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후기영토

소오강호 2013. 4. 22. 16:37

 

금나라기록에는 서로는 지금 장안남쪽에 있는 다싼관 동으로는 회수의 중류가 남송과의 국경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회수라고 하지 않고 회수의 중류라고 했을까? 회수의 하류는 왜 경계로 넣지 않았을까? 그것은 회수의 하류가 고려땅이기 떄문이다.

 

진(晉)나라기록에는 양자강동쪽을 백제가 점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로 계속 신라 고려가 차례로 점거한것이다. 그러니 회수중류를 경계로 설정한 것이다.

 

회수의 동이족을 회이라고 불렀는데 백제 후백제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후백제군은 당시에 호북성 무한과 개봉일대도 포위할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니 절강성의 오월국이 제발 고려와 후백제가 싸우지 마시라고 서신까지 보낸 것이다. 각각20만대군을 거느린 고려 후백제 두 강대국이 절강성앞바다에서 치고박고 싸우는 통에 오월국이 쫄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송나라때 기록에는 고려수도에서 5천리 남쪽에  귤이 많이 자라는 곳이 있고 절강성과 마주본다고 했다. 지금 상해시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대청광여도 서복도는 제주도를 달리 부르는 말로 고대 우리 영토이다. 전횡도는 조선후기에도 우리땅이라는 기록이 있다.

 

수앙제가 설치한 통제거를 지도상의 고대동해라고 우기는 바보들이 많은데 수나라기록을 자세히 읽어보면 변수와 회화를 연결했다고 하는데 변수의 출발점은 대주산이고 청나라고지도에 그 정확한 위치가 나온다. 지금 정주시에서 한참 서남쪽에 있다. 그러니 통제거는 지도상의 위치가 맞는 것이다. 즉 고대동해는 백제땅이니 어쩔수 없이 수나라가 정주시에서 개봉사이의 강을 회수와 연결한 것이다.

 

 

 

 

. 신하점(新河店)에서 점심을 먹고 신하(新河)와 회하(淮河)를 건너 창읍현(昌邑縣) 동관(東館)에서 유숙했다. 현청(縣廳)은 회수(淮水) 서쪽 5리 남짓한 데에 있었다. 10리 관도(官道)에는 버들이 연달았고 좌우에는 호화 주택이 즐비하니, 그 부유함이 산동(山東)에서 제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 남쪽 15리 밖에 창읍왕(昌邑王)의 성터와 박륙후(博陸侯 곽광(霍光)의 봉호)의 식읍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갈 길이 바빠 찾아보지 못하니, 한스러웠다.

 조천항해록 제1권 > 갑자년 (1624, 인조 2) 9월 > 17일(무진)

 

 

 

지금까지 나는 조선왕조실록에 조선의 전라도에 임진왜란이후 명나라군대가 주둔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산동반도를 상실한 시점이 선조임금때  명나라에게 참전의 대가로 할양한 것이 아닌가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인조임금때 창읍현의 위치를 살펴보면 인조때 즉 병자호란전에는 산둥반도는 조선땅이었다.

 

봉래산은 바라보면 심히 먼데, 앞이 높고 뒤가 내려갔다. 뾰족하게 치솟아 있는 것이 사랑스럽다. 그 섬은 아직도 창국(昌國 정해현을 말함)의 봉경(封境)에 속해 있다. 그 위는 극히 넓어 씨를 뿌릴 수 있어서 섬 사람들이 산다. 선가(仙家)의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봉래가 있는데, 그곳은 약수(弱水) 3만 리를 넘어가서야 도달할 수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4권 > 해도(海道) 1 >

 

봉래산즉(서복도: 진나라때 서복이 3천명을 거느리고 불노불사의 약을 찾으러 동쪽으로 떠날때 들렀던 섬,현재 제주도를 서복도라고 한다.) 한라산즉 제주도를 가리켜 창국의 일부라고 했다. 이 말은 옜 창국의 영토중 일부는 남송의 땅이고 일부는 고려땅이었던 것이다. 송나라기록은 창국즉 창읍의 일부와 흉산이 고려와 송의 경계라고 했다. 그럼 흉산역시 지금위치는 산둥반도 남쪽이지만 고대에는 회수의 서쪽에 있었음을 알수 있고 창읍현의 위치가 이동한 것은 바로 고려 조선과 송나라 명나라의 경계를 알수 있는 단서이다.

 

세종실록에 회안에서 사문도가 보인다고 한것이 이제야 이해 될 것이다. 회수에서 사문도가 지금 지리상 보일수가 없는데 세종이 왜 그런 말을 했겠는가?바로 회수근처의 창읍현근처의 회안에서 바로 맞은편에 사문도가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인조때 전쟁에서 이기면서 조선땅을 사실상 분할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창읍현은 계속 이동하게 되었고 지금 위치가 되었다. 중국학자들 상당수가 고대 창읍현을 제녕시 남쪽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그 동쪽땅이 동이즉 고려 조선의 땅이었음을 지들도 대략 인지한다는것이다. 그러나 실제 창읍현은 회수에 있었던 것으로 그 곳이 바로 금나라 고려 남송의 경계였던 것이다.

여기는 동이족 나라면 다 '대'를 붙이는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