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소오강호 2013. 4. 4. 14:19

地北界泰山, 西至高陽, 四十餘城

사마천의 사기

북쪽경계는 태산 서쪽은 고양에 닿았고 40여개 성이 있다.

 

<沛公>至<高陽>

사마천의 사기(다음 구절에는 진류에 도착했다고 나온다)

패공이 고양에 도착했다.

 

고양은 전욱고양씨라 불린 고대의 제왕이 살던 곳이다. 그럼 굉장히 중요한 지명인데 사마천의 사기에서 등장한 고양은 지금 하북성 고양이 아님을 위의 기록을 통해 알수 있다.

 

대청광여도

개봉의 남쪽 진류에 고양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 고양이다. 이곳은 유방즉 패공의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이고 고대의 태산의 남쪽이다. 그러니 사기에 나온 내용과 일치한다.

http://blog.daum.net/sabul358/13531346 1835년 청나라고지도

고대 태산의 위치가 그려진 청나라고지도 지금 산둥서쪽의 동창부일대이다.



 

비간의 무덤은 위주(衛州)의 북 쪽10리쯤에 있으니, 대개 주(周) 나라의 무왕(武王)이 봉축(封築)한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정관(貞觀) 때에 그 땅을 지나다가 스스로 글을 지어 그 묘에 제사지냈다. 그 석각(石刻)이 벗겨지고 떨어졌으나 한두 군데는 알아볼 수 있었다

동문선 제2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而封黃帝之後於薊, 封帝堯之後於祝, 【正義】地理志云平原郡 祝阿縣也. 薊音計, 幽州縣是也. 封帝舜之後於陳, 【正義】陳州 宛丘縣故陳城是也. 下車而封夏后氏之後於杞, 【正義】汴州 雍丘縣, 故杞國. 封殷之後於宋, 封王子比干之墓,

사기(史記)

하후씨를  기에다 봉했다. 변주 옹구현은 옛 기국인데 비간의 묘가 있다.

 

비간의 무덤은 기현에 있고 이곳이 바로 고대의 위주였던 것이다. 중국사이트를 보면 전우고양다음의 제왕인 제곡고신은 상구에 도읍했다고 한다. 요순임금 다음이 바로 우임금으로 하나라의 초대 군주이다. 하후즉 하나라의 군주들이 봉해진 곳도 기지방이며 은나라의 수도인 조가가 있는 위주역시 기지방이다. 이렇게 되면 고대 조선과 은나라의 경계가 대략 정해진다. 바로 기자대가 개봉에 있고 기자의 무덤은 상구의 북쪽에 있으니 개봉과 상구북쪽은 고대 조선의 땅이고 나중에 기자가 이곳에 오면서 기자가 조선의 제후왕이 되어 통치하게 된 것이다. 그의 무덤이 상구근처에 있는 것은 자신의 본국인 은나라의 옛수도 상구근처에 최대한 가까이 묻히기를 원해서이다. 그러나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은 엄연히 조선땅이다. 왜냐면 백이숙제가 주나라의 땅이 아닌 융적의 땅 위원에서 죽고 묻힌 것을 보면 알수 있다. 기자는 상구에 묻히기를 원했겠지만 그땅이 주나라의 땅이니 최대한 가까운 조선땅에 묻힌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비간(比干)을 제사한 조서에, “짐이 조ㆍ위(趙魏) 땅에서부터 죄를 묻고[問罪], 요ㆍ갈(遼碣) 지역에 주필(駐蹕)하여 황량한 농(隴) 땅을 바라보노라니, 신하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많았다. 스스로 몸을 어루만지고 그윽한 황천(黃泉)을 연상하면서 그의 간하는 말을 들을까 하여, 태사(太師)를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한다.”

성호사설 제27권 > 경사문(經史門) >

당태종이 고구려에 출정하기전 비간의 무덤앞에서 조서를 읽었다는 기록인데 고구려의 땅이 전국시대 조나라와 위나라의 땅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만일 조와 위가 당나라땅이라면 당태종은 자기나라땅을 먼저 공격한다는 미친 말을 한 것이다. 요갈지역은 요는 산서성요주를 말하는 것이고 갈은 갈석으로 당시 태행산근처이다. 이는 중국학계에서 이미 북제의 장성을 제원에서 양성까지라고 발표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장성은 국경을 말하는데 북제의 장성이 누구를 막으려고 쌓은 것인지는 뻔한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너머는 북제땅이 아니니 북제를 계승한 당나라입장에서 제원과 양성을 넘어서 땅을 확보하고 있었을리가 없다.

 

당태종이 바라봤다는 룡땅은 황하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요갈에서 룡을 봤다라고 표현한 것을 이해될수 있을 것이다.

 

□**[一0]**济阳**[一一]**平丘**有临济亭,田儋死此。有匡。[一二]有黄池亭。
本文来源:中国读史网,原文地址:http://www.cndsw.cn/a/zaixiandushi/houhanshu/2012/0123/4177.html

제양 평구는 임제정이 있고 전담이 죽은 곳이다. 황지정도 있다.

 

 

今濟水自滎陽卷縣,東經陳留至潛陰北,東北至高平,東北經濟南至樂安博昌縣入海,今碣石也

산해경

제수는 동쪽으로 진류를 지나  동북으로 고평에 닿고 동북으로 제남을 경유해서 낙안박창현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지금 갈석이다.

 

제양은 제수의 북쪽을 말하는 곳이다. 남쪽은 제음이 된다.

 

 

개봉동쪽에 황지가 표기되어 있다. 전담은 제나라의 왕으로 유방과 동일시대 인물이다. 그는 진나라 장수 장한이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해서 임제일대에서 위왕이 포위되자 구원군을 이끌고 임제에서 싸우다 죽었다. 즉 황지가 있는 곳이 임제이고 이곳이 위나라와 제나라의 경계가 된다.

 

그래서 중국역사지도도 대략 비슷하게 표기했다. 그럼 지들도 옛 제나라가 지금 산둥반도가 아니고 개봉의 동쪽황지에서 갈석까지였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산둥반도의 제수 끝에 갈석산이라는 유적이 있는데 이는 옮겨진  것이고 원래 갈석즉 우임금이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의 산을 갈석이라 불렀는데 그 갈석산은 고평북쪽의 거야택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이후 북쪽으로 이동되더니 나중에는 지금 산둥반도동쪽의 갈석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것은 우갈석이다.

 

禹行自冀州始. 冀州 : 旣載壺口, 治梁及岐. 旣脩太原, 至于嶽陽. 覃懷致功, 至於衡漳. 其土白壤. 賦上上錯, 田中中, 常·衛旣從, 大陸旣爲. 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海.

사기

우임금이 갈석이 있는 곳에서 도이(나중에 도이가 백제가 된다.)를 보았다.

제수를 경계로 해서 대략 고대에 조선과 하나라의 국경이 아닌가 한다.

 

南有<碣石>·<鴈門>之饒

사기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넉넉함이 있다.

 

;<龍門>=<碣石>北多馬

사기

용문갈석북쪽에는 말이 많다.

 

太行·常山至于碣石, 入于海

사기

태행상산이 갈석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

산서성여행지 프로그램을 보면 고대의 용문은 잉어가 용이 되는 곳으로 산서성 서남부에 있다고 한다.

 

고조선이 생각보다 더 컸던 것이다. 중국학자들은 황지의 북쪽을 동연군 즉 연나라의 동쪽군으로 표기한다. 우리 상식으로 베이징이 연경이면 동연군은 당연히 당산일대나 진황도일대라고 표기해야 되는데????

황지의 동쪽은 제나라였고 진류의 일대가 노나라 황지의 서쪽은 위나라였고 황지의 북쪽이 연나라였던 것이다.

 

北至碣石, 巡自遼西, 歷北邊至九原

사기

북쪽으로 갈석에 요서에 순행하며 북쪽변방구원에 이르렀다.

 

패수서쪽이 요서인데 진시황이 갈석다음에 패수서쪽을 순행한것이다. 한나라때 섭하가 조선의 제후왕을 죽이고 평주유림관으로 달아났는데 그 역시 패수를 건너서 갔다. 지금도 패수서쪽에 유림이란 지명이 남아 있고 청나라고지도에는 지도상의 패수서쪽을 평주라고 그린 그림이 꽤 있으며 거란지리도역시 지금 태원시를 금나라의 남경이라 표기했는데 남경은 평주에 설치한 것이다.

 

유익한정보감사합니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