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영토

소오강호 2009. 5. 16. 11:35

추자의 이름은 연(衍)이니 연 소왕(燕昭王)이 스승으로 섬겼으며, 담천연(談天衍)이라고 부르던 자이다. 은야산(銀冶山)은 현의 남쪽 15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은광(銀鑛)을 산출하였다. 송(宋) 나라 왕증(王曾)의 ‘상거란사(上契丹事)’에,

“순주(順州)의 동북에서 백서하(白嶼河)를 지나 은야산(銀冶山)을 바라본다.”

라고 한 것이 곧 이곳이다. 백하(白河)는 현 서쪽에 있는데, 근원이 선화부(宣化府) 적성현(赤城縣)에서 나온다.

 옛 이름은 고수(沽水)이고 또 일명 노수(潞水)니, 지금은 북운하(北運河)라고 일컫는다

연행기(燕行紀) 제2권 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 ○ 경술년(1790, 정조 14) 7월[16일-26일]

 

송나라때 순주에서 동북에 조하즉 백하가 있다고 한다. 또한 옛이름이 고수인 강은 바로 상간수이다. 조선후기에는 고수가 상간수이고 백하이다라고 이렇게 알고 있다. 그럼 순주는 최소한 텐진에서 서남쪽에 있다. 역수가 고려땅임은 증명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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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적도 고수의 위치  상간수가 고수였다.그런데 뜬금없이 조하가 고수라고 우기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조하가 원래지금위치가 아니고 고수가 있던 상간수를 조하라고도 불렀다고 봐야한다.

 

현대지도를 봐도 조백신하와 상간수(영정하)는 차이가 있다. 분명히 과거에 조하라고 불리던 강이 고수라고 불렸다면 이는 현재의 상간수이다. 지명이 동으로 이동한 것이 확실하다.

 

《원사(元史)》에 ‘중통(中統) 2년(1261, 고려 원종)에 황제가 친히 여러 만호(萬戶) 및 한군(漢軍)과 무위군(武衛軍)을 거느리고 단순주(檀順州)를 거쳐 조하천에 주둔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연행기(燕行紀) 제2권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 ○ 경술년(1790, 정조 14) 7월[16일-26일]

 

거란지리도를 봐도 동일하다. 순주와 단주는 분명히 구만리장성 안쪽에서 들어가 있다.  즉 요나라남경이 현재 베이징이라는 주장은 사실 과장된 것이다. 베이징의 서남쪽에 요나라 남경이 있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순주와 단주는 상간수안쪽에 있다.결국 순주와 단주근처에는 조백신하가 아니라 상간수가 있다. 즉 과거에 상간수가 조하라고도 불렸다고 해석해야 한다.

 

【건치연혁】 원래 고려 정융군(靜戎郡)으로 성종 2년에는 순주 방어사(順州防禦使)라 하였다. 고종(高宗) 44년에 덕주(德州)와 병합했다가 후에 분리하여 군(郡)으로 하였다. 본조(本朝)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5권평안도(平安道)순천군(順川郡)

 

조선은 만리장성바로북쪽을 순천군으로 했을 것이다. 원래 순주와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어쩌겠나 장성안쪽은 뺏겼으니 방법이 없지 않은가!!!약간 동쪽으로 이동해서 여기가 고려의 순주였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회유현은 한(漢) 나라 때에는 어양현(漁陽縣) 땅이었다. 당 나라 초기에는 밀운(密雲), 창평(昌平) 두 고을의 땅이었다가, 정관(貞觀) 때에는 탄주(彈州), 한주를 두었고, 개원(開元) 때에는 귀순주(歸順州) 회유현(懷柔縣)으로 고쳤으며, 천보(天寶) 초에는 귀화군(歸化郡)으로 고쳤고, 건원(乾元) 초에는 다시 귀순주로 하였다. 요(遼)에서는 주(州)를 폐하고 현(縣)으로 하여 순주(順州)에 속하게 하였고, 송 나라 선화(宣化) 때에는 그대로 따랐으며, 금(金) 나라의 명창(明昌) 때에는 고쳐서 온양(溫陽)이라고 하였다.
원 나라에서는 폐(廢)하였고, 명 나라 홍무(洪武) 때에는 다시 회유현을 두어 북평부(北平府)에 속하게 하였다가 뒤에 고쳐서 순천부(順天府)에 속하게 하였으며,

송(宋) 나라 왕증(王曾)의 ‘상거란사(上契丹事)’에 말하기를,

“순주(順州)에서 단주(檀州)에 이르는 길은 점점 산속으로 들어가는데 우란산이 그 요로(要路)에 있다.”

연행기(燕行紀) 제2권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 ○ 경술년(1790, 정조 14) 7월[16일-26일]

 

순주의 기원에 대해 설명한 글인데 고려말 명나라초기까지 전부 지금의 베이징서남일대임을 알수있다.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녕로는 본디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한나라 때 조선을 멸하고서 낙랑군과 현도군을 두었는데, 이곳은 낙랑군 지역이었다 자주(慈州), 가주(嘉州), 순주(順州), 은주(殷州), 숙주(宿州), 덕주(德州),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동녕부조(東寧府條)를 보면, 가주(嘉州)는 요나라 때의 가평군(嘉平軍)이고, 순주(順州)는 본디 요대현(遼隊縣) 지역이고, 철주(鐵州)는 본디 안시현(安市縣)이고, 태주(泰州)는 본디 거란목(契丹牧) 지역이라고 하였는데

 

 원래 요대현의 위치는 산서성이다. 그런데 요사가 쓰여진 원나라말기에 요대현의 위치를 어디로 봤냐 하는것이다.즉 현재의 베이징서남쪽일대를 요대현으로 본것이다. 왜냐면 요수가 꺽이는 곳에 요대현이 있으니 원나라말기에는 요수를 거란지리도처럼 상간수로 본것이다. 그리고 명나라초기에는 요수가 난하로 이동한다.

 

  《묵사(墨史)》에는 이르기를, “고려에서 먹[墨]을 진공(進貢)하였는데, 그 명문(銘文)에 평로성진공(平鹵城進貢)이니 순주공묵(順州貢墨)이니, 맹주공묵(猛州貢墨)이니 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였다. 평로성은 바로 평로진(平虜鎭)이다

 

 

 

 5년(탈렬가나 3, 1245), 찰한(察罕)이 양주(楊洲)로 침입하였다가, 제치사(制置使) 조규(趙葵)가 화친을 청하자 그만 물러갔다. 아모한(阿母罕)을 고려에 침입시켜 위주(威州)ㆍ평로성(平鹵城)을 함락하였다

 송사전 몽고열전(蒙古列傳)

 

 

 기해년(1239, 고종26) 봄 2월에 입조(入朝)하니, 개갑(鎧甲)과 궁시(弓矢) 및 금직문단(金織文段), 금은기(金銀器), 금편륵(金鞭勒) 등을 하사하였다. 을사년(1245, 고종32)에 정종(定宗)이 아무한(阿毋罕)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는데, 홍복원과 함께 함주(咸州)의 평로성(平虜城)을 함락시켰다

 [주D-009]평로성(平虜城) : 원문에는 ‘平鹵城’으로 되어 있는데, 《원사(元史)》 권154 홍복원열전(洪福源列傳)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원사

 

 《고려사》 지리지에,

“함주가 원(元)에 흡수되매 합란부(合蘭府)라 칭하였다

 

 《여지승람》에는,

“합란부의 옛 소재지는 지금의 부(府 함흥부(咸興府)임) 남쪽 5리에 있다

 

 

 《고려사》 조돈전(趙暾傳)에,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蘭)ㆍ홍헌(洪獻) .ㆍ삼살(三撒)  의 땅은 본시 우리의 강토이다.”

 

  《원사(元史)》 지리지에,

“개원의 서남쪽은 영원(寧遠)이고, 더 서남쪽은 남경(南京)  이며, 그 남쪽은 합란부(哈蘭府)이고, 더 남쪽은 쌍성(雙城)이다.”

 

 《고려사》 지리지와 《여지승람》의 공험진에 대한 설에 의해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두 설대로 한다면 함주에서 공험진까지는 1천 8백여 리나 멀다

동사강목 구성고

 

 

《요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주(咸州) 안동군(安東郡)은 본디 고구려의 동산현 지역으로, 발해 때에는 동산군(銅山郡)을 설치하였다.
《금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평부(咸平府)는 본디 고구려의 동산현 지역으로, 요나라 때에는 함주였다

 

 함주(咸州) 안동군(安東軍)은 본디 고구려의 동산현(銅山縣) 지역으로, 발해 때에는 동산군(銅山郡)을 설치하였다. 그 위치는 한나라 때의 후성현(候城縣) 북쪽, 발해 때의 용천부 남쪽에 있었다. 통할하는 현은 1개로 함평현(咸平縣)이다. 함평현은 당나라 때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천보(天寶) 연간에 영주(營州)와 평주(平州) 사이를 다스린 곳이 바로 이곳이다. 태조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다시 안동군(安東軍)을 설치하였다. ○

요사지리지

 

 이들이 금조(金朝)의 요동(遼東) 함주로(咸州路) 부근에 있는 심주(瀋州)에 쌍성현(雙城縣)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본국의 함주 근처의 화주에 옛적에 쌓은 작은 성 두 개가 있음을 인하여 애매하게 주청하면서 마침내 화주를 쌍성이라고 모칭(冒稱)하였습니다. 그 뒤 지정(至正) 16년(1356)에 이르러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화주 북쪽 지역을 본국으로 환속시켰습니다. 지금 성지를 흠봉(欽奉)하건대, ‘철령 북쪽, 동쪽, 서쪽 지역은 본디 개원로(開元路)에 속하는 곳이니 소관(所管) 군민(軍民)도 그대로 요동에 속하게 하라. 이를 공경히 시행하라.’ 하였습니다. 철령(鐵嶺)의 산은 왕경(王京)과의 거리가 겨우 300리 밖에 안 되며, 공험진으로 변방의 경계를 정한 지는 한두 해가 아닙니다

 《고려사》 열전(列傳

 

 

 위의 원나라시대 지도에서 함평이 구만리장성북쪽이며 이곳이 함주임을 알수있다. 즉 고려와 금의 경계였던 것이다. 역시 심주도 그근처임을 알수있다. 원래 명나라초기 심양과 요양은 바로 구만리장성북쪽에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지명이 현재의 요양과 심양으로 바뀐다.