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후기영토

소오강호 2014. 1. 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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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의 화려한 궁궐

 

 

경복궁의 웅장한 모습

 

지금 경복궁은 태조이성계가 지은 궁궐이 아니다. 이걸 아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10명중 1명?

저것은 흥선대원군이 지은 건물이다.이후 개보수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지은지 얼마안된 숭례문이 뒤틀려서 정밀조사를 하고 있다. 그럼 궁궐이 과연 천년간 잘 보존될수 있을까? 말도 안되는 것이다.

 

베이징의 자금성은 청나라가 지은 것이다. 명나라가 지은것이 아니다.  혹시나 싶어 자료를 확인해봤다. 과연 명나라가 망할때 이자성의 반란군이 청나라 팔기군과 오삼계의 연합군에게 쫓기게 되자 궁궐을 불태우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래서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이 남은 궁궐의 일부에서 겨우 집무를 봤다고 한다.  그 큰 궁궐에서 남은 부분은 겨우 집무실로 쓸 여유정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실록에도 왜군에 밀려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때 백성들이 불태워서 왕이 나중에 거주할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고대에는 내부반란이 아닌 타민족혹은 타국에 의해 수도가 점령되면 대부분 궁궐을 불태웠다. 부흥의지를 꺽기위해서라고 한다. 즉 지금 자금성은 명나라 영락제가 지은 건물이 아니다. 지은지 2-3백년만에 뒤틀려서 재건축해야할 것이고 재건축전에 이미 반란군이 다 태워버렸다.

 

 

 

026_052a任邱漢之鄭縣地。屬涿郡。平帝使中郞將任邱城此。因名焉。唐屬瀛州。後屬莫州。宋廢復置。大明洪武。以莫州入改。今屬河間府。自府北九十里也。白馬峯。在東北。其狀類馬。桂巖。幽邃如巨室。巖多桂木。縣之勝槩也。濡水。舊莫州西二十里。向東合易水。左傳齊侯北伐燕。盟于濡水此也。掘鯉淀。在東。縣有滱水枯涸。惟博野縣。鐵燈竿河口。爲水衝决流。經河間城下。東北流入縣境。聚而爲淀。遇霖潦。則淀溢。唐志莫州有九十九淀。此其一也。五龍潭。春夏不滿。秋冬不渴。遇旱而禱多應。白龍潭。亦故老相傳。旱禱得雨。虞邱臺。漢吾邱壽王。讀書于此。吾虞聲相近。故訛爲虞邱。度釋寺。永樂間建。顓頊城。邢子顒三郡記。顓頊所築。莫州城。026_052b漢爲鄭縣。隋屬瀛州。唐置鄭州。改鄭爲莫州。大明省入任邱。長桑君廟。東扁鵲之師而周人也。其西有扁鵲廟。舊有正殿及樓。內有像。又有井及古樹數株。冢與宅俱在。扁鵲姓秦氏。名越人。大明太學士楊士奇詩。雄縣城南水沒路。莫州市裏酒如油。客行相聚且一醉。不見越人空古邱。張郃墓。在莫州北門外。墓傍有廟。魏拜郃偏將軍。從攻鄴拔之。文帝卽位。封都鄕侯。與諸葛亮戰。中流矢死。謚壯侯。高郭城。漢宣帝。封河間獻王子爲高郭侯。此也。韓嬰墓。在南。燕人爲漢常山王太傅。作韓詩內外傳謁。城在其南。漢桓帝崩。太后使竇武。詣河間。迎靈帝。率羣臣於此朝謁故名。神臼在其南。邢子顒三郡志。臼受一石二斗。晉有026_052c沙門。移於寺。經宿血滿其中。仍移舊所。復凈如洗。邢昺墓。在東

소전집(少痊集) > 少痊公文集卷之二 (조선 광해군시대 학자 김덕승이 지은책 )

임구현은 한나라의 정현인데 탁군에 속한다. 막주성은 한나라때 정현이고 수나라대 녕주에 속하고 당나라때 정주이고 후에 막주로 개명했다.형병묘는 동쪽에 있다. 중략

 

http://www.caoxian.gov.cn/html/renwen/shangtanggudu/lishirenwu/325.html형병의묘는 조현에서 발표하기를 옛성서쪽 관형채에 있다고 한다.

소전집을 지은 시기가 명나라가 망하기 바로 직전이니 명나라가 망하기 직전의 연경즉 그들의 북경을 찾을수 있다. 우선 명나라말기 임구현은 한나라의 정현이라고 하는데 현재 중국백과사전은 한나라의 정현을 황하남쪽 화산의 서쪽근처라고 한다. 그런데 형병의 묘의 위치가 조현의 서쪽으로 두기록이 차이가 난다. (당나라이전시기에는 아마도 임구현인 화산의서쪽에 있다가 명나라때에 조현일대로 이동된것이 아닐까?)아무튼 현재의 임구현이 명나라말기의 임구현은 아닌 것이다.

 

 

소전집(명나라여행기)에 따르면 명나라임구현은 조현의 서쪽이다.

良鄕縣

良鄕春秋時。燕中都地。漢爲良鄕縣。屬涿郡。晉屬范陽國。唐屬幽州。後改固節縣。尋改良鄕。大明因之。屬順天府。自涿州七十里也。遼石岡在東。金史作料石岡。上有佛㙮。金時建。其南有界河橋。連有琉璃橋。兩橋侈壯。與胡良巨馬兄弟也。金史作劉李河。舊志又謂古聖水。自旁山龍泉峪。流至覇州。入巨馬河者此也。南之廣陽城。卽東漢舊縣。齊省入縣。天王寺在東南。洪武建。永樂葺。塩溝水自龍門口東南流。與廣陽水合。縣東有高閣。揭蕭迓台。騶西026_054b之長楊店前。連有兩橋。白石雕欄極侈。普安寺。乃內願堂也。寺宇侈靡。墻構盈野。善慶宮。乃道觀之豪壯者。前有永福橋。橋之功用。與長陽一揆。天津關在北。至大龍門。凡十五關口。其間差大者。是天津也。樂毅墓在南之三里

 소전집(少痊集) > 少痊公文集卷之二 (조선 광해군시대 학자 김덕승이 지은책 )

랑향현은 연나라 중도이다. 탁주에서 70리 거리이다. 광양성이 있다. 락곡(악의)묘가 남쪽3리에 있다.

 

 

청나라고지도에서 락곡(악의)묘를 찾을수 있었다.중국백과를 찾아보니 1770년대에 청나라에서 한단에서 발굴했다고 한다.

조선과 청나라시기에도 현재처럼 유물발굴이 이뤄지고 있었다. 청나라말기에 심양에서 발해 무왕의 무덤을 발굴했는데 비석에 서경에 무왕을 장사했다라고 적혀있었다고한다. 발해 서경은 압록부에 있었으니 최소한 현재의 요하가 압록강인 적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1600년대초반에 쓴 소전집과 1770년대 발굴한 유물이 큰 차이가 있겠는가?소전집에 쓰인 악의묘는 바로 청나라가 발굴한 한단시의 악의묘가 틀림없다. 게다가 악의묘에서 약 100리 정도거리에 영제거가 그려져있는데 영제거는 수나라탁군에 설치된 것이다. 즉 탁주가 악의묘에서 100리안밖의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는 탁주와 랑향이 70리거리라는것과도 일치한다. 근처에 황산즉 황제의 산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저곳은  기록대로 연의 중도 즉 연경이 맞을 것이다.

원나라고지도에서 대도와 중도를 구별해서 표기했고 금나라기록에도 연경과 중도를 구분해서 기록했으므로 소전집에 쓰인 중도의 기원은 바로 금나라의 중도일 것이다

 

대도와 중도가 구분된 원나라고지도

요나라의 연경을 금나라가 그대로 연경이라 하고 다시 중도를  새로 만든 것이며 원나라는 금나라의 연경은 대도로 금나라의 중도는 그대로 중도로 만든 것이다.원나라의 중도를 명나라가 북경(연의 중도라고 기록된 랑향즉 지금 한단시)이라 했다가 다시 수도를 북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盧溝橋在順天府西南。詎京四十五里。而跨盧溝河。自良鄕七十里也。橋是金明昌初建。大明正統九年重修。其長二百餘步。左右石欄欄頭。皆刻獅子抱雛之形。橋之兩頭。各立石橐駝擎天柱。各一雙。橋下虹門十一也。每夜波光曉月。上下蕩漾。曙景蒼然。亦一奇也。爲北京八景之一曰。盧溝曉月。大明王英詩。渾河東去日悠悠。斜月偏026_054c宜入早秋。曙色微涵波影動。殘光猶帶浪花流。踈鍾欲度千門曉。匹馬曾爲萬里遊。題柱謾勞回首處。西風零露滿貂裘。河本桑乾河。又名漯河。俗呼渾河。亦曰小黃河。以流濁故也。其源出山西大同府桑乾山。經太行山。入完平境。出此橋下。東南至看丹口。分爲二派。其至通州高麗藏。入白河。其一南經固安。至武淸縣小直沽。與衛河合流入海。西山在橋之西。舊記太行山首。始河內。北至幽州。第八陘在燕。強形鉅勢。爭奇擁翠。雲從星拱于皇都之右。每大雪初霽。千峯萬壑。積素凝華。若畫圖然。此亦八景之一。名曰西山霽雪。大明王洪詩。日華初上最高峯。玉樹凝輝在半空。佳氣迥浮丹鳳闕。淸光遙入翠微宮。松崖寒逐026_054d春風散。雲嶠晴含夜月重。靑瑣朝回頻極目。都將郢曲詠年豐。劉秉忠墓。在橋北

소전집(少痊集) > 少痊公文集卷之二 (조선 광해군시대 학자 김덕승이 지은책 )

노구교는 수도에서 40리거리이다. 랑향에서는 70리거리이다. 유병충묘가 있다.

 

选择了去邢台市区的西南方向探古。

  顺着滨江路一直往南,走不多远,就是第一站贾村——刘秉忠墓所在地

http://blog.sina.com.cn/s/blog_4ac76fe501017oad.html 형태시서남방에 유병충묘가 있다.(원나라시기 문신)

 

소전집에 기록된 명나라 마지막 수도는 근처에 유병충의 묘가 있고 그 묘는 형태시서남쪽에서 발굴되었다.

 하북성 형태시의 해자둘레는 약16km내외이다.  실록에 선조가 명나라도성은 둘레가 40리이고 우리 한성은 50리이다라고 했는데 마침 크기가 유사하다. 게다가 소전집에 나온 명나라 마지막 도성역시 형태시로 판명된다.

 

 형태시고성

 

 형태시의 다른 성곽은 고구려형식인데 중앙의 현성은 치성과 옹성이 없는 한족의 성곽형식이다.

 성중앙에 이런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다 파괴되었지만 궁궐로 유력하다.

 개원사 (개원사는 원래 금나라의 남경에 있던 절이다. 그 개원사가 형태시에 있는 것은 이곳이 명나라초기에는 금나라 남경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될수 있다. 즉 수도급의 성이었기에 명나라가 말기에 다시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개원사

 

 

청나라후기에 작성된 청조일통지도에  명후도천즉 명나라가 후기에 도읍을 옮겼다라고 적혀있다. 한단에 금도라고 쓰인 것을 보면 왜 내가 한단시를 금나라의 중도라고 했는지 이해할 것이다. 명나라는 초기에 황하까지 진격했기에 개봉을 북경으로 삼았다가 후에 원이 망하고 황하를 넘어서 한단즉 원나라의 중도에다 연경을 건설한다. 후에 북쪽으로 조금 더 가서 형태시를 도성으로 삼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