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소오강호 2012. 5. 16. 11:42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인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탐구(貪求)하므로 아비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弘益人間]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에 내렸으니, 곧 지금의 묘향산이다.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곡식을 주장[主穀]하고, 명을 주장[主命]하고, 병을 주장[主病]하고, 형벌을 주장[主刑]하며, 선악을 주장[主善惡]하니, 무릇 인간의 3백 60여 가지 일을 주장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게 하였다. 그때에 한 곰[熊]과 한 호랑이[虎]가 있어 같은 굴에서 사는데 항상 신(神)인 환웅에게 기도하여 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환웅이 영애(靈艾) 1주(炷)와 마늘 20(枚)매를 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으리라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얻어 먹고 삼칠일(三七日)을 기하였더니,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호랑이는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 웅녀(熊女)가 혼인을 할 데가 없어서 매양 단수(檀樹) 아래에서 잉태가 있기를 주언(呪言)하였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화하여 혼인하자,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호를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평양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칭하였다. 또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에 옮기어 어국(御國)한 지 1천 5백 년에 주나라 무왕이 즉위하여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이 또 장당경(藏唐京)에 옮기었다가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1천 9백 8세를 수하였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단군이 평양을 떠난 지 4백여 세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신이 되었으니, 여기에서 임금 노릇을 하였고 여기에서 신이 되었으니 이 땅을 싫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국역조선왕조실록 > 단종 즉위년 임신(1452,경태 3) > 6월28일 (기축) >

[주D-005]삼위태백(三危太伯) : 삼위산과 태백산. 삼위산은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현(敦煌縣) 남쪽에 있으며, 태백산은 장백산이라고도 함.

 

한반도인의 Y염색체 이동조사결과 흥미론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예전에는 알타이 산맥을 넘은 우리 조상이 몽골과 시베리아를 거쳐 남하하여 동북3성과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알고 있었다.그런데 유물까지 뒷받침해주던 이 학설이 Y 염색체 유전자조사결과 우리의 주류조상은 시베리아를 향한 것이 아니라 티벳쪽으로 남하하다가 방향을 꺽어 지금 서안시일대에 먼저 정착했음이 밝혀졌다.

 

그러니까 알타즉 (금이라는 뜻이 알타라고 한다) 우리의 조상 황금의 종족은 주류는 삼위산과 태백산일대를 배경으로 먼저 살았던 것이다.

 

 

지금 서안시에는 실제로 태백산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지형도를 보면 우리 조상들의 이동을 이해할수 있다. 현재의 카자흐스탄의 벌판지대즉 지금 카자흐스탄의 수도인 아사달에서 더 나은 땅을 찾아 남쪽으로 이주한 우리의 조상은 삼위산과 태백산을 신성시 했다. 알타이산은 지금도 금산이라고도 부른다.

 

서안시북쪽에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 군의 주인이 한족이 아니라 우리조상임을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나라와 당나라의 무덤도 많이 있다.

서안시는 지형으로 봐서 참 좋은 지형이다. 큰 강도 있고 넓은 벌판에 기름진 땅 또한 방어하기좋은 곳이다. 그러나 왜 우리조상들이 그땅을 놔두고 동으로 이동했을까?

 

당나라기록을 살펴보다가 유달리 장안즉 서안시에 지진이 많았음을 알수 있었다.수천명이 죽은 적도 있었다. 그러니 우리 조상의 지도부는 지진이 없는 곳을 찾아 동쪽으로 이동하고 마침 임분시가 장안처럼 강이 근처이고 방어하기 좋고 벌판이라 그곳을 수도로 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은 땅을 찾던중에 지금 한단시일대를 찾은 것이다.

 

고조선의 수도이동기록이 많은 것은 아마도 늘어난 인구와 지진대를 피하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겠는가?

위만은 원래 변방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기자의 수도를 점령했더라도 자신의 근거지인 패수근처로 옮기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영락제도 남경을 버리고 북경을 택한 것은 자신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조선의 수도와 위만조선의 수도는 다르다. 위만은 패수근처즉 국경에서 가까운 곳에 수도를 마련한 것이고 그곳이 실제로도 고도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