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후기영토

소오강호 2009. 1. 14. 11:25

숙종 8권, 5년(1679 기미 / 청 강희(康熙) 18년) 12월 12일(계유) 1번째기사
북병사 유비연이 청나라의 차사원이 물어온 지도에 대해 치계하다

북병사(北兵使) 유비연(柳斐然) 이 처음에 청(淸)나라 의 차사원(差使員)이 백두산(白頭山) · 장백산(長白山) 두 산의 형세를 물어올 적에 지도(地圖)와 나침판을 내놓은 일을 계문(啓聞)하여 왔었는데, 이때에 와서 또 치계(馳啓)하기를

 

백두산과 장백산이 다른산임을 숙종때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위에 있다. 분명히 두산이라고 했다.

 

이른바 지도는 차사원에게 다시 물어본즉 부령 부사(富寧府使) 최양필(崔良弼) 은 ‘도첩(圖帖)은 곧 우리 나라의 한 폭의 장지(壯紙)로서, 대개 평안 도 청천강(淸川江) 북쪽 여러 고을과 북관(北關)의 행영(行營)과 육진(六鎭), 그리고 삼수(三水) · 갑산(甲山) 에서 영흥부(永興府) 경계 끝까지의 모든 고을과 산천이 완연히 그려져 있고, 저쪽의 오국성(五國城) · 여진(女眞) · 걸가퇴(加退) · 문암(門巖) 등지도 또한 그 속에 그려져 있다.’고 하고, 대통관(大通官) 장효례(張孝禮) 에게 물어본즉, ‘외국의 지형을 어떻게 자세히 알겠소.’ 하기에 ‘천하의 지도를 등사해 가져 왔다는 말이 있다.’ 하였습니다. 저들이 우리 나라의 산천과 도로의 원근(遠近)을 알고 싶어서 이 지도를 만든 것인지, 아니면 헛말을 지어내서 우리로 하여금 의혹을 갖게 하자는 것인지, 그 진상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윗글에 청에서 우리나라까지 그렸다고 했는데 오국성은 그쪽땅이고 그 안쪽우리땅까지 그려졌다는 것이다. 오국성은 대명여지도에 만주의 북쪽에 그려져있다. 숙종때 조선과 청은 흑룡강의 동쪽즉 아무르강과 송화강북쪽이 경계였는데 그근거가 위에 있다.

 

장백산(長白山) 밑에는 왕년에 번호(藩胡)가 철거해 간 옛길이 있다.’ 한다니, 이것을 꼭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장효례 가 회령 부사(會寧府使) 김흥운(金興運) 과 더불어 이야기할 적에 내년에 나오므로 머지않아 다시 만난다고 하기에 재삼 물으니, 비로소 ‘황제가 반드시 나로 하여금 백두산 을 살펴보게 할 것인데, 그때는 의주(義州) 의 강가에서 길을 떠나 이곳에 올 것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장효례 는 들뜨고 잡된 사람이어서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나, 일이 범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장백산과 백두산이 다른 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백두산을 살펴보려면 의주강가에서 길을 떠나야 한다는데 당시의 요계관방도나 관북도에는 두산중 한개의 산은 요하의 상류에 한개의 다른 산은 현재의 북한 백두산에 그려져있다. 즉 백두산은 요하상류즉 의주가 위치한 대릉하와 요하하류에서 강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반면 장백산은 북한의 백두산위치이니 두위치가 표현이 고대기록이 일관됨을 알수있다. 윗글을 보고도 두산이 같은 산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임금이 승지 남태기(南泰耆) 에게 묻기를,

“네가 북도에서 돌아왔으니, 이른바 황제총을 보았겠구나?”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북평사(北評事)로 있으면서 그 무덤을 보았는데, 무덤은 행영(行營) 의 서쪽 30리 되는 곳에 있었습니다. 무덤의 형태는 높고 큰데, 곁에는 허다한 무덤이 있어 배장(陪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오국성은 지금의 볼하진(乶下鎭) 에 있는데 성의 사면은 천길 절벽이고 다만 동서로 통하는 한 길만이 있었습니다. 금(金)나라 사람들이 중원 천자(中原天子)를 사로잡아 이곳에 가두었다 합니다. 듣건대 주민들이 송나라 때의 돈을 습득했는데 돈의 이름은 지화(至和) 라 하였으니 지화 는 송나라 인종(仁宗) 의 연호입니다. 홍호(洪晧) 11912) 냉산(冷山) 에 갇히었다 하는데, 냉산 은 지금의 삼수(三水) 입니다

 

영조 71권, 26년(1750 경오 / 청 건륭(乾隆) 15년) 2월 4일(정축) 1번째기사
승지 남태기에게 황제총에 대해 묻다

 

조선의 북도에 황제총 즉 오국성이 있다. 즉 영조때도 만주 북쪽은 조선땅이다. 볼하진은 조선이 설치한 회령인근의 방어진으로  서예원이 회령(會寧)의 볼하진 첨절제사(乶下鎭僉節制使)로서 기병 80명을 거느리고 오랑캐를 정탐하러 갔다가 패배하고라는 실록의 기록도 있다. 금나라가 송나라황제를 잡아다가 여기서 장사지냈는데 이곳이 바로 고려와 금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즉 남송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휘종과 흠종의 안부를 물은 까닭이 여기있다. 오국성즉 남송의 황제2명이 이곳에 유배되었고 고려땅과 금의 경계였기에 남송이 황제의 소식을 물어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