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소오강호 2013. 11. 21. 09:45

當是時,秦晉為強國。晉文公攘戎翟,居于西河圜、洛之間〔一〕,號曰赤翟、白翟。〔二〕

전한서

당시에 진국과 진국이 강국이었는데 진문공이 융적을 물리쳤는데 그들은 하원의 서쪽과 낙의 사이에  있었다.

 

이 기록을 후대 학자들이 이상하게 주석을 달았는데 조씨고아라는 최근의 중국드라마를 보면 융적즉 백적을 태행산동쪽에 있다고 대사에 넣었다.  그래서 중국백과사전을 찾아보니 하원이라는 지명이 개봉시에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게다가 낙즉 하락지방의 중심은 당연히 낙양시라고 한다.

명나라지리지에 지금 낙양동쪽에 유웅씨즉 곰족이 살았다고 하며 고대의 유주라고 하는데 그럼 유웅씨의 바로 위에 백적(융적)즉 유역씨가 살았던 것이다.

 

 

중국학계는 역사지도에 유역씨를 당연히 역현에 그려야 하는데 지금 하간시 근처에 그렸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역성과 역현은 유역씨와 관계있으니 그곳에 유역씨를 그려야 하는데 왜 하간시근처에 그렸을까?

 

任邱縣
026_052a任邱漢之鄭縣地。屬涿郡。平帝使中郞將任邱城此。因名焉。唐屬瀛州。後屬莫州。宋廢復置。大明洪武。以莫州入改。今屬河間府。自府北九十里也。白馬峯。在東北。其狀類馬。桂巖。幽邃如巨室。巖多桂木。縣之勝槩也。濡水。舊莫州西二十里。向東合易水。左傳齊侯北伐燕。盟于濡水此也。掘鯉淀。在東。縣有滱水枯涸。惟博野縣。鐵燈竿河口。爲水衝决流。經河間城下。東北流入縣境。聚而爲淀。遇霖潦。則淀溢。唐志莫州有九十九淀。此其一也。五龍潭。春夏不滿。秋冬不渴。遇旱而禱多應。白龍潭。亦故老相傳。旱禱得雨。虞邱臺。漢吾邱壽王。讀書于此。吾虞聲相近。故訛爲虞邱。度釋寺。永樂間建。顓頊城。邢子顒三郡記。顓頊所築。莫州城。026_052b漢爲鄭縣。隋屬瀛州。唐置鄭州。改鄭爲莫州

소전집(少痊集) > 少痊公文集卷之二 (조선선조에서 광해군사이 )

임구현은 한나라의 정현인데 탁군에 속한다. 막주성은 한나라때 정현이고 수나라대 녕주에 속하고 당나라때 정주이고 후에 막주로 개명했다.

 

河間郡舊置瀛州。統縣十三,戶十七萬三千八百八十三。

  河間舊置河間郡,開皇初郡廢。大業初複置郡,並武垣縣入焉。文安有狐狸澱。樂壽舊曰樂城,開皇十八年改為廣城,仁壽初改焉。束城舊曰束州,後齊廢。開皇十六年置,後改名焉。景城舊曰成平,開皇十八年改焉。高陽舊置高陽郡,開皇初郡廢。十六年置蒲州,大業初州廢,並任丘縣入焉。鄚有易城縣,後齊廢。開皇中置永甯縣,大業初廢入焉。博野舊曰博陸,後魏改為博野,後齊廢蠡吾縣入焉。有君子澱。清苑舊曰樂鄉。後齊省樊興、北新城、清苑、樂鄉入永寧,改名焉。開皇十八年改為清苑。長蘆開皇初置,並立漳河郡,郡尋廢。十六年置景州,大業初州廢。平舒舊置章武郡,開皇初廢。魯城開皇十六年置。饒陽開皇十六年分置安平、蕪蔞二縣,大業初省入焉。

수서

하간군은 예전에 영주를 설치했다. 현이 13개이다.

고양현은 예전에 고양군을 설치했다. 개황초에 폐지하고 개황16년에 포주를 설치했다. 대업초에 없애고 임구현을 함께 넣었다. 막현은 역성현이 있다.

 

 임구현 정현 막현 역성현은 사실상 지금 정주시일대를 말하는 것이다.중국학계는 이지명이 탁군에 속한다고 기록에 있다고 일부러 현재의 탁군위치로 유역씨를 표기했지만 위에 분명히 현재의 정주시가 바로 고대의 탁군일대임도 알수 있다.한나라떄 탁군은 섬서성 한성시에 한후성이 남아있다는 현지 문물국발표로 위치가 분명해졌지만 고구려 수나라전쟁때 탁군은  그위치가 정주시일대인 것이다. 땅을 자꾸 고구려에 뺏기니 지명을 남쪽으로 계속 이동시켜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나라가 전쟁에 패한뒤 이곳 정주시일대도 고구려에 뺏기고 만다. 그래서 당나라때 당군의 출발지는 더 남쪽인 개봉남쪽의 기현이다. 그곳에서 당태종은 은나라의 충신 비간묘에서 출정조서를 읽으며 조나라와 위나라땅부터 먼저 토벌하겠다고 했다. 그말은 고구려가 반격해서 수나라의 제후국인 조와위땅을 모조리 점령해버렸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이 나온 것이다.

유역씨의 위치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근거지가 그 바로 북쪽이 옛 조선이기 떄문이다. 고조선과 중국제후국사이에는 산융과 고죽국이 있었다. 산융이 바로 융적즉 백적곧 유역씨인 것이다. 진나라와 연나라가 땅을 넓히면서 유역씨를 몰아내고 거기에 연나라수도 연경을 설치한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이 유역씨를 지금 베이징 남쪽에 그린 것을 보면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이   정주와 개봉의 북쪽이었다는 또다른 증거가 있다.

 

遂城废县县西二十五里。战国时燕之武遂也。赵李牧伐燕,拔武遂、方城。又秦破赵将扈辄于武遂,斩首十万,即此。汉为北新城县,属中山国。后汉属涿郡。晋属高阳国。后魏曰新城县,属高阳郡。世谓之英雄城。魏主诩孝昌中,营州陷。永熙二年,置南营州于此,领昌黎、辽东、建德、营丘、乐浪五郡,皆侨郡也。北齐惟存昌黎一郡,领永乐、新昌二县。隋开皇初,废南营州。三年,并废昌黎郡。十八年,改置遂城县,属易州。唐因之。刘句曰:遂城即后魏所置新昌县也。五代时亦为遂城县。周复三关,此为沿边要地。宋开宝三年,契丹寇定州,田钦祚御之,战于满城。虏少却,乘胜至遂城。太平兴国六年,于梁门寨置静戎军,于遂城县置威虏军。时号铜梁门,铁遂城,言其险固也。咸平二年,契丹攻遂城,宋将杨延昭登陴固守。会天大寒,汲水灌城上,倏忽为冰,坚滑不可登,契丹引去。四年,契丹复入寇,大帅王显大败之于遂城。是时安肃、遂城最为虏冲。景德初,改为广信军。金主晟天会七年,改为遂州,寻又号为龙山郡。泰和四年,州废。贞二年,复故。元废县存州。明初,州废,以其地并入安肃县。《宋史》:广信军,在易州东南八十里,当五回狼山之要道,戍守特重。方城,见前固安县

卷十二 北直三 《读史方舆》

독사방요는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초기의 지리지

수성폐현은  현서쪽25리에 있다. 전국시대 연나라의 무수땅이다. 중략 후한때 탁군에 속하고 진나라때 고양국이다. 북위는 신성현을 두었고 고양현에 속했다. 중략 북위명제 효창연간에 영주가 함락되고 영희2년에 남영주를 설치했다.  창려와 요동 건덕 영구 낙랑5군을 다스리게 헸다. 북제때 오로지 창려1개군만 남았다. 중략 수나라때 남영주를 폐하고 3년에 창려군을 폐하고 합쳤다. 18년에 수성현을 두고 역주에 소속케 했다. 당나라도 그리했다. 중략

 

武遂前漢屬河間,後漢、晉屬安平,後屬。

북위서

무수현은 전한때 하간에 속했다.

 

진나라 장성이 출발한 낙랑군 수성현은 연나라에서 무수현으로 고쳤는데 한나라떄 하간즉 당나라의 녕주에 속했다. 그말은 고조선의 땅 낙랑군 수성현은 정주시 북쪽에 있다는 것이다.

 

그럼 또다른 진짜 증거를 제시한다. 바로 중국학계에서 북제의 장성이 제원에서 양성에 걸쳐 있다라고 발표한 것이다.즉 고대장성의 출발점이 제원이었던 것이다.

북제가 왜 거기에다 장성을 쌓았을까? 제원혹은 그근처가 바로 연나라 무수 고조선의 수성현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고구려에 항복한 북연의 왕과 왕족들이 남쪽의 송나라로 망명하려한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그럼 우리가 배운 지식으로는 중간에 북위가 있어야 하는데 삼국사기의 내용은 마치 고구려와 송나라가 바로 국경을 맞닿은 듯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에 송나라가 북진하면서 황하근처까지 왔는데 이때 고구려와 국경이 연결된 것이다. 그러니 북연왕족들이 망명을 시도한 것이다.

 

이모든 증거가 고조선떄부터 고구려와 한족왕조의 국경이 현재의 황하일대임을 알려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