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수복을 위한 방법

소오강호 2011. 8. 10. 12:44

 

무사 백동수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과연 사도세자가 즉위했다면 북벌을 실행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간다. 조선은 사도세자의 할아버지인 숙종때 절호의 기회를 맞았는데 이를 날려버렸다.

 

 

 

 

 

중국 땅에 원망과 노여움이 바야흐로 일어나 오삼계(吳三桂)는 서쪽에서 일어나고 공유덕(孔有德)은 남쪽에서 연합하고 달단(韃靼)은 북쪽에서 엿보고 정경(鄭經)은 동쪽에서 노리고 있으며 머리털을 깎인 유민들이 가슴을 치고 울먹이며 명나라를 잊지 않고 있다 하니, 가만히 태풍의 여운을 듣건대 천하의 대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에 있는 나라로서 요충 지대에 처해 있고 저들의 뒤에 위치하고 있어 전성의 형세가 있는데도, 이때 군대를 동원하고 격서를 띄워 천하에 앞장서서, 그들의 세력을 가르고 마음을 놀라게 하여 천하의 근심을 같이 근심하고 천하의 의리를 붙들어 세우지 않는다면, 칼을 쥐고도 베지 않고 활을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쏘지 않는 것이 애석할 뿐만 아니라, 실로 우리 성상께서 유업을 계승하려는 마음이 우리 조종과 선왕을 감격시키거나 천하 후세에 할말을 남길 수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국역조선왕조실록 > 현종 15년 갑인(1674,강희 13) > 7월1일 (계해)

 

조선의 마지막 기회이자  조선이 고구려의 옛땅을 모두 수복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오삼계가 난을 일으켜 양자강이남지방을 거의 먹고 베이징을 향해 진격중이었다. 현종은 얼마안가 붕어했기에 북벌을 회피했다고 후손들이 비난을 하기가 어렵다.

 

 

. 형조 참판(刑曹參判)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효묘(孝廟) 이래로 30년 동안 치병(治兵)해 오면서 이와 같은 사기(事機)를 기다려 왔는데, 이러한 군병(軍兵)과 이러한 기계(器械)로써 어찌 도리어 저 사람들의 요구에 호응하겠습니까

 국역조선왕조실록 > 숙종 즉위년 갑인(1674,강희 13) > 11월13일 (임신)

 

그러나 숙종은 다르다. 30년간 조선은 북벌을 준비하면서 조선군부는 전쟁개시 10일안에 심양성을 점령할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오삼계의 난때 청나라에서 조선에 총수백자루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는데 이미 청나라도 조선이 조총기술이 많이 발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청나라는 조선에 10만대군을 보내어 오삼계를 막는데 도와달라고했다. 이에 숙종은 고심했다.

 

장효례가 또 말하기를, ‘조선의 일은 한스럽다. 오삼계(吳三桂)가 반란하고부터 여러 번국(番國)에서는 다 도운 것이 있으나 조선만은 한 가지 일도 없었으므로, 만약 앞으로 사행(使行) 때에 수 백 자루의 조총을 보낸다면, 황제가 반드시 크게 기뻐하여 의심받을 걱정이 아주 없어지고, 모든 청하는 것이 있을 때에 따라 주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인데, 조선은 무엇이 아까와서 하지 않는가

 국역조선왕조실록 > 숙종 1년 을묘(1675,강희 14) > 3월2일 (경신

 

숙종은 즉위후 최고의 기회를 잡았는데 청나라를 돕지도  오삼계를 돕지도 않았다. 그저 바라만 봤다. !!!!!!!!!!

 

 

듣건대 청인(淸人)이 장차 만주(滿洲)로 나오려고 하니, 우리에게 있어서 비록 조석(朝夕)의 근심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나 또한 환(患)을 대비하는 데에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국역조선왕조실록 > 숙종 4년 무오(1678,강희 17) > 8월20일 (무자)

청인의 만주 진출에 대비하는 방책을 정유악·이하진 등과 의논하다

 

조선의 국력이 너무 미약해서 청나라를 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위의 글을 읽어보라 만주영토가 누구땅인 것처럼 나오는가? 당시 만주는 비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상 조선땅이었던 것이다. 청나라가 오삼계에게 밀리면 만주로 밀려든다고 조선에서 대책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조선이 한반도만 차지한 소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청나라기록에는 심양이 조선땅과 굉장히 가깝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조선군부가 전쟁개시10일만에 심양을 점령할수 있다고 보고한 것이다. 북한 압록강신의주에서 심양을 향해 출발하면 가는데만도 거의 10일이나 걸린다.

 

숙종은 계속 정세를 관망하다 결국 오삼계가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것이 조선의 마지막 기회였는데 날려버린 것이다.

 

오삼계를 비롯한 삼번이 난을 일으켜 양자강이남이 끊기고 섬서성에는 왕보신이 10만군사로 반기를  들고 베이징서쪽의 찰합이왕도 3만군사로 반란을 일으켜 강희제는 심양으로 천도할 생각까지 했다. 이때에 숙종이 10만대군으로 진격했다면 심양성은 10일이내 베이징까지는 한달이내로 진격이 가능했을 것이다.

청나라는 우리가 오랑캐(오량해혹은 올량합)라고 불렀던 여진족의 한 부족이었다. 숙종이 과감하게 진격했다면 오삼계와 왕보신을 진압해야할 청나라군이 조선군을 막느라 분산되었을 것이고 결국 갈갈이 찢겨져서 옛날 자신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http://blog.daum.net/sabul358/18321813 1882년 청나라고지도의 오량해위치

 

숙종이 조금더 과감했다면 조선은 고구려의 국내성인 베이징성을 수복했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열때 오량해부족은 직접 추장이 와서 충성맹세를 하고 세금을 바치고 변방의 군사가되어 조선변방을 원나라의 잔당으로부터 지켰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약해진 틈을 타서 세력을 키운 누르하치가 오량해부족을 흡수하고 그 아들 홍타지와 도르곤은 조선에게 항복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조선은 자신들의 속국이었던 오랑캐가 자신들의 상국이 되니 이를 받아들일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더 과감한 자세로 기회를 얻었을때 진격했어야 옳았다. 신중을 기하다가 결국에는 기회를 놓쳤으니 얼마나 아까운가?

 

사도세자가 등극했다하더라도  당시 청나라는 조선이 공격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상대였다.  한가지 있다면 지금 중국서부지방의 위구르에 있던 당시 준가르왕국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어 청나라 강희제와 건륭제가 자주 친정했는데 준가르와 동맹하여 연합공격을 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고구려가 당과 싸울떄 이곳에 있던 설연타가 도와주어 고구려가 쉽게 이길수 있었고 신라가 당과 싸울떄도 토욕혼이 당나라군대의 발목을 잡아서 이길수 있었다. 사도세자가 그런 식견이 있었다면 당시 준가르와 티벳과의 동맹으로 기회를 노려볼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회가 왔을때 놓치는 바람에 천추의 한을 남기지는 말아야 한다. 중국은 민주화과정을 거치며 조만간 분열될 것이다. 이때 만주, 내몽골에 손을 내밀어 통일을 꿈꿔야 한다.

무장의 정치적 성향과 능력을 바로 보는 안목이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뜻을 세우면 뒤돌아 보지 않고 나가는 뚝심과 기백이 있어야 하며 사회적으로 전쟁을 지지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조선은 성리학만 맹신하는 나라라 뛰어난 인재는 무과에 응시도 안하고 무너진 왕권 살리기도 빠듯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