 사씨(史氏)의 집에서 잤다.

청성묘에서[淸聖廟]

새벽을 무릅쓰고 떠나 야계이(野鷄垞)까지 비스듬히 동북쪽으로 가는데, 지나가는 촌락마다 고요하고 외져 자못 시골다운 맛이 있다. 대략 20리를 가 북쪽으로 10리 사이를 바라다보니 흰 탑이 산마루에 높이 솟아 있어 불당(佛堂)이 있는 데 같았다.

짧은 언덕 하나를 넘으니 지형이 시원하게 열려 남쪽으로 산 하나가 가파르게 서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수양산(首陽山)이라고 한다. 산 높이는 열두어 길이 지나지 않는데, 민둥산이 되어 풀 하나 나무 하나도 없다. 산기슭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바라보니, 몇 리 밖에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가 보니 벽돌로 쌓은 작은 성이 있는데, 그 제도가 매우 옛것이다. 중간에 드나드는

계산기정(薊山紀程) 제4권

 

해주의 위치가 믿기지 않으면 윗글을 보라 숙종때 청성묘를 해주에 설치했다고 하고 영조때도 청성묘를 관리하고 있었는데  베이징으로 여행을 떠나는 과정을 적은 계산기정에 영평부근처 청성묘에서라고 써있다. 영평부는 1536년 명나라에서 작성된 대명여지도에 산해관서쪽즉 난하의 동쪽부근에 표시되어 있다. 계산기정을 쓴 저자는 산해관을 넘어서 영평부를 넘어서 청성묘에 갔다고 하니 난하하류지방이 고죽국임은 당시에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땅이 숙종 영조 정조때도 조선땅이었음을 알수있다. 청성묘는 고종의 서원철폐명령때 없어졌는데 고종초기까지 조선땅이었다는 증거이다.

 

파저강(婆豬江) 야인 이만주(李滿住) 등이 변방에 침입하여 군민(軍民)을 살해하고 재물을 빼앗아 갔다. 상이 최윤덕(崔潤德)을 파견하여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을 하게 하였다. 최윤덕이 토벌하고 나서 첩서(捷書)를 올리니, 신하들이 하례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우리 태조는 천운을 받아 개국하면서부터 국내를 정돈하고 외적을 물리치니 당시의 야인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하였다. 태종의 위엄과 덕은 섬오랑캐들에게 널리 입혀졌고 산융(山戎)도 모두 신하가 되어 복종하였다

국조보감 제6권

세종조 2(世宗朝二)

 

파저강을 북한 압록강바로 위쪽의 강으로 주장하는 어리석은 국사학계 지도자들은 윗글을 읽어봐라 댁들이 주장하는 파저강의 위치가 도대체 어디인지 분명히 윗글에 태조때는 섬오랑캐 즉 일본서해의 섬들과 유구(대만)이 복종하고 태종때는 산융즉 대릉하 서북에 살던 부족까지 모두 신하가 되었다고 한다. 정조실록에 보면 최윤덕은 군대를 거느리고 사막을 가로질러 한해에까지 진격했다고한다. 한해는 당시에 바이칼호혹은 몽골의 고비사막의 두가지뜻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뜻이던 간에 조선군은 몽골중앙부까지 진격했다는 것이다.

 

 

백두산 줄기가 북막(北漠)에서 나와 남쪽으로 달려서 분수령(分水嶺)에 이르고, 다시 꺾이어 동쪽으로 나와서 가로 천 리에 뻗쳤으니, 옛날에 불함산(不咸山)이라고 일컬은 곳이다. 그 속칭이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鄰)이니, 가이민(歌爾民)은 장(長)이고, 상견(商堅)은 백(白)이며, 아린(阿鄰)은 산(山)이다. 이렇게 해서 일명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했다.

 

성호사설 제3권

 

 

성호사설이 지어진 조선후기에도 백두산과 장백산은 다른산이다. 즉 백두산에서 가로로 천리쯤에 장백산이 있다고 한다. 물론 장백산은 현재 북한의 백두산이다. 만일 성호사설의 백두산이 현재의 북한 백두산이면 가로로 천리즉 동해바다 한가운데 장백산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조선후기까지 백두산과 장백산은 다른산이며 장백산의 서쪽 천리까지 조선땅이었다는 근거가 바로 위에 있다. 당시에 그려지 요계관방도를 보면 장백산이 요하의 상류에 백두산이 북한 백두산위치에 그려져 있는데 아마도 두산의 위치를 착각한듯하다. 결론은 두산은 다른산이며 백두산과 장백산은 거리가 천리이다. 둘다 조선땅이었다.그럼 조선후기에도 서쪽으로 대흥안령과 요하 북쪽으로 흑룡강이라는 천연의 경계선이 지어졌음을 알수 있다.청과 조선은 같은 민족이고 두산을 신성시했는데 서로 자기땅이라고 우겼다. 왜냐면 나라의 근본이자 기원이 바로 두산이기때문이다. 두산을 가지면 종주국임을 주장할수있기 때문이다.조선말기에 백두산은 청이 차지하고 장백산은 조선이 계속 차지한다. 이때 장백산을 조선사람들이 백두산이라고 부른것 같다.

 

충청도 병사 이세호(李世灝) 는 젊었을 때 거칠고 모진 행동이 많아 사람들에게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군관(軍官)으로 부경(赴京)할 적에는 여양(閭陽) 의 적도를 퇴각시켰고 지난번 방어사(防禦使)로 내려가서 이산(尼山) 을 버리고 도망한 수령을 목베어 온 도(道)를 놀라 떨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로 병사(兵使)에 의망(擬望)되었는데 대간이 사람들의 말에 따라 논파하였습니다. 세호 는 지금 바야흐로 군사를 거느리고 직산(稷山) 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여주 목사 성영(成泳) 과 수복(收復)하기 위한 대책을 꾀하고 있다 합니다. 세호 는 파직시킬 수 있으나 한 무리의 군사를 불러 모으기는 어려운 것이고 싸움에 임하여서 장수를 바꾸는 것은 옛 사람들이 경계하였던 바입니다. 이세호 를 잉임(仍任)시켜 공을 세우도록 책임지우소서

선조 30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9월 9일(병인) 5번째기사

비변사가 전 충청 병사 이세호를 잉임시켜 공을 세우게 하자고 청하다

 

개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였다.

여양역(閭陽驛)에서 밥을 지어 먹고 광녕참(廣寧站)에서 잤다. 이날은 80리를 갔다.

광녕읍치(廣寧邑治)는 서북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의지하였는데 높고 중첩한 산봉우리들이 100리를 두루 둘렀다. 동남은 광야(曠野)에 임하였는데 아득하여 끝을 볼 수 없다. 민호(民戶)의 조밀함과 번성함, 시가와 상점의 번화함은 비록 요양  (遼陽)만 못해도 산천의 수려함과 지계(地界)의 상쾌함이 영원(寧遠)보다 훨씬 낫다. 실로 관외(關外)의 중진(重鎭)으로서 영원, 금성(錦城), 요양, 의주(義州)와 더불어 표리(表裏)가 되어 견제(牽制)하고 제압하는 것이다

연행기(燕行紀) 제4권

 연경에서 진강성까지[起燕京至鎭江城] ○ 경술년(1790, 정조 14) 9월[4일-30일]


윗글을 자세히 읽어보라 여양이 조선초에 누구땅이었는지 선조때즉 조선중기에도 여양은 조선땅이었다. 충청도 병사 이재호가 젊은시절 여양의 오랑캐혹은 도적떼를 퇴치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 여양의 위치가 어디인가 연행기즉 베이징까지가는 여행기를 읽어보면 광녕과 여양이 가까움을 알수있다. 그럼 광녕이 어디인가 1536년 작성된 대명여지도를 보면 광녕은 요하와 대릉하중간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즉 여양은 요하와 대릉하사이이다. 이땅이 선조때도 조선땅이었다. 편협한 국사지도자들꼐서 꼭좀 읽어봐주시고 교과서를 수정해주기 바란다.

 

관내(關內)의 영평(永平)과 관외의 금주(錦州)는 모두 큰 물가에 있어서, 인가(人家)와 전지(田地)의 표류(漂流), 매몰(埋沒)이 거의 의주(義州), 조양(朝陽) 등과 같아 가을의 수확은 흉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여러 고을들은 관내와 관외를 막론하고 거의 다 풍년이 들었다

연행기(燕行紀) 제4권 

연경에서 진강성까지[起燕京至鎭江城] ○ 경술년(1790, 정조 14) 9월[4일-30일

 

조선땅의주와 조양 영평 금주가 가깝다고 연행기에 쓰여져있다. 대명여지도를 확인해보면 의주는 대릉하 서쪽에 표시되어 있다. 즉 조양과 가깝다. 정조때도 의주는 대릉하인근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요계관방도가 작성된 숙종때도 의주는 요하하류에 표시되어 있다.

 

 

평안도 도관찰사 와 도절제사에게 유지(諭旨)를 내리기를 

병조에서 송골산(松骨山)대창산(大昌山) 등처에 체탐인(體探人)을 두기를 청하므로, 내가 이미 이를 윤허하였다. 그러나, 개원(開原)요동(遼東) 인민의 거처가 멀지 않아서 인삼을 캐고 사냥을 하면서 들판에 포치하여 상시 다니게 되니, 만약 체탐인(體探人)이 사람이 없는 지경에서 만나게 된다면 혹시 뜻밖의 변고가 발생할는지 이것이 염려스러웁다

 

세종 113권, 28년(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8월 14일(기유) 1번째기사

송골산과 대창산 등처의 체탐인에게 뜻밖의 변고에 대비토록 경계시키다

 

개원은 대명여지도에 혼하즉 요동반도 북쪽에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기록에 평안도라고 한다. 그러니 평안도도관찰사에게 지시하는것이다. 송골산이 개원과 가깝고 이곳에 체탐인을 둔다고 한다. 조선땅이 아니면 왜 조선에서 이렇게 관심을 두는가

 

평안도 관찰사 오백창(吳伯昌) 이 창성진 첨절제사(昌城鎭僉節制使) 박양신(朴良信) 의 비보(飛報)에 의거하여 치계(馳啓)하기를

이달 29일에 올량합(兀良哈) 의 1천여 군사가 의주(義州)조모정(鳥暮亭) 에 들어가 목책(木柵)을 포위하여, 함께 싸우기에는 우리 군사가 이롭지 않은데도, 의주 목사(義州牧使) 우공(禹貢)박양신(朴良信) 및 인산 군수(麟山郡守) 이규(李揆) 등과 더불어 강을 건너 대창산(大昌山) 밑에서 사냥하다가, 적의 기병(騎兵)이 갑자기 이르러서, 우리 군사가 창황(蒼黃)히 패해 달아나 인마(人馬)가 많이 사로잡혀 죽음을 당했는데도, 박양신 이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2일(병인) 1번째기사

평안도 관찰사 오백창이 변방 방비를 잘못한 지방관에 관해 치계하다

 

 

대명여지도에 올량합의 위치는 서요하의 서북으로 현재의 몽골중앙부이다. 그곳에서 의주까지 올량합군사가 쳐들어왔는데 의주목사가 방심해서 대창산밑에서 패전했다는 내용이다. 위에서 대창산이 요하와 혼하근처로 추정되고 대명여지도에 의주는 대릉하에 표시되었으니 문맥상 이곳이 전부 조선땅임을 알수있다. 올량합은 태조이성계에게 충성한 부족인데 태조가 만호라는 벼슬을 주고 계속 복종하도록 했다. 즉 몽골중앙부가 태조때부터 조선땅이었다. 이들은 조선에 가끔 반기를 들었는데 그때마다 조선군이 수만명출동하여 복속시켰다. 세종때도 조선군이 출동했고 세조때도 성종때도 출동했다. 실록에 다나와있다.

 

평안도 감사 가 강계 도절제사(江界道節制使) 의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급히 보고하기를,

전일 황성평(皇城坪) 에 와서 거주하던 올량합(兀良哈)동소오(童所吾) · 왕도을호(王都乙好) · 장삼보(張三甫) 등 다섯 호(戶)가 처자와 우마를 거느리고 토우(土宇)를 압록강 가에 건축하여 겨울을 날 계획을 하고, 계속하여 〈우리 나라에〉 내왕하면서 식량과 소금·장을 구걸하므로, 말 혹은 되로 두세 번 구제하였으며, 강변에 사는 민가에게도 또한 되로 홉으로 주었으나, 수다한 인구의 먹을 것이 끊어지지 않도록 연속하여 구제하기란 매우 어려운 형편입니다. 또 서울에 올라가 〈그들이〉 조현(朝見)하려고 하는데, 여러가지 방법으로 못 가게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억지로 머물러서 남의 빈 집으로 들어가 있으니,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오리까

였다. 의정부와 육조에 내려 협의하게 하였다. 여러 대신이 말하기

저 사람들이 강을 건너 들어오는 것이 좋지 못할 뿐 아니라, 유한한 곡식으로 무한한 욕심을 채울 수 없으니, 사리를 들어서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본시 명나라건주위(建州衛) 에 속한 백성이니, 사사로이 통할 수 없다.’ 하고,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할 것이며

 

세종 26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11월 13일(갑신) 3번째기사

올량합 동소오 등이 압록강을 건너와 약탈하지 못하도록 대비하게 하다

 

세종때 압록강이 어느강인지 위에 나타나있다. 올량합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막아라고 명령했는데 대명여지도에 올량합이 서요하의 서북에 표기되어 있으니 서요하가 바로 압록강이다. 건주는 대명여지도에 난하의 동쪽에 표시되어 있으니 문맥상 그부근에 올량합이 있고 조선군은 서요하에 배치되어 올량합이 건너오지 못하게 막고 있음을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